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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感動えたこの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20努力けた近藤富男先生そして犠牲者のために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日本人在日同胞尊敬いた

 

近藤先生犠牲者たちの韓国内縁故してほしいとんだためらうことなく承諾したのもそのためだった犠牲者5する憐憫気持ちとともにこの々を祭祀追悼碑までてた々に感謝気持ちをしたかったのだ

 

犠牲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が文献確認されると江陵市請願した追悼碑建立者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請願だったこれは無念けた金炳順氏記憶する方法であるだけでなく金炳順氏犠牲れられないように努力した日本人在日朝鮮人する最小限礼儀だとえた

 

 

この請願大勢参加した韓国<チームアイ>鄭澈勲(チョン·チョルフン)先生写真作家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参加金性洙(キム·ソンス)記念事業会洪眞善(ホン·ジンソン)理事長ネットピアの柳善起(·ソンギ)社長國立江陵原州大学姜承昊(カン·スンホ)教授など江陵活動家たちも参加した金炳順氏系図して江陵ゆかりをらかにするがかりを発掘してくれた江陵慶州金氏宗親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請願参加日本でも兵庫県鄭世和(チョン·セファ)大黑澄枝先生にしてくれた

 

この請願江陵市議会経由して江陵市役所けられ請願内容確認れられた感謝牌贈呈対象8まった日本人6近藤富男飛田雄一堀内稔玉野勢三足立泰教足立智教夫妻在日朝鮮人2鄭鴻永金礼坤だった

 

江陵市庁請願迅速れてくれたのは請願内容意味があるという判断のためだっただろうがそこには近藤富男先生健康悪化したのもきな役割たした請願書202111近藤先生病院から6月余りの時限付人生宣告されたためだ

 

 

感謝牌贈呈まったのは20221月末だった東京所在江原道代表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部長直接宝塚訪問請願内容確認した直後だった以後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江陵市庁のパク·ジョンシ·ジュンハパク·インスン係長などの実務陣協力して迅速感謝牌されるよう努力した

 

江陵市長キム·ハングン名義感謝牌2022326されることに決定されたが突発変数じた近藤先生健康悪化めたのだった請願者実務者たちは感謝牌伝達決定されるやいなや製作いだが近藤先生容態急速悪化した江陵市庁担当公務員たちは近藤富男先生のための感謝牌製作してることにしたがそれでも時間りないようだった

 

結局江陵市庁のパク·インスン係長近藤富男先生感謝牌完成するやいなやこれを写真って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ってくれはこの感謝牌写真鄭世和先生じて近藤先生されるようにした昏睡状態いた近藤先生しばらくがついた感謝牌写真ったという残念なことだがいだった7名様への感謝牌予定通326された

 

 

日本には良心的学者活動家なくないらは韓日関係がどちらかの自尊心つけず共生協力関係発展することを近藤富男先生がまさにそのような々の一人だった

 

大韓民国地方政府韓国する日本人活動家たちに公式感謝表明したのは今回めてだとした近藤富男先生生前にそのような感謝けてくなったのは残念状況でもいだとっている。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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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富男先生直接にかかったことがない在日同胞写真家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紹介ラインLINEグループトークで2年間対話わしただけだそれでも近藤先生がこれまで遂行した3つのプロジェクトのためにきなけをくれた。。

 

第一崔承喜チェ·スンヒ研究だった近藤先生日本調査発掘した1930年代古文献資料解釈手伝ってくれためない部分写真ってライン文字近藤先生わせれば大体24時間以内えてくれた崔承喜先生名古屋公演についてのには近藤先生きなけをくれた

 

第二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靴るキャンペーンだ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めたが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結成した青少年支援団体<チームアイ>けが絶対的だった

 

 

<チームアイ>とは子供(아이)たちを(ai)として見守(eye)チームという意味近藤先生直接付けた名前韓中日米4国語同音異義語絶妙わせた素敵名前だったその名前趣旨かったのでたちのまりも<チームアイ>ぶことにした

 

202111大阪かれた在日朝鮮学校近畿地域舞踊コンテストに近藤先生直接参席して舞踊靴伝達激励言葉もした舞踊靴プロジェクトは近藤先生鄭世和先生<ティムアイ>がいなかったらかなくても結果すこともできなかっただろう

 

第三、「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であった近藤先生づいたのはこの調査のおかげだった近藤先生追悼碑主人公たちの韓国縁故調査してほしいと調査過程激励けをしまなか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宝塚切畑長尾山麓けられた·親水広場てられた朝鮮人労働者える追悼碑であるこのには1910年代1920年代兵庫県水道工事鉄道工事事故死亡した5朝鮮人名前まれている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南益三(ナム·イクサム)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などがまさにその々だなる時期なる工事くなった々を一緒記憶するためにこの追悼碑てられたのは近藤先生努力結実だった

 

近藤先生在日朝鮮人地域史研究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にこの5犠牲者死亡経緯調査記録として一方その々のための祭祀めた鄭鴻永先生鄭世和先生父親神戸西宮甲陽園地下号朝鮮人労働者いた朝鮮国独立という文字発見されたとしても有名だがその現場には近藤先生もいらっしゃった

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祭祀事故現場だった旧福知山線第6トンネル毎年開かれたねるにつれ日本人在日朝鮮人参加えた鄭鴻永先生この々のための追悼碑建立してほしい口癖のようにおっしゃったがせず20001他界された

 

 

一方1914-15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3遺体西谷村共同墓地安置されその位牌近隣仏教寺院滿福寺られ3にわたる住職とこの婦女会員たちが100年以上無縁故者追慕祭事ってきた

 

この事実った近藤富雄先生鉄道工事犠牲者水道工事犠牲者のための合同追悼碑建立することになりついに2020326<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た鄭鴻永先生遺志近藤先生によって20ぶりにいたのだ

 

追悼碑建立にとどまらず近藤先生犠牲者韓国緣故地してほしいとった多角的調査そのうちの一人である金炳順氏故郷江原道江陵という事実確認これを近藤富男先生らせることができた近藤先生大喜びだったので4縁故確認にも熱心。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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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님의 소개로 라인(LINE) 단톡방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도 콘도 선생님은 내가 그 동안 수행한 세 프로젝트를 위해 큰 도움을 주셨다.

 

첫째는 최승희 연구였다. 콘도 선생은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1930년대의 고문헌 자료 해석을 도와주셨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문자로 콘도 선생님께 문의하면 대개 24시간 안에 답을 주셨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나고야 공연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콘도 선생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

 

둘째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이었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기 시작했는데, 콘도 선생께서 정세화 선생과 함께 결성하신 청소년 지원단체 <팀아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팀아이>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는(eye)’ 팀이라는 뜻으로, 콘도 선생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한중일미 4개국 말의 동음이의어를 절묘하게 조합한 멋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과 취지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 모임도 <팀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02111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 조선학교 깅키(近畿)지역 무용경연대회에 콘도 선생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무용신도 전달하시고 격려사도 하셨다. 무용신 프로젝트는 콘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의 <팀아이>가 없었다면 오래 계속되지도, 좋은 결과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셋째,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조사였다. 내가 콘도 선생님과 가까워진 것은 이 조사 덕분이었다. 콘도 선생님은 내게 추도비 주인공들의 한국 연고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조사 과정에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기리히타 소재 시립 사쿠라 공원 신수이 광장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이 비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효고현 수도공사와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사망하신 다섯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병순, 장장수, 남익삼, 윤길문, 오이근씨 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공사에서 사망하신 분들을 함께 추도하는 이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콘도 선생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콘도 선생은 재일동포 지역사 연구자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이 다섯 희생자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그분들을 위한 제사도 지내기 시작하셨다. 정홍영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으로 고베 니시노미아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를 발견하신 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발굴현장에는 콘도 선생도 계셨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는 사고 현장이었던 옛 후쿠치야마선 제6호 터널 앞에서 매년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참여가 늘어났다. 정홍영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20001월 타계하셨다.

 

 

한편 1914-15년에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니시타니 마을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 위패는 인근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모셔져, 3대에 걸친 주지 스님과 이 마을의 부녀회원들께서 1백년이 넘도록 무연고자 추모 제사를 지내오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철도공사 희생자와 수도공사 희생자를 위한 합동 추도비를 건립하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었다. 정홍영 선생이 남기신 뜻이 콘도 선생에 의해 2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추도비 건립에 그치지 않고 콘도 선생은 나에게 희생자들의 한국 연고를 찾아달라고 하셨다. 나는 다각도의 조사 끝에 그 중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알려드릴 수 있었다. 콘도 선생께서는 무척 기뻐하셨기 때문에 나는 다른 네 분의 연고를 찾는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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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兵庫県<むくげの>という団体がある<兵庫朝鮮関係研究会>とともに代表的韓国関連研究団体である。 「むくげ無窮花日本語発音んだものだからこの団体韓国友好的まりだという容易推測できる

 

メディアにわるニュースには嫌韓団体いが日本には親韓団体なくない<むくげの>研究者たちはほとんどが韓日植民地支配時代不幸時期過去する謝罪容恕和解そして共生協力未来くことを日本主流雰囲気とは距離があるのでえにくくよくこえないがらも精一杯声している

 

<むくげの>けをたくさんけた<崔承喜(チェ·スンヒ)朝鮮舞踊>研究<在日朝鮮学校>後援そして<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しながら<むくげの>会員たちからけられその月刊情報誌<むくげ通信>せられたみながらくのことをんだ

 

 

ところが2022327日付<むくげ通信>訃報掲載された近藤富男先生他界らせる飛田雄一先生追悼文だったこのはこのようにまった

 

近藤富男さんが210くなった同学年神戸大学入学時最初にあったのがだった19693月末入学手続きのときで農学部園芸農学科畜産学科だった。」

 

はびっくりした近藤富男先生他界したというニュースや名門神戸大学出身だったという紹介のためではなかった他界消息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じてすでにっていたし飛田先生近藤先生神大卒業生だということもっていた神戸大学京都大学大阪大学とともに関西3大国立大学であり日本全体でもトップ10りする名門大学である

 

しかし近藤富男先生専攻畜産学だったという見当もつかなかった生涯国語つまり日本語教師としてきてきただった1974から宝塚市立安倉中学校日本語教師引退後もコリア国際学校でも日本語教師としてめたそれで近藤先生専攻当然日本語あるいは日本文学だとった

 

 

そのような誤解近藤先生けをけながらさらにまった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する1930年代日本文献調べてみると現代日本語表現ったりだしくはスペルが言葉もよくてくるがその近藤先生明快いてくれた日本語古文にもけていたからだところでその学部専攻畜産学だなんて···

 

1970年代初めに畜産学専攻されたのでをよく職業つこともできただろう。 「園芸農学専攻して韓国史研究者になった飛田先生じだこの々が名門国立大学有望分野専攻しても韓国関連学者活動家になった理由になった近藤先生がいらっしゃったらすぐにメールで質問してみたはずだがもう返事直接聞くことができない

 

近藤先生<むくげ通信>会員たちといつもしくしていたが会員として加入されたのは201811最近のことだ近藤先生<むくげ通信>加入前から<むくげ通信>寄稿されていたが最初釜山非武装地帯訪問記日帝強占期遺跡韓半島分断みに共感する近藤先生韓国する関心がどれほどかったかがかる

 

 

<むくげ通信>寄稿した学術的2つあるつは20195にわたって連載した<漢字とハングル>というこの副題漢字使わない日本語るために漢字併用ててハングル専用じた韓国語のように日本語漢字て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主張生涯日本語教師だった見解なので日本語文学者たちもけるべきだ

 

もうつは2021から2022まで9にわたって寄稿した<ソウル京畿道親環境無償給食>という韓国学校給食一般福祉のために無償市民健康農家扶養のために親環境有機農として実施されることを評価しただが遺伝子操作のない有機農畜産物重要性強調した畜産学専攻者見解がよくれている。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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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兵庫)현에 <무쿠게회(むくげの)>라는 단체가 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와 함께 대표적인 한국관련 연구단체이다. ‘무쿠게는 무궁화(無窮花)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니, 이 단체가 한국에 우호적인 모임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디어에 전해지는 뉴스에는 혐한단체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일본에는 친한 단체도 적지 않다. <무쿠게회>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일 식민지 강점시기를 불행한 시기로 여기고, 과거에 대한 사과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상생과 협력의 미래를 열기 바란다. 일본 주류 분위기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그들도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무쿠게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 조선무용> 연구와 <재일 조선학교> 후원, 그리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조사하면서 <무쿠게회> 회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 월간 소식지 <무쿠게통신>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2022327일자 <무쿠게통신>에 부고가 실렸다.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의 타계를 알리는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추도문이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콘도 도미오씨가 지난 210일 사망했다. 19693월말 고베대학 입학 시에 신입생으로 처음 만난 것이 그였다. 나는 농대 원예농학과였고, 그는 축산학과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콘도 도미오 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이나 명문 고베(神戶)대학 출신이셨다는 소개 때문이 아니었다. 타계 소식은 정세화 선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히다 선생과 콘도 선생이 신다이(神大) 졸업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베대학은 교토대학, 오사카대학과 함께 일본 간사이(關西) 3대 국립대학이며, 일본 전체에서도 톱10에 드는 명문대학이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전공이 축산학이었다는 점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평생을 국어, 즉 일본어 교사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1974년부터 다카라즈카 시립 아쿠라(安倉)중학교의 일본어 교사였고, 은퇴하신 뒤에도 코리아국제학교에서도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셨다. 그래서 나는 콘도 선생의 전공이 당연히 일본어 혹은 일본문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는 콘도 도미오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 굳어졌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 관한 1930년대 일본문헌을 조사하다보면 현대 일본어와 표현이 다르거나, 심지어 철자가 다른 말들도 자주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콘도 선생이 명쾌하게 풀어주셨다. 그는 현대 일본어뿐 아니라 고문에도 능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학부 전공이 축산학이라니...

 

1970년대 초에 축산학을 전공하셨으니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예농학을 전공하시고 한국사 연구자가 되신 히다 유이치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분들이 명문 국립대학에서 유망한 분야를 전공하시고도 한국관련 학자와 활동가가 되신 이유가 궁금했다. 콘도 선생이 계신다면 당장 문자로 여쭤 보았을 텐데, 이젠 대답을 직접 들을 수가 없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의 회원들과 늘 가깝게 지내셨지만, 회원으로 가입하신 것은 201811월로 최근의 일이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 가입 전부터 <무쿠게통신>에 글을 기고하셨는데, 첫 글이 부산과 비무장지대 방문기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적을 살피고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공감하는 글이다. 콘도 선생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무쿠게통신>에 기고한 학술적인 글이 2개 있다. 하나는 2019년에 5회에 걸쳐 연재한 <한자와 한글>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부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를 만들기 위하여이다. 한자병용을 버리고 한글전용으로 돌아선 한국어처럼 일본어도 한자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생 일본어 교사였던 분의 견해이니 일본 어문학자들도 귀담아들을 일이다.

 

다른 하나는 2021년부터 2022년까지 9회에 걸쳐 기고한 <서울시와 경기도의 친환경 무상급식>이라는 글이다. 한국의 학교 급식이 일반복지를 위해 무상으로, 시민 건강과 농가 부양을 위해 친환경 유기농으로 실시되는 것을 높이 평가하신 글인데, 유전자 조작이 없는 유기농 농축산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축산학 전공자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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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23일 최승희 무용단이 단행한 경남 진주 공연을 조사하다 보니 당시 지방순회 공연 일정은 철도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공연 동선이 철도 노선에 의해 결정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312월의 마산 공연 때문이었다.

 

27일 경성 공회당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진 최승희무용단은 지방 순회공연을 이어갔는데, 당시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217-18일 부산(공회당), 221일 춘천(공회당), 224-25일 대구(대구극장), 226-27일 마산(수좌)에서 공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순회공연 일정에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동선이었다. 경성(=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춘천을 다녀온 다음, 다시 경부선을 타고 대구까지 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 연구노트에서 비교적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둘째는 공연 순서였다. 왜 마산 공연을 부산 다음이 아니라 대구 다음에 했을까? 철도 때문이다. 마산까지의 직선거리는 부산에서 가깝지만, 부산에서 마산으로 직접 가는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경부선 상행선을 타고 북상해서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남행해야 했다.

 

마산선(삼랑진역-마산역)은 러일전쟁을 앞둔 일제가 1905526일 군용 철도로 개통했으나, 19051111일 일반 여객과 화물 수송도 시작했고, 그해 11일 개통된 경부선(경성-부산)의 지선으로 포함되었다.

 

따라서 경부선 철도로 하행하다 보면 삼량진에서 부산으로 갈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최승희무용단이 서로 가깝게 위치한 부산과 마산에서 잇달아 공연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한편 진주 공연은 순회공연이 철도에 의해 좌우됐음을 보여주는 더욱 단적인 예였다. 1931923일의 공연이 그의 첫 진주 공연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마산선이 193141일 경남선(마산역-진주역)과 통합되면서 국철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6개월 전인 19312월의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224-25일의 대구 공연을 마친 후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마산에 도착, 226-27일 마산 수좌(壽座)에서 공연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마산선이 경남선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주까지 갈 수는 없었고, 순회공연은 마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공연 5개월 전인 193141일 경남선과 마산선 철도가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승희무용단은 마산 공연(22)을 마친 후, 다음날 아침 경남선 기차를 타고 진주에 도착, 바로 진주 공연(23)을 가질 수 있었다. , 약 반년 전에는 불가능했던 진주 공연이 가능했던 것은 마산선과 경남선이 연결된 철도 사정 덕분이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지방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도쿄 유학 시절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많은 지방순회공연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 돌아와서도 지방순회공연을 기획할 때는 철도망과 그 시간표부터 조사했을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처럼 최승희무용단이 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존했던 것은 무용단원과 수하물의 이동 때문이었다. 수십 명의 단원이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소도구, 조명과 음향 장치 등을 가지고 이동하는 데에 철도만큼 편리하고 빠르고 저렴한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무용단은 경춘선 철도 개통 전인 1931221일 춘천공연을 가졌을 때 승합자동차(버스)를 이용했다. 당시 경성-춘천의 승합차 이동 시간은 편도 4시간이었고, 1인당 왕복요금이 약 10(편도 6)이었다. 그보다 거리가 3배나 긴 경인선 철도의 이동시간은 1시간40, 왕복요금은 약 1(편도 48)에 불과했다.

 

최승희 무용단이 지방순회공연에 철도를 이용했던 것은 이 같은 신속한 이동시간과 저렴한 비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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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무용단이 밀양과 마산, 진주와 통영에서 개최했던 공연을 각각 알리는 4개의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어째서 4개의 공연을 한데 홍보하지 않고 4개의 광고문으로 나누어 게재했을까, 였다.

 

4개의 광고문은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내용이나 형식이 조금씩 달랐다. 밀양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대공개였고, 진주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연회였다. 마산과 통영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개로 같았지만 활자 크기가 달랐다.

 

제목의 오른편에는 공연날짜와 장소를, 왼쪽에는 주최자와 후원자를 명기한 형식은 같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밀양, 마산, 진주 공연은 날짜와 시간을 표기했지만 통영공연은 시간 없이 날짜만 표기했다. 또 진주공연 광고문에는 일시(日時)”라는 표현을 썼지만, 다른 광고문들은 시일(時日)”이라고 썼다.

 

 

주최자와 후원자도 조금씩 달랐다. 밀양, 진주 공연의 주최자는 <최승희무용후원회(=후원회)>, 후원자는 <동아일보 현지지국(=지국)>이었고, 마산공연의 후원자도 <지국>이기는 했지만 주최자가 <후원회>가 아니라 <최승희무용연구소>였다. 가장 차이를 보인 것은 통영공연 광고문으로 주최자는 <지국>이었고, <경성최승희무용연구소><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다.

 

, 이 광고문들은 내용이 간단하고 형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인데도, 표현이나 내용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광고문을 최승희나 최승희무용연구소의 매니저, 즉 오빠 최승일이나 남편 안막이 주관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차이가 보이게 된 것일까?

 

그로부터 6년 후 최승희는 일본 간사이 지역에서 3주일 동안 순회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193724일부터 27일까지 나고야와 교토, 오사카와 고베의 4개 대도시에서 공연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공연 일정과 작품명을 한 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팜플렛을 발생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공연에서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4개의 광고문을 한데 합친 크기의 광고를 한꺼번에 게재했다면, 같은 비용으로 더 큰 지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일정과 극장, 주최자/후원자를 명기하는 것을 넘어 발표작품과 공연자들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가능한 대답은 하나였다. 이 광고문은 최승희나 무용연구소의 매니저가 주관하여 신문 게재를 의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주최자와 후원자로 명기된 <후원회><지국>이 게재한 광고이기가 쉽다. 즉 이 광고를 의뢰하고 그 광고비를 지불한 것은 <후원회>거나 <지국>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통영에서는 <지국>이 주최자이고 <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 후원 영화사가 광고비를 지불했을 가능성이 크다.

 

, 지방 순회공연은 현지의 <후원회>나 후원 신문사의 <지국>이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공연이 이뤄졌고, 공연의 조직과 진행을 담당하는 한편, 수익은 공연을 제공한 최승희무용단과 주최자가 일정한 비율로 분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공연 조직 및 진행 과정을 이해하면 포항 공연만 유일하게 <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낸 이유도 알 수 있다.

 

공연 즈음에 포항에는 <동아일보> 지국이 개설되지 않았거나 지국장이나 국원이 없는 사고지국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조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포항에서는 지국이 활동중이던 <조선일보>가 공연 조직을 대행했고, 포항지역에 신문이 보급되는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 게재된 수 개의 공연 기사와 광고를 토대로 당시에 무용공연이 지방에서 조직되고 흥행되는 방식을 모두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지방순회공연에서는 후원 신문사의 지국과 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로 공연 무용단은 신문사 지국과 공연 수익을 나누어야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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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의 순회공연을 알리는 광고가 4개나 나란히 실렸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광고문에는 최승희무용공개혹은 최승희무용공연회라는 말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양 옆에는 공연 일시와 극장, 주최와 후원단체 등이 명시되었다.

 

이 광고문들에 따르면 921일의 밀양 공연은 조일(朝日=아사히)극장, 922일의 마산 공연은 구()마산의 수좌(壽座=코토부키자)에서, 923일의 진주 공연은 진주좌(晉州座)에서, 그리고 925일의 통영 공연은 봉래좌(蓬萊座)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하루 전인 916일자 <동아일보(3)>에는 16일의 김천 공연이 김천(金泉)극장, 17일의 대구 공연이 대구극장에서 열린다는 기사와 광고가 실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행된 최승희무용단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김천(9/16)-대구(9/17)-밀양(9/21)에 이어 마산(9/22)-진주(9/23)-통영(9/25)의 순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그해 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의 후속 지방공연이었고, 대구 공연 전에도 수원(913)과 안성(14)에서 먼저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따라서 이 순회공연은 수원-안성 등의 경기도 지역에서 출발하여 김천-대구-안동-밀양의 경상북도 내륙도시를 거쳐 마산-진주-통영의 경상남도 해안도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925일 이후 신문에 다른 공연이 보도되거나 광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통영 공연 이후 더 이상의 지방 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913일부터 925일까지 약 2주일 남짓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순회공연을 가졌으니 피로가 누적되었을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 두 광고문에 드러난 순회공연 일정에 따르면 대구와 밀양 공연 사이에 사흘의 사이가 뜬 것이 의문이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0년대에 이끌었던 일본 지방공연에서나, 1930년대 초에 최승희무용단이 진행했던 조선 지방공연에서도, 3-4일의 공연 뒤에 하루 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연속 3일을 쉬는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신문들을 조사해 보니 1931914-16일의 <조선일보(7)>에 포항 공연(9/18) 광고가 3일 동안 게재되었음이 발견되었다. 또 신문 보도나 광고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평전들이 안동 공연을 단행했다고 서술했음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내륙 도시인 김천(16), 대구(17), 포항(18), 안동(20), 밀양(21)을 거쳐 해안 도시인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진주와 통영 공연 사이에 하루의 공백이 있는데, 이듬해인 1932년 순회공연에서는 진주와 통영 사이에 사천(泗川) 공연이 끼어 있었다. 따라서 19319월의 순회공연에서도 24일에 사천 공연이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920일부터 23일까지 4일 연속 공연한 무용단이 24일을 하루 쉬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에 사천 공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보도한 신문 기사와 광고문들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거의 모든 공연이 <동아일보>에만 보도되었거나 광고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지들은 물론 <매일신보><경성일보> 등의 총독부 기관지, 그리고 <조신신문><부신일보> 등의 일본어 신문들도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조선일보>가 포항 공연(9/18)을 보도하고 광고했던 것이었다.

 

한편 이 경상도 순회공연 직전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에 대한 모든 기사와 광고는 <조선일보>에만 실렸던 점도 눈에 띄었다. <동아일보><매일신보>는 경성의 신작무용 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매일신보><경성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보도 및 광고 행태로 미루어 19319월의 최승희무용단 경상도 순회공연은 <동아일보>가 단독 후원하기로 계약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부터 공연의 후원이 특정 언론사에 독점적으로 계약되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2022/6/1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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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7일 최승희 선생이 순천 공연을 가졌던 극장은 <순천극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것은 이 공연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나마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1930년대 순천에는 <순천극장> 외에 다른 극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천극장>의 당시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극장은 1914년 일본인에 의해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관되었는데, 일제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그 부지는 조선시대 객사 영역의 일부로 1910년대 초 읍성의 성곽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필지가 분리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주소는 중앙동 24-5번지(도로명 주소는 중앙로 16번지) 자리이다.

 

 

<황금연예관>1933년경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불렸다. 1933112일의 <조선신문(5)>에 실린 신년축하 광고에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광고문에는 네 사람의 일본인 극장주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 키자키 요시오(木崎義男), 무라카미 요시카즈(村上義一), 타케우치 아키라(武內罷)가 그들이다. 이들은 <황금연예관>을 인수해 명칭을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바꿔서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126일 벌교에서 채동선의 부친 채중현이 낙성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도 <벌교구락부>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초 남도에서 구락부라는 명칭이 극장 이름으로 자주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벌교구락부>가 자주 <벌교극장>으로 불리곤 했던 것처럼 <순천구락부>도 그 공식 명칭과는 별도로 <순천극장>으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정식으로 <순천극장>으로 굳어진 것은 19377월부터이다. 710일의 <동아일보(5)><순천극장>이 낙성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해 2월 순천 거주 일본인들이 3만원의 예산으로 극장을 지어 이날 낙성식을 가졌다고 보도되었는데, 이 극장은 건평 150평에 2층 건물로 신축되었으므로 수용인원은 대략 7백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순천구락부>의 발기인 4명의 한 사람이었던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인 것으로 보아 <순천극장><순천구락부> 자리에 개관되었고, 해방되기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 <순천극장>은 일시적으로 <동춘극장>이라고 불렸다가 1950년대에 다시 <순천극장>으로 회복되었는데, 1978년부터는 <국도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90년대 들어 폐관되었다. 극장 건물은 오래 방치되었다가, 2009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상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순천극장>의 역사를 고려하면 최승희가 공연했던 극장 이름은 <황금연예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순천극장>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은 19377월이었고, 1933년경에는 <순천구락부>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다만 <황금연예관><순천구락부>로 개칭된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193112월에 이미 <순천구락부>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극장이나 거리 이름에 황금이라는 말이 들어간 경우가 자주 보인다. 경성에서도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통이라고 불렀고, 황금정4가에 <황금좌>라는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해방 후 <국도극장>으로 불리다가 1999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호텔이 지어졌다.

 

189941일부터 시제를 시행한 일본 요코하마(横浜)시는 그 최대 상업지역을 황금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는 벚나무 대신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것이 특색이었다고 한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손님을 부르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 곳곳에 새로운 상업 지구를 만들면서 그 지명에 황금이라는 말을 넣곤 했던 것은 요코하마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순천 최대 상업 지구였던 황금정은 지금 중앙동이라고 불리며, 해방 후에도 순천 최대의 <황금백화점>이 문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 지역은 <황금패션거리>라고 불린다. (2022/6/1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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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 촬영 시기, 다시 말해 그의 순천공연 시기는 19301025일부터 1932520일경까지 약 1년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이 기간 중 최승희가 순천 공연을 했거나 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4번이나 된다.

 

첫째, 19301021-23일 단성사에서 가졌던 제2회 경성공연 이후 최승희는 1030일 대전공연을 시작으로 호남 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나 뭔가 사정이 생겨서 대전공연은 1111일로 연기됐고, 목포(119-10, 평화관)에서 먼저 공연한 뒤 대전(1111, 대전좌)에서 공연한 뒤 더 이상의 호남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와 여자고학생을 돕기 위한 공연(1114, 경성공회당)을 가졌다. 이 공연 후에는 해주(1117-18, 해주극장)와 재령(1120), 수원(1129)과 인천(1220, 가무기좌) 등 경성에서 가까운 도시에 공연했다.

 

만일 이 시기에 호남공연이 이뤄졌다면 그 시기는 취소된 대전공연(1030)과 목포공연(119) 사이였을 것이다. 즉 그 일주일 동안 순천과 여수, 벌교와 광주 등의 공연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공연들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소읍 순천 공연을 위해 대도시 대전 공연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때의 순천공연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된다.

 

 

둘째, 최승희는 1931110-12일 제3회 경성공연과 193127-8일 신작발표회를 차례로 열었고, 이후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4-25),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에서 공연했다. 3주일의 사이를 두고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12), 사리원(12), 개성(14) 등 북선지역에서도 공연했다. 이 시기에도 전북-충남 공연과 북선지역 공연 사이의 3주일 동안 전남지역 공연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2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2달 동안이나 순회공연을 하게 되므로, 이 시기에 순천 공연을 포함한 전남 공연까지 단행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다.

 

 

셋째, 최승희는 193151-3, 3회 신작발표회를 가진 후, 59, 청량관에서 안막과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 겸 원산 공연(522-23)을 떠났다. 이후 신혼 생활에 여념이 없다가 91-3일에 가서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발표회를 열었다.

 

그 직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서, 수원(913), 안성(14), 김천(16), 대구(17), 포항(18),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안주(20-21), 신의주(24), 안동(27),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목포극장), 광주(5, 제국관), 그리고 벌교(6,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다. 이 시기에 순천공연이 있었다면 벌교 공연 이후인 127일 경이었을 것이다.

 

 

넷째, 1932130일 경성공회당에서 토월회 주최의 재만동포위로공연을 가진 후 천안(212), 김천(16)의 충남-전북 공연과 대구(17-18), 밀양(19) 등의 경북지역 공연, 그리고 사천(22), 통영(24), 김해(27) 등의 경남 공연을 단행했다.

 

이후 기록에 남은 공연은 428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5회 신작발표회를 연 것이 처음이고, 경남 공연지인 사천, 통영, 김해는 전남 해안 지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만일 이때 순천 공연이 있었다면 227일 이후로 이어지면서 여수, 벌교, 광주, 목포 공연으로 계속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남 공연 일정이 사천-->통영-->김해로 진행된 것은 전남 지역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순천 공연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으로 추정된 순천 공연 시기는 1931127일경이 가장 유력하다. 벌교 공연을 마친 최승희가 기차로 불과 30분 떨어진 순천에서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6/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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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의심할 여지없는 자료로 받아들이면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제공된다. 우선 최승희가 순천을 방문한 것은 공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단히 추론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최승희가 아무 연고가 없는 순천을 방문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순천공연은 언제 이뤄진 것일까? 순천역이 문을 연 것이 1930105일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출판일이 1937730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진은 그 두 시기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19333월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193712월 세계순회공연을 떠날 때까지는 조선 지방공연을 체계적으로 단행한 적이 없다.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해 그 일원으로 19341028-29일에 경성 공연을 한 적은 있지만 이때도 지방공연은 없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 도쿄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한 뒤로 최승희는 도쿄와 일본 지방공연에 치중했고 조선에서 공연한 적은 없었다.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촬영을 위해 1935914일 경성에 온 적은 있으나 이때도 지방공연은 물론 경성 공연도 없었다. 19364<반도의 무희> 개봉시기에 맞춰 영화 판촉을 위해 최승희는 조선과 만주 순회공연을 단행했으나 조선에서는 부산과 대구, 경성과 평양과 신의주 공연이 전부였고, 순천에서 공연했을 가능성은 없다.

 

다시 말해 최승희가 재도일한 19333월 이후에는 순천 공연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의 순천역 사진이 촬영된 것은 순천역이 개관된 193010월부터 최승희의 재도일이 이뤄진 19333월까지의 약 2년 반의 시기로 압축될 수 있다.

 

 

한편 최승희의 공연 일정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순천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년 반의 기간은 더 압축될 수 있다. 최승희가 재도일하기 전 마지막 공연은 1932519-20일의 공주 공연이었고, 521일로 예정되었던 대전 공연은 연기되었다가 취소된 바 있었다. 이후로는 다른 공연이 없었는데 이는 이시이 바쿠의 조선 공연과 출산, 그리고 늑막염 때문이었다.

 

193264-5일 이시이 바쿠가 경성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를 만나 자신의 경성 활동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고백했다.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공연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그를 다시 도쿄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는데, 당시 상황을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시이가 경성에 공연하러 갔을 때에 최승희를 만났는데 아기를 배어 있었다. 배가 불룩한 몸으로 안막과 같이 호텔로 찾아와 다시 이시이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부탁하기에 나는 아주 기뻤으나 이시이는 한 달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대답했다.”

 

 

이시이 바쿠의 반승락을 얻은 최승희는 재도일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해산하고 동행을 자청한 김민자를 제외한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3년여의 경성 생활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193284일 딸 안승자를 출산한 이후에도 문제가 생겼다. 산후조리에 이상이 있었는지 최승희는 급성 늑막염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잡지 <만국부인(萬國婦人)> 193210월호에 기고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감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번(=1932) 가을에는 동경에 가서 그이는 남은 공부를 마저 마치고 나는 무용을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너무 어리고 또 내 몸도 완쾌되지 못한 듯싶어 내년 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 19325월 공주공연 이후 재도일이 이뤄졌던 19333월까지 최승희는 순천공연은커녕 다른 어떤 공연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순천공연은 순천역 준공시기인 19301025일부터 1932519일의 공주공연까지의 약 1년 반의 시기로 더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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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은 그 심미적 특징 때문에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사진은 기록의 특징도 가지기 때문에 학술 자료가 될 수 있다. 사진의 기록적 특징 때문에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수백 쪽의 책들이 전달하지 못하는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떤 사진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진 한 장이 담은 정보를 다 풀어내기 위해서는 수십, 혹은 수백 쪽의 책을 써야할 경우도 있다.

 

<최승희 자서전>에 실린 순천역 사진이 그런 예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십여 권에 달하는 자서전과 평전들이 서술해 놓지 않은 최승희의 순천 공연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다. 다만 그 같은 사실적 정보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읽어 내려면 사진의 인물과 배경, 촬영시기와 출판 시기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우선 이 사진이 순천역에서 촬영된 것임이 확실하다.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사진 자체이다. 순천역은 19301025일 전라선과 경전선의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즈음에 순천역사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순천역사에는 <순천역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19601231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 20091222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과 함께 19301025일 순천역 개통 당시의 사진이 시기 순서대로 차례로 새겨져 있다.

 

순천역 개통 당시의 순천역 사진과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비교하면 역사의 모양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개통시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정면에서 촬영된 반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측면에서 사각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정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두 사진 모두 배경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진에 담긴 역사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 전면의 모습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최승희 사진의 배경이 순천역임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사진이 <최승희 자서전>에 실리면서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설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진설명이 한글로만 제시되었다면 평안남도의 순천과 혼동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안남도의 순천(順川)과는 한자로 구별되는 순천(順天)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의 배경이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최승희 자서전>에 실은 의도이다. 최승희의 일본어 자서전인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에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실리지 않은 반면, 한국어 자서전인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34쪽에 걸쳐서 37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청색 계열의 2색도 사진이 16, 적색 2색도 사진이 8, 갈색 2색도 사진도 10쪽에 걸쳐 13장이 실려 있다.

 

37장의 사진들은 대부분 무용작품 사진이거나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고, 4장만 일상생활 중에 스냅으로, 혹은 스냅처럼 보이도록 연출 촬영된 사진들이었다. 작품 사진 중 4장은 경성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활동하던 시기의 사진이고 29장은 19333월 재도일한 이후의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 사진 혹은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다.

 

 

일상생활을 담은 4장의 사진에는 각각 <이시이문하(石井門下) 시대>, <1회 향토방문>, <경성무용연구소 시대>,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이시이문하 시대><1회 향토방문>은 최승희의 도쿄 무용유학 시기(1926-1929)의 사진이고 <경성무용연구소 시대><순천역에서>는 경성에 돌아와서부터 재도일하기 전까지의 사진이다. 37장의 사진이 선택되고 수록된 데에는 나름대로 시기적 배분이 고려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중 경성활동 시기의 사진 2장 중 <경성무용연구소 시대>는 대도시 경성에서 찍은 사진임에 틀림없고 <순천역에서>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경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읍에서 찍은 사진이다. , 이 두 장의 사진으로 경성활동 시절을 대표하도록 편집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순천역에서>가 전라남도 순천공연 때의 사진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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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있었다고 필자는 믿게 되었다. 근거는 한 장의 사진이다. 1937년에 출판된 최승희의 한글판 자서전에는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34쪽 분량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의 최승희 독사진에 순천역(順天驛)에서라고 사진설명이 되어 있다.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땐 긴가민가했다. 당시 말로 하면 남선(南鮮)’뿐 아니라 북선(北鮮)’에도 순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한자가 다르다. 평안남도의 순천은 順川인 반면 전라남도의 순천은 順天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당시의 근거지였던 순천과 여수의 호족이었던 박영규와 김총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로 귀화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순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1937)>의 독사진은 전라남도의 순천역에서 찍은 것임에 틀림없다.

 

 

최승희가 순천역에서 사진 찍을 일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공연하러 순천에 갔다가 마중 나온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인 것이다. 1930년대에는 공연자가 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마중을 나오기 보다는 공연자가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사와 기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시이 바쿠도 1926년의 첫 경성공연 때에는 아침 7시 기차로 경성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일보><매일신보>를 찾아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 형매 본사 내방이라는 제목의 단신이라도 한 줄 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자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특히 정상급 공연자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연자가 언론사에 찾아가기 전에 기자들이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 신문사 내방 사진이 실리면 아직 정상급 공연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기자들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공연자는 정상급이라는 뜻이다.

 

19271024일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 바쿠와 함께 경성 공연을 왔을 때는 기자들이 경성역으로 나가 이시이 바쿠-최승희 일행을 맞았다. 그때 경성역(=서울역)에서 찍은 이시이 일행의 사진이 1025일자 <매일신보(2)><경성일보(2)>에 실렸다.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실었고, <경성일보>는 이시이바쿠와 최승희를 포함한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런데 이 <경성일보>의 사진이 잘못 소개된 적이 있다. 정수웅의 <최승희(2004: 63)>에서 이 사진을 192711월 이시이무용단 일행이 순천역에 도착한 사진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정수웅은 이 사진의 중앙에 있는 체크무늬 외투여 여성이 최승희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사진은 순천역 사진이 아니라 경성역 사진이었다.

 

192711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가 순천에서 공연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19271031일의 <매일신보>는 이시이-최승희 일행이 25일부터 27일까지 주야간 공연을 합쳐서 경성에서 전후 다섯 번 공연을한 후에 “30일 밤 본사 주최 대전(大田) 무용시 공연회에 출연하고자 30일 아침 열시 경성역발 열차로 남행하였고, “대전서 즉시 조선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구주(九州)에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121일자 <매일신보(3)>도 이시이무용단이 경성, 원산, 대전공연을 마치고 구주(九州, 큐슈) 사국(四國, 시코쿠) 지방순업을 마치고 동경에 돌아왔다고 전했다. 1030일 대전 공연을 마친 이시이 무용단은 곧바로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모지, 후쿠오카, 쿠루메, 노가타, 사세보, 나가사키, 쿠마모토, 가고시마 등의 큐슈 공연을 이어갔고, 그 후에도 마츠야마, 도쿠시마, 다카마츠, 우와지마, 고치 등의 시코쿠 지방공연을 마친 후, 11월말 도쿄의 무사시노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시이 무용단이 순천에서 공연할 일정이 없었다는 말이다. (2022/6/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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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공연 조사를 마치고 취재한 자료들을 그러모아 글로 정리하면서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순천에서도 공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여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30년대에는 목포, 광주와 함께 벌교와 순천과 여수가 전라남도의 5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순천과 여수 공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신문과 잡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여수와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고 언급한 문헌은 더러 있었지만, 그 공연이 언제, 어느 극장에서, 어떤 레퍼토리로 이뤄진 것인지 상술한 문헌은 없었다. 더구나 그런 간단한 언급이나마 근거가 취약했다.

 

예컨대 정병호는 평전 <최승희(1995:207)>에서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그는 “(1942216-20일의) 경성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 강릉을 비롯하여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 등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다고 서술했는데, 목록에 오른 순회공연의 지방도시는 모두 16개였다.

 

 

한편 정수웅은 그의 평전 <최승희(2004)>에서 순천에 대해 3번 언급했다. (1) 63쪽에서 석정막무용단의 순천공연이 192711월에 이뤄졌다며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운데 체크무늬 외투를 입은 사람이 최승희라고 설명했고, (2) 370쪽의 연보에서도 192711월 순천 등의 지방 공연을 했다고 서술했는가 하면, (3) 376쪽에서도 최승희가 1942216-20일의 부민관 공연 후인 3월에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등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정수웅이 순천 공연 사진이라고 설명한 이시이무용단 단체사진은 19271024일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해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그러므로 순천공연에 대한 3개의 언급 중에서 2개가 오류였다. 19423월의 순천 공연에 대한 언급도 십중팔구 정병호의 서술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병호의 순회공연 도시목록 중에서 강릉이 빠져 있었지만, 왜 그 도시가 제외되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가장 최근의 평전인 강준식의 <최승희 평전(2012:279)>도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최승희는 예정대로 2월말부터 예산-군산-이리-전주-순천-여수-목포-광주-대전-청주-천안-안성-수원-춘천-개성-평양-신의주 등 전국 17개 지역을 순회 공연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강준식의 목록에는 도시 수가 17개인데, 정수웅의 목록에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수웅과 강준식의 서술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병호의 평전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 않았다. 또 정병호의 목록에서 정수웅은 강릉을 제외했고, 강준식은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는데, 제외하거나 추가한 이유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천공연을 처음 언급한 정병호의 순회공연도시 목록이 중요하겠는데, 이 주장도 근거가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병호는 16개 도시 순회공연을 서술하면서 <월간춤> 199311월호에 실린 김종욱 편주의 근대춤 자료사 29(176)”를 인용했다. 필자는 김종욱의 연재기사를 집성해 출판된 <한국근대춤자료사(2014)>을 자세히 조사했는데, 이 저서에 수록된 1942년의 어떤 자료에도 16개 지방도시 순회공연을 언급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194242일자 <매일신보>가 보도한 안성 공연(328일 밤8, 안성애관극장) 뿐이었다.

 

만일 정병호 선생이 열거한 16개 지방도시가 서술된 순서대로 공연을 유치했다면 순천과 여수 공연은 안성보다 열흘이나 2주일쯤 앞선 315일과 18일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즈음에 발행된 중앙지의 지방판에는 최승희의 공연이 보도된 것이 전혀 없었다.

 

비교적 꼼꼼하게 자료를 검증한 이현준의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1942년 연보(425)에도 순천공연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과연 있었던 것일까? (2022/6/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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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열렸던 극장은 <벌교구락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위치를 밝히려는 시도가 이뤄진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벌교구락부>의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이번에 처음 재발견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벌교구락부>의 신축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위치를 당지(=벌교)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이라고 보도했고,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했다고 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는 했지만 극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벌교구락부> 극장의 위치는 신시장 하단이자 벌교 신시장 인접지였던 셈이다. 1930년대의 벌교 주민이라면 이정도의 서술로도 그 위치를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지금은 그 주소가 밝혀지지는 않는 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벌교구락부>의 주소가 파악되었는데, 지번 주소는 벌교읍 벌교리 875번지혹은 벌교읍 시장21번지였다. 이 주소를 알아내는 데에는 <호남극장문화사(2007, 위경혜)>의 서술과 벌교 거주 한광석 선생님의 증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호남극장문화사>는 벌교에 등장한 첫 극장으로 1958년경에 소화다리 인근에 설립되었던 <벌교극장>1960년대에 개관한 <현대극장><제일극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서술했다. <벌교극장>은 임시로 가설된 노천 가설극장이었고, <현대극장><제일극장>은 건물을 신축해 개관한 실내 극장이었다고 한다.

 

<호남극장문화사>에 따르면 <제일극장>의 개관일은 1963311일로, 극장주는 씨 성을 가진 벌교우체국장과 벌교읍장이었던 김철수의 동생 김상수씨의 공동 경영이었으며, <제일극장>의 첫 상영작품은 <왕자 호동(1962, 한형모 감독)>이었다.

 

<현대극장><제일극장>보다 2년 먼저 개관해 성업 중이었다는 서술로 미루어, <현대극장>의 개관 시기는 1961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극장주는 장학사업을 하던 이길남씨라고 <호남극장문화사>는 밝혔다.

 

 

한광석 선생님께 이 두 극장에 대해 문의한 결과 “1930년대 기준 벌교 신시장 하단/인접지라면 <현대극장> 자리가 <벌교구락부>가 있던 곳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해 주셨다. 그동안 필자가 섭렵한 한국의 극장사를 보면 극장은 대개 이전의 극장자리를 이어받아 신설되거나 개설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1960-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현대극장>자리가 1930-40년대의 <벌교구락부>자리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였다.

 

지금은 <현대극장>도 폐관되어 <대성의원>이라는 병원으로 바뀌었는데, 그 주소가 바로 벌교리 875-6번지였다. 시장2길을 따라 대성병원의 오른쪽에는 <현대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주차장의 상호가 현대인 것도 아마 이전의 <현대극장> 자리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호남극장문화사(2007)>230쪽에는 벌교읍 거리와 극장의 위치를 명시한 약도가 실려 있는데, 가설극장이었던 <벌교극장>은 소화다리와 홍교다리 사이였고, 제일극장은 현 <벌교 진마트>자리이며, <현대극장>은 벌교 새마을금고 건너편의 <대성의원> 자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교차 확인을 위해 1916년에 발행된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대장과 지적원도를 찾아보았지만, <현대극장>의 주소인 벌교리 875번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지적원도 맨 앞장의 표지에 그려진 약도를 살펴보면, 벌교리의 지번은 1번지부터 862번지까지만 나와 있었다. 아마도 <현대극장>이 있던 875번지와 <제일극장>이 있던 866번지는 1916년의 지적도가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주인 없는 공터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22/5/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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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20205월 필자가 목포와 광주, 나주를 방문하면서 새로 발견되었다. 1931124일의 목포 공연, 125일의 광주공연을 조사한 후, 나주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126일에는 나주가 아니라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던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동아일보(1124일자, 3)>의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광주공연과 함께 벌교공연이 나란히 공지된 기사였다. 공연 열흘 전에 중앙지의 지방난에 공지된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리 기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의 보도에서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주와 벌교 공연은 실제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함께 벌교 공연이 열렸던 <벌교구락부>가 조선인 채중현에 의해 설립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었음도 발견되었다. 이 극장의 건축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완성과 낙성식 소식은 <동아일보(1930129일자, 3)<부산일보(19301210일자, 7)>, 그리고 <조선일보(19301214일자, 7)>에 보도되었다.

 

이 극장의 이름이 신문에 따라 <벌교구락부>, <벌교극장>, <벌교공설극장> 등으로 서로 다르게 소개된 것이 특이했는데, 아마도 현지에서는 <벌교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부산의 기자가 이를 극장으로 이해하고 <벌교극장>이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조선일보>가 이 극장을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의문이다. <동아일보><부산일보>는 채중현씨가 사재로 이 극장을 설립했다고 보도한 반면, <조선일보>만 이를 공설(公設)’극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일 채중현씨가 <벌교구락부>를 개관, 낙성한 후 이를 벌교읍에 희사했다면 공설극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벌교구락부(1930)><목포극장(1926)>에 이어 전남 지역에서 조선인이 개관한 두 번째 극장이었고, <광주극장(1935)>보다 5년이나 이르게 개관한 조선인 설립의 극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벌교구락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 행사였음도 확인되었다.

 

 

벌교 공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나주의 홍양현 선생, 화순의 임재택 선생님, 벌교의 한광석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중에서도 벌교에서 출생, 성장하셨고 지금도 벌교에서 활동하고 계신 한광석 선생님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셨다.

 

특히 한광석 선생님은 벌교의 역사와 일제강점기의 상황, 그리고 음악가 채동선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해 주셨는데, <벌교구락부>의 설립자인 채중현씨가 채동선 선생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그 덕분에 채동선과 최승희의 가족 사이에 인적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같은 인맥이 벌교 공연이 성사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벌교 공연이 확인됨으로써 최승희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다른 연구 가능성도 열렸다. , 목포, 광주, 벌교와 함께 전남의 5대도시에 속했던 순천과 여수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순천과 여수가 벌교의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불과 2-30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을 뿐 아니라, 두 도시 모두 경전선과 전라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공연 예정지로 꼽힐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벌교 공연 이후의 최승희 일정, 특히 순천과 여수의 일정을 확인해 주는 신문기사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 없지만, 벌교 공연이 확인된 만큼 순천과 여수의 공연 가능성을 상정하고 조사연구를 계속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벌교 공연은 지금까지 최승희 연구자들에 의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공연으로 이번 조사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향후 최승희의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는 데에도 자극을 주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22/5/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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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1931126일 밤 <벌교구락부> 무대에서 춤을 추었던 것은 최승희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무용수들 외에도 공연을 위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무대 위에서는 열 명 이상의 무용수가 최승희와 번갈아 14개 작품을 발표했다. 보이지 않게 일했던 무대, 음악, 조명 및 의상과 소품 담당자들과 매니저와 단장까지 합치면 약 20여명의 단원들이 공연의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벌교 공연의 연목은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과 거의 같았을 것이기에, 14개 작품을 상연하려면 적어도 10여명의 무용수가 필요했다. 이름이 명시된 무용수가 8(최승희, 김민자, 조영숙, 노재신, 이정자, 곽경신, 정임, 마돌)이었고, 군무에만 참여한 무용수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방공연에 대한 언론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31912일자 <동아일보(7)>는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발표회 직후의 수원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연구생 10여명 소녀의 총출동이라고 보도했고, 1931121일자 <조선일보(7)>도 군산 공연을 보도하면서 동 연구소원 전부가 총출연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에 이름이 명시된 7명의 제자(=연구생) 중에서 노재신과 이정자는 192911월 무용연구소가 개설됐을 때부터 최승희와 고락을 함께한 제자들이다. 193012월에 입단한 김민자는 입단은 1년 늦었지만 최승희의 수제자가 되었다. 조영숙은 19313월 이후에 입단했지만 그해 5월의 제3회 신작발표회에서 독무를 맡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였다. 곽경신과 정임과 마돌은 19315월 이후에 입단한 신입단원들로 보인다.

 

따라서 최승희와 수제자 그룹의 5명이 벌교 공연의 14개 연목 중에서 10개 작품을 공연한 셈이고, 연구생들의 군무는 4개 작품(세계의 노래, 영혼의 절규, 폭풍우, 건설자)이었다.

 

 

한편 최승희의 독무는 <자유인의 춤><십자가>의 두 작품이었고, 중무는 김민자와의 <철과같은 사랑> 한 작품뿐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주목을 받을만한 작품은 14개 작품 중에서 3작품에 머물렀고 다른 11개 작품은 수제자들과 연구생들의 참여와 활약에 의지했던 셈이다.

 

그밖에 무용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음악과 조명, 무대장치이다. 라이브 반주를 사용할 때 근대무용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용했고, 조선무용은 북과 장구, 꽹과리와 징 등을 이용했다. 따라서 적어도 2, 많게는 4-6명의 악사가 필요했다. 비용절감을 위해 레코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도 적어도 한 사람이 축음기 조작을 전담해야 했다.

 

무용 공연에서는 조명이 중요한데, 최승희는 조명에 대해 특히 까다로웠다. 뉴욕 카네기홀의 조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 최승희를 만족시켰던 사람이 원우전(元雨田)이었고, 최승희무용단 제4회 신작발표회의 무대감독을 맡아 주었다. 다만 원우전이 지방공연에 동행해 무대와 조명을 담당해 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무용공연의 조명은 적어도 좌,우와 중앙의 3개가 필요하며, 그중의 하나(대개는 중앙 조명)는 스포트라이트 기능을 갖춰야 했다. 1930년대에 전자식 원격제어가 가능했을 리 없으므로 적어도 3명의 조명 담당자가 따라 붙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벌교 공연의 무대, 조명, 음악 담당자가 적어도 4-5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무용단의 단장과 매니저는 가족이 맡았다. 단장은 아버지 최준현이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공연의 기획과 극장 섭외, 언론 홍보, 회계 관리 등의 실무는 주로 큰오빠 최승일이 담당했고, 경우에 따라 작은오빠 최승오가 맡기도 했다. 19315월 결혼 후에는 남편이 매니저 일을 이어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안막이 결혼 직후 사회주의 문예운동 혐의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벌교 공연의 매니저 역할도 최승일이나 최승오의 몫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최승희 만의 공연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무용수와 4-5명의 스탭, 단장과 매니저 역할의 가족까지 합치면 20명이 넘는 공연단이었던 것이다. (2022/5/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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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의 공연에서 최승희는 벌교의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을 선사했을까? 벌교민의 반응은 어땠을까?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면 처음보는 근대무용에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작품이 가장 좋은 반응을 일으켰을까? 야유를 받았던 작품은 없었을까?

 

불행히도 최승희 벌교 공연의 연목(=공연작품 목록)에 대한 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다. 벌교 공연의 프로그램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혹은 당시 벌교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감상문이나 비평문이 발견된다면 각 연목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에 대한 문헌 자료는 193111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문장짜리 단신 기사가 전부이다. 최승희가 내연(來演)했다는 것과 공연의 일시와 장소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추론에 의지해야 한다. 다행히 벌교 공연 전후의 상황을 잘 살피면 연목에 대한 정보를 추론해 낼 수가 있다.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공연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우선 경성에서 신작발표회를 개최한 다음, 그 연목을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였다. 이는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 시절 스승 이시이 바쿠로부터 직접 배우고 경험한 바였다.

 

이시이 바쿠가 새로 창작한 작품들은 도쿄 공연에서 첫 선을 보이지만, 거듭되는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다듬어지곤 했다. 같은 작품의 공연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용수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오히려 지방의 관객들이 수도권 관객들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최승희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1931916일자 <동아일보(7)>는 최승희의 마산 공연을 소개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일행은 금번 신작무용을 발표함과 동시에 남조선지방을 순회 중이라고 보도했다. 마산 공연의 연목이 경성 공연의 연목과 같음을 시사한 것이다.

 

 

1013일자 <매일신보(7)>무용가 최승희는 경성에서 신작무용을 발표한 후 지방공연의 첫걸음으로 오는 13일 해주극장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개최한다고 보도했다. 경성에서 발표된 신작무용 연목이 해주에서도 반복될 것임을 알린 것이다. 1031일자 <동아일보(7)>도 개성 공연의 연목이 신작무용공연회의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 최승희는 193191일 단성사에서 공연했던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을 가지고 수원(913)을 비롯해, 김천(9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은 물론,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광주(5), 그리고 벌교(6) 공연을 진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126일의 벌교 공연의 연목은 이틀 전의 목포 공연과 하루 전의 광주 공연의 연목과 같았을 뿐 아니라 석 달 전인 91일 경성 <단성사>공연 연목과 대동소이했음에 틀림없다. 193191일자 <매일신보(5)>는 제4회 신작발표회의 14개 작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1. 세계의 노래 (연구생 일동); 2. 자유인의 춤 (최승희); 3. 토인(土人)의 애사(哀史) (김민자, 조영숙); 4.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노재신, 김민자, 이정자, 곽경신, 정임); 5. 번외 야곡(夜曲) (노재신).

 

2, 1. 인조인간 (최승희, 노재신); 2. 영혼의 절규 (연구생 일동); 3. 철과 같은 사람 (: 최승희, : 김민자); 4. 고난의 길 (최승희 외 연구생); 5. 번외: 이국의 밤 (이정자, 노재신).

 

3, 1. 폭풍우 (최승희 외 연구생); 2. 어린 용사 (곽경신, 조영숙, 이정자); 3. 십자가 (최승희); 4. 건설자 (최승희 외 연구생).”

 

 

물론 91일의 경성 공연 연목이 석달 후 벌교 공연 연목과 완전히 일치했는지는 의문이다. 최승희는 무용수의 숙련도와 표현력, 그리고 관객의 반응 등을 고려하면서 각 지방 공연의 연목을 조정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의 연목이 제4회 신작발표회의 작품들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2022/05/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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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채동선과 최승일, 그리고 안막을 통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혹시 채동선과 최승희가 직접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있었다.

 

192996일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298월 최승희도 도쿄 무용 유학을 마치고 귀경해 있었다. 채동선의 귀국 독주회는 19291128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는데,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첫 번째 무대는 1929125-7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찬영회 주최의 <무용,,영화의밤>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박승희(朴勝喜, 1901-1964)가 이끄는 토월회의 화제작 <아리랑>이 재연되면서 화제가 되었고,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의 아내 석금성(石金聖, 1907-1995)도 여주인공 봉희 역을 맡아 출연했다. 최승희는 <인도의 애수>, <황혼>, <소야곡> 등 자신의 최초 창작무용 작품을 선보여, 그의 신무용을 궁금해 하던 관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채동선의 독주회와 찬영회의 <무용,,영화의밤>은 저물어가는 경성의 1929년을 장식한 두 개의 주요 예술행사였다. 독일 유학 경력의 바이얼린의 귀재 채동선 독주회가 경성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고, 최승희도 이 연주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연구를 병행했던 최승희는 이 연주회를 직접 참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무용,,영화의밤>은 경성 유수의 무대예술인들이 총출동했던 행사였고, 몰려드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틀로 예정되었던 공연일을 하루 더 늘려야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으므로, 채동선도 이 공연을 참관했거나 적어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후 채동선과 최승희가 함께 출연한 공연도 있었다. 193041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신춘음악무용의밤> 행사였다. 193041일자 <조선일보(5)>에 따르면 중앙유치원은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아동을 보육하여 온유치원이며 경비의 곤란을 겪는 이 유치원을 후원하기 위해 예술인들이 공연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최승희가 무용부문을 담당하는 한편, 음악부문에는 피아노의 김영환(金永煥, 1893-1978), 성악가 안기영(安基永, 1900-1980)과 현제명(玄濟明, 1903-1960) 등과 함께 바이올린의 채동선이 참여했다. 즉 최승희의 벌교 무용공연이 있기 1년 반 전에 채동선과 최승희는 같은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면식을 익혔고 서로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또 김영환은 숙명여학교 시절 최승희의 음악교사였고, 안기영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최승일과 동창이면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김영환의 제자였을뿐 아니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8년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전의 교수로 임용되어 채동선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초기 근대 음악가들의 명성은 당대에도 이미 자자했다. 문예지 <동광>19316월호(통권22)에서 김영환씨는 피아니스트로서 우리 악단의 길을 열은 사람이며 고종황제 생신어연이 석조전에서 열렸을 때 어전 연주를 하여 금일봉 3천원을 받은경험이 있고, “‘예술가가 칼을 찰 수 없다며 총독부 학무국 근무를 거절한 배짱 있는 음악가라고 서술했다.

 

 

안기영씨는 .. 악단의 경이라면서 작곡가로서도 촉망되는 바 그의 <작곡집1><2>, 그리고 <조선민요집> 등은 ... 선진국 악단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현제명씨는 테너보다 바리톤에 가깝지만 안기영씨와 같이 악단의 쌍벽이라고 치하했다.

 

이어 기사는 채동선씨는 조선 안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기술로나 예술로나 첫손을 꼽아야 할 사람이라면서.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채동선을 가르친 바 있던 홍난파를 상식 이하의 유치한 이론을 가진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승희가 이렇게 10년 이상 연상인 쟁쟁한 음악가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용이라는 신예술을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최승희는 채동선과 직접적인 예술적 교분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로부터 일 년 반 후에 채동선으로부터 벌교 공연의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2022/5/2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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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극장> 낙성식을 보도한 세 신문의 기사에 공통된 또 한 가지 내용은 이 극장의 설립자가 채중현(蔡重鉉)씨라고 밝힌 점이다. 특히 <부산일보>가 채중현을 벌교의 백만장자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재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에 채중현이 만석꾼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그가 벌교 지역의 대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중현은 벌교의 근검조합장을 역임하고 남선무역회사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금융업과 무역업에도 종사했다. 게다가 사립 송명학교의 기성회장과 벌교유치원의 원감을 역임하는 한편, 새로 학교 부지를 기증하여 벌교소학교(지금의 벌교남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교육에 대한 투자와 학교 경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중현은 1931211일 총독부학무국으로부터 전남의 대표적 교육자로 표창을 받았다. 벌교 주민들도 19343월 소화다리 인근에 채중현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지주이자 기업가, 교육후원자로서 <벌교극장>을 설립한 외에 채중현씨가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의 부친이었다는 점이다. 채중현이 <벌교극장>을 설립했을 때 그의 아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만이었다. 채중현은 아들이 고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부친의 재력과 함께 자신의 영민함과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채동선은 1915년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성으로 유학,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입학, 3학년이던 1918년 홍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4학년이었던 1919년 만세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지만 벌교 대지주인 아버지의 힘으로 출옥, 경성제1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대신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4년 와세다대 졸업 후 잠시 미국생활을 했으나, 바이올린 전공으로 마음을 정하고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9월 귀국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까지 4회에 걸친 개인 독주회와 다수의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채동선의 약력을 정리하다보니 평행선처럼 떠오른 다른 인물이 있었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이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최승일은 1905년경 대지주인 아버지 최준현(崔濬鉉)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도쿄의 니혼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1922년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하자 니혼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문사로 활동했다.

 

, 채동선과 최승일은 경성에서의 고등보통학교 시절, 삼일만세운동의 경험, 같은 시기의 도쿄 유학생활 경험을 공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이 1년에 1백명 미만이던 시절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이에서라면 채동선이 최승일에게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제안하고 초대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漠, 1910-?)도 채동선과 학연이 있다. 안막은 채동선보다 9살 연하이므로 학창시절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와세다 영문학과 동창이다. 재경성 와세다대 동창회는 1930115일 채동선의 귀국독주회를 주최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에는 동창회 회식이 이어졌다. 당시 경성에 체재했던 안막도 이 연주회와 회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로 최승희의 벌교 공연 반년 전이다. 따라서 <벌교극장> 개관1주년기념 특별행사에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유치하려는 것이 채중현의 계획이었다면, 이는 채동선을 통해 최승일이나 안막을 경유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상황증거에 따른 추론이며, 이를 뒷받침할 명시적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채동선의 인적 관계망을 고려하면 그가 호남 순회공연 일정을 짜면서 전주, 목포, 광주를 거쳐 벌교에서 공연을 가졌을 개연성이 충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2/5/2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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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 보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은 극장 때문이기도 했다. ‘인구 5천명의 벌교포에 무용 공연을 열만한 제대로 된 극장이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최승희는 도쿄 무용유학 시절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일원으로 적지 않은 공연에 출연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이나 유라쿠자(有樂座), 호가쿠자(邦樂座)나 니혼(日本)극장 등의 주요 극장들은 수용인원 2천명 이상의 초대형이었다.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온 후에 가졌던 4차례의 공연은 경성공회당(1,2)과 단성사(3,4)에서 열렸는데, 둘 다 객석 1천석의 대형 극장이었다. 최승희가 벌교에 앞서 공연했던 목포의 <목포극장>도 정원이 510, 광주의 <제국관>670여석 규모였다. 1930년대에 벌교에도 웬만한 규모의 무대가 마련된 극장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수용인원 1천명의 대형극장이었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1천여 명을 수용할 벌교구락부 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전남 벌교포는 5천여 인구가 거주하며 문화적 모든 시설이 거개 구비한 적지 않은 도시라면서도 시민이 모여 공사간 협의할만한 장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채중현(蔡重鉉)씨가 금번에 구락부(俱樂部)를 당지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에다 18백원의 적지 않은 금액으로, 건평 130여평에 1천명 이상 수용할극장 설립 공사를 벌여 근일에 끝났음으로 지난 6일 오후에 낙성식까지 거행했다고 자세히 보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이라는 제목아래 벌교의 백만장자 채중현씨가 고장에 극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벌교극장>을 설립했으며 “6일 낙성식과 피로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2백수십명을 초대"했는데, 이 연회에는 조선 기생의 무용등이 공연되었고 오후 6시경에 마쳤다고 보도했다.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4천여원의 거액을 들여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하고 “6일 오후3시부터 낙성식과 피로연을 열었는데 주최자 채중현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벌교면장 홍인표(洪寅杓)씨의 답사와 다수 내빈의 축사가 이뤄졌고, “여흥으로 조선명창 리화중선(李花中仙) 형제의 성악으로 다수한 내빈에게 많은 위안을 드리고 6시에 폐회했다고 전했다.

 

 

<벌교구락부> 혹은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의 공사비용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채중현씨가 사재를 털어 신시장 하단/인접지에 건설해 “126일 낙성식을 가졌다는 점은 모두 공통되므로 믿을 만한 내용이다.

 

당시 벌교에는 2개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교에 가까운 상부마을의 구시장과 벌교역에 가까운 하부마을의 신시장이 그것이다. 지금의 벌교시장은 1930년대의 신시장이 확대되어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홍교 근처의 구시장은 신시장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벌교극장이 신시장의 어디쯤에 설립되었는지는 다음번 현지 취재 때에 확인할 계획이다.)

 

 

한편 <벌교극장>의 규모가 1천명을 수용할 정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성공회당>이나 <단성사>에 맞먹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 경성공회당의 2층 넓이가 2백평인데 여기에 1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벌교극장>의 건평이 130여평이었다면 <경성공회당>식 계산법으로는 대략 6백여명이 정원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방 극장들은 대개 지정좌석제가 아니라, 다다미식이거나 장의자를 사용했으므로 행사에 따라서는 1천명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했겠지만, 정상적으로는 수용인원 650명의 극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목포와 광주의 주요극장들보다 큰 규모였던 것이다.

 

또한 <벌교극장>의 낙성식이 1930126일에 열렸다는 점은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최승희의 공연 날짜가 정확히 그 일 년 뒤인 1931126일이었기 때문이다. ,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벌교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2022/5/2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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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 무용가 최승희는 전남 벌교에서 공연했다. 극장은 <벌교구락부>였다. 124일의 목포, 125일의 광주 공연에 이은 남도 순회공연의 일환이었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포와 광주의 공연을 조사하는 중에 벌교 공연이 언급된 신문 기사가 발견된 것이다. 19311124일자 <동아일보(3)>가 지역 모임을 소개하는 <회합> 난에 최승희 여사 무용회 12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한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는데, 이 단신은 125일의 광주 <제국관> 공연 보도와 나란히 실려 있었다.

 

그러나 공연 당일(126)이나 그 직후의 신문에는 후속 보도가 없었고, 그밖에도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언급한 문헌은 더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최승희는 실제로 벌교에서 공연을 했을까? 혹시 기획되고 공고되었지만 연기되거나 취소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용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자주 있었다. 1930825일로 예정되었던 최승희의 청주 공연은 악사의 준비에 미비해서 912일로 연기되었고, 19301030일로 기획된 대전 공연은 주최 측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1111일로 연기됐다. 1932520일로 공고되었던 인천 공연도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 연기되었다가 결국 취소되었다.

 

신문에 공지된 공연이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면 이는 즉각 재공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과 시간 손실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31126일의 벌교 공연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정대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벌교 공연의 실현 여부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벌교가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벌교읍의 1930년 인구가 23천명이었고 일본인이 집중 거주했던 벌교포의 인구도 5천명 남짓이었던 벌교읍이 조선의 신무용 톱스타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했다는 것이 믿어지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최승희는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젊은 무용가였고, 신진답게 최승희의 공연 행보는 공격적이었다. 193021일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 공연 직전까지 그는 네 차례의 신작발표회를 경성에서 열었고, 각 발표회 후에는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1년에만도 최승희는 부산(217-18), 춘천(21), 대구(24-25)에서 지방 공연을 가졌고, 호남지역에서도 이리(31), 전주(2-3), 군산(4-5), 김제(6) 등에서 공연했다. 최승희가 전라도 공연을 가진 것은 1930119-10일의 목포 <평화관>공연 이후 두 번째였다.

 

이후 최승희는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 사리원(12), 개성(14) 등의 북선 지역에서 공연한 뒤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안막과의 결혼식(59)이 예정되어 있었고, 곧바로 네 번째 신작무용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31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무용공연을 가진 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섰다. 수원(913), 김천(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월24일), 청주(25), 대전(26일), 전주(29), 군산(30), 목포(124일, 목포극장), 광주(5일, 제국관), 그리고 벌교(6일,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벌교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소도시였다. 1930년의 벌교읍 인구는 23천명, 1940년에는 25천명으로 늘어나 광주(65천명)와 목포(64천명), 여수(37천명)와 순천(28천명)에 이어 전남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로 본 벌교는 전남에서는 나주와 강진보다 컸고, 전북의 이리와 김제보다 큰 도시였던 것이다.

 

최승희는 공주와 천안, 이리와 김제 등 인구가 벌교보다 작은 도시에서 공연한 바 있었고, 특히 신천과 재령, 의주와 정주와 선천 등 벌교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훨씬 더 작은 도시들에서도 무용 공연을 했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최승희가 빠르게 성장하던 신흥 소도시 벌교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022/5/2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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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에 따르면 숙명여학생들은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오다)”했다가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 인천역에 도착해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30분씩으로 잡는다면, 실제 수학여행은 12시에 시작되어 545분경에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시간이 채 못되는 수학여행이었던 것이다.

 

인천 도착이 1135분이었으니 인원점검하고 나면 바로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식사시간을 45분으로 잡았다면 여행지 방문시간은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약 5시간뿐이었다. 숙명여학생들은 인천에서 어떤 곳을 방문하고 견학했던 것일까?

<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도 인천역을 나서면 바로 중심가였고 인천신사가 있던 동공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시가 방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5시간 동안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을 돌아보고, 그밖에도 기타 여러 곳을 차례로 관람했다니 일정이 빡빡한 수학여행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동공원(東公園,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 중구 인중로 146)>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신사가 있던 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조계지의 동편 끝에 마련되었고 그때는 <일본공원>이라고 불렸고, 궁정(宮町)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궁정공원>이라고도 했다. 바닷가 절벽 위의 높은 곳에 마련된 신사 인근이 공원으로 꾸며져 식물원과 놀이시설이 있었다.

 

<서공원(西公園)>은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청국과 일본 조계지 북쪽 응봉산(鷹峰山) 기슭에 조성된 공원이다. <각국공원> 혹은 <만국공원>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 지역이 청국과 일본을 제외한 기타 각국의 조계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4년 조계지를 철폐하면서 <일본공원><동공원>으로 <각국공원><서공원>으로 개칭됐다.

 

관측소(현재, 중구 전동 25-1)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기상대를 말한다. 19044월 일제는 인천에 관측소를 신설해 러일전쟁을 필두로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데에 필요한 기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응봉산 정상에 69평 규모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진 관측소의 주변에는 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각종 기기를 구비했고, 그 결과를 매일 발표했다.

 

 

축항(築港, 중구 내항로 67)은 축조된 항구라는 뜻이다. 1883년 개항 시기 인천에는 항구시설이 없었다. 일제는 1914년 갑문과 잔교를 만들어 대규모 선박들이 접안할 수 있게 했다. 관측소와 함께 인천 축항은 일제가 건설한 신식문물로서 학생들의 견학거리로 추천됐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1924426)>가 보도한 이화학당의 인천 수학여행에는 검역소(중구 항동71-17)”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반출되던 한국소를 검사하던 이출우검역소를 가리킨다. 통감부 시기부터 패망까지 일제는 약 150만 마리의 한우와 6백만 마리분의 소가죽을 반출했는데, 검역소는 그 한우와 가죽을 검사하던 곳이다.

 

 

그런데 5시간의 도보 일정으로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과 검역소 방문이 가능했을지가 의문이었다. 현주소 기준으로 동선을 측정해 보니, 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입구까지 5백미터(도보로 10), 자유공원 입구에서 관측소까지 5백미터(오르막길 15), 관측소에서 검역소까지 3.3킬로미터(54), 검역소에서 축항까지 1.7킬로미터(27), 축항에서 동공원까지 3.2킬로미터(51)였고, 모든 방문을 마치고 인천역으로 돌아가는데 1.5킬로미터(26)였다. 10.7킬로미터였고 도보로 178, 즉 걷는 데에만 약 3시간이 걸렸을 거리이다.

 

5군데의 방문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2시간밖에 할당되지 않았을 테니 한 방문지에 25분 이상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 시가지와 서공원의 양식 건물들은 걸어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관측소나 검역소, 축항의 갑문이나 신사에서는 현장 관계자로부터 충분한 설명이나마 제대로 듣기 어려웠을 시간이다. 따라서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은 3시간 걸으면서 2시간 구경해야 했던 분주하고 빡빡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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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인천 수학여행을 위해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18999월의 열차 운행은 하루 2왕복에 불과했으나, 그 해(=1899) 121일부터는 하루 세 번 왕복, 이듬해인 1900316일부터는 하루 네 번 왕복으로 증편됐다. 6개월만에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증가세는 계속되어서 19203월에는 9, 19254월에 이르면 하루 13편에 이르렀다. 경인선 운행 20년 만에 열차 편수가 3, 25년 만에 4배로 증가한데다가, 운행 객차와 화물차의 수가 1899년의 3량에서 1925년에는 7량으로 늘어났으니 경인선을 이용한 인적, 물적 수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오전 645, 9, 1042, 1210, 210, 515, 610, 750, 1010분이었다. 그런데 이 1920년 열차시각표에는 1922526일의 <동아일보>가 보도한 오전1135분에 인천에 도착하는 기차편이 없다. 오전1135분에 도착하려면 그보다 1시간40분 전인 오전95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야 하지만, 9시발과 1042분발 기차가 있을 뿐이다.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열차시간표가 더 증편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19253월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역 출발 열차가 하루 13편으로 늘었고, 출발 시각은 오전635, 740, 830, 915, 1015, 1110, 오후1240, 1445, 1620, 1740, 1835, 2035, 2230분이었다. 이중 오전830분과 오후540분 기차는 급행이었다. 급행의 운행시간은 50분으로 오전830분에 경성역을 출발하면 오전92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1920년과 1925년의 열차시간표를 비교해 보면 증편된 4개 열차 중에서 3개가 오전 기차라는 점이다. 첫차가 645분에서 635분으로 10분 당겨졌고, 9시 기차는 915분으로 15분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740, 830분발 열차가 2편 증편됐다. 1110분발 기차도 새로 생겼는데, 이는 오전에 인천으로 가는 경성의 여행객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경인선 덕분에 인천이 경성의 1일 생활권에 완전히 포함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간표에도 숙명여학생들이 탔던 955분발 기차는 없었다. 915분발과 1015분발 열차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20년 이후에 955분발 열차가 생겼지만 1925년에는 그것이 감편되어 1135분발 기차가 1110분으로 당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19254월에 발표된 열차시각표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 제1함대가 인천항에 입항하자 일본군의 경성행 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열차시간표였다. 여기에는 경성->인천 열차가 14, 인천->경성 열차가 14편으로 되어 있었다. 인천행 열차 중에서는 오후330분과 오후435분 기차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대 귀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830분발 급행열차의 번호가 205호이고 그 다음으로 출발하는 915분발 보통열차 번호가 207호인데 그 다음 1110분에 출발하는 보통열차 번호가 211호인 것을 보면 그 사이에 1015분발 209호 보통열차가 있었으나 감편되었다는 뜻이다. 209호가 누락된 것은 그 시간 여행자가 적어서 감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253월 시행의 인천발 경성행 기차시간표는 6, 75, 85, 910, 1110, 오후1255, 255, 45, 515, 615, 720, 845, 1040분 등이었다. 19254월의 특별시간표에는 오후720분발 경성행 열차가 감편되었고, 그 대신 일본군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오전720분과 840분 기차가 증편되었다. 숙명여학생들이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한 615분발 열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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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22529, 4)>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 기사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된 것은 경인선의 시간표였다. 이 기사는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를 통해 경인선의 기차들의 발착 시간과 속도를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았는데, 1899918일에 개통되었던 경인선의 첫 시간표는 간단했다. 노량진->인천이 하루에 2, 인천->노량진이 2편뿐이었다. 노량진행 기차는 인천에서 오전7시와 오후1시에 출발했고, 인천행 기차는 노량진에서 오전9시와 오후3시에 출발했다.

 

오전7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는 오전8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20분 쉬었다가 9시에 다시 노량진을 출발해 104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1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가 2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이 기차는 20분 휴식한 후 3시에 다시 출발해 440분에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하루 운행을 마쳤다.

 

 

주목할 것은 경인선이 줄여놓은 거리이다. 이 기차는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여행길을 1시간40분으로 줄였다. 이 속도가 지금 기준으로는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최초의 경인선 거리가 33.2킬로미터였고, 이를 1시간40분에 달렸으니 그 속도는 약 시속 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누구든 1백미터를 15초에 달린다면 그 속도가 시속 24킬로미터이다. 즉 당시의 기차는 1백미터를 15초에 달리는 사람보다 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차 통학을 하던 학생들이 달리는 기차를 뛰어서 올라탔다거나, 만주의 열차강도 마적단이 말을 타고 기차와 나란히 달리다가 뛰어 오르는 일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도 경인선은 두 도시와 그 시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인천의 여관과 호텔들이 폐업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선객들이 바로 기차편으로 경성으로 향했으므로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것도 경인선이 개통된 직후였다.

 

그 대신 경성 시민들은 점심을 먹으러 인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천의 식당들은 호황을 맞았다. 중국집 <중화루>가 유명해 진 것도 경인선 덕분이다. 경인선은 또 월미도 유원지를 경성시민의 소풍지로 만들어 주었다.

 

 

경인선의 속도가 조선인들을 놀라게 했다면 기차와 함께 도입된 시간 개념이 조선인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이나 인천에서 오전 열차를 놓치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고, 오후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경인선의 개통식에서 기차를 놓친 사람이 있었다. 조선 정부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었다.

 

1899918일 제물포역에서 열린 경인선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총출동했고, 학부대신 신기선도 당연히 참석했다.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였다. 벼슬 팔아 돈벌이하던 고종에게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나라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렸고 출발 직전에야 비서가 화장실에서 신기선을 찾아냈다. “대감마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러자 신기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비서가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이 역사적 경험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는 기차와 함께 시간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간지를 사용하던 시간제가 24시간제로 바뀌었고, 한 시간도 분 단위로 세분화되었다. 그리고 그 세밀한 시간을 모두 잘 지켜야 했다. 새로 도입된 이 시간엄수의 관행은 반상천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고관대작이나 미관말직의 지위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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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526일의 숙명여학교 인천 수학여행에는 516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동아일보(1922529, 4)>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중의 초등과란 보통학교를 가리키며 오늘날 초등학교 과정이다.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만8세 이상의 여아가 입학하는 4년제 과정이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숙명 초등과의 입학정원은 90명이었고, 최승희도 19184월 이 학교에 입학해 19223월에 졸업했다.

 

 

19224월부터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보통학교는 6년제로 바뀌었지만, 숙명여학교는 이 해부터 보통과를 폐지해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고등과 교육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여학교 초등과 정원은 1학년 없이 2,3,4학년 각 90명으로 총 270명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숙명여학교 초등과 생도 수가 333명이었다고 했으니 재학생 수가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된다.

 

첫째는 법정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선발했을 가능성이다. <조선일보(1920616, 3)>1920년 숙명여학교 고등과의 모집정원이 40명이었으나 58명이 지원했고 이중 48명이 선발됐다고 보도했다. 모집정원보다 8(20%)을 초과 입학시킨 것이다. 입학 후 4년 동안 여러 사정으로 퇴학할 학생 수를 예상해 학생을 미리 더 선발했던 것이다. 초등과의 법정 정원이 90명이었다면 그 20%인 최대 18명까지 더 선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초등과의 각 학년 재학생 수는 최대 108명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보결(補缺) 학생, 즉 편입생의 선발이다. 숙명여학교의 입시요강을 보면 매년 신입생과 함께 약간 명2,3,4학년 보결학생을 추가로 선발했다.

 

 

따라서 초과 입학생과 보결 학생을 합치면 재학생 수가 법정 정원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학교가 적어서 입학 경쟁률이 251에 달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많은데 입학할 학교가 없어 비상대책이 강구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법적, 혹은 관행적으

로 용인되던 초과입학 비율 20%를 넘기더라도 총독부로서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이 수학여행에 참가한 고등과 학생은 183명이었다. 1차 조선교육령이 적용되었던 1921학년도까지 숙명여학교는 3년제였고, 입학 정원은 40명이었지만 실제 입학생은 48명이었다. 1922년의 정원은 80명으로 늘었지만, 실제로 몇 명이 입학했는지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80(정원)1백명(20%추가)의 사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 고등과 재학생은 최저 176, 최대 196명이었을 것인데, <동아일보>가 보도한 183명은 이 범위 안에 들어가므로 정확한 숫자로 보인다.

 

 

따라서 초등과 333명과 고등과 183명이 참가했다는 것은 곧 숙명여학교의 전교생이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단 516명은 1920년대 수학여행 규모 순위에서 5위로 꼽혔다.

 

1위는 192359일 관촉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강경공립보통학교(동아, 516, 800)였고, 2위는 192354일 성남사로 원족을 갔던 안성공립보통학교(조선 59, 700)였다. 3위는 1923522일 담양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광주보통학교(조선, 529, 667)이었고, 4위는 1923522일 묘향산 수학여행을 갔던 평양 광성학교(동아, 519, 528)였다.

 

한편 <조선일보(1924426)>에 따르면 숙명여학교에 뒤이어 대규모 수학여행단 6위를 차지한 것은 이화학당(5백명)으로, 이들도 426일 인천 수학여행을 단행했는데, 방문한 곳이 축항과 관측소, 검역소와 공원들이어서 2년 전의 숙명여학교와 완전히 같았다.

 

불행히도 숙명여학교의 이 수학여행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구 6(1925년 기준)에 불과했던 도시 인천에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5백 명이 줄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을 구경했다기보다는 인천 시민들이 숙명여학생들을 구경하게 되었던 수학여행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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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여학교의 19225월 인천 수학여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1918년에 입학해 19223월에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그해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에 진학했다.

 

당시 조선의 학교들 사이에는 수학여행 붐이 일었다. 1910년대까지는 조선총독부가 수학여행을 금지하거나 억제했지만, 1919년 삼일만세운동 이후에는 수학여행을 장려하되 방법과 내용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수학여행을 장려한 것은 문화정치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예산자립을 위해 관광산업을 일으키는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은 메이지 시대 일본 학교들의 관행을 모방한 것이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시작된 초기의 수학여행은 위국충군(爲國忠君),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점 후 일제가 수학여행을 억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총독부는 철도와 숙박업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자생적 산업기반이 없던 조선에서 조세 수입을 창출할 방법이 관광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평양과 경주와 부여를 고적지로 개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러한 관광정책의 흐름 속에서 학생들의 수학여행도 장려되었지만, 총독부는 각 학교의 1박 이상의 수학여행은 도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한편, 여행의 경유지와 내용을 보고하도록 했다.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친일적 내용으로 채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제약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적극 활용했다. 1920년대에 이뤄진 수학여행은 <동아일보>254, <조선일보>171건이 보도되었는데, 중복을 제외하면 10년간 보도된 수학여행 건수는 273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보통학교(=초등학교)와 고등보통학교(=중학교), 전문학교와 실업학교 등 모든 종류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 수학여행지로 자주 선택되었던 곳은 경성, 평양, 인천, 진남포, 수원, 신의주, 원산, 경주, 부여, 강화도, 만주, 일본 등이었다. 진남포와 신의주, 원산 등은 근대 문물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고, 경주와 부여, 강화도 등은 전통문화유적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다.

 

경성과 평양, 개성과 수원과 인천 등은 일제의 근대시설/신문물과 조선의 역사유적/전통미가 공존하는 곳이었으므로 선호되었다. 1920년대에 실시된 273건의 수학여행 목적지 중에서 경성(46)과 평양(45)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인천(36), 개성(28), 진남포(17), 수원(15), 신의주(13), 강화(12)의 순서로 나타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총독부가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수학여행을 통제할 때 일제가 건설한 근대문물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낙후된 조선을 일제가 근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체제 우월성과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문화 유적지가 수학여행지로 선정된 경우에는 통제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일제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 계속되어 왔다는, 이른바 식민사관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를 유적지의 해설 형태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것이다.

 

일제의 수학여행 내용통제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조선의 역사보다는 일제의 문물에 감탄하기 쉬웠을 것이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더 쉽게 물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수학여행 후에 민족의식이나 반일의식이 강화되기도 했다.

 

1920년 개성 수학여행을 다녀온 보성학교 황학동(黃鶴東)은 개성의 인삼실업기관을 견학한 후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는가 하면, 1921년 강화도 수학여행을 갔던 보성학교의 박달성(朴達成)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금일의 경우를 직접 초래한 것이 강화에 있음을 절실히 기억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고 개탄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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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인천 무용공연을 살피기에 앞서 19225월에 있었던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숙명여고보 1학년생이었던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통해 1920-30년대의 인천의 모습, 경성 시민들이 주변 도시들을 여행하던 유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인천)”(<동아일보>, 1922529, 4)

 

사진도 없는 단신이지만 압축적이고 밀도 높은 기사이다. 이 보도 내용을 잘 살피면 당시의 숙명여학교, 경인선 기차 운행, 인천의 관광명소와 산업시설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다.

 

 

우선 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교동(校洞)보통학교는 오늘(=19101016) 인천으로 수학여행 한다더라(<매일신보>, 19101016, 27)는 신문 보도가 있었고,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하여 지난 (19141)10일에 수원으로 내려갔더라(<매일신보>, 1914111, 3)>는 기사도 발견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매일신보>경성여고보 고등과 학생들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19201013, 3)고 보도했고, <동아일보>경성전수학교 직원과 생도 150명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1921429, 4)는 기사를 냈다. 1932<부산일보>경성의 숙명여학교 생도 1,2,3학년 3백여명은 수학여행을 위해 512일 개성에 가서 전매국 출장소의 인삼 상황 등 여러 명소와 구적(舊蹟)을 견학했다(1932514, 6)고 보도했다.

 

이 기사들로 미루어 볼 때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도시로 견학을 가는 여행은 당일에 돌아오는 경우에라도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는 3학년 학생들을 일본이나 만주로 일주일씩 수학여행을 보냈던 적도 있는 것을 보면 숙명여학교가 각 학년 혹은 전학년 학생들을 적어도 연1회 이상 다양한 형태의 수학여행에 참여하도록 주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숙명여학교가 수원(1914)과 인천(1922)과 개성(1932) 등을 자주 수학여행의 대상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경성에서 가깝고, 철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유적이나 근대적 산업시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 소풍을 가는 것은 원족(遠足)’이라고 불렸다. <매일신보(19101016, 2)>사범학교 직원과 학생 일동은 어제(=1015)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평야원족회(平野遠足會)를 행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이처럼 경성의 학생들이 경성 내 혹은 교외지역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원족이라고 불렀다. ‘원족이란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먼 발걸음이라는 뜻이므로 주로 도보여행을 가리켰지만,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기도 했다.

 

 

숙명여학생들이 자주 갔던 원족 대상지는 우이동과 효창원 등이었다. 숙명여학교의 우이동 원족은 <매일신보(1913429, 5)>경성 중부 박동 사립숙명고등여학교 생도 136명은 교사가 거느리고 어제(1913428) 오전 830분 남대문을 떠나는 기차로 운동 겸 사쿠라 구경을 위하여 동소문밖 우이동으로 향하여 갔다더라고 보도한바 있었다.

 

효창원 원족에 대해서도 <매일신보(192154, 3)>오늘 4일 오전9시에 시내 사립숙명여학교에서 고등과와 보통과 학생 전부를 교원들이 영솔하고 원족을 가기로 되었다고 전하고, 보통과 1,2학급 생도들은 아직 유치하여 너무 먼 길은 가기 어려움으로 과히 멀지 않은 동물원으로 가게하고, 그 외 보통과 3학년에서부터 고등과 3년급 생도들은 효창원으로 가서 하루 동안 유쾌히 놀고 오후4시 가량 각각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더라고 보도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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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그의 40년 무용 경력 동안 인천에서는 단 하루 공연했다. 인천 유일의 최승희 공연은 193012177시반, 인천의 <가무기좌(歌舞伎座, 가부키자)>에서 열렸다.

 

조선의 무용의 화형(花形=스타) 최승희 일행이 금월 20일 인천 가무기좌에서 무용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당일 오후5시부터는 인천시내 학생견학을 위하여 15, 10전에 공개하고 오후7시반부터는 일반에 6040전에 공개하는데, 동아일보 독자에 한해서 60전을 40전에, 40전을 30전에 공개하게 되었다. 최승희 일행의 무용은 보고자 하는 인사도 많은 터이므로 당일에는 상당히 성황을 이루리라 한다.”(동아일보, 19301217:7)

 

 

첫 공연 후 2년쯤 뒤에 최승희는 또 한 번의 인천 공연을 기획했다. 1932520일 오후7시반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인천공회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오는 20일밤 7시반부터 인천공회당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개최될 터인데 회원권은 대인50전 학생30전의 2종이다.”(<매일신보>, 1932512, 7)

 

그러나 이 두 번째 공연은 기한 없이 연기되었고, 이후 다시 일정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이 연기된 이유가 회장(會場) 관계라고 보도됐다.

 

“[인천] 기보=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신작발표회를 오는 20일밤 인천공회당에서 개최하려하였으나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연기하기로 되었다.”(<매일신보>, 1932514, 7).

 

 

1932년의 공연이 취소된 후 최승희의 공연이 다시 인천에서 열린 적은 없었다. 따라서 193012월의 공연이 최승희의 유일한 인천 공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인천에서 영화로 선보인 적은 있었다. 최승희의 두 번째 극영화이자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29일 애관에서 상영되었던 것이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에서는 구정의 선물로 1만 독자에게 바치고자 반도무희 최승희 여사가 나온 <대금강산보>라는 일활(日活)작품의 영화와 대조(大朝)<뉴쓰>를 무료로 제공하여 하루의 위안을 삼고자 금29일 오전2시반부터 외리 애관(愛館)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독자는 무료입장권을 지참하고 정각에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매일신보>, 193829, 6.)

 

해방이 되자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최승희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1946531일의 <동아일보(석간26)>화북에서 출발한 최종 귀환선 2척이 29일 인천에 입항했으나 검역관계로 상륙하지 못하고 정박 중이며 이번에 귀환한 동포 15백여명 중에는 조선이 자랑하는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 여사가 승선했다고 전했다. 최승희가 실제로 귀환선에서 하선해 인천에 발을 디딘 것은 그해 63일이었다.(<독립신보>, 194665, 2)

 

 

그밖에도 최승희의 무용 스승 이시이 바쿠는 인천에서 세 차례 공연했다. 공연일은 1926324, 193269, 1937430일이었고, 극장은 모두 <인천공회당>이었다.

 

한편, 최승희는 1922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해 526일 실시되었던 숙명여학교의 수학여행 때였다. 숙명여학교의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이 직원 15명의 인솔아래 26일 상오 1135분 도착 열차로 인천에 도착하여 시가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 기타 여러 곳을 순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을 출발하는 열차로 귀교했던 것이다.(<동아일보>, 1922529, 4).

 

이상이 언론에 보도된 최승희와 인천의 인연이다. 그가 인천에서 다른 소규모 무용 활동이나 여가 시간을 보냈을 수는 있겠지만,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인천 공연을 중심으로 1920년대와 30년대의 인천 상황, 공연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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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비문은 많은 실마리를 주지 않았지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참여한 공사와 사망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옛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고,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는 고베수도가설공사 중에 터널붕괴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는 신문기사로 확인되었다. 1929328일자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에 사고 상황과 희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아사히신문 도쿄판><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전자는 도쿄 소재 일본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사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씨가 찾아 주셨고, 후자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도서관에서 발굴하셨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4개의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이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윤길문(21), 오이근(25)씨가 사망하고 윤일선(尹日善,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 연령 미상)씨가 중경상을 입었는데, 피해자들은 모두 경상남도 고성과 통영 출신이었다.

 

 

다이너마이트 사고보다 15년 전에 발생했던 고베수도공사 터널붕괴사고에 대한 신문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1910년대의 일간신문은 발행면수가 적었기 때문에 산간 오지에서 발생한 공사장 사고까지 보도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나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은 사고지역인 니시타니무라(西谷村)의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매장 일시가 191483일 오후2시 이후로 명시되어 있었다. 오지에서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의 장례가 3일장이나 5일장으로 치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는 82일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83일 오전에 매장인허증이 발행되자마자 당일 오후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김병순(金炳順)씨의 한자 이름에 잘못이 있었다.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잡을 병()’ 혹은 자루 병()’자로 보였지만, 이는 빛날 병()’의 오기였다. 한국에서는 불 화()’변이 부가된 빛날 병자가 이름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훗날 발굴된 족보 자료에서도 김병순씨의 이름을 金炳順으로 기록해 놓고 있었다.

 

 

매장인허증에는 김병순씨의 생년월일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메이지(明治)16, 1883519일이었다. 따라서 사망 당시 김병순씨의 나이는 만31(+3개월)였다.

 

김병순씨의 최종거주지 주소는 카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의 타마세(玉瀨)였다. 번지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당시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을 이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주소만으로도 신원을 밝히기에는 충분했을 터였고, 우편물도 제대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병순씨의 최종 주소지는 그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른바 함바飯場)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순씨의 한국 내 연고를 찾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본적지 주소였다.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라고 되어 있었다. 즉 김병순씨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9148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꿀 수 있다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이 주소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와 군(), ()와 동()이 명시된 것은 좋으나 사이에 면()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강릉시 지명 중에는 대천동이라는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 이후 1백여년 동안 조선의 지역 구획과 지명 변동이 많았으므로 그 계보를 차분히 조사해 나가면 실마리가 발견될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으로서는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만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일본 매장인허증에 본적이 강릉으로 명시되었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강릉의 호적이나 족보 기록을 찾아 일본과 한국의 기록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반드시 완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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