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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踊靴>会員たちが来日えて皆帰ってきましたくは23くは2週間関西れていたのですが参加者わせて6でした

 

<1江陵フォーラム>のキム·ジュンナム(김중남)姜承昊(カン·スンホ)チョ·ウネ(조은혜)先生513-15<和江(ファガン)文化財団>で李洪範(이홍범, イ·ホンボム)先生と玄洪珍(현홍진, 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512-17<舞踊靴>会員としては510-23大阪兵庫県々なれました

 

 

今回訪問実務訪問です<舞踊靴>定期訪問区別するための名前です<舞踊靴>127-30めて訪日団構成していました30会員(1)大阪朝鮮学校開校70周年記念公演参観(2)宝塚朝鮮人追悼碑参拝(3)玉瀬滿福寺音楽会きました2次定期訪問10月初めに予定されています

 

ところで今回訪問性格います参加者皆共通目的日程遂行したのではなくなる任務のためになる日程動線活動しました

 

 

もちろん6参加したイベントもありました日本人団体主催した<朝鮮学校高校無償化含>のための街頭署名集会玉瀬参拝墓地にムクゲをえる行事がそれでした

 

にはそれぞれやるべきことがいました江陵-宝塚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策模索している<1江陵フォーラム>今回訪問じてその具体的方法見出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第一歩としてキム·ジュンナムカン·スンホチョ·ウネ先生橋本成年(Hashimoto Narutoshi)兵庫県議員北野さと(Kitano Satoko)宝塚市会議員面談共通関心事懸案について意見交換しました

 

 

<和江文化財団>7月初大学生たちの来日プログラムを企画中です20人前後大学生1週間日本九州関西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その期間中大学生れる場所参加するイベントを踏査める必要がありましたそれでイ·ホンボム常任理事とヒョン·ホンジンさんが今回訪日同行されたわけです

 

一方仕事4つでした(1) <舞踊靴>7キャンペーンで用意された舞踊靴朝鮮學校舞踊部伝達(2)2次訪問団日程動線もあらかじめ調べ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3) <青丘文庫研究会>月例会論文発表することになっていてそのにも(4)主要地域図書館記録保管所訪問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関西公演する資料調査する計画てました

 

 

今回実務訪問団参加した6はそれぞれなる団体しますが<舞踊靴>後援会員という共通で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参加すればもが<舞踊靴>後援者だからです<舞踊靴>はそれ自体よくまれた組織というよりは在日朝鮮学校舞踊部後援するためにまった個人団体連帯えます

 

キャンペーンがわれたり訪問団活動をする<舞踊靴>体系的活動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普段各会員した団体友好協力めることに集中したいといます

 

 

<舞踊靴>snsのグループトークを中心朝鮮学校支援することを公示討論計画実行報告します会員数150人余りであるためこのようなコミュニケーションと実践可能です会員数300えると分業必要ですし指導部必要でしょうその非営利団体登録もして指導部選出して活動していくのがいいでしょう

 

のところ<舞踊靴>活動(1)2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沿海州キャンペーン(2)2定期訪問団構成程度にとどまっているのでのような単純体制でもうまくりしていけるといますそれまでは今回実務訪問のようなことがよくわれるといます

 

 

たちのスローガンはにまた一緒です実務訪問定期訪問そして舞踊靴沿海州キャンペーンをじて在外民族学校後援効果的になされるだけでなく<舞踊靴>姉妹団体疎通協力活発になることをっていま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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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신> 회원들이 일본 방문을 마치고 모두 돌아왔습니다. 짧게는 23, 길게는 2주일 동안 간사이 지역을 방문했던 것인데, 참가자는 모두 6명이었습니다.

 

<1강릉포럼>의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께서 513-15, <화강문화재단>에서 이홍범 선생과 현홍진씨가 512-17, <무용신> 회원으로는 제가 510-23, 오사카와 효고현의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실무 방문입니다. <무용신>정기 방문과 구별하기 위한 이름입니다. <무용신>은 지난 127-30일 첫 번째 일본 방문단을 꾸린 바 있었습니다. 30명의 회원이 (1) 오사카 조선학교 개교70주년 기념공연을 참관했고, (2)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참배했고, (3) 타마세 만푸쿠지에서 음악회도 열었습니다. 2차 정기 방문은 10월초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공통의 목적으로 같은 일정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임무를 위해 서로 다른 일정과 동선으로 활동했습니다.

 

 

물론 6명이 함께한 행사도 있었습니다. 일본인 단체들이 주최한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포함>을 위한 가두서명 집회와 타마세 참배묘역에 무궁화를 심는 행사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밖에는 각자 할 일이 달랐습니다. 강릉-다카라즈카, 강원도-효고현의 교류와 협력 방안을 모색 중인 <1강릉포럼>은 이번 방문을 통해 그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김중남, 강승호, 조은혜 선생은 하시모토 나루토시 효고 현의원과 키타노 사토코 다카라즈카 시의원과 면담을 갖고 공통 관심사와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화강문화재단>은 오는 7월초 대학생들의 일본 방문 프로그램을 기획 중입니다. 20명 내외의 대학생들이 약 일주일 동안 일본의 규슈와 간사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기간에 대학생들이 방문할 장소와 참가할 행사들을 답사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홍범 상임이사와 현홍진씨께서 이번 방일에 동행하신 것이지요.

 

한편, 제 일은 네 가지였습니다. (1) <무용신> 7차 캠페인으로 마련된 무용신을 무용부에 전달하고, (2) 2차 방문단의 일정과 동선도 미리 살펴야 했습니다. (3) <청구문고 연구회>의 월례모임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밖에도 짬짬이 (4) 주요 지역 도서관과 기록보관소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에 대한 자료도 조사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 실무 방문단에 참가한 여섯 명은 각기 다른 단체에 속하지만, <무용신> 후원회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입니다. 무용신 캠페인에 참여하면 누구나 <무용신> 후원자이기기 때문이지요. <무용신>은 그 자체가 잘 짜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를 후원하기 위해 모인 개인과 단체들의 느슨한 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캠페인이 진행되거나 방문단 활동을 할 때는 <무용신>도 체계적으로 활동해야겠지만, 평소에는 각 회원이 속한 단체들과 우호와 협력을 다지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용신>, 단톡방을 중심으로, 우리학교 지원에 관한 일들을 공지하고, 토론하고, 계획하고, 실행하고, 보고합니다. 회원 수가 150명 남짓이기 때문에 이 같은 소통과 실천이 가능합니다. 회원 수가 3백 명이 넘으면 분업도 필요하고 지도부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때는 비영리단체 등록도 하고, 지도부도 선출해서 활동해 나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용신>의 활동이 (1) 2회의 무용신 캠페인과 연해주 캠페인, (2) 12회의 정기 방문단 구성 정도에 머물고 있으므로, 지금 같은 단순한 체제로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이번 실무방문과 같은 일이 자주 진행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슬로건은 따로 또 같이입니다. 실무 방문과 정기 방문, 그리고 무용신과 연해주 캠페인을 통해 해외 민족학교 후원이 효과적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무용신>과 자매단체들의 소통과 협력도 활발해 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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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チームアイ>会員3韓国(統営羅州江陵ソウル)訪問してから3韓国<舞踊靴>会員30日本(大阪宝塚)訪問してから1月半ちましたこの2つの訪問じてくの事実らされ感動共有されました

 

また相互訪問じてよりくのことがまりました日本では<神戸青丘文庫>映像会<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のドキュメンタリー(鄭世和制作)上映され韓国でも写真映像映像アルバムが制作されており書画報告書などが用意されています

 

韓国日本制作されるこれらの作品これから韓日市民交流協力する大切資料になると期待しながら時間財政そして才能次第一生懸命準備しています

 

 

ところで最近韓日政府っているかなことをながら両国市民共有したいことがあってこのきますそれは市民国家そして市民関係についてのえです

 

<舞踊靴>韓国市民まりで<チームアイ>日本市民団体ですこのつの市民団体協力じて在日朝鮮学校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いろいろなことをしてきましたつまりたちの仕事市民活動であり政府立場方向なることがいのです

 

市民政府立場市民がもっと重要です市民国家主権者であり政府上官だからです国家/政府しい方向市民団体はこれを支援することができった政策展開する批判打倒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それがまさに民主主義原則であり共和国性格です韓国日本はどちらも民主共和国標榜していますのでこうした原則られられるべきだとじていますそのについてはもが同意でき疑問余地はないでしょう

 

 

このでもっと強調したいのは韓日両国市民関係です韓国日本市民葛藤して対立するのではなく交流して協力でき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韓日歴史する日本韓国政府歪曲りをすのは市民任務ですがそれは両国市民認識共有交流協力実現してこそ可能だといますこれまでそのような目標達成されなかったとすればそれは市民政府をまともに牽制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政府非難することはできますが結局市民責任だということです

 

 

韓国市民には一部日本市民する敵対感もいれば日本市民にも嫌韓感情形成されているのも事実ですしかしそれは政府政策貫徹のために助長維持することであっても市民堅持する立場ではないといます

 

日本市民嫌韓感情在特会活動韓国市民反日感情はその範囲強度々ですがそれにして過剰反応する必要はないといます否定的よりは肯定的焦点わせたがはるかにいです

 

それで日本市民共感できることをして好意感謝そのようなことがおいにくよう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 「在日朝鮮学校支援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としてげられるのもそのためです

 

 

くおしましたがらせば市民事案によって政府政策賛成することも反対することもできますが市民では交流協力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どんなでも市民関心葛藤戦争ではなく平和繁栄だからです

 

これにして韓国日本市民共感理解くことができれば市民政府される主客転倒す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市民いことがくことがあります

 

市民韓日両国政府批判することができはそうすべきですしかし政府市民区別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市民同士対立葛藤ではなく交流協力堅持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してこそ過去ちをさず平和繁栄むことができるといます(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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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팀아이> 회원 세 분이 한국(통영, 나주, 강릉, 서울)을 방문하신지 세 달이 지났고, 한국의 <무용신>회원 삼십 분이 일본(오사카, 다카라즈카)을 방문한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이 두 방문을 통해서 많은 사실이 알려졌고, 깊은 감동도 공유되었습니다.

 

또 상호방문을 통해 더 많은 일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베 청구문고>의 영상회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다큐멘터리(정세화 제작)가 상영되었고, 한국에서도 사진과 영상으로 영상 앨범이 제작되고 있고, 시와 서화와 보고서 등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제작되는 이 작품들은 앞으로 한일 시민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간과 재정, 그리고 재주가 닿는 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한일 양국 정부가 벌이는 멍청한 짓을 보면서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시민과 국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무용신>은 한국의 시민모임이고 <팀아이>도 일본의 시민단체입니다. 이 두 시민단체는 협력을 통해 재일 조선학교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관련된 일을 해 왔습니다. , 우리의 일은 시민 활동이고, 국가나 정부의 입장이나 방향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시민과 정부의 입장이 다를 때는 시민이 더 중요합니다. 시민이 국가의 주권자이고 정부의 상사이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부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시민단체는 이를 지원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원칙이고 공화국의 성격입니다. 당연한 말이지요. 한국과 일본은 둘 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므로 이러한 원칙이 지켜질 수 있고,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일 양국 시민의 관계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시민들은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 아니라,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일 과거사에 대한 일본과 한국 정부의 왜곡과 오류를 바로잡는 것은 시민의 임무이지만, 그것은 양국 시민들이 인식을 공유하고 교류와 협력을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시민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부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시민 책임이라는 말이죠.

 

 

한국 시민 중에서는 일부 일본 시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분들도 있고, 일본 시민들 사이에도 혐한 감정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가 정책 관철을 위해 조장하고 유지하는 것일 수는 있어도, 시민들이 견지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민의 혐한 감정이나 재특회 활동과 한국 시민의 반일감정은 그 범위와 강도가 다양하지만, 그에 대해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일본 시민들의 좋은 점과 공감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호의와 감사를 드리고, 그런 일들이 상호간에 계속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일 조선학교> 지원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이 좋은 예로 꼽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길게 말씀드렸지만, 짧게 줄이면, 시민들은 사안에 따라 정부 정책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교류와 협력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든 시민의 관심은 갈등과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번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일본 시민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시민이 정부에게 휘둘리는 주객전도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 좋은 일들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한일 양국 정부를 비판할 수 있고, 지금은 그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정부와 시민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민들끼리는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교류와 협력이 견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평화와 번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3/3/8,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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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코를 실마리로 하여 살펴 본

조정희 (최승희 연구가, 2023210, 낙성대 살롱 발표문)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1939131일 파리 최대 극장 <살플레옐>24백의 객석은 거의 만석이었다. 관객석에는 화가 살바토레 달리와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파렐리도 앉아 있었다. 파리의 비평가들은 10여개의 신문에 공연평을 실었는데, 대부분이 호평이었다. 이 소식은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져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모두 자랑스러워했다.

 

프랑스의 다른 도시에서도 공연 요청이 밀려들어서, (2/26)과 마르세이유(3/1), 비아리츠(9/14)의 공연이 예약되었다. 프랑스만이 아니라 벨기에와 네덜란드,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서도 봄 시즌 공연이 기획되었고, 가을 시즌에는 북유럽과 동유럽 순회공연도 계획이 잡히기 시작했다. 유럽 첫 공연의 성공은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살 플레옐>에서 성공한 데에 힘입어 최승희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 순회 두 번째 공연을 준비했다. 유럽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다. 다음 공연은 일주일 후인 26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였다. 공연장은 브뤼셀 최대 극장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 Beaux Art)>였다. 1929년에 완공된 <팔레 드 보자르>의 주공연장 <앙리 르뵈프 홀(Salle Henry Le Bœuf)>은 수용인원 2,200명의 대형극장이었다. 수용인원 2,400명이었던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 못지않았다.

 

어째서 브뤼셀이 두 번째 공연지로 선택되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아마도 흥행사 <국제 예술 기구>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흥행사는 유럽 최대 흥행사였고, 아마도 유럽 순회공연을 위해 관행으로 정해진 일정이었을 수 있다. 1930년대나 지금이나 브뤼셀은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이자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화요일(1/31)<살 플레옐>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주말 이전에 벨기에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26, 월요일 저녁에 브뤼셀 공연이 잡혔기 때문이다. 브뤼셀은 파리 북동쪽 약 3백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로 벨기에의 수도이다.

 

최승희 일행은 아마도 기차로 이동했을 것이다. 요즘 파리 북역에서 브뤼셀 중앙역까지 고속철도 탈리스(Thalys)로 약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자동차나 고속버스를 타더라도 3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다. 1930년대의 기차들도 최고속도가 시속 160킬로미터였다고 하므로, 대략 2시간 정도면 브뤼셀에 도착했을 것이다.

 

브뤼셀 공연 하루 전인 25일 최승희는 벨기에 제2의 도시 안트워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벨기에의 겐트 대학에 유학 중이던 고고학자 김재원이 후일 <조선일보(1939314)>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최씨가 25일 오후 이곳 안트워프시에 왔을 때도 이 시내 세 신문사의 기자가 인터뷰를를 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한편 193926일자 브뤼셀판 <르 마탱>는 최승희는 안트워프에 간 것은 단지 언론 인터뷰 때문이 아님이었음을 보여준다. 최승희는 토요일(2/5) 저녁 안트워프에 거주하던 일본인 친구 무용가를 방문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번 <최승희 트레일> 취재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기사가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는 내가 전혀 몰랐던 일본인 무용가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8)의 친구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브뤼셀 공연을 앞둔 최승희를 초청해 리셉션을 열어 주었던 것일까?

 

우선 이 기사의 원문과 번역문은 다음과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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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Matin> 1939년 2월6일, 월요일, 6면

한국 무용가 최승희 인터뷰

후미꼬 타케바야시(Foumiko Takebayashi)의 일본 무용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미야타 부인(Mme Miyata)이 되고 난후 무용을 그만 두었고, 적어도 무대에서의 공연은 하지 않고 있다.

그녀(미야타 부인)의 집 내부는 현대적이지 않다. <일본 이야기>의 저자로서 이 무용가는 순수한 동양 전통을 담은 세련된 예의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 저는 지금 내 친구 최승희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벨기에에 옵니다. 최승희씨는 월요일 저녁에 팔레 드 보자르(Palais des Beaux-Arts)에서 무용발표회를 합니다.

- 그렇습니다. 그녀가 왜....

경보기 울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최승희와 그녀의 남편이다.

최승희는 그녀의 일본인 친구보다 키가 더 크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영락없는 한국 사람이다. 부드럽지만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눈을 가진 그녀는 마치 먼 여행, 예를 들면 몽골 여행에서 막 도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우가죽 코트와 모자, 벨벳 치마를 입었다. 벨벳과 금색 장식을 한 보디스 치마는 동양적인 특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손이 곱다. 매우 훌륭하다. 가느다란 손가락들과 피처럼 붉은색으로 굽어진 손톱은 부처의 춤에서 손목을 사용하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 (그렇다. 최승희씨가 영어를 할 줄 안다.) 불교는 제 작품 해석의 일부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고대 민속 무용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기교적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마침내 저는 궁전 무용의 한국적인 주제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음악은요?

- 제 무용의 반주에는 레코드판을 씁니다. 조선의 왕궁 음악가들이 취입한 음악들이지요. 거기에는 약 50여 가지의 악기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는 고토와 거문고, 피리 등이 포함되지요. 레코드 말고도 두 명의 음악가들이 저와 함께 와서 징과 타악기를 연주할 것입니다.

-무용 예술은 한국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그것을 ‘재창조’해 내었습니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미야키 부인의 말이다.)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무용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토쿄에 있는 저명한 이시이 무용학교에서 최승희는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이 보다시피 최승희씨는 몸과 영혼을 무용 예술에 헌신한 것이지요. 그런 열정을 가졌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파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압니다. 의상은 어떻습니까?

-각각의 작품들에 맞도록 최승희씨가 직접 제작한 것들입니다. 약간 고전적이면서도 절반 정도는 미래주의적인 냄새가 나도록 만들었어요... 무용은...

그때 최승희가 웃으면서 나무 상자에 담아서 제공된 ‘사케’를 집어들기 위해 그녀의 부드러운 손목을 뻗었다.

전축 레코드판의 표지에는 “사케와 사랑”이라고 씌여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은 이 우아한 분위기가 일본식인지 한국식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다.

소파에는 일본식 가운이 걸쳐져 있었는데 금색으로 새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수집가들이 탐낼 만한 경이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다.

사케는 논의 들판처럼 달콤하다. (Ra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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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야시 후미코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이어지는 취재에서 새로운 자료가 자꾸 나오는 바람에 곧 잊혀졌다. 그러나 모나코 취재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모나코 <루이 노타리 도서관(la Bibliothèque Louis Notari)>에서는 최승희 관련 기사를 한 건도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최승희의 모나코 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일본인무용등의 키워드를 사용해 기사를 다시 검색하자 192618일자 니스판 <르 쁘띠 주날>에서 다음과 같은 단신 기사가 발견됐다.

 

“(제목) 일본 여자 무용수의 출연 거부에 감독이 얼굴에 권총을 발사. (니스, 1월7일) 몬테카를로의 한 댄스홀에서 공연 중이던 일본 무용단의 감독이 여자단원의 얼굴에 권총을 쏘았다. 그 여자 무용수가 출연횟수 채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격자는 체포됐고, 피해자의 얼굴 부상은 심각하지 않다.”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무용단장은 왜 권총을 가지고 다녔을까? 무용단원이 어째서 출연을 거부했을까? 출연거부가 총부림을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이었을까? 가해자가 체포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얼굴에 총상을 입었는데도 용태가 심각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이 기사에는 몬테카를로라는 도시 이름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이름이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댄스홀의 이름도 없었고,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한 문단에 불과한 단신이지만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당시 파리의 신문들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여겼던 모양이다. 후속 기사들이 나왔다. 19일자 <르 주날>110일자 <르에코 드알제(L'Echo d'Alger)>의 기사가 그것이다. <르에코 드알제>일본 언론인의 모험이라는 평범한 제목으로 4면에 배치했지만, <르 주날>일본 여무용가의 소설 같은 이야기라는 다소 극적인 제목으로 1면에 보도했다.

 

 

이 두 기사는 똑같이 ‘18일 니스(Nice)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아 같은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 쓴 것으로 보였다. 내용도 대동소이하다. 두 신문은 이 총격 사건의 팩트(事實)와 함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을 밝혔다.

 

“(1926년) 1월4일 목요일 밤, 일본인 무용가 타케바야시는 옥스퍼드 호텔을 나서던 중, 같은 국적의 무용가가 쏜 권총에 피격되었다. 총탄은 그녀의 입에 맞았다. ... 범인 무용가 카와무라(Kawamura)는 도주했으나, 타케바야시 여사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고 난 후에, 체포되었다. 피해자의 부상은 심각하지는 않다.” 기사는 범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없었지만 피해자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자그마한 무용가는 3주전 (파리의) <페미나 극장(Théâtre Femina)>에서 공연한 바 있다.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한 그는 도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와 웨이트리스, 무용가 등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 있다. 기자 시절에는 사회적 의문점들을 파헤쳐 선정적으로 보도하곤 했다.”

 

<페미나 극장> 공연은 파리 일간지를 통해 확인되었다. 19251219일에 열렸던 공연이었다. 하지만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무용가 코모리 토시(Komori Toshi)의 공연에 타케바야시가 찬조 출연한 것이다. 이 공연의 광고문과 안내문에는 타케바야시 후미코가 일본 무용가로 소개되었으나, 사실 그가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거나 전공한 적은 없었다.

 

이어서 기사는 그녀가 5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를 소재로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Le voyage d'un bébé japonais en Europe)>이라는 책을 썼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일본어로 저술되었지만 후일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밖에도 다케바야시 후미코는 1933<일본 이야기(Contes japonais racontés)>라는 단행본을 출판한 바 있다.

 

 

뒤이어 두 신문 기사는 (1923) 일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일어나자 그녀는 중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정치 요원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중국에서 일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말로 들렸다. 그랬다면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일본판 마타 하리였던 셈이다.

 

또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유곽의 하녀와 식당의 웨이트리스로도 일한 바 있다고 서술됐다. 기사에는 요시와라(Yoshiwara)의 하녀로 일했다고 했다. 요시와라(吉原)17세기 이래 에도(江戸), 즉 오늘날의 도쿄에서 영업하던 정부 공인 유곽(遊廓), 즉 집창촌이다. 후미코는 잡지기자 시절인 1915년 이곳에 하녀로 잠입해 취재한 후 르뽀 기사를 쓴 바 있었다.

 

후미코가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은 자신의 식당에서였다.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과 결혼한 후 프랑스로 건너간 후미코는 192411월 파리의 케플러가 8번지(8 rue Kepler)일본식당 <고게츠(湖月)>를 개업했었다. 런던에 본점을 두고 있는 <고게츠>의 파리 지점이었다.

 

후미코가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정식 무용 교육을 받은 바 없었던 후미코는 기억과 눈썰미로 일본 춤을 추면서 식당을 홍보했다. 식당보다 춤이 호평받자 후미코는 무용가를 자처했고 급기야 192512월에는 샹젤리제 거리의 <페미나 극장>에서 정식 무용 공연에 찬조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르 주날><르에코 드알제>는 총격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몇 가지 제시했으나 의문점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다. 우선 기사에서 몬테카를로라는 지명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기사만 보면 이 사건이 니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위키피디어 백과사전은 이 사건의 발생지를 니스로 명시했다.

 

사건 발생장소도 한 댄스홀에서 ‘<옥스퍼드 호텔>의 현관 계단으로 바뀌었는데 몬테카를로에는 <옥스포드 호텔>의 기록이 없다. 같은 이름의 호텔이 오늘날까지 영업 중인 도시는 칸느뿐이다. 물론 1920년대에 몬테카를로나 니스에도 <옥스포드 호텔>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지난 90년 동안 폐업했거나 상호를 변경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범인 카와무라였다. 위키 백과사전은 범인이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라고 서술했지만, 그는 무용가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더구나 범인이 체포되기 전에 피해자의 남편에게 보상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을 안은 채, 필자는 유럽 취재를 마치고 귀국한 후, 이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일본 자료를 찾아보았다. 짐작대로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아사히신문의 특파원이 파리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나코 총격 사건은 일본에도 자세히 전해졌다.

 

필자가 접한 자료 중에서는 잡지 <후후세이카츠(夫婦生活)> 19503월호 기사가 이 사건을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기사 제목은 모나코의 요녀 다케바야시 무소안 부인(モナコの妖姫 武林夢想庵夫人)”이었다.

 

사건 발생 후 25년이나 지난 후에 기억과 회상으로 작성된 기사지만,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杉原啓之介)는 사건 당사자들과도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소문과 오류를 걸러내고 사실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이 기고문은 프랑스 신문 기사들이 남겨놓은 공백을 메꾸기에는 충분했다.

 

우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총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 프랑스의 니스가 아니라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라고 못 박았. 기사 제목부터 모나코의 요희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이름도 카와무라 이즈미(川村泉)가 아니라 카와무라 소레가시(川村某)라고 서술했다. (위키 백과사전이즈미()’는 익명을 가리키는 소레가시()’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이 카와무라는 런던의 일본 식당 <고게츠(湖月)>의 경영자였고 1925년의 파리 박람회에서 일본 요리 부문을 담당했다. 파리 박람회에서 후미코를 만난 카와무라는 후미코의 미색(美色)에 반해 <고게츠>의 파리 지점을 내자고 제안했고. 카와무라의 재력(財力)에 반한 후미코는 이를 수락했다.

 

불륜을 위해 급조된 <고게츠> 식당이 제대로 경영되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이내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식당의 경영난과 후미코의 낭비벽 때문이었다. 후미코와 카와무라의 불륜은 남편 무소안의 면전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엽기적이었다.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후미코가 무소안과 결혼한 것은 그를 사랑했거나 그의 문학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파리로 오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192512월 프랑스 공연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 코모리 토시(小森敏, Toshi Komori) 때문에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한층 복잡해졌다. 코모리 토시의 <페미나 극장> 공연에 후미코가 찬조 출연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261월 코모리가 남부 프랑스로 공연 여행을 떠나자 후미코도 이에 동행했다. 후미코로서는 공연을 빙자한 애정 행각이었던 셈이다.

 

이 무렵 식당 경영과 돈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파리를 떠나면서 후미코는 <고게츠>식당의 채권자들에게 부도 수표를 발행했다. 화가 난 카와무라는 후미코를 찾으려 몬테카를로 따라갔고, 그를 찾은 후 권총으로 쏘아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총격 사건은 최초의 보도처럼 공연 계약이나 출연 횟수때문이 아니라 질투와 돈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후미코의 총격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총알이 오른쪽 뺨으로 들어가서 구강을 지나 왼쪽 뺨으로 관통해 나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빨이나 혀를 포함해 구강 안팎에 다른 상처가 전혀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치료를 끝낸 후에는 후미코의 뺨에 보조개 같은 자국을 제외하고는 흉터가 없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세계에서 미용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치료를 받았던 덕분일까?”라고 언급했었다. 그는 또 의문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게이오 근처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후미코 부인의 얼굴을 보러가도 좋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고자 스기하라 히로유키는 범인 카와무라가 무소안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공한 것은 선처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무소안은 파리에서도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나 일본으로부터 원고료를 제때에 전달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카와무라가 제공한 보상금은 무소안의 경제난을 크게 완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한편 카와무라는 여러 증인을 동원해 살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의 질투에 의한 범행이라는 점을 인정받았다고 했다. 파리에서는 카와무라의 친구이자 신문기자인 르 블랑제(LeBoulanger)가 변호사를 물색하는 등 그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상 참작과 친구의 도움으로 카와무라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으나 3개월 만에 출옥했다.

 

한편 후미코도 총격 상처를 치료받고 파리로 귀환한 직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부도수표를 발행한 경제사범으로 수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후미코는 이내 방면되었고 일본 교민 사회뿐 아니라 파리 전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의 몬테카를로 총격 사건은 프랑스와 일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이는 후미코의 자유분방한 삶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는 요사스런 여인(妖姬)’을 자처했고 그것을 당당하게 내세웠다. 그는 욕망에 충실했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성적 매력을 십분 활용했다. 그의 자유분방은 당대의 상식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으므로 오히려 경이의 대상이었다.

 

타케바야시 후미코는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역량 있는 기자이자 파리 무대에서 공연한 무용가였고, 아동과 여성 의류업에 뛰어든 사업가이자 여러 저서를 출판한 작가였다. 이같이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그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후미코의 재능을 일별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을 세 시기로 나눠보는 것이 좋다. 그는 평생을 세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의 출생 시 이름은 나카히라 후미꼬(中平文子)였다. 시코쿠의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그가 교토(京都)의 제일고등여학교(第一高女)를 졸업할 때까지의 기록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제일고녀를 졸업한 직후부터 후미코의 자유분방함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당시 교토대학교 의대생과 사랑의 도피를 계획했으나 실천에 옮기기 전에 붙잡혀 저지됐다. 집안의 강권으로 18세에 중매결혼을 했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첫 번째 결혼이었다. 첫 결혼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바꾸지 않았다. 이 결혼은 약 6년간 지속되었고 그동안 3명의 자녀를 낳았다.

 

미인인데다 머리도 좋다고 자부한 후미코는 24세에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품었다.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세 자녀를 버리고 남편과 이혼했다. 배우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널리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이 분야에서 그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후미코는 잡지사에서 기자 경력을 시작했는데, 특히 잠입 취재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1913년에는 카나가와겐(神奈川県) 후지사와시(藤沢市)의 쿠게누마(鵠沼) 소재 불교 산사 지쿄안(慈敎庵)에 잠입해 취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 사찰에 수행 중이던 미남 청년에 반해 버려 취재를 내버린 채 그를 유혹해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연하의 남편이 질투가 심한 것에 식상한 후미코는 중국 상하이로 도망가 버렸다. 후미코는 이 두 번째 남편의 성도 따르지 않았다.

 

상하이에서도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현지 언론사 사장과 정치가들에 대한 폭로기사를 잇달아 터뜨려 유명인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1916년부터 정우회의 기관지 <쥬오신분(中央新聞, 1891-1940, 도쿄)>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후미코는 <쥬오신분>에서도 잠입 취재를 계속해 르뽀기사 <오메미에 니츠기(目見得日記)>를 연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연재 르뽀 기사는 1916년 말 <여성기자의 잠입취재기(婦人記者 化み お目見得廻)>로 출판됐고, 이 책은 첫 두 달 동안 17판이 인쇄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잠입 취재기>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마지막 장()에 서술된 <요시와라의 꽃(新吉原)>이었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후미코는 요시와라 유곽에 하녀로 변장해 잠입했다. 이 취재기에서 후미코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요시와라의 어린 창녀들의 생활을 자세히 서술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화려한 모습과 외롭고 쓸쓸한 숨겨진 모습, 그리고 그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글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밖에도 그가 나카히로 후미코의 이름으로 출판한 저서로는 <접대부 이야기(やとな物語)><여자인 주제에(のくせに)> 등이 있다. 이 저서들은 당대 화제작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본 여성 문학과 페미니즘의 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인정된다.

 

1920쿠게누마로 돌아간 후미코는 소설가 나이토 치요코(内藤千代子, 1893-1925)의 소개로 다다이스트 작가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을 만났다. 무소안은 후미코에게 반했다. 후미코는 무소안이 프랑스에 갈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위장결혼을 결심했다. 이는 후미코의 세 번째 결혼이었는데, 이때 후미코는 비로소 자신의 성을 타케바야시로 바꿨다.

 

타케바야시 시절에 후미코는 가장 화려한 남성 편력을 보였다. 앞글에서 본 것처럼 무소안과 살면서도 식당 경영자 카와무라와 무용가 코모리 토시와 동시에 불륜을 자행했다. 후미코는 친구에게 무소안에 대한 성적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묵인하면서 저술 작업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무소안은 1925년 잡지 <카이조(改造)><코쿠의 비애(Cocuのなげき)>라는 소설을 발표했다. 아내가 옆방에서 벌이는 불륜 행각을 들어야 하는 남편의 비통한 심정을 묘사한 작품이다.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무소안은 후미코의 남성 편력을 제지하지 않았다. 훗날 후미코가 미야타 코우조우와 결혼하겠다며 이혼해 줄 것을 요구했을 때는 거절했다.

 

이 시기에도 후미코는 <일본 소녀의 유럽 여행><일본 이야기> 등의 저서를 출판하고 이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페미나 극장>에서 무용 공연을 하고, 파리에서 일본 식당을 경영하거나, 시세이도사의 아동복과 모자 제조업에 뛰어드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후미코의 남성편력은 네 번째 남편 미야타 코우조우(宮田耕三, 1895-1984)를 만나면서 끝났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거주하면서 무역업을 하던 코우조우를 만난 것은 후미코가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결혼하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꾸미다가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디오피아 황태자와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했다가 미야타 코우조우를 만난 것이었다.

 

미야타의 재력에 혹한 후미코는 이내 그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후미코보다 여섯살 연하였던 미야타는 후미코가 타케바야시 무소안과 이혼할 것을 전제로 결혼을 수락했는데, 이것이 세간에는 계약 결혼으로 알려졌다. 후미코는 마침내 1934년 타케바야시 무소안의 이혼 허락을 받아내고 미야타와 완전히 결혼하게 되는데, 이것이 후미코의 네 번째 결혼이자 마지막 결혼이었고, 이때 후미코는 자신의 성을 미야타로 변경한다.

 

후미코는 1934년 이후의 미야타 시절에도 사업과 저술을 쉬지 않았다. 유태인 문제를 다룬 <게슈타포: 세기의 짐승과 싸운 유태인의 비화(ゲシュタポ : 世紀野獣った猶太人秘話)><풍뎅이(スカラベ)> <문신과 할례와 식인종의 나라(刺青割礼食人種)>, <73세의 청춘(73青春)>등의 저서와 자사전 <나의 백서: 행복한 요부의 고백>등이 바로 이시기의 저작들이다.

 

후미코가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재다능했던 여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남편 타케바야시 무소안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의 저작능력은 탁월했다. 그는 끊임없이 소설과 평론, 번역물을 집필해 내었다. 특히 양 눈을 실명한 1943년부터 1962년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기억력과 만년의 아내 하타 아사코(波多朝子)의 대필에 의지해 44권에 달하는 회원제 개인잡지 <무사우안 이야기(むさうあん物語)>을 집필했다.

 

사고와 행동의 자유분방함에 있어서 무소안도 후미코 못지않았다. 당대 대표적인 다다이스트였던 무소안은 친 여동생과 첫 번째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을 만큼(재확인 필요) 사회적 관습과 도덕, 윤리와 관행 등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소안의 친구들도 비슷한 부류였다. 그의 친구 쓰지 준(辻潤, 1884-1944)1909년부터 우에노 고등여학교(上野高等女学校)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2년에 제자 이토 노에(伊藤野枝, 1895-1923)와의 연애로 교직에서 사퇴한 후 평생 다른 직업이 없이 글을 쓰며 살았다.

 

쓰지 준과 이토 노에 부부는 1914년경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1985-1923)와 친분을 갖기 시작했으나, 1916년에는 이토 노에가 쓰지 준과 결별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결합했다. 이때부터 쓰지 준은 한 곳에 정착하기를 그만두고 평생 방랑하며 살았다.

 

이시이 바쿠는 쓰지 준의 평생 친구였다. 오페라 매니아였던 쓰지 준은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시작하기도 전, 1911년 데이코쿠극장(帝国劇場) 가극부와 1917년 아사쿠사 오페라(浅草オペラ, 1917-1923)에 출연하던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쓰지 준의 아내 이토 노에가 오스기 사카에에게 달아났을 때 어린 딸 마코토를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1932년 봄에 아예 집을 처분하고 재차 방랑길을 떠날 때에도 작은 고리짝 하나에 불과한 전 재산을 이시이 바쿠에게 맡겼다. 이렇듯 이시이 바쿠는 쓰지가 가장 소중한 것을 맡길 수 있는 상대였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아내 하리 야스코(堀保子, 1883-1924)와 애인 카미치카 이치코(神近市子, 1888-1981)와 함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토 노에의 합류로 4각 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 불편한 4각 관계는 <히카게 차야 사건(日蔭茶屋事件, 1916)>으로 끝났다. 카미치카 이치코가 카나가와켄(神奈川県) 미우라군(三浦郡) 하야마 마을(葉山村) 소재 히카게 차야(日蔭茶屋)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치코는 살인 미수죄로 기소되어 일심에서 징역4년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2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했다.

 

이 사건 이후에도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부부로서 활발하게 무정부주의 사회운동과 저작활동을 계속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인 91일 헌병대에 끌려가 구타당한 후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지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다른 친구들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고, 죽음도 편안한 편이 아니었다. 무소안은 1933년에 녹내장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외눈이 되고, 1943 년에는 왼쪽 눈마저 실명해 시각장애자로 여생을 살다가 196982세로 사망했다.

 

무소안의 친구 쓰지 준은 평생 방랑 생활로 일본 전역을 떠돌며 살다가 1944년 도쿄로 돌아와 다시 정착하려 했으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집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검시결과 그의 사인은 아사, 즉 굶어죽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쓰지 준의 친구 이시이 바쿠도 1928년부터 시력이 약화되어 상시적인 실명 위기를 겪었다. 이후 평생 실명 위기에 시달렸지만 다행히 죽는 날까지 시력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병인 만성 갑상선염으로 고생하던 중 19627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하지만 후미코만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과 화려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1934년 이후에는 미야타 코우조우와가 제공한 돈과 사랑에 힘입어 순탄한 만년을 보내다가 77세의 나이로 비교적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일설에는 수세미 건강법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건강 유지 비법이 주효했다는 설명도 있다.

 

후미꼬가 타케바야시에서 미야타로 변신한 것은 남편을 바꾼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황과 일본의 앞날을 바라보는 두 적대적 진영의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간 사건이었다. 타케바야시와 그의 친구들은 다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천황제를 폐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뒤바꾸려 했다. 그러나 미야타 코오조우는 전쟁 중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고 전후에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경제재건을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미야타 코우조우는 이차대전 직전에 일본 군부가 전함을 제작할 때 유럽의 고철을 사모아 일본에 공급했다. 이차대전 후에는 한국 전쟁을 이용해 일본의 경제 재건을 돕기 위해 유럽의 아마를 일본에 수입해 한국에 되파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미야타 코우조우는 후미코에게 많은 돈과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부었고 이를 통해 후미코의 마음과 생활을 안정시켜주었다.

 

후미코와 그의 친구들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면서 고뇌와 고통을 겪으면서도 후대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대항하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또 일반인들이 생각 없이 지켜오던 전통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행동을 글로 남겨 오늘날에도 그들의 노력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남겼다.

 

후미코와 친구들은 조선의 문인과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징검다리 역할을 한 사람 중에 고한용(高漢容, 1903-1983)이 있다. 고한용은 고한승의 다른 이름이다. 아동 운동을 할 때에는 고한승으로, 다다이스트로 자처할 때에는 고한용으로 자처했다. 자신의 니혼 대학 인맥과 자신이 심취했던 다다이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사상과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고한용은 19214월부터 니혼 대학 미학과에서 2년간 수학했으나 1923년의 관동 대지진으로 니혼 대학 캠퍼스가 크게 훼손된 데다가 조선인 학대가 시작되자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했다. 니혼 대학 재학 시절 고한용은 아키야마 기요시 등의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에 다녔던 마해송과 최승일 등의 한국인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특히 귀국 이후 고한용은 최승일과 같은 동네(경성 체부동)에 살았고, 연극운동과 방송극운동을 함께 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고한용은 1923년 다다이즘에 눈을 뜨고 <개벽> 9월호에 최초로 다다이즘을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다. 같은 해 고한용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으로 초대해 한국의 문인들에게 일본 다다이즘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불과 2년밖에 지속되지 못한채 사그러들었지만, 그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를 경성에 초대한 것은 조선의 근대 문인과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일본인으로서 한국 문학을 연구해 온 요시카와 나기(吉川 凪)는 그의 저서 <경성의 다다, 도쿄의 다다(2015)>에서 고한용의 다다이즘은 쓰지 준과 다카하시 신키치, 아키야마 기요시와 가네코 후미코 등의 일본인 다다이스트와 아나키스트들과 마해송과 임화, 최승일과 최승희 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서술했다.

 

<별건곤> 192611월호에는 최승일(崔承一, 1901-?)이 그해 8월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기가 실렸다. 아마도 3월말에 도쿄로 유학간 동생 최승희의 안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여행에서 최승일은 최승희가 참여한 이시이 바쿠 무용단의 카마쿠라 공연까지 동행한 바 있고,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 무용가)와 밤마다 깊숙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이 여행기에서 최승일은 지인 타케히사 유메지(竹久夢二, 1884-1934, 화가), 쿠메 마사오(久米正雄, 1891-1952, 소설가, 극작가, 하이쿠 시인)를 만났지만, 나카니스 이노스케(中西伊之助, 1887-1958, 작가, 노동운동가, 정치가)와 일본의 인기남아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를 만나고 오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서술했다.

 

이들을 자신의 우인(友人)이라고 하기에는 10세 이상의 연상들이지만, 그가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유학하던 시절, 당시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최승일이 쓰지 준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미 고한용의 주선으로 경성 체부동에서 쓰지 준을 만나 교분을 시작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만난 다케바야시 후미꼬(武林文子, 1888-1966)에서 시작하여, 그의 교분관계를 따라오다 보니까,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타케바야시 무소안(武林無想庵, 1880-1962)이 다다이스트 쓰지 준(辻潤, 1884-1944, 방랑문인, 다다이스트)과 그의 절친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와 연결되었고, 일본대학 유학시절 쓰지 준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의리를 알고 있었던 최승일은 안심하고 자신의 막내여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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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 오후 630, 서대문의 <연화>에서 [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의 마지막 모임이 열립니다. 이 모임에서는 방문기간 중의 각 행사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불편했거나 부족했던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다음 방문을 위한 제언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환영해 주신 일본 <팀아이> 선생님들과 조선학교, 타마세 마을과 만푸쿠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해서, 어젯밤 정세화 선생님과 무려 2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글로 전부 전해 드릴 수는 없지만 요지를 말씀드린다면,

 

(0) 일본에서는 이번 방문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하시고, 방문단을 고마워하신다고 합니다. 특히 <팀아이> 선생님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했지만 한국 분들이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일본의 준비와 대접은 실제로 특별했고, 최상이었습니다.

 

 

(1)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은 한 가지 이상씩 준비를 담당하면서 전원이 참여하셨고,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콘도 타쿠미 회장님과 정세화 선생님은 물론,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과 히다 유이치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예컨대, 우리 연주회가 만푸쿠지의 경내, 그것도 법당에서 열린 것은 만푸쿠지 역사 이래 처음이라고 합니다. 연주회 장소로 법당을 내어주신 스님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 타마세 마을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온 마을 주민이 힘을 합쳐 우리를 환영해 주셨습니다. 작은 마을이더라도 의견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 방문단을 환영하는 일에는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 협력하여 행사를 지원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4) 아마가사키 조선학교는 방문단에게 제한 없는 수업참관을 허용하셨습니다. 이것도 이 학교의 75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학교 시찰이나 수업 참관은 보통 교사나 학부모의 안내를 따르게 하고, 학생과 교사의 사진촬영은 자제를 당부하는 것이 관례인데, 우리 방문단에게는 자유로운 수업 참관과 제한 없는 사진/영상 촬영을 전면 허용하신 것입니다.

 

조선학교가 처한 내외의 어려움, 그동안 간간이 발생해온 불미스런 일들을 생각하면, 아마가사키 조선학교가 보여준 이런 조치는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5) 오사카 조선학교도 기념공연에서 우리 방문단에게 특별좌석을 제공하셨습니다. 초청된 오사카부/시의 각급 의원들에게도 일반 객석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우리 방문단에게는 로열박스를 제공했습니다. 건너편의 로열박스에는 오사카 정재계와 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 초청되었다고 합니다. 오사카 조선학교가 우리 방문단을 어떻게 배려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6) 우리가 머물렀던 화이브 호텔과 연회를 가졌던 두 식당에서도 정세화 선생님께 감사의 전화를 해 오셨다고 합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머물다 가시게 되어서 다행이고, 인연을 맺게 되어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언제 다시 오시더라도 환영이라는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일본 방문 직후에 강릉의 활동가들과는 전화통화로, 나주는 직접 방문해서 이번 방문의 의의와 성과를 설명드렸습니다. 아직 단언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 두 곳에서 각각 10명 내외의 회원들이 다음 번 방문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곧 2차 방문단을 구성하게 될 것 같고, 아마도 오사카 조선학교의 70주년 기념 마지막 행사인 514(일요일)의 동포초청 축제에 참가하게 될 듯합니다. 방문 기간을 512-15(34)로 잠정 결정하고 준비를 미리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2차 방문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무용신>과 북방 지역에서 활동해 오신 <대륙학교>에 더하여, 미주동포들이 많이 활동하시는 <AOK>도 참여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세 단체의 공동 주최로 하고, 돌아가면서 주관을 담당하시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된다면 다른 지역의 해외동포들도 재일동포의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릴 수 있고, 해외동포운동 시민단체들도 교류와 협력을 실질적으로 다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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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일 저는 3년 만에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되었고 한일간 무비자협정이 다시 가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반갑게 만났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함께 이룬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에 대한 걱정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다카라즈카시 외곽의 콘도 도미오 선생님 자택에서는 사모님과 자제분들이 정세화 선생과 저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방에 들어가니 모든 것이 생전에 쓰시던 그대로라고 하셨고, 침대 맡에 놓인 설합장 위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유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강릉시가 보낸 감사패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한 번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었고, 라인으로만 말씀을 나눴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막역한 선배이자 큰 형님처럼 느끼곤 했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장남이신 콘도 타쿠미씨가 아버님의 뒤를 이어 <팀아이>의 회장직을 수행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못다 하신 일을 아드님에게까지 넘기신 것은 지나친 책임감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거기에는 오래 지나서 증명될 깊은 뜻이 있으실 것입니다.

 

콘도 타쿠미씨는 부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남기신 유품 중에서 큰 박스에 가득 찬 연구 자료와 원고뭉치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제가 사용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콘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데스크탑 컴퓨터에도 수천 개의 파일이 남겨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는 이 자료들을 어찌할 것인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네에, 콘도 선생님의 이름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타계하시고, 감사패 전달이 이뤄진 뒤에도 다카라즈카 추도비를 둘러싼 많은 일들이 생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타마세 부녀회와 만푸쿠지에서는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참배묘를 유지할 뿐 아니라, 그곳을 무궁화와 진달래 동산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정세화 선생님의 노력으로 앞으로 인근 조선학교에서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연례 참배 장소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회원들이 많이 늘어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조선학교를 후원하는 일이 조금 더 빈번해 지고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묘에도 가서 참배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가족들보다 더 자주 찾아오시던 묘역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건립된 날에도 정홍영 선생님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20205월호 <무쿠게통신>에 쓰신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늘상 찾아왔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묘비의 글을 그날 발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묘비 옆에 새겨진 글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

 

 

정홍영 선생님은 마츠에로 가는 하쿠비선 열차 안에서 옆에 앉으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에게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정홍영 선생님을 고향 상주에 모시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숙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 남은 우리들이 계속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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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3ぶりに日本訪問しましたコロナ防疫緩和され韓日間のノービザ協定稼動したためです

 

鄭世和先生しくいにられないにも一緒げたことをしまし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宝塚朝鮮人追悼碑困難直面している朝鮮学校する心配一緒わしました

 

たちは近藤富男先生れました宝塚市郊外近藤富男先生自宅では奥様とおさんたちが鄭世和先生かく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部屋るとすべてが生前使っていたままだということでベッドサイドにかれたたんすの近藤富男先生遺骸かれ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には江陵市った感謝牌んでかれていました

 

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にお辞儀をしましたえてみると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でした写真だけでおいしてラインだけでおをしただけですそれでもまるでしい先輩であり長兄叔父のようにじたり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長男近藤卓海さんがおさんのいでチームあい会長職担当しているというきました自分わらせないことだからといって息子さんにまでったのは責任感すぎるのではないかとしばらくっていたのですが近藤富雄先生判断がいつもしいとじていますおそらくそこには間経って証明される意味があるでしょう

 

近藤卓海さんは父親近藤富男先生した遺品きなボックスにまれた研究資料原稿せてくれましたそしてこれらの資料使ってもい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近藤先生使っていたデスクトップパソコンにも数千個のファイルがされてい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

 

しかしそのそのではこれらの資料をどうするかえもわからずただはい近藤先生名前のためによく使いますえただけです

 

 

近藤富男先生他界され感謝牌伝達がなされた宝塚朝鮮人追悼碑くのことがこったときました

 

玉瀬婦人会滿福寺では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参拝墓維持するだけでなくそこをムクゲとツツジの計画てたそうです追悼碑てられたともよく似合うといます

 

 

鄭世和先生努力今後近隣朝鮮学校では宝塚朝鮮人追悼碑恒例参拝場所定期的訪問することにしたというおえてください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会員えて活気づいているというおきました朝鮮学校後援することがもう頻繁になり活発になるだろうという期待まるようになりました

 

 

鄭世和先生一緒父親鄭鴻永先生のおにもって参拝しました鄭世和先生近藤富男先生家族よりも頻繁れていた墓地だとえてく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追悼碑建立されたにも鄭鴻永先生ねてきたとおっしゃいました20205月号むくげ通信かれた文章近藤富男先生はいつもねてきましたが発見できなかった墓碑文章をその日発見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

 

墓碑まれた文字でてみました。 「統一いながらここに

 

 

鄭鴻永先生松江行きの伯備線列車った近藤富男先生統一されるまでは故郷にはかないわれたことがあるそうです

 

鄭鴻永先生故郷尚州えることが近藤富男先生宿願だ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そしてそれはったたちが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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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統営系図調査難航している緊迫した状況発生しました202111から近藤富男先生健康悪化めましたってき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のうちゆかりが確認されたのはまだ金炳順さん一人だけでしたしかし近藤富男先生をはじめ追悼碑建立されたそして100年以上無縁故慰霊祭ってきた々にえるいをしたかったのです

 

 

20211119日江陵市請願書提出しました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市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者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内容でした請願文にはこの追悼碑建立されるまで宝塚100年間あったことを簡略説明感謝牌贈呈対象8指名この々が感謝牌るにする理由明示しました

 

げた感謝牌対象者日本人6在日同胞2でしたこの々の経歴追悼碑建立寄与事項請願文まれていますが21ページ(証憑資料含)するためここにさず請願文全体をこの最後別途添付しましたただここにはその8名前だけをべることにします

 

鄭弘永1929-2000郷土歴史家)、近藤富男1950-2020教師市民活動家)、金礼坤キム·レゴン事業家)、堀内稔在日朝鮮人史研究家)、飛騨雄一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代表)、玉野誠三彫刻家)、足立泰教足立知教万福寺住職)。

 

 

この請願文江陵調査積極的協力してくれた洪眞善柳善起先生江陵市議会され市議会はこれを江陵市長送付しました異例いスピードでこの請願れられ請願内容確認作業着手されましたしかし当時新型コロナウイルス感染症状況非常深刻だったため江陵市公務員宝塚出張請願内容事実有無直接確認することがしかったです

 

江陵市庁でこの請願担当した実務者パク·ジョンシ課長·ジュンハ係長パク·インスン係長3でしたにパク·ジョンシ課長はこの請願調査難航するとこれを東京所在江原道本部送付江原道本部江陵市庁わって実態調査めることを要請しました

 

 

これに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東京から宝塚出張断行され関係者との懇談会じて請願内容事実であることを確認したこれを江原道江陵市庁報告しましたこの報告書けて江陵市庁やかに感謝牌贈呈感謝牌伝達もカン·ビョンジク江原道本部長においし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ヘ部長以後2宝塚訪問感謝牌伝達支障がないよう万全しました

 

 

ついに感謝牌伝達式2022415宝塚ホテルの宴会場われました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江陵市長わって8感謝牌したそうですはその出席できませんでしたが伝達式伝達される時間にオフィスにってその時間にしました

 

一方ではこのしい行事くからでも気持ちでしたがもう一方しみにしつぶされていました近藤富男先生がこの感謝牌伝達式出席できなかったからです近藤先生江陵市感謝牌伝達決定らせをきましたが伝達式までつことができず210くなりました

 

 

それでもいなら江陵市積極的協力近藤富男先生感謝牌製作して発送することにするなど最善くしましたが結局感謝牌ることはできずただ完成した感謝牌写真だけをされたときました

 

近藤富雄先生35年間努力べるとあまりにもさなおぎ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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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통영의 족보 조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2111월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분 중에서 연고가 확인된 것은 아직 김병순씨 한 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비롯해 추도비를 건립하신 분들, 그리고 1백년 이상 무연고 위령 제사를 드려온 분들에게 무언가 가시적인 보답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20211119일 강릉시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김병순씨의 고향 강릉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청원문에는 이 추도비가 건립되기까지 다카라즈카에서 1백 년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고, 감사패 증정 대상으로 8분을 지명하면서 이분들이 감사패를 받아 마땅한 이유를 명시했습니다.

 

제가 지목한 감사패 대상자는 일본인 여섯 분과 재일동포 두 분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경력과 추도비 건립 기여사항은 청원문에 포함되어 있으나 21(증빙자료 포함)에 달하기 때문에 여기에 옮기지 않고 청원문 전체를 이 글 끝에 별도로 첨부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 여덟 분의 이름만 나열하기로 하겠습니다.

 

정홍영(1929-2000, 향토역사가), 콘도 도미오(1950-2020, 교사, 시민활동가), 김례곤(사업가), 호리우치 미노루(재일조선인사 연구가), 히다 유이치(고베학생청년센터 대표), 타마노 세이조(조각가),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만푸쿠지 주지).

 

 

이 청원문은 강릉 조사에 적극 협조해 준 홍진선, 유선기 선생의 손으로 강릉 시의회에 전달되었고, 시의회는 이를 강릉시장에게 송부했습니다.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로 이 청원은 받아들여졌고, 청원내용의 확인 작업이 착수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코로나 상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강릉시의 공무원에 다카라즈카에 출장하여 청원 내용의 사실여부를 직접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강릉시청에서 이 청원을 담당한 실무자는 박종시 과장, 이준하 계장, 박인순 계장 등 세 분이었습니다. 특히 박종시 과장은 이 청원의 조사가 난항에 처하자 이를 도쿄 소재 전국시도지사협의회의 강원도본부에 송부해, 강원도 본부가 강릉시청을 대신해 실사를 진행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강원도 본부의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이 도쿄에서 다카라즈카로 출장을 단행하셨고, 관계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청원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한 후, 이를 강원도와 강릉시청에 보고하셨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강릉시청은 신속하게 감사패 증정을 결정하고, 감사패의 전달도 강병직 강원도본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과 문미혜 부장님은 이후 두 차례나 다카라즈카를 방문하여 감사패 전달에 차질이 없게 만전을 기하셨습니다.

 

 

마침내 감사패 전달식이 2022415일 다카라즈카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습니다. 강병직 본부장님이 강릉시장을 대신해 여덟 분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전달식이 전달되는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그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제 마음 한편은 이 기쁜 행사를 멀리서나마 자축하는 마음이었지만 다른 한편은 슬픔에 밀리기도 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이 전달식에 참석하시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콘도 선생님은 강릉시의 감사패 전달 결정의 소식을 전해 듣기는 하셨지만, 전달식까지 기다리시지 못하고 210일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릉시의 적극적인 협조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감사패를 먼저 제작해 발송하기로 하는 등,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감사패를 손에 만져보시지는 못하셨고, 다만 완성된 감사패의 사진만 전달받으신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35년 노력에 비하면 너무도 약소한 답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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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戸水道工事犠牲者金炳順さんの故郷江原道江陵推定され南益三さんの故郷慶尚南道統営そして福知山線鉄道公社犠牲者尹吉文さん吳伊根さんの故郷慶尚南道固城推定されましたらなければならない段階突入しました

 

これは鄭鴻永-近藤富男先生先例ったものでもあります二人糸口つかるやいなや現地踏査したからですいがあるとすれば宝塚-玉瀬1時間距離でしたがソウル-高城/統営4-5時間距離江陵3時間もかかる距離です

 

また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同行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一人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々でくの々の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高城調査では高城郡庁歴史資料研究士キム·サンミン先生高城放送局社長韓昌植(ハン·チャンシク)先生けをました

 

 

江陵調査では出発するから民族問題研究所出身朴漢龍(パク·ハンヨン)先生諮問ることができ江陵到着してからも金性洙(キム·ソンス)記念事業会活動家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江陵原州大学国際通商学科姜承昊(カン·スンホ)先生けをけることができました

 

現地活動家たちのけをはしましたが100年前故郷れた々の縁故すことは容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一番簡単方法官庁住民登録戸籍調べることですが2011制定された個人情報保護法のため他人個人情報閲覧する方法がなくなりました

 

またこの々がいつ朝鮮れたのかかりませんでしたので公的記録閲覧できる場合でもどの時期記録るべきか特定できませんでしたえば高城ではジャーナリストの韓昌植先生けで高城面住民センターのデータベースを制限的検索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尹吉文吳伊根さんの名前てきませんでした

 

 

これはおそらく尹吉文さんと吳伊根さんが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以前時期家族全員日本移住したからでしょうそうしていたら今日行政電算網入力さえされなかったでしょう尹吉文さんは死亡当時192921でしたので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以前まれ父親尹在裕(ユン·ジェユ)さんが同居していたことから1910年以前家族全体日本移住していた可能性いです

 

公的記録閲覧不可能だったため私的記録るしかありませんそこで代案としてじたのが系図記録閲覧です韓国ではでも苗字別家門別系図発刊保存する慣行がありこれを管掌する宗親会活発活動しています

 

系図閲覧方法江陵奏効しました数回試行錯誤洪眞善柳善起姜承昊先生けで金炳順さんの本貫慶州金氏樹隱公派だったことがらかになり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支会長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先生支会員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で最近系図である慶州金氏樹隱公派世譜(2014年刊行された甲午譜)調べ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この系図21ページをえていますので100年前朝鮮った金炳順さんの記録つけるの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金子正先生努力により金炳順さんが(1)慶州金氏樹隱公派17世孫であり(2)金東秀(キム·ドンス)さんの三男長男であり(3)生没年代記録されないわりに日本居という記録ってい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系図によりますと金炳順さんは結婚していませんがにはなくとも4がいることも確認されていますしかし宗親会のあらゆる努力にもかかわらず親族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記録だけでも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だという十分確認されています

 

 

しかし固城統営では系図調査がまだ成功していません固城では坡平尹氏系図調べましたが尹吉文氏記録つけることができず呉伊根氏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南益三氏固城南氏だったと推定されますが本貫確認されていません

 

しかし近藤富男先生のようにめておらず系図調査進行中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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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수도공사의 희생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으로 추정되었고,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남 통영, 그리고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의 희생자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남 고성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제는 발로 뛰어야 하는 단계에 돌입했습니다.

 

이는 정홍영-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선례를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실마리가 발견되자마자 현지를 답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다카라즈카-타마세는 자동차로 1시간 거리였지만, 서울-고성/통영은 4-5시간 거리이고, 강릉도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입니다.

 

또 정홍영 선생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동행하실 수 있었지만 저는 혼자 다녀야 했습니다. 다행히 가는 곳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성 조사에서는 고성군청의 역사자료연구사 김상민 선생과 고성방송국의 사장 한창식 선생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강릉조사에서는 출발하기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출신 박한용 선생의 자문을 얻을 수 있었고, 강릉에 도착해서도 김성수기념사업회의 지역 활동가 홍진선, 유선기 선생과 강릉원주대학 국제통상학과의 강승호 선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 활동가들의 도움을 얻기는 했으나 1백 년 전에 고향을 떠난 분들의 연고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관청에서 주민등록이나 호적을 조사하는 것이지만, 2011년 제정된 <개인정보 보호법>으로 타인의 개인정보를 열람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또 이분들이 언제 조선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공적기록을 열람할 수 있는 경우에도 어느 시기의 기록을 보아야 하는지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고성에서는 언론인 한창식 선생의 도움으로 고성면 주민센터의 데이터베이스를 제한적으로나마 검색할 수 있었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윤길문씨와 오이근씨가 일제강점기 이전 시기에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의 행정전산망에 입력조차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윤길문씨는 사망당시(1929) 21세였으므로 일제강점 이전에 태어났고, 그의 부친 윤재유씨가 동거했던 점으로 보아, 1910년 이전에 가족 전체가 일본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적 기록 열람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적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강구한 것이 족보기록 열람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성씨별, 가문별로 족보를 발간하고 보존하는 관행이 있고, 이를 관장하는 종친회들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족보 열람의 방법은 강릉에서 주효했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홍진선, 유선기, 강승호 선생의 도움으로 김병순씨의 본관이 경주 김씨 수은공파였던 것을 밝혀낼 수 있었고, 경주 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지회장 김자정(金子正) 선생과 지원 김철욱(金喆旭) 선생의 도움으로 최근 족보인 <경주김씨 수은공파 세보(2014년 간행된 갑오보)>를 조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족보 책도 2권으로 1천쪽이 넘었기 때문에, 1백년 전에 조선을 떠난 김병순씨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자정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김병순씨가 (1) 경주김씨 수은공파의 17세손이며, (2) 김동수씨의 3남 중 장남이었고, (3) 생몰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대신 일본에 거주(居日本)”라는 기록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족보에 따르면 김병순씨는 결혼하지 않았으나, 그에게는 적어도 4명의 조카가 있다는 점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친회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친족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도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은 충분히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성과 통영에서는 족보 조사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고성에서는 파평 윤씨의 족보를 조사했지만 윤길문씨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했고, 오이근씨는 본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남익삼씨는 고성 남씨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본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님처럼 저도 포기하지 않았고, 족보 조사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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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知山線鉄道工事中死亡した尹吉文吳伊根さんの朝鮮内縁故地調査は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報道した4記事のおかげで比較的簡単把握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慶尚南道固城郡固城面がその々の故郷であるかを現地資料確認するだけです

 

しかし神戸水道工事中くなった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朝鮮内縁故地すのはもうしかったですこのたちがくなった西谷村村長発行した埋葬認許證本籍地記入するがありましたがその記録がそれほど正確ではなかったからです

 

埋葬認許証住所欄いている場合もあれば本籍地住所ではなく現住所のみ記入されている場合もありました朝鮮住所記録されていてもみにくかったり当時朝鮮にない住所記録されていたりしましたこれをることは暗号解読作業ているようでした

 

 

それでも簡単だったのは犠牲者名前明確記載されておりらの生年追跡可能だというでしたまず金炳順さんは生年月日1883519明記されていましたそして埋葬認許證発行日191483その午後2時以降埋葬するよう指示されていることから死亡日はその前日191482だった可能性いです工事中だった当時朝鮮人同僚死亡したからといって3日葬でも状況ではなかったはずだからです

 

南益三氏張長守氏埋葬認許証には生年月日記録されていませんが二人年齢がそれぞれ3727となっていますしたがって南益三氏はおよそ1877年生まれ張長守氏1887年生まれと推定できま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生年でもることは系図調べる非常有用資料になりました

 

3朝鮮縁故地調査簡単解決されたのは張長守さんでした現住所玉瀬村イズハリ1番地45とはっきり記入されていましたが朝鮮本籍地住所れていたからですそれで縁故地把握不可ることができました

 

 

金炳順さんの埋葬認許証れた朝鮮内本籍地住所朝鮮江原道江陵郡北一里大川洞でした近藤富男先生江陵郡江華郡んでいたので江華島調べた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れだけ埋葬認許證記録された書体みにくかったです

 

しかし北一里という地名江陵にあったという事実確認しながら金炳順さんの故郷江陵だったと確信しました191441断行された行政区域改編江陵郡北一里面北二里面そして南一里面わさって郡内面となりましたがすでにその日本った金炳順氏はそのような事実らなかったはずでそれで故郷住所北一里記入されていたのです

 

そして今後調査じて大川洞大倉里りであることがらかになりましたおそらく発音ていることからじた間違いだったのでしょうしたがって金炳順さんの本籍地住所今日江原道江陵市浦南洞あるいは校洞特定さ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

 

 

一方南益三さんの本籍地住所解読するのが一番難しかったです埋葬認許證れた本籍地住所をすぐえるままむと、「朝鮮忠清道春元郡延北面先三村ですしかし1915年当時忠清道はなく当時朝鮮行政区域名前をすべて調べても春元郡延北面または先三村という地名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はこのうち春元という名前先三という名前をキーワードに当時行政区域名前全部探してみました。 「春元面高城郡にあり春元面には先三村ではなく光三村がありましたおそらくているので勘違いしているようにえました

 

そのため、「春元面光三村推定される南益三氏本籍地住所現在慶尚南道統営市広道面である可能性非常いという結論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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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중에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조선내 연고지 조사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를 보도한 4개 신문 기사 덕분에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경남 고성군 고성면이 그 분들의 고향이 맞는지를 현지 자료로 확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조선내 연고지를 찾는 일은 조금 더 어려웠습니다. 이분들이 사망한 후에 니시타니 촌사무소에서 발행한 매장인허증에 본적지를 기입하는 난이 있기는 했지만, 그 기록이 그리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장인허증의 주소난이 비어있는 경우도 있었고, 본적지 주소가 아닌 현주소가 기입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더라도 읽기가 어렵거나 당시 조선에 없는 주소가 기록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걸 읽어내는 일은 마치 암호해독 작업과 유사한 듯 했습니다.

 

 

그래도 손쉬운 일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고 그들의 생년이 추적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우선 김병순(金炳順)씨는 생년월일이 1883519일로 명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장인허증 발행일이 191483일이었고, 그날 오후2시 이후에 매장하도록 지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일은 그 전날인 191482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공사중이었던 당시에 조선인 동료가 사망했다고 3일장이라도 치를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익삼(南益三)씨와 장장수(張長守)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나이가 각각 37세와 27세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익삼씨는 대략 1877년생, 장장수씨는 1887년생으로 추정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지만 생년이라도 아는 것은 족보를 조사할 때에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세 사람의 조선내 연고지 조사가 가장 손쉽게 해결된 것은 장장수씨였습니다. 그의 현주소는 타마세촌 이즈리하 1번지의 45”라고 분명히 기입되어 있었지만, 조선의 본적지 주소는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고지 파악 불가로 결정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조선내 본적지 주소는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이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강릉군(江陵郡)”강화군(江華郡)”으로 읽으셨기 때문에 강화도를 조사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만큼 매장인허증의 기록된 서체는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일리라는 지명이 강릉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저는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었을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191441일 단행된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릉군의 북일리면과 북2리면, 그리고 남1리면이 합쳐져서 군내면(郡內面)이 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김병순씨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고향 주소는 북일리()’으로 기입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추후 조사를 통해 대천동대창리의 잘못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마도 발음이 비슷해서 생긴 착오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김병순씨의 본적지 주소는 오늘날의 강릉시 포남도 혹은 교동으로 특정화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남익삼씨의 본적지 주소는 해독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그의 본적지 주소를 얼른 보이는대로 읽는다면 조선 충청도 춘원군 연북면 선삼촌입니다. 그러나 1915년 당시에도 충청도는 없었고, 당시의 조선 행정구역 이름을 모두 뒤져도 춘원군이나 연북면, 혹은 선삼촌이라는 지명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중 춘원이라는 이름과 선삼이라는 이름을 키워드로 당시의 행정구역 이름을 전부 찾아보았습니다. ‘춘원면이 고성군에 있었고, 춘원면 안에는 ()삼촌이 아니라 ()삼촌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광()자와 선()자가 비슷하므로 착각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춘원면 광삼촌으로 기재된 남익삼씨의 본적지 주소는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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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まず4新聞記事みました事故報道する記事通常被害者身元をある程度報道するからです最近個人情報保護のために犯罪事故被害者身元報道自制するですが100年前新聞はそのような概念がなかったので年齢住所までも報道したりしました

 

ところが各記事ごとに被害者名前年齢しずついました。 『神戸新聞朝鮮慶尚南道出身尹吉文(ユン·ギルムン, 21)同尹日善(ユン·イルソン, 25)吳伊根(·イグン, 25)余時善(·シソン, 19)吳伊目(·イモク)5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尹吉文即死吳伊根病院移送中死亡したと報道しました

 

 

神戸又新日報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朝鮮人尹吉文(21)尹日善(25)金時善(キム·シソン, 19)4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被害けたとこのうち尹吉文吳伊根さんが死亡したとじました

 

大阪朝日新聞朝鮮人土工3が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土工尹吉文一(21)吳伊根(25)2死亡、「土工である伊日善(·イルソン, 25)重傷... 揚時善19顔面ったじました

 

朝日新聞東京版土工伊吉文(21)、呉伊根(25220んで身体々になる惨事、「土工である伊日善(25重傷って卒倒くの小屋食事準備をしていた伊日善揚時春(19いけがをったじています

 

 

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明示した被害者54いましたが報道した被害者名前はほぼ一致しましたただ女性被害者名前だけ余時善金時善いましたおそらく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余氏金氏って表記したのはているうえ朝鮮人金氏がより一般的だったため勘違いしたものとわれます

 

また大阪版東京版朝日新聞記事では、『神戸新聞神戸又新日報らかにした尹吉文尹日善名前伊吉文伊日善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漢字ていることからじたりだとわれます

 

 

しかも韓国には伊氏姓がないので神戸新聞報道正確だとみられ鄭鴻永先生神戸新聞記録いましたしたがって鄭鴻永先生先例死亡者名前尹吉文呉伊根断定調査めることにしました

 

朝日新聞尹日善氏妻余時善氏揚時善大阪版)、揚時春東京版などと々に報道しましたがこれもやはり余時善しいようです余氏揚氏って表記したのは揚氏日本語音読ようであるためでしょうまた余時善揚時春表記したのはその二文字ているからでもあり日本式音読がシュンで韓国式音読善ていたからでしょう

 

 

4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犠牲者名前表記しずついますが調査研究目的上そのようないはにとってあまり重要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なくとも死亡者2その名前尹吉文氏吳伊根氏一致するのでらの縁故地すだけです

 

朝日新聞はこの2朝鮮ゆかりのじませんでしたが、『神戸新聞死者朝鮮慶尚南道出身、『神戸又新日報はさらに具体的朝鮮慶尚南道高城郡高城面出身明示しましたこの程度情報であれば90年前犠牲者本拠地調べるための非常具体的出発点になってくれると期待されて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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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선 4건의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사고를 보도하는 기사는 보통 피해자의 신상을 어느정도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범죄나 사고 피해자의 신상 보도를 자제하는 편이지만, 1백년 전의 신문들은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나이와 주소까지도 보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각 기사마다 피해자의 이름과 나이가 조금씩 달랐습니다. <고베신문>조선 경상남도 출신 윤길문(尹吉文, 21), () 윤일선(尹日善, 25), 오이근(吳伊根,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의 다섯명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고, 윤길문은 즉사, 오이근은 병원으로 이송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유신일보>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조선인 윤길문(21), 윤일선(25), 김시선(金時善19) 4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고, 이중 윤길문과 오이근씨가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조선인 토공 3이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당했고 토공 윤길문일(尹吉文一,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사망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는 중상... 양시선(揚時善, 19)은 안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사히신문 도쿄판>토공 이길문(伊吉文, 21) 오이근(吳伊根, 25)의 두명은 약 20칸을 날아가 신체가 산산조각이 나는 참사를 당했고, “토공의 우두머리 이일선(伊日善, 25)은 크게 중상을 입고 졸도했으며, 인근 오두막에서 식사준비 중이던 이일선의 아내 양시춘(揚時春, 19)은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가 명시한 피해자의 수는 5명과 4명으로 조금 달랐지만, 보도한 피해자 이름은 거의 일치했습니다. 다만 여성 피해자의 이름만 여시선과 김시선으로 달랐습니다. 아마도 한자 여()자와 김()자가 비슷해서 생긴 오류로 생각됩니다. ()씨를 김()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데다가, 조선인들의 성으로 김씨가 더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오사카판과 도쿄판 <아사히신문>의 기사는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이 밝힌 윤길문과 윤일선의 이름을 이()길문과 이()일선으로 보도했는데, 이것도 역시 한자 윤()자와 이()자가 비슷하게 보여서 생긴 잘못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한국에는 이()씨 성이 없으므로, 고베의 신문들의 보도가 정확할 것으로 보이며, 정홍영 선생도 고베 신문들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정홍영 선생님의 선례를 따라서 사망자의 이름을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으로 단정하고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윤일선씨의 아내 여시선(余時善)씨를 양시선(揚時善, 오사카판), 양시춘(揚時春, 도쿄판) 등으로 서로 달리 보도했지만, 이 역시 여시선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선씨를 양()시선씨로 잘못 표기한 것은 양()자의 일본어 음독이 (よう)’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여시선()을 양시춘()으로 표기한 것은 두 글자가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 일본식 음독이 슌(しゆん으로 한국식 음독 선()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개 신문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 희생자의 수와 이름 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조사연구의 목적상 그런 차이는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사망자가 2명이며 그 이름이 윤길문(尹吉文)씨와 오이근(吳伊根)씨로 일치하므로 이들의 연고지를 찾기만 하면 됩니다.

 

<아사히신문>은 이 두 사람의 조선 연고지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고베신문>은 사망자들이 조선 경상남도 출신이라고 보도했고 <고베유신일보>는 더 구체적으로 조선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출신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이 정도의 정보라면 90년 전 희생자의 연고지를 조사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출발점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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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几帳面んだ鄭鴻永先生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みました1部第1神戸水道公社についての調査報告書2には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べられていましたこの研究報告書えることがないほど徹底的完璧だったので背景知識ました

 

いて近藤富男先生えてくださったむくげ通信文章もじっくりみました鄭鴻永先生行跡とともにそのがどんなだったのかも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またきになった飛田雄一先生堀内稔先生そして近藤富男先生人品じました

 

 

この々ははどのようにれても自分たちの信念またその信念かちえる同僚たちとやかで愉快自分仕事をしていく々でしたこのたちが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活動しながらめた信頼友情切実じられました

 

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わたしは鄭鴻永さんの金魚した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はそのみながら二人友情ましかったです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た近藤富男先生はその鄭鴻永先生墓所追悼碑建立について報告したそうです1985二人めたことが2020くのんだ感激鄭鴻永先生らせるためだったのでしょう

 

 

一度生きる人生このような仲間つことができるのはせなことでしょう。 「金魚がこういうものならかの金魚になりたいといました

 

しかし二人友情同志愛感歎してい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でしたはそのうちの一人のおいで追悼碑犠牲者々の縁故課題遂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です

 

背景知識つようになりましたが準備運動ぎませんでした仕事めるには出発点必要でしたその出発点もチョン·ホンヨン先生著書提供しましたこのには3 埋葬である虚証写真2 新聞記事のコピー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

 

 

埋葬認許證鄭鴻永先生1985、「宝塚市史編纂室編集担当主事若林泰さんから入手したものですこれを根拠神戸水道工事(1914-15)死亡した朝鮮人労働者3(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調査まりました

 

しかし付録収録されている埋葬認許證写真さすぎる3扇形なって撮影されたもので記録をきちんとむ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近藤富男先生はすぐにそれぞれの埋葬認許證画質写真ってくれましたそのはどうやってこの写真近藤富男先生所蔵していたのかからず理由れませんでした

 

一方鄭鴻永先生著書3部資料編には2新聞記事収録されていましたそのうち神戸又新日報記事1985325堀内稔先生からいただきましたそして翌日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雄先生一緒現場踏査きました

 

 

さて3資料編には神戸又新日報神戸新聞記事だけが収録されていましたが本文には「『神戸』、『朝日』、『毎日新聞などがそれぞれかなりしい記事じたされていました。 『朝日新聞毎日新聞もこの事故じたという意味です

 

早速鄭世和先生神戸市立図書館調査をおいし東京国立記録院勤務する恵那功刀直儀先生にも朝日毎日記事してほしいとみました鄭世和先生大阪朝日新聞記事つけられ惠那功刀先生朝日新聞-東京版記事して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こで4新聞記事確保されました

 

 

毎日新聞記事つかりませんでしたが追慕碑犠牲者たちの縁故調べるためのしっかりとした出発点られたわけ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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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을 꼼꼼히 읽은 후에, 정홍영 선생님의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를 읽었습니다. 1부 제1장은 고베수도공사에 대한 조사 보고서였고, 2장에는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가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이 연구보고서는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철저하고 완벽했기 때문에 저는 좋은 배경지식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전해 주신 <무쿠게통신>의 글들도 찬찬히 읽었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행적과 함께 그분이 어떤 분이셨는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글을 쓰신 히다 유이치 선생님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 그리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성품도 느껴졌습니다.

 

 

이분들은, 세상이야 어떻게 흘러가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고, 또 그 신념을 나눌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잔잔하고 유쾌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에서 활동하시면서 다진 신뢰와 우정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난 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우정이 부러웠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던 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그길로 정홍영 선생의 묘소에 찾아가 추도비 건립을 보고드렸다고 합니다. 1985년에 두 사람이 시작한 일이 2020년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매를 맺은 감격을 정홍영 선생께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이런 동료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금붕어 똥이 이런 것이라면 나도 누군가의 금붕어 똥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우정과 동지애에 감격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중 한 분의 부탁으로 추도비 희생자분들의 연고를 찾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배경지식은 갖게 되었지만 준비운동에 불과했습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출발점이 필요했습니다. 그 출발점도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가 제공했습니다. 이 책에는 3장의 매장인허증 사진과 2건의 신문기사 사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인허증은 정홍영 선생이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편집담당주사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입수한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고베수도공사(1914-15) 중에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3(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부록에 수록된 매장인허증의 사진은 너무 작은데다가, 세 장이 부채꼴 모양으로 겹쳐져 촬영된 것이어서, 기록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즉시 각각의 매장인허증을 화질 좋은 사진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이 사진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소장하고 계셨는지 몰랐고, 이유도 묻지 못했습니다.

 

한편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의 3부 자료편에는 2건의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고베유신일보>의 기사는 1985325일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으로부터 건네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현장 답사를 가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3부 자료편에는 <고베유신일보><고베신문>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본문에는 “<고베>, <아사히>, <마이니치> 신문 등이 각각 상당히 자세한 기사를 보도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아사히신문><마이니치신문>도 이 사고를 보도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즉시 정세화 선생님께 고베도서관 조사를 부탁드렸고, 도쿄의 국립기록원에 근무하는 에나 크누기(功刀恵那) 선생께도 <아사히><마이니치> 기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를 찾아내셨고, 에나 크누기 선생도 <아시히신문-도쿄판>의 기사를 찾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4건의 신문기사가 확보되었습니다.

 

 

<마이니치신문> 기사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추도비 희생자들의 연고를 조사하기 위한 탄탄한 출발점이 만들어진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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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鴻永先生著書むくげ通信文章とともに、『宝塚朝鮮人追悼碑まれた記録重要資料だという事実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しかしはこの追悼碑一度直接見たことがありませんコロナが猛威るっていて日本けなかったからです

 

それで鄭世和先生追悼碑写真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多様方向角度からった写真必要まれた文字模様しくえるように近接撮影もおいしました鄭世和先生はさっそく追悼碑写真ってくださいました

 

 

追悼碑前面下段には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犠牲者尹吉文呉伊根氏神戸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犠牲者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名前まれており裏面には追悼碑てた理由されていました

 

1914から15年間おこなわれた神戸市水道導水トンネル工事現在分かっているだけでも三人朝鮮半島出身労働者事故くなりましたこれは千苅水源地から神戸市まで淨水るための難工事であったとえられています

 

また旧国鉄福知山線敷設後ここ武庫川のほとりで氾濫土石流から鉄道改修工事のさなか19293262朝鮮半島出身者爆発事故としました

 

地域生活重要役割たしている水道鉄道建設現場犠牲になった5々を事故れず後世えてゆくためにこの追悼碑建立しました2020326」。

 

それによります、『宝塚朝鮮人追悼碑』の建設目的は2つです。 「犠牲になった5人の方々を悼」とし「事故を忘れず後世に伝えてゆくために」ということです。 犠牲者を悼むのは「地域生活に重要な基盤施設を建設する中で殉職した方々だから」です。 覚えて伝えようとする理由は「そんな事故が二度と起こら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

 

 

いてこの追悼碑建立した3団体名前まれています。 「追悼碑建立する宝塚市外国人市民文化交流協会」、そしてもくれんのがそれでした

 

追悼碑には建立当時宝塚市長中川智子さんのまれています日本全土朝鮮人慰霊碑追悼碑200もありますがそこに現職市長哀悼文字まれたのは宝塚朝鮮人追悼碑唯一だといています

 

 

最後追悼碑には「『福知山線敷設工事殉職者切畑立合新田にあるというえられています西谷青年会1979切畑建立したこの殉職者福知山線敷設工事1891-1912犠牲になった殉職者える追悼碑ですこれには20日本人犠牲者名前まれています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この殉職者言及した理由、「宝塚近代化のためにとした犠牲者国籍関係なくいに連携して追悼されるのが当然というえからでしょう追悼碑建立者たちの細心配慮じられ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洗練されたデザインは大阪彫刻家玉野勢三先生作品です玉野勢三先生追悼碑前面男女2子供姿飛天のイメージを形象化したもの、「飛天韓半島から仏教伝来とともにわったモチーフなので韓半島日本文化交流歴史暗示するものだと説明していますはまた5つのさな木蓮つぼみで犠牲になった5象徴するって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にこの追悼碑名前いたことがあります越鳥南枝碑慰霊碑追慕碑追悼碑などを検討した近藤富男先生追悼碑適切だ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のたちはこの追悼碑宝塚朝鮮人追悼碑んで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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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영 선생님의 저서와 <무쿠게통신>의 글들과 함께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새겨진 기록이 중요한 자료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추도비를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일본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세화 선생님께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다양한 방향과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필요했고, 특히 새겨진 글과 문양들이 자세히 보이도록 근접 촬영도 부탁드렸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즉각 추도비의 사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추도비의 전면 하단에는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희생자 윤길문(尹吉文)과 오이근(吳伊根), 고베수도도수터널공사 희생자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이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은 지역생활에 중요한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고 전하려는 까닭은 그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이 추도비를 건립한 세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 문화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가 그것이었습니다.

 

추도비에는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씨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전역에 조선인 위령비나 추도비가 2백개나 되지만, 거기에 현직 시장의 애도의 글씨가 새겨진 것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끝으로 추도비에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 순직자의 비>는 키리하타 다치아이신덴에 있다는 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니시타니 청년회가 1979년 키리하타에 건립한 이 <순직자의 비>는 후쿠치야마선 부설공사(1891-1912)에서 희생된 순직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입니다. 여기에는 20명의 일본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이 <순직자의 비>를 언급한 까닭은 다카라즈카 근대화를 위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연계되어 추도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추도비 건립자들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세련된 디자인은 오사카의 조각가 타마노 세이조 선생의 작품입니다. 타마노 세이조 선생님은 추도비 전면의 남녀 2명의 아이의 모습은 비천(飛天)’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으로 비천은 한반도에서 불교 전래와 함께 전해진 모티브이기 때문에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의 역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는 또 “5개의 작은 꽃은 목련꽃봉오리로, 희생된 다섯 분의 영혼을 상징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이 추도비의 이름을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월조남지비, 위령비, 추모비, 추도비 등을 검토하신 끝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추도비>가 적절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이 추도비를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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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近藤富男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5韓国内縁故してほしいとんできました犠牲者たちの家族親戚たちにこの5たちがよくえているというをした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

 

鄭世和先生から近藤富男先生2犠牲者縁故すために韓国れたことがあるというきましたそれだけ追悼碑主人公たちの縁故すことが近藤富男先生切実課題だといました

 

 

近藤富男先生直接会ったこと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寡黙普段はあまりしゃべらないのですが一旦切したらそのことが大切だという意味であり一度決心したことはいくら時間がかかってもげられるだということはよくっていました

 

しかし最初疑問いましたはこの分野専門家でもないのになぜこの仕事んだのだろうかになじみのある社会学分野でもないだけでなくしくなっている朝鮮舞踊朝鮮学校問題でもないので追悼碑にとってしい分野でした初心者同然にこんなおいをされたのが疑問でした

 

近藤富男先生日本語ができなくても日本全域りながら8~90年前崔承喜先生記録すのが不思議だったといましたですから韓国での調査にはもっと上手なのではないかと推察されたようです

 

 

研究調査れているのは事実です生涯研究所学校めながら調査研究執筆えられたというかしかしもっと正直うとそれしかにできることがあまりないという意味でもあります

 

それでも心配でした崔承喜先生当代最高芸術家だったので彼女公演はどこでも新聞雑誌のニュースでした日本大都市だけでなく中小都市図書館記録保管所でも崔承喜先生関連した記録すのはそれほど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

 

一方追悼碑主人公たちはられていることがほとんどない々です土木工事荒労働者身上生活記録素材になることはしかったでしょう新聞記事になるのはらがとした場合唯一でしたそれでも事故記事てであるだけで事故犠牲者死後がどうだったかをらせる後続報道があるはず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一応調査かりました5とも事故くなっているのでなくとも事故記録つかると期待していましたしかも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崔承喜研究手伝ってくれたことにするさな恩返しでもできればという気持ちで調査めました

 

とりあえずまで収集された基礎資料ってほしいとおいしましたライングループトークがられたのでコミュニケーションはリアルタイムでわれすぐにえがました鄭世和先生はたった一部残った父親鄭鴻永先生著書特急郵便郵送してくださり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掲載されていた文章えてくださいました

 

 

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3部構成そのうち1123資料編つものとみられます

 

近藤富男先生えてくれたむくげ通信文章全部5つでした信長正義先生サラム:鄭弘永インタビュー115)」、堀内稔先生新聞記事武庫川改修工事朝鮮人153)」、飛田雄一先生鄭鴻永さんの178)」兵庫在日朝鮮人史研究スタートさせましよう256)」、そして近藤富男先生鄭鴻永さんとのこと300)」などでした

 

これらの資料宝塚朝鮮人追悼碑主人公たちを調査する出発点と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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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났을 무렵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사람의 한국내 연고를 찾아달라고 부탁해 오셨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이 다섯 분을 우리가 잘 모셔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두 차례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과묵하신 분이고, 평소에는 말씀이 별로 없으시지만, 일단 말씀을 꺼내셨다면 그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한번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데 어째서 이 일을 내게 부탁하신 것일까? 내게 익숙한 사회학 분야도 아닐 뿐 아니라, 이제 막 친숙해져 가는 조선무용이나 조선학교의 문제도 아니어서, 추도비는 제게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초심자나 다름없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제가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8-90년 전의 최승희 선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조사에는 더 능숙하지 않겠느냐고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와 조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평생 연구소와 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사연구와 집필로 단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일밖에는 다른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걱정은 되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공연은 어디에서나 신문과 잡지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일본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최승희 선생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토목공사 막노동자들의 신상이나 생활이 기록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사고 기사가 전부일 뿐, 사고 희생자들의 사후가 어떠했는지 알리는 후속보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다섯 분이 모두 사고로 사망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사고 기록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무용신 캠페인과 최승희 연구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수집된 기초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라인 단톡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바로 답이 왔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딱 한부 남은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를 특급우편으로 우송해 주셨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도 <무쿠게통신>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부의 1,2장과 3부의 자료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알려주신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의 글은 모두 다섯 개였습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님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님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님의 <정홍영씨와의 일(300)> 등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조사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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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わった20203鄭世和先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またされました3月末追悼碑がついに建設さ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 「ついにとおっしゃったのが不思議でしたこの追慕碑がどれほど準備されどれほどくの困難経験したになってようやくてられるにったのかをらなかったには当然そのような疑問がありました

 

そしてめて日本にある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真剣めました専門家にも追悼碑慰霊碑についてわせました間専攻社会学犯罪学だったので歴史学韓日間近代史についてよくりませんでしたし追悼碑についてはなおさらりませんでした

 

 

ある図録から日本全土170朝鮮人追悼碑てられていることがかりましたまた20年間日本取材をしてきた写真家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から自分たにれた追悼碑30るので日本には朝鮮人追悼碑200ほどあることもかりま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201回目追悼碑になるわけだないながら熱心調査しました

 

日本でもけは答志しました鄭世和先生だけでなく近藤富男先生真銅敏之先生積極的手伝ってくれました鄭世和先生鄭鴻永先生息子さんであることをったのもこのでしたこの々は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も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り崔承喜研究にもきなになってくださったのでその々にいつも感謝気持ちをっていました

 

2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の日本チームあい結成されました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そして真銅敏之先生主軸になり在日朝鮮学校学生青年たちを後援することを目標にしました

 

 

近藤富男先生チームあいという名前子供(아이)たちを見守(eye)主体(I)たちのまりという意味めたとえてくれましたこのような趣旨同調する々が<チームあい>々と参加されました

 

日本<チームあい>結成刺激韓国でも在日朝鮮学校後援するためのられました名前日本<チームあい>わせるために韓国<チームあい>めました李仁珩先生めて9在日朝鮮学校後援者がこのまりをめました

 

日本韓国<チームあい>2020102回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160舞踊靴用意しましたこれらの舞踊靴2020近畿地域朝鮮学生芸術競演大會学生たちにされましたが近藤富男先生直接競演会場学生たちに舞踊靴えました

 

 

この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一緒競演大會をすべて参観されたそうですそして準備した挨拶をする自分直接観覧した舞踊作品する感想えたそうですまた近藤富男先生挨拶にこんな言葉がありました

 

日本人としてこの=韓国後援者たちかされ韓国とアメリカの々にもえながらわせて在日朝鮮学校生徒たちにする支援めることにしました

 

この言葉いたという表現さりましたけばくことができます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たのも90年前崔承喜先生朝鮮舞踊朝鮮学校生徒たちがいでいるという事実感動したからでした

 

 

感動したまれば意味深いことができます近藤富男先生1983鄭鴻永先生めてったいたようです。 「一目ぼれしたということですそのように一度動いた35年後宝塚朝鮮人追悼碑舞踊靴キャンペーンというんだのです

 

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友情感動しましたあんな友情同志愛一生大事にしていた々ならんでいながら一緒仕事ができると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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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끝난 20203월 정세화 선생님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또 하셨습니다. 3월말에 추도비가 마침내 건립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침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의아했습니다. 이 추도비가 얼마나 오래 준비되었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비로소 건립되기에 이르렀는지 몰랐던 저로서는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일본에 있는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에게도 추도비와 위령비에 대해 문의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전공이 사회학, 범죄학이었기 때문에 역사학, 특히 한일간 근대사에 대해서 잘 몰랐고, 추도비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습니다.

 

 

한 도록을 통해 일본 전역에 170개의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0년 동안 일본 취재를 해온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새로 찾은 추도비도 30개에 달하기 때문에, 일본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2백개쯤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1번째 추도비가 되는 셈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일본에서도 도움은 답지했습니다. 정세화 선생님뿐 아니라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이 정홍영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안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분들은 무용신 캠페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고, 최승희 연구에도 큰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2차 무용신 캠페인 즈음에 일본에서 <팀아이>가 결성되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정세화 선생님, 그리고 신도 도시유키 선생님께서 주축이 되셨고, 재일 조선학교를 포함해 젊은 학생청년들을 후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셨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팀아이>라는 이름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는(eye) 주체(I)들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정하셨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같은 취지에 동조하는 분들이 <팀아이>에 잇달아 참여하셨습니다.

 

일본 <팀아이>의 결성에 자극을 받아 한국에서도 재일조선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임의 이름도 일본 <팀아이>에 맞추기 위해 한국 <팀아이>로 정했습니다. 이인형 선생과 저를 포함해 9명의 재일조선학교 후원자들이 이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팀아이>202010월 제2차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 170켤레의 무용신을 마련했습니다. 이 무용신들은 2020년 깅키지역 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서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직접 경연대회장에 가셔서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하셨습니다.

 

 

이날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님과 함께 경연대회를 모두 참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신 인사말을 하시기 전에 자신이 직접 관람한 무용작품들에 대한 감상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콘도 도미오 선생님의 인사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일본인으로서 이분들(=한국의 후원자들)에게 마음이 움직여서 한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도 호소하면서 힘을 모아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이 말씀 중 마음이 움직였다는 표현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조선학교 학생들이 지금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한 마음들이 모아지면 뜻 깊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 정홍영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음이 움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번 움직인 마음이 35년 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무용신 캠페인>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 사이의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저런 우정과 동지애를 평생 간직하셨던 분들이라면 기꺼이 따르면서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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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世和先生がその昼食宝塚朝鮮人追悼碑を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がはあまりけ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朝鮮舞踊でいっぱいでした

 

舞踊競演大會わり韓国ってきましたが鄭世和先生202015神戸朝鮮高級学校吹奏楽部年例演奏会るよう招待されましたおそらくがあまりにも舞踊だけに執着していることをそうとしたのでしょうそれではまた大阪きました神戸朝高吹奏楽部年次演奏会素晴らしかったです

 

 

その朝鮮学校部活のレベルがいことがわかりました吹奏楽部演奏非常素晴らしくプロフェッショナル ミュージシャンの演奏りませんでしたどうやって高校生たちが部活練習したことがあんなに素晴らしい演奏につながるのだろうかきました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の公演もとても素晴らしかったというえがよみがえりました

 

韓国でもアメリカの生活でも音楽公演芸術展示会によくっていましたメトロポリタン美術館やニューヨークフィルハーモニー管弦楽団演奏会年間会員権更新しながら定期的参加ニューヨークバレエやオペラもよくましたそうだったので芸術作品公演水準だと自負しています

 

しかし朝鮮学校生徒たちの舞踊公演吹奏楽演奏会にまったくくも邪魔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だけレベルがかったです放課後しずつ練習して學父母々をしませる学芸会のレベル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国際舞台しても遜色ないほど素晴らしかったです

 

 

神戸朝高吹奏楽演奏会でも舞踊部生徒たちが賛助出演をしましたはもう一度朝鮮舞踊ながら2月前競演大會作品感興ることができました

 

そうするうちにふと崔承喜先生朝鮮舞踊をこんなにも立派伝授してきている生徒たちにかしてあげたいといましたそしてそんなえをチョン·セファ先生えました

 

ということで<舞踊靴キャンペーン>まりました20201韓国ってすぐに"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ろう"という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最初目標として神戸朝高舞踊部学生たちの練習公演のために舞踊靴ることにしました

 

 

募金額予想よりくなり神戸朝高生徒たちだけでなく四国朝鮮学校にも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最初舞踊靴キャンペーンに積極的参加してくださ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31神戸朝高卒業式参観卒業式舞踊部学生たちがまった舞踊靴しました四国朝鮮学校直接訪舞踊靴手渡しました

 

この舞踊靴意外事件だったのか朝鮮学生がったそうですにはなぜ神戸朝高だけなのか?」という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たちはさっそく二次武勇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近畿地域朝鮮高級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舞踊靴されましたところで東京広島学生たちと中級および初級学生たちにもこのらせがえられたことをりました

 

鄭世和先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けましたそれで2年半にわたって日本全土朝鮮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みんな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キャンペーンに参加してくださった々は韓国日本400この々が寄付した2700ウォンの基金1100舞踊靴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

 

 

後日がある朝鮮学校訪問した、「先生舞踊靴2けました中級学校にももらって高級学校進学したにまたもらいましたという生徒がいました

 

その学生言葉舞踊部学生たちが練習をとても熱心にするそうですそれで舞踊靴月行けず舞踊靴2ずつれたりするそうです

 

それをいてからどうしてもたちが舞踊化キャンペーンをもっと頑張らないといけないうよう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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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화 선생님이 그날 점식식사 자리에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리 귀담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제 머리 속은 조선무용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무용경연대회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정세화 선생님은 202015일의 고베조선고급학교 취주악부 연주회에 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너무 무용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을 바로잡아 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오사카에 갔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부의 연례 연주회는 훌륭했습니다.

 

 

그때 저는 조선학교의 동아리활동 수준이 높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취주악단의 연주는 매우 훌륭했고 프로페셔널 음악가들의 연주에 못지않았습니다. 어떻게 고등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으로 연습한 것이 저렇게 훌륭한 연주로 이어지는 것일까? 놀라웠습니다.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의 공연도 매우 훌륭했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한국에서나 미국 생활 중에도 음악 공연이나 예술 전시회를 자주 다녔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는 연간 회원권을 갱신해 가면서 정기적으로 참석했고, 뉴욕 발레와 오페라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저는 예술 작품이나 공연을 보는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학교 학생들의 무용공연이나 취주악콘서트는 제 눈이나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준이 높았습니다. 방과 후에 조금씩 연습해서 학부모님들을 즐겁게 하는 학예회 수준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 연주회에서도 무용부 학생들이 찬조출연을 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조선무용을 보면서, 두 달 전에 보았던 경연대회의 작품들의 감흥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을 이렇게도 훌륭히 전수해 오고 있는 학생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정세화 선생님께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20201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저는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첫 목표로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연습과 공연을 위해 무용신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모금액이 예상보다 많아져서 고베조고 학생들에게뿐 아니라 시코쿠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무용신 캠페인에 적극 동참해 주신 이인형 선생과 함께 저는 31일의 고베조고 졸업식을 참관했고, 졸업식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시코쿠조선학교도 직접 방문해서 무용신을 전달했습니다.

 

이 무용신 선물이 뜻밖의 사건이었는지 조선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소문 중에는 왜 고베조고뿐인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는 바로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깅키지역 고급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쿄와 히로시마의 학생들과 중급 및 초급학생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을 알았습니다.

 

정세화 선생님과 저는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약 2년 반에 걸쳐서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모두 무용신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캠페인에 참여해 주신 분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4백명에 이르렀고, 이분들이 기부하신 약 27백만원의 기금으로 11백 켤레의 무용신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제가 어떤 조선학교를 방문했을 때, “선생님, 저는 무용신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중급학교 때에도 받았고, 고급학교 진학한 뒤에 또 받았어요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말이 무용부 학생들이 연습을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헝겊 무용신은 몇 달 가지 못하고, 가죽 무용신도 일 년에 두어 켤레씩 망가지곤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무용신 캠페인을 더 열심히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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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ソウル国立大学社会学ニューヨーク州立大学院犯罪学勉強した研究者です20年間アメリカの大学勤務した韓国2017から独立研究者として朝鮮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研究めました研究分野犯罪から芸術えてせでした

 

2017年夏崔承喜先生のヨーロッパ公演調査しながらそののダンスと人生魅了されましたヨーロッパの取材記執筆すぐにアメリカと日本公演調べましたアメリカ公演くなかったのですぐわらせることができましたが崔承喜先生日本公演調査にはくの時間がかかりました日本崔承喜先生舞台活動期間一番長かったからです

 

 

日本調査2018年夏からまりました北海道名寄から沖縄那覇まで日本42都市崔承喜先生公演調べました3年間収集された新聞雑誌記事数百件撮影された都市劇場写真数千枚しました

 

くの資料収集しましたが依然として崔承喜先生りを推測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ほとんどの舞踊資料写真であり映像資料一件もなかったからです朝鮮解放された北韓った崔承喜先生映像資料はたまにありましたが1930年代風靡した彼女代表作品映像としてっていませんでした

 

崔承喜朝鮮舞踊特徴ともいえるきときをしくせる映像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とヨーロッパとアメリカの公演評論記事みながらてくるダンス動作する叙述じて崔承喜先生舞踊姿想像してみるだけでした

 

 

201910京都大阪神戸岡山いながら崔承喜先生関西公演調べていました京都調査中偶然朝鮮学校そこでチョ·ミョンホ校長先生とユン·ギョンスク舞踊教員うことができましたらは1031から112まで大阪在日朝鮮学生中央芸術競演大會かれそのコンテストの舞踊コンテストもまれるとえてくれました

 

月後大阪大阪朝鮮高級学校講堂かれた舞踊競演大會3日間ずっと参観しましたそれは研究起爆剤になりました文章写真だけで朝鮮武勇りを実際たからです生徒たちのダンスの動作これまで研究してきた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いないとはっきりとじることができました

 

 

自分研究目的のために写真映像撮影しましたが今振ってみるとそのほとんどはちませんっているほどえてえるだけじられるものですが当時朝鮮舞踊実際をよくりませんでした写真映像す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が生徒たちの競演大會じて崔承喜先生のダンスにする貴重糸口たことはらかでした

 

この舞踊競演大會はもうつの運命的出会いました鄭世和先生ったのです競演大會初日20191031でしたまれつき社交性鄭世和先生をかけてきてはなぜこの競演大會参観しているのかをおしましたそうして二人対話まりたちの出会いは共助協力につながりました

 

在日同胞社会しい鄭世和先生から朝鮮学校朝鮮舞踊についておその情報はこれまでばらばらにまれていた資料秩序生命力みました崔承喜朝鮮舞踊研究にもみがつきれないように熱心いていきました

 

 

その鄭世和先生昼食をとりながらめ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るときましたそのはそれがどういうことなのかもからず朝鮮舞踊夢中になったになぜそんなことをおっしゃったのかも理解できませんでした

 

ところでそのおっしゃったその言葉4ぎた今日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このかせるきっかけ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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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국립대학교에서 사회학,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범죄학을 공부한 연구자입니다. 20년간 미국 대학에서 근무한 후에 한국에 돌아와, 2017년부터 독립연구자로 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분야를 범죄에서 예술로 바꾸니 행복했습니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유럽공연들을 조사하면서 그분의 춤과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유럽 취재기 집필을 마치고, 곧바로 미국과 일본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미국 공연은 많지 않았으므로 금방 끝낼 수 있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일본 공연 조사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일본은 최승희 선생의 주요 무대였고 활동 기간도 가장 길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조사는 2018년 여름부터 시작됐습니다. 저는 홋카이도 나요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42개 도시를 방문해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조사했습니다. 3년 동안 수집된 신문잡지의 기사가 수백 건, 촬영된 도시와 극장의 사진들이 수천 장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자료를 수집했지만 저는 여전히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무용 자료는 글과 사진이었고 영상 자료는 한 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이 해방된 후 북한으로 간 최승희 선생의 영상 자료는 더러 있었지만, 1930년대에 풍미했던 그의 대표작품들은 영상으로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최승희 조선무용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발동작과 어깨동작을 자세히 보여주는 영상이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일본과 유럽과 미국 공연의 평론기사들을 읽으면서 이따금씩 나오는 춤 동작에 대한 서술을 통해 최승희 선생의 무용 자태를 상상해 볼 뿐이었습니다.

 

 

201910, 저는 교토와 오사카, 고베와 오카야마를 다니면서 최승희 선생의 간사이 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교토 조사 중에 우연히 조선학교를 방문했고, 거기에서 조명호 교장선생님과 윤경숙 무용교원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1031일부터 112일까지 오사카에서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리며, 그 경연대회 중에 무용경연대회도 포함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한 달 후에 저는 다시 오사카에 갔고, 오사카조선고급학교 강당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를 3일 동안 내내 참관했습니다. 그것은 제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조선무용의 춤사위를 실제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춤동작이 그동안 내가 연구해 오던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임에 틀림없다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연구목적을 위해서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습니다만, 지금 돌아보면 그 대부분은 유용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낄 수 있는 법인데, 당시에 저는 조선무용의 실제를 잘 몰랐습니다. 쓸모 있는 사진이나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경연대회를 통해서 최승희 선생의 춤에 대한 귀중한 실마리를 얻은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 무용경연대회에서 저는 또 하나의 운명적인 인연을 만났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을 만난 것입니다. 경연대회의 첫날인 20191031일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사교성이 좋으신 정세화 선생님이 말씀을 걸어오셨고, 저는 왜 이 경연대회를 참관하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의 만남은 공조와 협력으로 이어졌습니다.

 

재일동포 사회를 잘 아시는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조선학교와 조선무용에 대한 말씀을 들었고, 그 정보는 그동안 중구난방으로 쌓여있기만 했던 나의 자료에 질서와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 연구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고, 저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부지런히 글을 써 나갔습니다.

 

 

그날 정세화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저는 처음으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씀인지도 몰랐고, 조선무용에 푹 빠진 저에게 그런 말씀을 왜 하셨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신 그 말씀이 4년 뒤인 오늘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 글을 쓰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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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ウリ學校舞踊靴日本訪問団宝塚訪問しますこの宝塚訪問われたのにはいお便りがあります100年以上時間われることでもありくの々の配慮友愛努力んだ結果だからです

 

これは20世紀前半韓日間不幸歴史橫絲貫通しているでも両国市民いにせてくれた尊重感謝人間愛縱絲でしっかりとまれてられた物語でもあります

 

 

この1914朝鮮人労働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さんが宝塚くなったことからまります金炳順さんは故郷江陵宝塚移住神戸水道工事参加したところトンネル落盤事故くなりました1915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さんも同様事故くなり19293には福知山線改修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さんがくなりました

 

この々のはすぐにられました類似事故日本人朝鮮人わず死者かったからです鉄道工事くなったお二人遺体火葬されらないところにかれました水道公社くなった3遺体事故現場から玉瀬村められて葬儀われ参拝墓けられましたがこうした事情玉瀬世界にはられていませんでした

 

5世間られたのは半世紀ぎたでした宝塚郷土歴史家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富男先生1983からこの地域朝鮮人痕跡めました新聞記事調べて尹吉文,吳伊根さんの死亡ニュースをつけられ宝塚踏査しながら金炳順南益三張長守さんの死亡事実らかにしました

 

 

それは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当時はキーワードで検索できるデータベースもなかったのでいちいち新聞をめくりながら調べるか記事のスクラップに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県立アーカイブがなかったときなので各地域官庁保管されている記録すために公務員にお世話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さな糸口でもてきたら現地訪問して調住民たちに探問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苦労してめられた資料証言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にまとめられましたこのには3くなった神戸水道工事2くなった旧国鉄福知山線改修工事しくされています

 

神戸水道工事犠牲者については死亡後事情つけられませんでしたが福知山線鉄道工事死亡者記録事故現場確認することができ二人はそのから毎年尹吉文吳伊根ンさんの命日326わせて慰霊祭ってきました時間つにつれこの慰霊祭にはますますくの日本人活動家在日朝鮮人参加しました

 

20001鄭鴻永先生他界された近藤富男先生慰霊祭ける一方、「犠牲者のための追悼碑ててほしいという鄭鴻永先生遺志地域々のけをりて宝塚朝鮮人追悼碑建設するために努力しました

 

 

追悼碑建設2月後えた2020223近藤富男先生教師時代同僚であり宝塚地域社会活動家として一緒いていた大黑澄枝先生じてくべきニュースをりました神戸水道工事くなった3朝鮮人位牌玉瀬滿福寺られていて毎年824地元婦人会とともに無縁故者参拝をしてきたというニュースでした

 

そこで近藤富男先生大黑澄枝先生滿福寺足立泰敎足立智敎僧侶5朝鮮人犠牲者一緒える追悼碑てることになりついに2020326切畑園前親水広場追悼碑建立されました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が調査めて35鄭鴻永先生他界されてから20ぶりのことでした

 

宝塚朝鮮人追悼碑について特別関心つようになったのはこの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くの々がどれほど努力したかにづき感動し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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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8[우리학교 무용신] 일본 방문단은 다카라즈카를 방문합니다. 이 다카라즈카 방문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긴 사연이 있습니다. 1백년이 넘는 시간 끝에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우애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20세기 전반 한일간의 불행했던 역사가 씨줄로 관통하는 중에도, 양국 시민들이 서로에게 보여준 존중과 감사의 인간애가 날줄로 단단하게 짜여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1914년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가 다카라즈카에서 사망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김병순씨는 고향 강릉을 떠나 다카라즈카로 이주, 고베수도공사에 참가했다가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1915년 남익삼, 장장수씨도 비슷한 사고로 사망하셨고, 19293월에는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하셨습니다.

 

이분들의 죽음은 이내 잊혀졌습니다. 유사한 사고는 많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사망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철도공사에서 사망하신 두 분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유해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졌습니다. 수도공사에서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사고 현장에서 가까운 타마세 마을에 거두어져서 장례도 치러지고 참배묘도 마련되었지만, 이런 사정은 타마세의 바깥 세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섯 분의 죽음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다카라즈카의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1983년부터 이 지역의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신문기사를 뒤져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사망 소식을 찾아내셨고, 다카라즈카를 방방곡곡 답사하시면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도 밝혀내셨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키워드로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도 없었으니 일일이 종이신문을 넘겨가며 조사하시거나 기사 스크랩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현립 아카이브가 없었을 때이므로 각 지역 관청에 보관된 기록을 찾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조그만 실마리라도 나오면 현지를 방문해서 살펴보고, 주민들에게 탐문해야 했습니다.

 

어렵게 모아진 자료와 증언들은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정리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분이 사망하신 고베수도공사와 두 분이 사망하신 구국철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습니다.

 

고베수도공사 희생자에 대해서는 사망 이후의 사정을 찾아내지 못하셨지만,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사망자에 대한 기록과 사고현장을 확인하실 수 있었고, 두 분은 그때부터 매년 윤길문, 오이근씨의 기일(326)에 맞춰 위령 제사를 드려오셨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 위령제사에는 점점 더 많은 일본인 활동가들과 재일동포들이 참여하셨습니다.

 

20001월 정홍영 선생님께서 타계하신 후에도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위령 제사를 계속하시는 한편, “이 두 분을 위한 추도비를 세웠으면 좋겠다는 정홍영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추도비 건립을 두 달 앞둔 2020223일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교사 시절 동료이자 다카라즈카지역 사회활동가로 함께 일하시던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을 통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받았습니다. 고베수도공사에서 사망한 세 조선인의 위패가 타마세 만푸쿠지에 모셔져 있고, 매년 824일 지역 부녀회와 함께 무연고자 참배를 드려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에 콘도 도미오 선생님과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만푸쿠지의 아다치 타이쿄-아다치 치쿄 스님은 다섯 명의 조선인 희생자를 함께 기리는 추도비를 세우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일 키리하타 사쿠라공원 앞, 신수이광장에 추도비를 건립하셨습니다.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이 조사를 시작한 지 35, 정홍영 선생님이 타계하신지 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깨닫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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