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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1945815일 조선이 해방되자 2백만에 달했던 재일 조선인들은 딜레마에 부딪혔습니다. 조선인인데 조선어를 말하지 못하거나 읽고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재일1세들은 조선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율이 높았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2세들은 조선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건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조선 본토에서도 일제는 1938년의 제3차 교육령을 통해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수업을 금지시켰습니다. 1942년에는 조선어를 연구하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체포된 조선인들을 반국가사범으로 처벌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상황은 본토 조선인들보다 더욱 열악했습니다. 집에서는 재일1세 부모와 소통하기 위해 기초 조선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있었겠지만,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모두 일본어를 사용해야했으니까요.

 

그러다 해방이 되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서도 조선말을 못하니 조선인 구실을 하기 힘들고, 학교든 직장이든 다닐 수가 없겠다는 생각에 모두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급히 만들어진 것이 국어강습소였습니다. 이때의 국어는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였습니다.

 

국어강습소라는 이름의 조선어 교육기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여름 경성이었습니다. 한글학의 선구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선생은 경성 상동교회 안에 부설된 야학 상동청년학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계국어강습소>를 개설, 1914년까지 매년 여름방학 때 경성과 지방에서 조선어 강습을 개최했습니다. 이 강습소에서는 주시경 선생이 직접 작성한 교재로 조선어의 원리와 문법을 가르쳤습니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 하계국어강습소를 졸업한 제자들과 함께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했고, 190911월에는 그 부설기구로 국어강습소를 설치, 국어연구와 교수를 계속했습니다. 이 국어강습소의 교수 과목은 음학(音學) 자분학(字分學) 격분학(格分學) 도해학(圖解學) 변체학(變體學) 실용연습(實用演習) 등으로 전문적인 강의였습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이후 조선어를 국어라고 부르지 못하게 되자, 강습소의 명칭을 <조선어강습소>로 바꾸었지만, 아예 순 한글로 <한글배곧(=한글을 배우는 곳)>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1911<조선어강습소><조선어강습원>으로 발전되어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 연구과를 두었고, 상당히 밀도 있는 국어학교로 발전시켜 이를 효율적으로 보급하고 연구했습니다.

 

주시경 선생이 191439세의 나이로 사망하신 뒤에는 조선어강습원 출신의 제자 이규영, 권덕규, 김두봉 등이 강사로 나서 수업을 이어나갔지만, 1917년 초등과 1, 중등과 6, 고등과 5회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1917년에 중단되었습니다.

 

 

1907년부터 1917년까지 주시경 선생의 주도로 계속된 하계국어강습소, 국어강습소, 조선어강습원을 수료한 강습생은 550여명에 달했고, 후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최현배(崔鉉培신명균(申明均김두봉(金枓奉권덕규(權悳奎정열모(鄭烈模이규영(李奎榮장지영(張志暎정국채(鄭國采김원우(金元祐안동수(安東洙) 등도 바로 이 국어강습소 출신입니다.

 

특히 해방 이후 남북한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최현배와 김두봉은 모두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자 조선어강습소의 동기동창이었습니다. 오늘날 남북한에서 사용되는 한글이 일부 어휘를 제외하고는 문법적으로 거의 동일한 원칙을 가지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 남북한이 모두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문법적 형태를 살린 표기 등을 국어사용의 원칙으로 갖게 된 것은 주시경 선생이 국어강습소를 통해 일관되게 교육해 오신 덕분입니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들이 조선어를 배우는 곳을 마련하고 이를 <국어강습소>라고 불렀던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하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나 후학이 주도하여 그 이름을 이어받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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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5ソウル江南駅交差点のミジンプラザスペース22では在日写真作家曺智鉉(1938~2016)先生写真展かれました展示会のタイトルは猪飼野」、副題日本さな済州でした

 

 

百濟野4~8世紀まり猪飼野1920年代~1973生野1973~今日につながるこの地域朝鮮人史2番目時期最後姿した写真です

 

 

展示会観覧客最初にとらえたのは朝鮮市場つまりのコリアタウン商店街地域にかかっていた横断幕だったようです総連側民団側広報戦しかったことがれたからですこの展示会企画者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YTNとのインタビューで当時朝鮮市場分断線のない分断だったと説明しました

 

 

イデオロギー対決様子いても曺智鉉先生写真1960年代後半猪飼野朝鮮人村朝鮮市場様子そしてその生活していた在日朝鮮人辛酸だったらしを々しくせてくれます前文くの猪飼野朝鮮人作家言語叙述した内容曺智鉉先生視覚的強調していました

 

 

小舟って平野川をあさりながら古鉄をすくう男性たちの姿川辺欄干んで洗濯物女性姿いたドラムにしたり路地少年たちの姿韓服盛裝して外出する女性たちの姿荷物をいっぱいんだ手押をかろうじてっている老人姿、……, 

 

 

…… バイクにってぎる海産物えと座板おばあさんの姿日本式制服てバスに男学生たちとチマチョゴリ制服闊歩する女子学生たちの姿などは1960年代猪飼野朝鮮人たちがどのようにらしたのかを々しくえます

 

 

猪飼野でも曺智鉉先生写真展か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20161122から6日間生野区御幸森小学校ででした曺智鉉先生長女曺智恵さんが父親遺品整理していたところ4,000白黒写真発見そのから50んでパネルで展示その他数十枚写真をフィルムして映像展示えました

 

 

127日付<民団新聞>はこの展示会写真民族衣装路地裏をゆうぜんと女性たちにんにくやらやら白菜ががうずまれた朝鮮市場」、満面みで力強きているハルモニの横顔などいずれも在日同胞歴史をいまにえるもの、「会場れた市民あの写真かしいなづけて感激する姿られたえた

 

 

父親作品展示会開催した曺智恵さんもインタビューで、「あのしかった時代苦労しながらもたくましくきてきた同胞写真から当時歴史息吹じるとし、「在日同胞不条理差別のなかで懸命きたしとしててもらいたい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の展示会のタイトルは追悼-曺智鉉猪飼野写真展でしたがこれは曺智鉉先生2016年春77他界されたためでした1938済州島まれ10父親んでいた猪飼野移住した曺智鉉先生27から半世紀自分第二故郷猪飼野姿撮影しましたった猪飼野写真5千枚余りにるそうです

 

 

曺智鉉先生生前自分作品めて写真集猪飼野-追憶1960年代2003東京新幹社)』出版しています猪飼野朝鮮人たちと一緒らしていたある日本人住民生野図書館でこの写真集せられた曺智鉉先生平野川辺写真40年余自分姿発見ブログに当時るポスティングをしていました

 

 

大変しかった猪飼野時代えてきた在日朝鮮人同胞たちも尊敬していますがこのような姿写真後世した々の努力には本当感謝せざるをません(*)

 

YTN報道映像: https://www.youtube.com/watch?v=88hjCJ8EyqA&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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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15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의 미진프라자 스페이스22에서는 재일 사진작가 조지현(曺智鉉, 1938~2016) 선생의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전시회 제목은 <이카이노(猪飼野)>, 부제는 일본 속 작은 제주였습니다.

 

 

쿠다라노 시기(4-8세기)에 시작되어 이카이노 시기(1920년대-1973)를 거쳐 이쿠노(1973-오늘날) 시기로 이어지는 이 지역 조선인사에서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전시회에서 관람객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조선시장, 즉 지금의 코리아타운 상가지역에 걸렸던 현수막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총련 측과 민단 측의 홍보전이 치열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시회의 기획자 안해룡 선생도 YT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조선시장을 분단선 없는 분단의 거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데올로기 대결의 모습을 제쳐놓더라도 조지현 선생의 사진들은 1960년대 후반 이카이노 조선인 마을과 조선시장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생활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신산했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앞글에서 보았던 여러 이카이노 조선인 작가들이 언어로 서술했던 내용을 조지현 선생은 시각적으로 강조해 주고 있었습니다.

 

 

조각배를 타고 히라노카와 강바닥을 뒤지며 고철을 건지는 남성들의 모습, 천변 난간에 줄을 매고 빨래를 너는 여인의 모습, 빈 드럼통을 놀이터 삼거나 골목에서 구슬을 치는 소년들의 모습, 한복으로 성장하고 나들이 하는 아낙네들의 모습,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있는 노인의 모습, ....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남자에게 해물을 사라고 외치는 좌판 할머니의 모습, 일본식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는 남학생들과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학생들의 모습 등은 1960년대 이카이노의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전합니다.

 

 

이카이노에서도 조지현 선생의 사진전이 열린 적이 있었습니다. 20161122일부터 6일간 이쿠노구의 미유키모리 초등학교에서였습니다. 조지현 선생의 장녀 조지혜(曺智恵)씨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약 4,000장의 흑백사진을 발견, 그중에서 50점을 선택해 패널로 전시했고, 그밖에 수십 장의 사진을 필름으로 만들어 영상전시도 곁들였습니다.

 

 

127일자 <민단신문>은 이 전시회의 사진들을 민족의상을 입고 골목을 유유히 걷는 여성들, 마늘과 건어와 배추가 수북이 쌓인 조선시장, 함박웃음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옆모습 등 모두 재일동포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는 것들이라고 전하면서 전시회장을 찾은 시민들은 저 사진 그립다며 눈을 가까이 대고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덧붙였습니다.

 

 

아버지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한 조지혜씨도 인터뷰를 통해 그 어려웠던 시절, 고생하면서도 씩씩하게 살아온 동포들의 사진을 보면 당시의 역사, 숨결을 느낄 수 있다면서 재일동포들이 부조리와 차별 속에서도 열심히 산 증거로 보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추모-조지현 이카이노사진전>이었는데 이는 조지현 선생이 2016년 봄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938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10세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이카이노로 이주한 조지현씨는 27세부터 반세기동안 자신의 2의 고향이카이노의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그가 찍은 이카이노 사진은 5천여장에 이른다고 합니다.

 

 

조지현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모아 <사진집 이카이노-추억의1960년대(2003, 도쿄, 신칸샤)>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이카이노의 한 일본인 주민은 이쿠노 도서관에서 이 사진집에 실린 조지현 선생의 하리노카와 천변 사진에서 40여년 전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블로그에 당시를 회고하는 포스팅을 했더군요.

 

 

힘들고 어려웠던 이카이노 시절을 견뎌낸 재일조선인 동포들도 존경스럽습니다만, 이같은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 후세에 남긴 분들의 노력에는 진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YTN의 보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8hjCJ8EyqA&t=3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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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1次来日団兵庫県宝塚大阪府生野訪問することになりますがこのつの地域くて在日朝鮮人して微妙対比されます兵庫県では朝鮮関連社会科学んだ反面大阪猪飼野在日朝鮮文学産室です個人的観察ぎませんがこのようないがじられるのが不思議です

 

えば在日朝鮮人歴史政治経済学研究、「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中心活発ですそしてこのつの神戸市にある神戸学生青年センターっています宝塚朝鮮人歴史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1997)>著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研究パートナー近藤富男先生兵庫県宝塚出身です

 

 

この地域った芸術家写真映像部門活動する々がほとんどです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写真家この20年間朝鮮人関連行事かさず撮影してこられたドキュメンタリー監督金稔万(キム·イムマン)先生もこの地域活動しています

 

一方大阪猪飼野在日朝鮮文学産室です説明不要秀作大河小説火山島(1965-1997)済州島猪飼野背景ですが著者金石範(キム·ソクボム, 1925-)先生自身猪飼野出身です慶尚南道馬山まれ10東京作品活動った金達洙キム·ダルス1917~2014先生とともに在日朝鮮文学先駆者といえるです

 

金泰生キム·テセン1924~1986先生済州島生まれで1930猪飼野移住叔母工員としてきました肺結核静岡山中療養しながらめましたが短編コップ1955)」皮切りに小説集骨片1977)」猪飼野背景にした日本地図1978)」「人間地図1985)」「旅人伝説(1985)などを発表、「苦痛きた無名々をめてお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いう創作動機らかにしました

 

 

金時鐘(キム·シジョン, 1929-)先生元山まれ済州島小学校いましたが1948猪飼野渡日1953創刊されたつつじ同人として作品活動めました地平線1955)』、『和風土器1957)』、『新潟1970)』、『猪飼野詩集1978)』、『光州詩篇1983)』、『化石1998)』などなくとも6詩集出版しています

 

梁石一(ヤン·ソクイル, 1936-)先生猪飼野生まれで両親済州島出身でした貧困暴力不倫まった猪飼野生活描写しましたが<(1998)>代表作です作品運河1981)」猪飼野平野川にまつわる物語いた作品ですね

 

宗秋月(ジョン·チュワル)先生佐賀県生まれですが16仕事めて大阪猪飼野移住しました洋服縫製外販きの露天商靴工場ハリコボンドチル)、簡易食堂経営など々な職業々としながら直接経験した猪飼野生活きました彼女られている詩集には、「猪飼野---うた(1984)」があります

 

 

元秀一(ウォン·スイル,1950-)先生猪飼野出身最初創作集のタイトルから猪飼野物語ですこの副題済州島からたちというからもかるように済州島からってきた在日朝鮮人1たちのむちゃくちゃで生命力あふれるらしがかれています

 

金蒼生(キム·チャンセン, 1951-)先生作品集<>とエッセイ<猪飼野><猪飼野発韓国語カード>などがあります代表短編である<><三姉妹>女性であり独立した主体としての人間生活回復しようとする意志作品です

 

かった朝鮮人人口12万人ぎなかった猪飼野からこれほどくのトップクラスの文学者輩出されたのは偶然でしょうかもしかしたら猪飼野凄絶人生鍛冶屋のふいごや槌打ちのように朝鮮人レベルの文学作品形象化するようにしてくれ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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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1차 일본방문단은 효고현 다카라즈카와 오사카부 이쿠노를 방문하게 됩니다만, 이 두 지역은 가까우면서도 재일조선인과 관련해 미묘하게 대비됩니다. 효고현에서는 조선관련 사회과학이 진전된 반면, 오사카 이카이노는 재일조선문학의 산실입니다. 개인적인 관찰에 불과하겠지만, 이같은 차이가 느껴지는 게 신기합니다.

 

예컨대 재일조선인 역사와 정치경제학 연구는 <효고조선관계연구회(兵庫朝鮮関係研究会)><무쿠게회(むくげの)>를 중심으로 활발합니다. 그리고 이 두 모임은 고베시에 자리잡은 <고베학생청년센터(神戸学生青年センタ)>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역사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1997)>의 저자 정홍영 선생과 그의 연구 파트너 콘도 도미오 선생도 효고현 다카라즈카 출신입니다.

 

 

이 지역에서 제가 만난 예술가도 사진와 영상 부문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정세화 선생님도 사진가이시고, 지난 20여년간 조선인 관련 행사를 촬영해 오신 다큐멘터리 감독 김임만 선생님도 이 지역에서 활동하십니다.

 

한편 오사카 이카이노는 재일조선문학의 산실입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수작 대하소설 <화산도(1965-1997)>는 제주도와 이카이노가 배경인데, 저자 김석범(金石範, 1925-) 선생 자신이 이카이노 출신입니다. 경남 마산 출생으로 10세에 도쿄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신 김달수(金達洙, 1917-2014)선생과 함께 재일조선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김태생(金泰生, 1924-1986) 선생은 제주도 출생으로 1930년 이카이노로 이주, 숙모 밑에서 자라며 공원으로 일했습니다. 폐결핵으로 시즈오카 산중에서 요양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단편 가래컵(1955)을 시작으로, 첫 소설집 골편(骨片, 1977)에 이어 이카이노를 배경으로 한 나의 일본지도(日本地図, 1979), 나의 인간지도(人間地図, 1985), 나그네 전설[旅人伝説, 1985)등을 발표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간 무명의 사람들을 어둠 속에 묻어 둘 수 없었다는 창작동기를 밝혔습니다.

 

 

김시종(金時鐘, 1929-) 선생은 원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1948년 이카이노로 도일, 1953년에 창간된 <진달래>의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평선(1955)>, <일본풍의 토기(1957)>, <니가타(新瀉, 1970)>, <이카이노 시집(1978)>, <광주시편(1983)>, <화석의 여름(1998)> 등 적어도 6권의 시집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양석일(梁石日, 1936-) 선생도 이카이노(猪飼野) 태생으로, 부모는 제주도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가난과 폭력과 불륜으로 얼룩진 이카이노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피와 뼈(1998)>이 대표작입니다. 그의 작품 <운하(1981)>는 이카이노의 히라노카와에 얽힌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지요.

 

종추월(宗秋月, 1944-) 선생은 사가(佐賀)현 출생이지만 16세에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 이카이노로 이주했습니다. 양복 봉제와 외판, 오코노미야키 노점상, 신발공장 하리코(본드칠), 간이식당 경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직접 경험한 이카이노 생활을 시로 썼습니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집으로는 <이카이노-여자-사랑-노래(猪飼野···うた, 1984)>이 있습니다.

 

 

원수일(元秀一, 1950-) 선생도 이카이노 출신으로 그의 첫 창작집 제목부터 <이카이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부제가 제주도에서 온 여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제주도에서 건너온 재일조선인 1세 어머니들의 억척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삶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김창생(金蒼生, 1951-) 선생은 작품집 <빨간 열매>와 에세이집 <나의 이카이노>, <이카이노발 한국어 카드> 등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 단편인 <빨간 열매><세 자매>는 여성이자 독립된 주체로서의 인간의 삶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들입니다.

 

가장 많을 때의 조선인 인구가 12만명에 불과했던 이카이노에서 이처럼 많은 정상급 문학가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일까요? 어쩌면 이카이노의 처절한 삶이 대장간의 풀무와 망치질처럼 조선인들을 단련시켜, 수준 높은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하도록 주었던 것은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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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放直後1947済州市4·3民主抗争まりました三一節デモ事件導火線となって勃発した4·3抗争くの済州道民警察軍隊弾圧けて大阪脱出しました77 月間続いた4·3抗争時期前後最大1万人済州人大阪猪飼野密航したと推定されます

 

らの脱出によって済州った家族親戚はより一層激しい苦難弾圧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日本脱出したたちは赤色分子つまり社会主義者烙印されその家族親戚たちも43同調者でありなされていたからですこの済州道民からげることもできず対抗することもできず無数と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済州市4·3平和記念館とノブンスンイ43記念館記録ると産婦乳飲みの子供たちまで軍人警察によってされたりしました日本植民地から解放されたびも一瞬だっただけですぐに極端野蛮なイデオロギー対立まったのです

 

 

1956年頃戦後復興事業えた北韓日本赤十字社との合意じて1959から在日同胞北韓永久帰国させる事業めましたいわゆる在日朝鮮人送還事業あるいは帰国事業でした当時北韓1950年代末から千里馬運動じて大衆動員による経済量的成長段階突入1957からまった1次経済開発5年計画くの労働力資本必要だった時期でした

 

韓国政府1951からまった韓日国交正常化会談進展られない在日韓国人韓国移住させるいは実行す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李承晩政権北送事業阻止テロをてて失敗しました後日妥結した韓日国交正常化交渉でも韓国在日朝鮮人大韓民国帰国ではなく日本永住権ることに努力けただけでした

 

一方日本政府在日朝鮮人支給される生活補助金責任かられるため北韓帰国事業合意したもようです1956統計によりますと在日朝鮮人生活保護対象者はおよそ9万人これは外国人9する規模だっただけでなく支援金額年間2億円以上でしたので日本政府在日朝鮮人北韓帰国財政負担らそうとしたのですね

 

 

とにかくこうしてまった帰国事業19592北韓内閣通過その12から1961にかけて749百人在日朝鮮人北韓永久帰国することになります韓国政府はこれにして実効性のない反対だけをしていましたが1965韓日国交正常化実現した反対日本政府圧力をかけ1968から3年間帰国事業中断させましたしかし北韓帰国事業1971再開されその1984までに47百人余りが追加帰国しました

 

北韓帰国事業むにつれ大阪在日朝鮮人日本全土在日朝鮮人社会しいイデオロギー対立まれました北韓帰国相応韓国帰国事業施行され在日同胞困難解決できればよかったのですが韓国帰国事業わりに日本永住権問題方向転換したため在日同胞状況がさらにし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ね

 

 

北韓帰国した在日朝鮮人日本訪問制限されたため北送された日本人国籍たち1,831日本訪問できない非人道的問題発生しました2006北韓する制裁本格化してからは往来完全途絶北送朝鮮人日本訪問われず在日朝鮮人北韓訪問まで制限され自由往来人権問題深刻化めました

 

2000年代韓国民主化とともに在日同胞事業教育旅行利便性から大韓民国国籍取得する慣行がりましたが北送家族朝鮮籍在日同胞北韓居住する家族被害ぶことを懸念韓国国籍取得できませんでしたらは北韓国籍取得することもできないためすぐに日本帰化してしまう現象まできています

 

在日朝鮮人亡国分断による被害1世紀以上経ったでも経験しているの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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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인 1947년 제주시에서 4·3민주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일절 시위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발발한 4·3항쟁으로 많은 제주도민들이 대한민국 경찰과 군대의 탄압을 피해 오사카로 탈출했습니다. 77개월간 계속된 43항쟁 시기를 전후로 최대 1만명의 제주인이 오사카, 특히 이카이노로 밀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의 탈출로 인해 제주도에 남은 가족과 친척들은 더욱 심한 고초와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 탈출자들은 빨갱이, 즉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혔고, 그 가족과 친척들도 4·3동조자이자 빨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제주도민들은 섬 안에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대항하지도 못한 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주시의 4·3평화기념관과 너븐숭이4·3기념관의 기록을 보면 산모와 젖먹이 아이들까지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 심지어 민간 폭력단원에 의해 살해당하곤 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기쁨도 잠시였을 뿐 곧바로 극단적이고 야만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 북한은 1956년경 한국전쟁의 복구사업을 마치고 <8월 전원회의> 사건을 계기로 일인독재체재를 구축한 후, 일본 적십자사와의 합의를 통해 재일동포들을 북한으로 영구 귀국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재일조선인북송사업 혹은 귀국사업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은 1957년부터 시작된 1차경제개발5개년 계획으로 많은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 정부는 1951년부터 시작된 한일수교회담에서 진척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재일동포의 한국 이주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북한의 북송사업을 저지하려는 폭탄 테러를 기도하다가 실패해 국제적 비난을 받았습니다. 후일 타결된 한일수교협상에서도 한국은 재일조선인의 일본 영주권 취득을 주장했을 뿐 귀국사업에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일본정부는 재일조선인에게 지급되는 생활보조금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한의 귀국사업에 합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1956년 통계에 따르면 재일조선인 생활보호대상자는 약 9만여명이었고, 이는 외국인 중 약 90%에 달하는 규모였을 뿐 아니라, 지원 금액도 연간 2억엔 이상이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도 재일조선인의 북한귀국으로 재정부담을 덜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시작된 귀국사업은 19592월 북한 내각을 통과했고, 그해 12월부터 1961년까지 749백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영구 귀국합니다. 한국 정부는 실효성 없이 반대 하다가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뤄진 후에야 일본 정부를 압박하고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1968년부터 3년간 귀국사업을 중단시켰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귀국사업은 1971년 재개되어 이후 1984년까지 47백여명의 재일조선인이 추가로 북한으로 귀국했습니다.

 

북한의 귀국사업이 진행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는 다시 한 번 이데올로기 갈등에 휘말렸습니다. 북한과 입장이 같았던 총련은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면서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독려했고, 남한과 입장이 같았던 민단은 북의 귀국사업에 동요하지 말도록 홍보와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양측 사이에 무력충돌도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한편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들은 대부분 북한체제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일본으로 되돌아오지도 못했고, 일본 방문까지 제한되는 바람에 고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을 따라 북송된 일본 국적의 배우자들과 자녀들까지도 일본을 방문하지 못하게 되는 비인도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2006년 대북제재가 본격화된 이후로는 북일 교류는 완전히 끊겨서 이제는 거주 이전이나 자유 왕래는 커녕 통신의 자유 문제까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2000년대 한국 민주화와 함께 많은 재일동포들이 사업과 교육과 여행의 편의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북송 가족을 둔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북한에 거주하는 가족에게 피해가 미칠 것을 염려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북한 국적을 얻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싫어했던 일본 국적 취득으로 돌아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망국과 분단으로 인한 피해를 재일동포들은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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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丸って済州から大阪ってきた済州人はほとんど猪飼野まってんでいました1973猪飼野という名前公式生野わりましたがこれは周辺日本人朝鮮人貧民村のせいで地価住宅価格がると嘆願したためだったというがあります

 

猪飼野朝鮮人貧民村密接関係しています12世紀百済渡来人たちもここでちながららしていましたがその王室豚肉納品する特殊産業従事者でしたしかし1920年代以降済州人生計補助方法てました

 

在日朝鮮学校についてのドキュメンタリーれない-不当2019チェ·アラム監督)」在日同胞2のペ·ヨンエさんは1929日本ってきた両親いてっててて生計てたとっていますりの日本人"いがする"ざけたりしたそうです

 

 

猪飼野朝鮮人っていた·ミンジンのパチンコにもてきますソンジャがのイサクと一緒釜山下関到着汽車大阪りるとイサクのヨセフが猪飼野2案内する場面です

 

一行朝鮮人貧民街猪飼野りたヨセフが電車素敵風景とはうところだった動物いはいはもちろんトイレのいよりもひどいものだった. ソンジャはぎたかったがそうしなかった」。

 

ここで動物いとはいをしますそれはソンジャのであるイサクのヨセフの言葉からすぐにらかになります

 

ヨセフとキョンヒは屋根がややったのような小屋んでいた小屋々はれる鋼鉄われていた金属カバーきの合板玄関のドアだった。 「ここは朝鮮人だけがらせるところだ。」ヨセフはいながらった。」

 

 

このソンジャは 2息子みますらしはだんだんよくなりますが猪飼野れることができずそこで祖母になりますしかし初期猪飼野叙述したイ·ミンジン作家記述えておく必要があります

 

猪飼野間違っただったみすぼらしい小屋はすべてじように安価材料らかっていた. 玄関階段をきれいに掃除したりをきれいにいたりしたもあちこちあったがほとんどのはめちゃくちゃにれていたつや新聞紙とタール内側っており屋根使われた金属びていた

 

居住者資材った資材直接建小屋やテントとわらない臨時鋼鉄煙突からったにしてはかい夕方だったぼろを半分ほど羽織った子供たちはって路地っている無視してごっこをしていたヨセフのからくない玄関階段ではさな子供便をしていた」。

 

つらい労働低賃金しめられた朝鮮同胞まってらしていた猪飼野凄惨姿々とかれています在米同胞のイ·ミンジンさんが在日同胞半世紀前んでいた猪飼野のこのような状況をどのように取材したのかになります

 

 

劣悪住居環境大変労働状況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朝鮮同胞らしは言葉では表現できないほど辛酸でしたそれで同胞たちは<済州青春歌>という流行歌歌詞えてのようないながらいをめたりしたそうです済州島言葉をそのままってしました

 

無情代丸どんな理由せてたのか/ こんなに苦労ばかりさせるのか/ 晴天にはいですね/ には苦労ばかりしているね/ このはこんなに可哀想/ 日本のどこかにじこめられたな/ はいるのかいないのか/ けにるかないか/ があったら/ んでこうとするが/ のないものが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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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환>을 타고 제주에서 오사카로 건너온 제주인들은 대부분 이카이노에 모여 살았습니다. 1973년 이카이노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이쿠노로 바뀌었는데, 이는 주변의 일본인들이 조선인 빈민촌 때문에 땅값과 집값이 떨어진다고 탄원했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카이노의 조선인 빈민촌은 돼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12세기에 백제 도래인들도 이곳에서 돼지를 치며 살았지만, 그때는 그나마 왕실에 돼지고기를 납품하는 특수산업 종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의 제주인들은 생계 보조 방편으로 돼지를 키웠습니다.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쓰러지지 않는 부당(2019, 최아람 감독)>에서 재일동포 2세 배영애씨는 1929년에 일본에 건너온 부모님은 숯을 구워 팔면서 집에서 돼지를 키워 생계를 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주위의 일본인들이 돼지 냄새 난다며 멀리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카이노 조선인들이 돼지를 키우던 이야기는 이민진의 <파친코>에도 나옵니다. 선자가 남편 이삭과 함께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기차로 오사카에 내리자 이삭의 형 요셉이 이카이노로 두 사람을 안내하는 장면입니다.

 

일행은 조선인들이 사는 빈민가 이카이노에서 내렸다. 요셉이 사는 동네는 전철 안에서 본 멋진 길이나 풍경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동물 냄새가 음식 냄새는 물론 화장실 냄새보다도 더 지독하게 났다. 선자는 코와 입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여기서 동물 냄새란 돼지 냄새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선자의 남편인 이삭의 형 요셉의 말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요셉과 경희는 지붕이 약간 뾰족한 상자 같은 오두막집에 살았다. 오두막집의 나무들은 골이 진 강철로 덮여 있었다. 금속 덮개가 있는 합판이 현관문이었다. ‘이곳은 돼지들과 조선인들만 살 수 있는 곳이야.’ 요셉이 웃으며 말했다.”

 

 

이 집에서 선자는 두 아들을 낳습니다. 살림은 점점 나아지지만 이카이노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할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초기의 이카이노를 서술한 이민진 작가의 기술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카이노는 잘못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판잣집들은 모두 똑같이 값싼 자재들로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현관 계단을 깨끗하게 청소해 놓거나 창문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은 집도 군데군데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무광택 신문지와 타르지가 창문 안쪽을 덮고 있었고, 지붕에 사용된 금속은 녹슬어 있었다.

 

집들은 거주자들이 값싼 자재나 주운 자재로 직접 지어 올려 오두막이나 텐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임시로 만든 강철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봄날치고는 따뜻한 저녁이었다. 넝마를 반쯤 걸친 아이들은 술에 취해 골목에서 잠든 남자를 무시한 채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요셉의 집에서 멀지 않은 현관 계단에서는 어린아이가 변을 보고 있었다.”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조선동포들이 모여 살았던 이카이노의 처참한 모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사실 재미동포 이민진씨가 재일동포들이 반세기 전에 살았던 이카이노의 이런 상황을 어떻게 취재했는지 궁금합니다.

 

 

열악한 주거환경과 고된 노동상황을 견뎌내야 했던 조선동포들의 삶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신산했습니다. 그래서 동포들은 <제주 청춘가>라는 유행가의 가사를 바꿔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며 시름을 달래곤 했다고 합니다. (제주도 말을 그대로 따서 옮겼습니다.)

 

무정한 군대환은 무사 날 태워 완, 이 추룩 고생만 시켬신고/ 청천 하늘엔 별도 많치만, 내 몸 위에는 고생만 많구나./ 이 몸은 이 추룩 불쌍허게, 일본 어느 구석에 댁겨지고/ 귀신은 이신건가 어신건가, 날 살리잰 올건가 말건가/ 나신디 날개가 이서시문 나랑이라도 가구정 허건만,/ 날개가 어신 것이 원수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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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済州-大阪定期航路開設、「代丸済州人大挙大阪んできて工業化労働力として活用したことはすべての学者める歴史的事実ですしかしなぜ済州だったのかはまだ疑問です

 

済州人勤勉柔順労働力だったという説明するもいますが納得しにくいです済州人暴圧搾取不当差別対抗してった歴史っているからです20世紀初頭李在守(·ジェス)反乱(1901)済州人無能腐敗した大韓帝国王室官僚そしてカトリックを前面したフランス帝国対抗してった事件です

 

また1887五座首義挙日本漁師たちが武装したまま摹瑟浦上陸して乱暴くと両班奴婢などの身分わず摹瑟浦住民たちがわせて撃退した事件です済州牧中央政府官軍たせなかったことをげた主導者5座首しました

 

 

日本植民地時代にも済州人独立運動積極的しました<済州独立運動独立有功者現況(シム·オクジュ2013)>によりますと解放後独立有功者として褒賞された済州人150しますらの活動義兵(3)三一運動(19)文化運動(2)海女運動などの国内抗日運動(88)学生運動(19)光復軍(1)愛国啓蒙運動(1)日本活動(17)などに均等分布しています

 

したがって済州人柔順労働力卑下することは済州人自主性能動性冒涜することです実際済州人団結決意した事件がありました航路独占した代丸乗客過積載劣悪乗船環境にもかかわらず1250運賃賦課すると済州大阪済州人代丸競争する伏木丸用意したのがそれです

 

19284済州人々は代丸所有会社である尼崎汽船会社京成丸所有会社である朝鮮郵船株式会社運賃げを要請しました汽船会社じゃないからべずじゃないからげないのに嘲弄済州人要求りました

 

 

これに大阪済州人天王寺公会堂済州道民大会運賃引げと乗船環境改善再度要求しましたがこれも拒否されましたこの天王寺公会堂には済州道民1千人余りがまりましたので日本官憲監視弾圧まりました

 

済州人たちはたちはたちのというスローガンを採択通航組合組織して組合員めました19304月頃大阪済州人済州島民4500130組合費して東亜通航組合設立同年秋6千円資金函館成田商会から蛟龍丸(3,000トン)をレンタルし111から済州-大阪運航開始しました

 

蛟龍丸運賃650値下げしましたが、「代丸京成丸もそのため運賃げざるをませんでした資金十分尼崎汽船会社代丸運賃3まで値下げして出血競争めましたが済州人せず蛟龍丸っていました

 

 

6蛟龍丸賃貸契約わると東亜通航組合北日本汽船会社から伏木丸(1,332トン)運航再開しました1931121、「伏木丸初運航乗客334でしたが、「ウリ出港うためにまった歓送客1万人余りだったそうです

 

これに弾圧本格化しました官憲伏木丸販促活動った東亜通航組合員代丸営業妨害名目逮捕このうち7懲役1実刑されていますまた日警察伏木丸乗客渡航証さなかったり遅延させたりして乗船妨害したりしました

 

東亜通航組合34支部1万人余りの組合員維持しながら弾圧かいましたが弾圧赤字累積1933121運航中断しました朝鮮人団結した日本権力結託した資本て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済州人柔順労働力であるどころか決起のある民族民族であることを誇示できた事件であった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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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제주-오사카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군대환>이 제주인들을 대거 오사카로 실어와 공업화의 노동력으로 활용한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째서 제주였는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제주인들이 근면하고 유순한 노동력이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제주인들은 폭압과 착취, 부당한 차별에 맞서 싸운 역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벽두의 이재수의 반란(1901)은 제주인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대한제국 왕실과 관료, 그리고 가톨릭을 앞세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사건입니다.

 

1887년의 <오좌수 의거>는 일본 어부들이 무장한 채 모슬포에 상륙해 행패를 부리자, 양반과 노비 등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슬포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들을 격퇴한 사건입니다. 제주목과 중앙정부는 관군도 못해낸 일을 이룬 주동자 다섯 명에게 좌수 벼슬을 내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인들은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제주 독립운동과 독립유공자 현황(심옥주, 2013)>에 따르면,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제주인이 150명에 달합니다. 이들의 활동은 의병(3), 삼일운동(19), 문화운동(2), 해녀운동 등의 국내항일운동(88), 학생운동(19), 광복군(1), 애국계몽운동(1), 일본 활동(17) 등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주인들을 유순한 노동력으로 폄하하는 것은 제주인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제주인들의 단결과 결기를 보여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항로를 독점한 <군대환>이 승객 과적과 열악한 승선환경에도 불구하고 1250전의 비싼 운임을 부과하자, 제주와 오사카의 제주인들이 <군대환>과 경쟁할 <복목환(伏木丸)>을 마련한 것이 그것입니다.

 

19284월 제주인들은 <군대환> 소유사인 아마가사키(尼崎)기선회사와 <경성환> 소유사인 조선우선(朝鮮郵船)주식회사에 운임 인하를 요청했습니다. 기선회사들은 새가 아니니 날 수 없고, 물고기가 아니니 헤엄칠 수 없을텐데라고 조롱하며 제주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오사카의 제주인들은 텐노지(天王寺) 공회당에서 제주도민대회를 열고 운임 인하와 승선환경 개선을 재차 요구했는데, 이 역시 거부당했습니다. 이때 텐노지 공회당에는 제주도민 1천여명이 모였기 때문에 일제 관헌의 감시와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인들은 우리는 우리 배로라는 슬로건을 채택하고, 통항조합을 조직해서 조합원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304월경 오사카의 제주인과 제주도민 4,500명이 한 주에 30전의 조합비를 내면서 동아통항조합(東亞通航組合)을 설립했고, 그해 가을 약 6천엔의 자금으로 하코다테의 나리타(函館成田)상회로부터 <교룡환(蛟龍丸, 3000)>을 임대해 111일부터 제주-오사카 운항을 시작했습니다.

 

<교룡환>은 운임을 650전으로 인하했는데 <군대환><경성환>도 따라서 운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금이 충분한 아마가사키기선회사는 <군대환>의 운임을 3엔까지 인하하면서 출혈 경쟁을 시작했지만 제주인들은 굴하지 않고 <교룡환>을 타곤 했습니다.

 

 

6개월의 <교룡환> 임대계약이 끝나자 동아통항조합은 북일본기선회사(北日本汽船會社)로부터 복목환(伏木丸, 1332)을 매입, 운항을 재개했습니다. 1931121<복목환>의 첫 운항 승객이 334명이었는데, ‘우리배의 출항을 축하하려고 모인 환송객이 1만여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탄압이 본격화됐습니다. 관헌은 <복목환> 판촉활동을 벌인 동아통항조합원들을 <군대환>의 영업방해 명목으로 체포했고, 이중 7명이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또 일본 경찰은 <복목환> 승객에게 도항증을 내주지 않거나 지연시켜 승선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동아통항조합은 34개의 지부, 1만여명의 조합원을 유지하면서 탄압에 맞섰으나, 탄압과 적자 누적으로 1933121일 운항을 중단했습니다. 조선인의 단결된 힘도 일제 권력과 결탁한 자본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제주인들이 유순한 노동력이기는커녕 결기 있는 민족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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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チェ·スンヒ)公式誕生日19111124とされている朝鮮戸籍日本外務省パスポート発給記録などの公文書にはこの日付誕生日記録されている韓国淑明女子学校学籍簿北朝鮮愛国烈士陵てられた墓碑にも生年月日はこの日付

 

しかしこの誕生日崔承喜本当誕生日では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という疑問きたこの誕生日基準にした崔承喜自身直接明らかにした年齢正確でない場合かったためだ

 

崔承喜、「自叙伝1936)」崔承喜自叙伝1937)」19263自分舞踊めた年齢朝鮮式える年齢15だったとべているしかし誕生日新暦19111124だったとすれば1926316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また崔承喜自叙伝結婚当時自分年齢20だとらかにしたが公式誕生日基準にすれば21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崔承喜誕生日年齢不一致外国でもよく発生した1938111サンフランシスコ作成した米国入国書類崔承喜自分年齢25記録したが公式誕生日基準にすれば年齢26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19401010崔承喜がメキシコに入国する提出した入国申告書にも崔承喜年齢28かれていたが公式誕生日である19111124基準にすれば彼女満年齢29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だしくは崔承喜自身生年1911ではなく1912だと直接明らかにした記録もある崔承喜1939510日付発給されたベルギー労働許可書19401010日付提出したメキシコ入国記録にも生年1912記録されていた

 

 

このような公式誕生日年齢不一致解消する方法があった19111124という誕生日旧暦日付として考慮これを新暦日付である1912112変換すれば誕生日年齢完全一致することになる

 

当時朝鮮人誕生日旧暦(太陰太陽歷)日付記憶実際誕生日太陽暦(グレゴリオ)日付換算してうのが慣行だったこのような慣行1960年代やそのもかなりっており韓国人には住民登録上誕生日本当誕生日ではない場合なくない崔承喜もまさにそのようなケースだった

 

崔承喜誕生日旧暦19111124すなわち太陽暦1912112だったとすればサンフランシスコに到着した1938111崔承喜年齢25であるこの誕生日前日だったのでもし米国入国1日遅れたら崔承喜入国記録年齢26いたはずだ

 

19401010崔承喜がメキシコに入国した年齢1912112基準にすれば28であることがしいこれとにメキシコ入国申告書には生年1912記録したこととブリュッセルで発給された労働許可証生年1912記入したことも正確記録ただしブリュッセル労働許可証生月5記録したことは1りだったとられる

 

 

これまで崔承喜誕生日としてられてきた19111124った日付とはえないそれが公式文書記録された誕生日であり崔承喜彼女家族もこれを意識的っていたためだ実際崔承喜公式記録すなわち戸籍科学籍簿渡航証やパスポート引越しの移転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住民登録にはすべてこの公式誕生日記録したはずだからだ

 

19111124公式誕生日ではあるがそれが本当誕生日ではなくこの旧暦日付太陽暦換算した1912112本当誕生日だったはずだおそらく崔承喜ヒの誕生日パーティーはこのわせてわれただろうし家族誕生日もこのわせられただろう

 

崔承喜本当誕生日公式誕生日うからといって人生研究したりのダンスを保存して発展させることの邪魔にはならないだろうしかしなくとも彼女誕生記念日ることには影響えかねないえば崔承喜誕生100周年記念行事2011われたが彼女本当誕生日基準にすれば2012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わ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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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代丸1926から済州-大阪航路運航このから済州朝鮮人大阪じて日本全土がり1927には在日済州人3万人えました

 

1930年代には済州-大阪航路利用者数年平均32千人余りに1934には50,045渡航してくの移動記録しました1939在日済州人459百人でしたが1945解放当時10万人えていたそうです

 

もちろんらがすべて代丸利用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済州-大阪運航していたがあったからです日帝朝鮮総督府支援ける親日会社朝鮮郵船株式会社運航していた咸鏡丸(ハムギョンファン749トン)京成丸(キョンソンファン1033トン)がありました

 

 

また済州人独自結成した済州通航組合蛟龍丸(3,000トン)東亜通航組合伏木丸(1,332トン)もあり企業同盟汽船部がスタートし鹿児島郵船株式会社買収した順吉丸もありました

 

しかし1935までに運営難理由航路から撤退日本政府直接·間接支援けた尼崎汽船会社代丸だけがっていましたその1945までの10年間済州-大阪運航代丸独占していたのですね

 

1945年頃日本済州人10万人えたときらが済州-大阪往復していた例外なく代丸だったのですつまり年間3万人余りが代丸乗船したという統計がありますので1930からでも1945までの15年間45万人済州人代丸利用したということです当時済州人口20万人だったので済州人1人当たり2回以上代丸っていたわけです

 

 

しかし、「代丸乗船経験はあまり快適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代丸乗客定員365でしたが最大685まで乗船可能だったという記録があります定員のほぼ2せたものですこれはもちろん営業収益のためのものでしたが1935年以降済州-大阪航路には代丸しかなかったので当局黙認このような過積載きました

 

乗船環境もめちゃくちゃでした。 「代丸船室甲板上上等船室甲板下下等船室かれていましたが下等船室上層下層2かれていて下等船室天井非常つとくほど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れも旅客過積載のための方便だったはずですこの過疎状況ある日本人によってのように記録されています

 

193481大阪築港桟橋から済州島出発した代丸には563乗客がいたこの上等客室72だけが日本人... 船室にはになれる空間えないほど満員それで通路もいいし甲板もいいし物緯度もいいしまた日差しのでもになっている姿ブリッジでたデッキはあまりにも凄絶風景」。

 

 

代丸死者びました済州人んでも故郷られたいとっていたので、「代丸上等客室後尾つまり船尾安置する場所2所設けたそうです遺体ると喪主輓章をかけて運航しているずっとそこをれませんでした

 

1927年頃代丸運賃片道1250だったそうです当時猪飼野女工日給1だったということで女工月給半分にあたる運賃でした最近日本最低時給1千円程度なので当時ありふれた10時間労働日給1万円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ため代丸当時運賃今日片道125千円韓国圓125万圓相当していたのですしかも遺体運賃一般乗客5だったということで6百万圓えるおです

 

したがって済州人っていた代丸記憶愉快なはずがありません過積載劣悪乗船環境乗船費用まで非常かった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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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대환> <2기미가요마루>1926년부터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제주의 조선인들이 오사카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들어가 1927년에는 재일 제주인의 숫자가 3만명을 넘어섰습니다.

 

1930년대에는 제주-오사카 항로 이용자 수가 연평균 32천여명에 달했고, 1934년에는 50,045명이 도항해 가장 많은 이동을 기록했고, 1939년의 재일 제주인은 459백명, 1945년 해방 당시에는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군대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주-오사카를 운항하던 다른 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친일회사 조선우선(朝鮮郵船)주식회사가 운항하던 <함경환(咸鏡丸, 749)><경성환(京城丸, 1,033)>이 있었습니다.

 

 

또 제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결성한 제주통항(濟州通航)조합의 <교룡환(蛟龍丸, 3,000)>과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의 <복목환(伏木丸, 1332)>도 있었고, 기업동맹기선부가 시작했고 가고시마우선(鹿兒島郵船)주식회사가 인수받았던 <순길환(順吉丸,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까지 다른 배들은 운영난을 이유로 항로에서 철수했고 일제 당국의 직간접의 지원을 받은 아마가사키기선(尼崎汽船)회사의 <군대환>만 남았습니다. 이후 1945년까지 10여년 동안 제주-오사카 운항은 <군대환>이 독점했던 것이지요.

 

1945년경 일본의 제주인이 10만명을 넘어섰을 때 이들이 제주-오사카를 왕복하던 배는 예외없이 <군대환>이었던 것입니다. 즉 연간 3만여명이 군대환에 승선했다는 통계가 있으므로, 1930년부터만 치더라도 1945년까지 15년간 연인원 45만명의 제주인들이 <군대환>을 이용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제주인구가 20만명이었으므로, 제주인 1인당 2회 이상 군대환을 탔던 셈입니다.

 

 

그러나 <군대환>의 승선경험은 그다지 쾌적할 리가 없었습니다. <군대환>의 승객 정원은 365명이었지만, 최대 685명까지 승선이 가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원의 거의 2배를 태운 것입니다. 이는 물론 영업 수익을 위한 것이었지만 1935년 이후 제주-오사카 항로에는 <군대환> 밖에 없었으므로 당국의 묵인하에 이같은 과적이 계속되었습니다.

 

승선 환경도 엉망이었습니다. <군대환>의 선실은 갑판 위의 상등선실과 갑판 아래의 하등선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등선실은 다시 상층과 하층의 2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하등 선실의 천정이 매우 낮아 키 큰 사람이 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역시 여객 과적을 위한 방편이었을 겁니다. 이 과적 상황은 한 일본인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193481일 오사카 축항 잔교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군대환>에는 563명의 승객이 있었다. 이중에 상등객실 7명중 2명만이 일본인. ... 선실에는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으로 만원이다. 그래서 통로도 좋고 갑판도 좋고 물건 위도 좋다, 또 뜨거운 햇빛 밑이라도 누워있는 모습이다. 아침에 브릿지에서 본 갑판은 너무도 처절한 풍경이다.”

 

 

<군대환>은 죽은 사람도 운반했습니다. 제주인들은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기를 원했으므로, <군대환>의 상등객실 후미, , 배의 선미에 관을 안치할 곳을 2곳 마련됐다고 합니다. 시신이 배에 타면 상주는 만장을 걸어놓고서 운항하는 동안 내내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927년경 <군대환>의 운임은 편도가 1250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카이노 여공의 일급이 1원이었다고 하니, 여공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싼 운임이었습니다. 요즘 일본의 최저시급이 1천엔 정도이므로 당시 흔하던 10시간 노동에 일급이 1만엔인 셈입니다. 따라서 <군대환>의 당시 운임은 오늘날 일본 돈으로 편도 125천엔, 한국 돈으로 125만원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시신의 운임은 일반 승객의 5배였다고 하니 6백만원이 넘는 돈입니다.

 

따라서 제주인들이 가졌던 <군대환>의 기억이 유쾌할 리 없습니다. 과적과 열악한 승선환경에다가 승선비용까지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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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民地時代猪飼野在日済州人たちが共有した記憶<代丸>があります。 「代丸とは済州-大阪定期運航していた旅客貨物船名前です。 「代丸する記憶猪飼野済州人だけでなく済州島済州人にもっています1970年代までも済州島ではかとてもきいものを"代丸のようだ"という表現使っていたそうですから

 

日本人はこの<キミガヨマル>ばれていましたが朝鮮人韓国式漢字音グンデファンいました大阪をデパン神戸をシンホとんでいたのと言語習慣でしたね日本国歌のタイトルですが歌詞はこうです。 「/ 千代八千代/細石となりて/ すまで」。ここでという天皇します

 

日本船名わるのは豊臣秀吉戦艦建造これを日本丸んだのが嚆矢だったというもありそれよりずっと1187東京仁和寺発見された文書にも坂東丸という船名てきます船名マルくようになった由来としてさらに5~6つのがありますがどれが定説なのかはっきりしません

 

 

文献では1900制定された訓令船舶法取扱手続項目船名最後にはできるだけをつけることという勧告事項まれていましたがそれでもその条項2001訓令改正削除されましたそれでマルがついていない日本船名いですが植民地時代にはての-マルばれ代丸例外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

 

代丸所有会社である尼崎汽船会社によって大阪-済州定期航路まったのは19233ですが実際運航はすでに1922から不定期路線まっていますなぜこの時期航路開設されたのかについては2つの説明があります日帝朝鮮土地調査事業耕作権ってきる方法途方れていた朝鮮小作人たちが大規模発生ちょうど第一次大戦後活況日本のマンチェスターばれていた大阪には大規模労働力必要だったからです

 

なぜ済州-大阪航路だったのでしょうかこれについての明確説明はまだありませんただ済州農作業収益くない畑作がほとんどで土地調査事業打撃きくしたがって離農規模きかったというそして済州人勤勉従順労働力だというがあったというなどがげられますがそれが事実だったのか確認する資料はありません

 

 

最初代丸1891にオランダで建造された旅客貨物船スワールデクルン(Swaerdecroon)改造したでしたこのはオランダ-インドネシアを定期運行していたようですこのがボルネオ·ポンティアナック(Pontianak)停泊した様子(年代不詳)1906ジャカルタのタンチョンフリオク(Tandjong Priok)修理されたという記録発見されたからです

 

スワールデクルンさが669トンでそれほどきなではなく煙突設置されていることから小規模蒸気船だったとわれます1922にこの購入した尼崎汽船会社名前代丸1922大阪-済州航路投入しましたが19259済州島西帰浦表善座礁しました台風航海不可能になると船長原口熊次郞運転するようじましたがこれは人命被害らすための措置だったと判断されます

 

 

尼崎汽船会社座礁した代丸わる船舶として192511ロシア軍艦マンスール(Mandiur)購入しました日露戦争中戦利品としてったこの日本海軍尼崎汽船会社げたというもありますが日本軍によって台湾武装解除されていたマンスール日露戦争後にロシアに返却されロシア革命後建造されて40えた老朽船マンスールはソ連海軍から尼崎汽船会社されたのがしいようです

 

このロシア軍艦<マンスール><2軍隊丸>改造され大阪-済州航路投入されましたが済州々の記憶った<代丸>はまさにこの<2代丸>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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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카이노의 제주인들이 공유한 기억 중에 <군대환>이 있습니다. <군대환>이란 제주-오사카를 정기 운항하던 여객화물선의 이름입니다. <군대환>에 대한 기억은 이카이노의 제주인들뿐 아니라 제주에 사는 제주인들에게도 오래 남았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제주도에서는 무언가 아주 큰 것을 가리킬 때 군대환 같다는 표현을 썼다고 하니까요.

 

일본인들은 이 배를 <키미가요마루(代丸)>라고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한국식 한자음으로 <군대환>이라고 했습니다. 오사카(大阪)대판,’ 고베(神戶)신호라고 부르던 것과 같은 언어습관이었지요. 키미가요는 일본 국가의 제목이자 가사 첫 소절인데,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통치는 천대와 8천대에 이르러 모래가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千代八千代/細石となりて/ すまで)” 여기서 당신이란 천황을 가리킵니다.

 

일본의 배이름이 마루()’로 끝나는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함을 건조하고 이를 니혼마루(日本丸)라고 부른 것이 효시였다는 말도 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187년 도쿄의 닌나지(仁和寺)에서 발견된 문서에도 <반도마루(坂東丸)>라는 배이름이 나옵니다. 배이름에 마루가 붙게 된 유래로 5-6가지 설이 더 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문헌으로는 1900년에 제정된 훈령 선박법취급절차(船舶法取扱手続)”의 항목 중에 배 이름 끝에는 가급적 마루를 붙일 것이라는 권고사항이 들어 있었는데, 그나마 그 조항은 2001년 훈령 개정 때 삭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루가 붙지 않은 일본 배이름도 많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배가 ‘-마루라고 불렸고, 키미가요마루, 즉 군대환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군대환이 아마가사키기선(尼崎汽船)회사에 의해 오사카-제주 정기 항로가 시작된 것은 19233월이지만 실제 운항은 이미 1922년부터 부정기 노선으로 시작됐습니다. 어째서 이 시기에 항로가 개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을 잃어 살 방도가 막막해진 조선의 소작인들이 대규모로 발생했고, 때마침 1차대전 이후의 활황으로 일본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던 오사카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제주-오사카 항로였을까요? 이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제주의 농사는 수익이 높지 않은 밭농사가 대부분이어서 토지조사사업의 타격이 컸고, 따라서 이농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제주인들이 근면하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이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점 등이 꼽히는데, 그게 사실이었는지 확인하는 자료는 없습니다.

 

 

최초의 군대환은 1891년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여객화물선 스와르데크룬(Swaerdecroon)호를 개조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를 정기 운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배가 보르네오 폰티아낙(Pontianak)항에 정박한 모습(연대 미상)1906년 자카르타 단쭝프리오크(Tandjong Priok)에서 수리됐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와르데크룬호는 무게가 669톤으로 그리 큰 배는 아니었고, 굴뚝이 한 개 설치된 것으로 보아 소규모 증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2년 이 배를 매입한 아마가사키기선회사는 배 이름을 <키미가요마루>로 바꾸고 1922년 오사카-제주항로에 투입했습니다만, 19259월 제주도의 서귀포와 표선 사이에서 좌초했습니다. 태풍을 만나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선장은 배를 뭍으로 몰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마가사키 기선회사는 좌초한 <군대환>을 대체할 선박으로 192511월 러시아 군함 <만수르(Mandiur)>호를 매입했습니다. 러일전쟁 중에 전리품으로 빼앗은 이 배를 일본해군이 아마가사키기선회사에 불하했다는 말도 있지만, 일본군에 의해 타이완에서 무장해제되었던 만수르호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에 반납되었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해군으로부터 건조된 지 40년을 맞은 만수르호는 노후선으로 아마가사키 기선회사가 매도되었던 것이 맞는 듯합니다.

 

이 러시아 군함 <만수르>호가 <2군대환>으로 개조되어 오사카-제주 항로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제주인들의 기억에 남은 <군대환>은 바로 이 <2군대환>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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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生野コリアタウンには百済門てられています西暦4世紀からここにんでいた百済人させ朝鮮人がこの地域居住した歴史1600えることをらせるためでしょう

 

日本仁徳天皇時代から渡来人がここにんでいたのは事実ですが奈良時代末期つまり西暦8世紀頃にはここにっていた百済人痕跡えます百済王家猪飼野大阪北部枚方ここに設置されていた百済郡廃止されたからです

 

20世紀初頭猪飼野依然として大阪郊外地域綿花栽培する農家数十戸にすぎない農村部落でしたそれが1919<鶴橋耕地整理組合>結成され農地整理下水道整備われました蛇行していた平野川直線整備めたのもこのでしたこれは農地整備自体目的ではなくまもなく大阪市編入1925されることにえて住宅団地及工場地帯造成するためのものでした

 

大阪市編入された直後から猪飼野平野川沿いにゴムや金属製品製造加工工場てられましたほとんどが中小規模工場東大阪とともに大阪代表的中小工場集積地となりました

 

まさにこのつまり1920年代から猪飼野朝鮮人移住めました1922日帝済州島-大阪定期直行航路開設したことがきっかけで大阪-済州島往復船<君が代丸>って済州島朝鮮人大挙渡ってきました

猪飼野地域では1920年代1930年代にゴム工業全盛期まりましたがこのような発展えた労働力朝鮮人担当済州島出身朝鮮人がゴム産業従事しました

 

大阪企業報道会議1924調査報告書によりますと定期航路開設から2年間済州島から大阪渡航した朝鮮人渡航客1004そのうち済州島出身60960%えていますそれから10年後1934までは5万人男性29360女性2685済州道民日本大阪滞在したり日本地域移住したりしましたこれは当時済州男性人口31女性人口51済州島全体人口25%する数字でした

 

 

らはたいてい職業すための労働移民として猪飼野定着男性はゴム工場労働者女性紡織工場職工として就職工場就職ができなければ鉱夫雑夫洗濯夫などとしていたりだしくは荒仕事行商をしながら生活基盤いていきました

 

しい現象1925年頃れて大阪ってきた済州道民すでに一定基盤いた地域出身朝鮮人から島民蔑視されたりしたということです済州道出身労働移民者日本社会だけでなく朝鮮他地域出身者から二重差別けながららさなければならず強迫せざるをない移民者生活はより一層苛酷でした

 

 

1930年代には猪飼野平野川運河改修工事きましたが猪飼野定着した朝鮮人労働者として大挙参加しました済州出身朝鮮人たちも荒労働隊列合流する一方平野川運河労働者たちを収容する食堂運営しながら生活土台けました

 

1930年代末日帝国家総動員法(1938)労働関係勅令(1938)国民職業能力申告(1939)国民徴用令(1939)などを相次いで発令朝鮮人徴用徴兵強要しましたこの結果1939459百人だった在日済州人1945解放当時10万人えました

 

1945朝鮮解放されると200万人在日朝鮮人のうち145万人73%ほどが帰還およそ55万人27%りましたが猪飼野在住朝鮮人帰還率60%にとどまりましたほとんどが済州島出身猪飼野住民伝染病治安不安などの理由済州島らず帰還してもがなくて大阪ってきたりもし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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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이쿠노 코리아타운에는 <백제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기4세기부터 이곳에 살았던 백제인들을 상기시키면서 조선인이 이 지역에 거주한 역사가 16백년이 넘는다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닌토쿠 천황시기부터 도래인들이 이곳에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시대 말기, 즉 서기 8세기경에는 이곳에 남아 있던 백제인들의 흔적은 지워졌습니다. 백제의 왕가도 이카이노를 떠났고, 이 곳에 설치됐던 백제군도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 이카이노는 오사카 외곽의 교외지역으로 벼와 면화를 재배하는 농가 수십 호에 불과한 농촌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19<쓰루하시 경지정리조합>이 결성되어 농지 정리와 하수도 정비가 이뤄졌습니다. 구불구불 흐르던 히라노카와를 직선으로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이는 농지 정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곧 오사카시에 편입(1925)될 것에 대비해서 주택단지와 공장지대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사카시에 편입된 직후부터 이카이노는 히라노카와 천변을 따라서 고무와 금속 제품 제조 및 가공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대부분 중소규모의 공장이어서 히가시오사카와 함께 오사카의 대표적인 중소 공장 집적지가 되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이카이노에 조선인들이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22년 일제가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정기직항로를 개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사카-제주도 왕복선 <키미가요마루(代丸)>를 타고 제주도의 조선인들이 대거 건너왔습니다.

 

이카이노 지역에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고무 공업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는데, 이 같은 발전을 지탱한 노동력은 조선인들이 담당했고, 특히 제주 지역 출신의 조선인들이 고무 산업에 가장 많이 종사했습니다.

 

 

오사카기업보도회의 1924년 조사에 따르면 정기항로 개설 2년 동안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도항한 조선인 도항객은 1,004명이었고 그중 제주도 출신이 609명으로 60%를 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34년까지는 약 5만명(남성 29360, 여성 2685)의 제주도민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머물거나 일본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는 당시 제주 남성인구의 3분의1, 여성인구의 5분의1이었고 제주도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숫자였습니다.

 

이들은 대개 직업을 구하기 위한 노동이민으로 이카이노에 정착해 남성은 고무공장 노동자로, 여성들은 방직공장의 직공으로 취업했고, 공장 취업이 되지 않으면 광부, 잡부, 세탁부 등으로 일하거나, 심지어 막노동과 행상을 하며 삶의 터전을 잡아나갔습니다.

 

한 가지 슬픈 현상은, 1925년경 뒤늦게 오사카로 건너온 제주도민들이, 이미 어느정도 터전을 잡은 다른 지역 출신의 조선인들로부터 섬놈이라고 멸시 당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제주도 출신의 노동이민자들은 일본사회뿐 아니라 조선의 타지역 출신자들로부터 이중의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했고, 척박할 수 밖에 없는 이민자 생활은 더욱 혹독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이카이노의 히라노카와 운하 개수공사가 계속되었는데, 이카이노에 정착한 조선인들이 막노동자로 대거 이에 참여했습니다. 제주 출신의 조선인들도 막노동 대열에 합류하는 한편, 히라노카와 운하 노동자들을 수용하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삶의 토대를 이어갔습니다.

 

1930년대말 일제는 국가총동원법(1938)과 노동관계칙령(1938), <국민직업 능력신고(1939)><국민징용령(193)> 등을 잇달아 발령해 조선인의 징용과 징병을 강요했습니다. 이 결과로 1939459백명이던 재일 제주인은 1945년 해방 당시에는 1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되자 2백만명의 재일 조선인 중에서 145만명(73%) 가량이 귀환하고 약 55만명(27%)이 남았지만 이카이노 거주 조선인의 귀환율은 60%에 머물렀습니다. 대부분이 제주도 출신인 이카이노 주민들은 전염병과 치안 불안 등의 이유로 제주도로 돌아가지 않았고, 귀환했다가도 일자리가 없어 다시 오사카로 되돌아오기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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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リ學校舞踊靴>訪問団大阪宝塚訪問する<大阪ファイブホテル>まることになりますこの宿滞在しているたちは生野鶴橋桃谷という名前れるでしょうこのホテルが鶴橋駅から生野コリアタウンに隣接しながらも所在地住所桃谷二丁目だからです

 

この生野鶴橋という名前注目します生野百済野猪飼野とどんな関係があるのかそして鶴橋という名前由来それが猪飼野生野とどんな関係なのかっておく必要があるからです

 

 

鶴橋駅桃谷駅道路天王寺区生野区かれますがコリアタウンは天王地区からまり平野川までびていますコリアタウンはすべてつにつなが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3つの地区かれて分布しています

 

平野川生野コリアタウンです南北にまっすぐにれていますがもともとはからがりくねっていましたが大阪城から大川合流中之島って安治川合流大阪湾みますつまり大阪湾沖から生野までがれたということですね

 

コリアタウンという言葉1993年頃から使われる言葉その朝鮮市場ばれていました在日朝鮮人密集居住地域なのでらに韓国食品衣類提供する市場形成されたからです20227月現在生野区人口127千人ですがそのうち外国人住民27千人21.6%2021年現在そのほとんどは在日朝鮮人です

 

 

ここの朝鮮人居住歴史西暦4世紀までさかのぼります仁徳天皇(257?-399)時期渡来人(=百済人)多数ここに移住しましたがそのためこの地域百済野ばれ当時平野川百済川ばれていました

 

百済野んでいた百済人生業として飼育しましたそのため猪飼野百済野同義語になりました飼育していた野原という意味ですが漢字はイノシシではなく日本っていたとは区別される大陸産猪つまり韓半島からってきたのことをしていたそうです百済人猪飼育盛況難波宮皇室豚肉納品する官庁猪飼部まで設立されたほどです

 

660百済その遺民大挙猪飼野ってきたためこの地域百済人人口大幅そのため奈良時代(710794)には猪飼野百済郡昇格しましたしかし奈良時代末期百済王家河内(現在枚方市周辺)移封され平安(794~1185)末期には百済郡解体されました

 

 

一方日本書紀には仁徳天皇14(330)記録猪飼津けたという言葉ています猪飼津大阪湾からをさかのぼる停泊していた当時としてはかなりえたです猪甘津橋(=猪飼津橋)百済川かる名前ったのはここが飼育していた百済人居住していた場所だったからです

 

江戸時代(1603-1867)猪飼津橋鶴橋というしい名前ちますこのがよくんできてったからです平野川れがわりその横切っていた猪飼津橋=鶴橋もなくなりましたが学者たちは鶴橋桃谷駅平野川中間地点にあったと推定していますそこで1997そこに<つるのはし跡公園>造成され記念碑てられました

 

しかし学者たちは猪飼津橋鶴橋なるだと主張しています今日平野川東側近鉄大阪線今里筋出会交差点名前<猪飼野橋交差点>ですがここが旧猪飼津橋場所であり鶴橋とはだったと主張され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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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무용신> 방문단이 오사카와 다카라즈카를 방문하는 동안 <오사카 파이브 호텔>에 머물게 됩니다. 이 숙소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이쿠노(生野), 쓰루하시(鶴橋), 모모타니(桃谷)라는 이름에 익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이 호텔이 쓰루하시 역에서 가깝고, 이쿠노 코리아타운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소재지 주소는 모모타니 2초메(2丁目=2)이기 때문입니다.

 

이중에서 이쿠노와 쓰루하시라는 이름에 주목합니다. 지금의 이쿠노가 옛날의 쿠다라노, 이카이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쓰루하시라는 이름의 유래가 무엇이며, 그것이 이카이노와 이쿠노하고 어떤 관계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쓰루하시역과 모모다니역을 잇는 도로를 경계로 텐노지구와 이쿠노구가 나뉘어집니다만, 코리아타운은 텐노지구에서 시작해서 히라노카와(平野川)까지 3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히라노카와는 이쿠노 코리아타운의 동쪽 경계입니다. 이 강이 지금은 남북으로 반듯하게 흐르지만, 원래는 남에서 북으로 구불구불 흐르다가 오사카성 북쪽에서 오카와(大川)로 합류되고, 나카노시마()를 지나 아지카와(安治川)으로 합수되어 오사카만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 옛날에는 오사카만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이쿠노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코리아타운이라는 말은 1993년경부터 사용되는 말이고, 그 전에는 <조선시장>이라고 불렸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밀집 거주지역이어서 이들에게 한국식품과 의류를 제공하는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20227월 현재 이쿠노구의 인구는 127천명인데, 그중 외국인 주민이 27천명(21.6%, 2021년 현재)으로 그 대부분은 재일조선인입니다.

 

 

이곳의 조선인 거주의 역사는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닌토쿠천황(仁徳天皇, 257?-399) 시기에 토라이닌(渡來人=백제인)이 다수 이곳으로 이주했는데, 그래서 이 지역은 쿠다라노(百済野)라고 불렸고, 당시에는 히라노카와도 쿠다라카와(=百済川)라고 불렸습니다.

 

쿠다라노에 살던 백제인들은 생업으로 돼지를 사육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카이노(猪飼野)는 쿠다라노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돼지()를 사육()하던 들판()라는 뜻인데, 한자 돼지 저()’는 요즘의 멧돼지가 아니라, 일본에서 키우던 돼지()와는 다른 대륙산 돼지, 즉 한반도에서 건너온 돼지를 가리켰습니다. 백제인들의 돼지 사육은 성황을 이루어 나니와(難波)궁 황실에 돼지고기를 납품하는 관청으로 이카이베(猪甘部)까지 설립되었을 정도입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면서 그 유민이 대거 쿠다라노로 옮겨왔기 때문에 이 지역의 백제인 인구가 크게 늘었고, 그 때문에 나라 시대(710794)에는 쿠다라노가 쿠다라군(百濟郡=백제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 시대 말기에 백제 왕가가 가와치(河内, 현재의 히라카타枚方시 주변)로 이봉(移封)되었고, 헤이안(794-1185) 말기에는 백제군도 해체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닌토쿠 천황 14(330)의 기록에 이카이츠(猪甘津)에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카이츠는 오사카만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가 정박하던, 당시로서는 꽤 번성했던 항구입니다. 이카이츠바시(猪甘津橋=猪飼津橋)는 백제강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로, 이름에 돼지 저()’자가 들어간 것은 돼지 사육자 백제인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입니다.

 

에도시대(1603-1867)에 이카이츠바시는 쓰루하시(鶴橋)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습니다. 이 다리에 학들이 자주 날아와 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히라노강도 물줄기가 달라졌고, 그 강을 가로지르던 이카이츠바시=쓰루하시도 없어졌지만, 학자들은 쓰루하시가 모모타니역과 히라노강 사이의 중간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1997년 그곳에 <쓰루하시 유적공원(つるのはし跡公園)>이 조성되었고 기념비도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이카이츠바시와 쓰루하시는 서로 다른 다리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히라노카와 동편에 킨테츠오사카선(近鉄大阪線)과 이마사토스지(今里筋)가 만나는 교차로의 이름이 <이카이노바시 교차로(猪飼野橋交差点)>인데, 이곳이 옛 이카이츠바시 자리이며, 쓰루하시와는 다른 다리였다고 주장되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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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大劇場公演比較的急遽決まったとしてもこの公演崔承喜先生準備がなかったものとられるいや東京地域公演よりむしろったのがうかがえる公演のレパートリーを比較してみるとこれがよくかる

 

えば1020東京日比谷公会堂った公演発表演目15作品だったが宝塚発表演目16作品1作品かった

 

1025大阪朝日会館かれた崔承喜舞踊公演発表作品16作品宝塚のレパートリーじだったが内容にはいがあった大阪公演では16作品朝鮮舞踊5演目だったが宝塚公演朝鮮舞踊作品6演目1かった

 

 

また朝鮮舞踊作品だとしても東京公演5<><朝鮮風のデュエット><仮面><><3つのコリアンメロディー>大阪公演5つはその順序じだったため大阪公演東京公演のコピーといえるしかし宝塚公演朝鮮舞踊東京-大阪公演発表された2(『王舞3つのコリアンメロディー』)けて3(『剣舞』、『民謡調』、『エヘヤノアラ』)追加されわせて6つになったのだ

 

そこで宝塚公演1、「朝鮮舞踊)」無憂華日本舞踊)」、「民謡調朝鮮舞踊)」、「現代舞踊)」、「リリック·ポエム現代舞踊)」、「希望いて現代舞踊)」6演目構成されているが現代舞踊3連目朝鮮舞踊2連目日本式衣装音楽使った日本舞踊1連目混ざっていた

 

 

2朝鮮舞踊)」習作現代舞踊)」、「ほにほろ日本舞踊)」、「習作2現代舞踊)」、「朝鮮風のデュエット朝鮮舞踊)」3生贄日本舞踊)」仮面(朝鮮舞踊」、「エヘヤノアラ朝鮮舞踊)」(現代舞踊)」、<(現代舞踊)>構成されているそのため23でも現代舞踊4演目朝鮮舞踊4演目日本舞踊2演目比較的均等構成されている

 

全体的には朝鮮舞踊6演目現代舞踊7演目日本舞踊3演目当時まで崔承喜先生専攻だった現代舞踊がほぼ半分しくめた朝鮮舞踊31以上そして日本人観客のための日本舞踊20%程度めた宝塚公演のレパートリーは自分専攻である現代舞踊しい関心けた朝鮮舞踊そして日本人観客のための日本舞踊20%程度めたため比較的均等配分されたと評価できる

 

 

しかししくてみると宝塚公演のレパートリーでは朝鮮舞踊強調されていた事実かる123朝鮮舞踊2演目ずつ配置されており12朝鮮舞踊けた2朝鮮舞踊まり朝鮮舞踊ろしていた

 

また宝塚公演まれた朝鮮舞踊作品19349201回舞踊発表会以後創作されたものに制限されず最大話題作エヘヤノアラ1933)」とそれにらない人気作品1934)」僧舞1934)」まれたこれらの作品むために1935新作1935)」つのコリアンメロディー1935)」除外されたことから崔承喜宝塚観客自分人気のある朝鮮舞踊せるためにめたことはらかだ

 

 

えれば宝塚大劇場公演東京日比谷公演大阪朝日会館公演べて発表作品朝鮮舞踊構成そしてその順序配置がかなりわった目立つがこれは宝塚公演観客する配慮があったという意味

 

どんな観客する配慮だったのだろうか日本舞踊3つもまれていることから日本人観客配慮したことはらかだそしてそれにらず自分最人気朝鮮舞踊作品総動員したことから宝塚朝鮮人同胞観客する配慮かったこともらかに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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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이 비교적 급작스럽게 결정되었더라도, 이 공연에 임하는 최승희 선생의 준비는 빈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도쿄나 다른 지역의 공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신경을 썼던 것이 엿보입니다. 공연의 레퍼토리를 비교해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1020일 토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가졌던 공연의 발표연목은 모두 15개 작품이었는데, 다카라즈카의 발표연목은 16개로 한 작품이 더 많았습니다.

 

1025일 오사카 공연의 발표작품은 16개로 다카라즈카 공연의 레퍼토리 수와 같았는데,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사카 공연에서는 16개 작품 중에서 조선무용이 5개 연목이었으나 다카라즈카 공연의 조선무용 작품은 6연목으로 하나가 더 많았습니다.

 

 

또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도쿄 공연의 5(왕무, 조선풍의 듀엣, 가면무, 승무, 3개의 코리안 멜로디)와 오사카 공연의 5개는 그 수와 순서가 완전히 같았기 때문에 오사카 공연은 도쿄 공연의 복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공연의 조선무용은 도쿄-오사카 공연에서 발표됐던 2(<왕무><3개의 코리안 멜로디>)가 빠지고, 3(<검무>, <민요조>, <에헤야 노아라>)가 추가되어서 모두 6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카라즈카 공연의 제1부는 <검무(, 조선무용)><무우화(無憂華, 일본무용)>, <민요조(民謠調, 조선무용)>,<금가락춤(, 현대무용)>, <리릭포엠(リリツク ポエム, 현대무용)>, <희망을 안고서(希望いて, 현대무용)>6연목으로 구성되었는데, 현대무용이 3연목, 조선무용 2연목, 일본식 의상과 음악을 사용한 일본무용이 1연목이 섞여 있었습니다.

 

 

 

2부는 <승무(, 조선무용)><습작(習作, 현대무용)>, <호니호로사(ほにほろ, 일본무용)><습작(習作, 현대무용)>, <조선풍의 듀엣(朝鮮風のデユエツト, 조선무용)>이었고, 3부는 <생지(生贄, 일본무용)><가면무(仮面, 조선무용)>, <에헤야노아라(エヘヤノアラ, 조선무용)><적과 흑(, 현대무용)><마음의 흐름(, 현대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래서 2,3부에서도 현대무용이 4연목, 조선무용이 4연목, 일본무용이 2연목으로 비교적 고르게 구성되어 있지요.

 

전체적으로는 조선무용이 6연목, 현대무용이 7연목, 일본무용이 3연목으로, 당시까지 최승희 선생의 전공이었던 현대무용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고, 새로 시작한 조선무용이 3분의1이상, 그리고 일본인 관객을 위한 일본무용이 20퍼센트 정도 차지했습니다. 다카라즈카 공연의 레퍼토리는 자신의 전공인 현대무용과 새로운 관심을 기울인 조선무용, 그리고 관객의 호응을 배려한 일본무용이 고루 안배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다카라즈카 공연의 레퍼토리에서는 조선무용이 강조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2,3부에 모두 조선무용이 2연목씩 배치되어 있었고, 1부와 2부는 조선무용으로 막을 열었습니다. 특히 2부는 조선무용으로 시작해서 조선무용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또 다카라즈카 공연에 포함된 조선무용 작품들은 1934920일의 제1회 무용발표회 이후에 창작된 것에 머물지 않았고, 그의 최대 화제작 <에헤야노아라(1933)>과 그에 못지않은 인기작품 <검무(1934)><승무(1934)>도 포함됐습니다. 이 작품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1935년의 신작 <왕무(1935)><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1935)>가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아, 최승희는 다카라즈카의 관객들에게 최고의 조선무용을 보이기 위해 애썼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도쿄 히비야 공연이나 오사카 아사히회관 공연에 비해 발표 작품의 수와 조선무용의 구성, 그리고 그 순서의 배치가 상당히 달라졌던 점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다카라즈카 공연의 관객들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어떤 관객에 대한 배려였을까? 일본무용이 3개나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 관객들을 배려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자신의 최인기 조선무용 작품들을 총동원한 것으로 보아,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동포 관객들에 대한 배려가 깊었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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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19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宝塚大劇場公演々と異例行事でした

 

まず周辺大都市大阪1025神戸26)、京都118公演われたにもかかわらず小都市宝塚公演いました宝塚から大阪神戸までは電車30しかかからず京都までも1時間以内なので宝塚別公演くというのは興行ではあまり常識的ではありません

 

 

第二主要新聞宝塚公演予告記事異例です大阪公演1025広報朝日会館機関誌会館芸術10月号掲載された特集記事からまりました当時雑誌発行慣行10月号ならすでに9月中旬から編集されているので1月以上前から公演予告され宣伝されていたことがかります

 

神戸公演10261011日付神戸新聞舞姬崔承喜という記事宣伝開始その2週間主要新聞崔承喜紹介記事広告文掲載されけました京都公演118弘報広告1週間前111から京都新聞掲載されめました

 

しかし宝塚公演119広告大阪毎日新聞前日118、「大阪朝日新聞神戸新聞京都新聞公演当日朝刊新聞掲載しただけです

 

 

第三関西公演動線異例です崔承喜先生大阪25からまり神戸26)、岡山27)、29)、広島30西進ってきて119宝塚公演いますその1113から直方皮切りに九州巡回公演いました

 

つまり宝塚公演同線上関西公演初公演あるいは大阪2回目神戸3回目公演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が関西最後公演としてかれましたこれは宝塚公演大阪公演のように1月前から準備されたものではなく関西公演途中急遽行われたものだという印象えます

 

第四崔承喜先生公演日誌ますと宝塚公演"第二回大阪公演"かれています宝塚大阪いですが神戸とともに兵庫県します宝塚大阪勘違いしたのは崔承喜先生側宝塚のことをよくら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最後前文でも指摘されたように宝塚大劇場少女歌劇団専用劇場として使われ外部芸術家芸能人貸与しないという不文律があったことしかしその規則って崔承喜先生公演のために貸館されたことも非常異例のことです

 

異例性なったということは意図介入したということでしょうつまり宝塚公演最初から計画されていた公演ではなくれてまれた公演である可能性おそらく関西公演途中企画され提案され受諾されわれた可能性いです

 

おそらく宝塚少女歌劇団=阪急電鉄崔承喜先生大阪神戸公演盛況であるのを宝塚追加公演提案崔承喜先生側はこれをすでに日程まれた広島公演九州公演宝塚公演んだのでしょう

 

 

宝塚大劇場はなぜ崔承喜公演誘致しようとしたのでしょうか浮上したばかりのスター崔承喜興行性商品性調べたためでしょうが崔承喜師匠石井漠勧告仲介のためだった可能性があります石井漠1922世界巡回公演直前宝塚音楽学校教師としていたことがあったからです

 

崔承喜はなぜこの提案れたのでしょうか2千席劇場公演12百人誘致する撮影大会保障する収益当然良条件だったでしょうそれと宝塚公演てくれる朝鮮人同胞かったという受諾理由つだった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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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19일 최승희 선생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행사였습니다.

 

우선 주변의 대도시 오사카(1025)와 고베(26), 교토(118)에서 모두 공연이 열렸는데도 소도시 다카라즈카에서 또 다시 공연을 열었습니다. 다카라즈카에서 오사카와 고베까지는 전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교토까지도 1시간 이내이기 때문에 다카라즈카에서 별도의 공연을 연다는 것은 흥행의 측면에서 그리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주요 신문의 다카라즈카 공연 예고기사도 이례적입니다. 오사카 공연(1025)의 홍보는 예술잡지 <회관예술> 10월호에 실린 대대적인 특집기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잡지발행 관행으로 10월호라면 이미 9월 중순부터 편집되기 때문에 한 달 이상 전부터 공연이 예고되고 홍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베 공연(1026)1011일자 <고베신문>무희 최승희가 온다는 기사가 홍보를 시작했고, 이후 두 주일 동안 주요 신문에 최승희 소개 기사와 광고문이 계속 실렸습니다. 교토 공연(118)의 홍보 광고는 일주일 전인 111일부터 <교토신문>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공연(119)의 광고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하루 전인 118, <오사카아사히신문><고베신문><교토신문>은 공연 당일의 조간신문에 실었을 뿐입니다.

 

 

셋째, 간사이 공연의 동선이 이례적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오사카(25)에서 시작해서 고베(26), 오카야마(27), 구레(29), 히로시마(30)로 서진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119일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가집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1113일부터 노가타(直方)를 시작으로 큐슈 순회공연을 단행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카라즈카 공연은 동선 상으로 간사이공연의 첫 공연, 혹은 오사카에 이은 두 번째나 고베에 이은 세 번째 공연이 되어야 하지만, 간사이의 마지막 공연으로 열렸습니다. 이는 다카라즈카 공연이 오사카 공연처럼 1달 전부터 준비된 것이 아니라 간사이 공연 도중에 급작스럽게 마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넷째, 최승희 선생의 공연일지를 보면 다카라즈카 공연이 2회 오사카 공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와 가깝지만 고베와 함께 효고현에 속합니다. 다카라즈카를 오사카로 착각한 것은 최승희 선생측이 다카라즈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앞글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소녀가극단 전용 극장으로 사용되며, 외부의 예술가나 연예인들에게 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그 규칙을 깨고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위해 대관되었다는 점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례성이 중첩되었다는 것은 의도가 개입했다는 뜻이겠습니다. , 다카라즈카 공연은 처음부터 계획된 공연이 아니라, 뒤늦게 끼워 넣어진 공연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간사이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 기획되고, 제안되고, 수락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한큐전철)이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와 고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다카라즈카 추가 공연을 제안했고, 최승희 선생 측은 이를 받아들여 이미 일정이 짜인 히로시마 공연과 큐슈 공연의 사이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끼워 넣었을 것입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어째서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하려고 했을까요? 막 떠오르는 스타 최승희의 흥행성과 상품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겠지만,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고나 중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1922년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의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는 왜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2천석 극장의 공연과 12백명을 유치하는 촬영대회가 보장하는 수익은 당연히 좋은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다카라즈카에 공연을 보러와 줄 조선인 동포들이 많았다는 점도 수락의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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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承喜先生宝塚大劇場公演1935119日夕方7開演されましたこのニュースは関西地域のほぼすべての主要新聞報道公演宣伝する広告掲載しました

 

<大阪毎日新聞(11814)>公演日より1日早報道いて<神戸新聞(1192)><大阪朝日新聞(1197)><京都新聞(1192)>朝刊新聞公演記事広報広告掲載しました

 

 

いざ宝塚地元新聞記事つからなかったのですが宝塚中央図書館には古新聞所蔵されておらず明石兵庫県立図書館にもその日付宝塚新聞保管さ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す宝塚新聞はもう熱心調べる必要があります

 

各公演記事広告記事きく2つの部分かれています9公演らせる内容10日午前10午後1まる崔承喜野外舞踊撮影大会らせる内容です

 

崔承喜撮影大会とは舞踊衣装姿崔承喜つやつの舞踊作品試演している入場承認された申請者自分のカメラをって崔承喜舞踊姿撮影する競演大会でした会場はだいたい野外だったので野外舞踊撮影大会ばれていました

 

 

野外舞踊撮影大会はたいていコンテストでした撮影大会わると参加者自分った写真現像プリントして写真作品完成させこれを郵便直接主催側ることになっていました主催側作品審査して選別して入選者選定授賞をしたりしました

 

崔承喜野外舞踊撮影大会193481日鎌倉由比浜海辺でもかれ1935106には東京都西端遊園地である奥多摩渓谷でもかれた経緯があった

 

由比撮影大会東洋写真工業社主催したコンテストでこの大会2入選した桑原甲子雄1913~2007崔承喜写真でもられている

 

奥多摩撮影大会制限をかけましたライカカメラ所持者のみ申請資格がありました申請者殺到すると主催側申請者280制限この日撮った写真1人当たり3ずつしか出品できませんでした撮影大会後援会社である写真雑誌社<写真新報>自社写真記者撮影した崔承喜写真10193511月号掲載しました

 

 

ところで宝塚撮影大会由比奥多摩撮影大会より規模きかったです参加者制限しましたがその1200でした宝塚大劇場周辺空間活用できたからでしょう

 

撮影大会午前午後2けてわれましたのでそれぞれ1200参加したのかあるいはそれぞれ600わせて1200参加したのかはかではありませんが後者場合でもこれは崔承喜撮影大会最大規模です

 

宝塚大劇場2千席9公演入場料50特席3001だったのに撮影大会参加費一律1だったので公演収入より撮影大会収入かったです

 

 

しかしこの撮影大会撮影された崔承喜写真公開された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宝塚地方紙つけられなかったからかもしれませんがもしかしたらこの大会では撮影だけを許可してコンテストをわなかった可能性もあります

 

19351110宝塚大劇場野外舞踊撮影大会撮影された数千枚いや数万枚崔承喜写真はすべてどこにったのでしょうか

 

撮影大会参加者たちの屋根裏部屋倉庫っているかもしれないしあるいは現像引火すらされないままてられたのかもしれませんいずれの場合宝塚撮影大会から90年近ったではそれらの写真方法はほとんどない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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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1935119일 저녁7시에 개연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간사이 지역의 거의 모든 주요 신문들이 보도했고, 공연을 홍보하는 광고도 실었습니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118, 14)>이 공연일보다 하루 먼저 보도했고, 뒤이어 <고베신문(119, 2)><오사카아사히신문(119, 7)>, <교토신문(119, 2)>의 조간신문이 공연 기사와 홍보 광고를 실었습니다.

 

 

정작 다카라즈카의 지역신문 기사는 찾지 못했는데, 다카라즈카 중앙도서관에 고신문이 소장되어 있지 않았고, 아카시의 효고현립도서관에도 해당 날짜의 다카라즈카 신문이 보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 신문은 조금 더 열심히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 공연 기사와 광고 기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9일의 공연을 알리는 내용과 10일 오전10시와 오후1시에 시작되는 최승희 야외무용 촬영대회를 알리는 내용입니다.

 

최승희 촬영대회란 무용의상 차림의 최승희가 한두 가지 무용작품을 시연하는 동안 입장을 승인받은 신청자들이 자신의 카메라를 가지고 최승희의 무용 모습을 촬영하는 경연대회였습니다. 대회장은 대체로 야외였기 때문에 야외무용 촬영대회라고 불렀습니다.

 

야외무용 촬영대회는 대개 컨테스트였습니다. 촬영대회가 끝나면 참가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현상, 인화하여 사진 작품을 완성하고, 이를 우편이나 직접 주최 측에 보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주최측은 작품들을 심사하고 선별하여 입선자를 선정하고, 시상을 하곤 했습니다.

 

최승희 야외무용 촬영대회는 193481일 가마쿠라 유이가하마 해변에서도 열렸고, 1935106일에는 도쿄도의 서단의 유원지인 오쿠타마 계곡에서도 열린 바 있었습니다유이가하마의 촬영대회는 동양사진공업사가 주최한 경연대회로, 이 대회에서 2등으로 입선한 쿠와바라 키네오(桑原甲子雄, 1913-2007)의 최승희 사진이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오쿠타마의 촬영대회는 한 가지 제한을 걸었습니다. 라이카 카메라 소지자만 신청자격이 있었습니다. 신청자가 쇄도하자 주최 측은 신청자를 약 280명으로 제한했고, 이날 찍은 사진은 1인당 3장씩만 출품할 수 있었습니다. 촬영대회 후원사인 사진잡지사 <사진신보>는 자사 사진 기자가 촬영한 최승희 사진 10장을 193511월호에 게재했습니다.

 

 

그런데 다카라즈카의 촬영대회는 유이가하마나 오쿠타마의 촬영대회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참가자의 수를 제한하기는 했는데, 그 수가 12백 명이었습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 주변의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촬영대회는 오전과 오후에 두 번으로 나누어 진행했기 때문에 각각 12백명이 참가한 것인지, 혹은 각각 6백명으로 모두 합쳐서 12백명이 참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라도 이는 최승희 촬영대회 중에서 최대 규모입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2천석이었고 9일 공연 입장료가 50(특석 3백석은 1)이었던 반면, 촬영대회 참가비는 일률적으로 1엔이었기 때문에 공연수입보다 촬영대회 수입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날 촬영대회에서 촬영된 최승희 사진이 공개된 적은 없었습니다. 제가 다카라즈카 지역신문을 찾아내지 못했지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대회에서는 촬영만 허용하고 콘테스트를 진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351110, 다카라즈카 대극장 야외무용 촬영대회에서 촬영된 수천 장, 아니 수만 장의 최승희 사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요?

 

촬영대회 참가자들의 다락방이나 창고에서 잠자고 있을 지도 모르고, 혹은 현상이나 인화조차 되지도 않은 채 버려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다카라즈카 촬영대회로부터 9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사진들을 되찾아낼 방법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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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年代在日朝鮮人には宝塚つのつヤヌスでしたやかなショービジネスのメッカでありながら朝鮮人苦難現場だったからです宝塚表面的華やかさには地域近代化過程低賃金過労働しめられた朝鮮人がにじむわけです

 

ところが1930年代後半つまり1935年末から1937までの期間宝塚やかな歴史出会事件発生しました朝鮮舞踊家崔承喜登場です

 

崔承喜先生1926-1929東京石井舞踊団舞踊留学えた朝鮮って公演活動いましたがきな成果られませんでした朝鮮舞踊賤視風潮近代舞踊する無理解のためでした19315安漠(アンマク)先生結婚19328長女安勝子(アン·スンジャ)出産した崔承喜19333とともに2番目東京石井舞踊団首席舞踊家として朝鮮舞踊しいきました

 

 

1933520女性誌令女界主催した近代女流舞踊大会朝鮮舞踊作品エヘヤノアラ』(1931発表きな反響ました。 『エヘヤ·ノアラ成功えられ崔承喜朝鮮伝統から素材近代的再構成した僧舞(1934)剣舞(1934)などの朝鮮舞踊相次いで発表しました19355石井舞踊団から独立して<崔承喜舞踊団>げたその1020東京2回舞踊発表会いたすぐに日本巡回公演ました

 

大阪1025神戸1026)、岡山10271029広島1030公演した崔承喜はしばらくった京都118宝塚119舞踊公演いました

 

1935になると宝塚少女歌劇団創立1913されてから20年以上少女歌劇団ブームが日本全土がったです全国各地類似少女歌劇団られ広島羽田少女歌劇団1918)、大阪琵琶少女歌劇団1919浪華少女歌劇団1921)、東京松竹少女楽劇部1922がそれでした1932には松竹少女楽劇部名前松竹少女歌劇部改称そのから宝塚松竹少女歌劇団はライバルとなりダンスとわせたレビュー公演団先頭走者いでいきました

 

宝塚少女歌劇団1932東京進出浅草松竹座劇場拠点いた松竹少女歌劇部1933新宿第一劇場本拠した両歌劇団全国的巡回公演少女歌劇団全盛時代っていました

 

 

これといたるところに宝塚という劇場設立されました1932東京宝塚劇場開館して以来1935には横浜名古屋京都宝塚劇場がオープンしました朝鮮でも京城乙支路にあった黄金芸能館(1913)京城宝塚劇場(19251940))改称され大邱大邱キネマ倶楽部(1938)大邱宝塚劇場(1940)改称されました宝塚少女歌劇団人気映画界にもがり宝塚劇場盛業につながったのです

 

少女歌劇団ブームで日本伝統舞踊近代舞踊など芸術舞踊きく萎縮しましたが崔承喜朝鮮舞踊だけは人気まりました崔承喜朝鮮舞踊扇情性強調しなかった芸術舞踊でしたが崔承喜自身美貌作品異国性観客にアピールっていたからでしょう

 

 

それとともに崔承喜公演観覧えてくれた朝鮮人同胞声援きな役割たしました崔承喜公演朝鮮同胞居住していた地域かれたりしましたから

 

宝塚大劇場少女歌劇団公演以外芸術家/芸能人貸館しないことで有名だった劇場ですしかし1935119崔承喜公演はそこでわれました崔承喜例外提供したのです

 

そんな特恵のおかげで宝塚んでいた朝鮮人たちはやかな大劇場舞台朝鮮衣装朝鮮音楽伴奏げられる崔承喜朝鮮舞踊鑑賞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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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재일 조선인에게는 다카라즈카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였습니다. 화려한 쇼비지니스의 메카이면서도 조선인 고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표면적 화려함에는 지역 근대화 과정에서 저임금과 과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의 피와 땀이 배인 셈입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1935년 말부터 1937년까지의 짧은 기간, 다카라즈카의 화려한 얼굴과 어두운 역사가 서로 만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조선무용가 최승희의 등장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1926-1929년 도쿄의 이시이무용단에서 무용 유학을 마친 후, 조선으로 돌아가 공연활동을 펼쳤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무용 천시 풍조와 근대무용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었습니다. 19315월 안막 선생과 결혼하고 19328월 장녀 안승자를 출산한 최승희는 19333월 남편과 딸과 함께 두 번째로 도쿄에 건너갔고, 이시이무용단의 수석 무용가로서 조선무용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520일 여성잡지 <영녀계>가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노아라(1931)>를 발표해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에헤야 노아라>의 성공에 힘입은 최승희는 조선 전통에서 소재를 취해 근대적으로 재구성한 <승무><검무> 등의 조선무용을 잇달아 발표했습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최승희무용단>을 꾸린 그는, 그해 1020일 도쿄에서 제2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후 바로 일본 순회공연에 나섰습니다.

 

오사카(1025)와 고베(1026), 오카야마(1027)와 구레(1029)와 히로시마(1030)에서 공연한 최승희는 잠시 숨을 고른 후, 교토(118)와 다카라즈카(119)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습니다.

 

 

1935년이면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이 창립(1913)된 지 20년이 넘었고, 소녀가극단 열풍이 일본 전역에 퍼졌을 때입니다. 전국 각지에 유사 소녀가극단이 만들어졌는데, 히로시마의 하네다소녀가극단(1918), 오사카의 비와소녀가극단(1919)과 나니와소녀가극단(1921), 도쿄의 쇼치쿠소녀악극부(1922)가 그것이었습니다. 1932년에는 쇼치쿠소녀악극부가 이름을 쇼치쿠소녀가극부로 개칭했고, 이때부터 다카라즈카와 쇼치쿠의 소녀가극단은 라이벌을 이루면서 춤과 노래를 아우르는 레뷰공연단의 선두주자 자리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이 1932년 도쿄에 진출하고, 아사쿠사 쇼치쿠좌 극장에 근거를 두었던 쇼치쿠소녀가극부가 1933년 신주쿠 제일극장으로 본거지를 옮긴 후에는, 두 가극단이 전국적인 순회공연을 단행하기 시작하면서 소녀가극단 전성시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도처에 다카라즈카라는 이름을 가진 극장이 설립되었습니다. 1932년 도쿄다카라즈카극장이 개관한 이래, 1935년에는 요코하마와 나고야, 교토에 다카라즈카극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경성의 을지로에 있던 황금연예관(1913)이 경성보총극장(1925, 1940))으로 개칭됐고, 대구의 대구키네마구락부(1938)도 대구보총극장(1940)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의 인기가 영화계에도 번져서 다카라즈카극장의 성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소녀가극단 열풍으로 일본 전통무용과 근대무용 등 예술무용이 크게 위축됐으나, 최승희의 조선무용만은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최승희의 조선무용은 선정성을 강조하지 않은 예술무용이었지만 최승희 자신의 미모와 작품의 이국성이 관객들에게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함께 최승희의 공연을 관람으로 뒷받침해 준 조선인 동포들의 성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최승희의 공연은 주로 조선 동포들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에서 열리곤 했으니까요.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소녀가극단의 공연 이외에 다른 예술가/연예인에게 대관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극장입니다. 그러나 1935119일의 최승희 공연은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최승희 선생에게 예외를 제공한 것이지요.

 

그런 특혜 덕분에 다카라즈카의 어두운 그늘 속에 살던 조선인들은, 화려한 대극장 무대에서 조선의상을 입고 조선음악을 반주로 펼쳐지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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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宝塚市切畑てられました宝塚市立公園である入口けられた親水広場片隅位置しています

 

ここはかつて舊福知山線鉄道っていたところですが路線わってから線路撤去しただけで枕木がほとんどそのまま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線路沿って景色きやすい遊歩道造成されたため週末ごとに登山客わう場所でもあります

 

 

ところで、「宝塚朝鮮人追悼碑がなぜ玉瀬参拝墓ではなく切畑親水広場てられ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近藤富男調査チームの研究過程のためです1985から研究チームはこの地域われていた水道工事鉄道工事調査めましたその土木工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という心証ったためです

 

宝塚鉄道工事水道工事1880年代まり1910-1920年代までわれたのでこの工事参加した朝鮮人強制動員労働者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日本帝国朝鮮人強制動員1930年代まりましたからねらは朝鮮での窮乏した生活打開するために日本きかけた々でした用語では労働移民者だったのです

 

しかし各種土木工事結果報告書には朝鮮人参加したという記録はほとんどありませんでした国策工事受注した土木工事および人材管理会社朝鮮人雇用記録していません

 

 

それにもかかわらず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この工事朝鮮人労働者大規模参加したという事実をよくっていましたなぜなら1980年代にもこの地域には朝鮮人多数居住していてらのほとんどは先代家族がその土木工事参加するために宝塚工事わったもそのまま定着することになった家族史っていたからです

 

そこで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宝塚全域りながら高齢在日朝鮮人たちにインタビューしました198535にインタビューした徐巳用·サヨン85から1996721にインタビューした禹南喜·ナムヒ79るまで15のインタビュー記録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1997)』2収録されています

 

 

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文献記録調査並行しましたが1985年春宝塚市史編纂室若林泰氏から3埋葬認許證入手しましたこれは西谷村役場発行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埋葬認許證でしたこれをまえ研究チームは朝鮮人合宿所川辺郡西谷村玉瀬イズリハ1-45番地にあったことをめましたが3朝鮮人埋葬墓参拝墓つけ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

 

一方1993325研究チームは兵庫朝鮮関係研究会むくげの会員である堀内稔先生から1929の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朝鮮人2死亡3重傷ったとじた新聞記事のコピーを入手しました翌日鄭鴻永-近藤富男調査チームは武田尾から切畑事故現場踏査事故発生地域長尾山麓6トンネルの入口から50メートル前方左側さなであることを確認しました

 

 

8年間調査期間中鄭鴻永-近藤富男研究チームは5朝鮮人犠牲者文献確認しましたが事故場所埋葬地確認されたのは切畑だけでしたそれで鄭鴻永先生死去後近藤富男先生追悼碑てたのが切畑新水広場だったのです

 

ところが近藤富男先生真心感動したのか追悼碑建立2月前玉瀬滿福寺住職3朝鮮人無縁故三界万霊供養祭祀ってきた事実らせてきましたこのはすでに切畑親水広場追悼碑設立場所選定されすべての準備った状態だったため追悼碑玉瀬犠牲者3名前追加することにまとめられました

 

これが玉瀬3人犠牲者切畑2人分犠牲者追悼碑切畑てられることになったお便り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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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시의 기리히타에 세워졌습니다. 다카라즈카 시립공원인 벚꽃동산()의 입구에 마련된 신스이광장(親水広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 후쿠치야마선 철도가 지나가던 곳인데 노선이 바뀐 이후 선로만 철거했을 뿐 침목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 철로를 따라서 경치 좋고 걷기 좋은 산책길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주말마다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왜 타마세의 참배묘가 아니라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에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정홍영-콘도 도미오 조사팀의 연구과정 때문입니다. 1985년부터 연구팀은 이 지역에서 진행되었던 수도공사와 철도공사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토목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심증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다카라즈카의 철도공사와 수도공사는 1880년대에 시작되어 1910-1920년대까지 이뤄졌기 때문에 이 공사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강제 동원 노동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이들은 조선에서의 궁핍한 생활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으로 일자리를 찾아온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용어로 노동이민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각종 국책 토목공사의 결과 보고서에는 조선인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었습니다. 국책공사를 수주한 토목공사 및 인력관리 회사들도 조선인 고용기록을 남기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이 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참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도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선대 가족이 그 토목공사에 참가하기 위해 다카라즈카에 왔다가, 공사가 끝난 후에도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던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다카라즈카 전 지역을 다니면서 고령의 재일 조선인들을 인터뷰했습니다. 198535일 인터뷰한 서사용씨(徐巳用, , 85)로부터 1996721일 인터뷰한 우남희씨(禹南喜, , 79)에 이르기까지 15명의 인터뷰 기록이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의 제2부에 수록되었습니다.

 

정홍영-콘도도미오 연구팀은 문헌기록 조사도 병행했는데, 1985년 봄, 다카라즈카 시사(市史) 편찬실의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했습니다. 이는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가 발행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매장허가서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연구팀은 조선인 합숙소가 카와베군 니시타니촌 타마세마을 이즈리하 1-45번지에 있었음을 알아냈지만, 세 조선인의 매장묘와 참배묘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1993325일 연구팀은 <효고조선관계연구회><무쿠게회>의 회원인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선생으로부터 1929년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조선인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보도한 신문기사 사본을 입수했습니다. 이튿날 정홍영-곤도 도미오 조사팀은 타케다오(武田尾)에서 기리하타에 이르는 사고 현장을 답사했고, 사고 발생지역이 나가오산 자락의 신6호 터널의 입구에서 약 50미터 전방 왼쪽에 작은 공터임을 확인했습니다.

 

8년의 조사기간 동안 정홍영-콘도 도미오 연구팀은 5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문헌으로 확인했지만 사고 장소나 매장지가 확인된 것은 기리하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홍영 선생의 타계 이후 콘도 도미오 선생이 추도비를 세운 곳이 기리하타의 신스이광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정성에 하늘도 감동했는지, 추도비 건립 2달 전에 타마세 만푸쿠지의 주지스님께서 세 조선인의 무연고 만계삼령공양 제사를 해 온 사실을 알려오셨습니다. 이때는 이미 기리하타의 신스이 광장이 추도비 설립 장소로 선정되어 모든 준비가 갖춰진 상태였기 때문에, 추도비에 타마세의 희생자 세 분의 이름을 추가하는 것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마세의 3분 희생자와 기리하타의 2분 희생자의 추도비가 기리하타에 세워지게 된 사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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