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737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의 술 취한 모습을 묘사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작품의 의상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라고 했고, 결정적으로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한 춤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과연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의 모습을 묘사한 춤이었을까? 조선시대의 한량이란 하는 일 없이 노는 부잣집 젊은이를 가리켰다. 학문이나 수양에 힘쓰는 넉넉한 집안의 자제를 한량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주색잡기에 빠진 젊은이, 혹은 난잡성이나 퇴폐성은 그보다 덜하더라도 풍류와 노름에 빠진 부잣집 젊은이를 한량이라고 불렀던 것이 보통이다.

 

 

한량이란 특정신분이나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복식이 별달랐을 리 없다. 한량이라면 보통 양반 자제이었으므로 그들의 복장은 양반 복장이었고, 집안이 부유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좋은 옷감의 바지저고리에 쾌자와 가죽신 등을 곁들인 호화로운 복장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량 복장이라는 특별한 복식이 따로 있었을 리는 없다.

 

또 최승희가 이 춤을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은 1933520일인데, 최승희가 한성준으로부터 조선무용을 사사받은 것은 19346월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가 창작한 작품 중에 <한량무(1938)>가 따로 있다.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재해석해 창작했다는 작품은 바로 이 <한량무>일 가능성이 크다. 정병호(1985)에 따르면 이 <한량무>의 창작연대는 1939년이었는데,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193822LA 이젤극장 공연이 그 초연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작품은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 중에 창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춤(=<에헤야 노아라>)1933년에 창작되었지만 춤을 무대에 올린 것은 19345월 동경의 일본청년회관에서 열린 여류무용발표회라고 밝혔던 것을 보면, 이 작품이 <한량무(1938)>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보다 5년이나 이른 시기에 창작된 <에헤야 노아라(1933)>는 한량을 묘사한 춤이라고 보기 매우 어렵다.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춤일 수 없다는 사실은 최승희 자신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나의 자서전(1936)>에서 <에헤야 노아라>는 자신의 부친 최준현씨가 추던 <굿거리춤>을 배워서 작품화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술에 취한 자신의 아버지가 추었던 굿거리춤에서 영감을 얻어낸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나의 자서전(1936, 7-8)>에 서술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자.

 

도련님으로 자라신 아버지는 대단한 미남이셨고, 게다가 술자리도 좋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예능에도 능하셨는데, 그중에서도 <굿거리춤>을 가장 잘 추셨습니다. 흥에 겨워 아버지가 추시던 굿거리춤을 재미있게 바라보면서 어린 나도 어느새 이 춤을 외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바쿠 선생님의 작품 발표회에서 네 작품도 하나 발표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아버지의 <굿거리춤>을 떠올렸습니다. 쇠퇴한 조선무용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예술적으로 소생시키고 싶었던 나에게,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인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작품 창작의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 춤을 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나의 중요한 레퍼토리 중의 하나인 <굿거리춤>은 결국 아버지가 추셨던 <굿거리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외워버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 이 작품의 주인공은 중년 이상의 조선인 양반 남성이다. 그리고 중년 혹은 노년의 남성을 한량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행이 아니었다.

 

이상의 여러 문헌 증거와 상황 추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에헤야 노아라>의 소재를 술 취한 젊은 한량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

이학동 선생 인터뷰 때문에, 박경중 선생 인터뷰의 후속조사가 지체됐었다.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에 최승희 공연을 관람했다는 박경중 선생의 증언에 따라, 그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공연이며, 그 공연의 레퍼토리가 무엇이었는지 조사하던 중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언급한 3개의 연제 중에서 <초립동><보살춤>은 쉽게 공연 레퍼토리에서 찾아지고 정리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는 약간 복잡했다. 이 작품은 해당 공연 레퍼토리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제목과 창작 및 초연시기 등에 대해 모호한 점이 있다. 또 이 작품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점도 확실하지 않다.

 

 

우선 제목.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 19345월호는 이 작품을 <에헤노아라>라고 불렀다. 이는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잘못된 제목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의 제목구성 및 형식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제목) 에헤라노아라; (정의) 최승희가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 (구성 및 형식) 이 작품은 조선의 고전음악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음악을 사용하며, 전통적인 한량 복장에 갓을 쓰고 경쾌하게 추는 춤이다. 최승희는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새롭게 해석하여 애수와 즉흥성이 강한 춤으로 재창작하였다.”

 

이 두 문장 한 문단짜리 짧은 서술에 오류가 5개나 포함돼 있다. 첫째가 제목, 둘째가 반주음악을 관현악 편곡이었다고 한 점, 셋째는 한량 복장이라는 표현, 넷째는 <에헤야 노아라>가 한성준에게서 배운 태평무와 한량무를 기초로 창작했다고 서술한 점, 다섯 번째는, 이 작품이 조선의 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우선 제목을 <에헤라노아라>라고 한 것은 <에헤야 노아라>의 잘못이다. 이 제목이 처음 활자로 인쇄된 것은 1933520일의 <근대여류무용대회> 공연 직후의 언론보도였을 것이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은 발굴되지 않았고, 또 발굴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아마도 이시이 미도리)과 그의 연제가 인쇄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시이 미도리가 급성 늑막염에 걸렸기 때문에 최승희 선생이 불과 대회 이틀 전에 핀치히터로 이 대회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반년후인 1933922일의 <이시이무용단 가을공연>1934920일의 <최승희 제1회 발표회>의 공연 프로그램에는 분명히 <에헤야 노아라(エヘヤ・ノアラ)>로 표기되어 있다. 이것이 어떤 경위로 <에헤노아라>로 전해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오류는 어법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한국의 감탄사에서 에야는 정조 상승의 감탄사이고, ‘에라는 정조 하강의 감탄사이다. 에야는 흥을 돋우는 감탄사인 반면, ‘에라는 탄식이 밴 감탄사이다. 여기에 음절이 가운데 끼어들면 각각의 감탄사를 강조하게 된다. 에헤야는 흥을 더욱 돋우는 감탄사이고, ‘에헤라는 더욱 깊은 탄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군밤타령>이나 <호미타령>같은 빠르고 흥겨운 민요곡에서 감탄사 에헤야를 자주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성주풀이>같은 느리고 탄식조의 민요풍 노래에서 에라 만수를 추임새로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에라에야의 구별이 자주 혼동된다. 그래서 정태춘 선생의 <에헤라 친구야(1978)>는 가사의 내용상 <에헤야 친구야>로 바꾸는 것이 어법에 맞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들은 한 평자는 정태춘 선생의 목소리의 톤이 낮고 우수적이며, 가사가 체념성 평화(요즘 말로 하면 소확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에헤라 친구야>가 더 맞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 어떤 경우이든 에라에야를 구별한 필자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한량이 술에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배를 볼록하게 내민 채 팔자걸음을 걸으며 추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흥겨운 모습을 묘사한 코믹한 춤의 제목에 탄식과 체념의 감탄사 에헤라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

,

한국<팀아이><무용신2022>6<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나주 봉황면 욱실마을의 <케어팜 더욱(대표 최현삼)>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케어팜 더욱>이 올가을 추석명절 선물을 위해 출시한 <빨간 양파즙>을 구입해 주시면 1상자에 5천원씩의 기부금이 <무용신>에 전달됩니다.^^

 

 

저는 지난 2달 동안 <케어팜 더욱>3번 방문했습니다. 이 사회적 협동조합이 시작된 계기와 경과도 살펴보고, 진행 중인 사업들의 설명도 들었습니다. 농활 삼아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일도 해 봤습니다. 어제 다시 한 번 나주를 방문해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의논했는데... 상황은 생각보다 절박하네요.

 

<케어팜 더욱>은 연로하신 농촌 어르신들의 건강 돌봄을 목표로 3년전에 설립됐습니다. 어르신들께서 무리없는 노동 참여를 통해 건강도 돌보고 수입도 드리는 사업으로 나주 시정부의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선두주자에 해당하는 선진적인 시도입니다.

 

 

이내 여러 난관에 부딪혔고, 재정난 타개를 위해 양파와 포도(샤인머스캣)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샤인머스캣 출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양파는 <빨간양파즙>으로 가공해 지난달부터 시판하고 있습니다. 최현삼 대표가 귀농 후 3년의 노력 끝에 낸 첫 생산품인데, <빨간양파즙>의 성공적인 시장진입 여부에 따라 향후 사업들의 성패가 좌우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출시된 <빨간양파즙>은 여느 양파즙과 다르다고 합니다. 최현삼 대표의 3년간 연구와 실험을 반영했기 때문이죠. 3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고 합니다. (1) 물로 희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맛과 색이 진합니다. 색깔은 사진으로도 확인 가능하듯이 빨간 포도주와 같은 색깔입니다만, 맛은 직접 보셔야 알 수 있겠지만요.

 

 

(2) 양파즙 제조과정에서 침전물을 모두 제거했다고 합니다. 침전물이 남으면 색깔이 진해지기 때문에 물로 희석해도 어느 정도 농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빨간양파즙>은 침전물을 제거하는 대신 물로 희석하지 않는 다소 바보 같은방법을 택했더군요. 이런 건 소비자들이 알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3) 건강한 당도를 위해 스테비아를 사용했고, 건강효과에 변화를 주기 위해 야관문석류’, ‘솔잎의 액기스를 첨가했습니다. 그래서 <케어팜 더욱><빨간양파즙>은 세 가지입니다. <엄마 좋아 석류>, <아빠 좋아 야관문>, <모두 좋아 솔잎> 빨간양파즙이 그것이죠.

 

 

최현삼 대표의 3년간의 노력에 대한 보상과 향후 진행될 케어팜 계획을 위해서는 이번 <빨간양파즙> 판매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합니다. 자금 압박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빨간양파즙>이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최현삼 대표는 맛과 품질에 자신이 있다고 합니다. 제발 시험해 보아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케어팜 더욱>이 어떤 발전된 모습을 보일지 혹시 궁금하지 않으세요? 최현삼 대표의 청사진을 후원하고 싶으세요? 그럼, <빨간양파즙>을 구매해 주세요. 가정용으로도 주문해 주시고, 주변 선물용으로 다량 구매해 주세요.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올 가을 판매량이 1천 박스만 넘어서면 일단 <케어팜 더욱>이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2백 박스가 주문된 것을 보면, 품질과 맛이 좋은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께서 앞으로 3주일 동안 8백 박스만 더 주문해 주시면 <케어팜 더욱>의 꿈과 계획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케어팜 더욱><무용신> 캠페인이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고맙습니다.

 

조정희 드림 (2022/8/20)

 

<케어팜 더욱><빨간양파즙> 주문 정보

주문 전번: 010-5340-0578 (최현삼 조합장)

입금 계좌: 농협 351-5340-0578-43 (최현삼)

 

 

<무용신> 6차 캠페인 후원계좌

카카오뱅크: 7979-20-34510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지원(이인형)

,

한국 영화는 1920년대에 태동해 30년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하다가 40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군국주의적 문화 압살 정책에 짓눌려버렸다. 그래서 일제에 부역하는 일부 국책영화를 제외하고는 예술영화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예술 장르이자 계몽의 수단이었던 연극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실상 호남지역의 연극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뿌리도 깊고 저변도 넓은 편이었다.

 

호남 연극이 태동한 것은 1909년경이었다. 판소리가 서구 연극적 형태로 이행돼 만들어진 창극이 우리나라 연극의 시작인데, 김창환이 정학진, 유성준, 김정길 등 이 지역 명창 50여 명을 규합하고 <김창환협률사>를 조직, 그해(1909) 가을 광주천변(현 양림교 부근)에 가설무대를 설치해 공연한 것이 그 시초였다.

 

 

호남 연극사를 보면, <김창환협률사> 이후 1910년대에는 신파극이 유입되었고, 1920년대에는 근대극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에는 연극이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나, 1940년대에는 일제관헌의 검열을 받아야하게 되면서 잠복기에 들어갔다.

 

해방 후 호남인들의 연극 욕구는 다시 폭발했다. 19489월 창립된 조선대 연극회가 그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연극 붐은 195611월 광주극장에서 첫 막을 열었던 <전국학생연극제>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번 조사에 중요한 것은 조선대 연극회가 창립된 것이 호남 연극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과 이학동 선생님이 그 연극회의 창단 멤버이셨다는 점이다.

 

정식 이름이 <조선대 극예술연구회>인 조선대 연극회는 현지에서는 <조대극회>라고 줄여 부른다. 이 대학의 연극 동아리인 조대극회는 오늘날까지도 그 위용이 대단하다. 20101111일자 <경향신문>은 조대극회의 1백회 정기공연을 보도하면서 조대극회가 (201011) 17~18일 두 차례 펼칠 연극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 연습 무대를 소개했다.

 

 

이 연극은 인간의 탐욕, 권력욕, 성적 일탈 등을 꼬집은 셰익스피어 작품 37개를 각색해, 저물어가던 조선말의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였다고 한다. ‘철종 13은 진주민란이 일어난 1862년을 가리킨다. 유교사회 기득권에 대한 민중봉기의 물꼬를 튼 대사건이다.

 

조대극회의 100번째 정기 공연은 연극의 뿌리가 깊은 광주전남의 연극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기록이다. 이 작품의 러닝타임은 3시간인데 어떤 기성극단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출연 배우가 57, 연출, 조명 등 스태프가 20명에 이르렀다. 이 공연의 총기획자인 김영윤씨(81학번)는 직접 참여하지 못한 선배들은 약 2달 사이에 제작비 1억원을 모금했다고 전했다.

 

정기공연 1백회만 하더라도 대학 연극부가 해낸 것은 조대극회가 유일하다. 그만큼 조대극회의 저변이 넓고 깊이가 깊다는 뜻이다. 조대극회로부터 시작된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1956<전국학생연극제>로 절정에 달했고, 이후 연극협회 전남지부 발족(1962), 전대극회 창립(1965) 등으로 이어졌다. 전남 광주 지역의 연극 붐은 7-80년대에 전국적인 침체기를 거쳤으나 광주연극제 시작(1987), 광주학생연극제의 부활(1991), 광주지역 여배우들의 모임인 여우회창립(1996), 소극장연극축제의 시작(1998) 등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주 전남 지역의 연극이 융성하게 된 계기가 1948년의 조대극회 창립이었다는 점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당시 조대 미대 3학년이었던 이학동 선생이 그 창단 멤버 중의 한 분이셨던 것이다. 그해 9월 현 무등시네마 자리인 동방극장에서 <무의도 기행>이 상연되었던 것이 조대극회의 첫 정기공연이었고,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도 <귀촉도>를 들고 목포, 군산 등을 누빌 만큼 조대극회의 활동은 왕성했다.

 

이학동 선생님의 작품 <남매>가 나주극장에서 상연되었던 것도 전남 연극 붐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 작품의 기획과 연출, 상연과 반응 등을 조사하여 잘 정리하는 것은 전남 연극 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는 나주극장에서 1달간 상연되었던 <남매>가 중요 사안으로 조사되어야 할 것 같다. (*)

 

,

이학동 선생님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1회 졸업생이라고 하셨다. 1946929일 조선대학교가 개교할 때에는 4개 학부, 12개 학과에 모두 1,194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개학부에 미술대학이 있었을까? 혹은 12개 학과에 회회학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사 결과 조선대 개교할 때는 미술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회화과는 설치되었다. 이 회화과는 문리대에 속해 있었고, 그 안에는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학동 선생은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서양화를, 허백련 선생으로부터 한국화를 사사했다고 한다.

 

(지금은 조선대에 미술체육대학이 단과대학으로 독립되어 있고, 회화학부와 공연예술무용과를 포함한 10개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회화학부에 서양화 전공과 한국화 전공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개교 초기와 같다.)

 

 

2019510일 조선대학교 미술관은 <김보현과 실비아올드 미술관(조선대 본관 소재)>에서 개관 30주년기념 <찰나의 빛, 영원한 색채, 남도>전을 개최, 조선대 미대와 인연이 있는 원로, 중견작가들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남도 미술을 이끌어온 작품들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는 조선대 미술대학의 역사를 반영해 3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해방직후 개교 초기(40년대말-50년대초)에 강단에 섰던 김보현, 백명수, 윤재우, 천경자의 작품이 전시됐고, 2부는 조선대학교가 인상파 화풍의 산실이었던 1950년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 활약했던 오지호, 임직순, 김영태, 오승우, 조규일, 국용현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3부는 남도 화풍의 토대 위에서 독자적 화풍을 탐구한 진양욱, 황영성, 최영훈, 진원장, 이강하, 한희원, 김유섭, 박구환 등의 작품이 걸렸다.

 

이 전시회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학동 선생님이 (1) 전남 고흥 출신의 천경자(千鏡子, 1924-2015) 선생과 동년배였지만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과 (2) 전남 화순 동복면 출신의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선생의 제자였다는 사실이었다.

 

 

2016923일자 <중앙일보>호남 화맥의 산실로 69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조선대 미대가 <조선대학교 미술 70> 전시회를 열었다고 보도하면서 조선대 미대 동문과 전,현직 교수 320여명이 총 4개 분야로 나뉘어 전시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1부의 창립시기(1946-1970)에서는 개교 초기의 김보현, 윤재우, 천경자, 오지호 교수의 지도 아래 조선대 학파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이후 (2) 격동의 시기(1980), (3) 현대미술의 다양성과 대중화를 시도하던 시기(1990), 그리고 (4) 명예교수 및 타대학 출신교수인 김보현, 조복순, 김영태, 오지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회 기간 중에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던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 김영태 선생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조선대 미술인이라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지금이야 홍익대나 서울대가 더 높다고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중앙에서도 조선대를 알아줬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조선대가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태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대 미대는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화풍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전시회 소개 기사에 따르면 조선대 미대의 초기 주요 인물은 김보현, 오지호, 윤재우, 천경자 등의 교수진과 이학동, 김영태, 나점석 등의 1회 졸업생들이다. 이들에 대해 후속조사가 필요하고, 이학동 선생님 2차 인터뷰에서도 자세히 질문드릴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학동 선생이 한국화를 사사했다는 허백련(許百鍊, 1891-1977, 진도 출신) 선생은 조선대 미대의 창설과 초기 활동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조대 미대 70주년 기념전이나 조대 미술관 30주년 기념전에도 허백련 화백의 작품은 출품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학동 선생이 허백련 선생과 어떤 방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는지 후속조사 및 인터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

이학동 선생님이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제1회 졸업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선대학이 개교한 것은 1946929일이므로 그는 19469월에 입학해, 19506월에 졸업한 셈이 된다.

 

광주 소재 조선대학교는 흔히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대학이라고 불린다. 조선대학교의 역사를 살펴보니 그 서술은 반만 맞다. 조선대학교 설립운동은 해방 직후 19465월 조선대학설립동지회(=동지회)와 창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었다.

 

194685일 동지회는 광주서중학교에서 발족식을 열었다. “개성교육생산교육영재교육이라는 건학 이념과 민족국가 수립에 기여할 지역사회의 인재를 양성이라는 설립 이념을 채택했다. 같은 해 99<광주야간대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었고, 9294개 학부, 12개 학과, 1,194명의 학생이 등록한 <광주야간대학원>이 마침내 개교, 수업에 들어갔다.

 

 

동지회원들은 그해 12월부터 트럭을 타고 전라도 각 지역을 샅샅이 돌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군수와 면장, 이장과 경찰서장부터 기생에 이르기까지 당시 쌀 2말 값에 해당하는 100원짜리 설립동지회권을 구매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깨, , 미역, 장작 등의 현물을 기부했다.

 

당시 광주시장 서민호와 광주법과대학을 세우려던 이규정 등이 주축이 되어 모집된 동지회 가입회원은 194772,195명에 달했다. 가입 회원들의 거주 지역도 호남권은 물론 충청권과 제주도까지 포함할 만큼 광범위했다. 명실공이 민립대학이라고 불리는 것도 당연했다.

 

19461123<조선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여기에는 광주시장에서 전남도지사로 영전한 서민호의 역할이 컸다. 그는 광주 지역에 국한된 대학이 아닌 전국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목표로 제시했고, “정부수립 전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이끄는 초석이라고 주장했다. 1948526일 재단법인 <조선대학>이 미군정청의 설립 인가를 받게 되었고 박철웅 초대 총장이 취임했다.

 

 

조선대학교의 설립은 지역적 견지에서 이례적이었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연세대(1885), 고려대(1905), 숭실대(1906), 이화여대(1927), 숙명여대(1938), 한양대(1941)는 모두 경성에 있었다. 해방 이후 정부 수립 전에 설립된 홍익대(19464)와 서울대(19468), 성균관대(19469)와 단국대(194711)도 마찬가지였다.

 

지방에서 설립된 종합대학은 조선대(19465)와 부산대(19465)가 유이(唯二)했다. 그런데 부산대는 정부 주도로 설립된 국립대학이었던 반면, 조선대는 전남 민중의 힘으로 설립한 민립대학이었다. 그만큼 전남인의 교육열이 서울 못지않게 높았다는 뜻이다.

 

전남인이 민중의 힘으로 돈을 모아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크라우드 펀딩으로 대학을 세운 것이다. 1946년의 전남인들이 조선대학교를 설립한 것은 1988년 한국인들이 <한겨레신문>을 창간한 것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규모는 <조선대학교>가 훨씬 컸다. <한겨레신문>4천만명의 국민 중 61천여명이 주주로 참여했지만, <조선대학교>는 전국 인구가 19백만명(1948), 전라남도 인구가 3백만명(1949)이던 시절 72천명의 동지회원이 모은 돈으로 설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립으로 설립된 조선대학교는 초대총장 박철웅의 비리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박철웅은 기부된 현물을 현금화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하는 등 조선대 설립과정에서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총장 취임과 함께 동지회의 중심인물들을 제거하고, 동지회원 72천명의 기부내역을 은폐하면서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조선대학교를 사유화하고 세 차례 총장직을 차지하면서 30여년간 전횡을 일삼다가 1987년에야 물러났다.

 

따라서 조선대학교는 설립운동과 개교까지는 민립대학이었으나, 개교 후에는 박철웅의 사립대학으로 변질되었고,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박철웅이 자행한 비리로 인해 오늘날 조선대학교의 교육의 질은 초기 민중의 교육열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

 

,

이학동 선생님의 별명은 무궁화 화가이다. 조선대 미대 1회 졸업생이고, 허백련 선생과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한국화와 서양화를 사사, 지금까지 연 1-2회의 전시회를 꾸준히 열어, 통산 40여회의 개인전을 여신 분이니 화가라는 타이틀은 당연하다. 또 동,서양화를 넘나들면서 무궁화 소재의 작품을 꾸준히 제작하셨으니 무궁화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가 연극인으로도 활동했었던 뜻밖의 경력이 드러났다. 이학동 선생님과의 첫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의 출생 및 가족 배경과 학력과 경력을 되도록 자세히 알아내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그분의 배경이나 경력 중에서 <나주극장>과 관련된 사항이 있는지 찾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연극인으로서의 경력이 새롭게 드러났고, 그의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실이 발견됐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남매>였고, <나주극장>에서 약 한달 가량 장기 상연됐다고 했다.

 

 

그동안 언론이나 학계는 이학동 선생님의 연극인경력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주 언론과 전남의 언론, 나아가 전국지들이 무궁화 화가에 대한 기사를 많이 보도했지만, 그를 연극인으로 소개한 기사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201513일자 나주 신문 <빛가람타임스>의 기사였다.

 

천년고도 목사고을 예향 나주에서 예술을 논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어김없이 9순의 팔방미인 청운 이학동(李學童 91) 화백(畵伯)이 거론되곤 한다. 그는 나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단의 거목으로 동서양의 미술세계를 오가는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로서도 결코 프로에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기사도 이학동 선생을 화가이자 연극인이며 연주자라고 소개하면서도 그가 연극인으로 활동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학동 선생의 화가이자 연주자로서의 활동상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지만, 그가 왜 연극인이기도 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학동 선생님은 내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던 <남매>라는 연극이 <나주극장>에서 한 달 동안 상연되었다고 증언하셨다. 자신의 연극 경력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신 것이다.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뿐 아니라, 한 달 동안이나 장기상연 되었다고 하니 필자로서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은 이 연극 상연을 위해 각본과 연출뿐 아니라 무대 장치를 직접 제작했고, 배우가 모자라서 자신이 직접 일부 배역을 담당해 출연하기도 했다고 하셨다. 이같은 사실이 밝혀진 것은 언론 보도 영역에서라면 이른바 단독혹은 특종이라고 불릴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필자는 <남매>의 상연 시기와 배역, 출연진과 스탭진, 이 작품이 <나주극장>에서 상연된 사정과 경과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인터뷰가 이미 1시간 가까이 길어졌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서 피곤해 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남매>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1950년대 중,후반이나 1960년대 초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짐작했을 뿐, 더 구체적인 사항은 후속 인터뷰로 미루기로 했다.

 

 

이학동 선생님은 또 자신의 연극인 경력이 조선대 미술대학 재학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은 조대 연극부의 창단 멤버였고, 당시 여러 학생들과 협력해 정기 공연을 시작했으며, 자신은 미대 학생으로서의 특기를 살려서 무대장치를 도맡아 제작했다고도 하셨다.

 

또 여수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동안에는 학생들을 조직해 <교우>라는 제목의 연극을 상연한 적이 있다고도 하셨다. 이학동 선생님의 답변을 종합하면서, 필자는 그의 연극인 경력에 호기심이 급중했다. 그래서 당시의 전국 및 전남 지역의 연극계 상황을 미리 공부하면서 이학동 선생님의 2차 인터뷰를 준비하기로 했다. (*)

,

이학동 선생님 인터뷰는 나주시청 문화예술과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윤지향 팀장이 손수 나서서 도움을 제공한 것은 현재 진행 중인 <나주극장> 문화재생사업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극장 조사는 내 <최승희의 삶과 춤> 조사연구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학동 선생님께 <나주극장>에 관한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학동 선생님도 <나주극장>에 몰래 들어가다가 덜미 잡히곤 했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셨다. 극장주 성방명 선생은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와서 얘기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성방명 선생의 부인과 이학동 선생님의 자당께서 가까우셨기에 베풀어진 호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같은 <도둑 극장>형 에피소드는 사실 매우 보편적이어서 진부할 정도다. 내용도 다들 비슷하다. “몰래 영화/쇼를 보려고 극장의 뒷담/개구멍/화장실/창문 등으로 들어가다가 붙잡혀 매를 맞거나, 손들고 무릎을 꿇거나, 부모님한테 알려져서 야단맞은 이야기. 조사연구서에서 인터넷 블로그의 포스팅까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식상할 정도로 많다.

 

 

그에 못지않게 많은 극장의 추억이 <횡령 극장>형이다.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나중에 야단을 맞는 것이 골자다. 영화 <씨네마 천국(Cinema Paradisso)>에서 페페는 엄마한테 받은 심부름 돈으로 영화를 보고, 극장으로 쫓아온 엄마한테 귀를 잡혀 끌려간다. 5리라 지폐는 길에서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해 보지만, 그런 거짓말을 꿰뚫어보지 못할 엄마는 없다. 알프레도의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한 페페의 영화사랑은 더욱 열렬해졌고, 그는 극장의 영사기사를 거쳐 마침내 영화감독이 된다.

 

세 번째 유형의 극장 추억은 <극장 푸념>형이다. 극장을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다가 집안일이나 공부를 게을리 했거나, 혹은 무언가 사고를 쳐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평전 서문에서도 읽었고, 벌교의 염색 장인 한광석 선생님한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극장 푸념>형 에피소드의 결말로 등장하는 이 모양 이 꼴은 대체로 문화예술계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한국 교육의 특징인 추상적 암기식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는 청소년 시기에, 시청각 포함 오감을 자극하는 연극과 노래와 춤, 그리고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에 흠씬 빠지게 되는 것 자체가 많은 청소년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이다.

 

 

그래서 정병호 선생님은 무용가를 거쳐 무용학자가 되셨고, 한광석 선생님도 편집과 염색의 장인이 되셨고, 이학동 선생님도 화가가 되신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극장은 청소년들의 앞날을 예술가와 비예술가로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학동 선생님에게는 어린 시절의 짙은 추억이겠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진부할 수밖에 없는 <도둑 극장> 에피소드에 궁금한 점이 있다. 도대체 <나주극장>의 어디에 개구멍이 있었을까?

 

나는 오늘날 나주로 129번지소재 옛 <나주극장> 건물을 여러 차례 답사했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맞은편 5층 건물에 올라가서 극장의 지붕 사진까지도 찍었고, 그 사진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 건물의 전면은 크게 개축되었지만, 그 기본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나주로 쪽에서 바라본 건물의 양쪽 끝에 출입구가 마련된 외에는 다른 입구가 없어 보였다. 몰래 관람실로 들어갈 수 있는 담장이나 창문이나 화장실이 어디에 있었을까? 다음 번 인터뷰 때에는 그 점을 꼭 질문 드려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진부함을 벗으려면 디테일을 첨가해야 하는 법이다.

 

 

또 그렇게 개구멍을 드나들면서 이학동 선생님이 보셨던 영화나 연극, 혹은 쇼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궁금하다. 물론 그것이 어떤 영화나 쇼였는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볼거리가 드물었던 시절이니, <도둑 극장> 자체가 청소년들에게 흥미진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터뷰의 목적이 <나주극장>인 만큼, 이학동 선생님이 경험했던 <도둑 극장>은 어떤 것이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더 알아낼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학동 선생님의 기억을 조금 더 자세히 자극해 수집해 드릴 필요가 있겠다. (*)

 

,

김경손은 나주에서 이연년의 반란을 진압한 후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의 공과 승진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자주 모함을 받았다. 어떤 자가 최이(崔怡)에게 김경손 부자가 상공(相公)을 해하려 하며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라고 참소했다가, 최이가 조사 끝에 근거 없는 모함임을 밝혀내고 참소한 자를 강물에 던져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의 추밀원은 국사책에 흔히 왕명출납,’ ‘궁중 숙위와 군기를 담당한 기관으로 설명된다. 아직도 이런 한자어로 한국사를 가르친다면 문제라고 생각한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의 의사결정을 돕는 비서실과 경호를 맡은 경호실, 그리고 수도를 지키는 수도방위사령부를 겸한 곳이다. 즉 추밀원은 권력과 무력이 집중된 통치기구였던 것이다.

 

김경손의 추밀원 첫 관직인 지주사(知奏事)는 정3품의 고위 관직이었다. 그의 직전 관직은 전라도 지휘사로, 도지휘사의 지시를 받는 하급 관직이었다.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하급 무관이 내관직의 지주사로 임명됐으므로 크게 승진한 것이었다. 지주사 아래로는 좌,우승선과 부승선, 당후관이 있었고, 위로는 직학사와 부사와 원사, 그리고 추밀원의 수장 판원사가 있었다.

 

 

그의 초고속 승진을 시기한 누군가가 상공(相公)에게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했는데, 상공이란 최이(崔怡)를 가리킨다. 최이는 최우(崔瑀, 1166-1249)가 집권한 이후 개명한 이름이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1106-1179)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피바람과 함께 이의방(李義方, 1121-1175),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무신 권력이 이어지던 중, 1196년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다. 최충헌은 1219년까지 23년동안 실권을 행사했고, 아들 최우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최우는 1249년까지 30년동안 고려를 통치해, 최충헌-최우 부자는 반세기 넘도록 고려왕조를 좌우했다.

 

김경손은 아버지 김태서(金台瑞, ?-1257)의 장남, 즉 김경손의 큰 형 김약선(金若先)이 최이의 사위였고 고려 원종의 후비 순경태후 김씨가 그의 딸이기 때문에 왕실과 정방에서 모두 위세를 떨쳤다. 김경손이 모함을 받았을 때에도 최고권력자 최이는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심각한 모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조사를 통해 김경손의 무죄를 밝혀주는 성의를 보였다.

 

 

최이(=최우) 집권 시기 김경손은 부친과 큰형의 후광으로 주변의 질시와 모함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1249년 최이의 서자 최항(崔沆, 1209-1257)이 집권하자 사정이 바뀌었다. 서출이자 천출이라는 핸디캡으로 불안감과 시기심이 짙었던 최항은 근거 없는 무고에도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피모함자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다. 아버지 최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무렵 김경손은 추밀원 부사(副使)로 승진해 있었으나, 집권 직후부터 김경손의 인망을 꺼린 최항은 그를 백령도(白翎島)로 귀양 보냈다. 그뿐 아니라 1250년에는 추밀원부사 주숙(周肅)을 살해하고, 1251년에는 자신의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했다. 실권을 강화하기 위한 숙청작업이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최항은 독살당한 대씨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는데, 여기에는 대씨의 전 남편의 아들인 오승적(吳承績)도 포함되었다. 오승적은 강물에 던져져 익사했다.

 

최항은 김경손도 오승적과 인척 관계라 하여 그가 귀양 간 곳으로 사람을 보내 김경손에게 독주를 먹인 후 바닷물에 던져 죽였다. <고려사>에서는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며 조정이나 민간에서 모두 그를 믿고 소중히 여겼는데 갑자기 간적(姦賊)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김경손은 외적을 막고 내란을 진압하는 등 탁월한 공을 세운 고려 충신이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정주성에서 12명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격퇴한 것은, 12척의 함선으로 왜수군을 격멸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비겨질 만하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김경손 장군의 인지도가 높지 않고 추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의 친일파 후손과 공산주의자 후손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친일부역자 김동인-김동원 형제와 북한의 백두혈통이라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김경손 장군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 (*)

 

,

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하던 중 생가가 북성터에 있었다는 답변 때문에 나주성곽과 성문에 대해 후속 조사를 하던 중, 김경손 장군이 전라도 지휘사 시절에 나주성을 근거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이는 필자가 전혀 몰랐던 사실(史實)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고려사(103)> 열전16권에 실린 김경손의 기록을 찾아 읽었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사용된 현문(懸門)’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집중됐다.

 

김경손의 원래 이름은 김운래(雲來),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음서제도)으로 벼슬하다가 고종18(1231) 정주(靜州) 분도장군으로 임명됐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병력으로 몽골병을 물리쳤다.

 

 

재차 대군이 몰려오자 귀주(龜州)로 퇴각, 귀주성 남문을 수비하던 중 적장을 활로 쓰러뜨리고 적군을 물리쳤다. 이어 귀주성 수비 책임자로 20여 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 고종24(1237) 전라도 지휘사로 임명됐다.

 

나주에 부임한 김경손은 백제부흥을 목표로 원율(原栗=담양)에서 봉기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했다. 이연년 형제가 해양(海陽=광주)을 함락하고 나주성을 포위하자, 김경손은 별초(別抄=특공대) 30명을 선발,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왕의 고향)이므로 적에게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독전하고, 금성산신에게 제사한 후 출정했다. 이 부분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문을 열고 나가는데 현문(懸門)을 속히 내리지 않으므로 수문장을 불러 죽이려 하니 곧 현문(懸門)을 내렸다. 이때 이연년이 그의 부하들을 경계하여 지휘사는 귀주 싸움에서 성공한 대장이다. 인망이 높은 사람이니 내가 이 사람을 생포하여 도통(都統)으로 삼을 작정인즉 활을 쏘지 말라고 하고 ... 단병 접전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연년은 자기의 용맹을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내달아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아끌고 생포하려 했다. 김경손이 검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니 별초들이 몸을 생각지 않고 싸워서 이연년을 죽이고 높아진 기세를 내몰아 적들을 패멸시켰다.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의 나주성이 현문식 성문을 가진 석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문이란 바닥에서가 아니라 성체(成體=성벽)의 일정한 높이에서 만들어진 문이다. 출입을 위해서는 사다리 형식의 내리는() ()’을 사용하는 구조였다. 이는 사다리를 내리고 올려야 하는 출입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성문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문 구조는 5-6세기 신라시기부터 산성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고, 남북조 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뿐 아니라, 그 형식을 발전시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상한 점은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이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토축(土築), 즉 흙으로 지은 토성(土城)이었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 자료는 나주성이 석축으로 재건된 것이 조선 태종4(1404) 10월이거나, 문종1(1451) 8월이었고, 그 완성은 김계희(金係熙)의 나주목사 재임(14578-145911월 사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현문이 설치된 성벽은 대부분 석축(石築)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13세기 김경손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진압할 시기의 나주성은 석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들어 나주성을 석축성으로 개축 또는 증축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신축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13세기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석축성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은 아직 추정이지만, 15세기 중반에 나주목사 김계희가 증축한 나주성은 옹성을 부가한 홍예식 성문 구조였다. 이후 나주성은 임진왜란 직후를 비롯해 2차례 개축되면서 대한제국 시기에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성벽과 성문이 대부분 철거된 후, 그 헐린 북문에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

이학동 선생님께서 첫 인터뷰에서 자신의 생가가 북문터에 있었다고 답변하신 것을 계기로 당시 나주성과 북문터가 어떤 상태였는지 궁금했다. 일제강점기 나주 사진이나 지도를 찾아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1913년의 <지적원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 지도는 일제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한 결과로 작성된 것으로 <토지조사부>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의 토지소유 및 사용 현황을 그나마 제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 가지 미리 지적할 것은 전남지역, 특히 나주지역의 지적원도가 매우 이른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경성 중앙부인 광화문통의 측량이 191210월부터 1127일까지 끝났고, 1912년에 지적원도가 제작되었다. 1914315일부터 추가측량이 이뤄졌다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미 완성된 지적원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 나주군 나주면의 측량이 1913224일부터 38일까지였고, 지적원도가 완성된 것도 바로 그해(1913)였다. 경성 중심부와 나주면의 측량 시기 차이가 불과 4개월에 불과하다. 나주면의 측량은 당시 조선 제2의 도시였던 평양(191351-531)보다 약 3개월이나 빨랐고, 제주도(1914)나 강원도(916)에 비해서는 훨씬 빨랐다. 아마도 호남의 곡창지대에 위치한 나주의 토지 측량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3년 발행의 나주군 나주면(지금의 나주시 읍성권)의 지적원도에서도 나주성 4대문의 위치를 식별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이 지도에는 토지 구획과 함께 용도 및 번지수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문터를 짐작할 방법은 있었다. 지적원도에서 (1) 성벽()(2) 주요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3) 국유지()로 표시된 주소지를 찾으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적원도에 나타난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는 성벽에 접해있고, 간선도로에 면해 있는 택지()로 표시되어 있는데 괄호 안에 국유지()라고 되어 있다. 이를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남고문(南顧門)의 위치와 일치한다. 즉 오늘날 남고문의 주소 나주시 남내동 2-20번지는 일제강점기의 나주면 남문정 59-2번지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나주성의 동문인 동점문(東漸門)의 주소인 나주시 중앙동 126-8번지1913년 지적원도에서는 나주면 북문정 130번지였으며, 이 지점이 앞서 말한 세 조건, 성벽과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국유지였다. 또 오늘날 나주성의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은 오늘날 주소가 나주시 금남동 1번지이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 상의 주소는 나주면 북문정 30번지였고, 바로 이곳이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국유지인 택지였다.

 

그러나 나주성의 서문인 영금문(映錦門)은 위의 규칙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영금문의 오늘날의 주소는 나주시 서내동 108-2번지이다. 하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에는 성벽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국유지 택지가 없었다. , 이 지역에 몰려있는 나주시 서문정 77, 78, 79번지와 105, 106번지와 107번지등의 6개 주소지가 성과 간선도로가 만나는 주소들이었는데, 이중 어느 것도 국유지가 아니었다.

 

 

서문 인근의 국유지인 택지는 그보다 다소 동쪽으로 떨어진 나주시 서문정 103번지였다. 그러나 103번지가 성문이 있던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성문은 원래 성벽과 도로가 만나는 곳에 소재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문이 가장 이른 시기에 헐린 후 일찌감치 개인들에 의해 주택지로 점유, 또는 사유화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편 나주성의 북문터로 파악된 북문정 30번지는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 주소임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이 주소를 제외하면 인근의 다른 주소들은 모두 논이나 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북문정의 길 건너편의 박정리 1-7번지주택들이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다만 이 주거지들은 국유택지가 아니었는데, 어쩌면 나주성의 서문과 비슷하게 일찌감치 철거된 성문터를 주민들이 점유 혹은 사유한 상태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지도 및 주소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

 

,

인터뷰 중에 나는 이학동 선생님께 출생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분의 출생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인터뷰의 모든 질문은 육하(六何)를 파악하는 데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 언제어디서는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며, 그런 배경에서 누가무엇을의 좌표가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출생지를 묻는 질문에 이학동 선생님은 북문터라고 답변하셨다. 이 대답에 나는 의아했다. 북문은 지금의 북망문(北望門)을 가리킬 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망문은 국유지였을 것이다. 생가가 북문에 있었다니 이학동 선생님은 어떻게 국유지에서 태어나셨던 것일까?

 

추가 조사를 통해서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 수 있었다. 이학동 선생님의 출생 당시인 1923년경 나주성곽의 북문은 헐리고 없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북문이 헐린 자리에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한 집이 이학동 선생의 생가였을 것이다.

 

 

일제강점 하에서 나주 성곽과 성문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특히 성문들은 도로망 건설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헐렸거나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1913723일자 <매일신보(2)>는 나주읍민들이 간신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문을 허물지 말고 이를 개수하여 보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제목) 나주남문(羅州南門) 보존희망(保存希望), (본문) 나주는 구일(舊日) 전남의 수도(首都)되었던 역사가 유()하여 성문 누각이 구시(舊時)의 성황(盛況)을 상기할 자가 불소(不少)한 바 현금에는 불편한 성벽은 태반(太半) 철거되고 광주가도에 과재(跨在)한 동대문은 왕년에 자연 후폐(朽廢)되어 일야풍우에 전부 도괴(倒壞)하고 지금은 기영(基影)을 지()할 뿐이오, 금우(今又) 시중에서 나주 정거장에 통하는 대도(大道)의 성벽을 실()하여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자(姿)를 정()하여 아직 도괴(倒壞)의 액()을 면하였으나 일조풍우(一朝風雨)에 제회(際會)할 시()는 자연 동문의 예를 불면(不免)하리라는 우려가 유()한데, 기보존법(基保存法)을 강구(講究)하여 고적(古蹟) 보존하기로 나주의 일반 인민이 희망한다더라.”

 

이 기사에는 나주의 북문(北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나주의 동문은 이미 무너져 있고, 남문조차 그 파괴된 상황이 심각하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서문과 북문은 1913년경 이미 그 유적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나주성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고려사(高麗史, 103)> 열전(16) ‘김경손(金慶孫)이다. 이연년의 난을 토벌할 때 나주에는 문루와 현문 형식의 성문을 갖춘 토축의 읍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실록(太宗實錄)> 410월의 기사는 전라도에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성나주급보성(城羅州及寶城)’을 축성했다고 기록했다. 이후 문종 1(1451) 8월 병술조에도 나주읍성의 개축작업이 필요하다는 서술이 있고, 이 공사는 나주목사 김계희(金係熙, 재임, 14578-145911)이 완성했다.

 

이렇게 토성으로 축성되고 석축성으로 개축과 증축을 거듭한 나주성벽과 성문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렸다. 왜구를 막으려고 축성된 나주성이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만 것이다.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경에 남고문을 마지막으로 읍성 및 4대문이 철거되고, 대부분의 읍성터는 대지나 밭, 그 밖의 지목으로 등록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매일신보(2)>의 기사에 따르면 그보다 7년 전인 1913년에 나주성의 동,,북문은 이미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남문만 남았다. 따라서 북문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8월과 남문만 남았다고 보도된 19137월 사이에 헐렸던 것으로 추론된다.

 

성문과 성벽이 철거된 후에 그 터가 대지로 등록되었다는 것은 주민들이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뜻인데, 이학동 선생의 생가가 바로 그 북문이 헐린 터, 혹은 그 일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

1백년을 살면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자연에서야 거의 모든 게 그렇지만 인간에는 그런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지만 강과 산 그 자체가 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이 손을 댄 것은 무엇이나 10년 정도의 세월로 변하게 마련이다. 요즘 문화적 세대 단위가 30년에서 10년으로 줄어든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강산이 10번쯤 바뀌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그림을 그려온 분이 나주에 계신다. 청운(靑雲) 이학동(李學童, 1924-) 선생님이다. 해방 직후부터 서양화와 한국화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 오신 분이다. ‘까치를 잘 그리는 화가로 충남 연기 출신의 장욱진(1917-1990) 선생이 있지만, ‘무궁화를 잘 그리는 화가이학동 선생님은 전남 나주 출생이다.

 

 

84일 오후3시경 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나주 과원동 16-1번지(영산로 6366번지) 소재 <청운 아틀리에>, 이학동 선생님의 화실에서였다. 인터뷰는 나주 시청 문화예술과의 윤지향 팀장이 마련했고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젝트 담당자 3사람이 동석했다. 또 인터뷰 후에 봉황면 욱실마을 숙소로 돌아갈 차편을 제공하기로 하신 김순희 선생도 참석했다.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으신 이학동 선생님은 허리가 굽으셨기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셔야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티테이블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앉았는데, 그렇게 해서 이학동 선생님과 자연스레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소파와 테이블 사이가 너무 좁아서 가슴에 압박이 약간 느껴지긴 했지만, 인터뷰를 시작하자 금방 이학동 선생님과의 대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날 인터뷰의 주제는 <나주극장>이기는 했으나 그에 앞서 선생님의 기초 인적 사항과 교우 범위에 대한 질문을 먼저 드렸다. 이학동 선생님은 자신이 1924년생이라고 하셨고, 태어나신 곳은 나주 북문터라고 하셨다.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해보니, 이학동 선생님의 실제 생년은 1924년이 아니라 1923년이었다. 당시에는 영아 출생 후 1-2년을 기다렸다가 출생 신고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생존이 확실해 진 다음에야 호적에 등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로써 이학동 선생님의 올해 연세를 백세라고 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 1923년생이시라면 올해 세는 나이로 1백세가 되신 것이 맞다.

 

이학동 선생님의 공식 생년이 1924년이어서 손해 보신 일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일제는 만20세가 된 갑자년(1924)생의 조선 청년들을 심각한 신체적 결함만 없으면 무조건 징병대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였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 이학동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남았는지 조사해 보았다. 일제는 중국침략과 함께 1938<국가총동원법>을 제정,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2004<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자료에 의하면, 7,879,708(국내 6,126,180, 국외 1,390,063, 군인·군속 363,465)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었다.

 

 

조선인들은 어떤 역할로 강제 동원되었는지에 따라 노무동원(노동자, 군속,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병력동원(군인), 성동원(일본군위안부’, 10만 명 이상 동원)으로 구분되었는데, 이학동 선생님은 병력동원의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자명부>에는 14명의 이학동씨 이름이 등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1924년생 나주 출신의 이학동 선생님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이 <강제동원자명부> 작성에 사용되었던 <일정(日政)시 피징용자명부(전남 지역편, 57, 143, 229)>에는 3명의 이학동씨가 등재되어 있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청운 이학동 선생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록의 원본에는 본적이나 주소가 없더라도 이름은 한자로 씌였을 것이므로 이학동 선생님의 기록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

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19414월 혹은 19422), 어디서(경성 또는 광주) 열렸던 것이었는지, 최승희 선생의 1940년대 공연들을 중심으로 추론해 가는 중이다.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을 처음 보았던 것이 중학 시절이라고 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느 중학교였는지 알아낸다면 추론의 범위는 훨씬 좁혀질 테지만, 아직 그 점을 조사해 내지는 못했다. 정병호 선생이 경성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그가 보았던 최승희 공연은 19414월의 경성공연이나 1942년의 경성공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의 중학교가 광주에 있었던 것이라면 19414월말이나 19422월말의 광주공연이었을 것이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교를 알아내면 훨씬 간단할 수 있을 추론을 이처럼 복잡하게 진전시키는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최승희 선생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오면서 가장 취약했던 것이 1940년대의 공연들이었다. 따라서 박경중 선생이 언급하신 정병호 선생의 공연관람 에피소드를 계기로 아예 1940년대의 공연 전체, 특히 1941-1942년의 일본과 경성의 공연활동을 조사해 보는 것이 최승희 연구 전체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무용공연을 추론해 보기로 하자. 정병호 선생은 자신이 처음 관람한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초립동><보살춤>을 관람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보살춤>은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선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 때문에 공연 관람 후에는 최승희 공연 때마다 판매되었던 최승희 무용사진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돌아왔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병호 선생이 보았던 공연의 레퍼토리에 대한 서술을 조사하면서 한 가지 난점이 떠올랐다. 그것은 1941-1942년의 공연에서 <초립동><보살춤>은 레퍼토리의 일부였음이 확인되었지만, <에헤야 노아라>가 공연된 사실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19412월의 도쿄공연(귀조 제1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3작품으로 그중 전통작품이 2, 동양작품이 3, 조선작품이 8개였다. 이 레퍼토리는 4월초의 경성공연과 4월말의 광주공연에서도 거의 그대로 발표되었을 것이다.

 

1(1) 두 개의 속무(조선), (2) 검무(전통), (3) 옥적조(조선), (4) 화랑무(조선), (5) 신노심불로(조선), (6) 보현보살(동양), (7) 두 개의 전통적 리듬(전통), 2(1) 긴 소매의 형식(조선), (2) 꼬마신랑(조선), (3) 관음보살(동양), (4) 가면무(조선), (5) 동양적 선율(동양), (6) 즉흥무(조선).”

 

 

한편 194111월의 도쿄공연(이른바 귀조 제2회 공연)과 그 이후의 후속 지방공연들의 레퍼토리는 모두 12작품이었고, 그중 일본무용이 6, 국적을 밝히지 않은 조선무용이 5, 중국무용이 1개였다. 이 레퍼토리를 공연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전의 춤 (일본), 2. 화랑의 춤 (조선), 3. 옥피리의 곡 (일본), 4. 천하대장군 (일본), 5. 칠석의 밤(일본), 6. 즉흥무(고곡), 7. 무혼(일본), 8. 보살도(가무보살과 보현보살, 일본), 9. 초립동(조선), 11. 당궁의 무희(중국), 10. 옥중춘향(조선), 12. 세 가지 전통 리듬(조선).

 

 

두 레퍼토리에 모두 <초립동><보살춤>이 들어있으므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공연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는 두 작품 모두에 들어 있지 않다. 사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조선무용의 데뷔작이자 최고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의 레퍼토리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에헤야 노아라>라는 제목이 변경되었다면, 그 작품은 <신노심불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 취재기에서도 어느 정도 밝혔지만, <신노심불로><에헤야 노아라>에 스토리를 강화한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두 제목의 작품이 모두 노년의 조선인 남성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

,

정병호 선생(1995: 201)은 최승희의 공연 내용이 바뀐 것은 일제의 직접적인 개입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안제승의 증언을 바탕으로 최승희 선생이 가부키좌 공연이 끝나고 경시청에 불려갔앞으로 공연할 때는 일본의 춤을 늘려서 조선춤과 일본춤을 반반 구성하여 공연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경고도 받았다고 서술했다.

 

레퍼토리에 일본무용 작품을 반반 구성하라는 식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다른 자료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지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최승희 선생는 그 지시를 액면 그대로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1월에 있었던 도쿄 다카라즈카극장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공연된 12작품 중의 6작품(신전무, 칠석의 밤, 무혼, 천하대장군, 가무보살, 보현보살)이 일본무용으로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 신전무와 무혼은 이 공연을 위해 일본무용으로 새로 창작한 것으로 보이고, 칠석의 밤과 가무보살도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딱히 일본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우선 <칠석의 밤>은 견우와 직녀 전설을 작품화한 것인데, 그 전설이 일본 고유의 전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전설의 기원은 기원전 5세기의 중국이며 한국에서도 약 4세기 고구려 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의상과 음악에 따라서 중국무용이나 조선무용도 될 수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은 유럽과 미주에서 절찬리에 공연했던 <보살춤>의 제목을 도쿄 다카라즈카 공연에서는 <보현보살>고 바꾸었는데, 이는 새로 창작한 <가무보살>과 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공연 팜플렛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가무보살>은 지금은 일본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불화 <이십오보살래영도(二十五菩薩來迎圖)>를 보고 떠오른 영감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한다.

 

 

일본 카마쿠라(鎌倉)시기에 제작된 <25보살내영도>는 생전에 불법을 지켜 사후에 왕생자로 극락에 들어오는 사람을 스물다섯 보살이 환영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중에는 북이나 장구와 비슷한 모양의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보살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최승희 선생은 노래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보살들의 모습을 상상해 무용 작품화하고 이를 <가무보살>이라고 이름 붙였다.

 

공연 팜플렛은 무용작품 <보현보살>을 헤이안(平安)시기의 불화 <보현보살>을 보고 그 인상을 작품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아마도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회화 작품 <보현보살기상상(普賢菩薩騎象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는 보현보살이 연화좌(蓮華坐)를 얹은 흰 코끼리 위에 결가부좌하여 합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더 나아가 <천하대장군>을 일본 무용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견강부회에 가까운 일이다. 도쿄 공연 팜플렛은 이 작품을 일본 무악의 수법에서 받는 느낌을 주로 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서술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일본무용으로 분류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다.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당시에는 조선 전래의 장승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표정만 무서울 뿐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존재를 풍자하기 위한 무용작품이라고 설명되었던 것이다. 소재와 주제가 모두 조선적인 대표적인 조선무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천하대장군>을 일본 무용으로 분류한 것은 잘못된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도쿄 공연 후에 열린 경성 공연에서는 <천하대장군>이 레퍼토리에서 누락되었다.

 

이처럼 최승희 선생이 신작 일본무용 작품을 창작하고, 기존의 조선무용을 일본무용인 것처럼 서술해 프로그램에 소개했던 것은, ‘조선무용과 일본무용을 반반이 되게 하라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짜낸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승희 선생은 이런 식의 강요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제 군국주의의 요구는 점점 심해졌다. (*)

,

일제 군국주의 하에서도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공연을 멈추지 않았고, 이를 계속 공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국방헌금을 내고 신사참배를 할지언정, 자신의 무용만은 조선음악 반주의 조선무용 독무 공연으로 이어간 것이다. 이른바 살을 내주되 뼈는 지키는 전략인 셈이다.

 

최승희 선생의 이러한 결단과 고집은 조선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동안 계속됐다. 19417월의 요코하마(橫浜) 공연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1941717일자 일본의 영자신문 <재팬타임스(Japan Times)>의 보도에 따르면 요코하마 공연이 “721-22일 오후 7시 요코하마 타카라즈카 극장에서 특별 공연으로 열렸다. 이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10개의 무용이 포함되었고, 그 대부분은 동양무용(Oriental Dance), 동양의 리듬(Oriental Rhythm), 그리고 초립동 무용(Dance of Grass Helm)”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했다. , 최승희의 요코하마 공연 레퍼토리도 2월의 도쿄공연에서처럼 조선무용 독무작품으로 이뤄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두 가지 면에서 이전과 달라진 면을 보였다. 첫째는 19412월의 도쿄 공연에서 발표됐던 13작품 중에서 10개 작품만이 요코하마에서 공연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조선무용이라는 말이 동양무용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작품을 동양무용동양의 리듬이라고 소개한 것은, “조선음악으로 조선무용을 공연하려는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사는 최승희 선생을 조선인(Chosunese)’으로 소개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개월 후 1128-30일의 도쿄 다카라즈카극장 공연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발표작품 12개 중에서 6개가 일본무용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공연 팜플렛은 <신전무(神前)>일본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드러낸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천하대장군>일본 무악의 수법에서 받는 느낌을 주로 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했다. <칠석의 밤>일본의 가장 아름다운 전설의 하나인 견우직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며, <무혼(武魂)>일본 능악(能樂)의 무용적 수법을 도입해 ... 옛 무사의 영혼을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라고 소개됐다. <보살도(菩薩圖)>라는 제목 아래 <가무보살>카마쿠라(鎌倉)시대의 그림 ‘25보살래영도가 소재이며, <보현보살>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의 그림 보현보살을 소재로 창작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

 

이중 <신전무><칠석의밤><무혼>은 이 공연을 위해 새로 창작한 작품이다. 즉 명시적으로 일본적 소재를 무용화한 첫 번째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대장군>은 한국의 장승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지만 도쿄 공연에서는 이를 일본 무악(舞樂)’의 수법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이라고 설명을 바꿨다.

 

또 최승희의 대표작인 <보살춤>은 동양 공통의 불교적 소재로 창작된 동양무용이었지만, 이름을 <보현보살>로 바꾸고 일본 헤이안시대의 그림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이를 카마쿠라시대의 불화를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가무보살>과 짝을 이루게 했다.

 

 

 

또 명백하게 조선무용 작품인 <화랑의 춤><옥적곡>, <즉흥무><초립동>, 그리고 <옥중춘향>에 대한 설명에서는 조선무용이라는 언급이 완전히 배제되었고, <세 개의 전통리듬>은 유일하게 조선 고전무용의 세 가지 기본 리듬(염불과 타령, 굿거리)”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결국 이를 동양 무용이라고 소개했다.

 

요컨대, 194111월의 도쿄 공연 작품은 일본무용이거나(신전무, 칠석의밤, 무혼) 조선무용을 일본무용(천하대장군, 보현보살, 가무보살) 혹은 동양무용(세 개의 전통리듬)으로 둔갑시킨 것이거나, 혹은 조선 국적을 배제(화랑의춤, 옥적곡, 즉흥무, 초립동, 옥중춘향)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최승희 선생이 추구하겠다고 밝혔던 것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방향이었다.(*)

,

(1) 박경중 선생님 인터뷰를 계기로 (2)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3) 최승희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살펴보다가, (4) 적어도 1941년의 4월의 최승희 경성공연은 조선음악으로 반주되는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작품들이 발표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즈음 일제 군국주의는 강경해 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일본 열도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반도에까지 밀어닥쳤다. 일제 군국주의는 1931년 만주침략으로부터 시작되어 1937년 중국침략과 함께 강성화되던 중 1941127일의 미국 진주만 공습 이후 극단으로 치달았다.

 

 

일제 군국주의가 극단화되면서 조선의 정치, 산업, 사회 부문은 물론 문화 분야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심지어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194112월부터는 다방에서 영국과 미국 등의 적국(敵國)의 노래를 틀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기 시작했다. 19411230일자 <매일신보(4)>는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다방가에 흐르는 레코드의 멜로디에도 대동아 전쟁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안되기로 되었다. 레코드와 차를 가지고 손님을 끄는 다방가에는 얼마 전부터 오후 다섯시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레코드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경성식당업조합으로부터 통첩을 띄워서 현재 그대로 낮 동안에는 음향 없는 다방으로 실행하여 오는 터인데,

 

"대동아 전쟁의 발발과 함께 다시 이를 강화하여 다섯시 이전에라도 총후의 사기를 돋구는 우리나라의 군가만은 걸어도 좋으나 다섯시 이후라도 영국, 미국등 적국의 레코드 및 그 나라에서 취입한 것 또는 그 나라 작곡의 것은 일체로 걸어서는 안되기로 되었다. 그리고 독일, 이태리 등 추축국가에서 취입한 것 또는 작곡한 것이라도 시국에 알맞지 않는 경조부박한 것은 또한 걸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것이라 할지라도 회상적이요 감상적인 유행가 따위는 걸어서 안되기로 되었는데 다방이나 식당, , 카페 업자는 현재 가지고 있는 레코드 중에 미심한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 하고 한번 소관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알아본 연후에 걸어야 한다고 동조합에서는 업자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다방의 음악까지 간섭하기 시작했으니 무대예술 공연이나 영화 상영이 검열의 대상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고, 이는 최승희의 무용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최승희 선생은 경성 공연을 위해 1941327일 특급열차 아카츠키 편으로 오후 25분 경성역에 도착했는데, 그 길로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를 해야 했고, 29일 오전에는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했다. 예술가가 군사령부를 방문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당시 조선의 공연 허가권을 군사령부가 갖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공연 허가를 얻기 위해 최승희는 2천원의 국방헌금을 납부해야 했다. 1941년의 일본돈 2천원은 오늘날 약 3만달러(임금 기준), 즉 약 4천만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당시 2천석 규모의 부민관 공연이 만석일 경우, 1회 공연의 경비를 제외한 수익이 대략 2천원 내외였다. 따라서 5일동안의 공연 허가를 받기 위해 하루 공연 수익을 미리 상납해야 했던 것이다. 이 헌금이 표면상으로는 강제되지 않았는지 몰라도, 이런 기름칠을 하지 않았다면 최승희의 경성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기름칠의 효과는 컸다. 1941329일자 <조선신문(4)>에 따르면 이 2천원의 국방헌금의 댓가로 전조선 17개 도시에서의 공연 허가를 얻어낸 것이다. 42-6일 경성 공연, 46-15일 사이의 북선(北鮮)지역 5개도시(함흥, 청진, 성진, 흥남, 원산) 공연, 15-20일 사이의 신의주를 비롯한 서선(西鮮)지역 4개 도시와 인천 공연, 그리고 20-30일 사이의 부산을 비롯한 남선(南鮮)지역 6개도시의 공연 허가가 바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승희는 조선신사를 참배하고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해 거액의 국방헌금을 납부한 댓가로 경성을 시작으로 전조선의 17개 도시에서 조선음악을 반주로 하는 조선무용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

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추정하면서, 1940년대 초의 최승희 무용작품의 성격을 살피기에 이르렀다.

 

1941년 초에 열렸던 <조광><춘추>의 좌담회에서 최승희는 조선음악으로 반주되는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공연해 나갈 것이라면서, 그의 조선무용은 (1) 전통작품과 (2) 조선작품, 그리고 (3) 동양작품으로 구성될 것이며, 향후 동양작품의 비중을 높여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작품 분류는 그보다 5년 전에 출판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에서도 제시된 바 있었다. 자서전 15장의 내 무용의 방향에 대하여(舞踊方向いて)”에서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작품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사실 나는 나의 조선무용을 근대무용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에헤야 노아라><승무> 등의 작품은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검무><조선풍의 듀엣> 등의 작품은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 무용의 기법을 포함하고 있고, <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에 이르면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루고 단지 거기에 조선적인 색깔과 향기를 입히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때(1935년경)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과 서양무용을 결합해 작품화하는 문제를 고민 중이었다. 그는 도쿄 유학기간(1926-1929)에 전적으로 서양의 근대무용을 익혔고, 경성 활동시기(1930-1933)에는 서양기법 위에서 조선의 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지만, 두 번째 도일 후 첫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이 폭발적 인기를 끌자 <검무(1934)><승무(1934)>를 잇달아 발표했다. 바로 이 즈음 최승희 선생은 서양 근대무용 기법과 조선의 전통무용 기법 사이에서 충돌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분류법이 바로 <나의 자서전>에 기록된 무용 기법상의 분류이다. 각 부류에 상응하는 용어를 만들지 않고 그냥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이라든가, “어느 정도 근대 무용의 기법을 활용한 작품이라든가,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룬작품이라는 식으로 느슨하게 서술한 것을 보면, 이때만 해도 정교한 분류를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에서나마 최승희 선생이 예로 든 작품들은 주제와 소재와 정조에 있어서 모두 조선무용이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쯤 최승희 선생의 무용은 전적으로 조선무용으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이시기에 최승희 선생은 이미 조선무용을 넘어 동양무용의 개념화를 시도했다. <나의 자서전>의 같은 장에서 최승희 선생은 이렇게 썼다.

 

적당한 말은 아니겠으나,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 내 무용의 가장 중심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 자신의 서양 무용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쇼팽과 드뷔시의 곡에 의한 춤이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승희 선생이 조선무용에 머무르지 않고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고,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보려고 노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조선무용의 소재와 기법이 제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글에서 그는 나의 조선무용을 보다 풍부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그것을 국제적인 수준까지 높이려고 한다고 썼다. 뒤집어 말하면, 당시의 조선무용은 풍부하거나 복잡하지도 못하고,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서양무용이 발레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듯이, 그에 상응하는 동양무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양 각국의 무용이 가진 특수성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며 모든 동양무용을 관통하는 공통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 방향이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겠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

세계 순회공연(1937-1940)에서 돌아온 최승희 선생은 경성공연(194142-6) 직전에 문예잡지 <조광>과의 좌담회(330)에 참석, “조선음악과 조선무용으로 독무 중심의 공연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유럽과 남북미공연에서 조선무용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조광> 좌담회 다음날(41) 최승희는 또 다른 잡지 <춘추>가 개최한 좌담회에도 참석했다. 두 좌담회에서 밝힌 최승희 선생의 향후 계획은 비슷했지만 <춘추> 좌담회에서는 자신의 조선무용 작품들을 3가지로 명료하게 분류한 것이 눈에 띈다. 최승희 선생의 말이다.

 

 

내 프로그람 속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승무같이 종래 있는 전통 것을 보고 배우고 해서 발표하는 것, 둘째는 내가 상상해서, 전설 같은 데서 힌트를 얻어가지고 창작해서 하는 것, 예를 들면 조선 생활에서 테마를 만들어서, 활량이나 초립동이, 천하대장군 같은데서 말이죠. 그런데서 힌트를 얻어서 춤으로 만들어내는 것 하고요. 셋째는 전동양적인 것, 일테면 보살이라든가 -광범위의 동양적인 것, 아세아적인 것을 무용화하자는- 이렇게 세 가지 플랜이 세워 있어요.

 

이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공연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최승희의 대답이었다. 그가 분류한 세 가지 작품에 거칠게 이름을 붙이자면 (1) 전통작품과 (2) 조선작품, 그리고 (3) 동양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분류는 전날의 <조광> 좌담회에서도 제기한 바 있다.

 

프로그램을 세 종목으로 나누었어요. ... 첫째는 현재에도 남아 있고 제대로 해오던 향토무용, 민간무용 등을 다시 무대화시킨 것이고요, 둘째는 테-마는 조선 것인데 현재에는 무용화되지 않은 것을 제 상상력으로 이렇겠다 하고 만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동양적인 것, 즉 내지, 지나, 조선, 인도에 있는 얻은 인상이나 감상을 가지고 만든 것, 대개 그렇습니다.”

 

 

(1) 전통작품이란 이미 조선에 있던 작품이다. ‘종래 있던 전통 춤을 보고 배워서 다시 무대화한 것이다. ‘승무검무가 그 예이다. (2) 조선작품이란 조선 소재와 테마로 창작한 작품이다. 조선 소재란 조선의 생활이나 조선의 전설 등이라고 했다. ‘활량춤초립동,’ ‘천하대장군등을 예로 들었다. (3) 동양작품은 전동양적인 것, 즉 일본과 중국, 인도와 조선 등에서 얻은 소재에 대한 인상이나 감상을 무용화한 작품들이다. 최승희 스스로 보살춤을 예로 들었다. 이 분류법을 최승희 선생의 도쿄 가부키자 공연(1941221-25) 작품들에 적용해 보았다. 13작품 중에서 전통작품이 2, 동양작품이 3, 조선작품이 8개였다.

 

1(1) 두 개의 속무(조선), (2) 검무(전통), (3) 옥적조(조선), (4) 화랑무(조선), (5) 신노심불로(조선), (6) 보현보살(동양), (7) 두 개의 전통적 리듬(전통), 2(1) 긴 소매의 형식(조선), (2) 꼬마신랑(조선), (3) 관음보살(동양), (4) 가면무(조선), (5) 동양적 선율(동양), (6) 즉흥무(조선).”

 

유념할 것은 전통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최승희 선생은 이를 전해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승희의 승무(1934)’는 전통에 더 가깝다는 한성준의 승무(1939)’와 다르다. 한성준의 승무를 전수받았다는 그의 손녀 한영숙의 승무는 공연시간이 26분에 달하지만, 최승희의 승무는 5분을 넘지 않았다.

 

 

검무도 마찬가지였다. 이 작품의 기원은 삼국시대 신라 화랑 황창(黄昌)의 힘차고 웅장했던 춤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기의 검무는 기생들이 연회장에서 공연하는 부드럽고 유약한작품이 되고 말았다. 최승희 선생은 기생 검무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 본래의 강함역동성을 되살렸다고 한다. 최승희의 검무가 화랑 황창의 검무와 얼마나 유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조선말 기생들의 검무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 전통작품이라 하더라도 최승희는 이를 (1) 짧은 길이(5분 이내)와 기승전결의 구성이라는 근대적 기준에 따라 재구성하거나 (2) 문헌 고증에 따라 원래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작품은 전통작품이라 하더라도 창작무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미야코신문(都新聞)과 가진 인터뷰에서 조선악기를 사용하는 조선음악을 반주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계속 공연하겠다는 포부와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1941) 1128일부터 3일간 열린 귀조(歸朝) 2번째 도쿄 공연이었던 다카라즈카(寶塚)극장 공연 레퍼토리의 성격이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결심을 관철시켰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1941221-25)에 이어 열린 오사카공연(31-3, 아사히칸)과 교토공연(35-6)의 발표 작품들이 모두 조선무용 일색이었고, 이는 조선 경성공연(42-6, 부민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1228일자 <아사히신문(오사카판, 2)>에 따르면 오사카공연(31-3)과 교토공연(5-6) 레퍼토리는 도쿄 가부키자에서 발표된 13개 작품이 순서까지 똑같이 반복되었고, 194141일자 <조선신문(4)>에 따르면 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에서도 도쿄공연 레퍼토리서 <검무>만 제외한 나머지 12개 작품이 그대로 상연되었다.

 

 

최승희 선생의 결심과 계획은 1941330일 경성의 문예 월간지 <조광>최승희의 무용과 포부를 듣는 간담회라는 제목으로 주최한 좌담회에서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함화진(咸和鎭)과 송석하(宋錫夏), 이갑섭(李甲燮) 등이 질문자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좌담회의 내용은 <조광> 19415월호에 실렸는데, “서양 가셔서 민속무용과 향토무용을 주로 하셨겠지요?”하고 묻는 함화진의 질문에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프로그람을 세 종목으로 나누었어요. ... 첫째는 현재에도 남아 있고 제대로 해오던 향토무용 민간무용 등을 다시 무대화시킨 것이고요, 둘째는 테-마는 조선 것인데 현재에는 무용화되지 않은 것을 제 상상력으로 이렇겠다 하고 만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동양적인 것, 즉 내지, 지나, 조선, 인도에 있는 것에서 얻은 인상이나 감상을 가지고 만든 것,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전동양적인 무용, 향토무용, 궁정무용, 민속무용 그런 것을 기초로 하고 창작한 것, 또 한 가지는 예를 들면 초립동이니 천하대장군이니 하는 것이면 초립동이는 초립동이의 까부는 느낌이라든지 천하대장군의 <감지(>를 이메지네이숀으로 현표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으로 이번에 서양에서 했는데 그 사람들은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아요. 인도춤보다 조선춤을 그 사람들에게 알기가 쉬운 모양이에요. 조선 춤이라는 것이 대개가 흥에 겨워서- 다시 말하면 감정적이 아니예요? 희노애락의 감은 코스모폴리탄한 것이니까요. 국제적으로 공통되죠?”

 

이 대답에서 보듯이 최승희의 유럽과 미주공연에서는 대부분의 조선무용과 일부 동양적 무용작품이 포함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유럽과 미주에서 호평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이 <보살춤><전통적 리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기도 했다.

 

 

“<보살춤>이라든지 <전통적 리듬>이라든지 퍽 평판이 좋았어요. 보살춤이라는 것은 하체는 그대로 두고 주로 손과 상체를 놀리는 것인데요, 상체만 가지고 하는 것에는 서양 사람은 동양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보살춤이 문제도 됐고 평판도 좋았어요.”

 

춤에는 민족마다 버릇이 있다면서 민족마다 ... 무풍(舞風)이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송석하의 지적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민속무용이라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면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서반아 무용은 세계에 유명한 것이지만 아무가 해도 서반아 무용의 미묘하고 델리케-트한 곳은 표현하지 못한대요. 그렇지만 서반아 여자가 하면 설사 춤은 서툴러도 잘 표현한다니까요. 그런 점으로 봐서 동양사람이 서양무용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해요. 지금까지 저도 서양 무용을 해왔는데요, 인제부터는 동양무용에 전력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또 향후의 계획을 묻는 사회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무용한 지 십오년째 됩니다마는 외국 가서 제 밟아나갈 사명을 깨달았어요. 이후의 이상으로는 조선무용을 토대로 하고 힘이 자라는 대로 전동양적인 것도 해보려고 합니다. 불교예술도 좀 더 연구하고 인도무용, 일본 향토무용, 유구(流球)무용 같은 것도 손을 대 보겠습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조선무용을 조선악기의 조선음악으로 반주하겠다는 생각은 이 <조광> 좌담회에서도 다시 한 번 피력되었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의 경험과 후기를 되새기면서 최승희는 이렇게 말했다.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조선악으로 반주를 했더니 어떤 사람은 귀에 익지 않아서 서투르다고 양악으로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조선악의 몇 가지를 가지고 반주를 하는 것이 씸포니 오케스트라로 한 것보다도 몇 배 낫다고, 단순한 속에 미묘한 하모니는 여하한 오케스트라의 비()할 바가 아니라고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음악이 춤을 따라간다고 해요.”

 

 

이와 관련하여 반주자에 적당한 사람만 있으면 전속으로 두실 의향이 계시느냐는 송석하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무용생활을 할 때까지 손을 맞잡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하겠어요. 조선음악을 세계적으로 진출시키고 싶다는 야심도 있으니까요. (웃는다). 조선 음악을 위해서 일신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까지든지 함께 연구하겠습니다.”

 

이어서 이갑섭이 최여사의 예술을 맡길 만한 제자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제자도 양성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최승희 선생은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제자 양성보다 제가 연구할 것이 택산(澤山) 같아서요. 무어 그럴 여유가 있어야지요. ... 전에는 (문하생을) 사오십 명 두어 봤었죠.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의미로 가르쳐봤는데... 여러 가지 지장이 많아요. 그러나 유망한 아이만 있으면 이후라도 후계자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딸이나 조카딸 속에서도 뽑아가지고 가르쳐 보려고 합니다. 저이들도 좋아하니까...”

 

 

딸과 조카딸을 거론하는 최승희에게 세습을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의 질문을 던진 함화진에게 최승희는 제자 양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남의 애는 열심히 가르쳐도 중간에 튕겨지면 대성되기 전에 아무것도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제 딸이나 조카딸들에게 가르치려고까지 하는 생각이 나지요. 물론 끝까지 해보겠다는 희망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양성해 보고자 합니다. ... 제 자신이 미숙하나마 십오년 이상 걸어온 무용가로서의 노력의 결과를 후배에게 가르쳐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은 어디 여의하게 아니되느면요. ... 저는 사적으로 무용생활을 비결로써 미공개시킨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게 친척이거나 타인이거나 대성하는 희망이 있는 후배에게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용가로서 대성하기 위한 장시일의 노력을 끝끝내 갖는 사람이 드물어 걱정입니다.”

 

요컨대 희망있는 후배가 나타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면서도 그런 자질과 끈기를 가진 지원자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자 양성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에도 최승희는 일본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는 수제자들을 양성하지 않았는데, 그의 딸 안성희가 결국 그의 뒤를 이었다.

 

 

최승희가 제자 양성에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경성시절과 도쿄시절을 통해 그의 수제자로 성장했던 김민자(金敏子)가 해외 순회공연 동안에 자신의 허락 없이 조택원의 파트너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외도를 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최승희는 곧 김민자와 결별했고, 김민자는 독립했지만 이후 그다지 뚜렷한 성취를 일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독무 중심으로 진행하되 제자 양성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 이후 (1) 조선음악으로 반주하는 조선무용을 (2) 제자들의 도움없이 독무 중심으로 창작,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19412월에 가졌던 도쿄의 미야코신문(都新聞)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고, 그해 3월말 조선순회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에도 문예지 <조광>과 가졌던 좌담회에서도 재천명했던 것이다. (*)

 

,

박경중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언제 어디서 열렸던 것인지를 찾아가는 중인데, 시기는 19414월 혹은 19422월이었던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장소도 경성공연과 광주공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최종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최승희의 무용공연과 작품에 변화가 있었다.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최승희 무용작품과 공연의 경향성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일제가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시작한 태평양 전쟁의 여파 때문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최승희는 세계 순회공연(19371219-1940125)을 마치고 요코하마에 귀항한 직후, 1941221-25일까지 5일간 도쿄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歸朝) 첫 공연을 가졌다. 1941215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 6)>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는 세계순회공연 이후의 무용활동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제목) 민족무용은 민족음악으로, (부제) 피아노 없이 춤추는 최승희, (본문) 외유 3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무용수 최승희는 21일부터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귀조공연을 열게 되었는데, 이 발표회에 앞서 그녀는 선항성명을 한 끝에 어디까지나 동양 향토무용의 독자성을 발표하고 싶다는 염원에서 종래 사용해 온 반주악기에 피아노 사용을 금지하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민족무용은 역시 민족음악과 분리해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응한 것으로, 이를 위해 작년 말 경성에서 일류 악사 4명을 불러 목하 그 반주를 바탕으로 최승희는 민족무용으로의 재출발을 꾀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가부키자에서 5일간 혼자서 춤을 추겠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독무발표회는 앞으로도 지속해 나갈 것이며, 그녀는 제자도 가능한 한 취하지 않을 방침이며, 현재는 그녀의 외유 중에도 그녀의 연습장을 지키고 있는 몇 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창작발표회는 그것대로 개최하고, 만약 제자들의 모이게 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서 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그녀는 종래 무용계에 이쪽저쪽에서 일석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게 되어 있다. (사진은 춤추는 최승희)

 

이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세계 순회공연 이후 최승희 무용의 방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민족무용을 계속하되 피아노 대신 민족 악기로 반주하겠다는 것과 (2) 중무와 군무보다 독무 중심으로 공연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승희는 조선의 악사들을 채용했고 제자들을 더 모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는 세계 순회공연에서 얻어진 경험의 결과였을 것이다. 매니저역을 맡은 남편 안막과 단 둘이서 별도의 악단이 없이 축음기로 반주를 대신하면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 작품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완수하면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공에 힘입어 최승희는 가부키자 귀조공연에서도 유럽과 미주 순회공연 중에 발표한 것만을 선정해서 춤추겠다고 기획한 것인데, 실제로 그의 세계 순회공연 작품들은 모두 조선무용 작품들이었다. 가부키자 공연의 팜플렛에 따르면 19412월의 도쿄공연 발표작품도 다음과 같이 모두 조선무용 독무 작품들이었다.

 

 

1(1) 두개의속무(속곡), (2) 검무(타악기), (3) 옥적조(고곡), (4) 화랑무(속곡), (5) 신노심불로(고곡), (6) 보현보살(고곡), (7) 두개의전통적리듬(고곡), 2(1) 긴소매의형식(고곡), (2) 꼬마신랑(속곡), (3) 관음보살(고곡), (4) 가면무(속곡), (5) 동양적선율(속곡), (6) 즉흥무(고곡).”

 

도쿄 가부키자 공연 레퍼토리에는 구미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지 않았던 제목도 눈에 띈다. “두개의 속무긴 소매의 형식,” “동양선 선율즉흥무가 그것이다. 그러나 두개의 속무가 독일 뒤스브르크 공연에서 초연됐던 두 개의 기생춤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다른 작품들도 구미공연 작품들의 제목을 조금씩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

,

박경중 선생님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어떤 것이었는지 찾아가는 중이다. 지난 글에서는 19414월의 경성공연 레퍼토리를 살폈다. 이는 만3년의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최승희 선생이, 19412월 도쿄의 가부키자(歌舞技座)에서 일본 첫 공연을 가진 후, 그해 4월 조선을 방문해 가졌던 조선 첫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해(1941) 4월의 경성 부민관 공연의 레퍼토리에서는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다는 3개의 작품이 제목 그대로 발견되지 않았다. 작품의 제목과 내용이 다른 경우도 있고, 또 같은 작품이 다른 제목으로 소개된 경우도 있으므로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19422월 경성공연의 레퍼토리를 먼저 살피기로 하자. 1942218일자 <매일신보(4)>는 최승희의 경성공연을 소개하면서 레퍼토리도 함께 보도했다. 다소 길지만 기록을 위해서 기사의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제목) 신면목이 약여(躍如)한 최승희의 동양무, (부제) 다채한 프로로 매일밤(連夜) 성황, (내용) 일본의 고전음악을 중심으로 하고 동양적인 무용으로 일대 전환을 하여 새방향을 보인 최승희 여사는 동경 중앙공연에서 절찬과 지지를 얻었거니와 다시 몇 가지 향토의 춤을 가()하여 기보(旣報)한 바와 같이 이번 군사보급협회의 주최로서 전선공연을 가지게 된바 예정대로 경성공연이 16일부터 부민관에서 초야의 공연이 개막이 되었다.

 

감격에 사무친 xxxx의 기쁨으로 전 시가는 축하행사로 물 끓듯 하는 이날 밤 장내는 승전의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 춤추는 최여사의 포즈의 연결은 힘과 미와 건설에의 약동하는 동양무용의 진가를 살리었다. 이번 무용의 특색은 이전의 구미(歐米)적인 리즘이 전연 자취를 감추고 동양적인 전아한 리즘이 최여사의 원숙한 무기(舞技)의 조화를 얻어 일반 동호자와 관중에게 배가의 호평과 절찬을 받았다. 이제 당야(當夜)의 프로그람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 신전의 무(神殿, 일본의 의식무용의 장중한 형식미를 표현한 것.), (2) 화랑의 춤(화려하고 명랑한 청춘무), (3) 동양적 리즘(근대적 리즘과 동작), (4) 추심(追心, 능악(能樂)의 모성애 작품 중에서 취재, 죽은 내 자식의 모양을 추억하여 슬퍼하며 원통해하는 그 마음과 자태...), (5) 세 가지 전통 리즘 (조선의 고전무용의 세 가지 기본적 동작을 체계화해서 창작한 것.), (6) 칠석(七夕)춤형식(내지의 칠석춤의 전형적 수법을 취하여 무용화한 것.)

 

2. (1) 무혼(武魂, 우리 충?에 바치는 춤, 고래(古來)의 무사혼을 표현한 것.), (2) (8)보살의도(菩薩, () 가무보살(歌舞菩薩, 겸창鎌倉시대의 <25보살래영도>에서 취재한 것), () 보현보살(普賢菩薩, 헤이안시대(平安朝)의 명화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취재, 무용화한 것), (3) 화립(花笠)의 춤(鄕土舞踊), (4) 칠석야(七夕夜, <牽牛織女>傳物에서 취재), (5) 초립동(草笠童, 소년 신랑의 희희낙락한 모양), (6) 인도풍의 춤(인도무용의 수법), (7) 사죽(四竹)(류큐琉球무용의 대표적인 것), (8) 즉훙무(卽興舞, 가야금 산조의 변화에 주제를 취한 것). (사진은 최승희).”

 

이 공연의 발표작품 목록에는 <초립동>이 등장했다. <보살춤>이라는 제목은 없지만 <보살도(菩薩圖)>라는 제목 아래 <가무보살><보현보살>이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아마도 정병호 선생이 이 공연을 보았다면, 이 두 작품 모두, 혹은 그 중의 하나를 <보살춤>이라고 기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에헤야 노아라>는 이 작품목록에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이 작품목록이 중요한 것은 경성 부민관 공연 이후에 이어진 전조선 순회공연에서도 이 작품들이 상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은 그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선례를 따라서, 먼저 수도 경성에서 공연을 가진 이후 그 레퍼토리를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하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부의 6작품, 2부의 8작품, 14작품으로 이뤄진 이 레퍼토리는 4월말부터 5말까지 약2개월에 걸쳐서 조선의 18개 도시 순회공연에서도 상연되었을 것이다. 다만 모든 지방 공연에서 이 14개 작품을 전부 공연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현지 사정에 맞추어 작품의 숫자와 순서를 조정했을 가능성은 있다.

 

따라서 만일 정병호 선생이 이 공연을 관람했던 것이라면, 경성에서나 혹은 광주에서 이 공연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

 

,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1) 1941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이거나, (2) 1942216-20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혹은 (3) 19422월말-5월하순 사이의 지방 순회공연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시절이 19404월부터 19453월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어떤 것이었는지 범위를 더 좁히려면 정병호 선생이 어디에서 중학교를 다녔는지 알면 된다. 박경중 선생님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고, 김준혁 선생은 광주에서 다니셨다고 했다. 동시에 두 곳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는 없으므로 서울과 광주, 둘 중의 한 곳일 것이다. 만일 서울에서 중학교 생활을 했다면 (1)(2)의 부민관 공연일 가능성이 높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3)의 지방 순회공연 중의 광주공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어도 광주공연을 관람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신문기사들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공연이 광주 공연이라고 못 박기도 했는데, 정병호 선생의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5)>의 머리말에 기록한 자신의 증언에는 지역이 특정되지 않았고, 박경중 선생님과 김준혁 선생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디였는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다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최승희 공연의 레퍼토리를 살피는 일이다. 정병호 선생은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1934)><초립동(1937)><보살춤(1937)>을 관람했고, 특히 <보살춤>의 의상이 선정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따라서 위의 (1), (2), (3)의 공연에서 이 세 작품이 한꺼번에 발표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414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레퍼토리는 194141일자 <조선신문(4)>에서 기사화되었다.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 공연이라는 제목의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제목)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의 공연, (부제) 2일부터 부민관에서, (본문) 2일부터 경성부민관에 출연하는 세기의 무희 최승희의 귀국 제1회 무용공연은 만도(滿都)의 뜨거운(灼熱的) 전인기아래 그 개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호화로운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1: (1) 두 개의 속무(つの俗舞, 음악은 속곡(俗曲)), (2) 옥적조(玉笛調, 고곡(古曲)), (3) 화랑무(花郞, 속곡), (4)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고곡), (5) 보현보살(普賢菩薩, 고곡), (6) 두 개의 전통적 리듬(つの傳統的リズム, 고곡); 2, (7) 긴소매의 형식(長袖形式, 고곡), (8) 소년 신랑(少年花婿, 속곡), (9) 관음보살(觀音菩薩, 고곡), (10) 가면무(假面舞, 속곡), (11) 동양적 선율(東洋的旋律, 속곡), (12) 즉흥무(卽興舞, 고곡). (사진은 그의 무대모습).”

 

 

이 기사에 보이듯이 19414월 경성 부민관 공연의 레퍼토리는 1,2부에 6작품씩 모두 12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괄호 안의 속곡(俗曲)이나 고곡(古曲)이라고 표시한 것은 반주음악이다. ‘속곡이란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고곡이란 조선의 고전음악인 아악을 가리킨다.

 

민요와 아악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더라도 원곡 그대로 사용된 적은 거의 없다.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각 작품에 맞추어 원곡을 편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듬과 박자, 멜로디와 가사는 원곡과 같더라도 그 진행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축음기를 이용한 녹음 반주일 경우에는 가사가 있는 경우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레퍼토리에 따르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다는 <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보살춤>이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 없었다. <보현보살><가무보살><보살춤>에 가까운 제목인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둘 중의 어떤 것이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작품이었을까? 더구나 <에헤야 노아라><초립동>은 그 비슷한 이름의 작품도 찾을 수 없다.

 

어찌된 일일까? 19414월의 부민관 공연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암튼, 조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

,

최승희 선생은 193712월부터 194012월까지 만 3년동안 세계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4회에 걸쳐 미국에서 공연했고, 19391월의 파리 공연부터 그해 6월의 네덜란드 덴하크(=헤이그)공연까지 유럽순회공연, 2차대전의 발발로 유럽을 떠난 이후 19399월에서 194012월까지 북미와 남미 공연을 가졌다. 최승희 일행이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요코하마로 돌아온 것은 1940125일이었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이 19404월부터 중학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조선에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관람하려면, 최승희 선생이 세계 순회공연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후 다시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한 19414월까지 기다려야했다. 최승희 선생은 1941328일 경성에 도착, 42일부터 6일까지 경성공연, 425일에는 부산공연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때 경성 공연과 부산공연 사이에 광주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공연을 가졌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최승희 선생은 19415-6월 베이징과 톈진에서 18회의 공연을 가진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1942년에는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조선과 만주와 중국 각지에서 대륙전선 위문공연이 있었는데, 216-20(5일간) 경성부민관에서 공연한 후, 2월 말부터 5월 하순까지 강릉, 예산,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목포, 광주, 대전, 청주, 천안, 안성, 수원, 춘천, 개성, 평양, 신의주 등에서 공연한 바 있다.

 

 

이는 일제의 조선군사보급회가 최승희 선생을 초빙해 주최한 조선 순회공연으로 강준식(2012)은 강릉을 제외한 17개 도시를 나열했으나, 정병호(1995)는 개성과 신의주를 제외한 16개 도시를 나열한 바 있었다. 하지만 두 도시 목록 모두 순천과 여수, 광주와 목포 등 전남 4개 도시를 포함했고, 나주와 벌교는 들어있지 않았다.

 

1943년에는 812일 도쿄를 출발하여 시모노세키, 부산, 신의주, 만주, 안둥, 푸순, 선양(봉천), 다롄, 창춘(신경), 지린, 하얼빈, 치치하얼, 베이안, 자무쓰 린커우, 무단장, 투먼에서 공연을 갖고, 914일부터 26일까지 난징 공연, 927일부터 1015일까지 상하이 공연, 113일부터 한커우, 텐진, 칭타오 공연, 1123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 공연 등, 4개월 반의 중국 공연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갔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져 일본에서의 공연이 어려워지자 최승희 선생은 315일 조선으로 이주했다. 이후 425일 부터 부산과 대구공연을 거쳐 52-9(8일간) 경성 부민관 공연, 511-15(5일간) 평양공연, 612-13일 개성공연, 619-21일 대구 공연을 가졌고, 이후에도 전주, 부산, 대구, 대전에서 공연을 가졌다. 다시 97-11일 경성 중앙극장에서 공연한 후 최승희 선생은 11월 북경으로 이주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에 머물렀다.

 

 

따라서 박경중 선생님의 증언대로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 서울에서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관람했다면, 이는 194142-6일의 경성공연이거나 1942216-20일의 경성공연, 혹은 194452-9일까지 8일간 열렸던 경성공연이었을 것이다. 세 공연은 모두 경성의 부민관(=후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그러나 만일 김준혁 선생의 증언대로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 광주에서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관람했던 것이라면, 19422월말부터 5월 하순까지 가졌던 조선 순회공연이었을 것이다. 1944년에도 425일부터 621일 사이에 조선의 지방 순회공연을 가지기는 했으나, 광주에서 공연을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방 순회공연 보도에는 공연도시가 망라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도 광주 공연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은 최승희 선생의 공연 작품들이 1941-1942년 공연과 1943년 이후의 공연 작품들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 정병호 선생이 중학생 시절에 관람했다는 <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보살춤> 등의 대표적 작품들은 1942년까지만 공연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은 194142-6일의 경성공연이거나 1942216-20일의 경성공연, 혹은 19422월말-5월하순 사이의 조선 순회공연이었을 것이다. (*)

 

,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이자 최초의 본격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7)>의 저자이신 정병호(鄭昞浩, 1927-2011) 선생님이 나주 출신이심을 나는 나주에 와서야 알았다. 다시 찾아보니 약력에 분명히 나주 출생이라고 되어 있는데도 전에는 보지 못했었다. 사람의 인지과정은 선택적이고 상황구속적임에 틀림없다. 취재할 때 반드시 현장에 가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주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의 절친이셨다고 한다. 박경중 선생님도 1927년생이라고 하셨으니까 갑장이셨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나 공식 기록에 나오지 일화를 많이 이야기해 주셨다. 그런 일화들은 대개 최승희 연구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정병호 선생의 삶과 그의 최승희 연구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박경중 선생의 말씀 중에 사실 관계에 의문을 불러일으킨 점도 있었다. 박경중 선생님은 정병호 선생이 중학 시절에 최승희 선생의 무용공연을 보고 감탄한 나머지 자신도 무용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공연이 경성(=서울) 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나는 혹시 정병호 선생이 중학교 시절에 보셨던 최승희 공연이 나주공연이었을까, 하는 의문으로 조사연구를 시작한 것인데, 박경중 선생님은 그것이 서울공연이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인터뷰에 응했던 나주문화원 전 사무국장 김준혁 선생은 그것이 광주공연이었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정병호 선생이 평전 <춤추는 최승희>의 머리말에 쓰신 내용을 다시 찾아보았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자.

 

일제 시대에 우리 학생들은 이침 조회 때에 동쪽을 향해 서서 천황에게 경례를 하고 자기들이 황국 신민이라고 맹세하고 살았다. 그러니 이승만, 김구도 몰랐고 뒷소문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이 들먹여질 정도였다. 그런 시대에도 손기정과 함께 최승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그 둘은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나도 중학생의 몸으로 몰래 극장에서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았다. 그때에 본 최승희의 춤은 <보살춤>, <초립동>, <에헤야 노아라> 들이었다. <보살춤>은 광채가 나는 보석과 구슬을 꿴 줄을 몇 가닥 몸에 걸쳤을 뿐일 정도의 반나체의 모습을 하고 높은 무대에 올라가 손만 가지고 춘 것이었다. 조명이 처음에는 배꼽 부분을 비추다가 차차 온몸으로 퍼졌는데, 사춘기에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겠지만 하도 요염해서 어쩌면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울까! 저렇게 아름다운 예술이 있을까!’ 하고 느꼈다. 소문에 그이가 세계적인 무희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때에 그 흥분과 감격을 간직하려고 최승희의 사진 몇 장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손기정이 조선인들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9368월의 베를린 올림픽 이후이므로 정병호 선생의 무용공연 관람도 그 이후임을 알 수 있다.

 

 

또 정병호 선생이 최승희 공연에서 보셨다는 작품들의 창작연대를 조사해 보았더니, <에헤야노아라>1933520,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영녀계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초연되었고, <초립동><보살춤>193724, 오사카 아사히칸(朝日館)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따라서 공연작품을 기준으로 해도 정병호 선생의 최승희 무용 첫 관람은 19372월 이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가 황국신민 서사를 지어낸 것은 1937년이다. 그해 102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최종 결재한 후 황국신민 서사는 전 조선의 학생들에게 암송하도록 강제됐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의 기억 내용은 193710월 이후로 다시 미루어지게 된다.

 

 

또 정병호 선생은 중학생이었을 때 최승희 무용 공연을 보셨다고 했다. 당시는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취학연령이 만8세였다. 학제는 6년제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5년제 중학교에 진학하도록 되었다. 정병호 선생은 19404월부터 19453월까지 중학교에 다니셨을 것이다.

 

따라서 정병호 선생께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보신 것은 1940년 이후의 일이게 된다. 다만 영민한 학생들은 7세 혹은 심지어 6세에 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최승희 선생도 만6세에 숙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했었다. 정병호 선생도 그와 비슷한 전례를 따랐다면 그의 중학교 시절은 19394월이나 19384월로까지 앞당겨질 수는 있을 것이다. (*)

,

지난 2022719일 나주 시내의 한 찻집에서 박경중 선생님을 만나 뵙고 약 1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주 문화원장을 역임하신 박경중 선생님은 지금도 나주 문화계의 지도자급 원로이시고, 나주의 명소 남파고택의 주인이기도 하시다. 지금도 그는 나주시 금성길 13번지(지번주소, 남내동 95-7번지)”의 남파고택에 거주하신다.

 

이 저택은 1884년 남파(南坡) 박재규 선생이 초당채를 지으신 이래 1910년대에 안채와 아래채를 짓고 1930년대에 문간채와 바깥사랑채를 지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3,750평의 대지에 20동의 건물로 구성된 남파고택은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주택으로 남도지방 상류층 주택의 전형일 뿐 아니라, 각 건물들이 근대 한옥의 시기별 변천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198761나주 박경중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전남 나주 문화재(153), 20091217일에는 남파가옥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민속문화재(263)로도 지정됐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인터뷰 요청에 응해주신 것은 전적으로 나주 큰언니 김순희 선생 덕분이었다. 김순희 선생은 나주시 도시재생주민자치위원회에서 활동하실 때부터 박경중 선생님을 모셨다고 했다. 인터뷰 자리에는 <케어팜 더욱>의 최현삼 선생도 동석했는데 박경중 선생님은 농사일을 노년층 돌봄과 치유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취지에 공감하셨고 구체적인 실천 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하실 만큼 깊은 관심을 나타내셨다.

 

나는 박경중 선생님께 (1) 최승희 나주 공연 여부와 (2) 나주의 8개 극장의 역사를 파악하는 것이 리서치의 목적이라고 말씀드렸고, 이와 관련해서 최승희 연구가 정병호 선생에 대해서, 그리고 일제강점기 문헌에서 찾아낸 나주의 4개 극장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박경중 선생님께서는 정병호 선생님과 직접 교분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의 생가와 최승희 연구 과정에 대한 여러 일화를 전해 주셨고, <나주극장><나주중앙극장>에 대한 사실들도 다수 말씀해 주셨다.

 

박경중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관심을 끌었던 것은 (1) 정병호 선생이 태어나 자란 집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셨던 점, 그리고 (2) 정병호 선생이 어려서부터 춤과 노래에 능했고 중학교 시절 (서울에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관람한 이후 부쩍 무용에 관심을 가졌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우선 정병호 선생의 생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최승희 연구의 권위자이신 정병호 선생의 생가 위치를 여러 번 강조해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일단 조사해 둘 필요가 있다. 박경중 선생님께서 정병호 선생의 생가가 나주성당의 길 건너 집이자 박정자 선생 댁 뒷집이었다고 하셨다.

 

박경중 선생님과의 인터뷰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바로 나주성당을 찾아갔다. 나주성당은 지금의 나주시 박정길 3번지,’ 지번 주소로는 나주시 산정동 18-2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숙소에서 약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으므로 로시난테를 타니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박정길은 영산로에서 갈라져 북동쪽으로 뻗어나간 작은 도로인데, 두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나주향토음식체험문화관(박정길 1번지, 산정동16번지)>이 자리 잡고 있고, 나주성당은 바로 그 오른쪽 옆이다. 나주성당과 향토음식체험문화관 사이에 옛날식 대문이 보존된 한식 저택이 남아 있는데, 어떤 건물인지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었다.

 

 

지금은 박정길은 물론 영산로 주변 지역이 산정동에 포함되어 있지만, 1913년의 지적원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이 지역이 나주면 서문정(西門町)’에 속해 있었다. 나주성의 북문인 북망문(北望門)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북문정이 아니라 서문정이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지적원도(1913)와 카카오지도(2022)를 비교하니 박정자 선생님 자택의 일제강점기 주소는 서문정 86 혹은 87번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그렇다면 정병호 선생님의 생가는 서문정 87번지였을 것이 분명했다. 87번지는 후면에 국유지를 면한 대단히 큰 집이었는데, 정병호 선생의 부친이 천석꾼이었다는 박경중 선생님의 말씀이 실감이 났다.

 

그러나 이 주소지들은 지금은 모두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

,

김순희 선생은 이번 <최승희 나주공연><나주의 극장들> 조사에 참가해 주신 홍일점이다. 역시 첫 나주 방문에서 홍양현 선생의 소개로 처음 인사했는데, 원래 말이 없으신가보다, 하는 착각을 했다. 에코왕곡에서 머무는 동안 말씀이 거의 없으셨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순형 선생님네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하고 정찬용 선생 댁으로 이동할 때 김순희 선생의 차를 얻어타게 됐는데, 아마도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접대 차원이었겠으나, 얼마나 이야기를 구성지고 재미있게 하시는지 깜짝 놀랐다.

 

 

게다가 김순희 선생의 전라도 말이 일품이었다. 나는 전라도말에는 여성 앨토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편견은 열여덟살 때 생겼다. 대학 시험을 떨어지고 2차 시험을 회피하기 위해 무전여행을 떠났었는데, 광주 검찰청에 근무하시던 외삼촌에게서 여비를 뜯어내기 위해서 충장로 우다방 앞에서 검찰청 가는 길을 물었었다. 그때 들었던 친절한 대답은 둘째 치고 나는 그분의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에 뻑~ 가고 말았다. 재수를 앞둔 비감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작업을 걸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는 전라도말이 프랑스어보다 아름다웠는데, , 여성의 앨토성 액센트여야 했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의 목소리가 딱 그랬다. 운전하시면서 친구 분과 전화통화를 하실 때나 나주가 어떤 곳이고, 자신이 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셨는데, 내가 열여덟살 때 들었던 딱 그 목소리였다. 그때 그분이 다시 나타나신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김순희 선생의 또 다른 특징은 자뻑이다. 자신이 이쁘고 아름답고 총명하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계셨다. 한때 나주 최고의 미인이었는데, 지금은 3위로 내려앉은 것을 대단히 애석하게 여기셨다. 순위를 누가 매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이 그렇게 믿고 사신다는 데야 어쩔 도리는 없다. 실제로 이쁘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이쁘고 총명하다는 점을 자신감의 근거로 당당하게 내세우시는 모습이 특이했다. 이런 현상을 전문용어로 깔때기 혹은 자뻑이라고 부르는데, 나한테도 익숙한 개념이다.

 

 

나는 대학 1학년때 빵꾸(F) 났던 학점을 때우느라고 복학한 뒤에 심리학 개론을 재수강해야 했는데, 그때 담당교수가 장병림 교수님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수업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고, 특히 마지막 수업에 하셨던 말씀 중의 한 구절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제군들, (, 실제로 제군이라는 말을 쓰셨다.^^), 살다보면 힘든 일이 많을 거다. 그럴 때마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큰소리로 자꾸 말해라. 그러면 진짜로 괜찮아질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자성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일종이 아닌가 나중에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주문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굴곡과 구비가 많은 삶을 살아오면서도 이만하면 괜찮지하면서 지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만하면 잘한 거지하면서 자뻑의 경지를 업그레이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남들한테 하지는 못했고, 언제나 혼잣말이었지만, 그래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김순희 선생은 그런 자뻑 멘트를 남들에게도 서스럼없이 날리신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정찬용 선생 댁에서 바비큐 파티 하는 동안에도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앉으신 김순희 선생이 간간이 날리는 자뻑 멘트에 감탄하느라 고기 맛을 몰랐다.

 

<최승희 나주공연><나주의 극장들> 조사연구를 도와주시도록 김순희 선생께 부탁을 드린 것은 물론 그윽한 앨토성 전라도 액센트나 심각한 수준의 자뻑 때문은 아니다. 김순희 선생의 나주 네트워크가 매우 넓고 촘촘하고 끈끈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주제로 질문을 하든지 김순희 선생은 그건 이러저러한 분이 잘 아실텐데, 소개해 드릴까요하고 대답하곤 하셨다. 그게 뻥이 아니라면(실제로 뻥이 아니었다) 처음 방문하는 낯선 곳에서 조사연구를 하는 연구자에게는 꼭 필요한 가이드였다. 그래서 초면의 실례를 무릅쓰고 조사팀에 참가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던 것이고 다행히 승낙해 주셨다. (*)

 

,

엊그제까지만 해도 역대 나주의 극장들을 6개로 파악됐었다. <호남의 극장문화사(2007, 위경혜)>는 해방 이후 나주 지역에 <나주극장(1955)><영산포극장(1958)>, <중앙극장(1963)>이 있었다고 했고, 나는 고신문을 조사해 남문정의 <마연(馬淵)극장(1931)>, <금성정(錦城町)극장(1931)>, <촌상(村上)극장(1938)><나주극장(1939)>을 더 찾아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6개의 극장을 이미 찾아내어 발표한 논문이 있었다. 김남석의 <나주지역 극장의 생성과 역사적 전개에 대한 연구(2022, 160)>가 그것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보자.

 

 

“19313월 나주에 방문한 김소랑 대표 삼천가극단은 방문 공연을 남문정(南門町) <마연극장>에서 시행했다(조선일보 193138). 19317월 나주에서 시행된 영사대회 역시 금성정극장에서 시행되었다(동아일보, 193178). 그런가 하면 1938년에 열린 나주국방의회(羅州國防義會)는 촌상극장에서 정기총회로 개최되었다(동아일보, 193884). 1938년 나주 시국 강연도 이 촌상극장에서 개최된 바 있다(동아일보 1938107). ... 1939년 나주에서는 가정방호조합(家庭防護組合)’ 결성식이 나주극장에서 열렸다(조선일보, 1939628). ... 동 시기에도 촌상극장은 여전히 존재했다. 가령 19399월 나주에서 열린 신불출, 유추강, 고봉선의 만담과 야담대회는 촌상극장에서 시행되었다(동아일보, 193993).

 

촌상마연은 둘 다 일본인의 성()이다. 각각 무라카미마부치라고 발음한다. 이 두 극장의 설립자는 일본인이었고, 그들의 성을 따서 극장 이름을 지은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촌상극장><무라카미(村上)극장>, <마연극장><마부치(馬淵)극장>이라고 불러야 맞겠으나, 이 글에서는 당시의 관행대로 <촌상극장><마연극장>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그런데 김남석(2022, 157)은 나주 지역에 극장이 더 있었다고 서술했다. 영산포에 <영산포극장> 말고도 <영산포 중앙극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김남석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또한 나주 지역에는 영산포도 포함되는데, 영산포에는 영산포극장과 영산포중앙극장이 존재했다. 영산포극장이 더 오래된 극장이었고, 영산포중앙극장은 이와 경쟁 관계에 있는 극장이었다. 두 극장은 시차를 두고 설립되었고, 그로 인해 영산포극장은 전통과 역사성을 확보한 극장이 되었고, 영산포중앙극장은 개성과 세련미를 겸비한 극장으로 설립되었다.”

 

실제로 내가 <영산포극장> 터를 답사했을 때, 인터뷰에 응한 영산포 주민 한 분의 증언에 따르더라도 <영산포극장> 외에도 <영산포중앙극장>이 영산포 다리에서 홍어거리 쪽으로 50미터쯤 내려간 곳에 3층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그는 또 <영산포중앙극장>이 개관되기는 했으나 극히 짧은 기간만 영화 상영을 하다가 이내 폐업했었다고 서술했다.

 

이 증언은 1969228일자 <동아일보(3)>기사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영산포에는 <영산포극장>과 함께 새로 <영산포중앙극장(1969)>도 개관했는데, 두 극장은 라이벌 관계였다. 더구나 이 기사는 1969228일에 열렸던 나주의 국회의원 재선거 과정에서 두 극장주의 대립과 갈등으로 <영산포중앙극장>의 주인이 쇼크사한 사실도 언급했는데, 대립과 갈등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편, 남평 지역에도 극장이 있었다는 정찬용 선생의 증언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남평에도 극장이 있었다고 언급했는데, 따라서 <영화연감(1980)>과 위경혜(2007), 김남석(2022)의 서술, 그리고 정찬용 선생과 성명 미상의 영산포 주민의 증언을 종합하면 일제강점기 이래 나주 지역의 극장은 모두 8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는 최승희 선생의 나주공연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시작됐으나, 이내 취재의 초점이 나주의 극장들로 옮겨졌다. 최승희 선생이 나주에서 공연했다는 문헌 기록이나 증언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가운데, 지금까지 나주 지역에 설립되었던 극장들을 조사하다보면 새로운 실마리가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이래 나주 지역에 설립되었던 극장은 총 8개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

,

최현삼 선생을 만난 것도 2022년 5월의 내 첫 나주 방문 때였다. 홍양현 선생의 안내로 봉황면 욱곡리 욱실마을에 있는 그의 <더욱 케어팜>을 방문했고, 그날 밤을 케어팜에서 지내면서 내가 몰랐던 나주의 농업, 의료, 사회보장 부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더욱 케어팜>의 설립자 최현삼 선생을 모두들 귀농, 즉 귀향한 농부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역사 교사로 오래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으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과거 나주 선비들의 귀향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서울을 떠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같으나, 서울로 복귀하기 위해 칠천팔기의 기회를 노리거나 혹은 그저 안빈낙도를 꿈꾸던 과거의 선비들과는 달리 최현삼 선생은 욱실마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일들은 한국사회가 첨단 분야로 지정해 그 발전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는 사업이었던 것이다.

 

 

나주 선비들의 귀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더욱 케어팜>에서 서쪽으로 약 1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송죽리에는 금사정(錦社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현량과 실시(1518)와 소격서폐지(1518) 등을 추진한 조광조(1482-1519)의 개혁이 실패하고 기묘사화(1519)로 조광조 자신을 포함한 70여명의 선비들이 처형당한 뒤, 조광조를 따르던 나주 출신의 선비 11명이 고향으로 돌아가 안빈낙도의 한 방편으로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 정자의 원래의 이름은 11명의 선비들이 결성한 모임 금강계를 딴 금강정(錦江亭)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현종 6(1665)에 재건, 고종 6(1869)에 중수한 후 1973년에 나주시가 복원하면서, 편액이 지금의 금사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금강정이 금사정이 된 구체적 시기와 자세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최현삼 선생의 환향은 시간적으로는 멀지만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금사정의 선비 11인의 낙향과 사뭇 다르다. 금사정의 11인은 중앙정계에서 실패하고 마지못해 고향에 돌아온 것이지만, 최현삼 선생은 비교적 안정적인 서울생활을 뒤로한 채 자발적으로 귀향한 것인데, 특히 최현삼 선생이 부모님의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했다. 나는 내심 깊은 감동을 느꼈다.

 

 

최현삼 선생은 연로해 가시는 부모님의 의료적 필요를 위해 케어팜(Care Farm)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농사일을 의료적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케어팜의 개념은 일찍이 19세기초 미국의 국부로 숭앙되는 벤자민 러쉬(Benjamin Rush, 17461813)의 저서 <마음의 병(The Diseases of The Mind, 1812)>에서 개진된 바 있었지만, 그것이 사회운동으로 꽃이 핀 것은 20세기 후반 유럽 각국에서였고, 한국에 소개된 것은 21세기 초였던 것이어서, 최현삼 선생은 자신의 개인적, 가족적 필요를 한국사회에서 개발되는 첨단 산업부문의 관행에 접목시켜 해결할 뿐 아니라, 공동체적, 사회적 관행으로 정착시켜 나가려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내가 최승희 선생의 전남 공연, 특히 나주 공연 여부를 조사하면서 최현삼 선생의 의견과 조언이 필요했던 것은 그의 효성이나 사업적 안목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가진 역사학적 소양과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그의 절제된 소통방식 때문이었다. 이같은 그의 성향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활동가들이 보이는 실천 중심의 경향성을 균형잡는 데에 아주 긴요하게 느껴졌다.

 

 

부딪힌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연쇄적으로 구상하고 행동에 옮기느라 바쁜 최현삼 선생에게 조언과 도움을 부탁하는 것은 미안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내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최현삼 선생이 <더욱 케어팜> 사무실 입구 안쪽에 붙여둔 <방문객>이라는 정현종의 시 한편 때문이었다.

 

자기 집/사무실에 미카사 수카사라든가 이집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평화,” 혹은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같은 문구를 붙이는 사람은 많지만,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라는 시구를 걸어둔 사람은 최현삼 선생이 처음이다. 나는 어쩌면 그런 환대를 기대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

<나주극장> 좌담회의 담장(談場)’ 포스터를 비판한답시고 원고지를 10매 가량 낭비했지만, 좌담회 자체는 사뭇 중요한 행사임에 틀림없다. <나주극장>이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모한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었다고 발표된 것이 202065일이었고, 나주시가 <나주극장>의 소유사 나주신용협동조합과 문화재생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한 것이 2021120일이었으므로, 반년이 더 지난 지금쯤 시민과 전문가들의 중지를 모을 시기인 것이 맞다.

 

신문기사들에 따르면 문화재생사업은 보존 가치가 높은 지역 내 유휴공간을 찾아 특성에 맞는 문화재생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나주시는 옛 나주극장이 가진 역사, 장소적 가치를 되살리고 다시 나주극장이라는 테마로 근대 문화·예술·생활역사를 영사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보존가치라는 게 뭘까? 이 좌담회의 1부 강연에서는 그 점이 논의되었을 것이다. 보존 가치의 기준의 하나는 아마도 오래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된 것은 보존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주시의 계획 중에 이 극장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린다는 말이 포함된 것이리라.

 

사실 나주시 자체가 보존가치가 높은 고장이다.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고장이 한국에서 그리 많지 않다. 한양의 역사는 6백여 년에 불과하고 부산의 역사도 2백년이 되지 못한다. 북한에는 평양과 개성이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도시라면, 한국에서는 경주와 나주 정도일 것이다. 당연히 보존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나주극장>이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그것이 1930년대에 세워진 오래된 극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오래된 역사가 제대로 구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모사업 선정과, 업무협약 체결, 그리고 좌담회 등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이 극장이 “1930년대에 들어선 나주 지역 최초의 극장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맞는 말일까?

 

 

우선 언론 기사들은 <나주극장>“1930년대에 들어섰다고 했지만 개관 시기를 더 특정하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1930년대는 2번의 변곡점을 갖는다. 1931년과 1937년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 침략을 시작했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두 시기를 기준으로 <나주극장>이 언제 설립되었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주극장>의 설립연대를 특정하지 못했다면 이 극장의 성격과 활용도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다행히 문화재생 좌담회의 주제가 옛 나주극장의 추억 찾기이고, 부제가 시민들의 기억 나눔이다. 나주시민들이 간직해 온 <나주극장>의 추억을 공유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이 소중한 정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주시민들의 개인적 추억을 수집해도 극장의 역사가 충분히 구명되지는 못한다. 나주극장의 역사가 90년이라면 개인들의 기억은 그 절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존한 개인들의 <나주극장> 경험은 1980년대 이후가 대부분이고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1950년대와 그 이전의 <나주극장>의 역사는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나주극장이 1930년대에 설립되었다면 당시의 기록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주극장>에 대한 문헌 기록은 일제강점기의 신문기사, 그것도 중앙지의 지방판에 수록된 단신 수 건에 불과하다. <나주극장>90년 역사와 그 진면목을 파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기록이다.

 

기록이란 문헌뿐 아니라 사진과 영상도 포함하는데, 안타깝게도 1980년대 이전의 <나주극장> 사진이나 영상은 단 한 건도 남겨진 것이 없다. 이른바 활동사진을 상영하던 최초의 근대적 문화공간이었던 <나주극장>이 단 한 장의 사진이나 단 한 편의 활동사진도 남기지 않다는 것은 역설이다.

 

지금부터라도 <나주극장>에 대한 기록부터 부지런히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