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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参加した1次改修工事1914-1921では武庫川上流千刈にダムをいでしい貯水池浄水場発電所導水路建設工事同時われたその危険工事導水管通過させるためのトンネル掘削工事だった

 

千刈から生瀬まで12のトンネルがられたがトンネルは1.8m1.8m馬蹄形でありトンネル工事導水管水圧によって破損したり漏水することをぐためにコンクリートライニングと防水工事同時われた

 

このトンネル工事設計図面工程についてはくの文献資料っているが工事参加した作業員する記録はほとんどなかった。 「神戸市水道70年史にトンネル工事進行するのような記録っているだけだった

 

掘削さともメートルの導坑げをなう普通順序であつたがらかいところは手掘いところは爆薬使用した坑内のズリしはトロッコ二台一組としていトロッコー人夫二名積込手伝二名がつき土捨場整理一名掘方三名配置昼夜三交替とした坑内では当時のこととてもちろんカンテラやカーバイトランプの使用大部分であつたがただ宇塚付近では電力使用できたので電灯照明掘削した

 

この記録から推測してトンネル掘削作業はカンデラやカーバイトのわれ岩壁爆破のためにダイナマイトを使用したため危険常在した鄭鴻永氏のインタビューにじた波豆在住測量技師福本實二さん当時75はこう証言した

 

在職中先輩職員からよく大正時代第一回拡張工事きましたがいていたのはみな遠方から出稼ぎにきていた人達朝鮮人達ばかりでその当時朝鮮人日本人よりかつたそうです事故何人死人たといういたことがありますよ

 

 

しかし死亡者負傷者する記録くないため南益三氏3朝鮮人がどの工事犠牲になったのか把握するのはしかった南益三氏埋葬認許証には日本現地住所記載されておらずがどの地域居住したのかさえ推定できなかった

 

鄭鴻永氏方向えて西谷村役場発行した埋葬認許証全数調査した同氏西谷8地域つである玉瀬死亡者数注目したこの地域死亡者数年平均1-5だったが神戸水道第1次拡張工事があった1914-1916死亡者数年間6-15異例的かった

 

この3年間死亡者本籍地調査した結果現地人死亡者年間2-5例年とほぼじだったが外地人死亡者数3年間20だった死亡者推移1914101915819162減少傾向だったこの20外地人死亡者のうち1418から45までのりの男性でありそのうち朝鮮人3まれていた

 

 

鄭鴻永氏はまた武田尾飲食店兼旅館紅葉館のおかみさんである松本文美さん当時78から労働者合宿所工事事故する証言ることができた

 

子供でしたのでハッキリしたことはかりませんけども朝鮮らしいもいたようにいます。… トンネルエ工事発破事故怪我人がずいぶん沢山でました身体じゅうにさつて今日三人明日五人というぐあいにだらけになつて医者まれるのを何回たことがありますよ」。

 

2にわたる調査鄭鴻永氏朝鮮人労働者居住した合宿所(飯場)住所イズリハ1-45番地でありこの合宿所4トンネルと5トンネルからかったことをらかにしたしたがってイズリア合宿所居住した朝鮮人労働者4トンネル工事(1914/8/18-1916/7/13)5トンネル工事(1914/2/18-1916/1/11)投入されたと推定され南益三氏もこの工事参加して1915220事故にあったと推論された。 (2022/9/4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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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가 참가한 제1차 개수공사(1914-1921)에서는 무코카와(武庫川)의 상류 센가리(千刈)에 댐을 막아 새 저수지를 만들고, 정수장, 발전소, 도수로 건설 공사가 동시에 진행했다. 그중 가장 위험한 공사가 도수관을 통과시키기 위한 터널 굴착 공사였다.

 

센가리에서 나마제(生瀬)까지 12개의 터널이 만들어졌는데, 터널은 높이 1.8m, 너비 1.8m의 말굽모양이었고, 터널공사와 함께 도수관이 수압에 의해 파손되거나 누수되는 것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라이닝과 방수공사가 동시에 이뤄졌다.

 

 

이 터널 공사의 설계도면과 공정에 대해서는 많은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만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었다. <고베시 수도 70년사>에 터널공사 진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굴착은 폭과 높이 모두 1.8m의 도갱을 파서 넓혀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였다. 부드러운 곳은 손으로 파고 단단한 곳은 폭약을 사용했다. 갱내에서 파낸 흙을 운반하기 위해 광차 2대를 1조로 하여 광차 1대에 인부 2, 그 밖에 흙을 부리는 것을 돕는 인부 2, 토사장 정리에 1, 굴착공 3명을 배치하여 주야 3교대로 작업했다. 갱내에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칸델라나 카바이트 램프를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우즈카(宇塚) 부근에서는 전력을 사용할 수 있어 전등 조명으로 굴착작업을 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터널 굴착 작업은 칸델라나 카바이트의 어두침침한 불빛 아래서 이뤄졌고, 암벽 폭파를 위해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위험이 상존했다. 정홍영의 인터뷰에 응한 하즈(波豆) 거주 측량기사 후쿠모토 지츠지(福本實二, 당시 75)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재직 중에 선배 직원들로부터 자주 다이쇼시대 제1차 확장공사 때의 얘기를 들었는데, 인부들은 모두 먼 곳에서 돈 벌러 온 사람들이거나 조선 사람들뿐이었고, 그 당시에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사고로 사망자가 여러 명 났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사망자나 부상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남익삼씨를 포함한 3명의 조선인이 어느 공사에서 희생되었는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특히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일본 현지 주소가 기재되지 않아 그가 어느 지역에서 거주했는지조차 추정하기 어려웠다.

 

정홍영은 방향을 바꾸어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을 전수 조사했다. 그는 니시타니 8개 지역의 하나인 타마세(玉瀬)의 사망자수에 주목했다. 이 지역 사망자 수는 연평균 1-5명이었는데, 고베수도 제1차 확장공사가 있었던 1914-1916년의 사망자 수는 연간 6-15명으로 이례적으로 많았다.

 

3년간 사망자들의 본적지를 조사하니 현지인 사망자는 연간 2-5명으로 예년과 비슷했으나, 외지인 사망자 수는 3년간 총 20명이었다. 사망자 추이도 191410명으로 가장 많았고, 19158, 19162명으로 감소추세였다. 20명의 외지인 사망자 중 14명이 18세에서 45세까지의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이었고, 그 중에 조선인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홍영은 또 타케다오(武田尾)의 오래된 음식점 겸 여관 코요칸(紅葉館)의 안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78)씨로부터 노동자 합숙소와 공사 사고에 대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어려서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조선 사람도 있었던 것 같아요. ...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습니다. 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요.”

 

2년에 걸친 조사 끝에 정홍영은 조선인 노동자가 거주했던 합숙소(飯場=함바)의 주소가 '이즈리하 1-45번지'이며 이 합숙소는 제4호 터널과 제5호 터널에서 가까웠음을 밝혀냈다. 따라서 이즈리아 합숙소에 거주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제4호 터널공사(1914/8/18-1916/7/13)와 제5호 터널공사(1914/2/18-1916/1/11)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었고, 남익삼씨도 이 공사에 참가했다가 1915220일 사고를 당했던 것으로 추론되었다. (2022/9/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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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埋葬認許証参考にして故郷今日慶尚南道統営市光道面だったと推定そのでも安井里黄里地域あるいは竹林里地域だったと範囲めることができたやこの地域調査して南益三氏がここ出身だという文献証拠証言確保すれば期待していた目的達成することになるだろう

 

南益三氏縁故地確認のための実際調査宝塚発生した死亡事故整理しておこうまず南益三氏死亡したのは1915220推定される埋葬認許証発給日221埋葬日221であることをると南益三氏はその前日220死亡翌日やかに埋葬されたものとみられるからだ水道改修工事参加して事故死った肉体労働者のために3日葬5日葬った可能性はほとんどなさそうだ

 

神戸水道工事朝鮮人労働者大挙参加したという事実らかにしたのは在日朝鮮人歴史家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 1929-2000)だった1985年春宝塚朝鮮人たちを調査めた西谷地域市史編集担当した若林泰氏から3埋葬認許証入手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南益三(ナム·イクサム)埋葬認許証だった

 

 

鄭鴻永氏らの死亡時期1914-1915だったといういた日帝朝鮮強占実現してからわずか4~5時期日本宝塚山岳地帯である西谷玉瀬朝鮮人3死亡したというのが意外だったためだ

 

内務省警保局発行した統計報告書朝鮮人概況によると1915日本国内朝鮮人全国3,986兵庫県218だけだったこれは公式統計だから実際仕事めて日本渡航した朝鮮人はもっとかっただろうが大阪神戸東京などの大都市ではなく兵庫県奧地西谷朝鮮人3死亡したことはらかに不思議なことだった

 

以後鄭鴻永氏2年間調査じて朝鮮人労働者参加した工事神戸水道工事でありらが導水館のトンネル掘削工事事故った事実らかにした

 

 

神戸水道めて開通したのは1905だった横浜とともに日本代表的国際貿易港だった神戸には水道問題深刻だったえる市民だけでなく神戸港入港する船舶良質供給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ためだ1890には神戸にコレラががり1千人余りが死亡したがその原因つがきれいな用水不備だった

 

これに神戸市水道建設したが1893年神戸市議会水道建設計画承認したが日清戦争きたため1897になって工事まりついに神戸水道水給水まったのは1905だった

 

神戸水道開通したものの神戸市人口予想よりはるかに増加した水道工事着工当時189319万人だった人口完工時1905には32万人人口増加傾向依然としてだった神戸水道工事計画当時給水人口目標25万人だったが完工時にすでに人口目標値えてしまったため神戸水道拡張工事けられなくなった

 

 

神戸市政府武庫川上流千刈たな水源2にわたって拡張工事った日本語文献にはこれを改修工事記述したが水源やし導水路たに架設するなどの拡張工事であった

 

1次拡張工事1914まり1921完工2次拡張工事1926着工1931完成したが人口80万人神戸水道水供給することが目標だった

 

鄭鴻永氏埋蔵認許証れた金炳順(191413)南益三(1915121)張長守(1915324)埋葬日神戸水道工事進捗日程比較3朝鮮人労働者参加した神戸水道工事1914からまった神戸水道第1次改修工事(1914-1921)であったと断定することができた。 (2022/9/2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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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을 참고하여 그의 고향이 오늘날의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이었던 것으로 추정했고, 그중에서도 지금의 안정리황리지역, 혹은 죽림리지역이었을 것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이제 이 지역을 조사해서 남익삼씨가 이곳 출신이라는 문헌증거나 증언을 확보한다면 기대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다.

 

남익삼씨의 연고지 확인을 위한 실제 조사에 나서기 전에 그가 다카라즈카에서 맞았던 사망사고를 정리해 두자. 우선 남익삼씨가 사망한 것은 1915220일로 추정된다. 매장인허증 발급일이 221일이고 매장일도 221일인 것을 보면 남익삼씨는 그 전날(220) 사망했고, 하루 만에 신속하게 매장됐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도 개수공사에 참가했다가 사고사를 당한 막노동자를 위해 3일장이나 5일장을 치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고베수도공사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은 재일동포 역사가 정홍영(鄭鴻永, 1929-2000)이었다. 1985년 봄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을 조사하기 시작한 그는 니시타니 지역의 시사(市史) 편집을 담당했던 와카바야시 야스시(若林泰)씨로부터 3장의 매장인허증을 입수했다. 김병순, 장장수,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이었다.

 

 

정홍영씨는 이들의 사망시기가 1914-1915년이었다는 점에 놀랐다. 일제의 조선강점이 이뤄진지 불고 4-5년밖에 안되었던 시기에 일본 다카라즈카의 깊은 산악지대인 니시타니의 타마세에서 조선인이 3명이나 사망했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이 발행한 통계보고서 <조선인개황(朝鮮人概況)>에 따르면, 1915년의 일본내 조선인은 전국에 3986, 효고현에 218명뿐이었다. 이는 공식통계니까 실제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도항한 조선인은 더 많았겠지만, 오사카나 고베, 도쿄 등의 대도시가 아니라 효고현의 오지 니시타니에서 조선인이 3명이나 사망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정홍영은 약 2년간의 조사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참가했던 공사가 고베수도공사였으며, 이들이 도수관의 터널 굴착공사에서 사고를 당했던 사실도 밝혀냈다.

 

고베에 수도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05년이었다. 요코하마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이었던 고베에는 수도 문제가 심각했다. 날로 늘어나는 시민들뿐 아니라 고베항에 입항하는 선박에 양질의 물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1890년에는 고베에 콜레라가 번져서 1천여명이 사망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용수 미비였다.

 

이에 고베시는 수도 건설에 나섰는데, 1893년 고베 시의회가 수도 건설계획을 승인했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1897년에야 공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고베에 수돗물 급수가 시작한 것은 1905년이었다.

 

고베 수도가 개통되기는 했으나 고베시 인구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다. 수도공사 착공 당시(1893) 19만 명이던 인구가 완공 시(1905)에는 32만 명으로 불어났고, 인구 증가세는 여전히 가파랐다. 고베 수도공사 계획 당시 급수 인구 목표가 25만 명이었는데, 완공 시에 이미 인구가 목표치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고베수도의 확장 공사가 불가피해졌다.

 

 

고베 시정부는 무코가와(武庫川) 상류의 센가리(千刈)를 새로운 수원으로 결정, 두 차례에 걸쳐 확장공사를 단행했다. 일본어 문헌에는 이를 개수(改修)공사라고 서술했지만, 수원을 늘리고 도수로(導水路)를 새로 가설하는 등의 대대적인 확장 공사였다.

 

1차 확장공사는 1914년에 시작되어 1921년에 완공되었고, 2차 확장공사는 1926년에 착공하여 1931년에 완성되었는데, 인구 80만 명의 고베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이 목표였다.

 

정홍영은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김병순(191413), 남익삼(1915121), 장장수(1915324)씨의 매장일과 고베수도공사의 진척 일정을 비교하여, 3인의 조선인 노동자가 참가했던 고베수도공사는 1914년부터 시작된 고베수도 제1차 개수공사(1914-1921)였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었다. (2022/9/2,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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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서 정병례 선생의 <수세거부운동 기념비>를 보면서, 수세거부운동에 대한 궁금증도 되살아났다. 수세거부운동이 시작된 것은 전남 해남이었다. 해남 농민회의 회지 <해남농어민의 소리(1987920일 특집1)>“<농지개량조합>은 무엇하는 곳인가라는 글이 실리면서 수세 거부를 위한 선전활동이 시작됐다.

 

1111일 해남군 부락대표 150명이 <해남 부당수세거부 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1126일에는 해남읍 농민 3천명이 수세거부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126일부터 <부당수세거부 및 농지개량조합 해체를 주장하는 해남 서명운동>이 시작됐고 수세납부고지서도 반납되었다.

 

수세<농지개량조합>이 농민들에게 강제로 거두던 물값이었다. 명목상 농업용수를 위한 댐과 저수지, 수로 등의 건설비와 관리유지비, 그리고 직원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거두던 세금이었는데, 이는 일제가 1917년에 설치한 조선수리조합이 하던 일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이었다. 1987년 징수된 수세는 1천억원(=2021년의 약 3275억원)에 달했다.

 

 

농민들은 수리시설이 철도, 항만, 도로와 마찬가지로 사회간접자본이므로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부문인데도 부담을 농민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며, 일제 강점기 조선농민 수탈수단으로 강구되었던 것이 해방 후 40년이 넘도록 유지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세거부운동은 해남에서 시작되었지만 가장 큰 규모로 활발하게 전개된 곳은 나주였다. 나주의 운동은 봉황면에서 시작됐다. 19871117, <봉황면 수세거부 대책위원회>가 결성됐고, 12월까지 나주의 각 면단위 조직이 완결되었다.

 

1229<부당수세거부 나주농민 결의대회>에는 나주 농민 1만여명이 참가했다. 12,073매의 수세납부고지서가 농조에 반납됐고, 10,026명이 수세폐지와 농조해체를 위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이 결의대회에서는 수세거부운동의 구호 <못내 못내, 절대 못내, 부당 수세 절대 못내>가 채택되었고, 운동이 성공을 거둘 때까지 외쳐졌다. 이 구호는 고암 정병례 선생님의 <나주 수세거부운동 기념비>에도 새겨져 있다.

 

 

수세거부운동은 확산되어 19884<수세폐지를 위한 전남,북 농민대회>이 개최되었고, 1988111<전국 수세폐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전국 62개 군으로 확산됐다. 1989213일 여의도 농민대투쟁 이후 3백평당 나락 23-28Kg이던 수세는 5Kg으로 대폭 감소되었다가, 1997년에 완전히 폐지되었고, 징수기관이던 농지개량조합도 폐지되어 2005년 한국농어촌공사에 흡수됐다.

 

수세거부운동의 과정과 결과는 2007년 수세거부운동 20주년을 맞아 세워진 기념비의 설명문에도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이 설명문의 한국어판은 정확한 편이지만, 영문판에는 오류가 많기 때문에 신속히 교정해서 교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제목이 Naju Washingi Memorial이라고 되어 있는데, Washingi는 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2) ‘기념비가 1987년에 건립되었다(The monument was erected in 1987)’고 서술되었으나 이 기념비의 건립연도는 2007년이다. (3) 기념비가 농협(National Agricultural Cooperative Federation)의 폐지(death) 20주년 기념으로 건립되었다고 했으나, 수세거부운동으로 폐지된 것은 농협이 아니라 농지개량조합(Farmland Improvement Association)이다. (4) '농지개량조합'을 agricultural improvement unions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5) 수세거부운동을 anti-water movement라고 표현했으나 이는 Anti-Irrigation-tax Movement의 잘못이다. (6) ‘수리시설이 폐지되었다(the irrigation system was finally repealed)’는 표현이 있으나 폐지된 것은 수세와 농지개량조합이지 수리시설이 폐지되었을 리 없다. (7)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영문표기가 Republic of Korea Farmers Union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Korean Peasants League의 잘못이다. (8) 농림수산부는 Department of Agriculture and Fisheries인데 단체명을 소문자로 쓰는 것은 관행에 어긋난다. (9) 농지개량조합이 폐지되어 흡수된 기관은 '농림수산부'가 아니라 2000년의 '농업기반공사(Korea Agricultural and Rural Infrastructure Corporation)'이며, 이는 2005년 '한국농어촌공사(Korea Rural Community Corporation)'으로 개칭되었다. 

 

(10) 전체적으로, 영어 설명문의 내용이 부정확하고, 영어에 비문이 많다. (2022/9/4,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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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한국어 설명문에 가깝게 영문 설명문을 재구성한다면 아래와 같은 시안을 제안할 수 있다.

Monument for the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Naju

The monument was established in 2007 by the Committee for the 20th Anniversary Commemoration of the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Naju, recognizing Naju farmers as the masters of their lives and the leaders of history against unfair tax systems.

As the results of the successful Anti-Irrigation-tax Movement in 1987, Korean peasant movement took a leap forward, resulting in the establishment of Korean Peasants League in 1990, the Irrigation-tax was abolished in 1997, and the Farmland Improvement Association, the tax-collecting agency, was dissolved and incorporated into the Korea Rural Community Corporation in 2005.

 

(사족 2.) 이 기념비는 내가 세계 곳곳에서 보아온 수많은 기념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탁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설명문을 수정할 경우 이 기념비를 디자인한 예술가(고암 정병례)가 설명문에 언급되면 기념비와 설명문의 격조가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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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마지막 날인 지난 수요일, 고암(古巖) 정병례(鄭昺例, 1947-) 선생님의 새김아트 전시회에 갔다. 약 한 달을 벼르던 일이다. 발단은 올해(2022) 720일 나주를 방문, 금성관 근처에서 본 <나주 수세거부운동 기념비>였다. 나주성당에서 <째깐한 박물관>에 가려고 금성관로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기념비가 너무너무 인상적이었다.

 

길거리에 기념비를 세우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 기념비는 첫인상이 달랐다. 기념비라기보다는 미술관에 전시되어야 어울릴 예술품 같은 느낌이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비석의 취지는 길거리에 세울 기념비로 어울렸다. 그러니까 설치 자리는 맞는데, 기념비를 너무 예술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기념비의 자리 뿐 아니라 기념비 자체도 독특했다. 직육면체 돌덩이에 이리저리 글씨를 써서 가로나 세로로 세워놓은 평범한 비석이 아니었다. 직육면체의 돌덩이 두 개를 마주 세워놓은 것도 이례적이었고, 두 돌의 꼭대기 한쪽면만 곡선으로 처리한 것도 특이했다.

 

그러나 가장 독특했던 것은 표면에 새긴 그림을 색깔 처리한 것이었다. 빨간색과 녹색, 파란색이 사용됐고, 이것이 검은 바탕과 테두리, 그리고 판화 바탕처럼 그어진 다양한 흰색 줄무늬와 잘 어울렸다. 두 비석의 바깥쪽 측면에 쓰인 흰 글씨도 멋졌고 검은 바탕과 대비와 조화가 아주 좋았다.

 

두 비석 전면의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두 비석의 아래쪽 3분의1 부분에는 검은 바탕에 녹색 벼나 보리의 어린 줄기가 3단으로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논밭의 모습(오른쪽 비석)과 쟁기질을 하는 사람의 모습(왼쪽 비석)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은 붉은색으로, 논밭은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검은색으로 테두리와 여백이 채워진 색채 대비가 강렬했다.

 

 

쟁기질 하는 농부의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었는데, 달의 색깔을 연한 파란색으로 처리한 것이 신선했다. 또 오른쪽 비석에 새겨진 초록의 논밭의 위로 태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둥근 태양을 빙 두른 불꽃과 내부의 곡선이 이글거리는 태양의 뜨거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관찰자의 착각 혹은 과잉 해석일수도 있으나, 달 아래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은 한자로 달 월()’자처럼 보였고, 태양 아래 형상화된 논밭과 초목의 모습은 해 일()’자처럼 보였다. 밤낮없이 일하는 농부와 쉼없이 자라는 논밭의 작물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오른쪽과 왼쪽 비석의 바탕 무늬도 대조를 보였다. 태양 아래 논밭이 형상화된 오른쪽 비석의 바탕은 검은 바탕의 돌에 여러 방향으로 그어진 선들도 역동적인 분위기였고, 달 아래 쟁기질 농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왼쪽 비석의 바탕은 주로 가로로 길게 새겨진 선들 때문에 대체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뒷면 바탕은 반대였다. 태양의 비석 뒷면에는 초록색 산봉우리 3개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바탕은 차분하고 긴 가로선들이었고, 파란색으로 새겨진 강물의 흐름이 그려진 왼쪽 비석의 뒷면 바탕은 짧은 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져 있어서 동적이었다.

 

나는 산처럼 움직이고 물처럼 생각해라(Move like Mountains, Think like Rivers.)’는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는데, 이 기념비의 뒷면에 새겨진 산과 물을 보자 작가에 대한 친밀감이 일었다. 내 생각을 경제적이고,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대신 형상화해 주셨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독특하고, 멋지고, 철학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념비를 언제 누가 제작했는지 설명문에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왼쪽 비석 측면에, 읽기가 그리 쉽지 않은 글씨체로, “20071212일 나주지역 수세거부운동 2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일동이 기념비를 세웠고, ‘고암 정병례 새김이라고 제작자가 밝혀져 있었다. 고암 정병례라는 호와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서울에 돌아와 이 기념비에 감탄한 이야기를 정철훈 선생한테 했더니, 정병례 선생님이 나주 동강 출신의 새김 아티스트이며, 자신의 집안 형님뻘이시라고 했다. 나는 고암 선생님을 뵐 기회를 부탁했고,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에 전시회에 가게 된 것이다. (2022/9/3,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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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市立図書館郷土資料収録された朝鮮時代古地図6日本による植民地時代行政区域一覧表参考にして南益三氏故郷慶尚南道固城郡春元面光三村だったと推定した

 

固城郡だったこの地域1914年以来統営郡になり解放後1955年統営郡地域春元面地域忠武市昇格したが1995年忠武市統営郡わせて統営市になってっているこれに1914年以前光三村地域広道面することになった

 

南益三氏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住所春元面光三村という名前はこのように歴史えた。 「光三村今日光道面にそのした程度ところが今日統営市地図光道面地域調べれば春元面がさらにっている

 

 

光道面海岸から竹林里徳浦里安定里黄里などで構成されているが過去地図比較してみればこの地域過去光三面あるいは光三村だったにいないところが安井工團内春元1ギル」、「春元2ギル」、「春元3ギルという名前っているこれと関連して統営市のウェブサイトは春元という名前由来のように叙述した

 

安井国家産業団地内道路であり旧地名春元浦由来する道路名黃里棉花山南側海岸位置気候のようにかい野原という意味春原朝鮮初期春原元変遷され地元地名チュンエオンゲ」、「チュノンケ」、「チュエオンケなどとばれた旧春元浦口最近海岸てられ安井工團として造成された。」

 

この記述通りなら春元浦黄里安亭里にまたがっていた浦口だったとえられる春元浦口ててったという安井国家産業団地黄里安井里両方にまたがっているためだ

 

 

春元浦15978元均(ウォンギュン)漆川梁海戦日本水軍敗北したててげる途中死亡したところでもあった春元浦位置壬辰倭乱著者たちによって黃里(ファンリ)安井里あるいはイェスン主張されたがまでは統営市光道面安井里だったということが多数説

 

しかし古地図<東輿図(1850年頃)>には春元面春元浦明示されたが轅門北側海岸のへこんだ湾南側春元浦という名前記録されているこれは春元浦黃里ではなく安井里海岸にあったことを示唆する

 

ただし<東輿島>統営市ウェブサイトそして壬辰倭乱研究書春元浦轅門以北海岸にあったと主張することには共通するしかし<東輿島>のすべての古地図春元面轅門以南地域すなわち統制営弥勒島龍南面地域だとった

 

春元という名前春元浦から由来春元浦安井里海岸だったとすれば々な古地図轅門以南地域春元面んだ理由だろうかこれは統制営移転したためだ

 

 

壬辰倭乱めて設置された統制営初代統制使李舜臣本来閑山島にいた丁酉再乱閑山統制営風飛雹散になった巨済島吾兒浦(オアポ)固城県春元浦などにみながら定着できなかったが16046代統制使李慶濬(·ギョンジュン)によって統営市地域定着したこの地域本来巨濟縣頭竜浦だったがすぐ春元面ばれめた

 

主要軍陣移転する地名一緒場合がよくあった巨濟助羅鎭(チョラジン)本来今日舊助羅鎭にあったが軍陣玉浦助羅鎭という名称ったまた金海市長有面チャンユミョンにあった新門津シンムンジン鎮海市安骨チンヘシ·アンゴル方向ると、「新門津という名前一緒移転した

 

三道水軍統制営安定里海岸春元浦にあったが統制営頭龍浦それがあった地名春元まで一緒それで統営市内地域春元面ばれるようになったとられる。 (2022/9/1趙正熙(チョウ·ジ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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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行政区域改編前後地名対照して作成された報告書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1916越智唯七編纂中央市場発行)海東地図(1750年頃)慶尚道地図(1872)」、そして地図(1884)をはじめとする6つの古地図調査した結果今日統営春元面であったことがかった

 

しかし南益三氏故郷当時春元面自体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という疑問があった埋葬認許証れた住所最後先三村という地名のためだった先三村または先三という地名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収録されていなかった

 

しかし古地図調査していたところ筆者春元面のすぐ北側光三面があり漢字ているという事実えが到達したもしかしたら南益三氏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先三村光三村誤記かもしれない

 

 

古地図れた地名光三ではなく光三それより北側位置した光一面光二面いて命名されたものとられる調査対象になった古地図海東地図(1750年頃)によると光一面光内一運面光二面光内二運面略語だったしかしこの地図光内三運面れていないことから18世紀には光三面設置されなかったものとられる

 

しかし慶尚道地図(1872)では春元面所在統制営玄関である轅門のすぐ北側光三面設置されたことがられるつまり海東地図時期にはなかった光三面慶尚道地図製作以前設置されたのだ。 『慶尚道地図南益三氏出生(1878年頃)する製作されたのでがここでまれたとすれば故郷春元面ではなく光三面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だろう

 

しかし光三面はその後再姿した南益三氏出生直後製作された<地図(21884)>には轅門以南地域春元面とそのまま表記されていたが轅門のすぐ北側位置した光三面という表記えた反面それよりさらに北側には光一面光二面がそのまま存続した

 

 

えればこのには光三面春元面にすでに移属されたものと推定できるそのため南益三氏埋葬認許証住所春元という言葉先三(光三誤記推定)という言葉同時登場したのではないかとえられるおそらく光三面設置されたさな地域だったため春元面移属され光三村格下げされた可能性もあるこの光三村埋葬認許証先三村誤記されたものと推定されたのだ

 

光三面/村域1914年日帝行政区域改編統営郡することになった反面光一面光二面固城郡された光一面固城郡居留面光二面固城郡東海面まれその名前えた

 

反面光三村地域日帝行政区域改編道内面統営郡広道面になった光道面光三面道内面頭文字ってった名前だったため光三面はその一部ではあるが統営にその痕跡しているわけだ

 

 

このようにれば南益三氏故郷慶尚南道固城郡春元面光三村だっただろうもちろんこれはまだ推定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南益三氏故郷住所半分以上確認されていない春六まれることもありうる地名そのような地名当時朝鮮行政区名目録にないという理由春元誤記断定した先三という表記光三誤記推定したなどがすべて事実合致する場合にのみ事実められるだろう

 

埋葬認許証南益三氏住所曖昧その資料がないためこのように推定でもしてみるのが筆者としては最善だったそしてやこの推定朝鮮内縁故してみるしか方法がない状況。 (2022/8/31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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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埋葬認許証れた朝鮮住所地「春元今日統営という事実把握した筆者はこれを固城市立図書館発見した古地図確認することにした

 

同図書館所蔵する『固城郡誌(1-3)『固城史料集(1-3)には々な古地図収録されていたそのうちなくとも5つの古地図春元明示されていた

 

固城郷土資料掲載された時期古地図海東地図(1750年頃)だった812822構成された海東地図(ソウル大学奎章閣韓国学研究院所蔵本)には朝鮮全図朝鮮8道別地図そして全国330りの郡縣地図まれているすべての地図彩色筆写製作された海東地図5慶尚道地図まれているが<固城縣>もここにしている

 

 

この<固城縣>中央には山脈川筋固城をはじめとする地名かれておりその余白には固城縣地理人口兵力水勢状況付記されていた右下には12付属んでいるが、「春元面(チュンウォンミョン)最後収録されていたこの地図によると春元面きさは3070、固城12面積かった地図本文によると三道水軍統制営東側した丘陵地域春元面表記したことが鮮明えた

 

それから100年後製作された慶尚道地図(1872ソウル大学校奎章閣韓国学研究院所蔵本)にも春元面表記されていた1871辛未洋擾経験した全国的われた地誌地図編纂作業一環として慶尚監営編纂した慶尚道地図9()構成された郡縣地図牧場山城軍陣地図104地図まれている

 

慶尚道地図朝鮮政府最後編纂した全国郡縣地図一環として作成されたもので今日までっている郡縣地図内容詳細精密地図評価される郡縣地図各郡縣所属した山城牧場軍陣など軍事地域地図むものと地図作成目的国防関連したものだったことを推察させる開港後変貌する直前各郡·姿いたため朝鮮時代慶尚道各地域肖像画といえる地図

 

 

'春元面'記述した<固城府地図><慶尚道地図>9()収録されているが固城半島(=統営半島)南部彌勒島(ミルクド)めた地域'春元面'という表記がされている春元面には先山面光三面そのには光一面光二面える

 

にも固城市立図書館所蔵された各種郷土資料収録された地図'春元面'表記したことでは<輿地圖(1789-1795)><東輿図(19世紀哲宗年間在位1849-1864)>そして<大東輿地図1861)>などがある

 

以上5つの古地図はすべて18世紀19世紀中期地図南益三氏(1878ごろの出生)出生する以前地図出生した製作されたこの地域地図してみると1884刊行された<地圖(高麗大学図書館所蔵)>があった

 

 

<地図(1884)>では絵画風郡縣地図帖4構成されているが2()道別全圖3()各道所属郡縣個別圖まれている地図余白各道郡縣人口財政耕地面積四方警戒城郭名前位置する内容記録されている

 

この<地図(2)>収録された固城府地圖によると固城半島(=統営半島)設置された轅門以南地域'春元面'という表示になっていたそして統営半島南方のろしがかれている彌勒島(ミルクド)にも'春元面'という表示になっていた

 

したがって南益三氏出生直後1884年頃統制営周辺地域彌勒島めて轅門以南地域全てが'春元面'だったのだ(2022/8/30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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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益三氏朝鮮内縁故地推定するためには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不完全住所依存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この住所でどの部分正確でどの部分間違っているのか判断できなかったしたがって不正確住所からとか信頼できる部分区別する方法じ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筆者はまず----などの行政単位をすべて無視して地名固有名詞だけを調査することにしたそれで中清春元」、「連北先三という名前だけがることになったまた草書体した文字のため、「春元ているようにえる春六連北ている蓮地調査めた

 

この6つの地名新旧対照朝鮮全図府郡面里洞名称一覧(1916越智唯七編纂中央市場発行)調べてみたこの報告書1914日帝朝鮮行政区域改編した結果をまとめたもので19世紀末20世紀初めに朝鮮使われた行政区域名前網羅していたこの報告書本文だけで1096ページにする膨大分量だったが1915死亡した南益三氏住所確認するのに時期的適切文献だった

 

 

同報告書によると20世紀初めの朝鮮全図中淸連北先三という地域名称はなかった。 「連地春六じだったところが春元という名前追跡可能だった

 

この報告書にも春元という名前てこないが1914年以降統営郡過去龍南郡巨済郡統合した地域であることがかった固城-統営地域行政区域変遷史多少複雑だったが要約すればりだ

 

現在固城統営地域(1)三韓時代以前辰国三韓時代には弁韓していた古資彌凍國伽耶時代には小伽倻所在地だった(2)南北国時代古資郡ばれていたこの地域新羅景徳王(在位742-765)固城郡改称され757康州(現在晋州)併合された(3) 1016(高麗顯宗9)この地域巨濟縣移管されたが(4)1275(高麗忠烈王2)南海縣移属され1308(忠烈王復位10)巨済縣された

 

 

朝鮮時代って(5)1604(宣祖37)この地域三道水軍統制営設置されたが当時名前巨濟縣頭竜浦だった(6) 1677(肅宗3)頭龍浦固城県移属され春元面改称された(7) 1869に固城県春元面戸籍紛糾事件朝鮮朝廷はこれにする事後策として1870固城縣固城府昇格した(8) 1880固城府は固城還元され1884固城府昇格した

 

(9) 1895(高宗32)春元面所在三道水軍統制営廃止され固城府固城郡改称された。(101900年統制営所在した地域が固城から独立鎭南郡になった。(111909鎭南郡龍南郡改称された。(121914日帝行政区域改編龍南郡巨済郡とともに統営郡併合された

 

すなわち統営郡(1914)併合された龍南郡(1909-1914)はその直前名前鎮南郡(1900-1909)でありその230年間「固城//郡春元面(1677-1900)だったのだ

 

 

1915220死亡した南益三氏埋葬認許証には生年月日不詳としながらも死亡時年齢37だとべたこれを逆算すれば南益三氏まれた年度1870年代末だがその当時統営名前固城府春元面だった

 

南益三氏日本んでいた、「故郷はどこかという質問けたとすれば、「慶尚道固城府春元面えただろう春元まれ最初20年間をそこでらしたはずだからだ

 

20代後半春元鎮南30代前半には龍南わり朝鮮れて日本兵庫県から神戸水道工事投入された統営になったが持続的わる故郷公式名称がどれほど馴染んでいたかは疑問。 (2022/8/29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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固城市立図書館豊富郷土資料所蔵していたが、「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縁故すためにはそのほとんどが必要ではなかった日本新聞がすでに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伊根·イグン本拠地慶尚南道固城郡固城面であることをらかにしたためだ

 

されたことは固城内らの具体的縁故地文献証言確認すればいいしもし家族親族などの縁故者つけることができればそれは錦上添花だろう江陵調査では慶州金氏樹隱公派系図じて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本拠地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固城でも尹吉文, 吳伊根氏系図記録すことが優先的関心事だった

 

しかし統営調査事情った日本には南益三氏統営出身であることを記録がなかった筆者南益三氏埋葬認許証れた不完全朝鮮住所土台統営出身であると推測できたがその推測文献証言裏付けら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南益三氏1915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遺体埋葬するために西谷村役場発行した埋葬認許証朝鮮住所記録されていたしかしこの住所草書体漢字かれていたためみにくくようやくげた住所当時行政区域一致しなかった

 

埋葬認許証記録された南益三氏住所次第移せば朝鮮中淸道春元右連北面先三村しかしこの住所には問題かった

 

まず当時朝鮮には中淸道という行政区域がなかったいのが忠清道だがこれもやはり忠清南道忠清北道けて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たがってこの住所当時朝鮮行政区域する知識がないかがんだりにっていたものとられる

 

 

春元右という記録問題。 「という行政単位朝鮮にはなかった行政単位ればにはてこなければならないではあるまた春元連北てきたので、「春元右春元郡むのが自然だろうしかし1914年日帝によってなされた行政区域改編前後調べても忠清南道忠清北道にはもちろん朝鮮全域春元郡という地名はなかった

 

春元右連北面先三村じだった1914行政区域改編前後わせて全国13のすべての行政区域名称調査しても連北面先三村あるいは先三里というところはれなかったこれも間違った表記いなかった

 

つまり南益三氏朝鮮住所間違った記録だということだがなぜこのようなことがきたのだろうか埋葬認許証によると死亡当時37だった南益三氏雇用記録はなかったとられる就職資料があったとすれば埋葬認許証にも正確住所生年月日記録されただろう

 

 

1910年代初めにして日本った朝鮮人には正式就職手続きにって移住した々もいただろうが日雇いや肉体労働した々はたいてい事前雇用手続きなしにむやみに渡航したり密航した々もいた

 

らは日本到着鉄道河川工事石炭鉄鉱石などの炭鉱肉体労働仕事したりもしたその場合雇用記録はもちろん身上記録さえ作成されていない場合かった水道工事投入された南益三氏もそのようなケースだっただろう非公式的雇用した企業はもちろん居住した地域末端行政機関にも南益三氏身元情報えられていなかっただろう

 

南益三氏死亡埋葬認許証発行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村役場朝鮮人同僚伝言依存したはずであり同僚たちが南益三氏故郷をよくらなかったとすれば住所をまともに記録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だろう朝鮮行政区域する知識くなかった村役場書記これを可能性もなかっただろう

 

埋葬認許証南益三氏住所正確でなかったのはまさにそのような事情のためだっただろう。(2022/8/29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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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시립도서관의 향토자료에 수록된 조선시대 고지도 6점과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일람표를 참고하여,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광삼촌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고성군이었던 이 지역은 1914년 이래 통영군이 되었고, 해방후 1955년 통영군 지역을 제외한 춘원면 지역이 충무시로 승격했다가,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이 합쳐 통영시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에 따라 1914년 이전의 광삼촌 지역은 지금의 광도면에 속하게 되었다.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주소 중에서 춘원면광삼촌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려졌다. ‘광삼촌()’자가 오늘날의 광도면(光道面)에 그 자취를 남긴 정도다. 그런데 오늘날의 통영시 지도에서 광도면 지역을 살펴보면 춘원면의 흔적이 더 남아 있다.

 

 

광도면 해안은 남에서 북으로 죽림리와 덕포리, 안정리와 황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거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이 지역이 과거의 광삼면 혹은 광삼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지금의 안정 공단 내에 춘원1,’ ‘춘원2,’ ‘춘원3이라는 길 이름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 통영시의 웹사이트는 춘원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안정국가산업단지 안의 도로이며, 옛 지명 춘원포(春元浦, 春原浦)에서 유래된 도로명이다. 황리(黃里) 면화산(棉花山)의 남쪽 해안에 위치하여 기후가 항시 봄날처럼 따뜻한 넓은 들이라는 뜻에서 춘원(春原)이라 칭했다가 조선 초기에 춘원(春元)으로 변천되었으며, 토박이 지명은 춘언개’, ‘추넝깨’, ‘추엉깨등으로 불리었다. 옛 춘원 포구는 최근 해안이 매립되어 안정공단으로 조성되었다.”

 

이 서술대로라면 춘원포는 황리와 안정리에 걸쳐 있었던 포구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춘원 포구를 매립해서 만들었다는 안정국가산업단지가 황리와 안정리 모두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춘원포15978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배한 후 배를 버리고 도망가다가 사망한 곳이기도 했다. 춘원포의 위치는 임진왜란 저자들에 따라 황리안정리,’ 혹은 예승리등으로 주장되었는데, 지금까지는 통영시 광도면 황리였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그러나 고지도 <동여도(東輿圖, 1850년경)>에는 춘원면과 함께 춘원포가 따로 명시되었는데, 원문(轅門)의 북쪽 해안의 움푹 들어간 만 남쪽에 춘원포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춘원포가 황리가 아니라 안정리 해안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동여도>와 통영시 웹사이트, 그리고 임진왜란 연구서들은 모두 춘원포가 원문 이북 해안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공통된다. 그러나 <동여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고지도들은 춘원면을 원문(轅門)의 이남 지역, , 통제영과 미륵도, 지금의 용남면 지역이라고 했다.

 

춘원이라는 이름이 춘원포에서 유래했고, 춘원포가 지금의 안정리 해안이었다면, 여러 고지도가 원문의 이남 지역을 춘원면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통제영이 옮겨간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처음 설치된 통제영(초대 통제사 이순신)은 본래 한산도에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의 통제영이 풍비박산이 난 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에 의해 지금의 통영시 지역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원래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지만 이내 춘원면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주요 군진이 이전할 때 지명도 함께 옮겨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거제의 조라진은 원래 오늘날의 구조라진에 있었지만 진이 옥포로 옮기면서 조라진이라는 명칭도 옮겨갔다. 또 김해시 장유면에 있던 신문진도 진해시 안골방향으로 옮겨 가자 신문진이라는 이름도 따라 갔다.

 

삼도수군통제영도 원래 안정리 해안의 춘원포에 있었으나, 통제영이 두룡포로 옮겨가면서 그것이 있었던 지명 춘원까지 따라 옮겨갔고, 그래서 지금의 통영시내 지역이 춘원면이라고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2022/8/31,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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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후의 지명을 대조하여 작성된 보고서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6, 越智唯七編纂, 중앙시장 발행)><해동지도(1750년경)><경상도지도(1872)>, 그리고 <지도(1884)>를 비롯한 6개 고지도를 조사한 결과 오늘날의 통영이 춘원면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익삼씨의 고향은 당시의 춘원면자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주소 맨 마지막의 선삼촌(先三村)’이라는 지명 때문이었다. 선삼촌(先三村) 혹은 선삼(先三)이라는 지명은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에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고지도를 조사하던 중 필자는 춘원면의 바로 북쪽에 광삼면(光三面)’이 있었고, 한자 먼저 선()’자는 빛 광()’자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남익삼씨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선삼촌광삼촌의 오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지도에 나타난 지명은 광삼이 아니라 광삼으로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광일면광이면에 이어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조사대상이 되었던 가장 오래된 고지도 <해동지도(1750년경)>에 따르면 광일면은 광내일운면(光內一運面), 광이면은 광내이운면(光內二運面)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나 이 지도에 광내삼운면(光內三運面)이 나타나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세기에는 광삼면이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상도지도(1872)>에서는 춘원면 소재 통제영의 현관인 원문(轅門) 바로 북쪽에 광삼면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해동지도> 시기에는 없었던 광삼면이 <경상도지도> 제작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지도>는 남익삼씨가 출생(1878년경)하기 전에 제작되었으므로 그가 이곳에서 출생했다면 그의 고향은 춘원면이 아니라 광삼면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삼면은 이후 다시 사라졌다. 남익삼씨 출생 직후에 제작된 <지도(2, 1884)>에는 원문의 이남 지역은 춘원면으로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원문 바로 북쪽에 자리잡았던 광삼면이라는 표기는 사라진 반면, 그보다 더 북쪽에는 광일면과 광이면이 그대로 존속했다.

 

 

다시 말해 이때쯤이면 광삼면은 춘원면에 이미 이속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의 주소에 춘원이라는 말과 선삼(先三, 광삼(光三)의 오기로 추정)’이라는 말이 동시에 등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마도 광삼면은 나중에 설치된 작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춘원면에 이속되면서 광삼촌(光三村)으로 격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광삼촌이 매장인허증에 선삼촌으로 오기된 것으로 추정된 것이다.

 

광삼면/촌 지역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통영군에 속하게 되었던 반면, 광일면과 광이면은 고성군에 남겨졌다. 광일면은 고성군 거류면에, 광이면은 고성군 동해면에 포함되어 그 이름이 사라졌다.

 

반면 광삼촌 지역은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도내면과 함께 통영시의 광도면이 되었다. 광도면은 광삼면도내면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었기 때문에 광삼면은 그 일부나마 통영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남익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군 춘원면 광삼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추정이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남익삼씨의 고향 주소 중에서 절반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 춘육(春六)이라고 읽힐 수도 있는 지명이, 그런 지명이 당시 조선의 행정구명 목록에 없다는 이유로 춘원(春元)의 오기라고 단정한 점, 선삼(先三)이라는 표기도 광삼(光三)의 오기라고 추정한 점 등이 모두 사실에 부합할 경우에만 사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남익삼씨 주소는 모호했고, 그 밖의 다른 자료가 없으니 이렇게 추정이라도 해 보는 것이 필자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추정을 발판으로 그의 조선 내 연고를 찾아보는 수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2022/8/31,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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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조선 주소지 춘원(春元)’이 오늘날의 통영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 필자는 이를 고성시립도서관에서 발견한 고지도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이 도서관이 소장한 <고성군지(1-3)><고성사료집(1-3)>에는 다양한 고지도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중 적어도 5개 고지도에 춘원이 명시되어 있었다.

 

고성 향토자료들에 실린 가장 이른 시기의 고지도는 <해동지도(海東地圖, 1750년경)>였다. 812822장으로 구성된 <해동지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에는 조선전도와 조선8도의 도별 지도, 그리고 전국 330여 군현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지도가 채색필사로 제작된 <해동지도>의 제5책에 경상도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데, <고성현도(固城縣圖)>도 여기에 속해 있다.

 

 

<고성현도>의 중앙에는 바다와 산맥과 강줄기 사이사이에 고성을 비롯한 지명들이 적혀 있었고, 그 여백에는 고성현의 지리와 인구, 병력과 수세 상황들이 부기되어 있었다. 특히 오른쪽 하단에는 12개 부속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춘원면은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 따르면 춘원면의 크기는 가로 30, 세로 70리로 고성현의 12개 면 중에서 면적이 가장 넓었다. 지도 본문에 따르면 삼도수군통제영의 동쪽, 바다에 면한 구릉지역에 춘원면(春元面)”이라고 가로로 표기한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로부터 약 1백년 후에 제작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 1872,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에도 춘원면이 표기되어 있었다.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뒤 전국적으로 벌어진 지지와 지도 편찬 작업의 일환으로 경상감영이 편찬한 <경상도지도>9()으로 구성된 군,현지도와 목장, 산성, 군진의 지도를 포함하여 모두 104매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경상도지도>는 조선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편찬한 전국 군·현지도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군·현지도 중에서 내용이 가장 상세하고 정밀한 지도로 평가된다. 특히, ·현지도 외에 각 군·현에 소속된 산성, 목장, 진보 등 군사 지역의 지도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지도 작성의 목적이 국방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개항 후 변모되기 직전의 각 군·현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조선 시대 경상도 각 지역의 초상화라 할 수 있는 지도이다.

 

 

춘원면을 서술한 <고성부지도><경상도지도>의 제9()에 수록되어 있는데, 고성반도(=통영반도) 남부와 미륵도를 포함한 지역에 춘원면이라는 표기가 되어 있다. 춘원면의 북쪽에는 선산면과 광삼면, 그 위쪽에는 광일면과 광이면이 보인다.

 

그밖에도 고성시립도서관에 소장된 각종 향토자료에 수록된 지도 중에서 춘원면을 표기한 것으로는 <여지도(輿地圖, 1789-1795)><동여도(東輿圖(19세기, 철종연간, 재위 1849-1864)>,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 등이 있다.

 

이상의 5개 고지도들은 모두 18세기와 19세기 중반의 지도들로 남익삼씨(1878년경 출생)가 출생하기 이전의 지도들이다. 그가 출생한 후에 제작된 이 지역의 지도를 찾아보니 1884년에 간행된 <지도(地圖, 고려대학교 도서관 한적실 소장)>가 있었다.

 

 

<지도(1884)>는 회화식 군현지도첩으로 총 4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에 도별전도, 3()에 각도 소속 군현의 개별도가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여백에 각 도와 군현의 인구, 재정곡, 경지면적, 사방경계, 성곽, , 면의 이름과 위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2)>에 수록된 고성부 지도에 따르면 고성반도(=통영반도)의 좁은 길목에 설치되었던 원문(轅門) 이남 지역에 춘원면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통영반도 남쪽, 봉화가 그려져 있는 섬 미륵도에도 춘원면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익삼씨 출생 직후인 1884년 경, 통제영 인근 지역과 미륵도를 포함하여 원문의 이남 지역 전부가 춘원면이었던 것이다. (2022/8/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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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익삼씨의 조선내 연고지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불완전한 주소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 주소에서 어떤 부분이 정확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따라서 부정확한 주소에서 어떻게든 믿을 수 있는 부분을 구별해 내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필자는 우선 ----등의 행정단위를 모두 무시하고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만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중청(中淸)’춘원(春元),’ ‘연북(連北)’선삼(先三)’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또 초서체로 흘려 쓴 글씨 때문에 춘원과 비슷해 보이는 춘육(春六)’연북과 유사하게 보이는 연지(連地)’도 조사에 포함시켰다.

 

이 여섯 개의 지명을 <신구대조 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1916, 越智唯七編纂, 중앙시장 발행)>에서 찾아봤다. 이 보고서는 1914년 일제가 조선의 행정구역을 개편한 결과를 정리한 것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에서 사용된 행정구역 이름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 보고서는 본문만 109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지만, 1915년에 사망한 남익삼씨의 주소를 확인하기에 시기적으로 적절한 문헌이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조선전도에 중청연북선삼이라는 지역 명칭은 없었다. ‘연지춘육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춘원(春元)’이라는 이름은 추적이 가능했다.

 

이 보고서에도 춘원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1914년 이후의 통영군(統營郡)이 과거의 용남군(龍南郡)과 거제군(巨濟郡)을 통합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고성-통영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사가 다소 복잡했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고성과 통영지역은 (1) 삼한 시대 이전에는 진국(辰國), 삼한 시대에는 변한에 속했던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가야시대에는 소가야(小伽倻) 소재지였다. (2) 남북국 시대 고자군(古資郡)으로 불리던 이 지역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에 고성군(固城郡)으로 개칭됐고, 757년 강주(康州=지금의 진주)에 병합했다. (3) 1016(고려 현종9) 이 지역은 거제현(巨濟縣)으로 이관되었지만, (4) 1275(고려 충렬왕 2)에 남해현(南海縣)으로 이속되었다가 1308(충렬왕 복위10) 거제현으로 되돌려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5) 1604(선조 37) 이 지역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었는데 당시 이름은 거제현 두룡포(頭龍浦)였다. (6) 1677(숙종 3) 두룡포가 고성현(固城縣)에 이속되면서 춘원면(春元面)으로 개칭되었다. (7) 1869년 고성현 춘원면에서 호적분규사건이 일어났고,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한 사후책으로 1870년 고성현을 고성부로 승격했다. (8) 1880년 고성부는 고성현으로 환원되었다가, 1884년 재차 고성부로 승격되었다.

 

(9) 1895(고종32) 춘원면 소재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고, 고성부는 고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0) 1900년 통제영이 소재했던 지역이 고성군에서 독립하여 따로 진남군(鎭南郡)이 되었다. (11) 1909년 진남군은 용남군(龍南郡)으로 개칭됐다. (12)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용남군은 거제군과 함께 통영군으로 병합됐다.

 

통영군(1914)”에 병합된 용남군(1909-1914)”은 그 직전 이름이 진남군(1900-1909)”이었고, 그 전에는 약 230년 동안 고성현//군 춘원면(1677-1900)”이었던 것이다.

 

 

1915220일 사망한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생년월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不詳)’면서도, 그의 사망시 나이가 37세라고 했다. 이를 역산하면 남익삼씨가 태어난 연도는 1870년대 말인데, 그 당시 통영의 이름은 고성부 춘원면이었다.

 

남익삼씨가 일본에 살면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경상()도 고성부 춘원면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춘원에서 태어났고 첫 20년을 거기서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20대 후반에 춘원진남으로, 30대 초반에는 다시 용남으로 바뀌었고, 조선을 떠나 일본 효고현에서 고베수도공사에 투입되었을 즈음 다시 통영이 되었지만, 지속적으로 바뀌는 고향의 공식 명칭에 그가 얼마나 친숙했을지는 의문이다. (2022/8/2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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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시립도서관이 풍부한 향토자료를 소장하고 있었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서는 그 대부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의 신문들이 이미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의 연고지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임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일은 고성 내에서 그들의 구체적인 연고지를 문헌이나 증언으로 확인하면 되고, 혹시 가족이나 친족 등의 연고자를 찾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강릉 조사에서는 경주김씨 수은공파 족보를 통해 김병순(金炳順)씨의 연고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고성에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족보 기록을 찾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였다.

 

그러나 통영 조사는 사정이 달랐다. 일본에는 남익삼씨가 통영 출신임을 보여주는 기록이 없었다. 필자는 남익삼씨의 매장인허증에 나타난 불완전한 조선 주소를 바탕으로 그가 통영 출신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지만, 그 추측은 문헌이나 증언으로 뒷받침되어야 했다.

 

 

남익삼씨는 1915년 고베수도공사 중에 터널 낙반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니시타니(西谷) 촌사무소에서 발행한 매장인허증에 그의 조선 주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소는 초서체 한자로 쓰였기 때문에 읽기 쉽지 않았고, 간신히 읽어낸 주소도 당시의 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았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남익삼씨의 주소를 읽히는 대로 옮기면 조선 중청도 춘원우 연북면 선삼촌(朝鮮 中淸道 春元右 連北面 先三村)”이다. 그러나 이 주소에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당시 조선에는 중청도(中淸道)’라는 행정구역이 없었다. 가장 근접한 것이 충청도(忠淸道)’이겠으나 이 역시 충청남도이거나 충청북도로 나누어 써야했다. 따라서 이 주소는 당시의 조선 행정구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 불러준 대로 받아썼던 것으로 보인다.

 

 

춘원우(春元右)’라는 기록도 문제다. ‘()’라는 행정단위는 조선에 없었다. 행정단위의 순서로 보면 ()’ 다음에는 ()’이 나와야 하는 자리이기는 하다. 또 춘원다음에 연북이 나왔기 때문에, ‘춘원우춘원군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의해 이루어진 행정구역 개편 전후를 모두 살펴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에는 물론 조선 전역에 춘원군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춘원우다음의 연북면()’선삼촌()’도 마찬가지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의 전과 후를 통틀어 전국 13도의 모든 행정구역 명칭을 조사해도 연북면선삼촌혹은 선삼리라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역시 잘못된 표기임에 틀림없었다.

 

, 남익삼씨의 조선 주소가 엉터리였다는 것인데, 이런 일이 왜 생겼는지 궁금했다. 매장인허증에 따르면 사망 당시 37세였던 남익삼씨의 정식 고용 기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취업 자료가 있었다면 매장인허증에도 정확한 주소와 생년월일이 기록되었을 것이다.

 

 

1910년대 초반에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중에는 정식 취업 절차를 따라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일용직이나 막노동 일자리를 찾아간 사람들은 대개 사전 고용 절차 없이 무작정 도항했거나 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도착해 철도나 하천 공사, 석탄과 철광석 등의 탄광에서 막노동 일자리를 찾곤 했다. 그럴 경우 고용 기록은 물론 신상 기록조차 작성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수도공사에 투입됐던 남익삼씨도 그런 경우였을 것이다. 그를 비공식적으로 고용한 기업은 물론 그가 거주했던 지역의 말단 행정기관에도 남익삼씨의 신상 정보는 구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남익삼씨가 사망하고 그의 매장인허증을 발행해야 했을 때 촌사무소는 조선인 동료들의 전언에 의존했을 것이고, 동료들이 남익삼씨의 고향을 잘 몰랐다면 그의 주소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의 행정구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촌사무소의 서기가 이를 바로잡을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매장인허증의 남익삼씨 주소가 정확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2/8/29,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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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日午後、固城到着した約束時間午後3だったが姜旭千先生ももう時間がかかった韓昌植先輩もまだ日課えていないとった

 

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全羅南道羅州公演可能性打診するために広範囲南道取材中だったがこの日約束るため光州-統営固城バスターミナルに到着してみたら3時半だったしかし姜旭千先生事情により6時頃到着する予定だとらせてきたし韓昌植先輩5までは時間ることがしかったため2時間余裕時間つことになった

 

 

固城バスターミナルに到着したりの時間固城市立図書館資料調査めた固城るたびに図書館ぎてすぐに邑内中心街進入したりもした韓昌植先輩がいつも先頭ってけてくれたので図書館調査にあまりげなかった

 

しかし同日固城図書館郷土資料ながらこれまでえが間違っていたことがかったこの図書館はかなりの多様郷土資料所蔵していたまず『固城郡誌2015)』があった1ページ前後3構成されたこの郡誌先史時代以来固城のすべてを記録としてしていた固城沿革歴史叙述した1固城文化芸術および各村由来叙述した3非常必要だった

 

 

『固城郡誌えて『固城史料集にあったこれも3になっているが固城する歴史的文献集成した。『固城史料集1(2008)各種歴史書地理誌掲載された古城する記録をすべてめている渉猟した史書には<三国志><後漢書><日本書紀><三国史記><三国遺事><高麗史><高麗史節要><備邊司謄錄>などが網羅され地理誌にも<三国史記地理志><慶尚道地理志><高麗史地理志><世宗實錄地理志><慶尚道續纂地理志><新増東國輿地勝覽><東國輿地誌><輿地図書><慶尙道邑誌><大東地志><嶺南邑誌><嶠南誌>などが動員された

 

<固城史料集2(2010)>朝鮮王朝実録固城するての記録抜粋編集しただがその面数ページをえた<固城史料集3(2012)>1930年代独自編纂された邑誌鉄城誌(1930)『固城(1934)翻訳して掲載したがこのつの邑誌1ページをえるほど膨大だった時期邑誌2つも編纂されたのも異例だがこれらの邑誌日帝当局ではなく民間編纂したということも特異

 

 

<固城郡誌><固城史料集>シリーズだけでもかなりの資料だがそのにも固城文化院発刊した資料さらにあった<固城郷土地名社><固城名辭録><固城文化遺跡誌><固城先史石語録>などがそれだ

 

また固城郡編纂した<固城:写真地元固城のあののその姿>という写真集もいたがこのには歴史的固城んだ写真網羅して収録してその場所現在姿写真とペアをすように配置した立派資料集だった

 

そのにも固城のいくつかの地域散在した先史時代遺跡する資料集もあり伽倻新羅高麗朝鮮時代られた各種遺物遺跡各級文化財指定されたものを別途めて写真とともに説明えた親切資料集出版されていた

 

 

まで韓国日本米国欧州くの都市たちをって取材してきたが地元歴史文化についており固城のように膨大資料集具備しておいたはなかったようだ

 

固城する多様みのある資料沢山具備されているというのは研究者いことかしかないしかし<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縁故すのにはどんな資料がどのようにとなるかまだからない

 

本格的調査まりこの資料をせんさくしてみればえてくるだろう(2022/8/24趙正熙(チョ·チョン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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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日午後固城(コソン)到着した2次調査まりだった1回目調査訪問までわせれば5回目訪問だったが今回訪問目的固城-統営調査計画すことにしたまず1次調査積極的協力してくださった<固城放送局>韓昌植(ハン·チャンシク)先輩って調査再開議論することにした

 

この会合には文化企画者であり民芸総事務総長姜旭千(カン·ウクチョン)先生参加した姜旭千先生18日江原道訪問19ソウル延南洞かれた<小船たちの>コンサートと徹夜打げまで参加しても翌日固城約束れたすごい動線だしくべき情熱

 

同日約束2月前われたものだった統営トンヨン4回目訪問した6月末韓昌植先輩とダチの夕食会めてったダチとは一定のメニューがまっておらず時期った海鮮中心につまみを放題提供する方式した

 

これまで統営頻繁訪問したがたいてい単独訪問だったためダチをしむことができなかったダチは一人飯/一人酒1人客には提供されなかったおそらく経済性すなわち元手けていないためだろうたまにダチというメニューが広報されるがあえて1人顧客敬遠する風土らうにはならなかったそして統営にはのおいしい海産物食堂かったためでもある

 

そうしているうちについに韓昌植先輩とダチのごちそうをかちいながら時間ごしたのでとしては感激的時間いなかったそれでsns自慢をしたのだがすると姜旭千先生統営ダチ会合をもう一度しようとって820くから日付めた

 

この約束られるかは疑問だった8にはもがしいか休暇シーズンだったからだ随時文化行事日程消化しなければならない姜旭千先生事前計画もなく勝手にあちこち取材2月後のダチの約束可能性希薄えた

 

 

しかしたちは2ともこの日付記憶20固城まった韓昌植先輩もややった様子だった。 姜旭千先生合流するともっとしい姿だった韓先輩きな姿ると統営ダチのまりを頻繁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もしたかにらすということがただそういう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きな人同士きなことをよく一緒にするのが人生だろう

 

とにかくたち3固城すぐ統営移動港南洞船艙街でタチねた金曜日夕方ほとんどすべての満員だったので3のドアをいて拒絶4番目でテーブルをったるやいなや新鮮海藻類甲殻類刺身がテーブルにがりめたえのあるたちはをすぐにそのしいんできたビールと焼酎めたバケツにれられたままテーブルのかれたバケツがいたらすぐにしくたされたさすがにダチらしい

 

 

港南洞タチ路地トッケビ(=)路地ばれたが路地のあちこちにそのようながついたアーチ型装飾物てられている漁師たちが一日労働苦労していだお一晩中全部はたいてべる居酒屋とおさんたちのためにけられた名前だというはそのような慣行えたが酒量えてぎるしかないトッケビ路地雰囲気もそのままっているようだ

 

々としくなるおつまみのたちはしながらまたした韓昌植先輩統営-固城面白姜旭千先生民芸総事務総長適応期興味深かった宝塚朝鮮人追悼碑犠牲者計画簡単らかにした

 

韓昌植先輩固城調査担当して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二根·イグン縁故して 統営調査して南益三(ナム·イクサム)のゆかりをらかにします。」

 

これがすべてだったこの計画簡単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議論するにはダチがとてもかったしいおつまみのために酒気がすぐがることがらかだった한창식先輩そうしようけたしい計画^^てられたこれから実行せばいい。 (2022/8/23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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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 선생의 최초이자 최고 히트 작품이었다.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이시이 바쿠의 작품 <캐리커처(1926)>를 불쾌하게 여겨 <우리의 캐리커처(1931)>를 따로 안무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이 작품은 조선에서도 인기를 끌었지만,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어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된 이후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에헤야 노아라>는 최승희가 <나의 자서전(1936)>에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굿거리 춤이라고 서술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부친 최준현의 <굿거리 춤>과 스승의 <캐리커처>를 비판하기 위해 안무한 <우리의 캐리커처>가 합쳐진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헤야 노아라>는 곧 일본에서 유명해졌고, 최승희 조선무용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독립하기 전인 19331022일 최승희는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상연했고, 1934920일 도쿄에서 개최한 첫 개인 발표회 <1회 도쿄공연>에서도 상연됐다. 19351025-27일의 간사이(오사카, 고베, 오카야마) 공연과 19351119일의 다카라즈카(寶塚) 공연, 1129일의 후쿠이(福井) 공연에서도 상연됐다.

 

이 작품의 상연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3673일의 타이완 타이페이 공연, 1937329일의 숙명여전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경성 부민관 공연, 1938116일의 미국 뉴욕 길드극장 공연에서도 <에헤야 노아라>가 상연됐다.

 

그러나 의아한 점이 있었다. <에헤야 노아라>1937년까지는 활발하게 공연되었지만 세계 순회공연이 시작되자 그의 공연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이 다시 공연된 것은 최승희가 자신의 무용 경력을 총결산하는 1942126일의 도쿄 독무공연에서였다. 그렇게 인기 있는 대표작품을 어째서 더 이상 공연하지 않았을까?

 

 

사실 <에헤야 노아라>의 공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면서 최승희는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개량해 이름을 바꾸었는데, 새 제목은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였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노심불로>가 초연된 것은 193727일의 오사카 공연이었다. 이어서 211일 후쿠이 공연, 216일 교토 공연, 227일 나고야 공연 등에서도 시험 삼아 공연되었고, 331일에는 이왕직 본청이 주최한 경성의 윤황후 위로 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는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상연되었다. 19381월의 샌프란시스코 공연과 2월의 LA 공연에서는 <신노심불로>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116일 뉴욕 길드극장 공연,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 26일 브뤼셀의 팔레드보자르 극장 공연, 42일 독일 뒤스부르크 공연, 417일 네덜란드 덴하크 공연, 510일 브뤼셀 2차 공연, 615일 파리 샤이오 극장 공연, 627일 덴하크 쿠어짤 극장 공연에서 잇달아 공연되었다.

 

 

이후 미국 공연과 남미 공연에서도 <신노심불로>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였고, 마침내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 처음 가졌던 1941222일의 도쿄 가부키좌 귀조공연에서도 상연되었다.

 

<신노심불로>의 주인공은 <우리의 캐리커쳐><에헤야 노아라>에서처럼 흰 조선 의상을 입은 조선 노인이다. 파리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에는 <신노심불로>한국 노인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청년처럼 춤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야위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여 다시 노인으로 되돌아온다고 해설되어 있다. 이 짧은 서술로 미루어 볼 때 <신노심불로><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이어졌던 우스꽝스런 몸짓의 무용에다가 새로운 스토리를 가미해 구성력을 높인 차원 높은 작품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캐리커처(1931)><에헤야 노아라(1933)>, <신노심불로(1937)>를 발전의 연속선에 놓인 동일한 작품으로 본다면,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끝내고 공연 활동을 시작한 이래 10년 이상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된 유일한 레퍼토리였던 셈이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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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년에 창작된 직후 제목을 <실념>으로 바꾸었고, 적어도 1940년까지는 계속 공연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승의 작품 <캐리커처>에 불만을 가졌던 최승희는 19315<우리의 캐리커처>를 창작해 경성에서 발표했는데, 오빠 최승일의 서술에 따르면 조선 공연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19333, 최승희는 다시 도쿄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 문하에 들어갔고, 불과 2달 만에 무대 출연의 기회가 왔다. 520일의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원래 이시이무용단을 대표해 이시이 미도리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그가 급성 늑막염 진단을 받는 바람에,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를 대타로 지명해 대회에 참가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발표할 작품이었다. 대회를 불과 수 일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새 작품을 안무할 시간은 없었다. 최승희는 이미 창작한 작품 중에서 한 곡을 선정해야 했고, 이때는 이시이 바쿠 문하생 신분이었으므로 스승과 작품 선정을 의논해야 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의 작품성이 뛰어남을 알아보았고, 이를 출품작품으로 선정하면서, 다만 그 제목을 변경하도록 권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 33)>에서 이시이 바쿠는 이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의 권고로 도쿄에서 제1회 발표를 하게 되었다. 승희의 무용에 특징을 주자는 의미에서, 그 때 빅터(=레코드사)의 용건으로 도쿄에 와 있던 조선무용의 대가 한(성준)씨 밑에서 조선무용의 수법을 속성으로 연습시켰고, 본인이 싫다는 것을 내가 억지로 정리해서, 제목도 <에헤야 노아라>로 명명해 상연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큰 평판이 났고, 그 후 스스로도 자주 조선풍의 무용을 상연하게 되었다. 정말로 본인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시이 바쿠의 이 회상에는 몇 가지 착오가 있다. <에헤야 노아라>를 발표한 <근대여류무용가대회>1933520일에 열렸으므로, 이는 최승희가 한성준 선생에게서 조선무용을 배우기(19346) 1년쯤 전이고, 최승희의 제1회 발표회(19349)보다도 1년반 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에헤야 노아라>로 바꾸도록 권고한 것은 이시이 바쿠였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승희의 작품 제목이 자신의 <캐리커처(1926)>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스승 이시이 바쿠와 제자 최승희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을 것이다.

 

<캐리커처>는 이미 제목을 <실념>으로 바꿨지만, 기억하는 관객이나 평론가도 있을지 모르니, 모작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 네 <우리의 캐리커처>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어떠냐?”

그럼 조선에서 흥을 돋우는 감탄사로 쓰이는 <에헤야 노아라>라고 할까요?”

그게 좋겠다. 앞으로 이 조선무용 제목은 <에헤야 노아라>로 하도록 해라.”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라는 조선식 감탄사를 알고 있었을 리 없다. 따라서 이 제목은 최승희가 제안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엄격한 도제식의 스승-제자 사이에서 최종 결정은 스승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는 법이다. 이시이 바쿠가 <에헤야 노아라>의 제목을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서술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1926)>와 최승희의 <우리의 캐리커처(1931)>은 둘 다 제목이 바뀌었다. <캐리커처><실념(1926)>으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1933)>로 바뀐 것이다.

 

이후 이시이 바쿠의 <실념>은 조선 의상 대신 일본식 의상을 사용하면서도 노인의 모습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계속 상연되었다.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도 조선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되, 반주 장단을 중모리에서 굿거리로 바꾸어 더 흥겹고 유쾌한 작품으로 바꾸었는데, 덕분에 조선과 일본, 유럽과 미주에서 공연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2022/8/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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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캐리커처(1931)>는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カリカチュア, 1926)>에 불쾌감을 느꼈던 최승희가 이를 수정하고 보완하려는 의도로 창작한 작품이었고, 이것이 후일 <에헤야 노아라(1933)>로 개칭되었던 것이라고 필자는 추론했다.

 

이 추론은 <신여성(19345월호)>과 최승일의 <최승희 자서전(1937)>, 그리고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평전 <최승희(1981[1959])> 등의 문헌으로 뒷받침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시이 바쿠의 <캐리커처>가 공연에서 발표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1926년 이래 1940년대에 이르는 이시이 무용단의 숱한 공연 프로그램을 조사했으나, 그 모든 프로그램에 이시이 바쿠의 독무 <캐리커처>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이는 <캐리커처>가 창작은 되었으나 발표되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는 뜻이다.

 

 

<이시이바쿠 팜플렛(1, 1927)>에 실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작품 목록에도 <캐리커처>라는 작품은 없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으로 창작된 <실념(失念)>이 있을 뿐이다.

 

<캐리커처>19263월 이시이 바쿠가 처음 경성을 방문했을 때 창작되었다. 이 경성 공연을 위해 이시이 바쿠는 그의 처제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 도착, 여관과 요정이 즐비하던 수정 2번지(=지금의 중구 필동)의 하라카네(原金) 여관에 숙소를 정했고, 경성일보 사옥(=지금의 태평로1가의 프레스센터)에서 인터뷰를 하고, 하세카와초(=지금의 소공동)의 경성공회당에서 321일부터 23일까지 공연을 열었다.

 

 

이때 이시이 바쿠는 경성역 앞을 배회하는 한 조선 노인의 모습과 그의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공연을 마치고 도쿄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로 돌아가, 이 조선 노인을 희화화한 작품을 안무했다. 강이향(1993, 52)은 당시 상황을 이같이 서술했다.

 

(=이시이 바쿠)가 서울에서 맨 처음 본 것은 흰옷의 조선인들이 밧줄에 묶인 채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수인들의 무리였다. 그는 그곳에서 빼앗는 것들의 뿌리는 하나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어두운 인상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서도 활기찬 사람의 모습, 흰옷을 입은 노인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리의 그늘 밑에 앉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한가함을 즐기는 모습. 그는 그 모습 속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자마자 그곳에서 본 노인의 인상을 테마로 하여 <실념(失念)>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이 흐르는 가운데 조선 남자의 백의를 상징하는 의상으로 춤추고 있는 그의 무대 사진은 지금도 남아있다.”

 

강이향의 서술과는 달리 이 작품이 노인의 푸근한 사랑과 잔잔한 웃음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흰옷 입은 조선 노인의 정신 나간 듯한 멍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 이시이 바쿠는 조선 노인을 풍자적으로 희화화한 것인데, 그래서 그 제목을 <캐리커처(=희화, 풍자)>라고 붙였다가 나중에 <실념(失念=망각, 멍함)>으로 바꿨다. 최승일과 최승희가 이 작품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런 희화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의 <실념>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코믹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공연에서 그다지 많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일부 남겨진 공연 사진을 보면 일본에서 <실념>을 공연할 때에는 조선 의상이 아니라 일본식 의상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예컨대 이시이 무용단이 19401215일 도쿄의 칸다(神田) 소재 공립강당에서 개최한 보호아동의 밤공연의 프로그램에, <실념>10개 작품 중 4번째 작품으로 실려 있었다.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 난에는 자기 자신의 생활의 캐리커처라고만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실념>이 조선에서 만난 조선인을 소재로 창작되었다는 연원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로 보아 이 작품의 공연 의상도 조선식 한복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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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 1931년 경성에서 이뤄졌던 것은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승희 선생의 1931년 공연을 모두 찾아 봤다. 1931년에 이뤄진 공연은 모두 6회였는데, 그 각 공연에서 초연된 신작 무용작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10-12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발표회>의 신작: <그들의 로맨스>, <향토무용, 농촌소녀>, <광상곡>, <그들의 행진> 4개 작품.

(2) 27일 경성공회당에서 개최된 <2회 무용 발표회>의 신작: <방랑인의 설움>.

(3) 193138일 예산극장에서 신명유치원 후원을 위한 예산공연의 신작: <가비(歌悲)>, <어린 용자(勇者)>, <유희>, <흙을 그리워하는 무리들> 4개 작품.

(4) 51-3일 단성사에서 열렸던 <3회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어린이무용, 나는?>, <우리의 캐리커처>, <찌고이넬와이젠>, <남양의 밤>, <비가(悲歌)>,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 약동>, <황야에 서서>, <어린이무용, 앞으로 앞으로>, <겁내지 말자> 10개 작품.

(5) 91-3일 단성사에서 열린 <신작무용 발표회>의 신작: <세계의 노래>, <자유인의 춤>, <토인 애사>,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인조인간>, <영혼의 절규>, <철과같은 사랑>, <고난의 길>, <이국의 밤>, <폭풍우>, <십자가>, <건설자> 12개 작품.

(6) 1023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던 양현여학교 후원공연의 신작: <번외, 향토무용>.

 

이상과 같이 1931년 최승희 선생이 새로 창작한 무용작품은 32개였다. 여기에 <에헤야 노아라>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에헤야 노아라>를 다른 제목으로 발표했다는 뜻이다. 위의 32개 작품 중 어떤 것이 <에헤야 노아라>였을까?

 

 

<에헤야 노아라>조선무용이자 독무였으므로, ‘현대무용중무군무를 제외하면 단 1개의 작품이 남는다. 그것은 193151-3일 단성사 공연에서 최승희의 독무로 초연되었던 <우리의 캐리커처>이다.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이었을까?

 

최승일은 <최승희 자서전(1937, 56-57)>에 실린 누이에게 주는 편지에서 최승희가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 언제인가 나와 너는 석정막씨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조선 옷을 입고 추는 춤을 보고서 대단히 불유쾌하게 생각하여, 곧 이기세(李基世)씨와 의논하야 가야금 산조 진양 중모리에다가 안무하야 <우리들의 캐리커처>라는 제목으로 너로서는 처음으로 <조선리듬>에 춤을 추지 아니하였느냐. 그때 일반의 평판도 좋았지마는 나는 그때 너는 조선의 딸이다하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이시이 바쿠는 19263월 첫 조선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 경성역에서 보았던 조선 노인의 모습을 소재로 <캐리커처>라는 작품을 안무했다. 이 작품에서 이시이 바쿠는 한복 두루마기 의상으로 춤을 추었는데, 최승일과 최승희는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만큼 조선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최승희는 조선 남성의 의상은 유지하되 음악을 진양중모리 리듬의 가야금산조로 바꾸고, 무용 동작을 모두 새롭게 안무해서 제목을 <우리의 캐리커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이시이 바쿠가 본 조선의> 캐리커처>가 아니라 <우리의 캐리커처>라는 뜻이다.

 

갓을 쓴 두루마기 의상의 중년 남성의 춤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와 같다. 다만 <에헤야 노아라>의 반주가 굿거리장단이었지만, <우리의 캐리커처>의 음악은 진양중모리 장단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로 개명하면서 장단을 더 흥겨운 굿거리장단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3151일 서울 단성사에 초연된 <우리의 캐리커처><에헤야 노아라>의 원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2022/8/27,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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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 <에헤야 노아라(1933)>가 아니라 <영산무(1930)>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많은 저자들이 1930년 경성에서 초연된 <영산무(1930)>의 존재를 알면서도 <에헤야 노아라>를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서술하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본 문헌을 답습한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산무>보다 <에헤야 노아라>보다 먼저 발표됐던 것은 사실이다. <영산무>1934920일 일본청년관에서 최승희 선생의 <1회 무용발표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던 반면, <에헤야 노아라>는 그보다 약 1년반 전인 1933520<레이조카이(令女界)> 주최의 <근대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933년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에헤야 노아라>의 초연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1931년 조선의 경성에서 초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헌들이 있다.

 

먼저 조선의 여성지 <신여성(19345월호)>이다. 이 기사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했다. 필자는 처음에 이 서술에 의문을 가졌다. <신여성> 기사는 작품 제목을 <에헤노아라>라고 잘못 기록한 바 있다. 또 최승희 선생의 <에헤야 노아라> 공연 사진이 “193311월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재발표할 때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는데, 실은 19331022일의 <이시이바쿠 무용단 가을공연>이었다. 날짜를 잘못 서술한 것이다.

 

<신여성> 기사의 이같은 오류들 때문에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는 서술도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 기사의 서술대로라면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은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보다 약 2년이나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사의 서술을 뒷받침하는 다른 문헌이 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高嶋雄三郞)의 평전 <최승희(1981[1959])>이다. 이 책의 118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1년 서울에서 초연되었다고 기록했다.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연대가 1931년이라고 서술한 <신여성>의 기사와 일치된 주장이다.

 

그러나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서술에도 문제가 있었다. 같은 책 41-49쪽에서 저자는 <에헤야 노아라>1933년 작품이며, 여성잡지 <레이조카이(令女界)>가 일본청년관에서 주최한 <근대여류무용대회(1933520)>에서 초연되었다고 서술했다. 같은 책에서 같은 작품의 초연시기와 장소에 대해 전혀 다른 서술을 제공한 까닭이 무엇일까?

 

언론인(=신문기자)이자 안막-최승희 부부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이같은 사실을 서술할 때 추측이나 자의적 판단을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저자가 같은 사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언급을 기록했을 때에는, 그 각각을 뒷받침하는 문헌, 혹은 증언 자료가 존재했었음에 틀림없다.

 

 

필자는 다카시마 유자부로의 ‘1933년 도쿄 초연설이 다른 언론사들의 기사가 근거였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근대여류무용대회>가 끝난 후 도쿄의 신문들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가 그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며 그날 일본청년관에서 발표된 것이 초연이라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반면, ‘1931년 서울 초연설은 최승희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1931년 최승희는 경성에서 활동했고, 재차 도쿄에 가기 전이었으므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최승희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다카시마 유자부로가 안막에게서 들었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이므로 안막은 최승희의 <에헤야 노아라>에 대해 직접 알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1931년 서울 초연설의 근거는 최승희가 다카시마 유자부로에게 직접 전했거나 혹은 안막의 증언을 통해 건네졌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경우이든,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같은 사건에 대한 상이한 서술을 기록하면서 어떤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 검토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다. (2022/8/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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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일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한창식, 강욱천 선생과의 약속은 오후3시였는데, 나도 늦었고 강욱천 선생도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한창식 선배님도 아직 일과를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최승희 선생의 전남 나주 공연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남도 취재 중이었는데, 이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주-통영을 거쳐 고성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3시반이었다. 그러나 강욱천 선생은 사정상 6시경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려왔고 한창식 선배님도 5시까지는 시간을 내기 어려우셨기 때문에, 나는 약 2시간의 여유시간을 가지게 됐다.

 

 

고성버스터미널에 먼저 도착한 나는 남은 시간 동안에 고성시립도서관에서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고성에 올 때마다 도서관을 지나쳐 바로 읍내 중심가로 진입하곤 했었다. 한창식 선배님이 항상 앞장서서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도서관 조사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날 고성도서관의 향토자료들을 살펴보면서 그동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이 도서관은 상당한 양과 다양한 종류의 향토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우선 <고성군지(2015)>가 있었다. 1천쪽 내외의 책 3권으로 구성된 이 군지는 선사시대 이래 고성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특히 고성의 연혁과 역사를 서술한 1권과 고성의 문화와 예술 및 각 마을의 유래를 서술한 3권은 매우 필요한 책이었다.

 

 

<고성군지>에 더하여 <고성사료집>이 따로 있었다. 이 역시 3권으로 되어 있는데, 고성에 관한 역사적 문헌들을 집성한 책이다. <고성사료집 1(2008)>은 각종 사서와 지리지에 실린 고성에 관한 기록을 모두 모아놓았다. 섭렵한 사서에는 <삼국지>, <후한서>, <일본서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비변사등록> 등이 망라되었고, 지리지에도 <삼국사기지리지>, <경상도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경상도읍지>, <대동지지>, 영남읍지>, <교남지> 등이 동원되었다.

 

<고성사료집 2(2010)>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고성에 관한 모든 기록을 발췌, 편집한 책인데 그 면수가 1천 쪽이 넘었다. <고성사료집 3(2012)>1930년대에 독자적으로 편찬된 읍지 <철성지(1930)><고성지(1934)>를 번역해서 실었는데, 이 두 읍지도 1천 쪽이 넘을 만큼 방대했다. 비슷한 시기에 읍지가 2개나 편찬된 것도 이례적인데, 이 읍지들은 일제 당국이 아니라 민간이 편찬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고성군지><고성사료집> 시리즈만 해도 상당한 양의 자료인데, 그밖에도 고성문화원이 발간한 자료들이 더 있었다. <고성향토지명사><고성명사록>, <고성문화유적지><고성선사석어록> 등이 그것이다.

 

또 고성군이 편찬한 <고성: 사진으로 보는 내 고장 고성의 그때 그 모습>이라는 화보집도 있었는데, 이 책에는 역사적으로 고성을 담은 사진들을 망라해 수록하고, 그 장소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짝을 이루도록 배치한 훌륭한 자료집이었다.

 

그밖에도 고성의 여러 지역에 산재한 선사시대의 유적들에 대한 자료집도 있었고, 가야,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각종 유물과 유적 중에서 각급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을 따로 모아 사진과 함께 설명을 곁들인 친절한 자료집들도 발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과 일본,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취재해 왔지만, 자기 고장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고성처럼 방대한 자료집들을 구비해 놓은 곳은 없었던 듯싶다.

 

고성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자료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다는 것은 연구자에게 좋은 일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데에는 어떤 자료가 어떻게 도움이 될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어 이 자료들을 천착해 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다. (2022/8/2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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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0일 오후, 고성에 도착했다. 2차 조사의 시작이었다. 1차 조사 방문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 방문의 목적은 고성-통영 조사의 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잡았다. 우선 1차 조사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셨던 <고성방송국>의 한창식 선배님을 만나서 조사 재개를 의논하기로 했다.

 

이날 모임에는 문화기획자이자 민예총 사무총장 강욱천 선생도 동참했다. 강욱천 선생은 18일 강원도 방문, 19일 서울 연남동에서 열린 <조각배들의 노래> 콘서트와 밤샘 뒷풀이까지 다 참석하고도, 다음날 통용 약속에 나타났다. 대단한 동선이고, 놀랄만한 열정이다.

 

사실 이날 약속은 두 달 전에 이뤄진 것이었다. 통영을 네 번째 방문했던 6월말에 나는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저녁상을 처음 마주했다. 다찌란 일정한 메뉴가 정해져 있지 않고, 시절에 맞는 해물 중심으로 안주를 무한 리필로 제공하는 방식을 가리켰다.

 

 

그동안 통영을 자주 방문했지만 대개 단독 방문이었으므로 다찌를 즐길 수 없었다. 다찌는 혼밥/혼술의 1인 고객에게는 제공되지 않았다. 아마도 경제성, 즉 본전이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더러 다찌라는 메뉴가 홍보되지만, 굳이 1인 고객을 꺼리는 풍토를 거스를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리고 통영에는 다른 맛있는 해산물 식당들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한창식 선배님과 다찌 한 상을 마주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으니 나로서는 감격적인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sns에 약간 자랑질을 했던 것인데, 그랬더니 강욱천 선생이 통영 다찌 회동을 한 번 더 하자면서 820일로 일찌감치 날짜를 잡았다.

 

이 약속이 지켜질는지 의문이 없지 않았다. 8월이면 누구나 한창 바쁘거나 휴가철이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문화행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강욱천 선생이나, 사전계획도 없이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취재를 다니는 내가 두 달 후의 다찌 약속을 지킬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이 날짜를 기억했고, 20일 고성에 모였다. 한창식 선배도 약간 들뜬 모습이었다. 강욱천 선생이 합류하니 더욱 즐거운 모습이었다. 한선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통영 다찌 모임을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산다는 게 그냥 그런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일을 자주 같이 하는 게 슬기로운 인생살이일 것이다.

 

암튼 우리 세 사람은 고성에서 만나 이내 통영으로 이동, 항남동 선창가에서 다찌집을 찾아 들어갔다. 금요일 저녁이었고, 거의 모든 집이 만원이어서 세 집 문을 두드렸다가 퇴짜를 먹었고 4번째 집에서야 테이블을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선한 해초류와 갑각류, 생선회와 구이가 테이블에 오르기 시작했다. 먹성 좋은 우리들은 접시들을 금방금방 비웠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접시가 날라져 왔다. 맥주와 소주는 얼음을 채운 바께쓰에 담긴 채 테이블 아래 놓였다. 바께쓰가 비면 금방 새로 채워졌다. 과연 다찌답다.

 

 

항남동 다찌 골목은 도깨비 골목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도 골목 여기저기에 그런 팻말이 달린 아치형 장식물들이 세워져 있다. 어부들이 하루의 노동으로 애써 번 돈을 밤새 다 털어먹는 선술집과 아가씨들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관행이 사라졌지만, 주량을 넘겨 과음할 수밖에 없는 도깨비 골목의 분위기는 지금도 그대로 남은 것 같다.

 

시시각각 새로워지는 안주 위에서 우리는 이야기하며 마셨고, 마시고 또 이야기했다. 한창식 선배의 통영-고성이야기도 재밌었고, 강욱천 선생의 민예총 사무총장 적응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아주 취하기 전에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희생자들을 찾을 계획을 간단히 밝혔다.

 

 

한창식 선배님이 고성 조사를 맡아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아 주세요. 저는 통영을 조사해서 남익삼씨의 연고를 밝혀 보겠습니다.”

 

이게 다였다. 이날은 뭐든지 간단해야 했다. 길게 의논하기에는 다찌가 너무 좋았고, 좋은 안주 때문에 술기운이 금방 오를 것이 뻔했다. 한창식 선배님도 그러자고 하셨고, 빠르게 술잔을 비우셨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계획(^^)은 세워졌다. 이제 실행에 옮기면 된다. (2022/8/2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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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尚南道固城統営調査再開した。『宝塚朝鮮人追悼碑記録された犠牲者韓国内縁故調査である碑文によると南益三(ナム·クサム)19151兵庫県宝塚われた神戸水道工事でトンネル落盤事故死亡尹吉文ユン·ギルムン)、呉伊根·イグン19293国鉄福知山線工事で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死亡した

 

 

202011開始した固城1次調査3にわたる現地調査にもかかわらずこれといった成果せなかった20215までわれた調査では固城郡庁のキム·サンミン記録研究士固城放送局のハン·チャンシク代表積極的支援があったが犠牲者縁故確認できなかった

 

固城調査暫定中断したのはほとんど同時めた江陵調査急速進展したためだ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記録された犠牲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江陵ゆかりの物語20215系図記録確認された金炳順氏系図記録発掘するには慶州金氏樹隱公派江陵支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けがきかった系図には金炳順氏名前とともに居日本という記録っておりいの余地がなかった

 

 

202111月中旬、「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した日本人在日韓国人感謝牌贈呈要請する請願江陵市提出した請願者日本鄭世和(チョン·セファ)大黑澄枝(ダイコク·スミエ)先生ソウルの安海龍(アン·ヘリョン)鄭澈勳(チョン·チョルフン)先生江陵姜承昊(カン·スンホ)洪眞善(ホン·ジンソン)柳善起(·ソンギ)先生だった江陵市議会のチョン·グァンミン議員をはじめ江陵市庁のイ·ジュンハパク·ジョンシパク·インスン係長などの実務担当者協力してくださったおかげで請願れられた

 

2022326江陵市長名義感謝牌日本人学者芸術家宗教家社会活動家6在日同胞歴史家事業家2された監査牌伝達決定され実行される過程東京所在江原道本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部長けが絶対的だ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江陵感謝牌贈呈々な記録としてっている金炳順氏縁故過程結果韓国日本くのマスコミに報道された江陵月刊雑誌江陵プラス(20223月号)韓日国境時代超越したヒューマニズムという題名特集記事報道したが宝塚江陵市民いに人類愛礼儀してきた過去歴史現在過程しく報道した

 

筆者江原大学校学術誌<平和たち(PEACES)>つの都市物語:江陵宝塚という論文寄稿した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公共外交視点整理したものだが姜承昊教授(江陵原州大学国際通商学)江原道沿海州農業協力事例意義という論文とペアをむことになった

 

日本では在日朝鮮学校生徒たちが宝塚朝鮮人追悼碑毎年参拝することをめたというこれまで1914-15殉難者金炳順南益三張長守氏100年間祭祀してきた西谷滿福寺では犠牲者位牌った区域にムクゲとつつじを平和庭園造成すると発表した

 

 

感謝牌った宝塚日本人在日同胞江陵答礼訪問計画中だがこれが実現すれば江原道兵庫県交流協力拡大する見通しだこのようにして江陵出身殉難者キム·ビョンスン縁故すことは成功的わり両地域未来指向的展望いてくれた

 

江陵調査成功的えられ殉難者縁故張長守氏本拠地推定さえ不可能なほど資料がなかったが尹吉文吳伊根氏故郷慶尚南道固城調査され19151死亡した南益三氏本拠地統営推定された

 

らの縁故地縁故地確認するための調査再開したのだ(2022/8/20*趙正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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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과 통영 조사를 재개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는 조사이다. 비문에 따르면 남익삼(南益三)씨는 19151월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에서 진행되었던 고베수도공사에서 터널 낙반사고로 숨졌고,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19293월 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공사에서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다.

 

 

202011월에 시작했던 고성 1차 조사는 3차례 단행한 현지조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215월까지 진행된 조사에서는 고성군청의 김상민 기록연구사와 고성방송국의 한창식 대표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희생자들의 연고를 확인하지 못했다.

 

고성 조사를 잠정 중단한 것은 거의 동시에 시작했던 강릉 조사가 빠르게 진척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기록된 희생자 김병순(金炳順)씨의 강릉 연고가 20215월에 족보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족보기록을 발굴하는 데에는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 지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의 도움이 컸다. 족보에는 김병순씨의 이름과 함께 일본에 거주한다(居日本)”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202111월 중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한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에게 감사패 증정을 요청하는 청원을 강릉시에 냈다. 청원자는 일본의 정세화, 다이꼬꾸 스미애 선생님, 서울의 안해룡, 정철훈 선생, 강릉의 강승호, 홍진선, 유선기 선생 등이었다. 강릉 시의회의 정광민 의원을 비롯해, 강릉시청의 이준하, 박종시, 박인순 계장 등의 실무 담당자들이 협조해 주신 덕분에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2022326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가 일본인 학자와 예술가, 종교인과 사회활동가 6인과 재일동포 역사가와 사업가 2인에게 전달되었다. 감사패 전달이 결정되고 실행되는 과정에서 도쿄 소재 강원도본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과 <강릉의 감사패> 증정은 여러 기록으로 남았다. 김병순씨의 연고를 찾는 과정과 결과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특히 강릉의 월간 잡지 <강릉플러스(20223월호)>한일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휴머니즘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보도했는데, 다카라즈카와 강릉의 시민들이 서로를 인류애와 예의로 대했던 과거 역사와 현재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필자는 강원대학교의 평화학 학술지 <평화들(PEACES)>두 도시이야기: 강릉과 다카라즈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강원도와 효고현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공공외교의 시각으로 정리한 것인데, 강승호 교수(강릉원주대, 국제통상학)의 강원도-연해주의 경제교류 문제를 다룬 강원도와 연해주의 농업협력 사례의 의의라는 논문과 짝을 이루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매년 참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동안 1914-15년의 순난자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를 1백년간 제사해 왔던 니시타니의 <만푸쿠지(滿福寺)>에서는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구역에 무궁화와 진달래를 심어 평화의 정원을 조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감사패를 증정 받은 다카라즈카의 일본인과 재일동포 활동가들이 강릉 답방도 계획 중이라는데, 이것이 실현되면 강원도와 일본 효고현의 교류와 협력이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렇게 해서 강릉 출신의 순난자 김병순씨의 연고를 찾는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양 지역 사이에 미래지향적 전망도 열어주었다.

 

강릉 조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다른 순난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설 때가 왔다. 또 다른 희생자 장장수(張長守)씨의 연고지는 추정조차 불가능할 만큼 자료가 없었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은 경상남도 고성으로 조사되었고, 19151월에 사망한 남익삼씨의 연고지는 통영으로 추정되었다.

 

이제 이들의 연고지와 연고자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재개한 것이다. (2022/8/2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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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일의 남도 취재를 다녀오자마자 <하얼빈>을 읽었습니다. 오세훈 선생의 권독문을 읽자마자 인터넷으로 주문했고, 당일 책을 찾아왔습니다. 서점 창구 직원께서 선생님이 마지막 권을 사신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책을 많은 분들이 사 읽는 걸 알고 안심이 되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역시 김훈 선생의 문장력입니다. 단문을 가지고 담백하게 정곡을 찌르며 서사를 전개하는 필력이 놀라웠습니다. 내용도 그랬습니다. 군더더기 한 조각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이렇게 적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더군요. <칼의 노래>의 감흥도 되살아났습니다.

 

 

<칼의 노래> 같은 작품이 이순신 사후 4백여 년이나 지나서 나오고, <하얼빈> 같은 작품이 안중근 사후 1백여 년이 지나서 나왔다는 것이 사실 이 민족의 슬픔입니다. 이런 작품이 더 일찍 나오지 못하게 만든 조선과 한국 사회가 안타까운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도 합니다. 이 두 영웅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한 사람이 <라면을 끓이며> 살았던 김훈 선생인 것도 어쩌면 필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얼빈>의 주요 등장인물은 네 부류입니다. (1) 비루한 조선 왕족과 사대부들, (2) 의연한 포수 안중근과 담배팔이 우덕순, 그리고 의병과 독립군으로 싸웠던 숱한 민초들, (3)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무도한 일본 제국, 그리고 (4) 관망적이었던 조선 천주교회가 그것입니다.

 

작가가 각 주인공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또렷합니다. 그게 뭔지는 책을 읽어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으실 테니까, 제가 주절주절 나열할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두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안중근 선생님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접했지만, 안중근 선생이 바로 이런 분이었구나, 하는 전체적인 그림(whole picture)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은 이 소설 덕분입니다.

 

그것은 저자도 의도했던 바였더군요. 후기에서 토탈 픽쳐(total picture)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라는 핵심어로 세계사적 폭탈 속에서 무능한 조선 왕족/사대부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문서 한 장으로 나라를 팔아먹을 때, 의연히 나서서 일제의 심장을 쏘아 버린 날 것의 청춘들을 드러낸 것이지요. 김훈 선생은 또 이렇게 썼습니다.

 

한국 청년 안중근은 그 시대 전체의 대세를 이루었던 세계사적 규모의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서 있었다. 그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혹은 빼앗은)’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제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안중근 선생님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나섰던 우덕순 선생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진 축에 끼인다고 자부했던 저는, 그동안 우덕순 선생의 이름조차 낯설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하얼빈>을 읽고 나서야 일제가 남긴 우덕순 선생 심문기록과 재판기록을 읽어 보았는데, 안중근 선생 못지않게 훌륭하고 멋진 분입니다. 안중근 선생과 우덕순 선생의 차이점은 결국 누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 성공했는가의 차이뿐입니다. 두 분의 사상과 인성, 의기와 심지는 방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수준의 차이가 아님을 느꼈습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우덕순(과 유동하) 선생이 이발을 하고 나란히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그 사진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그때 그분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저자가 재구성한 것이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 사는 동안, 저런 일을 하면서 저런 말로 마음을 주고받을 동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일까, 하고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인 거사를 앞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동지들과 함께 후세에 전할 사진 한 장을 남길 여유를 챙기셨던 안중근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2022/8/2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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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 즉 최승희류 조선무용의 첫 작품은 그동안 <에헤야 노아라(1933)>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에헤야 노아라>에 앞서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되어 공연된 적이 있었음을 알아 낼 수 있었다.

 

193021일의 <1회 무용발표회(경성공회당)>에서 <영산무(음악 조선고곡 영산회상)>가 초연되었고, 1930330일에 열린 <1회 창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는 <농촌소녀의 춤(음악 조선민요)>가 발표됐다. 19301021일의 <2회 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 음악 보허자)><정토의 무희(음악 조선정악)>가 초연되었다.

 

 

<향토무용: 농부(음악 조선민요)>193127<2회 최승희 무용발표회(단성사)>에서 초연됐고, 193151일의 <3회 최승희신작무용 발표회(단성사)>에서도 <우리의 캐리카추어(음악 가야금산조)>, <봄을 타고 가는 시악씨들>, <향토무용(음악 대취타)>가 초연됐다.

 

, 19335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근대여류무용가대회>에서 <에헤야 노아라>가 발표되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8개의 조선무용 작품이 창작, 공연된 바 있었고, 그중 가장 먼저 발표됐던 <영산무(1930)>야말로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에헤야 노아라>가 최승희 선생의 첫 조선춤이라고 알려져 왔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런 이름붙이기를 시도했던 것이 일본의 평론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공연된 최승희 조선무용 작품은 <에헤야 노아라>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먼저 창작된 8개의 조선무용 작품들은 모두 경성에서 초연되었다. 그중 <영산무>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열린 <1회 최승희 무용발표회>에서 <에헤야 노아라>, <승무>, <검무>와 함께 발표되었지만, 이미 돌풍을 일으킨 <에헤야 노아라>와 새로운 관심을 얻은 <승무><검무>에 눌려 <영산무>는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산무>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조선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전에는 <영산무>가 주목을 끌었다. 예컨대 1930131일의 <매일신보(2)>조선정조를 가득 실은 가지가지의 무용이라는 제목 아래 영산회상의 고악과 영산무라는 부제를 사용할 만큼, <영산무>는 이 공연의 대표곡으로 소개됐다.

 

기사의 본문에서도 그 무용은 모두 조선의 정조를 가득히 실은 최양 독특의 무용들이며, “그중에도 <영산무><영산회상>이라는 조선고악에 맞추어 추는 춤으로 더 한층 조선의 향내를 발산하는 것이라고 특별한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공연이 끝난 후에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평론들은 <인도인의 비애><사랑의 춤>, <오리엔탈><마주르카> 등의 현대무용에 대한 감상이나 평론이 있었지만 <영산무>에 대해 언급한 글은 단 한편도 없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이같은 무관심 때문인지 이후 최승희는 19333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영산무>를 조선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았다.

 

 

기대를 받았던 <영산무>가 조선에서 외면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조선의 관객들에게 충분한 호소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일본유학을 통해 연마한 것은 서양식 근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재와 의상을 조선의 전통에서 찾기는 했으나 그것이 조선무용 작품으로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영산무>에 최승희 선생이 직접 출연하지 않고 그의 제자 2-3명이 출연했던 것도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거나 호평을 받지 못했던 원인이었을 수 있다. 193021<영산무>가 경성공회당에서 조선 초연되었을 때에는 조영애(趙英愛)와 노갑순(盧甲順)에 의해 발표되었고, 1934920일 도쿄 일본청년관에서 일본 초연되었을 때에도 카이 후지코(甲斐富士子), 김민자(金敏子), 가토 에미토(加土惠美子)에 의해 공연되었다.

 

최승희 무용 공연, 특히 그의 초기 공연에서는 모든 시선이 최승희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므로, 그가 직접 출연하지 않은 작품에는 세간의 관심이 적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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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선생은 <에헤야 노아라(1933)>는 물론 <한량무(1938)>를 창작했던 시기까지도 한량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추> 19415월호에는 최승희와 여류명사 회담이라는 좌담회 기사가 실렸는데, 최승희와 참석자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최승희: ... 멕시코에 가니 거기에 옛날에 이민으로 가셨던 조선분이 한분 계신데 70노인이라고 해요. 열세 살 때부터 돌아다니며 춤추고 장구치고 그랬다는데 무슨 장단이고 못하는 게 없어요.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 춤을 추는데 덩실덩실 어찌도 잘 추는지요. (일동 웃음) 소위 난봉꾼인가 봐요. 그런데 그분더러 장구쳐달라고 그랬죠. (일동 웃음) 그런데 활량이란 어떤 의미예요? 활량이라는 춤을 창작해서 추었지요.

 

고봉경: 활량이라는 게 화랑(花郞)이라는 말이 변해진 것이 아닐까요?

 

최승희: 기생꽁무니나 따라 댕기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어떤 분보고 물어봤더니 글도 잘하고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요.

 

이근영: 그건 요새 말하는 활량과는 다를 겁니다. 신라 때의 화랑이란 문과 무도 겸한 채 호탕하게 지내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모윤숙: 원래는 글도 잘 짓고 활도 잘 쏘는 사람을 옛날에 전해오는 말에 화랑이라고 하잖아요?

 

박승호: 그렇지만 요즘이야 건달을 활량이라고 그러지.”

 

이 좌담회가 열렸던 것은 최승희 선생이 세계 순회공연(1937.12-1940.12)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일시는 194141일이었고, 좌담회 장소는 경성 반도호텔이었다.

 

 

위의 대화에 따르면 이때까지도 최승희 선생은 한량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기생꽁무니나 따라 다니는 건달이라는 의미인 줄알고 있었다면서, “한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질문에 답을 해 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봉경이나 이근영, 모윤숙과 박승호 등의 참석자들은 한량이 본래 글도 잘하고 활도 잘 쏘는, 즉 문무를 겸비한 신라 화랑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좌담회 당시, 즉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한량이 그와는 정반대의 젊은이들, 즉 술과 기생을 좋아하는 건달이나 난봉꾼으로 변질된 상태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멕시코 공연은 1940111일이었으므로 위의 대화에 등장한 멕시코 에피소드는 <한량무(1938)>가 창작되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 한량을 소재로 <한량무>가 창작된 것이 1940년 전후, 즉 세계 순회공연 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 7년 앞서 도쿄에서 초연된 바 있었던 <에헤야 노아라>가 한량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대단히 어렵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헤야 노아라>의의와 평가를 서술하면서 이 작품이 “1933년 조선춤의 소재를 서양춤의 기법으로 살려낸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고 소개했고, “이 작품의 성공을 발판으로 최승희는 그녀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견하고 훗날의 최승희류 조선무용확립에 이르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에헤야 노아라>에 대한 이같은 평가는 대부분 사실이지만, “최승희의 첫 조선무용 작품이라는 표현은 유보되어야 한다. <에헤야 노아라(1933)> 이전에도 최승희 선생은 <영산무(1930)><농촌소녀의 춤(1930)>, <장춘불로지곡(1930)><정토의 무희(1930)> 등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조선무용 작품이었다는 것은 우선 그 음악으로 알 수 있다. <영산무>의 음악은 조선고악(영산회상)’이었고, <농촌소녀의 춤>조선민요로 반주되었다. <장춘불로지곡>의 음악은 조선아악(보허자),’ <정토의 무희>의 음악은 조선정악이었다고 한다.

 

또 이 작품들은 그 제목으로 미루어 조선음악과 함께 조선의상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을 조선무용으로 보는 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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