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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1939)는 베네치아 영화제(1932), 베를린 영화제(1951)와 함께 유럽의 3대 영화제로 꼽히지만 1938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아카데미(1929)를 제외하면 국제 영화제로는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일했다. 

193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일부로 시작된 영화제는 1933년을 건너뛰고 1934년부터 연례행사로 전환되고 경쟁 부문이 도입되어서 1938년에 여섯 번째를 맞았다. 1937년의 5회 대회에서는 프랑스의 쟝 르노아르(Jean Renoir) 감독의 <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이 “최고 예술상(Prix du meilleur ensemble artistique)”을 받았다.

<거대한 환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흥한 극우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경계하고 임박한 또 다른 전쟁을 경고하는 반전 평화 영화였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만 1천2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1938년 제5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최고 예술상을 수상한 쟝 르노아르 감독의 <거대한 환상> 포스터.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이 영화에 분노했다. 특히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이 영화를 “공공의 적 제1호”로 규정하면서 독일에서 상영되던 <거대한 환상>의 필름을 압수해 파괴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에도 괴벨스의 첫 명령 중에는 <거대한 환상>의 원본과 복사본을 모두 압수해 파괴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거대한 환상>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의 분노는 이듬해의 베네치아 영화제에도 반영됐다. 이 두 정부가 수상작 선정에 개입한 것이다. 괴벨스는 독일 영화가 수상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 영화는 수상작에 포함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의 <올림피아(Olympia)>가 해외작품상을 받았다.

최우수 작품상도 무솔리니의 아들  비토리오 무솔리니(Vittorio Mussolini)의 후원을 받아 고프레도 알레산드리니(Goffredo Alessandrini) 감독이 제작한 <파일럿, 루치아노 세라(Luciano Serra, pilota, 1938)>에게 돌아갔다. 당시 베네치아 영화제의 수상 결정은 여론이나 투표가 아니라 주최 측이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 같은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올 여지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이 같은 수상 결과를 놓고 미국과 다른 유럽국 영화인들이 분개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단은 즉각 베네치아에서 철수하면서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에서는 정계와 예술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영화제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베네치아 영화제가 이탈리아와 독일 전체주의 입김에 좌우되기에 이르자, 미국과 프랑스 등은 새로운 영화제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1939년 9월 첫번째 칸 영화제가 기획되었다.



새로운 영화제 조직에 발 벗고 나선 것은 프랑스 교육예술부의 영화 담당 차관 필리페 에르랑거(Philippe Erlanger)였다. 프랑스 정부 대표로 베네치아 영화제에 참여했던 그는 수상작 선정 결과에 분노한 나머지 귀국행 열차 안에서 바로 새로운 영화제를 구상했고, 이를 쟝 쟤(Jean Zay) 교육예술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영화제 조직가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1938년 9월30일에 체결한 뮌헨 협약 때문이었다. 이 협약으로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정부는 유럽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을 사후 승인했었다. 간신히 조성한 유럽의 평화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영화인들과 관객들도 프랑스가 새로운 영화제를 만드는 것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직전 해에 <거대한 환상>이 베네치아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데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영화제 조직안을 승인했다. 미국이 유럽의 새로운 영화제를 환영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정치적 목적 외에도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권을 둘러싼 경제적인 이유도 개입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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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야폰 위원회>가 개최한 일본 영화 시사회에서는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외에 2편의 다큐멘터리가 더 상영되었다. 흑백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와 컬러 다큐멘터리 <도쿄(Tokio)>였다.

 

<도쿄>컬러영화였다고 특별히 소개한 것은 당시 컬러 영화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크니컬러기법으로 만든 컬러 영화로, 일본 수도 도쿄를 소개하는 내용이지만 일본 영화사가 제작한 일본 영화는 아니었고, 미국의 MGM사가 제작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파리 일간지에 <토쿄(Tokio)>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영화의 원제목은 <모던 토쿄(Modern Tokyo, 1935)>이며, 미국의 영화 제작자 제임스 핏츠패트릭(James A. FitzPatrick)가 출연해 해설을 맡은 상영시간 730초의 여행 다큐멘터리였다.

 

<모던 토쿄>는 핏츠패트릭의 세계여행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하나였다. 1925년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소개한 이후, 1926년부터는 서유럽 국가들의 도시와 음악을 담은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나갔다. 1930년 핏츠패트릭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소개하는 7분짜리 <벚꽃 필 때의 일본(Japan in Cherry Blossom Time, 1930)>를 방영했고, 1935년 두 번째 일본 다큐멘터리 <모던 도쿄>를 제작한 것이다.

 

제임스 피츠패트릭이 진행하는 여행다큐 <트래블톡>의 첫장면과 홍보 포스터. 피츠패트릭은 1935년 도쿄를 취재해 <모던 도쿄>를 제작, 방영했다.

 

<모던 도쿄(1935)>는 도쿄가 대지진을 이겨내고 동양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서양 문명의 영향으로 빠르게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듬해(1931) 샴 왕국과 한국을 동시에 취재해 제작한 <샴과 코리아(Siam and Korea)>를 방영하기도 했다.

 

시사회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는 나의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이 필름이 다큐멘터리였다고 하므로 일본 다큐멘터리의 효시라고 알려진 <유키구니(雪國, 1939)>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유키구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1937년 단행본 간행)이기도 하지만, 이시모토 토키치(石本統吉) 감독의 이 다큐멘터리 영화(1939년 개봉)로도 유명하다.

 

다큐멘터리 <유키구니>1935년 오무라 에이노스케(大村英之助)가 설립한 예술영화사(藝術映畵社)가 제작한 사회운동적 성격의 기록영화로 상영시간은 약 38분이었다. 19371월부터 1938년 봄까지 만 13개월 동안 7차례의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된 필름을 편집해 제작된 <유키구니>1939년 문부성의 표창을 받을 만큼 수준이 높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영화사에서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의 효시이자 전범으로 꼽히고 있다.

 

파리의 시사회에서 상영된 <유키구니>가 특별한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촬영감독 이노우에 칸(井上莞) 때문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본명이 이병우(李炳宇). 일찍이 오오무라 에이노스케와 함께 사회주의 영화운동에 참여했으나, 1935년 창업된 <예술영화사>에 동참하면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성을 보였다.

 

 

1939년 <예술영화사>가 제작, 개봉한 기록영화 <유키구니>,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 감독은 조선인 카메라맨 이병우였다.

 

<예술영화사>1935년 창립 후 한동안 관광이나 산업 관련의 문화 영화를 제작했는데, 맨 처음 제작한 여행 다큐멘터리가 <조선의 여행(朝鮮, 1935)>이었고, 이 작품의 촬영을 담당한 것도 이병우였다.

 

1938518일의 <조선일보>는 이병우가 “3년 전(=1935) 조선철도국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여행>이라는 조선 풍경 소개영화를 촬영했으며 이때 촬영한 장면에서 최승희 여사가 주연한 <금강산보>에 이용된 것이 적지 아니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1939217일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열린 일본 영화 시사회상영작 3편중에서 2편이 이병우가 촬영한 영상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랭트랑지장>의 평론가 도랑쥐는 <눈의 호소>라는 다큐멘터리가 진행은 느렸지만 현란했으며 촬영이 매우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카메라맨의 한 사람이었던 이병우의 촬영기술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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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파리 시사회는 기록으로 발견된 최초이자 유일한 해외 상영이었다. 제작이 시작된 지 2년만이고 조선과 일본에서 개봉된 지 약 1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후 이 영화가 조선과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상영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대금강산보>의 시사회가 파리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서 막 시작된 최승희의 명성 때문이었다. <대금강산보>의 내용이나 작품성을 소개한 기사나 평론은 없었고, 영화 속의 최승희의 무용 장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310일자 <랭트랑지장>에 실린 간략한 시사회 후기가 전부였다.

 

일본 다큐멘터리와 발성영화 시사회. 먼저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가 상영되었다. 설원, 스키학교와 스키경기,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에서의 스케이트 장면들이 있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흰색이었고, 진행은 느렸지만 현란했다. 촬영이 매우 탁월했다.

 

 

1939년 3월10일의 파리 일간지 <랭트랑지장>은 <대금강산보>의 감상후기를 보도하면서 주인공 최승희가 대단히 아름다웠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 다큐멘터리는 컬러영화 <도쿄(Tokio)>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영화는 미국영화사 MGM의 제작이었다. 해설도 영어로 이뤄졌고, 프랑스어 자막이 달려 있었다. 일본을 촬영한 것이지만 일본 영화는 아니었다.

 

 

메인 메뉴는 <산의 노래(Le Chant de la Montagne)>였다. 발성영화기는 했으나 일본어로 녹음되었고 자막도 없었기 때문에 기모노 차림의 일본인 여류 시인이 프랑스어로 통역했다. 그녀의 프랑스어는 일본식 액센트가 조금도 없이 유창했다. 주최 측에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저명한 코리안 무용가 최승희양을 소개했는데, 그녀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고 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도랑쥐.”

 

<대금강산보>에 프랑스어 자막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 여성 시인이 통역했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이 여성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녀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이로써 <대금강산보>가 파리에서 일반 상영될 수 없었던 이유 한 가지가 밝혀진 셈이다. 일본어 발성영화를 프랑스어로 전달할 수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파리에서 일반 개봉을 하기 위한 서류작업이나 검열과정에 신청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대금강산보>가 왜 미국에서도 상영되지 못했는지 추측하게 해 준다. 1938219일의 뉴욕 길드극장 공연 이후 최승희는 거의 10개월을 공연도 없이 뉴욕에서 지냈다. 이때 최승희가 <대금강산보>의 상영을 시도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필름에 영어 자막이 달려있지 않았고, 아마도 뉴욕에서 일본 영화에 영어 자막을 입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대금강산보>의 파리 시사회가 열렸던 <살드예나> 극장. 그러나 프랑스어 자막이 없이 변사를 동원해 상영되는 바람에 이후 일반 개봉의 기회도 얻지 못했고, 평론가들로부터도 영화의 내용이나 작품성에 대한 적절한 비평을 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용 필름에 외국어 자막을 달지 못한 것은 제작과정의 지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촬영이 4개월이나 지연되었고, 편집을 끝내고 시사회를 가진 것이 19371217일로 최승희가 미국으로 출발(1229)하기 2주 남짓 전이었다. 그 사이에 영어나 프랑스어로 자막을 입힌 새로운 필름을 마련하기가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쿄 시사회 이후 <대금강산보>는 조선용, 일본용, 해외용으로 3벌의 필름이 복사되었다. 조선어 자막이 입혀진 조선 상영용 필름은 1938129일에 개봉되었다. 복사본 제작과 자막 입히기, 그리고 운송에 약 1달이 걸렸다는 뜻이다. 복사본 제작과 운송에 걸렸던 시간은 수일에 불과했으므로 그 대부분은 조선어 자막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영화가 일상적으로 상영되던 조선의 경우에도 약 3주일의 시간이 걸렸다면, 영어나 프랑스어 자막을 다는 일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시사회를 마친지 열흘 만에 미국으로 출발해야 했다.

 

순회공연의 목적지마저 유럽에서 미국으로 급히 변경되는 바람에 온갖 준비가 미비했을 최승희는 결국 영어나 프랑스어 자막을 입히지 못한 <대금강산보> 필름을 가지고 해외 순회공연 길에 올라야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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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381224일이었다. 최승희를 맞는 파리의 분위기는 뉴욕과 사뭇 달랐다. 피켓을 들고 플래카드를 늘어뜨린 환영 인파는 없었지만 조선인과 일본인 교민들의 대립도 없었고, 반일 시위도 없었다. 조르주 생크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도 마련한 최승희는 비로서 차분하게 공연 준비에 몰두 할 수 있었다.

 

유럽 첫 공연은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이었고, 두 번째 공연은 26일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 극장이었다. 두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승희는 파리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1939217일 오후9<살 드예나(Salle D'Iena)> 극장에서였다.

 

<테아트르 드예나(Théâtre d'Iéna)>라고도 불렸던 이 극장은 약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 극장이었다. 파리16구의 살드예나 애비뉴 10번지에 위치해, 인근에 트로데카로 정원과 팔레드예나 박물관, 그리고 지금은 한국문화원도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센 강 너머로 에펠탑이 바라다 보이는 살드예나 지역은 경관이 탁월한 파리의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다.

 

1939년 2월17일, 최승희는 파리 <살드예나> 극장에서 <대금강산보> 시사회를 개최했다. 이 극장은 오늘날의 샹그릴라 호텔이 되었다.

 

극장 건물은 1896년 롤랑 보나파르트 왕자의 저택으로 건축되었으나 1924년 왕자가 사망한 후 수에즈운하 회사에 매각, 1929년부터 1955년까지 극장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정부가 매입해 국립무역회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민간에 매각되어 2010년부터는 샹그릴라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대금강산보><살드예나> 상영은 일반 개봉이 아니라 일회 상영의 시사회였고, 프랑스와 일본 사이의 민간 문화교류단체인 <프랑코 야폰 위원회(Le Comité Franco-Japonais, 일본명 일불협회 日仏協會)>가 주최했다. 아마도 <대금강산보>의 일반 개봉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최승희가 <프랑코 야폰 위원회>에 도움을 청했고, 이 위원회는 <대금강산보>와 다른 2개의 영화를 묶어서 일본영화 시사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대금강산보> 시사회는 거의 모든 파리 일간지에 보도됐다. 상영 이틀 전인 215<르땅(Le Temps)><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이 가장 먼저 보도했고, 16<엑셀수아(Excelsior)><르쁘띠주날(Le Petit Journal)>이 뒤를 이었다. 상영 당일인 17일에는 <르피가로(Le Figaro)><르주날(Le Journal)>, <르마탱(Le Matin)><롬리브르(L'Homme Libre)>, <랭트랑지장>이 시사회 소식을 실었다.

 

상영 다음날인 218일에는 <파리수와(Paris Soir)>, 24일에는 <라프랑스(La France)>가 이 시사회 소식을 보도했고, 310일에는 <랭트랑지장>이 영화평을 실었다. 모두 10개의 파리 일간지가 <대금강산보>의 상영을 보도한 셈인데, 특히 <랭트랑지장>은 사전 2, 사후 1, 모두 3회나 보도해 <대금강산보> 보도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215일자 <랭트랑지장>의 보도는 다음과 같았다.

 

<살드예나> 극장은 오늘날 파리16구의 문화 중심지에 위치한 5백석 규모의 영화 상영관이었다. 사진은 <살드예나> 극장의 소강당 내부의 모습이다.

프랑스-일본 위원회는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무용가 최승희가 출연하는 일본 영화 <산의 노래(le Chant de la montagene)>를 상영한다. 최승희씨는 최근 파리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천연색 영화 <도쿄(Tokio)>와 다큐멘터리 <눈의 호소(L'Appel de la Neige)>를 동시 상영한다. 이 시사회는 217일 금요일 밤 9시에 살드예나 (salle d'Iéna)에서 열린다.”

 

이로써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해외에서 상영한다는 자신의 목표를 이뤘다. 그러나 이 시사회가 그의 목적을 달성해 준 것은 아니었다. <대금강산보>가 최승희 공연을 도운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파리 공연을 마치고 얻어진 최승희의 유명세가 <대금강산보> 홍보에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프랑스어 제목이 <산의 노래>로 약식 번역됨으로써 금강산을 홍보한다는 조선총독부의 의도도 달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제작과정이 순탄하지 못했고, 미국에서 겪었던 우여곡절을 고려하면, 끝내 <대금강산보>의 파리 상영을 이뤄낸 최승희의 추진력만큼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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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반일 분위기는 1938년 들어 더욱 격화됐다. 일본정부의 엄격한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난징 대학살의 참상이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371215일자 <시카고 데일리뉴스>가 난징 대학살을 처음 보도한 이래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들이 속속 보도했다.

 

심지어 일본 언론이 보도한 일본군의 영웅적 행위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공분에 기름을 부었다. 특히 193711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111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이 경쟁적으로 보도한 “1백명 참수경쟁은 지금까지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잔학성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었다.

 

두 신문은 토야마(富山)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26) 소위와 노다 타케시(野田毅, 25) 소위가 무석(無錫)을 점령한 후 난징(南京)에 입성할 때까지 누가 먼저 1백 명의 중국인 목을 베는지 경쟁한 사실을 보도했다. 19371213일자의 두 신문은 무카이 소위가 105, 노다 소위가 106명의 중국인의 목을 베어, 두 소위가 같은 날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1937년 11월30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 東京日日新聞)은 일본군 소위 2명이 중국인 1백명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는지 경쟁했으며, 같은날 목표를 달성해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므로 연장전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종전 후 열린 전범재판에서 두 소위가 목을 벤 중국인들은 대부분 투항한 포로이거나 농민들이었음이 밝혀졌고, 결국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형이 집행됐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이후 6주 동안 학살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의 수가 약 30만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은 중국내 조차지를 잃고 충칭으로 쫓겨났을 뿐 아니라 곧이어 미군과 미국인들은 중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인들은 자국의 손실과 일본군의 반인도적인 학살에 분노했다. 이에 대해 최승희 평전의 저자 김찬정(2003[2002]:196)은 이렇게 서술했다.

 

최승희가 미국에 도착하기 바로 전인 1213, 난징(南京)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의 중국인 대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그 사실이 일본군의 엄격한 보도 관제를 뚫고 세계 각지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반일 데모가 발생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영사관은 재외공관으로서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미국인의 대일감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뿐 아니었다. 일본군의 잔학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무마할 방안이 필요했다. 특히 생필품과 군수물자를 크게 의존하던 미국에 대한 선무공작이 시급했다. 그 같은 공작의 하나가 예술단 파견이었고,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도 그중의 하나였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변경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35년 하반기부터 세계 순회공연을 기획하던 최승희의 첫 목적지는 유럽이었다. 최승희는 1937927일 도쿄극장에서 세계순업 고별공연을 가졌는데,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 도구(渡歐) 고별공연>이었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은 미국 정부와 시민들의 공분을 일으켜, 미국 전역을 통해 광범위한 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최승희의 공연이 보이콧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지 못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1014일에도 같은 극장에서 다시 한 번 고별공연을 단행했는데, 이때의 제목도 <최승희 도구(渡歐) 최후의 대중고별공연>이었다. 19371120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최승희는 유럽의 런던을 시발로 해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돌고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밝혔다. 첫 목적지가 여전히 유럽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승희는 125일 히비야 극장에서 고별공연을 다시 열면서 공연 제목을 <최승희 도미(渡米) 고별공연>으로 바꿨다.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이다. 2년 동안 유럽을 목표로 준비한 순회공연의 첫 목적지가 미국으로 바뀐 것은 일본정부의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찬정(2003: 195)의 서술대로 최승희는 일본 정부의 앞잡이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노리고 일본 정부가 미국으로 보낸 일본의 개라는 단정적인 소문이 난 것도 근거가 없지 않았던 셈이다.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을 보이콧한 것은 최승희 자신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그의 공연을 이용해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일본의 의도를 보이콧한 것이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당하고 전화협박까지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중일전쟁, 특히 19381월경 미국 전역에 퍼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의 참상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승희는 미국에서 1년 동안 4회의 공연을 하는데 그쳤고, <대금강산보>는 한 차례도 상영하지 못한 채 유럽으로 떠나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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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미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와 LA, 그리고 뉴욕에서의 이유가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같았다. 미국에서 격화되었던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때문이었다.

 

일부 평전 저자들은 당시의 재일 조선인과 재미 조선인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미 동포들이 최승희의 공연활동을 방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카시마 유사부로(1981[1959]:75)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승희의 이름이 사이 쇼키라고 소개된 것이나 그가 일본 영사관과 신문사에 자주 출입하고 일본공관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재미 조선인을 자극했고, 결국 조선인 동포들이 LA 이벨극장 앞에서 배일 배지를 판매하고, 뉴욕 호텔로 협박 전화를 하는 사태로 발전했다고 서술했다.

 

1938년 들어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일제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미국의 국익이 손상되었을뿐 아니라, 미국에도 난징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도적인 잔혹 행위가 시민들을 격분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제국주의 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과 재미조선인이 처해 있는 정치적·사회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고 행동의 차이, 즉 재일조선인은 재미조선인에 비해 극히 행동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소수의 재미조선인 독립지사들은 승희 등의 행위를 의심하여 승희에게 무리한 주문을 했을 것이다.” (다카시마 유사부로, 1981[1959]: 76)

 

한편 강이향(1993:136)최승희는 단지 문화선전만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비밀지령을 띠고 정치적 선전을 위해 와있다는 말까지 떠돌았다고 서술했고, 정병호(1995:149)독립운동가들은 최승희를 한편으로는 배일적 인물로 전환시켜 보려는 작전을 펴면서 친일파로 몰았고, 최승희의 공연을 계기로 하여 반일 여론을 미국인에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그리 활동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같은 서술에는 일견 수긍할 측면도 있지만, 국제적 맥락과 미국내 분위기를 도외시함으로써 재미 조선인들을 동족 예술가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몰아간 측면이 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교포신문 <신한민보>에는 최승희를 비난하는 보도가 한 건도 없었다.

 

최승희의 미국 공연이 보이콧 당한 것은 단지 재미 조선인 동포들의 몰이해나 감정적 앙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을 침공한 일본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될 만큼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의 일화배척 운동에는 여성들도 적극 참여했다. 미국여성들은 특히 일제 실크 스타킹 불매운동을 벌임으로써 일본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다.

 

미일관계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그해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미국이 조차지를 잃게 되자 미국은 추축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37105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른바 격리 연설(Quarantine Speech)”을 통해 침략국 일본과 이탈리아, 나치독일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신호로 미국민들은 대대적인 일제 불매운동에 돌입했다. 1937109일의 <동아일보>격렬해지는 각지 일화배척운동이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미국에서의 일본관계 상품의 제조업자중 반일적인 파에 의하여 <미국품표준보호동맹>이 결성되어 일본의 원료품 및 제조품의 영구적인 보이코트운동을 개시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기타 미국 <반전 반파시즘> 연맹과 <중국민중의 벗> 협회는 반일운동의 착수로 1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시위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상품의 보이코트 등을 결의하였다. 또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산업조직위원회(CLO)에서도 근간 개시되는 연차대회에서 일화배척이 문제로 될 것을 예상하고 대책협의중이라고 전한다.”

 

최승희의 공연이 취소되고 그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상연되지 못한 것을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 교포들 사이의 갈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서술이다.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들은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양해도 제공하고 있었다.

 

공연 보이콧과 영화 상영의 실패는 미국 정부가 앞장서고, 미국내 노동조합을 포함한 각종 사회단체들이 총동원된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일제불매운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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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각 1회씩의 공연을 간신히 마치고 <대금강산보>도 상영하지 못한채 23일 뉴욕으로 출발했다. 뉴욕 길드극장 공연은 219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까지 2주일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대금강산보>의 뉴욕 상영을 위한 서류작업과 검열통과를 위한 시간은 충분했겠지만, 일본공관과 조선인 동포들 사이의 대립적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조선인 동포들이 유태인, 중국인들과 합세해 최승희의 공연을 보이콧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이 나선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베이징과 상하이, 난징을 빼앗기면서 중국 정부가 와해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었고, 유태인들은 일본이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日貨排斥=일제 불매운동)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 항의하는 미국내 사회주의자들도 이에 참여했다.

 

1938년 2월19일, 최승희의 뉴욕 첫번째 공연이 열렸던 길드 극장

 

최승희는 뉴욕에서 조선인 동포로부터 전화협박을 받기도 했다. 정병호(1995:141, 145)와 강준식(2012:210)은 최승희가 투숙한 호텔로 전화를 건 익명의 교포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배일연설을 하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공연을 방해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서술했다.

 

이같은 협박은 심각한 범죄행위였지만 두 평전자의 서술에 출처가 밝혀져 있지는 않았다. 강준식(2012)은 내용의 유사성이나 서술의 구성으로 보아 정병호(1995)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용의 주는 달려있지 않았다.

 

최초의 최승희 평전인 다카시마 유사부로(1959)는 호텔 전화협박 사건에 대한 서술이 없고, 강이향(1993)은 호텔로 걸려온 전화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것이 협박전화였다고 서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정병호(1995)는 다른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료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김찬정(2002)과 정수웅(2004)은 이 협박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평전에 따라 서술에 차이가 있고 출처도 모호하지만 최승희가 받았던 뉴욕 호텔 전화협박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서술이 구체적이고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승희나 안막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람의 증언일 것이다. 안막의 동생 안제승, 혹은 최승희의 제자이자 시누이 김백봉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LA 사건의 증언에서처럼 뉴욕의 일본 영사관을 대사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증언자는 같은 사람, 즉 안제승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 사건은 이후 연쇄적 결과로 이어졌다. 전화협박 사건 이후 뉴욕 일본 대사관(=영사관)에서는 뉴욕 경시청에 (최승희의) 신변 보호를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공연할 때 무대 위와 화장실까지 경관이 지키는 소동”(강이향, 1993:137; 정병호, 1995:146; 강준식, 2012:211)이 벌어졌다고 한다.

 

거리에는 최승희의 공연을 보지 말자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에 최 승희와의 계약을 파기하리는 압력이 가해졌. (정병호, 1995:146). 결국 메트로폴리탄 뮤직 컴퍼니와의 계약은 파기되었고 최승희의 향후 미국 공연은 모두 취소되었다.

 

1937년 12월29일, 최승희는 미주 순회공연을 위해 <치치부마루>에 올라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이때만 해도 미국에서 엄청난 시련과 난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몰랐다.

 

뉴욕에서의 일련의 사건이 일본에 와전되면서 최승희는 자신이 배일행위자로 몰리게 되었고, 안막과 최승희는 급히 해명의 편지를 보내어 이를 수습해야 했다.

 

이렇게 급속히 악화되는 상황 때문에 최승희는 뉴욕에서도 <대금강산보>를 상영할 수 없었다. 정병호(1995:149)는 최승희가 자기가 주연한 <대금강산보>라는 영화를 ... 상영... 하려 했으나 이 일 또한 반일행위로 감시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어 취소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최승희가 이 영화의 상영을 포기한 것은 반일행위로 감시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직접 나서서 외국 상영을 위해 제작한 <대금강산보>가 뉴욕에서 상영되는 것을 반일행위로 분류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일본영화였기 때문이다. 당시 광풍처럼 뉴욕을 휩쓸던 일화배척운동의 물결 속에서 보이콧 당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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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가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상영되지 못한 데에는 서류작업과 검열통과 문제 말고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대금강산보>가 보이콧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재미 조선인 동포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런데 더 큰 규모의 재미 일본인 환영단도 출영했다. 배에서 내려 두 환영단을 마주한 최승희는 착잡했을 것이다. 어느 쪽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동포들은 세계의 무희로 발돋움하는 조선의 무희를 만나고 싶어 했고, 대개 독립운동가였던 교포사회 유력인사들은 그녀와의 면담을 기대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여행하면서 일본 공관의 상시적 감시 아래 있었던 최승희의 사정은 복잡했다.

 

최승희는 결국 샌프란시스코의 교포 인사들과의 면담을 거절했고, 교포단체의 환영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공연 준비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일본 공관원들에게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이 같은 행동은 재미 동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1938년 2월2일, 최승희의 LA공연이 열렸던 <윌셔 이벨> 극장.

그러던 중 최승희는 115일 일본영사관이 개최한 <일미친선의밤>에 참석했다. 주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가 마련한 이 행사는 지역의 정계와 재계 인사들뿐 아니라 언론인과 문화계 인사들을 초청해 최승희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이 특별히 마련한 행사였기 때문에 최승희는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포들과의 만남을 피하면서도 일본 영사관의 행사에 참석한 최승희가 동포들의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더구나 <일미친선의밤>에서 최승희가 무용 감상회까지 열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포들의 분노는 증폭됐지만, 다행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24LA에 도착한 최승희는 조선인 동포들의 분위기가 심각함을 인식했다.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126LA교포들이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해 한인 청년회로부터 기념금배를 증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교민들 중에 최승희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정병호(1995)와 김찬정(2003), 강준식(2012) 등의 평전자들은 이들이 반일 독립운동단체의 구성원들이며, 최승희가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는 것부터 불만이었다고 서술했다.

 

이들은 LA 공연 당일 윌셔이벨(Wilshire Ebell) 극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유태인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유태인들은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였던 일본의 상품에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 국적의 공연도 불매 대상이었으므로 최승희의 공연도 보이콧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1938년 미국에서는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일 시위와 일제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위와 불매운동에는 사용자와 노동조합뿐 아니라 여성단체들도 적극 가담했다.

 

정병호(1995)가 인용한 안제승의 증언에 따르면 흥사단에서 나온 교포가 마이크를 갖고 와서 최승희에게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공표하면 공연을 후원하겠다고 했으나 극장에 포진한 일본 대사관원들을 의식한 최승희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주미 일본 대사관은 워싱턴에 있기 때문에 안제승이 증언한 대사관원들이란 아마도 주LA 일본 영사관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벨 극장에 다수 나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사관 직원들에게 공연에 참석하라는 총영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승희의 배일 행위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상부와 본국에 보고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도쿄에 남겨둔 딸 안승자의 안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물론 무용연구소의 앞날과 향후 자신의 무용 활동이 위협받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승희는 샌프란시스코나 LA에서 일부 조선인 교포들의 요구대로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다. ‘배일 행위로 비쳐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할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금강산의 풍광과 최승희의 무용은 조선인 교포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내용이었겠지만, 일본 영화였기 때문에 보이콧 대상이었다. 결국 최승희는 LA에서도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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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요코하마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938111일이었다. 미주 첫 공연인 샌프란시스코 커랜 극장 공연은 122일로 잡혀 있었다.

 

따라서 예정대로라면 최승희는 111일과 22일 사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해야 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본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금강산보>의 해외상영을 위해 최승희는 필름 한 벌을 따로 제작했고, 그 상영권을 전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와 LA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미주 순회공연 흥행사가 이를 대행해 주는 것이었다. LA의 미주동포신문 <신한일보> 193823일의 기사에 따르면 최승희는 컬럼비아 컨설팅사와 흥행계약을 맺었고, 최승희의 대행사는 퍼킨스였다.

 

최승희의 세계순회공연(1937-1940)의 첫 기착지 샌프란시스코의 공연은 1938년 1월22일, <커랜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최승희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대금강산보>의 상영에 대한 보도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컬럼비아나 퍼킨스가 영화의 미주 상영을 위한 업무를 대행했던 것 같지는 않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관이나 재미 일본인 혹은 한국인 단체들이 영화 상영에 관한 업무를 대신해 주었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영사관의 최승희 관련보고서 문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재미 일본인 신문이나 조선 교포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최승희 본인이나 매니저 역할의 안막이 이 일을 직접 처리해야 했을 텐데, 영어에 능통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언어장벽은 별도로 하더라도 시간이 부족했다. 도쿄를 출발하기 전의 일주일, 혹은 태평양을 건너는 2주일 동안 미국 영화 배급사와 원격으로 계약을 맺고, 상영관을 확보하고, 미디어에 영화 광고를 집행하는 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대금강산보>를 상영하려면 국제무역 절차와 서류작업도 필요했겠지만, 무엇보다도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1938년경 미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검열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의 자체검열이었다.

 

미국 영화의 정부 검열의 시작은 1897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메인 주가 도박성 권투 영화 상영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키자 수개 주가 메인주의 선례를 따랐다. 1907년 시카고는 경찰청장에게 영화 검열권을 주었고, 이후 1백개 이상의 미국 도시가 시카고의 선례를 따랐다.

 

1915년 미연방 대법원은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므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헌법 제1수정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판결함으로써 정부의 영화검열을 뒷받침했다. 영화의 정부 검열은 1981년에야 미국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공연에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상영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는 정부 검열과 영화업계 자체 검열도 받아야 했다. (사진은 당시 미국 영화들이 자체검열을 받은 후 필름 앞부분에 삽입하게 되어 있었던 검열 통과 증명서.)

 

한편 영화업계는 자체검열도 도입했다. 1920년대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들과 영화인들 사이에 만연한 비윤리적인 행위 때문에 영화계 전반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때, 영화계는 대중의 비난을 피하고 정부의 검열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자체 검열 제도를 도입했다.

 

1927년부터 도입되기 시작해 1934년에 확정된 <헤이스 코드>라는 자체검열 조항에는 신성모독나체,’ ‘국가, 인종, 신념 등에 대한 고의적 공격등의 <절대 금지 장면> 11개와, ‘국기국제관계’, ‘사형집행이나 범죄자에 대한 동정<주의할 장면> 25종이 명시되었다.

 

미국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사, 외국 영화에 대해서는 배급사들이 자체검열을 실시했고, 19347월 이후에는 모든 영화가 이 검열을 통과한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극장 상영이 가능했다.

 

<대금강산보>가 미국의 정부검열이나 영화사 자체검열에 저촉될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그 두 검열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시사회 일주일 후에 요코하마를 출발했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에도 공연까지 열흘밖에 시간이 없었다. 영화상영을 위한 서류작업은 물론 검열 절차를 통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같은 절차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최승희와 안막은 <대금강산보>의 미국 상영, 적어도 샌프란시스코와 LA 상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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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경성 개봉일은 도쿄보다 일주일이 늦은 1938129일이었고 개봉관은 을지로의 황금좌였다. 황금좌는 당시 주소 황금정 제4정목 30번지에 위치한 극장으로 해방 이후의 국도극장,’ 지금은 국도호텔자리이다.

 

1907년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진 이후 광무대(1907), 단성사(1907), 연흥사(1907), 장안사(1908), 우미관(1910)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을지로4가에 황금연예관(黃金演藝館)’이 개관됐다. 줄여서 황금관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은 1917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 1925경성보창극장(京城普昌劇場)’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다가, 193611월 동양풍 르네상스식의 지상 3층 지하 1층의 대리석 극장 건물이 신축되었고, 이것이 1천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황금좌(黃金座)’이다.

 

<대금강산보>의 서울 개봉은 1938년 1월29일, 을지로의 극장 <황금좌>에서였다.

 

1930년대 경성의 극장들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어 있었다.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동양극장(東洋劇場), 우미관(優美館), 단성사(團成社) 등이 있었고, 남촌에는 명치좌(明治座)와 황금좌(黃金座), 희락관(喜樂館) 등이 있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북촌의 동양극장은 관객의 거의 전부가 조선인이었고 우미관은 조선인이 9, 일본인이 1’, 단성사는 조선인이 8, 일본인이 2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남촌의 명치좌와 희락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반반’, 황금좌의 관객은 조선인 6, 일본인 4이었다.

 

<대금강산보>가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은 경성에서도 통용되던 일본 영화사의 배급 관행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소유한 남촌의 극장들은 각각 일본 영화사와 제휴되어 있었다. 신작 영화 개봉의 전속 계약이었다. 명치좌는 쇼치쿠(松竹), 약초극장은 도호(東寶), 경성극장은 신코(新興)의 영화를 개봉했고, 황금좌는 니카츠(日活) 영화사와 전속 계약이 되어 있었다. <대금강산보>는 니카쓰 타마카와 촬영소의 작품이었으므로 황금좌에서 개봉된 것이다.

 

당시 개봉관들은 토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신작 영화를 상영했다. <대금강산보>1938129일 토요일부터 24일 금요일까지 황금좌에서 상영됐다. 이를 홍보하기 위한 <동아일보><매일신보>, <경성일보>의 극장 광고는 126일 수요일부터 시작되었고 개봉일인 129일에 기사와 함께 가장 큰 광고가 실렸다. 신작 영화 개봉 일수가 일주일에 머문 것은 아마도 경성 영화 관람객 시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약 넉 달 후에 다시 극장가에 등장했다. 이번에는 재상영관이었다. 1938510일부터 13일까지는 신부좌(新富座), 514일부터 17일까지는 도화(桃花)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상영했다. 신부좌는 신당동의 극장이었고 도화극장은 마포의 극장이었다. 두 극장 모두 경성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극장들이었고, 이미 개봉되었던 영화를 재상영하는 이른바 2류 극장들이었다.

 

개봉 직전, 1938년 1월27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광고문.

 

이상한 것은 두 극장이 <대금강산보>를 일주일이 아니라 4일씩 상영한 것인데, 이는 필름 임대료 때문이었다. 19385월호 <삼천리>에 따르면 당시 외화 필름 임대료는 1주일에 25백원에서 45백원까지 다양했다. 찰리 채플린의 <거리의 등불(1931)>45백원으로 가장 비쌌고 <오케스트라의 소녀(1937)>25백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대금강산보>의 대여비는 3-4천원선으로 채플린 영화 급이었다. 2류 극장들은 비싼 대여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영화관이 공동으로 한편을 대여해 3-4일씩 나누어 상영했던 것이다. 신부좌와 도화극장은 193810월 다시 한 번 공동으로 <대금강산보>를 대여해 상영했다. 신부좌는 1021일부터 23일까지, 도화극장은 1022일부터 25일까지였다.

 

한편 <대금강산보>는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다. 1938728일의 <매일신보>오는 (7) 30, 31일 양일간 당지 읍애관에서최승희 주연의 <대금강산보>가 상영된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대금강산보>1938년 내내 경성과 지방에서 상영되었다. 같은 영화가 한 해에 경성에서만 3차례, 그리고 지방에서도 상영되었던 것은 이 영화의 흥행이 좋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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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 시사회가 있은 지 일주일 후인 19371229, 최승희는 오후 3시에 요코하마를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호화여객선 치치부마루(秩父丸)’ 1등실에 승선했다. 마침내 1935년 말부터 2년여 이상 준비하면서 기다렸던 세계 순회공연 길에 오른 것이다.

 

최승희는 치치부마루의 화물칸에 악기와 의상, 공연 소도구를 담은 수십 개의 여행용 가방을 실었는데, 그중에는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담긴 가방도 포함돼 있었다. 최승희는 자신이 절실하게 원했던 <대금강산보> 필름을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의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를 떠난 지 3주 후, 1938121<대금강산보>는 마침내 도쿄 <후지칸(富士館)>에서 개봉됐다. 아사쿠사6구에 위치한 <후지칸>은 니카츠 영화사의 개봉관이었으므로, 타마카와 촬영소에서 제작된 <대금강산보>가 이 극장에서 개봉되는 것은 예정된 것이었다.

 

 

<대금강산보>는 1938년 1월21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후지관>에서 개봉되었다.

 

<후지관>19088월에 개관한 객석 18백석의 대규모 영화전문 극장이었다. <후지관>의 개관은 당시 일본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일었던 영화전문극장 개관 러쉬의 일부였다. 이 지역 최초이자 일본 최초의 영화상설관 <텐키칸(電気館)>1903년 아사쿠사6구 설립되었는데, 이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개봉관으로 최승희의 <반도의 무희(1936)>도 여기서 개봉되었다.

 

이후 190741일의 <신성관(新聲館)>, 7월에는 오사카 최초의 상설관 천일전전기관(千日前電気館), 716일 도쿄 아사쿠사6구의 삼우관(三友館), 1220일 오사카의 제일문명관(第一文明館), 19087월에 아사쿠사6구의 대승관(大勝館)이 줄줄이 개관했고, 마침내 그해 8<후지칸(富士館)>이 개관한 것이다. 이후로도 10월 나고야 최초의 상설관 문명관, 11월에는 천일전일본관(千日前日本館)이 문을 열어, 이른바 일본은 영화전문 상영관 시대가 열렸다.

 

<대금강산보>는 주연 여배우가 없는 가운데 개봉된 것이어서 홍보와 판촉에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반도의 무희> 개봉 때와는 달리 도쿄에서 발행되던 수십 종의 일본 잡지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기사가 거의 없었다.

 

더구나 <반도의 무희> 개봉은 도쿄에서만도 4개 극장에서 동시에 이뤄졌지만 <대금강산보>의 개봉관은 <후지칸> 하나뿐이었다. <대금강산보>의 예상 흥행 수준이 <반도의 무희> 때보다 낮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금강산보>는 보통 이상의 흥행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1월말 도쿄의 <후지칸> 상영이 종료되자 오사카의 텐노지 신세카이 공원에 위치한 <다이산칸(大山館)>21일부터 상영을 이어받았다. 오사카의 니카츠 개봉관인 <다이산칸>이 발행한 홍보지 629호에는 <대금강산보>을 다음과 같이 홍보했다.

 

1939년3월 <조선악극단>이 도쿄의 <화요극장>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의 맨 왼쪽의 입간판을 보면 이 극장의 당시 상영 영화가 <대금강산보>였음을 알 수 있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 ...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오사카 <다이센칸> 상영은 193821일부터라고 되어 있었으나, 이후에도 일본 각지에서 <대금강산보>가 지속적으로 상연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진도 발견되었다. 1935년에 결성된 <조선악극단>은 소속단원이 35명에 달했던 본격 악극단으로, 19393월 일본 순회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39일자 <매일신보>는 이 악극단이 카게츠(花月)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광고문이 실렸고, 악극단의 트럼펫 연주자 현경섭의 유품 중에서도 단원들이 <카게츠극장>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사진 속의 <카게츠극장>의 상연 영화가 <대금강산보>였던 점이 발견된 것이다.

 

1938121일 도쿄에서 개봉된 <대금강산보>가 적어도 1년 이상 오사카와 도쿄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상연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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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일자 <매일신보>에는 <대금강산보> 시사회에 이왕 전하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의 2인자인 정무총감이 총독을 대신해 참석하고,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자금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철도국의 국장이 참석한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할 사람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 1973) 외사과장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결정을 비롯해 초기의 신속한 진행은 아이카와 외사과장의 추진력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의 목적은 총독부의 재정난 타개를 위한 해외관광객 유치였지만, 적어도 그의 업무 추진 방식과 능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그는 최승희와 최승일을 도와 음악과 원작 마련을 지원했고, 최승희가 안무를 마칠 때까지 온갖 편의를 봐주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똑똑하고 능력있고 강직한 경찰공무원이었다. 도쿄제국대학 법대 출신이었고 고등고시를 통과해 내무성 공무원이 되었다. 1934년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장으로 승진했지만 1936년 우시오 시게노스케(潮恵之輔, 1881-1955)의 히로타(広田弘毅, 1878-1948) 내각 입각에 반대 의견을 내는 바람에 그 보복으로 좌천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경찰부 경무국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의 사령 보도에 따르면 그가 총독부 외사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36422일이었다.

 

아이카와 카츠로쿠, 그는 1936년 4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제작에 적극 협력했다.

 

그의 외사과장 재임 중인 193685일 조선 총독이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郎)로 교체되었다.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신임총독을 충실히 보좌했는지 이후 미나미 총독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19372<대금강산보> 제작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를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총독의 신임 덕분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음악과 원작과 안무의 준비를 마쳤을 때, 촬영을 담당할 영화사로 니카츠를 선정한 것도 그의 수완이었을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의 재정지원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철도국의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71일 니카츠 영화사가 타마카와 촬영소에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할당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대금강산보>를 위해서는 불운한 일이 2가지 생겼다. 하나는 앞에서 본바와 같이 77일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78일자로 외사과장을 물러나 미야자키현(宮崎県)의 지사로 승진, 영전하게 된 것이었다.

 

75일자 도쿄 토메이 통신의 전화통지문을 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76일의 일제 각의 결정으로 지방장관 4명이 사임하게 됨으로써 부장급에서 지사로 영전할 사람이 4명이 지명되었는데 그중의 한명이 아이카와 가츠로쿠였던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외사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장급으로 간주되어 지사로 승진한 것이다. 그가 우시오 시게노스케의 히로타 내각 입각을 반대했던 것이 옳았다는 점이 인정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이며, 일시적인 좌천을 두 단계 승진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아이카와 카츠로쿠는 조선총독부 외사과장을 사임한 후 미야자키현의 지사로 영전했다. 사진은 미야자키현 종합공원에 세워진 그의 동상.

 

이후 아이카와 가츠로쿠는 1939년 히로시마현 지사, 1941년 아이치현 지사를 거쳐 1944년 중앙정부 후생성 차관으로 승진했다가, 일제의 2차대전 패전과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1952년에는 자민당 소속으로 미야자키 지역구에서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내리 8선을 달성했고, 자민당 안에서는 치안대책특별위원장으로 오래 재직했다.

 

만일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조금만 더 재임했다면 <대금강산보>의 제작은 당초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지도 몰랐다. 중일전쟁으로 총독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는 계획은 빠르고 목표를 반드시 이뤄내는 역량있는 행정가였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최승희도 조바심을 내며 4달이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대금강산보>, 적어도 최승희를 위해서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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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는 한 달의 촬영과 한 달의 편집을 거친 뒤 완성되어서 1937년 12월21일 시사회를 열었다. 장소는 도쿄 소재 니카츠 영화사의 타마카와 촬영소였는데, 이 시사회 참석자들이 눈길을 끈다.

12월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 시사회에 “황공하옵게도 이왕(李王) 전하의 태림(台臨)으로 받들어 뫼시고,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 정무총감과 요시다 히로시(吉田浩) 철도국장 등이 출석”했다고 전했다.

‘이왕 전하’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으나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나라를 잃은 영친왕(英親王, 1897-1970)을 가리킨다.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된 후의 정식 호칭은 ‘의민태자’이지만, 조선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그해 12월 강제로 일본 유학에 보내졌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10세의 나이로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갔던 의미태자와 그의 모친 엄귀비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황제 순종은 왕으로 격하됐고, 의민태자도 왕세자로 격하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그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했다. 해방 후 귀국하려했으나 이승만 정부가 거부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야 국적을 회복했으나, 여전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살다가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이왕은 어떻게 <대금강산보>의 시사회에 참석하게 되었을까? 신문 보도에는 경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주최측이 이왕을 초청했거나 이왕의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에 머물며 아카사카 저택에 유폐되었던 이왕은 조선 미술품에 관심이 높았고, 특히 금강산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아마도 이왕 쪽에서 요청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다. 

어떤 경우이든 이 자리에서 최승희는 이왕을 만날 수 있었고, 10세 때부터 일본에 억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조선어를 구사했던 이왕은 최승희와 조선어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에게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이모저모를 묻기도 하고, 또 일주일 후면 요코하마를 출발해 장도에 오를 세계 순회공연에 대해서도 질문했을 법하다.

이왕과 최승희는 그보다 12년 전에 만났을 수도 있었다. 영친왕이 일본에 억류당한 이후 그는 도쿄 치요다구 소재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 거주했는데, 이 저택은 조선의 숙명, 진명, 양정고보 학생들의 단골 수학여행 목적지의 하나였다. 이 세 학교는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설립한 학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속했던 숙명17회 졸업생들도 3학년 시절인 1925년 일본 수학여행 중에 이 저택을 방문했고 이왕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친왕이 살았던 도쿄 아카사카의 저택


그러나 최승희는 이때 이왕을 만나지 못했다. 1922년 최승희 집안이 몰락한 이래 지속적인 가난 속에 살았기 때문에 수학여행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약 80명의 동급생 중에서 일본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학생은 5명으로 알려졌는데, 최승희가 그중 한명이었다. 

1925년에 이왕을 만나지 못했던 최승희는 마침내 1937년 12월21일 <대금강산보> 시사회에서 이왕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카사카의 이왕 저택에서는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15킬로미터쯤 서쪽의 초푸시 타마카와 6초메의 니카츠 타마카와 촬영소에서였다. 

이왕은 저명한 무용가로 성장한 최승희가 숙명여고보 출신인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설립한 학교의 졸업생이 일본 최고의 예술가가 된 것을 대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왕이 금강산 영화를 관람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은 아니었다. 1929년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왕은 다른 “금강산 활동사진”도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해 10월6일자 <매일신보>는 “(영친왕) 전하께서 ... 조선사회사업과 금강산, 조선농업 등에 대한 제 활동사진을 어람하”셨으며, “<금강산>이란 활동사진에 대하여는 전하께서 실지로 어관람(=방문)하실 터이므로 예비지식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더욱이 열심히 어람하셨더라”고 보도했었다. 

직접 금강산 관광까지 했던 이왕은 <대금강산보>에 촬영된 금강산을 어떤 기분으로 감상했을까? 자신의 영토였을 금강산을 빼앗기고 일본 땅에서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그로서는 비록 영화로나마 다시 보는 금강산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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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소실되었다. 그것이 어떤 영화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사의 문헌도 남아 있지 않다. 즉 원작이나 각본도 없고 필름도 없으니 <대금강산보>의 내용이나 작품성을 짐작할 자료가 거의 없는 셈이다.

 

다만 여기저기 흩어진 단편적인 미디어의 기사와 일본영화 데이터베이스의 배역 기록을 참고하면 그것이 대략 어떤 내용의 영화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대금강산보>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살포된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반도의 기이한 명승, 금강산의, ... 경승과 오랜 제사 행사의 진기함이 줄거리와 병행되어서, 미지의 나라 조선을 남김없이 소개하고, 그에 더해, 자신감 넘치는 최승희의 멋진 무용장면, ... 요염한 미희, 최승희의 무용 걸작집... 천연미와 미술미를 혼연시킨 이채편...”

 

이 홍보문에서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은 별로 없다. 다만 유서깊은 제사 행사가 등장한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1938129일자 <경성일보> 3면에 게재된 영화 광고문에는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대금강산보> 전단지, 영화 내용을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라고 소개했다.

신기한 명승지 대금강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반도의 무희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를 묘사... 최승희의 반생을 가로지른 고투를 이야기하는 애련의 비창곡...”

 

고통스런 투쟁이란 무용가로 성공하기 위한 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애련의 비창곡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주인공 이승희가 무용가로서의 꿈은 이루지만 사랑까지 이루지는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금강산보>는 무용영화이므로 암시와 복선이 깔리고 반전이 숨어있는 복잡한 스토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순한 스토리 속에서나마 금강산의 승경을 배경으로 최승희의 무용 자태가 소개되는 영화였음에 틀림없다. 다행히도 193823일자 <경성일보>에는 <대금강산보>에 대한 짧은 비평문이 게재되었고 여기에 대강의 줄거리가 서술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정략결혼을 피하여 조선으로 도망간 작곡가 지망의 일본인 대학생 토모다(=가사하라 츠네히코)는 부관 연락선에서 무희 이승희(=최승희)를 만난다. 금강산 속에 자리 잡은 그녀의 생가를 방문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사랑하게 되고 결혼을 약속한 뒤, 도모다는 부모의 승낙을 얻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하지만 토모다의 부모가 승희와의 결혼을 허락할 리 없다, 그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부모님의 집을 떠나 학업을 포기하고 <대금강산보> 작곡에 몰두한다.

 

한편, 무희가 되려는 승희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무단으로 상경, 향토무용을 기초로 새로운 무용공부에 전념한다. 이윽고 승희의 힘겨운 정진은 결실을 맺어 반도의 무희;로서 화려한 데뷔의 날이 왔다. 그러나 바로 그날 병상에 누운 토모다는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승희에게 바치면서 죽어간다.”

 

1938년 1월28일의 <동아일보>에 게재된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가사히라 츠네히고(왼쪽)과 최승희(오른쪽)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서술이 한 가지 등장한다. 석왕사에 대하여 이 절은 올해가 축성 12백년 째였기에 114일의 촬영을 위해 특별 임시 대제(大祭)를 열게했다고 설명하면서 그 장면의 촬영을 위해 시골사람 총출동으로 거의 2천명에 가까운 엑스트라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80년 전의 영화 촬영에 2천명 가까운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보다 20년 후에 제작된 <벤허(1959)>의 전차경주 장면의 엑스트라도 15백명이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1938)>의 석왕사 축제장면 엑스트라가 2천명이었다고 하니, <미야코신문>의 서술이 오류가 아니라면, <대금강산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엄청난 영화였다는 뜻이다.

 

그 같은 대규모의 석왕사 축제 속에서 최승희 선생은 <승무><검무>, 혹은 <아리랑>이나 <봉산탈춤> 같은 조선무용 작품을 공연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무용작품뿐을 보고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2천명의 엑스트라가 나오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대금강산보>의 필름이 조만간 어디선가 발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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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지명이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특급 촬영감독을 위촉한 것만으로도 니카츠 영화사는 성의를 보인 셈이었다. 금강산의 경치를 찍는 관광영화이자 최승희의 무용을 찍는 무용영화라는 점을 고려한 배려였을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자 외사과와 철도국의 협조도 재개되었다. 철도국은 니카츠 촬영팀의 이동에 최대한 편의를 주었고, 외사과는 촬영지 섭외를 위해 애썼다. 특히 금강산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지만, 니카츠 촬영팀이 이에 구애되지 않도록 일본군의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외사과였다.

 

평전과 연구서들을 종합하면 니카츠 촬영팀의 조선 로케이션은 19371018일부터 1124일까지였다. 1022일의 <매일신보>1027일의 <동아일보>감독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 14명의 선발대가 20일 오후 135분에 입경하여 그날 밤으로 금강산 로케이션을 떠났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1018일 도쿄를 출발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 촬영시 최승희가 '만상계(萬相溪)' 입구에서 부친과 남편, 동료 배우들과 포즈를 취해 기념 촬영. 

 

최승희는 촬영팀에 뒤늦게 합류했다. 1025일의 <매일신보>주역이 될 반도가 낳은 무희 최승희 여사는 일행과 함께 24일 오후135<아까츠키(あかつき)>로 입성했고 경성에서 2박한 후 25일 금강산으로 향할 터라고 전했다. 최승희가 늦게 합류한 것은 1014일부터 도쿄츠키지(東京築地)극장에서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최승희는 1달이 넘는 로케이션 기간 동안 촬영팀과 함께 조선에 머물지도 못했다. 예컨대 1030일에는 시마네(島根)현의 마츠에(松江) 시공회당에서 <최승희여사 신작무용 발표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으므로, 이 공연을 위해서라도 일본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촬영을 위해 언제 조선에 돌아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 공연이 125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의 <도구고별공연>이었으므로 아마도 다시 촬영팀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1025일부터 1030일까지 불과 5일 동안의 촬영으로 금강산과 석왕사를 포함, 부여와 수원, 경주와 평양 로케이션을 모두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미숙한 감독과 배우, 스탭들과 분주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촬영에 최선을 다했다. 무용영화였기에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배우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8개 무용작품 장면만큼은 자신의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극영화로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더라도 무용영화로서의 작품의 수준은 최승희가 결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1937127일자 <미야코신문(都新聞)>은 금강산 촬영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대금강산보> 촬영을 위해 들것에 타고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최승희. <미야코신문>은 최승희가 금강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도 영어 공부를 했다고 보도했다. 

 

“(옥류담) 위로는 산 전체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산 정상에서 최승희의 라스트 신을 찍었다. 으스스한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추었는데 산을 내려와서 보니 일손을 거들었던 일행은 모두 콧물을 훌쩍였지만 그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미야코신문> 보도가 127일인 것으로 보아 옥류담 촬영은 최승희가 시마네현 마츠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11월 중순 이후였을 것이다. 11월 중순이면 금강산 속은 한겨울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흰옷 한 벌만 입고 춤을 춘다는 것은 배우는 물론 무용예술가라면 절대 시도하지 않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고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 그만큼 <대금강산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옥류담 촬영에 동참했던 동료 배우 코노 켄지의 발언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는 (촬영을 위해) 금강산을 올라가면서도 이번 외국여행을 대비한다며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정말 감탄했다.”

 

당시의 최승희가 얼마나 의지가 단단하고 열의에 차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반드시 완성된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고 싶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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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의 감독과 배우 수준이 기대에 못미쳤다 해도 최승희가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영화제작 시스템은, 스튜디오 체계를 갖춘 대형 영화사가 감독과 배우를 전속 고용해 풀을 만든 다음, 제작 영화에 따라 감독과 배우를 배분하는 식이었다. 최승희 조차도 <대금강산보> 출연을 위해 니카츠 영화사의 고용계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따라서 최승희가 아무리 저명한 예술가라고 해도 고용주인 대형 영화사의 결정을 거부하거나 뒤집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빠른 시일 안에 영화를 완성하려면 과정이 불만스럽더라도 영화사가 지명한 감독, 배우들과 협력해 촬영을 해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감독과 배우들과는 별도로 니카츠 영화사가 지명한 <대금강산보>의 촬영 스태프가 탁월했다는 점이다. 특히 촬영감독 요코타 타츠유키(横田達之)는 전설적인 카메라맨으로 1921년의 <부침()>부터 1961년의 <석가(釈迦)>에 이르기까지 평생 114개의 영화와 다큐멘터리, 및 기타 필름을 촬영한 베테랑 촬영감독이었다.

 

<대금강산보>의 촬영감독은 일본 영화의 수작 <석가(1961)>의 촬영을 맡았던 요코타 타츠유키(横田達之)였다. 

 

그가 촬영한 영화 중에는 일본 영화사에 기록되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특히 그가 니카츠 영화사의 교토 촬영소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전설적인 감독 미조구치 켄지(講口健二)와 콤비를 이루어 걸작을 양산했다.

 

여성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던 미조구치 켄지 감독은 1952년부터 연속 3년 베네치아 영화제의 국제상(<사이카쿠 일대녀(西鶴一代女, 1952)>), 산마르코 은사자상(<우월이야기(雨月物語, 1953)><산초대부(山椒大夫, 1954)>)을 수상해 국제적으로도 주목받는 영화감독이었다. 특히 1953년의 <우월이야기>는 금사자상 해당작이 없는 사실상 최고상 수상작이었다.

 

미조구치 켄지 감독과 요코타 타츠유키 촬영감독은 간토대지진 이후 교토의 니카츠 영화사에서 만나 함께 활동하면서 <사랑을 끊는 도끼(, 1924)>부터 <양귀비(楊貴妃, 1955)>에 이르기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28편의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바 있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의 완성에 기여한 또 한명의 탁월한 촬영감독이 있었다. 일본 다큐멘터리의 효시라고 불리는 <설국(雪國, 1939)>의 촬영감독 이병우(李炳宇)였다.

 

일본에서 이노우에 칸(井上莞)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이병우는 1920년대 일본에서 사회주의 영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1935년부터는 <예술영화사(術映画社)>에 몸담고 예술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몰두했다. <하늘의 소년병(少年兵, 1941)>은 그의 초기 대표작 중의 하나이며, 이 영화는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을 정도였다.

 

1938514일의 <매일신보>조선영화주식회사 제1회 작품 <무정>의 촬영을 위하여 10일 동경예술영화사의 중진 카메라맨 이병우씨가 입성했다고 보도하면서 그는 수년전에는 철도국의 초빙을 받아 관광영화를 제작한 일도 있는 명 카메라맨이라고 소개했다.

 

이병우가 촬영했다는 관광영화는 <조선의 여행(朝鮮, 1935)>이었다. 이 영화는 조선 전국의 명승지를 자세히 소개했는데 그 촬영 담당이 바로 이병우였던 것이다.

 

<대금강산보>에는 이병우(일본이름 이노우에 칸)가 촬영했던 <조선의 여행(1935)의 장면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사진은 이병우의 대표작 <하늘의 소년병(1941)의 한 장면.

 

1938518일의 <조선일보>도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이병우씨가 “1932<강 건너편의 청춘(河向らの靑春)>을 촬영해 단연 영화계에 두각을 낸 후 “3년 전에는 조선철도국의 초청을 받아 <조선의 여행>이라는 조선 풍경 소개영화를 촬영했다고 설명하면서 이때 촬영한 장면에서 최승희 여사가 주연한 <금강산보>에 이용된 것이 적지 아니하다고 덧붙였다.

 

, <대금강산보>에는 이병우 촬영의 <조선의 여행>의 장면들이 적지 않게 편집되어 포함되었던 것이다. 두 영화가 모두 철도국이 후원한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금강산보>는 당대 최고의 촬영감독 요코타 타츠유키와 일본영화 리얼리즘의 선구자이자 다큐멘터리 영화의 권위자인 이병우의 작품이 나란히 콜라보를 이루어, 적어도 영상 면에서는 뛰어난 영화가 될 가능성을 보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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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강산보>에 쏟아졌던 초기의 열의가 사라지자 촬영 및 편집의 밀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원작과 각색, 음악과 안무가 조선과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에 의해 이뤄졌던 점은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중일전쟁 발발 4개월 후 촬영이 시작될 즈음에는 세계 수준의 무용영화를 만든다는 열의는 사라졌다. 그것은 니카츠 영화사가 구성한 감독과 배우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감독으로 미즈가에 류이치(江龍一)를 지명했다. 그는 해외 유학파이기는 했으나 세계 수준의 예술영화 제작 능력이 검증된 감독은 아니었다. 1937922일의 <매일신보>감독은 신진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미소(微笑, 1934)><소집령(召集令, 1935)>에서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 감독의 조감독으로 실전수업을 받은 뒤 19375개의 영화를 감독한 바 있지만, 그중 4개가 러닝타임 3-40분의 국책 홍보영화였다. 극영화는 19371021일에 개봉된 <연애 하와이 항로(恋愛ハワイ航路)> 한 편이었다.

 

아마도 니카츠 영화사는 미즈가에 류이치 감독이 <연애하와이항로>를 완성한 것을 인정하여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감독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극영화 제작 경험이 단 한 편인 감독에게 세계적 수준의 무용 영화제작 책임을 맡긴 것은 의아스러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1937년 10월경 <대금강산보> 출연자 및 제작진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실제로 미즈가에 류이치는 극영화 부문에서 그다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금강산보>가 개봉된 후 19388월에 니카츠 영화사를 떠나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 ‘만영에서도 12편의 국책영화를 더 만들었으나 1942년 이후에는 감독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했다.

 

한편 니카츠가 지명한 출연 배우도 대부분 신인이었다. 여주인공 이승희(李承姫) 역의 최승희부터 신인이었다. 비록 <반도의 무희> 출연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의 연기가 칭찬받은 적은 없었다. 따라서 상대역의 리드가 필요했다. 하지만 니카츠가 지명한 남주인공 도모다 히데오(友田秀夫) 역의 가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조차 데뷔 1년이 막 지난 신인배우였다.

 

더구나 그동안 가사하라 츠네히코가 출연한 8개 영화에서의 역할은 모두 조연이었고,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대금강산보>가 처음이었다. 그는 <대금강산보> 이후 4년간 더 배우로 활동했으나 1942년 이후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역시 만주영화사로 이적했다가 패전과 함께 영화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희의 여동생 순희(順姫) 역인 다치바나 키미코(橘公子, 1921- )1936년에 닛카츠에 입사한 이래 2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신인이었다. 그나마 그가 출연했던 <꿈의 철모(鉄兜, 1937)><아버지의 노래시계(さんの歌時計, 1937)>는 국책영화였다.

 

이승희의 아버지 역을 맡은 코노 켄지(河野憲治)도 경력 짧은 단역이었고, 도모다 히데오의 어머니역의 미츠이 치에(三井智恵, )<대금강산보>가 처녀출연이었으며 1942년에 배우 생활에서 조기 은퇴했다.

 

1938년 1월2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의 한장면, 이승희 역을 맡은 최승희를 제외한 부친(왼쪽)과 여동생(가운데) 역은 모두 일본인 배우들이 담당했었다.

 

다만 도모다 히데오의 여동생 미에코(美枝子) 역의 무라타 치에코(村田知栄子, 1915-1995)는 중견배우로 1933년에 데뷔한 이래 26편의 영화에 출연한 바 있었다. 그밖에 도모다 히데오의 아버지 역을 맡은 다카기 에이지(高木永二, 1896-미상)와 무용교수 키시이(岸井) 역의 에가와 우레와(江川宇礼雄, 1902-1970)는 베테랑 연기자들이었다.

 

따라서 니카츠 영화사가 지정한 감독과 배우들은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기는 했지만 세계는커녕 일본에서도 일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 초기에 보였던 세계 수준의 뛰어난 무용 영화를 목표로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니카츠 영화사의 결정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전쟁 중 총동원령이 내려질 것이 뻔한 마당에 <대금강산보>같은 예술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작이 취소되지 않고 진행된다 하더라도 후일의 손실을 줄이려면 현재의 투자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니카츠 영화사가 당시의 2류 감독과 배우를 썼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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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초기(19377~10), <대금강산보> 제작이 중단된 것은 조선총독부 외사과와 철도국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권력 및 재력기관이었던 이 두 부서는 중일전쟁 중의 정보수집 업무와 폭증하는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업무로 무용영화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다.

 

193710월에 들어서야 이같은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 일본군은 중국 화북 지역을 장악했고, 상하이에서 승기를 잡았고,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공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특히 랴오뚱과 산뚱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한반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선편으로 바로 대련이나 청도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중일전쟁 초기와는 달리 일본군의 조선총독부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총독부로서는 숨 돌릴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대금강산보> 제작 당사자들의 관심도 되살아났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7월초부터 10월말까지 거의 4개월 동안 끈질기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1937년 10월7일자 <매일신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영화 촬영이 오랜 지연끝에 시작할 예정이며, 영화 제작이 마치는대로 최승희가 유럽 순회공연을 떠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1022일자 <매일신보>는 마침내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한 철도국의 후원이 확정되었다고 보도했고, 1027일자 <동아일보>는 철도국 지원금이 1만원이라고 전했다. 철도국 부담액은 전체 제작비의 10분의1에 불과했지만, 니카츠 영화사가 기다린 것은 단지 예산만은 아니었다. 촬영지 선정을 위해 조선의 주요 명승지에 위수령을 내린 일본 군부의 허락도 필요했고, 철도국이 보유한 필름들을 비롯, 각종 대외비 자료도 활용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철도국의 자금 지원이 이뤄지자 니카츠 영화사는 1025일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이후 일정은 다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의 촬영이 전부 야외 로케이션이었는데도 11월 말까지 한 달 만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한 초창기 열의는 현저하게 식어 있었다. 철도국은 약속했던 지원금을 지급했을 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외사과도 중일 전쟁 정보 업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대금강산보> 제작의 산파 역할을 했던 아이카와 외사과장이 사임하자, 무용영화에 대한 외사과의 관심은 크게 줄었고, 최승희나 니카츠 영화사의 요청에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정도였다.

 

열의가 떨어진 것은 니카츠 영화사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촬영이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취소된다 해도 니카츠 영화사로서는 손해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10월말 촬영이 시작되면서 문제가 달라졌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를 국내 상영용으로 전환해 비용절감에 들어갔다. 해외 상연이 불가능해진 마당에 굳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철도국 지원금 외에 자사 예산을 10만원이나 투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937년 10월27일의 <동아일보>, 최승희의 <대금강산보> 촬영이 시작됐음을 보도했다.

 

다만 최승희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해외 순회공연을 떠난다는 계획이었고, 일정을 연기해서라도 <대금강산보>를 가지고 떠나겠다는 결심이었다.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관련자들의 입장이 모두 변했지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만은 원래의 목표와 의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193710월말부터 <대금강산보>가 촬영되고 편집되어 1221일에 시사회를 가지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승희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야 했다. 만일 이때 최승희까지 <대금강산보>를 포기했다면 이 영화의 제작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193710월은 최승희가 기다릴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해가 넘어가면 그의 순회공연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는 중일 전쟁이 확대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마저 전쟁이 터진다면 1935년 말부터 2년 이상 준비해온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계획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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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71, 제작사가 니카츠(日活) 영화사로 정해지면서 이제 <대금강산보>는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니카츠는 19124개 군소 촬영소가 합병되어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된 최초의 메이저 영화사였고, 뒤이어 설립된 쇼치쿠(松竹, 1920), 도호(東寶, 1932)와 함께 당시 3대 영화사였다.

 

니카츠는 도쿄와 교토에 촬영소(studios)를 운영했는데, 1930년대 이래 교토의 다이쇼군 촬영소는 시대극, 도쿄의 타마카와 촬영소는 현대극을 제작했다. 조선총독부 외사과의 설득과 철도국의 지원 약속으로 니카츠는 <대금강산보>의 제작에 뛰어들었고, 촬영을 도쿄의 타마카와 촬영소에 맡겼다. 이로써 이제 <대금강산보>는 촬영과 편집과 배급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대금강산보>는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단됐다.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193777일 베이징 서남쪽 외곽의 루고챠요(盧溝橋) 다리를 사이에 두고 중국군과 대치하던 중, 한 병사의 일시적 탈영을 트집삼아 중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노구교(盧溝橋) 사건, 중국에서는 치치시벤(七七事變), 서방에서는 마르코폴로 다리사건, 일본에서는 로코쿄지켄(盧溝橋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이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 제작에 치명타를 준 것이다.

 

니카츠 영화사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제작비 지원을 기다렸으나, 병력과 군수물자를 중국으로 수송하기 위해 총동원 상태에 돌입한 철도국은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영화 제작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는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대금강산보>를 지연시킨 또 다른 원인은 도쿄 올림픽의 취소였다. 1940년의 제12회 하계 올림픽 개최지는 도쿄와 헬싱키가 경합, 3627의 투표로 도쿄로 결정됐다.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올림픽 개최권이 박탈당하자 개최지가 헬싱키로 변경되었지만, 1939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도 전쟁이 터지자 1940년 올림픽은 취소되었다.

 

히로히토 천황과 히틀러 총통이 올림픽을 목졸라 죽이자, <대금강산보>도 덩달아 말라죽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의 <대금강산보> 제작 동기는 구매력 높은 서양 관광객의 유치였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면서 일본을 방문할 관광객들이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일본이 중국을 침략 중인데, 전장 바로 옆의 조선 관광에 나설 서양인들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다.

 

중일 전쟁과 올림픽 취소로 총독부의 해외 관광객 유치 정책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대금강산보>에 대한 정책적 관심도 사라졌다. 그나마 영화 제작이 백지화되지 않았던 것은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의 인내심 어린 노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와 니카츠 영화사 사이에도 관점의 차이가 생겼다.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을 포기하고 국내 상영 중심으로 관심을 옮겼다. 해외 상영 자체가 불투명해졌으므로 내수 시장을 겨냥한 것인데, 이는 기업인 영화사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 <대금강산보>의 해외 상영이 필요한 것은 최승희 뿐이었다. 그가 세계 순회공연을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을 최초로 보도한 것은 미주 일본인 신문 <타이호쿠닛포(大北日報)>였다. 소문을 전제한 19351018일의 기사에서 최승희가 내년(1936) 4월경 세계 순회공연을 계획 중이라고 보도했었다. 이 소문의 진위를 묻는 영자지 <재팬타임스(The Japan Times and Mail)>와의 인터뷰에서 최승희는 “1년쯤 후에 출발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최승희는 당초 193610월경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 계획을 세웠지만, 분주한 공연 일정으로 약 1년이 지체되었다. 마침내 1937927일 최승희는 도쿄극장에서 도구(渡歐) 고별공연을 열었는데, 이는 곧이어 유럽 공연 출발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승희는 출발을 연기했다. <대금강산보>가 완성은커녕 촬영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총독부 및 영화사와의 계약을 유지한 채 끈질기게 기다렸다. 유럽 공연 한 시즌을 포기하더라도 꼭 <대금강산보>를 완성해서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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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홍난파와 이종태가 작곡한 <대금강산보>의 주제가 <금강산곡(金剛山曲)>의 편곡은 야마다 코사쿠(山田耕作, 1886-1965)에게 의뢰되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당대 일본 최고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도쿄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고, 독일 베를린 왕립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에 유학하면서 막스 브루크(Max Bruch, 1838~1920)에게서 사사했다. 1914년 도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했고, 1917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자신의 곡들을 연주했다.

 

1920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다이고쿠(帝國) 극장에서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일본 초연했고, 1924년에는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일본 교향악단을 설립,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활발한 해외 활동으로 1936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최승희가 야마다 코사쿠에게 <금강산곡>의 편곡을 부탁한 것은 그의 탁월한 음악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용을 이해하는 음악가였고, ‘음악과 무용은 하나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야마다 코사쿠는 제국오페라단 시절부터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의 친구이자 동료로서, ‘무용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시이 바쿠의 무용시 운동을 지원했다.

 

이시이 바쿠가 19263월 첫 번째 경성공연에서 최승희를 매료시켰을 때 공연된 <젊은 판과 님프(きパンとニムフ)>의 작곡자도 야마다 코사쿠였다. 그밖에 이시이 바쿠의 초기 대표작인 <법열(法悦)><쓸쓸한 그림자(しき)>도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에 맞추어 안무되었다.

 

훗날 최승희는 <아이들의 세계, 인형씨(子供世界, A.人形さん, 1936)><그놈의 오뚜기(彌次郞兵衛)> 등의 동심어린 작품을 안무했을 때에도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사용했다.

 

한편 <대금강산보>의 원작을 최남선이 집필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원작자는 다마카와 에이지(玉川映二, 1903-1973)였다. 본명이 사토 하치로(佐藤八郎)인 그는 탁월한 글재주로 구제 와세다 고등중학교를 중퇴한 이래 수많은 시집과 소설 및 수필집을 낸 작가로 활동했다.

 

 

23세였던 1926년 첫시집 <손톱 색깔의 비(爪色)>를 시작으로 20권의 시집을 출판했고, 아사쿠사6구를 배경으로 한 소설 <엔코노로쿠(エンコの, 1931)>을 비롯해 3권의 장편 소설을 썼다. 그밖에도 유머 소설 12, 청소년 소설 38권을 내기도 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에게 학교의 교가 가사를 부탁하는 경우가 많아서 다마카와 에이지가 작사한 교가는 66개에 달했다. 또 그는 야구팀 사이타마세이부 라이온즈의 응원가와 한큐 브레이브즈의 단가를 작사해 지금까지 운동장에서 불리고 있다.

 

다마카와 에이지는 <대금강산보(1938)>의 원작을 집필하기 전까지 <남자의 눈물(のなみだ, 1935)><벌거벗은 합창(はだかの合唱, 1936)>을 비롯해 7개의 영화 원작을 집필해 영화화된 바 있는 관록 있는 작가였기에 최승희는 그에게 <대금강산보>의 원작을 믿고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작을 영화대본으로 각색한 것은 전설적인 각색 전문가 야마자키 겐타(山崎謙太)였다. 그는 1931<사랑의 장총(長銃)> 이후 <대금강산보(1938)>를 포함해 평생 83편의 영화 각본을 각색했고, <장난삼아 사랑하지 말자(れにはすまじ, 1933)>를 포함한 11개의 영화 원작을 직접 집필했던 다작의 영화 원작 및 대본 각색자였다.

 

금강산 무용영화 제작 결정은 유력자들이 내렸고, 구체적인 작업 담당자들은 최승희를 포함해 모두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 높은 무용영화를 만들겠다는 최승희와 총독부의 의지를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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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와 최승희 모두에게 <대금강산보>는 해외 홍보를 위한 영화였다. 따라서 세계 어디에서 상연하더라도 손색이 없을 만큼 최고 수준의 영화이어야 했다. 총독부는 최고 수준의 제작비를 책정했고 최승희도 각 단계의 제작자들을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 선정했다.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으로 책정되었다. 192814일자 <조선일보><조선영화계의 현재와 장래>라는 기고문에서 심훈(沈熏)은 당시 조선영화 한 편의 최고 제작비가 6천원이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무성영화가 토키영화로 바뀌고 장비와 필름이 비싸졌다고 해도, 조선영화의 제작비는 2만원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대금강산보>의 제작비는 10만원이었으니 일본 유수 영화사 <니카츠(日活)>도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제작비뿐 아니었다. 최승희는 음악과 편곡, 원작과 각본, 의상과 조명 등의 담당자를 조선과 일본 최고 전문가로 지명했고, 관광협회와 총독부, 니카츠 영화사는 군소리 없이 이를 수용했다. 돈과 재능을 절약하려 해서는 안 되는 영화임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난파는 <봉선화>와 <흥사단가>를 만들기도 했지만, 일본천황에의 충성을 노래하는 숱한 곡을 작곡하기도 한 친일음악가였다.

 

최승희는 영화음악 작곡자로 이종태와 홍난파를 선정했다. 본명이 홍영후(洪永厚, 1897-1941)인 홍난파는 이미 <애수(1920)><봉선화(1926)>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고, 바이얼린 연주자로서도 호평을 받고 있었다. 그밖에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10여곡의 가곡과 <나뭇잎><개구리> 1백여곡의 동요를 작곡했다.

 

19317월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에 유학했고 미국 유학기간에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 단우번호(266)을 받기도 했다. 1933년 귀국한 홍영우는 경성보육학교, 이화여전, 빅터레코드사, 경성방송국 등에서 음악주임 및 교사로 재직하면서 활발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378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었고, 72일의 옥고 끝에 전향서를 쓰고 출옥했다. 이후 그는 1941년 사망할 때까지 음악과 저술을 통해 극렬한 친일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대금강산보>의 주제가 작곡을 의뢰받았던 것은 19372월이므로 변절하기 전이기는 했으나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퇴영적인 기분에 싸였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는 의견을 가진 양악 예찬론자였다. 그런 홍영우가 어떻게 이종태와 함께 아악 분위기를 가진 <금강산보>를 작곡했는지 의문이다.

 

1939년 1월7일 <동아일보>의 조선음악 좌담회에 참석한 이종태(오른쪽)와 이병기(왼쪽)

 

한편 이종태는 아악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서양음악과 궁중음악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했던 음악가였다. 1930년부터 <소년>, <내일>, <김소좌를 생각함>, <총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했다. 홍난파가 도중에 변절한 반면 이종태는 처음부터 친일음악인이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 전래의 궁중음악을 서양식 악보로 채록한 덕분에 조선 전통음악의 계승자로서의 업적을 낸 것이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는 10년 동안에도 일본국가 <기미가요><우미유카바>를 조선식 아악기로 연주하도록 편곡해, 경성방송국에서 자주 연주했는가 하면,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전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경성관현악단과 영미합창단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해방후 이종태는 42세의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해 <상이군인의 노래>, <조국찬가>, <광복10> 등을 작곡하고 군대내 음악행사를 진행하면서 진급을 거듭했고, 이후 그의 친일 행적이 감춰지면서 국가유공자로 등재되었는가 하면, 사후에는 부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함께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히기에 이르렀다.

 

홍영우와 이종태가 일제강점하 탁월한 음악가였던 것은 사실이고, 바로 그점 때문에 <대금강산보>의 음악 작곡자로 선정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1937220일 밤10시에 최승희, 최승일과 함께 최초의 작곡회의를 열었던 네 사람이 모두 훗날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그리 우연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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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와 경성관광협회가 주도한 <대금강산보> 제작 계획에 최승희는 수동적으로 동원되어 끌려간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최승희 자신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추진했다는 증거가 곳곳에 보인다.

 

1937218일자 <매일신보>에 보도에 따르면, 오빠 최승일은 예비교섭 자리에서 최승희가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외사과장의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이 말이 단지 총독부의 권력자 비위를 맞추기 위한 립서비스가 아니라면, 최승희는 이미 조선의 절경 금강산과 자신의 조선무용을 결합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 다른 증거는 최초 보도에 이어진 219일의 <매일신보>의 보도이다. 이 기사는 “(공연 첫날인) 20일 밤10시부터 (장소미정) 이왕직 아악부 리종태씨와 음악가 홍난파씨, 최승일씨, 최승희 여사 등이 모이어 금강산 춤의 작곡 협의회를 열기로 되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짜의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최승희의 경성 일정이 얼마나 분주했는지 알 수 있다. 20일부터의 고별공연을 압둔 최승희는 ... 경성도착은 19일 오전8... 그날 오후 6시부터 ... 좌담회에 참석하였다가, 8시의 모교 숙명여고의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다.”

 

1937년에 발행된 일본철도성의 포스터와 1938년 발행된 일본 영문 화보잡지 <재팬>,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발발 이후 나빠진 일본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홍보 활동에 나섰다. <일본 철도성 포스터(1937, 왼쪽>은 파리 홍보물 전시회에서 금상을 받은 바도 있다.

 

공연 전날과 당일의 분주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7시에 시작되는 첫 공연이 끝나자마자 밤10시에 이종태, 홍난파씨와 함께 금강산 춤의 작곡협의회 일정을 잡았다. 불과 하루 전에 저명 음악가들을 접촉해 수락을 얻어내었을 뿐 아니라, 바로 실무회의에 돌입한 것이다. 설사 오빠 최승일과 관광협회 및 당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최승희가 이처럼 신속하게 준비작업에 돌입했던 것은 자신도 이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었다.

 

<대금강산보> 제작을 위해 열린 첫 실무회의가 작곡협의회였던 것도 최승희의 제안이었다. 음악이 있어야 작품을 안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가 무용가였기에 알 수 있었던 사항이다. 총독부와 관광협회가 일을 서두른 것은 사실이지만 최승희도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성을 보였다는 말이다. 최승희는 어째서 금강산 무용영화에 이렇게 적극적이었을까?

 

세계 순회공연을 앞둔 최승희가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명승지를 세계에 소개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은 총독부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관심은 조금 달랐다.

 

해외 공연을 앞둔 최승희는 <대금강산보>를 먼저 현지에 보내어 개봉한다면 자신의 공연 흥행에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조선무용에 대한 현지의 사전인식을 넓히고, 비평가들로부터도 예술적으로 깊이 있는 평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최승희는 이 영화를 세계 순회공연의 선발대로 삼으려고 했다.

 

1937년 10월7일의 <동아일보>는 최승희가 <대금강산보>를 제작, 유럽과 미국에 미리 보내고 그 뒤를 이어 무용순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금강산 무용영화의 입안 초기부터 언급된 바 있었다. 1937218일의 <매일신보>그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하여서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할 것이라고 보도하는 한편, 1937107일의 <동아일보>니카츠(日活)에서 계획 중인 이 영화는 해외에 수출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며, “본래 계획은 대금강산보를 먼저 구미에 보내고 그 뒤를 따라 최승희씨가 무용행각을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었다.

 

최승희는 언제부터 금강산 무용영화의 유용성을 깨달았을까? <조광> 19374월호에 실린 <도구기념 좌담회>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서양에 가시면 특별히 뵈이기로 한 춤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최승희는 “<재팬(Japan)>이라는 잡지와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영문판에 많이 소개가 되어 그들은 나의 춤이 어떤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최승희는 영문판 신문과 잡지의 기사와 화보가 세계 순회공연의 사전 홍보에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영화, 특히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무용 영화를 미리 배포한다면 그 효과는 잡지나 신문에 비할 바가 아님은 분명했다. , <대금강산보> 제작에 대해 최승희의 적극성과 열의를 보인 것은 곧 전개될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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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와 30년대, 조선총독부는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192521일자 <개벽>에 실린 논설 <조선총독의 재정의 개요와 비평>에 따르면 총독부의 초기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

 

한일합방 이전인 1907년 일본 의회는 보호령이 된 조선의 통치를 위해 조선통감부에 5년간 2천만 원의 재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강점(1910)까지 재정지원은 3년 만에 26백만원으로 늘어났다. 5년 예산을 3년 만에 초과한 것이다.

 

1911년부터 일본 정부의 총독부 예산 지원은 연간 1,235만원으로 더 늘었다. 일본정부는 1919년까지 조선총독부가 재정 자립을 이루도록 요구하면서 예산을 점진적으로 삭감했다.

 

그러나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이 터지면서 총독부는 경찰과 헌병 병력을 대폭 증가시켜야 했다. 지출 예산은 다시 늘었고 총독부는 재정자립에 실패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총독부는 매년 15백만원의 예산을 본국 정부로부터 지원받아야 했다.

 

만성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조선총독부는 재정자립의 방법으로 1920년대부터 금강산 등의 관광자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조선 총독부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줄이고 재정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 내에서 산업을 일으켜야 했다. 가장 먼저 입안된 것이 관광 산업이었다. 비교적 소규모의 투자로 즉각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금강산처럼 자연경관이 뛰어난 지역, 평양, 경주, 부여 등의 사적지, 그리고 주을과 동래, 유성 등의 온천지를 중심으로 관광지 개발에 착수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은 조선의 국립공원 후보지로 지목되어 개발의 최우선 순위였다.

 

1920년대 총독부는 금강산에 호텔과 온천을 짓고 관광객용 차량을 증편하는 한편 관광객들과 관광 업소를 지원하기 위한 통신 시설도 증설했다. 관광 숙소 부근에 도서관 등의 여가시설과 댄스홀 등의 오락 시설도 확충했다. 1931년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금강산 전철이 개통되어 관광객 수송이 원활해졌다.

 

총독부는 금강산 홍보에도 박차를 가했다. 1921년에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총독이 직접 금강산 관광에 나섰고, 이듬해인 1922년에도 금강산을 휴가지로 선택했다.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물론이다.

 

금강산 관광안내서들도 출판되었다. <금강산 탐승 안내(1926)><금강산(1931)>, <금강산 탐승 안내기(1934)>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금강산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이광수와 최남선 등의 조선인 작가들도 적극 동원되었다. 최남선의 <금강예찬(1928)>과 이광수의 <금강산유기(1924)>

 

조선인 작가들도 동원되었다. 이광수는 1921년과 1923년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한 후 <신생활><금강산유기>를 연재한 후 1924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최남선은 1924년 금강산을 여행한 후 <시대일보><풍악기유>를 연재했고 이를 1928년에 <금강 예찬>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조선인 작가들의 금강산 여행기는 금강산 관광을 자극했고, 관광객 증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총독부의 금강산 관광 진흥책으로 관광객 수가 늘어났다. 1926년 연간 8천명이던 금강산 관광객 수가 1927년에는 15천명으로 1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1934년에는 22천명에 달했고, 1937년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다. 총독부는 1937년경 금강산 관광의 내수가 포화된 것으로 판단했고, 이번에는 해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총독부는 금강산을 비롯한 조선 관광지를 소개하는 영문 책자를 제작해 해외에 배포했다. 특히 이 시기는 1940년의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올림픽 관광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조선으로까지 유치하는 방안이 다각도로 강구되었다.

 

금강산 무용영화계획이 나온 것이 바로 이즈음이다. 1937215일경의 관광협회와 로터리 클럽의 조선 호텔 간담회는 조선총독부의 재정위기 타개책을 자문하는 자리였고, 이 자리에서 나온 최승희의 금강산 무용영화제작안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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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무대로 무용영화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은 최승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성관광협회의 기업인들이었고, 조선총독부의 외사과였다.

 

1937218일자 <매일신보>수일 전 조선호텔에서 열린 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 회원들의 간담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최승희의 도구(渡歐)에 당하여, 그의 예술을 통해 천하의 명승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선전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최승희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조선 정서가 농후한 금강산 춤을 추는 영화를 제작하자는 것이었다.

 

기사는 이 제안이 각 방면에서 크게 기대를 모았고, “총독부 외사과와 조선관광협회를 통하여 구체화되었으며, 217일에는 아이카와(相川) 외사과장이 최승희 여사의 친형 최승일씨와 예비교섭을 한 끝에 “(최승희) 여사의 입성과 동시에 실현될 모양이라고 전했다.

 

<매일신보>의 예상대로 <대금강산보> 제작 결정은 신속하게 내려졌다. 경성관광협회와 로터리클럽의 간담회 날짜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수일 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215일 전후였을 것이다. 이날의 간담회 결과는 바로 총독부 외사과에 접수되었고 내부검토 끝에 영화 제작이 결정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경성일보>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아이카와 가츠로쿠(相川勝六, 1891-1973) 외사과장은 17일 오후3<경성방송국>에 근무하는 최승일을 총독부로 초청했다. 아이카와 외사과장으로부터 최승희씨가 금강산 무용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최승일은 즉석에서 동생이 일찍부터 금강산을 무용화하려고 연구해 왔다면서 이를 수락했다.

 

최승일이 지금의 국정원장에 해당하는 총독부 외사과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최승일의 승낙은 곧 최승희의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최승희는 220-21일의 공연을 위해 19일 아침에 경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최승일이 이 결정을 전화나 전보로 동생에게 알렸는지는 알 수 없는데, 아마도 최승희는 경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 결정을 통고받았을 것이다.

 

이후에도 일은 신속하게 진척되었다. 최승희는 음악이 있어야 안무할 수 있다면서 금강산 무용영화의 음악으로 아악과 양악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수용한 총독부와 관광협회는 음악에 대한 세부사항을 최승희에게 일임했다.

 

최승희는 아악에는 이왕직 아악부의 리종태(李鍾泰), 양악에는 홍난파(洪蘭坡)를 작곡자로 지명해 220일 밤10시에 작곡자 회의를 가졌다. 이종태와 홍난파는 바로 작곡에 들어가 49일 주제곡 <금강산의 곡(金剛山曲)>을 비롯해 모든 음악의 작곡을 끝냈다. 최승희는 악보를 바로 편곡자에게 넘겼고 526일경 편곡이 완성됐다. 최승희가 편곡된 음악을 바탕으로 무용 안무를 끝낸 것은 6월 말이었다. 이 과정은 모두 언론에 세세하게 보도되었다.

 

1937년 2월18일의 <매일신보>는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최승희의 무용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조선관광협회와 총독부 철도국 관계자들은 최승희를 대동하고 19373월말 강원도 고성군수의 안내로 외금강 일대를 시찰하면서 촬영계획을 세우는 한편, 6월 중순에는 총독부 외사과의 지원을 받아 유수 영화사인 니카츠(日活)에 금강산 무용영화 촬영을 의뢰했다.

 

니카츠 영화사는 제작예산이 10만원이라는 말에 재정난을 이유로 난색을 표했으나, 외사과의 설득과 철도국의 재정지원을 약속받고 촬영과 배급을 맡기로 했다. 마침내 71, 니카츠 영화사는 <대금강산보>의 촬영을 타마가와(多摩川) 촬영소에 배당했다고 발표했다.

 

215일경 경성의 기업가 간담회로 시작된 금강산 무용영화 계획은 불과 넉 달 반 만에 음악과 편곡, 안무와 원작을 마치고, 71일 영화사 선정을 끝낸 것이다. 일의 진척이 이렇게 빨랐던 것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들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외사과는 정보기관이자 권력 기구였고, 철도국은 전국적으로 조직이 가장 크고 돈이 많은 기관이었다. 권력과 돈이 함께 움직이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던 것이다.

 

도대체 금강산 무용영화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기에 유력 기관들이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서 그다지도 신속하게 일을 진척시켰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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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영화 3편은 모두 무용영화라고 불리지만, 정확한 명명법은 아니다. 세 영화에 모두 무용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무용 장면의 비중과 형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반도의 무희(1936)>에도 무용 장면이 나오지만 원래 최승희의 성공기이며, 삽입된 무용장면도 주인공의 활동을 소개하는 방편이다. 따라서 <반도의 무희>는 엄격한 의미의 무용영화는 아니고 무용가에 대한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사도성 이야기(1956)>는 같은 이름의 무용극을 영화화한 것이므로 무용극 영화이고, <대금강산보(1938)>는 완결된 무용작품들이 포함된 본래적 의미의 무용 영화이다.

 

이 두 무용영화음악영화와 비교한다면, <사도성이야기>가 뮤지컬 영화 <오페라의 유령(2004)><맘마미아(2008)>에 가깝다면, <대금강산보><사운드 오브 뮤직(1965)>이나 <원스(2007)>에 가깝다.

 

1938년 1월26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최승희의 <대금강산보>의 한 장면.

 

<대금강산보>에는 최승희의 무용작품 8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의 필름이 재발견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스토리라인의 적절한 부분 부분에 각각의 무용작품이 완결된 형태로 삽입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조선의 여러 명승지에서 로케이션을 했다는 기록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무용작품을 촬영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1937922일자 <매일신보>1027일자 <동아일보><대금강산보>의 촬영이 금강산과 석왕사, 평양과 경주와 부여와 수원에서 로케이션으로 이뤄졌다고 서술했는가 하면, 사진가 후쿠다 가츠지(福田勝治, 1899-1991)의 사진집 <봄의 사진술(1938)>은 그 책에 실린 3장의 최승희 사진이 스튜디오에서 <대금강산보>의 무용장면 촬영 때 동시에 촬영된 사진 작품이라고 서술했다.

 

<대금강산보>에 삽입된 무용작품들도 확인되었다. 1938129일의 <동아일보><조선일보>, <경성일보>에 나란히 실린 <대금강산보> 개봉 광고문에서 삽입 작품 목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광고문에는 빼어난 풍광의 금강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반도 처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로맨스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전편 춤추는 걸작 8이라는 제목 아래 무녀춤, 아리랑, 보살도, 검무, 봉산탈춤, 무녀, 승무, 금강산보라는 작품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전편 춤추는 걸작이라는 말뜻이 명확하지 않다. ‘영화 전편에 걸쳐 ‘8개의 작품이 부분부분삽입되었다는 것인지, 혹은 영화에 ‘8개 작품이 전편삽입되었다는 뜻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무용 영화라는 표현에 부합되려면 아마도 후자이었어야 할 것이다.

 

1938년 1월29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대금강산보> 개봉을 알리는 광고문. 이 영화에 삽입된 8개의 무용작품 제목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거의 다 최승희의 세계 순회공연 레퍼토리였다. ,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뉴욕의 미국 공연과 파리, 브뤼셀, 암스텔담, 헤이그 등의 유럽 공연 레퍼토리를 살펴보면 <대금강산보>8개 작품 중 7개가 적어도 한번 이상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발표되지 않은 유일한 작품은 <금강산보>이다. 주제 작품이 왜 무대에서는 상연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금강산보>가 서양 음악을 사용한 현대무용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1백퍼센트 조선음악을 사용한 조선무용 작품만 공연했었다.

 

<대금강산보> 삽입 작품들이 미국과 유럽 무대에서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최승희가 처음부터 영화와 공연 둘 다를 위해 작품들을 창작하고 준비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이 작품들은 처음부터 세계무대를 겨냥해 창작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와 그의 세계 순회공연 사이에 작품의 접점이 확인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최승희는 왜 <대금강산보>에 출연했을까? 그는 왜 세계 순회공연을 떠났을까? 영화와 공연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말, 특히 조선인과 일본인이 아닌 세계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그녀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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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용가 최승희 선생은 1939년 유럽 순회공연에서 자신이 주연한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를 상연했다. 217일 금요일 밤 9, 파리의 센 강변 트로카데로 정원(Jardins de Trocadéro)에 인접한 <살드예나(salle d'Iéna)> 극장에서였다.

 

2017년 여름 최승희 선생의 파리공연을 조사하던 중 나는 이 영화 상연을 보도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르땅(Le Temps)>을 비롯한 파리의 6개 일간지가 이 사실을 보도했고, <랭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간단한 비평도 게재했다. 이는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는데, 이 취재를 위해 예습을 꽤 했었지만, 이 영화의 유럽 상연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었고, 8권에 달하는 최승희 평전들도 이를 언급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 선생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가 상연되었던 파리의 <살 드예나> 극장.

 

무대 예술가인 최승희가 영상에 등장하는 것이 낯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용가가 극영화에 출연한 것은 본인이나 관객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을 것이고, 특히 그런 영화를 자신의 순회공연 중에 상연한 데에는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80년쯤 늦기는 했으나, 이글은 최승희의 그 특별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기 위한 시도이다.

 

최승희는 평생 3편의 무용영화를 촬영했다. 해방 전의 <반도의 무희(1936)><대금강산보(1938)>, 해방 후의 <사도성 이야기(1956)>였다. 그밖에도 <백만인의 합창(1935)>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그대와 나(1941)>에도 출연 교섭을 받았으나 고사한 바 있었다.

 

해방 후 <춘향전(1948)><반야월성곡(1949)>, <맑은 하늘 아래서(1955)> 등의 무용극이 영화화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최승희의 북한시절 활동에 정통한 이애순(2002)과 김채원(2008)의 책에 따르면, 영화화된 작품은 <사도성 이야기>뿐이었다.

 

더구나 <사도성 이야기>는 컬러영화였으므로 최승희의 무용영화라는 무용사적 의미와 함께, 북한 최초의 컬러영화라는 영화사적 의미도 갖는다. 참고로, 한국 최초의 컬러영화는 안창호 선생의 아들 안철영 감독의 <무궁화동산(1949)>과 홍성기 감독의 <여성일기(1949)>였다.

 

그러나 한국영화사에서는 <대금강산보>가 낯설다. 인기있는 미인 예술가 최승희 주연의 나름 인기 있던 영화였지만, 다른 배역이 모두 일본인이었고, 언어도 일본어였을 뿐 아니라, 제작자도 일본 영화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금강산보>는 이경손이나 나운규 감독의 무성영화나 문예봉이나 김일송이 출연한 한국 영화들과 나란히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 오사카의 <타이센칸(大山館)>에서 발행한 <대금강산보>의 홍보 전단

 

<대금강산보>는 일본 영화사에서도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에는 <대금강산보>의 기초정보가 등재되어 있지만, 연구 대상이 되기는커녕 일본 영화사 저술이나 자료집에서도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영화테레비전 프로듀서협회가 편찬한 <프로그램영화사: 다이쇼에서 이차대전까지(プログラム映畵史: 大正から戰中まで, 1978)>라는 책에는 <백만인의 합창>의 포스터가 실려 있지만, <반도의 무희><대금강산보>는 자료 제시는커녕 언급조차 없다. <백만인의 합창>의 출연자 명단에도 최승희의 이름은 올라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무용영화들이 한국과 일본의 영화사에서 외면당한 것은 해방 이후 계속된 이데올로기적 격동 때문이다. 일제의 패전으로 최승희는 더 이상 일본 신민이 아니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게 됨에 따라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의 행적과 업적이 폄하되거나 잊혀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제작과 배급, 특히 해외 상연 과정을 자세히 살폈다. 영화의 내용과 성격을 살피는 한편, 이에 출연하고 상연했던 최승희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계기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재조명되고 남,북한과 일본 영화사에서 조금 더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연구의 주요 자료는 2017년 필자의 최승희 유럽 순회공연 취재를 통해 발굴되었다. 이 취재는 <후암재단>의 재정지원으로 이뤄졌음을 밝히며, 고 차길진 회장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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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교육개혁 운동이 숨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517일 오사카 시립 키가와미나미(木川南) 초등학교의 쿠보 다카시(久保敬) 교장이 마츠이 이치로(松井一郎) 오사카 시장에게 <오사카시 교육행정에 대한 제언>이라는 제목의 교육정책 비판 서한을 발송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소학교 교장이 오사카 시장의 교육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쿠보 시장의 비판은 현실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비판으로 보였고, 교육의 궁극적 목표를 잊지 않은 합목적적인 주장으로 들렸다.

 

쿠보 교장의 항의 서한 발송 사실은 18 <쿄도통신>이 단신으로 보도했고, 19일에는 <로이터통신>이 받아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보도 내용은 오사카시의 초,중학교의 코로나 대책으로서의 온라인 수업의 현실성 여부를 둘러싼 것에 국한되었다.

 

마침내 20 <아사히신문>은 쿠보 교장의 항의 서한 전문을 공개했고, 그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는 한편, 마츠이 시장의 반응도 보도했다.

 

쿠보 교장의 주장은 단순히 대면수업 정상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과잉 경쟁과 점수 위주의 비인도적 교육관행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임이 드러났고, 이에 대해 마츠이 시장은 현실감각 없는 이상적 주장이며 조직원이 룰을 무시한 무도한 행동으로 비난했다.

 

https://jp.reuters.com/article/idJP2021051801003143

 

小学校長が大阪市長に批判書面

 新型コロナウイルス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は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

jp.reuters.com

 

21일 디지털판 <아사히신문>에는 중앙정부 문부과학성의 하기우다 고이치 장관의 논평이 실렸다. 내용은 지방자치정부의 정책을 존중한다면서도 일선 교장의 보고에 귀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양시론으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면서 중앙정부의 조정 책임을 면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22일 조간신문에 인쇄될 것이 분명한 하기우다 장관의 논평은 오사카 시장이나 쿠보 교장의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쿠보 교장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쪽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이로써 쿠보 교장의 교육개혁 주장이 힘을 얻을 기회를 주었고, 중앙정부의 장관이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건은 전국적 이슈가 될 계기를 맞았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fb11429d3463b5af3cf97ca88ae613e16f775b4f

 

「学校は混乱極めた」 現職校長、実名で大阪市長を批判(朝日新聞デジタル) - Yahoo!ニュー

 大阪市立小学校の校長が、市の教育行政への「提言書」を松井一郎市長(57)に実名で送った。今回の緊急事態宣言中、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自宅オンラインが基本」と決めた判断に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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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yahoo.co.jp/articles/e17e8419469b59f5902461447fd1a5f8d18f60a2

 

松井一郎市長 オンライン学習めぐり批判書面送付の校長に「社会人として外に出たことある

 大阪市の松井一郎市長(57)が20日、緊急事態宣言下で市が独自に取り組んだオンライン授業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59)から送付された書面について言及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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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sahi.com/articles/ASP5P42KYP5PUTIL00R.html

 

文科相、大阪市長に「耳を傾けて」 現職校長からの提言:朝日新聞デジタル

 大阪市が緊急事態宣言中の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オンラインが基本」としたことに対し、市立小学校の校長が実名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た」などとする提言を松井一郎市長や市教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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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가 조금 늦게 발견하기는 했지만, 20 <마이도나 뉴스>라는 다소 생소한 인터넷 매체에 독특한 기사가 올라왔다. 저명한 사회교육가이자 여러 대학의 객원교수를 역임한 미즈타니 오사무 교수가 쿠보 교장을 지지하면서 마츠이 시장이 오사카시 학교정책을 재고할 것을 권고하는 기고문을 발표한 것이다.

 

미즈타니 교수는 요코하마에서 고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밤의 번화가를 순찰하면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가정과 학교로 돌아가도록 설득하곤 했기 때문에 <야간순회 선생님>이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사회교육가이다.

 

쿠보 교장이 공개 서한을 발송한 지 불과 5일만에 오사카시의 교육개혁 문제는 문부과학성 장관이 논평을 해야할 정도의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저명한 사회교육가가 입장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오사카의 교육 문제에서 일본 전체의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655b356c2ffdfe2842def829bd50012615b49ec4

 

松井市長、再考を!小中学校にオンライン学習求める大阪市「教育受ける権利」阻害も 夜回

 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拡大を受けた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が18日、端末の配備や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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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이 사태는 대략 3가지 변수에 따라 들불처럼 번질 것인지, 아니면 사그러들 것인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학부모와 교원들이다. 이들은 미즈타니 교수처럼 오사카 시장보다는 쿠보 교장을 지지하는 입장일 것이다. 다만 그런 의견을 얼마나 공개적으로 표명하거나 행동에 옮길 것인지가 문제이다. 교원과 학부모들이 나서면 이 문제는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교육개혁의 물꼬를 트게 될 것이지만, 이들이 침묵을 지키고 오사카 시정부가 쿠보 교장을 징계하면서 진압에 나설 경우 교육 개혁의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둘째는 코로나 방역상황이다. 오사카는 물론 일본 지역의 코로나 감염 및 확산은 이미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개선될 여지도 없다. 따라서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정부 입장을 약화시키고 학교와 교원과 학부모들과 일반 시민들을 결집을 도울 것이다.

 

셋째는 올림픽 강행이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극성의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개최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런 의료적 위기상황에서 올림픽 같은 국제행사를 치르려면 군과 공무원 뿐 아니라 의료와 학교의 희생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코로나와 올림픽으로 동시에 학교의 존립기반이 위협받고 헌법이 보장한 인도주의적 교육의 권리가 부정당한다면, 시민과 교원들이 교육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넷째는 쿠보 교장 등의 주도세력이 얼마나 조직화될 것인지도 문제이다. 마츠이 시장이 쿠보 교장을 징계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내 생각에는 결국 징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쿠보 교장의 개혁 운동이 교원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될 것이고, 이는 1989년 한국에서 발생한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의 길을 밟을 것이다. 한국의 이 운동은 1998 <전교조>가 합법적 지위를 얻기까지 약 10년 동안 대정부 투쟁을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체 조직이 필수적인데, 개인들이 10년 이상 운동을 지속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섯째, 또 하나의 가능한 변수가 재일 조선학교의 동조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중앙정부와 각 지방정부들의 제도적 차별을 겪어온 재일 조선학교가 조직적으로 쿠보 교장의 교육개혁을 지지하고 행동을 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문제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될 가능성이 크다. 쿠보 교장의 입지는 강화되겠지만, 오사카 시정부와 극우 혐한 세력이 반격할 빌미를 주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보 교장의 문제 제기가 성공하고 확대되려면 교원과 학부모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의 동조 여부에 따라서 일반 시민들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원-학부모-일반시민들은 유권자들이므로 정치가들은 그들의 주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먼저 학부모와 교원, 일반 시민의 힘으로 일본 교육개혁의 기반이 마련되고, 그 주도세력이 재일조선학교의 제도적 차별 철폐를 약속한다면, 조선학교도 조직적으로 이에 적극 가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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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늦게 발견하기는 했지만, 5월20일의 <마이도나 뉴스>라는 다소 생소한 매체에 독특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쿠보 교장의 비판이 합리적이며, 마츠이 오사카 시장은 "정책을 재고해 주기 바란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힌 미즈타니 오사무 교수의 기고문이 보도됐습니다. 미즈타니 교수는 <야회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밤거리의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저명한 사회교육가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에는 묵직한 무게가 실렸습니다.

 

이로써, 당사자인 교장과 시장, 그리고 조정자인 장관 이외에 처음으로 일반 시민으로서의 제3자가 쿠보 교장의 편에 선 것입니다. 앞으로 교원들과 학부모,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미즈타니 교수와 같은 입장에 서서 쿠보 교장을 지지할 것인지가 이 운동의 향방을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655b356c2ffdfe2842def829bd50012615b49ec4

 

松井市長、再考を!小中学校にオンライン学習求める大阪市「教育受ける権利」阻害も 夜回

 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拡大を受けた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が18日、端末の配備や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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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번역)

 

마쓰이 시장, 재고하세요초중학교에 온라인 학습 요구하는 오사카시 '교육 받을 권리' 저해도 야경 선생이 우려
5/20(목) 6:55 전달

야경 선생과 교육가 미즈타니 오사무 씨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확대를 받은 긴급사태 선언에 수반해, 오사카시가 초중학교에서 「원칙 실시」를 요구한 온라인 학습에 관해,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 교장이 18일, 단말의 배치나 통신 환경의 정비가 불충분한 채 도입해 현장을 혼란시켰다고 하는 서면을, 마츠이 이치로 시장 앞으로 송부한 것을 밝혔다.「일자리적인 계획으로 학교 현장은 혼란을 극에 달해 아동,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라고 해 오사카시의 자세를 비판해, 동교에서는 대면 수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야간주행 선생님」인 교육가 미즈타니 오사무씨는 동교장에의 이해를 나타낸 다음 「오사카시장 마츠이씨에게의 부탁입니다」로서 재고를 호소했다.

   ◇    ◇    ◇

 오사카시립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 교장이, 오사카시가, 이 긴급사태 선언으로, 모든 초중학교에 온라인 수업을 원칙 실시할 것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마츠이 시장 앞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문서를 송부해, 그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감염증 대책을 철저히 한 다음, 대면 수업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 보도되었습니다.이 판단이 옳은지 어떤지는 저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잘 알겠어요.

 현 헌법으로 모든 어린이들은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받고 있습니다.온라인 수업은, 이 아이들이 가지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초등학교, 특히 저학년 아이들이 컴뷰터 단말기를 직접 사용하여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또한 모든 오사카시의 의무교육과정 아이들에게 이 단말기는 배포되어 그 통신이 확보되고 그 요금에 대해서도 시가 지불하는 체제는 되어 있는 것입니까?

 제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교토의 하나조노 대학에서는 필요한 모든 학생에게 통신료가 대학 부담 단말기를 빌려 주고, 또 그 사용에 대한 강습도 실시하고 있습니다.작년, 강의가 리모트 수업으로 바뀌면서 필사적인 대책을 대학이 실시해 왔습니다.오사카시는 어떨까요?작년의 장기적인 휴교, 그 때, 온라인 수업에 대한 준비를, 하드면, 즉 기재나 통신환경의 행정에 의한 정비, 또 소프트면, 온라인 수업의 교재의 준비를 완전하게 해왔는지요.

 그렇게 되었다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온라인 수업으로 수업을 한다.말로 하면, 꽤 멋있는 말입니다.하지만 내용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단순히 자녀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저해하는 헌법 위반입니다.그러면 작년처럼 모든 학교를 휴교하고, 하절기와 동절기의 휴업 기간을 단축해서 실제 수업을 해야 합니다.나는, 쿠보 교장의 판단을 이해하고 지지합니다.

 온라인 수업은 지식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대학에서조차 완전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생활습관이나 집단행동 등도 가르쳐야 할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시킬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가정에 낮 동안 아이밖에 없는 상황의 아이들에게는 해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꼭 마츠이 시장은 이 쿠보 교장의 용기 있는 발언을 재고해 주었으면 합니다.또, 이로 인해, 그를, 「복무 명령 위반」으로 처분하는 일이 없도록 부탁드립니다.나는, 요코하마시의 교원 시절, 납득할 수 없는 「복무 명령」을 모조리 거부했습니다.그래서 여러 번의 처분을 받았습니다.그 결과, 급여, 퇴직금과 큰 마이너스 영향을 받았습니다.구보 교장이 이런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빈번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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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松井市長、再考を!小中学校にオンライン学習求める大阪市「教育受ける権利」阻害も 夜回り先生が懸念
5/20(木) 6:55配信

夜回り先生こと教育家の水谷修氏

 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感染拡大を受けた緊急事態宣言に伴い、大阪市が小中学校で「原則実施」を求めたオンライン学習に関し、大阪市立木川南小の久保敬校長が18日、端末の配備や通信環境の整備が不十分なまま導入して現場を混乱させたとする書面を、松井一郎市長宛てに送付したことを明かした。「場当たり的な計画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児童、生徒や保護者に大きな負担がかかっている」として大阪市の姿勢を批判し、同校では対面授業を続けているという。「夜回り先生」こと教育家の水谷修氏は同校長への理解を示した上で「大阪市長松井氏へのお願いです」として再考を訴えた。

   ◇       ◇    ◇

 大阪市立木川南小学校の久保校長が、大阪市が、この緊急事態宣言で、すべての小中学校にオンライン授業を原則実施することを求めたことに対して、松井市長宛にそれを批判する文書を送付し、その指示に従わず、感染症対策を徹底した上で、対面授業を実施していることが報道されました。この判断が正しいのかどうかは、私には判断できません。しかし、彼の言いたいことはよくわかります。

 現憲法で、すべての子どもたちは、教育を受ける権利を保障されています。オンライン授業は、この子どもたちの持つ教育を受ける権利を保障するものとな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小学校、特に低学年の子どもたちが、コンビューター端末を自分で使用して、授業に参加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また、すべての大阪市の義務教育課程の子どもたちに、この端末は配布され、その通信が確保され、その料金についても市が支払う体制はできているのでしょうか。

 私が今教えている、京都の花園大学では、必要とするすべての学生に通信料が大学負担の端末を貸し出し、また、その使用についての講習も行っています。昨年、講義がリモート授業となったことから、必死の対策を大学が行ってきました。大阪市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昨年の長期にわたる休校、その時、オンライン授業に対する準備を、ハード面、つまり機材や通信環境の行政による整備、またソフト面、オンライン授業の教材の準備を完全にしてき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ができていれば、このような事態は起きていないでしょう。オンライン授業で授業を行う。言葉にすれば、なかなか格好のいい言葉です。でも、内容が整っていないならば、単に子どもたちの教育を受ける権利を阻害する憲法違反です。それならば、昨年のように、全学休校にして、夏期や冬期の休業期間を短縮し、実際の授業を行うべきです。私は、久保校長の判断を理解し支持します。

 オンライン授業は、知識を中心に教える大学ですら、完全な授業を行うことは不可能です。生活習慣や集団行動なども教えなくてはいけない小学校低学年の子どもたちに、きちんとした教育ができるわけがありません。ましてや、家庭に昼間子どもしかいない状況の子どもたちに対しては、害でしかないでしょう。

 ぜひ、松井市長には、この久保校長の勇気ある発言を再考してほしいと思います。また、このことによって、彼を、「服務命令違反」で処分することのないようにお願いします。私は、横浜市の教員時代、納得できない「服務命令」をことごとく拒否しました。そのため、数度の処分を受けました。その結果、給与、退職金と大きな負の影響を受けました。久保校長がこのような被害に遭わないことを望みます。

まいどな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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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교육개혁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키가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다카시 교장이 마츠이 이치로 오사카 시장에게 코로나 대책 학교행정을 계기로 <교육개혁>을 주장하는 공개서한을 발송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마츠이 오사카 시장이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인 가운데,

이번에는 중앙정부의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성 장관이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책을 존중한다"면서도 "일선 교육자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지 않느냐"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긍정하는 듯한 줄타기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기우다 장관의 발언으로 오사카 교육개혁 문제가 수그러들것 같지는 않지만, 중앙정부의 장관이 이 문제에 논평을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본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직'을 걸고 문제를 제기한 쿠보 교장이 이 정도의 중재발언으로 물러날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기우다 장관의 발언은 오사카시에서 시작된 이 문제가 전국적인 문제로 확산되게 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https://www.asahi.com/articles/ASP5P42KYP5PUTIL00R.html

 

文科相、大阪市長に「耳を傾けて」 現職校長からの提言:朝日新聞デジタル

 大阪市が緊急事態宣言中の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オンラインが基本」としたことに対し、市立小学校の校長が実名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た」などとする提言を松井一郎市長や市教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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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번역)

 

문부과학상, 오사카 시장에게 귀 기울여줘 현직 교장의 제언
이토 카즈유키 2021년 5월 21일 12시 26분
아사히 신문 디지털 기사
사진·도판
하기우다코오이치문부과학상

 오사카시가 긴급사태 선언중의 시립 초중학교의 학습을 「온라인이 기본」으로 한 것에 대해, 시립 초등학교의 교장이 실명으로 「학교 현장은 혼란을 극했다」 등으로 하는 제언을 마츠이 이치로 시장이나 시교육장에게 보냈다.이에 대해 하기우다 고이치 문부 과학상은 21일의 내각회의 후 회견에서, 「(교장으로부터) 불편이 있었다고 하는 보고라면, 귀를 기울여 개선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시 측에 재촉했다.

 마츠이 시장과 시 교육장에게 17일에 「제언서」를 보낸 것은, 오사카시 요도가와구의 시립 키카와미나미 초등학교의 쿠보 타카시 교장.온라인 학습을 기본으로 한 마츠이 시장의 판단을 「아이의 안전·안심도 배울 권리도 어느쪽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고 비판.시의 교육 행정의 문제도 언급했다.한편 마쓰이 시장은 20일 보도진의 취재에 하고 싶은 말은 해도 좋다며 (시교육위원회의 교육진흥기본계획의) 룰을 따를 수 없다면 조직을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하기우다씨는 오사카시의 대응에 대해 「자치체의 판단을 존중한다.다만 온라인에서 아이들이 납득할 만한 수업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실태가 있다면 잘 챙겨주길 바란다고 말했다.쿠보 교장과 마츠이 시장의 교환에 대해서는 「현장의 선생님이 수장에게 의견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단지, 오사카시는 생각한 결과라고 생각한다.해보고 잘못됐다는 보고라면 귀 기울여 개선하면 어떨까요라고 말했다.(이토 카즈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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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文科相、大阪市長に「耳を傾けて」 現職校長からの提言
伊藤和行2021年5月21日 12時26分
朝日新聞デジタル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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萩生田光一文部科学相

 大阪市が緊急事態宣言中の市立小中学校の学習を「オンラインが基本」としたことに対し、市立小学校の校長が実名で「学校現場は混乱を極めた」などとする提言を松井一郎市長や市教育長に送った。このことについて萩生田光一文部科学相は21日の閣議後会見で、「(校長から)不具合があったという報告であれば、耳を傾けて改善したらどうか」と市側に促した。

 松井市長と市教育長に17日に「提言書」を送ったのは、大阪市淀川区の市立木川南(きかわみなみ)小学校の久保敬校長。オンライン学習を基本とした松井市長の判断を「子どもの安全・安心も学ぶ権利もどちらも保障されない状況をつくり出している」と批判。市の教育行政の問題にも言及した。一方、松井市長は20日、報道陣の取材に「言いたいことは言ってもいい」としつつ、「(市教育委員会の教育振興基本計画の)ルールに従えないなら、組織を出るべきだと思う」と発言した。

 萩生田氏は大阪市の対応について「自治体の判断を尊重する。ただオンラインで子供たちが納得する授業が十分できなかったという実態があれば、しっかりフォローして欲しい」と述べた。久保校長と松井市長のやりとりについては「現場の先生が首長に意見をおっしゃることは決して悪いことだと思いません。ただ、大阪市は考えた上での結果だと思う。やってみて不具合があったという報告だとすれば、耳を傾けて改善したらどうですかね」と話した。(伊藤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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