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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부산에 활동사진 상설관 시대가 시작된 이후 1920년대는 영화관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다. 국제관에서도 12권짜리 장편영화 <! 무정(=레미제라블)>14권짜리 <십계>(1923, 파라마운트사, 세실 B. 데밀 감독)를 상영해 주목을 끌었으나 보래관이나 상생관 등의 영화 상설관에 비하면 상영영화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보래관과 상생관은 일본 유수 영화제작사와 특약을 통해 일본 영화를 확보했고, 보래관과 행관은 미국과 유럽의 영화배급사와의 계약으로 다양한 필름을 확보했다. 특히 행관은 사쿠라바상회가 보유한 3천개 이상의 필름을 활용해 매일 주야 2회 상영을 경영전략으로 구사했다.

 

 

상영 영화 확보에 열세였던 국제관은 눈을 국내로 돌렸다. 일본영화와 서양영화의 열세를 조선영화로 만회하고자 한 것인데, 조선영화란 조선에서 제작된 영화를 가리킨다. 1920년대 초기의 조선영화들은 일본인들의 자본과 기술, 조선인들의 연기 인력의 합작인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중반에야 조선의 자본이 동원되곤 했지만, 촬영기법은 여전히 일본식이었다. 조선식의 새로운 촬영기법은 나운규의 <아리랑>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1924711일 부산 최초이자 조선 최초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일본인들이 설립한 영화제작사이지만, 연기와 감독 등의 제작진에는 조선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24년 초 조선의 연극인 안종화와 김정원, 유수준과 엄진영, 이경손과 이채전 등 <무대예술연구회>의 회원들이 국제관 무대에서 톨스토이의 <부활>, <월광곡> 등의 연극작품을 공연해 갈채를 받았는데, 이들의 연기를 눈여겨 본 부산의 일본 실업인들이 조선인 배우들을 영입해 <조선키네마()>를 설립한 것이다.

 

조선인 배우와 일본인 자본/기술이 결합해 출범한 <조선키네마()><해의 비곡(秘曲, 1924)>, <총희의 연(寵姬, 1925), 일명 <운영전(雲英傳)>, <신의 장(, 1925)>, <동리의 호걸(洞里豪傑, 1925)> 4편의 영화를 제작해, 모두 국제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들이 국제관에서 상영된 것은 <무대예술연구회>에 속한 조선인 연극배우들이 국제관과 맺은 인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제관은 <조선키네마>의 조선-일본 합작의 조선영화뿐 아니라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도 다수 상영했다.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1924)>, 이경손 감독의 <심청전(1925)><개척자(1925)><장한몽(1926)>, 이구영 감독의 <쌍옥루 전,후편(1925)>, 김수로 감독의 <괴인의 정체(1927)> 등이 모두 부산에서는 국제관에서 상영되었다.

 

<조선키네마>는 설립 1년만인 1925년에 경영난과 내부 분열로 해산되었지만, <조선키네마>의 시도는 부산에서 영화의 제작과 배급, 흥행을 모두 담당했던 경험을 남겼고, 이는 훗날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떠오르는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국제관은 영화 상영 외에 다양한 공연을 유치했는데, 무용공연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무용가로서 최초로 조선공연을 가졌던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부산 공연도 1925114일 국제관에서 열렸고, 1926327일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공연이 열린 곳도 국제관이었다.

 

 

다만 최승희는 국제관에서 무용공연을 가진 적이 없는데, 이는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마치고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던 1930년대 초에는 국제관이 이미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19284월에는 국제관보다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부산공회당이 개관했으므로 무용공연이 대개 부산공회당에서 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국제관은 19251월 자본금 20만원이 10만원으로 감자(減資)되는 등 경영의 어려움을 겪던 중, 1929227일의 화재로 전소되었다. 이 화재로 공연 중이던 사와다(澤田) 극단의 출연배우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피해액도 109천원에 달했다. 이후 국제관을 재건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국제관은 설립 10년 만에 폐관되었다. 화재 당시 국제관의 위치는 대창정 4정목 40번지(1929228일 부산일보)로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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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822일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이 안본정 5번지(=중구 중앙동)에 개관했다. 국제관은 옛 부산역(=1953년 부산 대화재로 소실) 앞에 르네상스식과 일본식의 절충적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이형재 건축사의 고증에 따르면 건물 전면 한 칸 기둥까지는 근대식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동서양 절충식으로 구성되었고, “건물 상부에 마련한 지붕 내밀기 디자인은 당시로서는 꽤 획기적인 디자인 발상이라고 조사했다.

 

국제관은 4천주를 나눠 투자한 194명의 주주들이 설립했는데, 설립 자본금은 20만 원, 불입금 13만 원이 출자되었다.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 4명 중 기노시다 모도지로(木下元次郞)가 대표,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가 전무, 요시오카 시게도미(吉岡重實)와 시게도미 이하치(重富伊八)가 각각 취체역으로 참여하여 공동 경영되었다. 경영진 참여자들은 모두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경제인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국제관은 상설 활동사진 영업을 주목적으로 하되, 활동사진 필름의 제조, 판매, 임대, 위탁 매매업도 할 수 있었고, 연극 및 제흥행 경영 중개업, 그리고 극장임대업도 가능하도록 허가되었다.

 

 

국제관 개관 시기는 부산 극장사의 초기가 마무리된 시기였다. 부산의 초기 극장은 8개로, 행좌(杏座사이와이자, 1903-1916)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 변천좌(辨天座벤텐자, 1912-1916),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등이 그것이다.

 

이 극장들은 모두 일본의 구극과 신극을 주로 상연하던 연극장이었고, 각 극장의 존속 연대에도 보이듯이 이중 부산좌를 제외한 7개 극장이 폐관되거나 영화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송정좌와 부귀자, 질자좌와 욱관은 폐관되었고, 동양좌는 1916년 대흑관으로 바뀌었다가 1918년경 폐관되었다. 다만 행좌는 행관(1916-1930)으로, 변천좌는 상생관(1916-1945)으로 개칭되었다, 이중 욱관은 폐관되기 2년 전인 1914312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해 부산에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처음 열었다.

 

 

따라서 1918년경에는 부산좌와 보래관, 행관과 상생관의 4곳만 남았고, 부산좌만 연극과 영화 공용상영관으로 남았을 뿐, 나머지 3곳은 모두 새롭게 개관, 혹은 재개관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영화관람 수요가 다시 늘어나자 1920년대에 새로운 극장이 세워졌는데, 1920년의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 1921년의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 1922년의 태평관(太平館타이헤이간, 1922-1943) 1924년의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가 개관해 총 8개의 극장과 공존하면서 다시 관객 경쟁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앞선 일본식 연극장 시기(1903-1914)와는 달리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1914-1928)로 이미 활동사진, 즉 영화의 공급이 확대되고 이를 관람하는 관객의 층도 두터워졌기 때문에 부산좌가 화재로 폐관된 것을 제외하고는 7개의 극장이 모두 상존(相存)하면서 극장계를 이끌어 나갔다.

 

 

8개 극장도 부산 초기극장 시기부터 보이던 역할 분담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평관은 일본전통의 가부키 극장이었고,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은 봇물 터지듯 시작된 활동사진 상설관이었다. 한편 부산좌와 국제관, 유락관과 수좌는 전통적인 일본의 구극과 신극은 물론 새로운 활동사진도 상영했을 뿐 아니라, 부산부 내의 각종 사회단체와 연예행사 등도 개최하는 전천후 극장이었다.

 

그러나 영화관으로서의 국제관은 당시 부산의 3대 상설 영화관인 보래관, 행관, 상생관에 비해 경영 실적이 뒤쳐졌고, 상영된 영화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연극 공연장으로서는 부산좌와 함께 명성을 얻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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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이 본정1정목 16번지(중구 동광동116번지)에 문을 열었다.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 1884~?)는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로부터 인수받은 연극장 변천좌(1912-1916)를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19161031일에 활동사진 상설관 상생관을 개관한 것이다. 대지 95, 1,2층 총건평 165평으로 관람석은 1350, 2307, 입석 148, 805석이었다.

 

상생관의 외형장식은 매우 독특했다. 이형재 건축사무소 대표의 고증에 따르면 인조석으로 조각을 부각시켜 석조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표현했으며 2층 열주는 이오닉형에 가까운 주두로 적은 공사비를 투입, 석조집의 모양을 낸 당대 제일의 미장공 솜씨를 뽐낸 건물이다. 로코코와 바로크, 르네상스풍이 가미된 절충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어 이런 유형은 대청동의 근대 역사관에서 조금 찾아볼 수 있다.

 

 

상생관은 1918년부터 닛카츠(日活), 1923년부터는 쇼치쿠(松竹) 영화사로부터 영화를 배급받아 오던 중 닛카츠 영화가 보래관으로 넘어가버리기는 했으나 파테사를 비롯하여 키스튼, 메트로 등의 외국영화를 상영하여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상생관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가장 먼저 소개하면서 인기를 끌자 독식하다시피 상영했다. 1917428, 1권짜리 <채플린의 장난>을 시작으로 <권투>, <빵집>, <신문기자>, <괴잠정>, <사랑의 도피>, <연극>, 1918년 들어 <악우>, <남의 일에 질투>, <백작>, <가짜>, <지배인>, <칼멘>이 상영됐으며 그 후 <전선의 채플린>, <황금광시대>,<나무망치>, <키드>, <방랑시대>, <스케이트>, <전당포>, <데파트 성금>, <거리의 등불>, <거리의 대장>이 상영됐다.

 

상생관의 외관은 19251115일 개축공사에 의해 새롭게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보래관, 행관과 함께 부산을 대표했던 3대 극장의 하나였던 상생관은 1932212일 쇼치쿠 가마다(蒲田) 촬영소가 만든 발성영화 제1회 작품 <마담과 마누라>를 상영하면서 부산의 세 번째 발성영화 상영관이 되었다.

 

 

이후 상생관은 1934년 부산대교(영도다리) 개통에 이어 1936년에는 극장 건너편에 부산부청(시청)이 들어서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로 시민들과 더욱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대중 문화공간으로 융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상생관의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는 1936년 오이케 겐지(大池)로부터 초량동 소재 중앙극장을 인수하여 극장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고 모관 상생관에서 가까운 잇점을 살려 한 영화를 두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하는 방식으로 경영의 내실을 기했다. 그는 사업 영역을 대구와 서울 지역까지 넓혀 대구 신흥관과 서울 용산극장도 경영했다.

 

그러나 시설과 관객 수용에서 보래관, 행관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상생관은 소화통 2정목에 부지를 확보하고 극장 신축을 시도했지만 실현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1942년의 <조선의 영화상설관목록(소화17년 영화연감)>에는 대표가 미츠오(滿生忠雄)으로 교체되어 있다.

 

 

해방 후인 194611일 새로운 이름을 현상 공모하여 <대중극장(大衆劇場)>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4812월에는 <부민관(府民館)>으로, 한국전쟁기에는 임시수도 부산의 대표적인 개봉관으로 신작영화가 모두 이곳에서 상영, 2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19538월에는 <시민관(市民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명극장 등이 차례로 세워지면서 극장 시설의 노후로 2,3번관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197661일 개관 60년 만에 문을 닫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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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보래관과 욱관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이후 많은 연극장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19151219일 행좌의 극장주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는 시설이 노후된 연극장을 폐관하고, 주변의 땅을 더 사들여 총 120평의 대지 위에 르네상스 러시아풍과 일본풍의 절충양식으로 2층짜리 현대식 행관(幸館, 1916-1930)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개관했다.

 

1922년 홋카이도 하코다테 출신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 1892-)는 행관을 인수하는 한편 영화배급회사 <사쿠라바상회(サクラバ商會)>를 설립해 부산 지역을 포함하여 전 조선과 만주까지 영화 배급망을 구축했다. 그는 행관을 <1행관>, 영도의 수좌(壽座, 1924-1945)를 임대해 <2행관>으로 직영하면서, 일본의 도호영화제작소, 연합영화예술가협회, 동아키네마주식회사 등과 특약을 맺어 경성, 안동, 대련 등에도 출장소를 두어 영화 배급업무를 확대했다.

 

 

극장도 부산 <행관> 외에 경성의 <중앙관>, 평양의 <평양키네마>, 안동의 <전기관> 등은 임대 계약관으로, 울산의 <상반좌>, 대구의 <대송관>, 대전의 <대전관>, 목포의 <희락관>, 군산의 <희소관>, 이리의 <이리좌>, 원산의 <원산극장>, 해주의 <해주좌>, 청도의 <낙락관>, 대련의 <제국관>, 무순의 <보관>을 직영순업부로 운영했다.

 

사쿠라바 후지오는 영화 상영을 극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부산호텔이나 초량의 철도클럽, 신문사와 도청 등의 각 관청과 회사에까지 출장하여 영화 영사업을 개시하여 영업 전략을 다변화해 나갔다.

 

1929718일 행관은 부산 최초로 발성영화 상영시설을 갖추고 마키노 영화사가 제작한 발성영화 제1회작 <돌아오는 다리>를 상영하여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1927년 최초의 발성영화 미국의 <재즈싱어>가 나온 이후 2년만의 일이었으며,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만들어지기 6년 전의 일이었다.

 

행관은 행좌(1903-1915) 시기부터 소화관(1931-1945) 시기에 이르기까지 부산지역 극장사의 등뼈와 같은 존재였다. 가장 먼저 세워진 극장이면서, 대형극장화(1916)에 성공했고, 발성영화 상영(1929)의 선두주자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배급망을 확대함으로써 전조선과 만주까지 영업했던 극장이기 때문이다.

 

 

행관은 19301110일의 화재로 소실됐다. <사쿠라바상회>의 지하실 영화필름 저장소에서 발생한 화재는 극장까지 전부 태웠고, 3천권의 필름을 포함, 30여만원의 피해를 입혔다. 부산부 당국으로부터 같은 장소의 극장 재건축을 허가받지 못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19311231일 남빈정2정목 22번지(지금의 중구 창선동247번지)에 새로운 활동사진 상설관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을 개관했다.

 

대지 164평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진 소화관은 연건평이 344, 무대만도 25평의 널찍한 극장이었다. 관람석도 861(1932, 부산상공안내)으로, 층별로 등급석을 구별해 1층에는 2등석 475(남자 135, 여자 65, 가족 275), 2층에는 1등석 226(남자 71, 여자 35, 가족 120), 3층에는 3등석 160(남자 48, 여자 48, 가족 64)을 배치했다.

 

 

행관(1916-1930)과 함께 부산 극장가를 모양지었던 극장들은 13개를 헤아렸다. 행관의 개관 당시에는 이미 부산좌(1907-1923)와 변천좌(1912-1916), 동양좌(1912-1918)와 질자좌(1912-1918), 욱관(1912-1916)과 보래관(1914-1945)와 초량좌(1914-1917) 등의 7개 극장이 영업 중이었고, 행관 이후에 개관되어 동시에 존재했던 극장들로는 상생관(1916-1945)과 국제관(1920-1929), 유락관(1921-1932)과 태평관(1922-1943), 수좌(1924-1945)와 중앙극장(1930-1945) 등의 6개관이 있었다.

 

부산 최초의 극장인 행좌(1903-1915)와 최초의 발성영화 상연관 행관(1916-1930), 그리고 부산 최대극장 소화관(1931-1945)의 역사를 합친다면 이는 부산극장사의 등뼈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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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는 부산 동구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극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극장들은 대부분 일본인이 밀집 거주 지역이자 상업 지구였던 중구 지역에 집중되었으나 초량좌와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과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45)3개 극장은 동구지역에서 문을 열었다.

 

초량좌는 1910년에 개관되었다는 설도 있었으나 문헌으로 확인된 것은 191424일자 <매일신보>의 보도가 처음이었다. 이 기사는 이기세 대표가 이끄는 신파극 유일단(唯一團) 일행인 문수성, 이웅수, 윤상희의 지방순회 공연이 초량좌의 무대에 올라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1914111일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 11장의 부산의 극장 및 기석을 서술한 글에서도 부산좌, 행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보래관, 변천좌 등과 함께 초량좌가 개관되어 있었던 사실을 서술했고, 부산일보(1916621, 1917220)와 조선시보(1916827), 191741일 부산부청이 발행한 <부산부전도>에도 부산좌, 보래관, 대흑좌(동양좌가 개명된 극장), 행관, 상생관과 함께 초량좌가 수록되어 있었다.

 

 

초량좌의 위치는 경부선의 부산 종착지인 초량역 인근 초량천 하구 옆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량좌는 행좌(1903-1915)와 송정좌(1903-1911) 이래 개관된 총 10개의 극장 중에서 영도의 질자좌(1912-1918)와 함께 일본인 거류 및 상업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중구 지역에서 벗어나 설립된 유이의 극장이었다. 초량좌는 일본인들 외에도 조선인들이 자유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극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원표가 저술한 <향토부산(1967)>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는 초량좌의 위치에 대하여 초량천을 사이에 두고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초량좌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어 박원표는 초량좌가 “...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 곳 무대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토월회가 창립된 것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에서 공연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한편 박노홍은 <한국극장사5(1979)>에서 철로가 생긴 후(1905) 초량 너머에 있는 철도역 근변에 1912년 철도영관이라는 극장이 있었던 것만 가려내었다.”고 기술했다.

 

 

유락관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가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 주식회사가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5백원을 출자하여 건축되었는데, 115명의 주주가 소유한 총주식 3천주 중에서 오이케 타다스케가 1280주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조선인 연극과 영화 및 연예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다. 최천택(조선일보, 192312),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동아일보, 192336),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조선일보, 192387),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동아일보, 19231222) 등이 유락관에서 공연한 바 있었다. 유락관은 193212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 후 복구되지 못했다.

 

부산좌(1907-1923)와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타다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이를 승계했고, 건축 중이던 중앙극장(1930-1936)도 완공해 경영했다. 중앙극장은 연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개칭,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되었다.

 

중앙극장과 대생좌는 조선인 영화를 상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32년에는 <방아타령>(31, 김상진)<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년에는 <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년에도 <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의 조선영화가 상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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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1914년에 행정1정목 15번지(=중구 창선동115번지, 현 국민은행 광복동점 자리)에 문을 열었다. 극장주 오노하이루(小野入)는 보래관을 연극전용 극장으로 개관해 일본 신극과 가부끼 등을 주로 상연하였다. 개관 당시의 입장료는 1등석 25, 2등석 20,3등석 10전이었다.

 

보래관은 개관 4개월만인 191539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개관했다. 이는 욱관이 19143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한 것에 자극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보래관은 욱관에 이어 부산의 활동사진 상설관 2호로 기록된 셈이다.

 

 

19141219일에는 행관(幸館)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함으로써 욱관, 보래관과 함께 부산의 초기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1916111월에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 4호가 되었고, 19161031일에는 변천좌가 헐린 자리에 상생관(1916-1945)이 활동사진 상설관 5호관으로 들어섰다. 욱관이 1916, 대흑좌가 1918년에 폐관된 이후부터 보래관은 행관, 상생관과 함께 부산의 3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꼽혔다.

 

보래관은 부산에서 가장 먼저 연속활극 시리즈물을 선보인 극장이었다. 191678일 길이가 124,000척으로 2550권짜리 대작 영화 <하트3!!>을 상영한 이래 바이타그라프사, 유니버셜사, 파테사, 워너사, 메트로사 등이 만든 미국의 연속활극이 대부분 상영되었다. 초기에는 동경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특약을 맺고 경성의 황금관과 동시에 활동사진을 개봉했고, 후에는 일본의 데이코쿠키네마주식회사와 닛카츠, 미국의 유니버셜영화사, 폭스사, 바이타그라프사, 워너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그리고 프랑스, 독일 등의 유럽 영화까지 상영했다.

 

보래관은 행관에서 1929년 처음으로 발성영화를 상영한지 1년 후인 1930726일 닛카츠(日活)의 제1회 작품인 <고향>을 상영하면서 발성영화 상영관 시대의 대중화를 열어 나갔다.

 

보래관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은 이바라키현 출신의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였다. 그는 도쿄의 영화사에서 근무하다가 1914년에 조선으로 건너왔고, 한동안 경성에서 일하다가 부산에 와서 보래관에서 지배인으로 오래 근무한 후, 경영을 승계했다.

 

 

1928년 보래관은 재건축되었다. 상층 250, 하층 450, 700석 수용의 2층 목조 건물로 재건축된 보래관은 같은 해에 행관, 상생관과 함께 키네마협회를 결성함으로써 경쟁을 줄이고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키네마협회는 1930년 행관이 화재로 폐관된 후 행관의 뒤를 이은 소화관을 받아들여 부산활동사진상설관동업조합으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부산영화극장이 가입해 부산영화연예조합을 개칭하면서 4개 극장 담합체제를 유지했다.

 

193792일 당시 극장주 이와사키 다케지는 극장 노후화를 이유로 재신축을 결정, 상영 중인 영화 프로를 부산극장으로 이동해 상영해 가면서 11개월 동안 건축비 30만원을 투입한 끝에 1938105일 새로운 보래관을 개관했다. 이는 140평 대지 위에 3층 석조건물(총 건평 341)을 갖춘 현대식 극장으로 수용인원은 952석이었다.

 

보래관은 일제에 앞장서서 협조했던 대표적인 친일 극장 중의 하나였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협조하기 위해 영화광고(1941525일자 부산일보)에서도 국민 모두가 방첩 전사라는 구호를 싣는가 하면 만주 사변 기념흥행식의 표현으로 자국전쟁을 미화 홍보하는 상영광고를 서슴지 않았다.

 

보래관은 조선인이 제작한 조선영화를 철저하게 외면한 극장이었다. 개관한 전 기간 조선영화를 단 1편도 상영하지 않았으나, 1944년 제작된 친일 어용영화 <거경전>이 유일하게 개봉된 바 있었다.

 

8·15 광복 후에는 194611<국제영화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한때 미군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다가 1949118<국립 극장>, 1950618<문화극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973827일 폐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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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국제영화제가 부산에서 열리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산이 오래 전부터 극장과 영화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관의 역사와 그 수가 말해 준다.

 

부산지역에서는 1903년에 첫 극장이 개관한 이래,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기(1903-1945)23개 영화관이 존재했다. 해방 후(1947-2014)에도 단관극장이 78개소, 소극장(1982-1999)48개소, 복합영화관(1993-2014) 27개소가 개관과 폐관을 거듭하면서 부산 영화인들과 관객들에게 영화를 가까이 하게해 왔다. 여기서는 일제강점기의 주요 극장들에 대해서만 일별해 보기로 하자.

 

부산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극장은 행좌(幸座, 1903-1915, 사이와이자)였다. 190312(추정), 부산의 사업가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 1860-1942)가 남빈정 2정목 14번지(=중구 남포동245-1번지)에 개관한 행좌는 일본인들을 위한 연극장, 즉 가부키 극장이었다.

 

 

부산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극장은 송정좌(松井座마츠이자, 1903-1911), 행정 2정목(=중구 남포동, 또는 중구 광복동?)의 사안교(思案橋) 앞에 세워졌다. 부산의 여관업자 마츠이 고지로(松井幸次郎)가 설립한 이 극장은 연극장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행좌와 송정좌에 이어 부귀좌(富貴座후키자, 1905-1907)가 부평정(=중구 부평동)에서 문을 열었으나 190781일 발행된 지도 <부산항시가 명세도>에 부귀좌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전에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1906315일 발행된 <조선실업> 10호가 “(행좌와 송정좌와 부귀좌의) 세 극장이 모두 비좁다고 서술한 것을 보면 부산의 초기 3대극장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산 최초의 대형극장은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이다.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실업가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야마모토 준이치(山本純一), 나까무라 토시마츠(中村俊松), 고지마 진기찌(五島甚吉)등이 공동 합자, 19074월 자본금 총액 3만원, 불입자본금 2만원을 출자하여 부산연극합명회사를 창립 후 부산좌를 건축, 그해 715일 개관했다.

 

부산좌 건물은 끽다점과 정원을 설치하는 등 부대시설과 조경에도 신경을 쓴 근대식 건축물이었다. 내부 관람석은 의자가 아니라 방석을 깔고 앉는 구조였다. 관람석 수는 무대 정면에 990, 좌우측이 각각 225석으로 총 1,540석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연극 전용극장이었으나 연쇄극과 영화 상영도 계속되었고, 음악회, 무용발표회, 투견대회, 권투시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행사가 개최되었던 극장이었다. 특히 부산좌는 19151016<짝사랑>을 상영하면서 한국 최초의 연쇄극 상영극장으로 기록되었다.

 

 

1912년에는 4개의 극장이 추가로 개관했다. 변천좌(辨天座벤텐자1912-1916, 본정1정목, 중구 동광동116번지), 동양좌(東洋座도요자, 1912?-1918?, 부평정1정목, 중구 부평동), 질자좌(蛭子座히루고자, 1912-1918, 목도牧島, 영도), 욱관(旭館아사히칸, 1912-1916, 행정1정목, 중구 창선동)이 그것이었다.

 

변천좌는 극장주 교야마 하나마루(京山花丸)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인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으로 전환하기 위한 개축공사에 들어가면서 5년 만에 폐관되었다.

 

동양좌는 부산좌와 함께 드물게 회전무대까지 갖춘 연극 전용 극장이었으나 1916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하면서 대흑좌(大黑座다이고쿠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8년 발행된 <부산시가전도> 이후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흑좌는 그 무렵 폐관된 것으로 보인다.

 

영도 지역에 처음 세워진 질자좌의 극장주나 폐관 이유 등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일본인 거류지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흥행이 부진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욱관은 기석식(奇蓆式) 연극 공연장이었으나 활동사진 상영 시설을 확충하고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와 천연색활동사진주식회사와 영화공급 계약을 맺은 후 1914312일부터 연중무휴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욱관은 부산에서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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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전 일본 고베(神戶)시에서 열린 깅키(近畿)지방 <재일조선학생 예술경연대회>에서 발표된 <장고무>입니다. <아마가사키(尼崎)조선학교>의 무용부 학생이 이 <장고무> 발표로 금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고무> 혹은 <장구춤>은 1937년 2월4일부터 6일까지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 공연에서 초연되었고, 2월14-15일의 교토공연에서 재연된 작품입니다. 1939년 1월31일 <파리 살플레옐> 공연과 2월6일의 <브뤼셀 팔레드 보자르>공연에서는 <기생무>라는 제목으로 상연되기도 했습니다. 배운성 화백의 목판화로도 제작되었던 바로 그 작품이지요.

 

 

그 <장구춤>이 8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재일 조선학교의 어린 무용수들에 의해 공연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한 무용 작품이 80년 넘도록 계속 공연되고 있다는 것이... 게다가 이 학생들이 지금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최승희 선생이 창안하신 조선무용을 이어간다면, 1백년이고 2백년이고 계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진짜 고마운 일입니다.

 

 

4차 <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1인1만원 이상의 후원으로 우리가 보내는 <무용신>은 이처럼 장한 학생들에게 작은 기쁨과 큰 보람을 줄 수 있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카카오뱅크: 7979-20-34510 우리학교 후원모임 아이(이인형)

 

 

한국<팀아이>: 조성무(회장, 문의: 010-5037-1244), 정회선, 황웅길(고문), 강충호, 권홍우, 이인형, 이원영, 정철훈, 조정희. 그리고 강욱천, 최명철 선생께서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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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朝鮮学校運動場ですれって質問した教員でした道具箱ぶのでだとっていましたが運動会づくとみんなが練習準備んだのです

 

在日朝鮮学校において毎年運動会非常重要行事です生徒教職員父兄まる行事だからです学校のバザーや展示会音楽会種目別体育競技なども学校構成員たちがまる行事ではありましたが年例運動会こそ父母めて全学校構成員一堂まる最大行事です

 

このような学校運動会70年代まで韓国でもんだったようですまたその地方さな学校命脈いてきたようですがある時点から韓国では挙校的年例運動会姿したのですしかし在日朝鮮学校ではそれが伝統としてまでいています

 

2019年9月末、筆者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を訪問しました。 学生たちが体操服姿で運動場で年次運動会の練習を準備していました。

 

銀閣寺近くの喫茶店でコーヒーをみながら時間十二時半頃また京都朝鮮学校きました正門るとすでに学生たちが運動場まっていました昼食ませてから運動会練習までまだ30ほど時間があったのでみんな自由運動場いたりをしたりしていました

 

運動場号令台とそのでは教員らしき大人たちがあわただしくあれこれ準備をしていましたすでにおわしたなじみの教員してまたってきたとげるとその教員はすぐに女性教員一人へおれしましたたちは挨拶わしました

 

舞踊部指導教員はユン·ギョンソン先生いというよりいとうべき年輩でした韓国式でいえば師範大学えて最初学校赴任されたのような印象でした丁寧挨拶をしこれまでってきた崔承喜(チェ·スンヒ)研究について簡単紹介しましたそして朝鮮学校舞踊部活動作品についてえていただけないかと丁寧においしました

 

ユン·ギョンソン教員いけれど気品があって意志力じられる表情でしたをしている途中何人かの学生たちがりすがりに挨拶をしたりづいてきてをかけたりしたのですがそのたびにユン·ギョンソン教員やかで権威ある身振りや言葉遣いで学生たちから挨拶けたり指示をしましたいわばかのカリスマをっているようでした

 

京都朝鮮中高級学校の生徒たちが2019年の運動会を練習している場面。

 

ユン·ギョンソン教員崔承喜先生京都でも何度公演をしたことがあるという事実いたようでしたそして崔承喜先生公演資料調べているうちに京都朝鮮学校にまでったという事実にも興味ったようでした

 

前日までに京都市立図書館つけた資料によると崔承喜先生終戦前まで京都なくとも5公演いました1935118京都朝日会館公演初公演その19361131937127京都宝塚劇場194136京都朝日会館朝鮮舞踊上演されましたまた一部記録では19431にも関西公演ったとありますのでおそらくここに京都公演まれているはずです

 

このようなをすべておきになったユン·ギョンソン教員崔承喜先生朝鮮学校舞踊部する関心一度きりの関係常軌したものではないことをご存知のようでしたはちょっとってくれとった校長先生れてきました

 

年輩える校長先生謹厳姿でしたがるい表情でした再度挨拶わしたはユン·ギョンソン教員にした説明要約してびおしましたしかしもなく運動会練習まる予定でしたので継続してえないとおえになったのか校長先生からご提案いただきました

 

10月末大阪<中央芸術競演大會>かれますそこにると趙正熙先生朝鮮舞踊直接見ることができるはずです言葉うよりそのがはるかにいい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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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조선학교 운동장에서 마주쳐 질문을 드렸던 분도 알고 보니 교원이셨습니다. 연장 상자를 옮기시기에 일꾼일 줄 알았지만, 운동회가 임박하자 모두가 연습 준비에 뛰어든 것이지요.

 

재일 조선학교에서 연례 운동회는 아주 중요한 행사입니다. 학생과 교직원과 학부모가 모두 모이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바자나 전시회, 음악회나 종목별 체육경기 등도 학교의 구성원들이 모이는 행사이기는 했지만 연례 운동회야말로 학부모를 포함하여 전 학교 구성원이 한데 모이는 가장 큰 행사입니다.

 

이 같은 학교 운동회는 아마도 7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성행했던 것 같습니다. 또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지방의 작은 학교들에 명맥이 이어져 왔던 것 같지만, 어느 시점부터 한국에서는 거교적 연례 운동회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재일 조선학교에서는 그것이 전통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9년 9월말, 필자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생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운동장에서 연례 운동회 연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긴카쿠지(銀閣寺) 인근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기다렸다가 12시 반쯤 다시 교토조선학교로 갔습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이미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운동회 연습까지 아직 30분쯤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들 자유롭게 운동장을 거닐거나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운동장의 구령대와 그 옆의 차일 안에서는 교원으로 보이는 어른들이 분주하게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을 나눴던 낯익은 교원을 찾아서 다시 돌아왔다고 말씀을 드리자, 그 교원은 금방 여성 교원 한분을 차일 쪽으로 모셔왔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눴습니다.

 

무용부 지도교원은 윤경선 선생이셨고,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해야 할 연배이셨습니다. 한국식으로라면 사범대학을 마치고 첫 학교에 부임하신 분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저는 깍듯이 인사를 드리면서 내 소개를 했고, 그동안 해 온 최승희 연구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조선학교 무용부의 활동과 작품에 대해 배울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윤경선 교원은 젊기는 했으나 기품 있어 보였고, 얼굴도 의지력이 엿보이는 표정이었습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몇몇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거나 다가와서 말을 걸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온화한 것 같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실린 몸짓이나 말투로 학생들의 인사를 받거나 지시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카리스마를 지닌 것 같았습니다.

 

교토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이 2019년 운동회를 연습하고 있는 장면.

 

윤경선 교원은 최승희 선생이 교토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을 하셨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최승희 선생의 공연 자료를 조사하다가 교토조선학교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도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전날까지 교토시립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에 따르면 최승희 선생은 해방 전까지 교토에서 적어도 5회의 공연을 가졌습니다. 1935118일의 교토 아사히 회관 공연이 첫 공연이었고, 그 뒤로도 1936113일과 1937127일 교토 다카라즈카극장, 194136일 교토 아사히 회관에서 조선무용을 공연했습니다. 또 일부 기록에는 19431월에도 간사이 공연을 가졌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마도 여기에 교토 공연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 들으신 윤경선 교원은 내가 가진 최승희 선생과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일회적이거나 범상하지 않은 것을 아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잠깐 기다려달라고 말한 후 교장 선생님을 모셔왔습니다.

 

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교장선생님은 다소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명랑한 표정이셨습니다. 재차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윤경선 교원에게 했던 설명을 요약해서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곧 운동회 연습이 시작될 예정이었으므로 마냥 대화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교장 선생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

 

“10월말 오사카에서 <중앙예술경연대회>가 열립니다. 거기에 오시면 조선무용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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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一緒<舞踊靴キャンペーン>めたのは20202ですが淵源4月前20199月末にさかのぼります当時私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日本公演調べていました

 

20185からスタートした日本調査1年半続北海道釧路から沖縄那覇まで日本国内42都市訪問しました崔承喜先生公演われた場所です都市ごとに府立県立市立図書館記録保管所新聞社博物館調公演われた劇場見学しました

 

日本調査中朝鮮学校めてしたのは京都でした20199京都市立図書館調べていたら友人から京都素敵なおがあるからぜひてくださいわれました銀閣寺でしたかでいていてよかったです

 

京都東山近くの銀閣寺の隣に位置する京都朝鮮中高級学校正門

 

銀閣寺周辺小川沿いにられた遊歩道、「哲学名付けられたのはちょっと突拍子もありませんが遊歩道そのものはしいです9月末でしたので遊歩道沿いにえられたはまだ々としていましたが紅葉満開になると壮観ですね

 

実際<哲学>案内板ではこの紅葉雪景色としてしいと紹介されています案内板日本語英語中国語一緒韓国語説明えられたのはいいんですがただ翻訳りがありましたこの1986<日本100>ばれたという説明ですが韓国語説明には<日本100>間違って翻訳されています関心のある当局連絡して修正するようにしていただいてもいません^^

 

世界遺産登録されたおだけあって銀閣寺はきれいでいた管理がなされていましたマニキュアがよくできたのように清潔じでしたしかし朝早入場したにもかかわらず団体観覧学生くて篆刻庭園より裏山散策路だけ見物してなければいけませんでした

 

銀閣寺近くの川辺に設けられた遊歩道<哲学の道>、なぜそのような名前が付けられたのかは分かりませんが、遊歩道はとても良い場所です。

 

ところで銀閣寺入口あたりにはるときにかけた京都朝鮮中高級学校進入路という標識つけました好奇心られて銀閣寺左手にあるってきました左右鬱蒼としたはセメント舗装道沿ってがれば学校正門てきました

 

正門両側には京都朝鮮中高級学校とハングルと漢字かれていました日本調査期間漢字仮名だけせっかくハングルをしかったですしかも両側かれる鉄門中央にはサンペンとばれる校標けられていました

 

ペンとハンマーがになって三角形配列されたサムペンのマークは1948東京朝鮮学校校標採択されて以来日本全国朝鮮学校まったといわれていますペンとつになったものはきながら勉強しようという意味3配列したものは韓国北朝鮮在日韓国人のために3ずつきながら勉強しようという意味だという説明けたようです

 

京都朝鮮中高級学校正門に付けられたサンペン校標。 ペンと槌が三つずつ配列されているのは"働きながら勉強"するとしても、南北と在日韓国人のために3倍も頑張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意味だといいます。

 

正門いていて運動場いていました授業時間でしたどうしようしばらくえてからわれるまで校庭教師見学しましたそのまますのは残念だったからです運動場横切って本館付属建物んでてられた校舎歳月がありましたが清潔掃除されて整理されていました

 

付属建物掲示板<2018427日板門店宣言>らせる写真掲示されていてきました文在寅(ムン·ジェイン)大統領金正恩キム·ジョンウン総書記握手する場面ってげる場面でしたテレビ画面感激がりながらしみをじました

 

ハングルで掲示された掲示物みながら校舎内部をもっとりたかったのですが、「それは礼儀正しくないだろう?」運動場りました運動場には学校名前かれた遮日てられていたがちょうど道具箱ってぎるをつかまえて韓国からたのに舞踊部指導教師においできますかね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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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형 선생과 함께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20202월이지만, 연원은 넉 달 전, 20199월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최승희 선생의 일본공연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20185월부터 시작한 일본 조사는 1년 반 계속되었고 홋카이도 쿠시로(釧路)에서 오키나와 나하(那覇)까지 일본 내 42개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물론 모두 최승희 선생의 공연이 열렸던 곳입니다. 가는 도시마다 부립, 현립, 시립 도서관과 기록보관소, 신문사와 박물관을 조사했고, 공연이 열렸던 극장과 공회당들을 답사했습니다.

 

일본 조사 중에 조선학교를 처음 접한 곳이 교토(京都)에서였습니다. 20199월 교토시립도서관을 조사하던 중, 친구 한 명이 교토에 멋진 사찰이 하나 있으니까 꼭 구경하고 와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긴카쿠지(銀閣寺)였습니다. 고즈넉하고 차분해서 좋더군요.

 

 

교토 히가시야마 인근 은각사 옆에 위치한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

긴카쿠지 주변에 개울 따라 만들어진 산책길에 철학의 길(哲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약간 생뚱맞지만 산책로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9월말이었으므로 산책길을 따라 심어진 벚나무 잎은 아직 푸르렀지만, 가을 단풍이 들거나 봄에 벚꽃이 만발하면 장관이겠더군요.

 

실제로 <철학의길> 안내판에는 이 길이 봄의 사쿠라, 여름 반딧불, 가을 단풍, 겨울 설경으로 아름답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내판에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 설명이 곁들여진 것은 좋은데, 다만, 번역에 잘못된 것이 있더군요. 이 길이 1986년에 <일본의 길 100>에 뽑혔다는 설명인데, 한국어 설명에는 <일본의 다리 100>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당국에 연락해 수정하도록 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명성답게 긴카쿠지는 깨끗하고 차분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습니다. 매니큐어가 잘 된 손처럼 정갈한 느낌이었지요. 하지만 아침 일찍 입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체관람 학생들이 많아서 전각이나 정원보다 뒷산 산책로만 구경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은각사 근처 천변에 마련된 산책로 <철학의길>,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책로는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긴카쿠지 입구 근처에서 들어갈 때 보지 못했던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진입로>라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긴카쿠지 왼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갔습니다. 좌우의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니까 학교 정문이 나왔습니다.

 

정문 양쪽 기둥에는 <교토조선중고급학교>라고 한글과 한문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일본 조사기간 한자와 가나만 보다가 모처럼 한글을 보니 반갑더군요. 더구나 양쪽으로 열리는 철문 중앙에는 삼펜(サンペン이라고 불리는 교표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펜과 망치가 짝을 이루어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된 삼펜 마크는 1948년 도쿄조선학교의 교표로 채택된 이후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펜과 망치가 한데 묶인 것은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고 세 쌍을 배열한 것은 남한과 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세 배씩 일하며 공부하자는 뜻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토조선중고급학교 정문에 부착된 삼펜 교표. 펜과 망치가 세개씩 배열되어 있는 것은 "일하면서 공부"하되 남북한과 재일동포를 위해 3배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정문은 열려 있었고 널찍한 운동장은 비어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어떡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누군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교정과 교사 구경을 했습니다. 그냥 발길을 돌리기는 아쉬웠기 때문입니다. 운동장 가로질러 본관과 부속 건물로 나란히 세워진 교사는 세월의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정갈하게 청소되고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부속 건물 입구의 게시판에 <2018427일 판문점선언>을 알리는 사진이 게시되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하는 장면과 손을 맞잡고 치켜든 장면이었습니다. 티비 화면으로 보았을 때의 감격이 떠오르면서 친숙함이 밀려왔습니다.

 

한글로 게시된 다른 게시물들을 읽으면서 교사 내부를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지?’하는 생각에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습니다. 운동장에는 학교 이름이 쓰인 차일이 세워져 있었는데, 마침 연장 상자를 들고 지나가는 분을 붙잡고 한국에서 왔는데 무용부 지도교사를 만나 뵐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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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ェイスブックののポスティングをしてみたら、「舞踊靴キャンペーンめたのは2020221でし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各自のフェイスブックといくつかのグループトークにけをめました李仁珩先生当時のポスティングをんでみると、「在日朝鮮学校神戸朝高卒業式参観しますが舞踊部学生たちにバレーシューズをプレゼントしたいのでのあるたちは同参してくださいとあります

 

神戸朝校卒業式出席できたのは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めのおかげでした伊丹みながら関西写真家としていている鄭世和先生朝鮮舞踊りたいなら朝鮮学校について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朝鮮学校主要行事参加するようにめましたその15かれた神戸朝高吹奏楽部新年音楽会参加したのもその勧告のおかげでした

 

2020年1月5日、神戸市東灘区の区民会館で開かれた第21回神戸朝高吹奏楽部新年音楽会

 

神戸朝高吹奏楽部毎年新年音楽会きます校内行事ではなく一般人対象にした対外行事です出席した演奏会神戸市東灘区区民センターでかれ出席した観客在日韓国人だけでなく日本人観客かったです

 

はどうかかりませんが7~80年代には韓国にも高校がほとんど吹奏楽部設置していました。 「バンドとよくびました中高校部活活発日本同様です日本高校吹奏楽部はずっと体系的参加人数演奏力いので校内行事だけでなく対外行事をよくっているようですユーチューブに各地域主要高校吹奏楽部街頭行進演奏をしている動画いです

 

神戸朝高吹奏楽部街頭行進ではなさそうですが毎年新年音楽会いています2020演奏会21ということで神戸市のメジャーな音楽行事として定着したのですね演奏曲にも既成曲だけでなく創作曲まれており演奏実力水準がかなりかったです

 

日本全国高校生コンクールで3になったという3年生のプロット独奏があり<希望>という木管重奏印象的でしたしかしよりも自分感動えてくれたのは、「ホン()オル」、「思鄕などの合奏曲でした

 

この演奏会プログラムでは1999年神戸朝高創立50周年記念してノク()という創作され10年後2009にはオル」、そしてこの演奏初演されたいずれも異国しい環境においてもがれてきたその価値決心世界中りたい気持ちで創作されたとなっていました

 

2020年1月5日、神戸操高吹奏楽部の新年音楽会で会った鄭世和先生(中央)と筆者(右)。

 

レパートリーは全般的深刻でしたが高校生のイベントだけにとても自由でした司会者女学生があらかじめ準備した言葉思慮深いながらもウィットがあり演奏合間にコントを演出したりもしました最後には<アリラン>一緒順番もありますが韓国語らない日本人観客のために発音解釈映像せてくれました

 

当時ほとんどすべての関心朝鮮舞踊いていたにも印象的順序がありました吹奏楽演奏りが調和したいつでもらはいつでもらは)」というでしたが神戸朝高舞踊部学生たちが賛助出演した作品として記憶されています

 

2月前中央芸術競演大会参観してこの日神戸朝高吹奏楽演奏会鑑賞した鄭世和先生がもうつのイベントを推薦しました3われる朝鮮学校卒業式出席してみるようにとのことでしたそうして鄭世和先生母校である神戸朝高卒業式推薦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が便宜りやすかったからだといます

 

この卒業式にも参観すると約束してりにめて舞踊靴プレゼントのアイデアがかびました。 「日本朝鮮人として一生懸命きて勉強する学生たちのためにかをしたいといましたソウルにっててからそんないを李仁珩鄭世和先生かちいながらやがて神戸朝高舞踊部舞踊靴をプレゼントする計画てるに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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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의 옛 포스팅을 찾아보니 <무용신 캠페인>을 처음 시작한 날은 2020221일이었습니다. 이인형 선생과 저는 각자의 페이스북과 몇몇 단톡방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인형 선생의 당시 포스팅을 찾아 읽어보니 재일 조선학교 고베조고 졸업식을 참관하는데 무용부 학생들에게 발레슈즈를 선물하고자 하니 뜻있는 분들은 동참해 달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베조고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은 정세화 선생의 권고 덕분이었습니다. 이타미에 거주하시면서 간사이 지역에서 사진가로 일하시는 정세화 선생께서는 조선무용을 알고 싶다면 조선학교를 알아야 하니, 조선학교의 주요 행사에 참석해 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해 15일 열렸던 고베조고 취주악부의 신년음악회에 참석한 것도 그 권고 덕분이었습니다.

 

2020년 1월5일, 고베시 히가시나다구의 구민회관에서 열린 제21회 고베조고 취주악부 신년 음악회

 

고베조고 취주악부는 매년 신년음악회를 엽니다. 교내 행사가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대외행사입니다. 내가 참석한 연주회도 고베시 히가시나다구(東灘区)의 구민센터에서 열렸고, 참석 관객은 재일동포뿐 아니라 일본인 관객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7-8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고등학교들이 대부분 취주악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흔히 밴드부라고 불렀지요. 중고등학교의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고등학교의 취주악부들은 훨씬 체계적이고 참가인원도 많고 연주 실력도 좋아서, 교내 행사뿐 아니라 대외 행사를 자주 갖는 것 같습니다. 유튜브에 각 지역 주요 고등학교 취주악부가 거리 행진 연주하는 동영상이 많습니다.

 

고베조고 취주악부는 거리 행진 연주를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매년 신년음악회를 엽니다. 2020년의 연주회가 제21회라고 하니까 고베시의 주요 음악 행사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지요. 연주곡에서도 기성곡뿐 아니라 창작곡이 포함되어 있었고, 연주 실력도 수준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일본 전국 고교생 콩쿨에서 3위를 했다는 3학년생의 플롯 독주가 있었고, <희망의 날개>라는 목관중주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감동을 주었던 것은 <><>, <사향> 등의 합주곡이었습니다.

 

이날 연주회 프로그램의 설명을 보면 1999년 고베조고 창립50주년을 기념해 <>이라는 곡이 창작되었고, 10년 후인 2009년에는 <>, 그리고 이날 연주에서 초연된 <>은 모두 이역 땅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어온 넋과 얼, 그 가치와 힘과 결심을 온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창작된 곡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2020년 1월5일, 고베조고 취주악부 신년음악회에서 만난 정세화 선생(가운데)과 필자(오른쪽).

 

레퍼토리는 전반적으로 심각했지만 고등학생들의 행사였던 만큼 형식은 퍽 자유로웠습니다. 사회자 여학생이 미리 준비한 멘트는 사려 깊으면서도 위트가 있었고, 연주 중간 중간에 상황극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맨 마지막 순서로 <아리랑>을 함께 부르는 순서도 마련됐는데, 한국말을 모르는 일본인 관객들을 위해 발음과 해석을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관심이 조선무용에 기울어져 있던 내게도 인상적인 순서가 있었습니다. 취주악 연주와 노래와 춤이 어우러졌던 <언제라도 우리는(いつだつてらは)>이라는 순서였는데,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이 찬조 출연했던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두 달 전에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했고, 이날 고베조고의 취주악 연주회를 감상한 나에게, 정세화 선생께서 한 가지 행사를 더 추천하셨습니다. 3월에 있을 조선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세화 선생의 모교인 고베조고 졸업식을 추천하셨는데 아무래도 편의를 보아 주시기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졸업식에도 참관하기로 약속하고 돌아오는 길에 처음 무용신 선물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일본땅에서 조선인으로 열심히 살아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그런 생각을 이인형, 정세화 선생과 나누면서, 마침내 고베조고 무용부에 무용신을 선물하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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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四回目<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進行中です3までの3キャンペーンをじて183個人後援者5つの後援団体支援により1,288万圓寄付まり506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指導敎員々に舞踊靴されました

 

4キャンペーンは3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じても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てもらえなかった13在日朝鮮初中級学校76中学生舞踊部員13舞踊部指導敎員追加舞踊靴伝達するためです舞踊靴わりでれていた学校のように把握されています

 

東京朝鮮第1初中級学校以下いずれも朝鮮初中級学校13)、東京第45)、東京第55)、西東京第112)、西東京第21)、埼玉12)、千葉1)、群馬6)、東北1)、長野8)、静岡1)、四日市2)、岡山6各舞踊部指導敎員1389)。

 

韓国<チームアイ>の李仁珩(イ·インヒョン)先生が2020年3月、神戸朝鮮高級学校舞踊部の教員に舞踊の神様をお届けする姿です。

 

地域的東京とその近隣地域初中級学校いですが大部分小規模学校初級学校=小学校中級学校=中学校統合されている学校です3回目のキャンペーンでは舞踊靴キプレゼントの対象中学生以上めていたのですが小学校併設されている中学校舞踊部生徒除外されていたといます学校小学生違和感えることを心配して善処されたのだといます

 

それで今回4キャンペーンでは中学生からけていた生徒たちに舞踊靴すぐに小学校舞踊部にも舞踊靴るキャンペーンをげ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朝鮮学校では小学生たちが4年生から舞踊部サークルにって活動できるというから次回舞踊靴プレゼント対象4-6年生になるべきではないかといます

 

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まったこんなにそしてこれほどの規模発展するとはいませんでした舞踊靴キャンペーンがまったのは20203でしたがその李仁珩先生訪問した神戸朝鮮高級学校舞踊部生徒たちにだけプレゼントするつもりでしたその仕事きくなり関西東京朝鮮学校になり高校生だけでなく中学生対象まれました

 

中学生めることにしたのは朝鮮学校には·高級学校つまり中学校高等学校併設されていた学校かったからです学校中学生いて高校舞踊部員にだけプレゼントするのがずかしくて自然でないようにえたからです

 

第1次舞踊神キャンペーンを成功的に終えた後、日本<チームアイ>の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が感謝の気持ちとして韓国<チームアイ>の李仁珩(イ·インヒョン)先生に朝鮮学校学生たちの文集<花房>をプレゼントしました。

 

ところで今回はそれと問題中学校小学校併設されている初中級学校発生したのですねこの問題解決方法舞踊部であれば小学生むすべての舞踊部員教員々に韓国同胞たちが舞踊靴をプレゼントするしかないといます

 

小学生から舞踊部活動する学生では朝鮮学校卒業まで10ずつ舞踊活動をするのが普通だといますそれなら朝鮮舞踊第一歩から韓国同胞がプレゼントした舞踊靴いてまる姿るのは非常意味があ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4次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うにった理由とこれからのキャンペーンの方向まで概略的整理してみましたがもちろんこれは一人二人でで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在日朝鮮学校舞踊靴プロジェクトのためにすでにくの々が苦労しています

 

韓国では李仁珩先生偶然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めましたが2019年末には10のボランティアが<チームアイ>という団体構成舞踊靴運動けています日本でも<チームアイ>構成され朝鮮学校をはじめとする日本内外国人学生機会均等のために努力しています

 

日本<チームアイ>には在日韓国人だけでなく日本人先生たちも加入しており朝鮮学校困難理解改善するために努力しています最近韓日政府間市民社会間不便さがしていますが韓国日本<チームアイ>会員たちは、「しい仕事をすること連帯げています関心のある参加がもっとかったらいい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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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 네 번째 <무용신> 캠페인이 진행 중입니다. 지난 3월까지 3차 캠페인을 통해 183명의 개인 후원자와 5개 후원 단체의 도움으로 1,288만원의 성금이 모아져, 506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과 지도교사 분들에게 무용신이 전달되었습니다.

 

4차 캠페인은 세 번의 무용신 캠페인을 통해서도 무용신을 선물 받지 못한 13개 재일조선초중급학교 76명의 중학생 무용부원들과 13분의 무용부 지도교사들에게 추가로 무용신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용신 전달에서 누락되었던 학교는 다음과 같이 파악되었습니다.

 

도쿄조선제1초중급학교(이하 모두 조선초중급학교, 13), 도쿄제4(5), 도쿄제5(5), 니시도쿄제1(12), 니시도쿄제2(1), 사이타마(12), 치바(1), 군마(6), 도호쿠(1), 나가노(8), 시즈오카(1), 욕가이치(2), 오카야마(6)와 각 무용부 지도교사 13. (89)

 

한국 <팀아이>의 이인형 선생께서 2020년 3월, 고베조선고급학교 무용부 교원에게 무용신을 전달하는 모습입니다.

 

지역적으로 도쿄와 그 인근지역의 초중급학교가 많은데 대부분 소규모 학교이고 초급학교(=초등학교)와 중급학교(=중학교)가 통합되어 있는 학교들입니다. 아마도 3차 캠페인까지 무용신 선물 대상을 중학생 이상으로 정했는데, 초등학교와 병설된 중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이 제외되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학교의 초등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줄까봐 선처된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이번 4차 캠페인에서는 중학생 중에서 누락되었던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먼저 전달하고, 곧이어 신속하게 초등학교 무용부에도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학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이 4학년부터 무용부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하니까, 다음번 무용신 선물 대상은 4-6학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용신 캠페인이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그리고 이정도 규모로 발전될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용신 캠페인이 시작된 것은 20203월이었는데, 그때는 이인형 선생과 제가 방문했던 고베조선고급학교의 무용부 학생들에게만 선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이후 일이 조금씩 커지면서 간사이 지역과 도쿄 지역의 조선학교로 확대되었고, 고등학생뿐 아니라 중학생까지도 대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중학생을 포함하기로 했던 것은 조선학교 중에 중고급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병설된 학교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학교의 중학생들을 빼고 고등학교 무용부원들에게만 선물하는 것이 민망하고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1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친후, 일본 <팀아이>의 정세화 선생께서 감사의 표시로 한국 <팀아이>의 이인형 선생에게 조선학교 학생들의 글모음집 <꽃송이>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와 똑같은 문제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병설된 초중급학교에서 발생한 것이지요.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은 무용부이기만 하면 초등학생을 포함한 모든 무용부원 학생들과 교사분들에게 한국의 무용신을 선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초등학생 때부터 무용부에서 활동하는 학생들 중에는 조선학교를 다니는 한 졸업할 때까지 10년씩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무용의 첫발걸음부터 한국 동포들이 선물한 무용신을 신고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차 무용신 캠페인을 벌이게 된 이유와 앞으로의 캠페인 방향까지 개략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물론 이는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재일 조선학교 무용신 프로젝트를 위해서 이미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계십니다.

 

한국에서는 이인형 선생과 제가 우연히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2019년 말에는 10명의 자원자들이 <팀아이>라는 단체를 구성, 무용신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팀아이>가 구성되어 조선학교를 비롯한 일본 내 외국인 학생들의 기회균등을 위해 노력합니다.

 

일본 <팀아이>에는 재일동포들뿐 아니라 일본인 선생님들도 다수 가입해 계시며, 조선학교가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에 애쓰고 계십니다. 요즘 한일 정부간은 물론 시민사회 사이에도 불편함이 증가하고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 회원들은 옳은 일 하기연대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의 참여가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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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쁜 대선 레이스가 진행되고 있지만, 시간을 재촉하는 <무용신> 문제가 생겨서 4차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월말까지 여러분의 후원으로 모두 1천2백88만원의 성금을 모아 506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교원들에게 무용신을 보냈습니다만... 89명의 여중생+교사가 명단에서 누락되었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요즘 일본의 우리학교 학생들도 다 sns를 할텐데, 여기저기 친구들이 다 한국에서 온 무용신 받은 소식을 보면서도 자신이 누락된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안타깝습니다.ㅠ.ㅠ

 


그래서 부랴부랴 4차 무용신 캠페인을 시작한 겁니다. 무용신 캠페인을 계속해 온 한국의 <팀아이>는 새로 조성무 회장을 모셨습니다만, 조성무 회장께서 직접 웹자보도 만드시고 이 일에 매우 적극적이신 것도, 그런 미안함과 안타까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른 시간 안에 13개 학교 89명의 무용부 학생/교사 분들에게 무용신이 마저 전달되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11월3일 도쿄에서 개최되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에 맞춰 무용신이 전달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이 성공하도록 힘을 보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인1만원 이상의 후원으로 지난 반 년 동안 섭섭했을 어린 마음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카오뱅크: 7979-20-34510 우리학교 후원모임 아이(이인형)

 

한국<팀아이>: 조성무(회장, 문의: 010-5037-1244), 정회선, 황웅길(고문), 강충호, 권홍우, 이인형, 이원영, 정철훈, 조정희 (20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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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1926328)><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서술을 실마리로 국제관의 주소가 대창정 4정목(=오늘날의 중앙동4) 40번지이며, 옛 부산역(=오늘날 무역회관)의 중앙대로 건너 맞은편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국제관의 주소가 부산부 안본정(岸本町) 5번지(지금의 중구 중앙동)”이라고 서술했다. 또 하나의 국제관 극장의 주소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안본정 5번지가 오늘날의 중구 중앙동이라고 보충서술함으로써 이 주소가 대창정 4정목 40번지와 어떤 관계인지의 의문을 일으켰다. 국제관이 안본정에서 개관했다가 대창정으로 이전했거나, 혹은 동리 이름이 안본정에서 대창정으로 바뀌었던 것일까?

 

국제관의 위치에 대한 엇갈린 서술들을 정리하기 위해 우선 부산역부터 조사했다. 국제관에 관한 거의 모든 신문기사가 부산역전의 국제관이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0년에 완공된 부산역. 왼쪽 날개 인근에 철도호텔(1912)과 공회당(1928)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1910-1911년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제관의 대창정 4정목의 주소가 옛 부산역과 연관되어 서술되어 있었던 것처럼, 안본정 5번지의 주소는 부산일보사 사옥의 위치와 연관되어 있었다. 1929328일의 <매일신보>의 국제관 화재사건 기사에 따르면 이 화재로 국제관이 전소하고 인근의 이시카와(石川)정미소 창고 외에 12호를 반소하였다고 보도했다. 또 기사는 인근 부산일보사 사옥이 있어 화재가 옮겨올 것을 대비해 대피소동을 벌였다는 서술도 있다.

 

<부산일보(釜山日報)>19052월에 부산 변천정(辨天町, 현 중구 광복동 일대)에서 <조선일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시사신보>로 제호를 바꾸었다가 190710월부터 <부산일보>로 개칭했다. 당시 사장은 아쿠타가와 타다시(芥川正)였고, 1915년 현재 자본금은 4만원, 소재지는 변천정 3-3번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부산일보>191921일부터 개인 경영을 벗어나 자본금 25만원의 주식회사로 전환했고, 이때 안본정(岸本町, 현 중구 중앙동)에 사옥을 신축하여 19204월에 준공하였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 1면에 나타난 주소는 부산부 안본정 1번지로 되어 있었다.

 

1919년에 작성된 < 신정명강계입부산시가전도 ( 新町名疆界入釜山市街全圖 )>에 나타난 부산역과 부산일보사 위치. 안본정(녹색 동그라미)의 어느 곳엔가 <국제관> 극장이 설립되었는데, 이 지도가 작성될 당시에는 아직 극장이 들어서지 않았다.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국제관 주소가 부산부 안본정(岸本町) 5번지라고 했으므로 국제관과 부산일보사 사옥은 두어 집 건너 도로의 같은 쪽에 면해 있었고, 국제관에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불이 옮겨 붙을 위험에 처했던 것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일보사 위치는 2장의 고지도에서 확인됐다. 하나는 1919년에 작성된 <신정명강계입부산시가전도(新町名疆界入釜山市街全圖)>였다. 이 지도에는 부산역이 부산정거장으로 표기되어 있고 길 건너편이 안본정(岸本町), 안본정 건너편이 중정(), 안본정과 중정의 남쪽이 대창정(大倉町)이었다. 이들은 모두 신축 매립지에 새로 만들어진 토지이며, 신매립지의 서쪽 건너편은 본정(本町) 4,5정목이었다.

 

이 지도에서 부산일보사의 사옥은 부산정거장 맞은편이었고, 아마도 부산일보사 인근의 안본정은 다른 시설물이 들어서지 않은 공터처럼 되어 있었다. 국제관 극장은 19208월에 개관했으므로, 1919년에 작성된 <싱정명 강계입 부산시가전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1930년 이후에 작성된 <대일본직업별명세도>에 나타난 부산역과 부산공회당, 부산일보사 사옥과 국제관 극장 위치로 추정되는 지역.

 

또 한 장의 지도는 <대일본직업별명세도>로 작성연대가 미상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부산역 앞 광장에 <부산공회당>이 표시되어 있다. 부산공회당의 주소는 대창정 4정목 89-1번지이었으므로 부산역 주소인 대창정 4정목 87-7”의 바로 옆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국제관>이 표시되지 않았다. 부산공회당 개관이 19283월이고 국제관의 화재 소실이 192912월이므로 이 지도는 1930년 이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지도에 국제관은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부산역과 부산일보사 사옥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그 주소인 안본정 5번지는 후일 안본정이 대창정 4정목으로 개칭되고 번지수도 40번지로 바뀐 것임을 알 수 있다. , 1929년말의 <대창정 4정목 40번지>는 그보다 10년쯤 전인 1919년의 주소 <안본정 5번지>와 같은 주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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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14일의 <경성일보>는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 1880-1966)113일 부산에 도착해서 4일 국제관(國際館)극장에서 공연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는 이시이 바쿠(石井漠, 1887-1962)327일과 28일 국제관 극장에서 공연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일본 근대무용의 두 선구자들의 부산공연은 국제관에서 열렸다는 말이다.

 

국제관은 어떤 극장이었을까? <부산역사문화대전>은 영화상영관 국제관이 “19208월 부산역 앞(지금의 중앙동)”에 개관되었다고 서술했고,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블로그에는 1920822일에 개관했다가 1929227일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정리했다.

 

국제관 화재사건은 1929228일의 <경성일보><매일신보>, <부산일보> 등의 기사로 확인되지만, 개관일에 대해서는 자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일제강점기의 부산 부사(府史)나 오늘날의 시사(市史)를 조사하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국제관 극장이 있던 부산부 대창정 거리 풍경 (사진은 1933년경 촬영된 그림엽서)

 

특히 불분명한 것은 국제관의 소재지이다. <부산역사문화대전>은 국제관을 “1920년대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있던 영화관이라고 소개하면서 “19208월에 부산역 앞(현 중앙동)에 개관했다고 서술했다. 문제는 오늘날의 부산역은 중앙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앙동은 부산 중구의 동쪽에 위치해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롯데백화점부터 북쪽으로 영주고가교까지 이어지는 해안지역으로 중앙대로와 해관로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북쪽으로 영주2, 서쪽으로는 동광동, 부평동, 남포동에 인접해 있다. 서북쪽에는 복병산이 있고, 서남쪽에는 용두산이 있다. 남쪽과 동쪽은 남해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산역은 이 중앙동 포함되지 않고 중앙동 북쪽의 초량동에 속해 있다. 그런데 부산역 앞(현 중앙동)”이라고한 <부산역사문화대전>의 서술은 어찌된 것일까?

 

결론은 부산역이 이전했기 때문이다. 중앙동은 본래 초량 왜관 남쪽의 해변 지역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과거의 초량 왜관이 폐쇄되고 지금의 중앙동 지역이 일본인 전관(專管)거류지가 되었다.

 

일본인 인구가 늘면서 1880년 복병산과 용두산 사이의 해안지역에 북빈정이 신설되었고, 1908-1913년의 북빈정의 매축 공사와 영선산의 착평 공사로 대규모 매축지가 조성되었다. 1908년 경부선 기점이 초량역(현 부산진 역사 자리)에서 부산역(중앙동 87-7번지에 임시 역사)으로 옮겨졌고, 1910년에는 부산역사와 제1부두가 완공되면서 경부선 철도가 부산역을 거쳐 제1부두(=부산잔교역)까지 연결되었다.

 

1908년경부터 북빈정에 새로 생기는 매립지에 좌등정(左藤町), 매립신정(埋立新町), 대창정(大倉町), 안본정(岸本町), 중정(中町), 고도정(高島町), 경부정(京釜町)등이 생겼다가, 이후 대창정(大倉町) 1·2·3·4정목과 대교통(大橋通) 1·2·3정목으로 통합 개칭되었다.

 

오늘날의 네이버 지도에 표시한 옛 부산역(대창정4정목=중앙동4가 87-7번지)과 국제관 극장(대창정4정목=중앙동4가 40번지)

 

해방 후인 1947년 일본식 동명을 한국식 동명으로 변경하면서 대창정 1·2·3·4정목은 중앙동 1·2·3·4가로, 대교통 1·2·3정목은 대교동 1·2·3가로 개칭되었다. 1982년 대교동 1·2·3가가 중앙동 5·6·7가로 개칭되고, 부산이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한 1995년 이 지역은 중앙동 1·2·3·4·5·6·7가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같은 지명 개칭의 역사를 고려하면 1920년대의 대창정 4정목은 오늘날의 중앙동 4가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의 부산역 주소 대창정 4정목 87-7번지는 오늘날의 중앙동 487-7번지로 지금은 부산 무역회관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다. 1929228일의 <매일신보>는 국제관 극장의 주소가 대창정(大倉町) 4정목 40번지로 밝혔으므로, 당시의 부산역과 국제관 극장은 가까운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 1920년대의 대창정 4정목 40번지는 오늘날의 중앙동 440번지에 해당하므로 이를 오늘날의 지도에서 찾아보면 오늘날의 중앙대로와 부산전철1호선 중앙역를 사이에 두고 옛 부산역은 그 동쪽에, 국제관 극장은 그 서쪽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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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마 시즈에의 1925114일 부산 공연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7-8일의 경성공연 못지않은 성황을 이룬 것은 확실해 보인다. 1925114일의 <매일신보>조선인과 일본인을 물론하고 인기가 물 끓듯 하여 멀리 동래(東萊) 울산(蔚山) 방면으로부터 음악 동호자와 예기(藝妓)의 단체 총견의 신청이 답지하였다고 보도했다.

 

같은 기사의 보도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 일행은 “3일 아침 부관연락선으로 부산에 상륙한 이후 후원사인 경성일보-매일신보사의 지국원들, 부산의 악단 및 음악 동호자들, 그리고 예기(藝妓) 단체의 환영을 받았다. 114일의 <경성일보>도 후지마 시즈에가 “(3) 정오부터 후원회인 부산 죽우회(竹友會)와 권번 예기 연합회의 발기로 카모카와(加茂川)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참석했고, “오후에는 부산 악단 유지의 환영연에 참례했다고 전했다.

 

후지마 시즈에 일행은 4일 아침 부산부내를 자동차로 관광한 후, 그날 저녁 부산역 앞의 <국제관(國際館)> 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114일자 <매일신보>오늘밤의 국제관은 건축 이후로 처음 보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공연의 성황 소식을 전했다.

 

1925년 11월5일의 <경성일보>는 후지마 시즈에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음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일본 최고의 무용가라고 소개되었던 후지마 시즈에는 192511월의 부산 및 경성 공연 이외에도 이후 몇 차례 더 조선 공연을 단행했고, 그때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무용계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반년이나 나중에 조선에 데뷔했던 이시이 바쿠가 오히려 조선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까닭은 무엇일까?

 

후지마 시즈에와 이시이 바쿠는 둘 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들이었고, 일본의 패전 후에도 중견 및 원로로서 일본 무용계를 이끌어 나간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무용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이시이 바쿠였다. 거기에는 최승희의 역할이 컸다. 이시이 바쿠가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최승희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영향을 제외하더라도 두 사람의 무용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이시이 바쿠는 그의 자전적 수필집인 <춤추는 바보(1955)>에서 후지마 시즈에와 자신의 무용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평가했다.

 

(1). “나는 일본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제극의 연구생 시절, 돌아가신 미즈키 우타와카 스승에게 배우는 동안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창작 무용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그러나 시즈에 씨의 춤은 ... (42)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고,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3) “일본무용의 기본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일대 혁명이나 다름없, “질식해가는 일본무용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 일을 할 사람은 시즈에씨를 빼놓고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일본 전통무용을 싫어하는 이시이 바쿠도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만은 좋아한다는 언급은, 실상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이 일본 전통 무용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다만 이시이 바쿠가 관심을 갖는 것은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에 어떤 근대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근본적으로 일본 무용이며, 일본의 전통 무용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이나 내용을 근대화해 나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일본 전통 무용을 뿌리부터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근대적 신무용을 창작해 나가던 이시이 바쿠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따라서 조선인들이 이시이 바쿠의 무용과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을 나란히 접했을 때에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용에는 서구적 취향이 느껴질지언정 일본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지마 시즈에의 무용은 그것이 가진 탁월한 근대성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그것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의 무용이 근본적으로 일본 무용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후지마 시즈에가 최승희같은 조선인 제자를 얻지 못한 근본 이유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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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무용가로 부산을 방문해 공연을 가진 것은 이시이 바쿠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에 약 5개월 앞선 1925113일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가 부산을 방문한 바 있었다.

 

1925115일의 <매일신보>에 따르면 후지마 시즈에는 113일 부산에 도착, 114일밤 부산에서 공연을 가졌고, 115일 밤에 경성에 도착, 117일과 8, 경성공회당에서 2회의 공연을 가졌다.

 

후지마 시즈에의 공연은 부산과 경성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정상급 무용가가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해 공연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의 무용가들도 그를 반겼고, 그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일대 성황을 이뤘다.

 

후지마 시즈에의 경성 첫날 공연 당일인 1925117일의 <매일신보>일본의 무용계의 여왕 후지마 시즈에 여사의 일행이 경성에 도착한 후로 시내의 인기는 거의 백열화하였다고 보도했다. ‘백열화하얀 색이 될 정도로 뜨거웠다는 뜻이다.

 

 

1925년 11월3일의 <경성일보>가 보도한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의 무용 자태.

 

 

첫날 공연 상황을 보도한 1925119일의 <매일신보>경성 시중은 물론이요 멀리 인천 수원 등으로부터후지마 여사의 무용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이 개장 한 시간 전부터 공회당 부근에 사람바다를 이루었고 정각인 여섯시가 되자 장내는 이미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113일의 <매일신보>는 후지마 시즈에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었다.

 

(=후지마 시즈에)는 본시 일본에서 미인의 산지가 되는 눈의 나라 니가타(新潟)에서 태어났다. 미인은 박명이라고 처녀의 몸은 구르고 굴러서 도쿄에서 기생노릇을 하게 되었었다. 어리고 고은 그는 비록 기생노릇은 하나 살에 주린 남자의 두려운 손길에는 죽기를 한하고 넘어가지 않았으며,

 

자나 깨나 문학서류만 애독을 하다가 당시 문명이 천하에 높은 젊은 문학가 나가이 카후(永井荷風, 1879-1959)씨와 사랑의 낙원을 열었으나 그의 애닯게 기대하던 첫사랑은 얼마 아니하여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눈물을 뿌리며 나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가슴에 남은 정혈은 모조리 무용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그 길로 무용연구에 심신을 바치자 일진월보하는 그의 천재는 차차 광명을 찾게 되어 나중에는 세상의 칭찬의 표적이 되었으며, 뒤를 이어 규수화가와 청년예술가들 사이에는 그의 빛나는 무용의 천재를 영원히 북돋고자 후지카게카이(藤陰會)라는 후원회까지 세우게 되었다.”

 

 

1925년 11월10일의 <매일신보>가 보도한 후지마 시즈에의 경성 공연 무대 장면.

 

이시이 바쿠도 후지마 시즈에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그는 저서 <춤추는 바보(1955)>에서 후지마 시즈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후지마 시즈에 씨가 신무용을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우리가 제극의 연습생 시절(1911-1915)이었던 것으로도 기억한다. 그 후 후지마 시즈에는 일본 고유의 고전 무용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스승 후지마 종가와 문제를 일으켰는데, 시즈에 씨는 순순히 후지마라는 이름을 종가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후지마의 그림자를 따르기 위해 성을 후지카게(藤陰)로 바꾼 것은 당시 우리들 사이에 평판이 자자했다.”

 

내가 시즈에씨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 아주 싹싹하고 가시가 없고, 숨기는 것 없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다. 그 후, 십여 명의 무용가들과 함께 무용가 클럽이라는 사교 클럽을 만들어, 매월 한 번 긴자의 모나미(モナミ)에서 식사를 함께 했으므로, 무용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라든가 불만 등을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다. 일본무용연맹도 약 1년간의 회합 속에서 만들어졌다.”

 

어느 해 말 마루노우치()의 마플(マープル)에서 후지카게카이 20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모인 사람이 2백 명이었다. ... 시즈에 씨의 후원회도 훌륭하지만, 여자의 솜씨 하나로 오늘의 지위를 쌓아 올린 후지카게 시즈에는 실로 훌륭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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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부산공연] 1. 이시이무용단의 첫 부산공연

 

최승희는 1926327일 부산을 방문했다.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생애 첫 부산 방문이었고 이시이 무용단과 함께였다.

 

최승희는 323일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무용단의 경성공연을 관람한 후 대기실을 찾아가 이시이 바쿠에게 무용 입문을 요청했고, 25일 아침 경성역 2층 끽다점에서 최승희의 부형, 이시이 무용단, 그리고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토시오 테라다가 동석한 가운데 계약을 맺고 이시이 무용단의 일원이 되었다. 최승희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무용단 입단 3일째였다.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공연은 26일 하루였지만 부산 공연은 328일과 29일 이틀로 예정되었다. 부산 인구가 1925년 현재 11만 명으로 대구의 8만 명보다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은 경성(34)에서는 3, 인천(6)에서는 하루 동안 공연한 바 있었다. 당시 조선 제3의 도시였던 평양(9)에서는 공연을 갖지 않았다.

 

1926328일의 <부산일보(7)>는 이시이 바쿠 일행이 “27일 오후 215분에 부산본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부산역이라고 한 것은 당시에 부산역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본역을 지나 한 정거장 다음이었는데,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에 바로 승선할 수 있도록 부두 바로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1926년 3월28일의 <부산일보>에 실린 이시이 바쿠-이시이 코나미 부산공연 광고문

 

부산역에 내린 이시이무용단 일행은 우선 숙소인 오이케(大池)여관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주요 여관들이 부산역 근처에 있었던 것과는 달리 오이케 여관은 시내 번화가에 있었기 때문에 이시이 일행은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고 <부산일보>가 보도했다. 오이케여관의 당시 주소는 부산부 벤텐초 1초메 38(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138)이었다.

 

숙소에 간단히 짐을 푼 이시이 바쿠는 다시 부산역으로 나갔다. 부산역사 옆 철도호텔의 소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철도 호텔 라운지에서 가졌던 것은 다소 의외였다. 경성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경성역에 도착한 직후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조선신문 등의 신문사를 순방하며 도착 인사를 했었다.

 

공연 예술가들은 언론과의 만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의 집중 홍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사도 마찬가지이다. 이시이 바쿠 정도의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예술가가 부산을 방문한 것은 뉴스 가치가 매우 컸다. 따라서 대개는 기자들이 이시이 무용단의 숙소를 방문하거나, 혹은 이시이 무용단이 신문사를 순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기자회견을 위해 제3의 장소를 마련했다.

 

1926년 3월27일 이시이무용단은 부산정거장(오른쪽)에서 하차해 오이케여관(왼쪽)에 투숙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지도는 1919년의 부산시가전도)

 

이 기자회견 자리에 최승희가 동석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의 두 사람만 참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의 관심은 그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성에서는 최승희의 이시이무용단 입단이 큰 뉴스가 되었고, <매일신보>는 거의 한 면을 할애해서 경성역전의 이별의 장면까지 보도했지만, 그런 분위기가 부산까지 전해진 것 같지는 않다. 이시이무용단의 공연과 관련된 신문 보도에서 최승희가 언급된 것은 전혀 없었다.

 

또 기자회견이라면 부산지역의 언론사들이 모두 참여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는 <부산일보>에만 회견문이 보도되었다. 당시 부산에는 부산일보 외에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등의 지국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다른 신문들은 이시이 바쿠의 부산 도착 사실조차 보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기자회견은 <부산일보>와의 단독회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산일보>가 이시이무용단 공연의 후원사였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이 공연의 주최측이 <이시이바쿠 부산후원회>였다는 점이다. 이시이 바쿠가 부산에서 공연하거나 방문한 적이 없는데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특이한데, 아마도 이시이 바쿠의 친구나 지인들이 결성했거나, 혹은 그의 세계적 명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192212월부터 19243월까지의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았고, 특히 일본에서는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아져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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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약과 결론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형성 과정과, 그것이 유럽 순회공연 중에 어떻게 주장되었고, 현지 매체들에 의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최승희는 어린 시절과 숙명여학교 시절을 통해 자부심에 바탕을 둔 <조선인 정체성>을 형성했고, 일본 유학 기간에는 <예술가 정체성>, 조선 활동 시기에는 진취적인 <신여성 정체성>, 그리고 도쿄를 중심으로 벌인 일본 활동 시기에는 <세계일 정체성>을 내면화했다.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할 무렵 최승희의 네 가지 정체성은 유기적으로 결착되었고, “조선무용을 세계에 알리고, 자신도 정상급 예술가로 발돋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목표는 미국 공연에서는 좌절되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 반일 정서와 일제 불매운동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내 반일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최승희를 일본의 예술사절로 삼으려던 일제의 숨은 의도 때문이었다. 위험하고 미묘한 상황 속에서도 최승희는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 입국서류에 자신이 코리안임을 밝혔고, 미국민과 일제 외교당국이 부딪히는 위험 속에서도 자신의 무용이 조선무용임을 강조했다.

 

1939년 유럽 순회공연 중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일부 평전자는 미국 순회공연의 실패가 최승희와 재미 조선인 동포들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재미 조선인 단체들의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의 기사들에 따르면 재미 동포들은 최승희의 처지를 이해했고, 교민들의 요구는 협박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일제 불매운동으로부터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살려내기 위한 조언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유럽 공연에서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관철해 냈다. 프랑스에 도착한 순간부터 조선인(꼬레안느)’임을 강조했고, 파리 언론과의 인터뷰와 공연 홍보를 통해 자신은 조선인 무용가이며 자신의 작품들은 조선무용임을 주장했다.

 

최승희의 노력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어서,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거의 모든 파리의 매체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소개했다. 이는 일본 대사관의 개입 때문이었다.

 

일본 대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었고 일본인 유학생과 교민들을 동원하는 등 최승희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를 일본 예술사절로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일본 대사관의 개입으로 초기의 파리 언론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인식했다.

 

초기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의 꼬레안느 무용을 꾸준히 홍보했다. 또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과 샤이오 공연의 레퍼토리를 조선의 역사와 풍습을 종횡으로 구성해 발표했다. 입국 서류와 신문 광고를 통한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은 일제 외교공관의 개입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공연을 통한 주장은 효과가 컸다. 살플레옐 공연 이후 최승희의 정체성은 꼬레안느 무용가즉 조선인 무용가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경향성은 파리 언론의 146개 기사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확인되었다. 살플레옐 공연 전후에 보도된 기사 79건과 샤이오 공연 전후의 기사 67건을 조사한 결과,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기사는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6퍼센트(54건중 3)에 불과했으나, 공연 후에는 80퍼센트(25건중 20)로 대폭 증가했고, 샤이오 공연 때에는 93퍼센트(67건중 62)에 달했다.

 

샤이오 공연을 보도한 주요 신문의 기사 5건이 최승희를 국적이나 민족명 호칭 없이 이름으로만 보도한 것도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임을 전제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비율은 1백퍼센트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최승희는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의 예술성을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까지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최승희가 유럽 공연의 레퍼토리를 치밀하게 구성했고 완벽하게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파리의 일제 외교관들은 정치력으로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누르고 일제의 문화선전대로 활용하려 했지만, 최승희는 예술의 힘으로 정치를 누르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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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샤이오 공연의 보도 경향

 

한편,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 공연인 샤이오 극장 공연을 보도한 파리매체의 경향을 보면 살플레옐 공연 이후의 경향이 더욱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살플레옐 공연 이후 최승희는 벨기에의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네덜란드의 암스텔담과 헤이그에서 공연을 가졌고, 독일의 뒤스부르크와 프랑스 남부의 칸과 마르세유 등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인 후, 615일 샤이오 극장에서 파리 2차 공연을 단행했다. 이 공연은 결과적으로 유럽 고별공연이 되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직후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은 2천명의 수용인원을 가진 파리 최대의 극장이었고, 개인 무용가로서 샤이오 극장에서 공연을 한 것은 세르주 리파르와 사하로프 부부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에 이어 최승희가 세 번째였다.

 

샤이오 공연을 보도한 파리 매체의 기사는 모두 67건으로 조사되었다. 그중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서술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없었고, 62건의 기사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했다. 나머지 5건은 최승희에 대한 수식어 없이 무용가 최승희혹은 그냥 최승희라고 보도했다.

 

1939년 6월15일 최승희가 파리 제2차 공연을 가졌던 샤이오 극장

 

이러한 경향은 131일의 1차 파리 공연 때와는 두 가지 면에서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첫째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로 완전히 굳어졌다는 것이다. 살플레옐 공연 때는 79건의 기사 중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던 건수가 23건으로 전체의 29%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이 살플레 공연 이후의 기사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을 전후로 나누어 파리 언론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한 보도를 다시 집계해 보면, 살플레옐 공연 전에는 모두 55건의 기사 중에서 3(5%)에 불과했으나, 공연 이후에는 25건의 기사 중에서 20(80%)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했다. 그러던 것이 샤이오 공연 때는 전 기간을 통틀어 67건의 기사 중에서 62(93%)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호칭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무용가라고 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최승희를 국적이나 민족명 없이 그냥 최승희마드모아젤 최승희혹은 무용가 최승희라고만 부르는 신문이 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민족명 조차 붙이지 않은 신문은 모두 5개였는데, 그중 <르주날(6/15)><르앵트랑지장(6/16)>, <파리수와(6/16)>는 발행부수가 1백만 부가 넘는 파리의 메이저 일간지였다.

 

이 신문들은 던컨이나 파블로바, 니진스키나 비그만이나 크로이츠베르크를 지칭할 때 미국인 무용가라든가 러시아계 무용가,’ 혹은 독일인 무용가라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정상급 무용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최승희도 파리의 매체들에 의해 정상급 무용가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최승희가 한 시즌만 더 유럽에 머물러 공연 활동을 계속했다면, 유럽 전역의 매체들이 그에게 꼬레안느 무용가라는 수식어조차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승희가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 언론이 약 반년 만에 그를 꼬레안느 무용가이거나 혹은 호칭 없이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승희의 조선무용 공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공연들을 통해 최승희는 조선무용의 예술성을 한껏 과시했고, 이를 통해 조선무용이 일본무용과는 전혀 다른 예술이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살플레옐과 샤이오 공연의 레퍼토리를 분석해 보면 그 이유를 더 뚜렷이 알 수 있다. 최승희는 이 두 공연의 발표 작품들을 조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조선인들의 성별, 연령별, 지역별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치밀하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작품을 감상한 관객들이라면 언론인이나 평론가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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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살플레옐 공연 후의 비평 기사

 

살플레옐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4>에 보이듯이 22일부터 31일까지 약 한 달간 파리 매체에 게재된 최승희 관련 기사는 모두 25건으로 조사됐는데 대부분 평론기사였다. 기고자들은 파리 예술계의 정상급 비평가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의 공연을 호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25개의 기사 중에서 최승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은 3, ‘극동의 무용가1건에 머물렀던 반면,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소개한 것이 20건이었다. 1개의 기사는 최승희를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냥 무용가라고 불렀다,

 

일반적 경향이 역전되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런 모습을 보인 매체도 있었다.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22일의 공연 보도기사에서 최승희를 미카도 제국에서온 ... 극동의 무용가, 그의 작품을 꼬레안느 무용으로 서술했으면서도 다음날(2/3)의 평론기사에서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 그의 작품을 일본 무용으로 서술했다.

 

 

1939년 1월31일, 파리의 살플레옐 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 프로그램. 최승희는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이는 공연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비평문을 기고한 평론가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당시 파리 언론인들이 아직 최승희와 조선의 상황에 대한 완전히 객관적인 인식을 공통적으로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엑셀시오르(Excelsior)>19381226일의 기사에서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했다가, 한 달 후인 1939126일과 30일의 기사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바꾸었는데, 공연 당일인 131일 기사와 26일의 평론기사에서는 다시 극동의 무용가로 변경했다. 이 신문은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적이 없는 유일한 매체였다.

 

다만 공연 전까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파리의 유력 신문들이 공연 후에는 모두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을 바꾸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르땅(2/7)><르마탱(2/4, 2/6, 2/13, 2/17)>, <르주날(2/18, 2/25)><파리수와(2/25)> 등은 모두 당시 1백만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기록했던 파리의 일간지들로서 이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파리 시민들의 최승희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력 매체들 중에서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하면서 동시에 일본인으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 신문도 있었다. <르땅(2/7)>은 최승희를 동양의 무용가로 소개한 후 같은 기사에서 그를 할리우드식의 일본 미인이라고 서술했는가 하면, 정작 그의 무용작품은 꼬레안느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파리의 패션잡지 <보그(3/1)>도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서술한 뒤에 매우 아름다운 일본인이라고 묘사하고, 그의 작품들을 섬세한 극동의 무용이라고 설명했다. , 살플레옐 공연 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보도했던 파리의 매체들이 공연 이후 꼬레안느 무용가로 전환되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 혼란의 여지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부 평론가는 이러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비평문의 일부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예컨대 <파리 수와>에 최승희 공연 평론을 기고한 모리스 상펠(Maurice Champel)꼬레(Corée)와 일본(Japon)의 관계는 티롤(Tyrol)과 시실리(Sicile)의 관계와 같다고 논평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일차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영토인 티롤의 남부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해 지배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지역에서 사용되던 독일어를 금지하는 한편 이탈리아어 사용을 강요했고, 각급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들을 회유해 이 지역을 이탈리아로 동화시키기 위한 강압적 정책을 펴고 있었다. 모리스 상펠의 논평은 간단했지만 파리의 지성계와 일반 시민들에게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리는 효과적인 정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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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대사관의 최승희 환영 리셉션

 

1939121일 파리주재 일본 대사관은 최승희 환영 리셉션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파리주재 외교관들과 언론인, 무용가와 무용평론가들이 대거 초청됐다. 리셉션 개최 목적은 최승희의 공연 홍보였다. 한편으로 이는 최승희의 바람이기도 했다. 유럽까지 와서 공연에 실패할 수는 없었으므로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얻어야했다.

 

따라서 일본 대사관이 제공하는 환영 리셉션을 흥행을 위한 기회로 받아들였다. 또 일본대사관의 협조를 거절할 명목도 없었고, 만약 이유 없이 거절했다면 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일본 대사관이 베푼 환영 리셉션은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에 심각한 역효과를 초래했다.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하고 싶었던 최승희의 바람이 완전히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리셉션이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파리의 언론인들은 최승희는 일본인임을 인식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9년 1월22일의 <르앵트랑지장>에 보도된 일본 대사관의 최승희 환영 리셉션.

 

 

<3>에 보이듯이 리셉션 이후 살플레옐 공연 때까지 파리의 언론에 보도된 32개의 기사에서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것이 단 1,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한 것이 5건에 불과했고, 대다수(26)일본인 무용가였다. 파리 언론은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고 싶은 최승희의 소망보다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려는 일본 대사관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3><2>와 비교하면 <파리 수와(Paris Soir)>18일의 보도에서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했지만 122일 보도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수정했다. <르마탱(Le Matin)>128일의 공연단신에서는 최승희를 극동인 무용가, 공연일정표에서는 일본인 무용가로 표기했지만, 사흘 후인 131일의 신문에서는 모두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다.

 

파리에서 발행되어 전 유럽으로 배포되었던 영자신문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120일과 22, 31일 기사에서 모두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기술했으며, 당시 파리 내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신문이었던 <파리수와><르마탱>, <르땅><르피가로>, <르주날> 등이 모두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표기했다.

 

 

심지어 살플레옐 공연 당일에 배포된 프로그램조차도, 최승희 측에 의해 준비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꼬레안느 무용가가 아니라 극동의 무용가로 서술했다. , 최승희 자신도 입장을 후퇴시킨 것이었다. 이는 일본 대사관의 감시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 시기에도 최승희의 작품은 모두 꼬레안느 무용으로 소개되었다.

 

일본 대사관의 리셉션이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저해했지만 순기능도 있었다.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 사이의 긴장을 느낀 파리의 언론인들이 꼬레와 쟈폰의 관계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르앵트랑지장(L‘Intransigeant)>은 일본 대사관의 최승희 환영리셉션에 대한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켰다.

 

일본 대사관은 어제 오후 5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해 리셉션을 열었다. 최승희씨가 일본인이 아님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극동인 중에서는 인종적으로 몽골 인종에 더 가깝다. 그러나 한국은 약 30년 동안 일본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의 대사대리와 미야자키 부인은 이 무용가를 동포로서 따뜻하게 환영했다.”

 

최승희가 일본인과 인종적으로 다른 한국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고, 한국이 일본에 30년간 합병되었다는 사실도 적시했다. 이러한 보도가 이어지면서 파리와 파리 신문이 보급되는 프랑스의 다른 지역, 나아가 파리 신문이 전해지는 벨기에나 스위스 등의 유럽 각국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사실과 최승희는 꼬레안느라는 사실이 점점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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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

 

19391월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의 홍보를 시작했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주관사는 <국제 예술 기구(Organisation de International Artistique)>, 프랑스내 대행사는 <발말레트(Valmalette)>, 매니저는 남편 안막이 맡았다. 따라서 홍보 실무는 <발말레트>가 담당했겠지만, 홍보의 내용은 최승희와 안막의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되었을 것이다.

[2. 파리 매체에 나타난 최승희와 그의 무용 정체성 수식어 (193911-21)]

 

1939년 새해 파리의 최승희 공연 관련 최초의 기사는 <파리 미디(Paris midi)>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일본의 아르헨티나,” “꼬레안느,” “극동의 무용가등으로 소개했다. 최승희가 서구 신문에 파블로바 꼬레안느(Pavlova coréenne)”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스페인 무용가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에 비겨 소개한 것은 <파리 미디>가 처음이었다. 이는 최승희의 조선무용이 근대무용가 파블로바보다는 민족무용가 아르헨티나에 더 가깝다는 뜻이었다.

 

이 기사는 최승희를 출생에 따라서 꼬레안느, 귀화로 일본인, 직업상 미국인이라고 정리했다. 최승희가 미국인이라는 서술은 사실이 아니지만 아마도 미국 공연을 마치고 프랑스로 건너왔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 합병을 귀화(adoption)라고 표현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기자가 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용어를 순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꼬레 태생이지만 국적이 일본인 점으로 미루어 최승희가 일본으로 귀화했을 것으로 유추한 것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는 국적변경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이든 13일자 <파리 미디>의 기사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꼬레 태생임을 파리 시민들에게 알린 최초의 기사였다.

 

한편 18일자 <파리 수와>는 파리의 신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최승희의 공연이 등재된 공연일정표를 게재했다. 공연일정표란 파리에서 열리는 각종 공연을 최근날짜를 선두로 내림차순으로 정리해 표로 만든 것인데, 파리의 거의 모든 일간지가 이를 문화면에 게재했다. <파리 수와>의 공연일정표에는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la célèbre danseuse coréenne)”라고 소개되었다.

 

[ 자료 3.  파리 일간지의 공연일정표 예시]

 

일주일 전(13일자) <파리 미디>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극동인꼬레안느미국인으로 두루 서술했지만, <파리 수와> 공연일정표는 꼬레안느를 선택했다. 아마도 최승희의 요청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공연일정표 작성을 위해서는 신문사가 대행사를 통해 공연 및 공연자 정보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해 주도록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리>호 승객 명단에 이어 최승희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연일정표가 게재된 바로 다음 날부터 최승희의 이름이 각 신문의 공연일정표에서 사라졌다. 이는 이례적인 일인데, 한번 공연일정표에 이름이 오르면 날이 가면서 순위만 변경될 뿐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일정표에 머물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최승희가 다시 공연일정표에 등장한 것은 일주일이 더 지난 116일의 <르피가로><르주날>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최승희가 일본인 무용가로 바뀌어 있었다. <파리 수와>는 첫 보도 이후 공연일정표에 최승희 공연을 수록하지 않았고, 다른 신문들은 일본인 무용가혹은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이다.

 

극동의 무용가일본인 무용가의 비율도 최승희의 도착 기사 때와 달라져 있었다. 최승희 도착 기사들에서는 9개의 기사 중 6개가 극동의 무용가’, 3개가 일본인 무용가였으나, 116일 이후에는 10개의 기사 중에서 9건이 일본인 무용가였고 극동의 무용가로 소개한 것은 1개뿐이었다.

 

 

이렇게 역전되어버린 경향으로 보아 최승희가 공연일정표에 자신을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하려던 시도가 난관에 부딪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때쯤 현지 언론도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이지만 본래 꼬레 태생이며, 꼬레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승희 본인은 꼬레안느로 소개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에게 이 같은 상황은 낯설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영국 국적보다 자신의 민족명으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 신문들은 최승희를 꼬레안느대신 일본인으로 기술했는데, 여기에는 아마도 일본 공관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대사관이 최승희는 일본제국의 무용수임을 강조하는 보도문이라도 배포했다면 현지 언론은 공식 입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최승희가 18일의 공연일정표에 꼬레안느 무용가를 시도했으나 곧 철회되었고, 뒤이은 모든 공연자 정보가 일본인 무용가로 변경됐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때도, <2>에 수록된 (괄호 안의) 무용 수식어를 살펴보면, 최승희의 작품만은 여전히 꼬레안느 무용(danses coréennes)’으로 소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당국에게는 최승희가 일본인인 것이 중요했을 뿐 그가 조선무용을 발표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에게는 발표 작품을 조선무용으로 발표하는 것도 중요했다. 자신의 조선인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조선무용을 홍보하는 것도 그의 목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작품이 꼬레안느 무용으로 소개되면 될수록, 결국 최승희도 다시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될 반전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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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승희의 파리 도착 보도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은 그녀가 프랑스에 도착하는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승선했던 <파리>호는 르아브르에 기항하기 이틀 전 저명인사 승객의 명단을 무전으로 타전했고, 이 명단은 19381223일자 르아브르의 일간지 <주날뒤아브르(Journal de Havre>에 게재되었다.

 

13명의 승객 이름이 포함된 이 명단에서 최승희는 예술가로서 레종 되뇌르 훈장을 받은 프랑스의 오르가니스트 앙드레 마르샬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었고, 그의 호칭은 코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1938년 12월23일의 <주날뒤아브르>에 실린 <파리>호 승객 명단,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이 명단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라고 기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식 서류에 따르면 최승희의 국적은 일본(Japon)’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최승희가 자신을 국적보다 민족으로 기록해 주기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입국할 때 민족명을 일본인에서 코리안으로 정정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태는 최승희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에 보이는 바와 같이 <주날뒤아브루> 이후 1224일부터 28일까지 최승희의 파리 도착 소식을 게재한 파리 일간지의 9개 기사 중에서 그녀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기사는 한 건도 없었다.

 

<르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en)>을 비롯한 6개의 일간지가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소개했고, <르주르(Le Jour)>를 비롯한 3개 신문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뜻밖의 분포가 나타난 것은 프랑스 언론이 대부분 (1) 최승희를 일본인으로 알았거나, 혹은 (2) 동양의 무용가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최승희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3) 최승희가 꼬레안느 무용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는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파리의 모든 일간지들이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가 아니라 극동의 무용가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던 것은 사실이다.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소개한 유일한 신문인 <주날뒤아브르>는 르아브르의 지역신문이었으므로,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 뒤 일주일 동안 파리의 시민들에게는 최승희가 꼬레안느조선인이라는 사실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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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무용가와 조선 무용

 

최승희는 19381224일 프랑스에 도착했고, 193913일부터 언론을 통해 자신의 조선무용 공연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31일에는 살플레옐 극장에서 첫 번째 유럽 공연, 615일에는 샤이오 극장에서 두 번째이자 파리 마지막 공연을 단행했다.

 

일본 대사관은 121일 최승희 환영 리셉션을 열었고, 일본인 유학생과 교민들에게 최승희의 공연에 참석하도록 총동원령을 내렸다. 파리의 언론들은 기사와 광고의 형태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을 선별적으로 보도했다. 파리 언론은 대부분 수동적인 입장이었겠지만 때로는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적인 해설기사를 게재하는 능동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과 샤이오 공연에 직접 관련된 프랑스 매체의 기사는 모두 146건이었다.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이 보도된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이 기사들을 5개 기간으로 나누어 내용을 살폈다.

 

1938년 12월27일의 <라디페쉬 드브레스트>는 "극동의 무용가" 최승희가 12일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 쌍라자르 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1) 1223일부터 12일까지의 최승희의 프랑스 도착에 관한 보도 (10개 기사), (2) 13일부터 121일까지의 최승희 공연 홍보 관련 보도(12개 기사), (3) 일본대사관 리셉션 다음날인 122일부터 131일의 살플레옐 공연까지 최승희 관련 보도(32개 기사), (4) 살플레옐 공연 이후 21일부터 약 한 달 동안의 최승희 관련 보도(25개 기사), 그리고 (5) 615일의 파리 두 번째 공연인 샤이오 공연을 전후로 한 최승희 관련 보도(67개 기사)였다.

 

각 기사로부터 두 가지 사항만 확인했다. 첫째는 최승희를 소개하는 문구이다. 각 기사가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꼬레안느 무용가로 서술했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문구로 소개했는지를 구분했다. 둘째는 최승희의 무용 작품을 일본무용으로 서술했는지 조선무용으로 서술했는지를 정리했다.

 

한 기사에 두 개 이상의 서술어가 등장할 경우 자의적으로 선택하기 보다는 모두 인용해 두기로 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기사 중에 명시적으로 꼬레안느쟈포네스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경우 기사 전체를 통해 일본이나 조선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지를 찾아보고, 그에 따라 그 기사를 조선인 무용가혹은 일본인 무용가로 분류했다.

 

예컨대 기사 중에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혹은 미카도 제국이 언급되었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서술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사 중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왔을 경우에는 최승희를 꼬레안느 무용가로 지칭한 것으로 보기로 했다.

 

 

1938년 12월26일의 <엑셀시오르>(왼쪽)과 <르주르>(오른쪽>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보도했다. <엑셀시오르>는 최승희를 "극동의 무용가"라고 서술한 반면, <르주르>는 "일본인 무용가"라고 보도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최승희를 쟈포네스 무용가(danseuse japonaise)’ 혹은 꼬레안느 무용가(danseuse coréenne)’라고 서술했지만 극동의 무용가(danseuse de l'Extrême-Orient)’라는 표현도 자주 등장했다. ‘극동이란 유럽에서 동쪽으로 가장 먼 아시아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인도차이나의 각국과 인도네시아와 자바 등의 남방 도서 국가들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예컨대 23일자 <르악시옹 프랑세즈>에 실린 평론 기사에서는 인도, 발리, 캄보디아, 중국, 한국, 일본의 춤을 극동의 춤으로 서술한 바 있었다.

 

보통의 경우 프랑스 언론이 극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특정 국가를 지칭할 필요 없이 동아시아 일반을 가리키기 위해서였지만, 최승희 관련 보도에서는 쟈폰(Japon)’꼬레(Coree)’라는 두 단어를 피할 수 있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프랑스 언론인들은 일본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삼일운동이 대대적으로 프랑스 언론에 보도되었던 이래로 꼬레쟈폰의 식민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와 일본대사관의 주장이 대립되었을 때 프랑스 매체는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보다는 극동이라는 표현으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호칭에 따라 기사를 분류하는 방법은 최승희의 공연 작품을 가리키는 표현을 분류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각 기사가 최승희의 무용을 조선무용이라고 지칭했는지 혹은 일본무용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표현했는지를 구분해서 정리해 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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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리 공연과 최승희의 조선인 정체성 주장

 

미국 공연 중단으로 반년 이상 뉴욕에서 보낸 최승희는 19381217일 프랑스 여객선 <파리>호로 뉴욕을 출발해 유럽으로 향했다. 8일간 대서양을 횡단한 끝에 그는 1224일 오후3시 프랑스 서안의 항구도시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 생라자르역에 내렸고 기다리던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유럽 순회공연은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파리와 마르세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텔담과 헤이그 등에서 열린 주요 공연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고 비평도 호평이 많았다. 특히 1939131일의 파리 살플레옐 극장 공연과 615일의 샤이오 극장 공연은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파리 무용계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최승희는 1938년 12월17일, 프랑스 여객선 <파리>호에 승선, 뉴욕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8일간의 항해 끝에 르아브르에 도착한 <파리>호의 승객명단을 보도한 1938년 12월23일의 <주날뒤아브르> 기사에 따르면 최승희는 <꼬레안느 무용가 최승희>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133건에 달하는 최승희의 파리공연 관련 기사에 따르면 조선무용의 예술성은 스페인과 인도, 일본과 발리 등의 민속 무용뿐 아니라 발레 루소로 대표되는 유럽 정통 발레와도 대등하게 비교 평가되었다.

 

최승희 자신도 스페인의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1890-1936), 인도의 니오타 이뇨카(Nyota Inyoka, 1896-1971), 중국의 메일란팡(Mey Lanfang, 1894-1961) 등의 정상급 민속 무용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나아가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1881-1931)와 마리 비크만(Mary Wigman, 1886-1973), 사하로프 부부(Alexander & lotilde Sakharoff, 1886-1963, 1892-1974), 하랄트 크로이츠베르크(Harald Kreutzberg, 1902-1968) 등의 현대 무용가들과도 동등하게 평가되었고, 유럽 발레의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1905-1966), 다르자 콜린(Darja Collin, 1902-1967) 등과도 교류를 가졌다. 최승희는 세계일의 반열에 올라섰고, 전설적인 무용가들과 나란히 호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평전들은 최승희가 이같은 예술적 성취와 함께 유럽에서 조선인 정체성을 한껏 펼쳤다고 서술했다. 정병호(1995)는 최승희가 (1) “국적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민족명을 재패니스가 아니라 코리안이라고 했, (2) 파리에서 “‘코리안 댄서라는 말을 ... 사용한 데에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민족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3) 최승희가 프랑스에 도착한 이후 파리의 거리에는 조선의 자랑 최승희를 환영한다,’ ‘조선이 낳은 천재적 무희 파리 공연같은 표어로 된 플래카드가 나붙었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은 다른 평전과 연구서들에 널리 인용되었지만 몇 가지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파리에 오래 거주하던 중 이차대전 발발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 화가 배운성의 증언에 따르면 파리에는 조선동포가 10여명 있었을 뿐이므로 이들이 플래카드를 거는 등의 환영 행사를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30년대 르아브르 정경

 

더 중요한 의문은 코리안 무용가라는 표현에 대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말이 영사관에 해명해야 할 만큼 민감한 표현이었는데, 파리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일제 외교공관들이 최승희를 일제 문화선전대로 활용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면 파리에서도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해야 했을 것이다. 파리 대사관이 미국의 영사관들보다 최승희의 민족 정체성 주장을 더 관대하게 대할 재량권을 가졌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어 보인다.

 

마지막 의문은 파리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과연 파리의 관객들과 언론인들이 처음부터 최승희를 코리안 무용가로 환영할 수 있었을까? 파리의 일본 대사관이 암묵적, 혹은 명시적으로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했던 반면, 최승희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코리안으로 주장했다면, 이처럼 상반된 입장을 목격하면서 파리의 언론과 관객들이 손쉽게 최승희의 편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금부터 최승희가 파리 체재 동안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주장했고 일본 대사관은 여기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그리고 파리 언론이 최승희와 일본 대사관의 상이한 주장을 어떻게 기사에 반영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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