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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월초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설 여유가 생겼다. 출발점은 당연히 추도비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추도비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다카라즈카와 고베, 오사카 등지를 취재하러 다녔던 20203월초까지는 추도비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2020326일 추도비가 세워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불거진 한일 양국의 경제마찰과 양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이 중첩되면서 기존에 자유롭던 한,일 여행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도비가 희생자 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비석의 전,후면과 좌우 측면, 받침대와 상단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촬영해 달라고 했다. 정세화 선생은 곧 사진을 보내 주셨고, 나는 추도비 희생자 연구를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자료인 추도비 사진들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추도비는 2개의 거대한 장방형의 돌이 2단으로 겹쳐져 세워져 있었고, 전면에는 <월조남조>라는 글귀와 함께 그 하단에 희생자 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후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와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조남지, 철새는 고향을 잊지 않고 머나먼 조국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비문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이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근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을 애도하고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어서 추도비 건립을 주도한 단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이하 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의 세 단체이다. 이 세 단체의 구성과 활동, 대표자들에 대한 서술은 다른 글에서 이뤄졌으므로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세 단체를 결성하거나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2세인 김예곤 선생이었음을 밝혀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베수도공사><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의 사고와 희생자들을 밝혀낸 정홍영 선생이 20001월에 타계한 후에도 콘도 토미오 선생은 추도와 제사를 계속했다. 시간이 가면서 추모 제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2013년에는 <교류협회>가 정식으로 추모 제사에 참여했고, 20175<고베수도건설공사 및 구국도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사망자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하 <추도비건립모임>)이 발족되면서 추도비 건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현직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 씨가 슬퍼할 도()’자를 써 보냈고, 이를 추도비의 후면에 새긴 것이다. 일본에서는 물론 효고현과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특히 조선인 추도비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직 정치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도의 뜻을 나타낸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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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월 초 서울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 조선인 추도비를 잊고 있었다. 이미 조사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이 상당히 쌓였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고 번역해 정리하는 데에 여러 달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내가 최승희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2018년부터 2년여 동안 일본의 42개 도시에서 수집해온 최승희 관련 자료 중에는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많아 흥미로웠지만, 애써 수집한 자료 중의 일부는 제대로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복사된 자료들 중에는 읽지 못할 정도로 활자가 흐리거나 뭉개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이 그런 경우도 있었고 복사가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체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신문 기사들은 원본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물자 통제로 신문 인쇄에 필요한 잉크도 배급제가 실시됐고, 따라서 신문사들은 상시적으로 잉크가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일제 패전까지의 신문들의 인쇄는 상태가 매우 나빴다.

 

 

활자를 읽을 수 있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1920-30년대의 일본어는 철자와 용례가 현대 일본어와 다른 점이 꽤 많았다. 오늘날 일본 대학입시에서 현대일본어와 별도로 일본어 고문과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고문 과목에는 메이지유신(1876)이래 1930년대까지의 글들이 많이 출제된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어 고문에 해당하는 1930년대의 신문기사를 읽을 때는 오늘날의 사전이나 번역기가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정세화 선생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정세화 선생과 둘이서 연락하던 라인(LINE) 방에 콘도 토미오(近藤富男)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을 초대해서 함께 문자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셨다. 내가 자료를 읽다가 막히면 그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 단톡방에 올렸고, 콘도 선생과 신도 선생께서 시간 되시는 대로 그 부분을 읽어주시고 해석도 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수집해 온 자료들을 쑥쑥 읽어나갈 수 있었고, 필요한 부분들은 번역해서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됐다.

 

 

라인 단톡방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무용신 보내기> 2차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1차 캠페인 때부터 이인형 선생의 합류로 활력과 추진력이 생겼는데, 일본에서도 콘도 토미오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께서 참여하시기로 한 것이다.

 

일은 점점 커져서 일본에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팀아이>가 결성되었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팀 아이(ムアイ>라는 이름도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직접 지으셨는데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며(eye) 돕는 팀이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회원 모집도 이뤄져서 약 15인의 회원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팀아이> 출범에 자극을 받아 한국 <팀아이>도 결성되었다. 9명의 회원들이 모여 조선학교 무용부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팀아이> 회원은 아직 공개모집할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이인형 선생과 나의 대학 동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먼저 황웅길, 강충호, 정철훈, 권홍우 선생이 참여하셨고, 곧이어 정회선, 이원영, 조성무 선생도 합류해 주셨다.

 

 

일본 <팀아이>는 재일 외국인 학생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었지만, 한국 <팀아이>는 지원의 대상을 재일 조선학교로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 특히 다카라즈카가 속한 효고현에서는 외국인 중 재일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이상이었으므로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재일 조선학생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셈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협력해 이룬 첫 번째 사업이 제2<무용신> 캠페인이었다. 고베에서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나고야 지역에 이르는 일본 깅키(近畿) 지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 160명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두 번째 <무용신> 프로젝트도 성공적이어서, 일본 <팀아이>의 회장이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202011월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참석해 학생들에게 직접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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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최승희 연구자라고 소개했고,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지역 공연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드릴 때마다 듣는 이들은 흥미로워했다.

 

예를 들면 최승희 선생이 우와지마 공연에서는 공연 수익금을 그 지역 도서관 건립에 기부해서 그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나고야 공연 수익금을 조선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에 출전하는 스키 선수들의 여비로 쾌척했다는 이야기들을 해 드리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소지하는 랩탑 컴퓨터에 고이 저장된 신문, 잡지 기사들을 증거삼아 보여드리곤 했었다.

 

정세화 선생이 내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말을 꺼낸 것도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보고난 직후였다고 한다. 80여년전의 최승희 선생의 행적을 고신문과 잡지, 자서전과 예술사 서적들을 통해 밝혀내고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조정희 선생이 1백년 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의 행적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부탁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거절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한국 근대사나 한일관계사 전공자가 아니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노동이민은커녕 후기의 강제동원의 역사도 잘 몰랐다. 비교적 오랜 학문 생활을 통해 나는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면 각별히 주의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학 안에서도 일탈사회학 하던 사람이 예술사회학으로 분야를 바꾸면 초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미 가진 학위나 장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 대상의 성격이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고 그의 활동 범위도 일본 전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마다 행적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는 그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재주껏 그 기록을 찾아서 깨우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기지개를 켠 기록은 엄청나게 많기는 했다.

 

그러나 추도비의 조선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생존 당시 차별받는 조선인 노동자였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사망하게 한 사고에 대한 기사는 발견될 수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나 생존시 사정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기록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유명 인기인이었던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무명인들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발굴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세화 선생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하지 못했다. 평소 장난기와 익살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그 부탁의 말씀을 하시는 동안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조선인 추도비는 정세화 선생의 가계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그의 부친 정홍영 선생이 1970년대에 시작하셨던 지역사 연구의 마지막 단추였던 것이다.

 

나는 다소 자신없는 목소리로 정세화 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연구자는 자료가 없으면 꽝입니다. 일단 어떤 자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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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월 오사카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1월 고베의 <고베조고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조선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

 

 

서울로 돌아와 연락을 계속하던 중 나는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정세화 선생도 좋다고 하셨다. 멋진 취주악 연주회를 열어준 고베조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고베조고는 정세화 선생의 모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제안에 대단히 흐뭇해 하셨던 것 같다.

 

결정이 되자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명단과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파악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일반 모금을 시작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과거의 인맥이 거의 끊어진 나로서는 특정 지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할 방법은 없었고, 어차피 일반 모금을 해야 했다. 내가 하는 sns는 페이스북 밖에 없었으므로 거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때 큰 원군이 나타났다. 최승희와 재일조선학교, 그리고 무용신 이야기를 듣고 이인형 선생이 동참해 주신 것이다. 이인형 선생은 발이 아주 넓어서 모금운동을 주도하기에 적임자였다. 그는 몸담아 활동하는 단체가 아주 많았고, 그중 일부에 나를 소개도 해 주셨다. 나도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모임을 중심으로 지인들을 찾아 협조를 당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노력은 페이스북에 기울였는데, 2주일 동안 계속된 모금운동에서는 97만원의 성금이 모금되었다. 정세화 선생이 파악해 주신 고베조고 무용부의 인원은 26명이었고, 지도교사를 포함해서 27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97만원의 예산으로는 27켤레의 무용신 대금으로 충분했다.

 

그때 정세화 선생이 다시 제안을 하셨다. 무용신을 얼마간 더 주문할 수 있으니 마츠야마 소재 시코쿠 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좋다고 했고, 정세화 선생은 시코쿠 조선학교 무용부원과 지도교사를 위한 무용신의 신발칫수 조사하셨다.

 

무용신의 전달 시기는 3월초의 졸업식에 맞추기로 했다. 고베조고의 졸업식은 31일이었고, 이 행사에 맞춰서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이인형 선생과 내가 이 졸업식에 참석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보다 먼저 출국한 나는 먼저 마츠야마에 들러 시코쿠 조선학교에 무용신을 전달했다. 무용부 학생이 5명에 불과했던 시코쿠 조선학교에서는 작은 무용발표회를 열어가며 환영해 주었고, 그런 환대를 받고 보니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고베조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이 끝난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정세화 선생이 정성껏 준비해 주신 무용신을 무용교사에게 전달했다. 무용신을 하나씩 전해 받은 학생들은 너무너무 고마워해서 우리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날 시코쿠와 고베에서 오고간 것은 무용신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무용신 한 켤레는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고, 뭐 영원히 남을 선물도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대한민국 동포들이 재일조선인을 잊지 않고 있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시코쿠와 고베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우리는 조선학교 무용신 선물을 확대해 가기로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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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3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김병순(金炳順, 1914년 사망), 남익삼과 장장수(南益三, 張長守, 1915년 사망), 윤길문과 오이근(尹吉文, 吳伊根, 1929년 사망)5명이었다.

 

 

내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11월초였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러 오사카에 갔다가 우연히 교분을 갖게 된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이 추도비가 건립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추도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당시 나는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일본 공연을 조사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한 것도 무용경연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무용경연대회를 통해 나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이 80여년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때까지 나는 다카라즈카를 두 번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답사에서 다카라즈카 대극장을 포함해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이 재일 조선인들의 밀집 주거지역이라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나는 20201월에 다시 고베를 방문했다. 정세화 선생의 초대로 고베조고의 연례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비로소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추도비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점과 이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추도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1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게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질문할 때마다 정세화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셨다.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현지인들이, 인본인과 재일동포를 불문하고,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분들이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 건립에 대해 각별한 열심을 내고 계셨다. 콘도 토미오 선생은 다카라즈카의 중등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사로 오래 재직하신 후 정년퇴임하신 분으로 2000년에 작고하신 재일동포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 추도비를 꾸준히 추진해 오신 것도 알게 되었다.

 

 

정홍영 선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 곳곳을 조사하고 답사해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과정과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한 상황, 이들이 받았던 차별대우와 악조건 속에서도 분투하며 이루어낸 조선인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그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담겨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정홍영 선생의 소원이었는데, 그가 타계하신 후 그의 오랜 연구 파트너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를 이어 받았다. 다카라즈카 학술단체와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았고, 결국 정홍영 선생 사후 20년 만에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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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연구사의 조사방법이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첫째,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닌 신고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수백명, 많으면 1천명이 넘을 수도 있었다. 이 신청서들은 전산 처리된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데이터베이스 검색이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일일이 신청서를 넘기면서 이름과 주소, 가족사항과 이주지 등의 정보를 일일이 살펴야 한다.

 

 

둘째, 그같은 지난한 조사를 통해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이나 친척, 후손이 강제동원 피해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찾아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한 것이 1929년이므로 이들이 경남 고성을 떠난 것은 그 이전이다. 이들의 나이가 이때 21세와 25세였으므로 대략 1905년에서 1910년 출생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본으로 노동이민을 떠난 것을 직접 보았거나 1차로 전해 들었을 사람들의 나이는 2004년 현재 70세에서 1백세에 달할 것이다. 그중에서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해 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이 얼마나 될른지는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셋째, 만에 하나 윤길문씨나 오이근씨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한 신고서가 접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신청서의 문서 보존연한은 통상적으로 3년 혹은 길어야 5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펴볼 신청서 자체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김상민 선생의 조사 방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가진 자료는 경남 고성군 고성면출신의 윤길문(尹吉文, 21)’오이근(吳伊根, 25)’라는 한자 이름과 그들의 나이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본관과 이름의 항렬을 알면 이들의 친족관계가 폭넓게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족보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면 오늘날까지 생존한 가족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며,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 호적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족보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탐문의 방법이 있다. 고성군 내의 집성촌을 찾아가 탐문하거나, 혹은 언론의 협조를 얻어서 공개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행적을 탐문해 가족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는 아니므로, 우선 김상민 선생의 조사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에 고성의 1차 취재를 마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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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일제의 국민동원령이 시작된 1938-45년 사이에 약 180만명이 군인, 군속, 노무자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10명 중의 1명꼴로 조선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38년 이후 강제동원피해자이다. 내가 연고를 찾고자하는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민동원령이 내려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자발적인 노동이민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자발적이란 용어는 강제적의 상대어로 쓰인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일 합방 직후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지주와 소유권을 강화하고 소작인의 소작권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땅이 없는 소작인들의 농업 종사는 더욱 어려워졌고 생활은 피폐해졌다.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다.

 

둘째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과 쌀의 반출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이농인구가 증가하였으나 국내의 산업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의 상당수가 일자리가 있는 일본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배출요인으로만 보아도 1910년대와 20년대 조선인의 도일 노동이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을 수 없는반강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다만 일제의 직접적인 강제는 아니더라도 일제의 정책으로 인한 간접적인 강제였던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1차대전(1914-1918) 이후의 경기 호황기에는 일본의 노동력 유인력이 컸기 때문에 조선인의 도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말 세계가 불경기에 돌입했을 때, 일본의 일자리마저 쪼그라들었을때에는 조선인에게 미친 타격은 더욱 컸다. 1931년의 조선의 실업자 수가 3백만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2천만명, 경제활동인구 12백만명 중에서 실업률이 25%에 달했던 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도항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노동이민은 더욱 늘어났고, 시간이 갈수록 합법적 도항보다는 불법 도항이 늘어났다. 불법이주한 사람들은 관공서나 회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공식 기록만 보더라도 경기불황으로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19258월 도항저지제를 실시했음으로 불구하고, 조선인의 도항자수는 1920년의 30,189명에서 1930년에는 298,091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 1935년에는 625,678명으로 다시 5년 만에 두 배로 늘었고, 1940년에는 1,190,444명으로 1백만명을 넘었으며,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4년만에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후기에 조선인들의 생활고가 매우 심각했다는 뜻이다.

 

 

생활고에 쫓겨 도일한 이농 노동이민자들은 대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출신지가 알려진 1923년의 도항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이었다. 일본 도항자의 80%가 이 세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친분관계도 노동이민자의 도일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았다1925년의 센서스에 따르면 경상남도 고성군의 인구는 약 87천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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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민 선생이 지적한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2004년에 시작된 조사를 가리킨다. 그해 35<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되었고, 11월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첫 번째 업무가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였다.

 

이후 2010322일에는 다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따른 <국외강제동원희생자 지원위원회>를 신설했다. 피해자 조사와 함께 피해자들을 보상하고 지원하는 업무도 병행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다. 해방된 지 60년이나 지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강제동원 피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재정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 정부가 근대사의 질곡을 60년이나 연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집권으로 양성된 반민족 정치인들은 민주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보상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갔으니 잊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간의 유감을 푸는 방법일 수는 있지만, 국가 간의 외교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일 수 없었다.

 

사실 2004년 이전에도 각종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가 수집되었다. 우선 1945년 조선총독부가 퇴각하면서 남긴 <노무군 문서> 3권에는 1,012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었다.

 

1952-3년에는 내무부가 전국조사로 작성한 <일정시 피징용자명부>, 1957-8년 지방 읍·면지역에서 신고 받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그리고 1970년대 대일민간인청구권 보상을 위해 작성한 <피징용사망자연명부>가 있다. 3종의 명부에 수록된 피해자는 총 537,077명이었다.

 

1990년 노태우 전대통령의 방일 외교의 성과로 일본정부로부터 돌려받은 <군인군속명부(12, 346,733)><노동자명부(3, 114,822)>, <군인군속공탁금명부(120,525)>도 추가되었다. 16종 명부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는 582,080명이었다.

 

 

그밖에도 민간이나 해외에서 수집된 명부가 있다. 2005년 김용현이 기증한 <동명회명부록(1, 419)>, 2005년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인수받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명부(81, 116, 413,407>, 2011년 러시아 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조선인포로명부(2,767)>, 2017년 김광렬 선생의 유족이 기증한 <강제동원기록(151,737)> 등이 있다.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2010년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가 신규 수집자료와 함께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피해자 명단도 568,330명에 달했다. 김상민 선생이 언급한 피해자 신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편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 자료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의 수는 총 7,879,708명이었고, 이중 국내 동원이 6,126,180, 국외 동원 1,390,063, 군인·군속이 363,465명으로 집계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기록을 취합해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적사항이 파악된 피해자 수는 약 118만명이라고 했다. 전체의 5분의1,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만 따지면 약 60만명 이상이 누락된 상태이다.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의 3분의1 가량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강제동원피해자들이므로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건너가 철도공사 노동자로 일하던 중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는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경남고성> 출신의 피해자는 3,523명이었다.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를 3분의1로 본다면, 1938-1945년 사이의 강제 동원된 고성군 출신의 피해자는 대략 5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성군에서 약 5천명의 강제동원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도 노동이민의 숫자 역시 상당한 숫자에 달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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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청에 들어가 우선 민원실을 찾았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창구계원에게 ‘1백년전에 일본에서 사망하신 고성면민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계원은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잠깐 기다려 달라면서 전화를 했다. 일상적 민원업무 외에 다소 복잡한 민원을 다루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나를 안내해 민원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특별 민원담당자에게 나는 똑같이 요청했다.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그 역시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나는 가져간 자료 폴더를 꺼내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조선인 추도비> 사진과, 제사상 장면, 그리고 나무 위패에 이름이 적힌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이분들이 1914년과 1929년에 일본 다카라즈카에서 철도 터널공사와 수도관 터널공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고성 출신의 윤길문, 오이근씨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일본 분들이 1백년 가까이 이분들의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작년에는 이 다섯 분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셨는데, 뒤늦게나마 이분들이 어떤 분들이셨는지 연고를 알고자 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부탁을 받고 조사를 시작한 끝에 마침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민원담당관은 내 말을 다 듣고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물도 한잔 달라고 했다. 밤새 버스에서 쪽잠을 잔데다가 새벽 통영 자전거 관광으로 피곤했다. 고성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시외버스 안에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고성군청 민원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보니 목이 말라왔던 것이다.

 

내가 물과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 자리를 떴던 담당자가 누군가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고성군청의 역사자료연구사 김상민 선생이었다. 나는 드디어 적임자를 만난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도 프레젠테이션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구나 민원담당관에게 이야기할 때보다 편한 마음이었고, 간결하게 설명해 나갈 수 있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공적 기록, 즉 민적/호적을 열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화된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역사연구라는 이유로 열람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료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고, 공적 자료 조사가 불가능하다면, 향교를 통한 족보 조사, 혹은 집성촌을 방문해서 탐문조사도 해 볼 생각입니다.”

 

김상민 연구사는 말없이 들으면서 간간이 내가 꺼내놓은 자료 사진들을 뒤적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일어섰다. “제 자리가 있는 2층으로 가시지요.”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역사연구실은 책상마다 서류뭉치와 문서철들이 쌓여 있었다. 고성의 역사가 오래고 유서가 깊은데다가 문화재와 사적지 등이 많기 때문에 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그의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김상민 연구사가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들기더니 말했다.

 

 

“10여년전에 강제동원 피해자 신고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고된 사람이 고성에서만 수백 명입니다. 그중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도 있었고 자발적 노동이민자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신고한 경우는 별로 없고 가족이나 친척, 기타 연고자들이 신고하셨기 때문에 일단 신고서를 다 받고 분류는 나중에 했지요.

 

강제동원 피해자로 확인된 분들은 중앙부서로 자료가 이전됐고, 노동이민자로 밝혀진 분들의 자료는 군청 자료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연한으로 폐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료가 남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지 방법이 열렸다. 나는 몇일이 걸리더라도 그 자료를 일일이 조사할 용의가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때문에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김상민 연구사가 그 신청서 조사를 자신이 해보겠다고 하셨다. 다시 희망이 솟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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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군청으로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의사를 밝히고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냥 민원실로 방문하기로 했다. 군청의 협조를 얻으면 일이 쉬워질 것이었고, 협조를 받지 못하더라도 바로 개인적인 조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고성터미널에서 군청까지는 걸어서도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29년에 고성면이라고 불렸지만 193810고성읍으로 승격된 이래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다지 많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해왔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성은 변한12국의 하나인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資國)의 영토였고, 서기 42년부터 461년까지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지였다. 고자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의 중국기록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 사기에는 고차국(古嵯國) 혹은 구차국(久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가야가 속했던 가야연맹이 신라에 합병(562)된 이후에는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16(757)고성군으로 개칭했는데, 이때의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가야시대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성은 경상도 서남 해안지역의 중심지였다. 산악과 해안이 구비되어 있고 농업을 위한 평야와 교통을 위한 도로가 잘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성의 변방이던 창원과 사천, 통영과 진주가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고성군만 도농복합지역으로 남아 있다. 고성군의 면적은 서울시 크기이지만 인구는 51천명에 머물러, 2백만명이 사는 주변 4도시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192587천명이던 고성의 인구는 1960년대 13만 명에 달했으나 2020년 현재 약 51천명으로 집계되었다.

 

 

고성 시내를 가로 질러 들어가는데 뜻밖에도 공룡이라는 말이 자주 발견되었다. 시장이름도 공룡, 거리이름도 공룡이 있고, 곳곳에 공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과 가게가 많았다. 고성에서 공룡 화석이 출토되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실이었다. 고성 소개서 <나무가 알려주는 고성 이야기(2015: 257-8)>와 고성군 웹사이트(goseong.go.kr)의 설명에 따르면,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약 12천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화석과 새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21월 이곳에서 최초로 용각류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이래, 덕명리 해안을 따라 약 19백여족, 고성군 전체에서는 약 54족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확인되었는데, 다고 한다.

 

공룡 발자국 화석 중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자국도 발견되었는데, 발자국 하나의 길이가 102센티미터, 너비 64센티미터에 달해, 이 공룡의 크기는 발에서 등까지 약 8미터, 머리까지는 15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1백 톤이 넘는 거대한 공룡으로 추정되었다.

 

 

고성군은 198311월 하이면 덕명리와 월흥리 일대를 군립공원으로 지정해 공룡발자국을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의 양과 종류, 규모 덕분에 고성은 미국 콜라라도주와 아르헨티나 해안지역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인정되었고, 특히 중생대 새발자국 화석지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고성군은 이곳에서 출토된 공룡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4년 하이면 상족암군립공원 내에 공룡박물관을 개관하여 약 96종의 공룡관련 전시물을 일반에 공개했고, 20064월부터 매3-4년마다 공룡세계엑스포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219월에도 제5회 고성공룡세계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의 고성 취재는 삼국시대나 중생대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대략 1백여년 전에 이곳을 출발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 청년 두 사람의 행방을 찾으면 된다. 그다지 도시화되어 있지 않은 고성에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흔적을 찾는 것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인구가 적고 이동이 빈번하지 않은 지역이었다면 1백년 전 이주자 가족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남아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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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30일 월요일,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을 찾는 첫 답사에 나섰다. 목적지는 경남 고성이었다. 일본 효고현의 일간지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1929328일의 보도에 따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 참여했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29일 밤11시에 서울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30일 새벽 4시쯤 통영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고성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없었으므로 통영이나 진주에서 갈아타야 했다. 진주에서 환승하면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웠지만, 버스 시간표가 좋았기 때문에 통영 환승을 선택했다.

 

유럽 취재를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요령은, 야간에 이동하면 주간 취재시간이 넉넉해진다는 것이었다. 취재는 대부분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거나, 사람들을 탐문하는 것이므로 밤에 일할 수 없다. 따라서 야간 시간을 이동에 활용하면 시간과 경비가 확실히 절감되었다. 다만 일본 취재에서는 야간 이동의 교통편이 거의 없어서 이 요령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고성 취재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갔다.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별도의 운임 없이 자전거를 실어주게 되어 있었다. 최승희 선생의 지방공연 취재를 위해 지방 도시를 방문했을 때 자전거를 가져가서 톡톡히 덕을 보았었다. 현지 교통사정을 잘 모르는 만큼 도시 내 이동에 자주 택시를 타야했는데 자전거를 가져가면 그런 수고와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군산이나 공주 같은 중소도시에서는 시내 이동을 전적으로 자전거에 의존해도 좋았고, 대구나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도 자전거가 유용했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면 되었고, 이동 거리가 멀면 자전거를 자전거보관소에 묶어놓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통영은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언덕이 너무 많았다. 새벽녘에 통영 시내 구경을 할 생각으로 바닷가 구도심으로 향했는데, 간선도로에 오르자마자 거대한 언덕이 나타났다. 도로는 캄캄하고 가로등도 드문드문한데다가 이따금씩 무서운 속도로 달려 지나가는 차량들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은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 했다. 내리막도 길었지만 마냥 내리 달릴 수 없었다. 도로가 고르지 않았고 무섭게 달려지나가는 트럭과 승용차들 때문에 자주 브레이크를 잡아야 했다. 구도심에 도착하기 전에 그런 언덕이 하나가 더 있었다.

 

 

 

가까스로 두 번째 고개를 넘어 세병관 표지판을 지나치면서 비로소 바닷가에 접근했다. 남망산 공원에서 일출을 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남았으므로 한동안 선창에서 어선들이 고기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새벽시간에 깨어 있는 곳이 선창뿐이었다. 막 귀항한 어선들이 수백 개의 백열등을 대낮같이 밝힌 채 야간 어로에서 잡은 고기를 부리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손가락 경매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일출시간이 가까워지자 남망산 공원에 올랐다. 선창에서는 자전거로 불과 5분 거리였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해가 뜨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드문드문 구름이 끼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통영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새벽 통영의 자전거 관광은 고성 취재까지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는 바람에 통영 도심의 지리를 제법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유용한 경험과 지식이 되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또 다른 희생자 남익삼씨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영의 사전 답사를 한 셈이었다.

 

 

남망산 공원에서 내려와 문을 연 첫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자전거를 시장 맞은편 자전거 주차장에 묶어둔 채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자전거로 고개를 2개나 다시 넘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는 고성 취재를 마치고 찾으러 올 생각이었다.

 

고성행 시외버스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있었고, 통영에서 고성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고성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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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공식 생일은 19111124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선 호적과 일본 외무성 여권발급기록 등의 공문서에는 이 날짜가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숙명여학교의 학적부와 북한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도 생년월일은 이 날짜이다.

 

그러나 이 생일이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일었다. 이 생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승희 자신이 직접 밝힌 나이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19263월 자신이 무용을 시작했을 때의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로) 15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세는 나이는 16세여야 했다. 또 최승희는 두 자서전에서 결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20세라고 밝혔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세는 나이는 21세가 되어야 했다.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는 외국에서도 자주 발생했다.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작성한 미국 입국서류에 최승희는 자신의 나이를 25세로 기록했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나이는 만26세여야 했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28세라고 적혀 있었지만, 공식 생일인 19111124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만 나이는 29세여야 했다.

 

심지어 최승희 자신이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라고 직접 밝힌 기록도 있다. 최승희가 1939510일자로 발급받은 벨기에 노동허가서와 19401010일자로 제출한 멕시코 입국기록에도 그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식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19111124일이라는 생일을 음력날짜로 고려하고, 이를 양력날짜인 1912112일로 변환하면 생일과 나이가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날짜로 기억하고 실제 생일은 양력 날짜로 환산해 축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관행은 1960년대나 그 이후에도 꽤 남아서 한국인들 중에는 주민등록상의 생일이 진짜 생일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최승희도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9111124, 즉 양력으로 1912112일이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던 1938111일의 최승희 나이는 만25세가 맞다. 이날은 생일 바로 전날이었으므로 만일 미국 입국이 하루만 늦었다면 최승희는 입국기록의 나이를 26세라고 썼을 것이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의 나이도 1912112일을 기준으로 하면 만 28세인 것이 맞다. 이와 함께 멕시코 입국신고서에는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한 것과 브뤼셀에서 발급받은 노동허가증에 생년을 1912년으로 기입한 것도 정확한 기록이다. 다만 브뤼셀 노동허가증에 생월을 ‘5이라고 기록한 것은 1월의 잘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최승희의 생일로 알려져 온 19111124일이 잘못된 날짜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공식문서에 기록된 생일이었고 최승희와 그의 가족들도 이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는 공식기록, 즉 호적과 학적부, 도항증이나 여권, 이사할 때마다 이전해야 했던 주민등록에는 모두 이 공식 생일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11124일이 공식 생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짜 생일이 아니었고, 이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진짜 생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최승희의 생일 파티는 이 날짜에 맞춰 이뤄졌을 것이고, 특히 가족들의 생일상도 이 날짜에 맞춰졌을 것이다.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공식 생일과 다르다고 해서 그의 삶을 연구하거나, 그의 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탄생 기념일을 지키는 데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최승희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가 2011년에 이뤄졌으나, 그의 진짜 생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2012년이어야 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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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6세의 일기><이즈의 무희>가 최승희의 도쿄 공연 활동과 맞물려 <16세 최승희> 신화를 영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1)>는 최승희의 파리 공연에 즈음해 <14세 최승희> 신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381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나 그의 국적과 민족정체성 문제로 미국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당시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했고 난징 대학살 소식이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고, 특히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일본상품 배척운동이 벌어져 일본 국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한 최승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국에서의 실패를 뒤로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국적이나 민족정체성보다는 개인사를 홍보했다. 양반 출신인 그는 유럽에서 귀족 가문으로 홍보되었고, 기생을 천시하던 관행을 무시하고 무용가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인해 최승희는 아시아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승희는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그의 유럽 첫 공연이었던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2면을 전부 할애해 최승희를 길게 소개한 글이 게재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극동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14세에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교장은 그가 가수가 될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도쿄 음악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나이가 어려 서울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소개문은 조선이나 일본, 만주와 중국, 미국에서도 사용되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무용을 시작한 나이를 14세라고 명시한 것이다. 불과 3-4년전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어째서 프랑스에서는 14세라고 했던 것일까?

 

 

유럽식 만 나이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나이는 만14(+4개월)이다. 이 생일이 음력날짜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 되므로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는 여전히 만14(+2개월반)이었다. 따라서 파리 공연 팜플렛에 그의 나이를 14세라고 쓴 것은 유럽식으로 정확한 나이 기술이었던 셈이다.

 

16세 여성과 14세 여성은 어감이 대단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6세의 여성은 과년(瓜年) 혹은 과년(過年)이라며 성인 대접을 했지만, 14세라면 누구나 소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라는 표현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드가의 소조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와 연관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희를 작품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유화와 드로잉 작품을 다수 남겼지만, 생전에 조각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은 <14세의 어린 무용수> 하나뿐이었다.

 

 

이 작품이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이 조각품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고,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14세 소녀 마리 반 구뎀(Marie van Goethem)도 벨기에 출신의 하류계층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서도 무용수는 창녀와 별반 다름없이 취급되는 천한 직업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의 전당에 아즈텍 인디언을 들여놓았다며 인종차별적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실망하고 분노한 드가는 전시회가 끝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작업실에 옮겨와 처박아 두고, 두 번 다시 전시회에 내놓지 않았다. 1917년 드가가 사망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다시 빛을 보았고, 1931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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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6세 최승희> 신화가 지속되었던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가 집필한 세 개의 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그가 <문예(193411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 둘째는 1925년에 발표한 실록 단편 <16세의 일기(十六歳日記)>, 셋째는 1926년에 발표한 그의 초기 대표작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무희 최승희론(1934)>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를 일본일(日本一) 무용가라고 선언했다. 일본 최고라는 말이다. 최승희는 3(1929-1933)의 경성 활동을 접고 스승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와 1934920일 도쿄에서 첫 공연을 가졌는데, 이 공연을 관람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곧바로 <무희 최승희론>을 집필해 <문예>지에 기고하면서 최승희를 극찬한 것이다.

 

 

<무희 최승희론>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6세 최승희>3번 언급했다. 같은 글에서 같은 표현을 여러 번 서술한 것은 강조의 뜻임에 틀림없지만, 3번이나 서술한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가 무리해 가면서 최승희의 ‘16세 신화를 강조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대답의 일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소설 <16세의 일기(192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이 16세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258-9월호 <문예춘추><17세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2회로 나뉘어 발표되었지만, 1927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6세였음을 밝히면서 작품의 제목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다.

 

<16세의 일기>의 저술 배경을 생각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를 만났을 때,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최승희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가 의사였던 부유한 집에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모와 조부모, 여동생을 차례로 잃고 16세에 천애 고아가 되었지만 글쓰기에 매달려 험한 세상을 헤쳐 왔다.

 

최승희도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몰락한 채 빈곤 속에서 여학교를 졸업했으나 진로를 찾지 못하던 중, 16세의 나이에 발견한 무용에 매달려 낯선 일본 땅으로 건너와 인생을 개척 중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즈의 무희(1926)>는 그 내용과 발표 시기의 양면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의 삶과 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시즈오카현의 오지 이즈(伊豆) 지방에서 유랑하던 천민 무희에게 사랑을 느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무희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우호적 정서는 일본 제국의 변방 조선에서 온 <반도의 무희> 최승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의 무희>가 발표된 것은 <문예시대(文藝時代)> 19261월호와 2월호였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론가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1년만인 1927320일 단행본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16세의 일기>도 수록되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19264월은 혜성처럼 등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16세의 일기>가 일본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는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이 최승희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이 보였다.

 

 

또 최승희가 19333월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공연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332, 쇼치쿠 영화사가 <이즈의 무희>를 영화화하여 개봉했다. 소설 <이즈의 무희>와 영화 <이즈의 무희>는 두 번에 걸친 최승희의 일본 활동 시작 시기와 일치했던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고, 최승희의 공연 활동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발표가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첩된 우연을 통해서나마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특별한 관심과 작품들이 <16세 최승희> 신화를 이어받아 영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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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16세 최승희신화를 일으키고 유지시킨 최대 공헌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였다. 훗날 <설국(雪國유키구니, 1937)> 등의 작품으로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1968)한 문호이자, 지금도 일본인들이 애호하는 10대 작가의 한 사람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0년대에도 이미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한 주목받는 작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4년 일본 종합문예지 <문예(文藝)> 11월호에 실린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 여류 신진무용가 중에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했다. 글 중에서 자신은 작가이지 무용 전문가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일찍부터 무용에 관심이 많았고, <이즈의 무희><무희> 등의 무용과 관련된 작품을 다수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일본일 작가에 의해 일본일의 무용가로 지목되었으니 일본 문화계가 최승희에게 주목했던 것은 당연했다. 최승희의 1930년대 중반 인기 급부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평가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승희의 성공 신화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을 테니 두 사람의 서로 칭찬하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예>무희 최승희론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 무용가선언으로 유명해진 글이지만 그 글이 ‘16세 최승희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은 그동안 지적되지 않았다. 4쪽 분량의 이 기고문에는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나이가 16세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한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하고자 하였고,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 여학교를 졸업하고도 16세였던 까닭에 나이가 어려서 음악학교의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최승희가 오빠에게 이끌려서 입문하겠다고 이시이씨를 찾아왔을 때는 여학교 졸업 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이시이씨와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하며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걸작 <에헤야노아라>와 같은 것은 일본의 <갓보레>와 같은 춤인데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에서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8년 전에 16세라면 그는 아직도 너무 젊다. 천부의 체구와 재분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7)

 

 

무희 최승희론은 문예 193411월호 153-158쪽의 6쪽이 걸친 기고문이지만 첫 쪽과 마지막 쪽은 1-2행의 짜투리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4쪽짜리 글이다. 그 짧은 글에서 최승희는 16라는 표현이 3번이나 사용된 것이다. 이는, 의식적 결과이든 무의식적인 실수이든, 작가에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16세라는 나이에 집착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시절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01년에 아버지, 1902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1906년에는 할머니를 잃었고 1909년에는 누나가 죽었다. 1912년 이바라키 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1914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천애 고아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바라키 중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잃었던 상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했고, 이를 <17세의 일기>라는 단편소설로 만들어 <문예춘추> 19258월호와 9월호에 나누어 발표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망 당시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 세는 나이가 16세였다는 점을 깨달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7년 단행본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1927)>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면서 제목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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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이른바 ‘16세 최승희신화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내 중단되었지만 일본에서는 8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최승희와 가깝고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네 사람의 역할을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째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다. 192615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그였다. <경성일보>의 테라다 토시오 학예부장에게 소개장을 부탁하면서 여동생의 나이를 한 살 올려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15세였음을 밝혔다.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라고 말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특히 이시이 바쿠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2-15세의 조선인 여성을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발표한 터여서, 최승일이 이시이 바쿠의 연령 제한을 어겨 가면서, 세는 나이로 15, 만나이로 14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일부로 한두 살 높인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필자는 작가 최승일이 조선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로 알려진 16세를 동생의 나이로 제시했던 것이며, 이는 춘향의 나이 16세와도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전혀 없는 셈이다.

 

둘째는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였다. 그는 ‘16세 최승희신화를 최초로 신문에 보도했고, 그것이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되도록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1926325일자 <경성일보>‘16세 최승희신화를 처음 보도했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37년 총독부의 행정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에서 다음과 같이 ‘16세 최승희신화를 반복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이 인용문은 자연스럽게 읽힐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산술적 오산이 포함돼 있다. 19374월 현재 최승희가 26세였다면, 11년 전인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이나 전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했다. 잘못된 계산이었지만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은 채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셋째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였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31)>에 실린 최승희와 조택원이라는 글에서 최승희와 처음 만났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경성의 공회당 공연은 분명 그 이듬해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장을 지내셨던 테라다 히데오(寺田壽夫)씨의 소개장을 가지고, 나의 공연 대기실을 방문한 두 남매가 있었다. 오빠 승일군은 자기 여동생을 어떻게든 무용수로 만들고 싶다면서. 제발 거두어 주기를 청했다. 그 여동생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최승희이지만,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시이 바쿠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도 전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16세 최승희신화를 1950년대까지 연장시킨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한편 이시이 바쿠의 아내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최승희 팜플렛 제1>에 실은 기고문 생각날 때마다 보고 싶은 최승희에서 최승희씨는 서울의 명문 여학교인 숙명을 그 해에 졸업한 착하고 귀여운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아내 야예코가 제대로 알고 있던 최승희의 나이를 이시이 바쿠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최승희의 잘못된 나이를 계속해서 밀고 나갔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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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경성일보>에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16세 춘향이의 후광에 편승해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리 큰 영향력도 없었고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조선의 민족지들은 최승희의 초기 무용 활동에 침묵했었고, 최승희가 자서전을 통해 당시 나이를 ‘15로 바로잡은 후 ‘16세 최승희신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16세 최승희신화는 조선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일본으로 옮겨졌고 오래 지속되었다. ‘16세 최승희신화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이 조선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였지만, 같은 해 615일자 일본의 일간지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에 의해 반복되었다.

 

192999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16세 최승희신화를 바탕으로 당시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로 보도했고, 이는 일본의 대표적 문예지 <문예(文藝)> 193411월호에서도 반복되었다. 1935년에는 잡지 <실업의 세계(實業世界, 10월호)><부인구락부(婦人俱樂部, 3월호)‘16세 최승희신화를 이어갔고, 1937년에는 일본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던 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서도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서술이 계속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일본의 여성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 19358월호가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서술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은 나의 자서전(自敍傳)”으로 최승희가 직접 집필해 기고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최승희는 당시 나는 (만으로) 14세였다고 밝혔는데도 일본 매체들은 “16세 최승희의 신화를 이어간 것이다.

 

또 다른 예외는 있었다면 최승희의 일본어 단행본 자서전 <나의 자서전(1936)>이었다. 도쿄에서 출판된 이 자서전에서 최승희는 무용 시작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다. <부인구락부>나의 자서전과 단행본 <나의 자서전>에서 같은 시기의 나이를 다르게 서술한 것은 만 나이(14)’연 나이(15)’의 차이였을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문헌, 예컨대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에 따르면 최승희는 자신이 19263월에 15세였다고 서술하면서, 이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최승희 자신의 기록에 착오가 없다면, 최승희의 생일은 이미 알려진 것과는 다른 날짜였을 가능성도 제기될 수 있다. 이 점은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만 나이가 표준이었던 일본에서 사실과 다른 ‘16세 최승희신화가 이렇게 오래 계속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승희가 19264월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 입단하면서 그의 생년월일을 제대로 보고했다면, 그것이 음력 19111124일이든 양력 1912112일이었든, 그의 나이는 ‘14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는 1940년에 발행한 그의 자전적 에세이집에서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고 기술했고 (<나의 얼굴>, 1940:30), 이는 1955년에 출판된 다른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서도 반복되었다.

 

다카시마 유자부로는 1959년에 최초의 최승희 단행본 평전을 발간하면서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그대로 인용했고(다카시마 유자부로, <최승희>, 1981(1959):19), 이는 재일동포 평전자 김찬정의 평전 <춤꾼 최승희(2003:34)>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에는 미도리카와 준의 평전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생애(2006:74)>에서도 서울공회당에서 공연할 때 최승희라는 여학교를 갓 졸업한 16세의 조선소녀가 입문했다고 서술했고, 이현준의 저서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407)><경성일보>와 이시이 바쿠의 회상을 인용해,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다고 서술했다.

 

일본에서는 최승희 본인이 자서전과 기고문을 통해 당시 나는 16세가 아니었다고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왜 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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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일의 제보와 테라다 토시오의 보도로 시작된 ‘16세 최승희신화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러한 효과는 없었던 것 같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지속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우선 <동아일보><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 일간지들에는 최승희에 대한 초기 보도가 없었다. 그의 무용유학을 보도한 것은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매일신보>뿐이었다. 일본어 신문 <조선신문><부산일보>에도 최승희 기사는 없었다.

 

 

민족지 <동아일보>가 처음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도한 것은 지난 19271026일이었는데, 이는 최승희가 19263월말 일본 무용유학을 떠난 이후 1년 반만이었다. 그동안 <동아일보>는 최승희에 관한 기사를 단 1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가 최승희를 처음 보도한 것은 19271027일이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그보다 2달 전인 1927814일 이시이 바쿠의 제자였던 강홍식(姜弘植)과 한병룡(韓炳龍)을 언급한 기사를 냈지만, 그 당시에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연수 중이던 최승희를 언급하지 않았다. 1027일의 기사도 최승희 관련 기사가 아니라 숙명-진명-양정학교의 연합 동창회인 양명회 간친회 행사의 공짖 기사였다. 최승희가 그 행사에 출연한다는 내용이 단 한 줄이 맨 끝에 덧붙여져 있을 뿐이었다.

 

, 최승희의 초기 무용 유학에 대해 민족지들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성일보><매일신보>19266월의 최승희 초무대, 19269월의 가을 공연과 이후 홋카이도 순회공연, 1927년의 봄 공연과 규슈 및 오키나와 지방공연 등을 보도했을 때에도 조선어 민족지들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어 민족지들이 192710월에 이시이 바쿠 경성 공연을 보도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최승희의 나이를 보도한 적이 없었다. 이는 총독부 기관지들과 다른 일본어 신문들 때문에 최승희가 이미 경성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경성일보><매일신보>, 라디오 방송인 <경성방송>, 그리고 <조선신문><부산일보>의 보도로 최승희는 이미 조선에서는 일정한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나이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2999일자 <중외일보>였다. 귀국 직후 옥천동 소재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 기사 말미에 그의 당시 나이가 19세라고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에도 무용 유학 시작 당시 ‘16세 최승희신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19299월의 나이가 19세였다면, 19263월의 나이가 16세였을 것으로 추론할 수는 있게 했다.

 

최승희가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 조선의 매체들도 덩달아 최승희에 대한 전기적 기사들을 내기 시작했다. 그 첫 기사는 조선의 여성잡지 <여성>19343월호(24)에 실린 인터뷰 기사였는데, 그 첫머리에 “16세 최승희가 언급됐다.

 

 

열여섯 살에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오빠가 동경 가서 무용을 공부하라고 하시길래, 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 불안과 공포에 떠는 가슴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되었습니다.” (<여성>, 19343월호, 75)

 

하지만, 같은 시기에 발행된 종합잡지 <조선중앙(19343월호)>는 무용 시작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5세였다고 보도했다.

 

“1926년 이른 봄 최양의 나이 겨우 열다섯이 되어서 숙명여고를 마치던 해이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그는 좁은 가슴을 태워가며 졸업 후의 일을 걱정하였다.” (<조선중앙> 19343월호, 101)

 

<조선중앙>은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및 무용 시작 시기의 나이가 16세가 아니라 15세였음을 밝혔는데, 이는 최승희로부터 직접 취재한 결과였음에 틀림없다.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최승일의 의도와는 달리 ‘16세 최승희의 신화가 그다지 작동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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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큰 오빠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살 올려서 <경성일보> 취재에 응한 것은 고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세는 나이로 15세였던 최승희를 16세라고 전했던 것은 실수나 착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1년에 태어난 최승일은 최승희가 태어났을 때 이미 10세 내외의 나이로 보통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 나이면 막내 동생이 태어난 시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최승일은 남동생 최승오나 다른 여동생 최영희보다 막내 최승희와 가장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승희도 큰 오빠 최승일을 마치 제2의 아버지처럼 따랐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 생일이나 나이를 잘못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해 <경성일보>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와 처음 만났을 때 무용가로 나서려는 여동생의 나이를 ‘16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문학적 패러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최승일은 문인이었다. 19246월호 <신여성>에 단편 아내떠나가는 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고, “김첨지의 죽음”(<매일신보>, 1924127일자), “바둑이”(<개벽>, 19262월호), “봉희(鳳姬)”(<개벽>, 19264월호) 등의 작가였고,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예술인 단체에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의 문화예술인 써클에서는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16세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16세 여성에게 그런 수식어가 붙었던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전통적으로 여성의 16세는 성년으로 인식되었다. 남성은 15세에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관례(冠禮)를 치렀고, 여성도 땋은 머리를 쪽지고 비녀를 꽂는 계례(筓禮)를 행했다. 그래서 16세의 여성은 소녀티를 벗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고전 국문학과 한문학에서도 여성의 16세를 과년(瓜年)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여성이 혼기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오이 과()’자를 쓴 데에는 해학과 퍼즐이 담겨 있다. 오이 과()자를 파자(破字)하면 여덟 팔()자가 2개 나오는데, 이를 합치면 16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16세를 파과지년(破瓜之年)이라고 불렀다. (한편 파과지년은 64세의 남성에게도 쓰이곤 했는데, 이는 팔을 두 번 곱하면 64세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조선 민중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였던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의 주인공 춘향의 작중 나이가 16세였다. 조선 문학에서 가장 아름답고, 재주가 출중하고, 정절이 높은 최고의 여성상으로서 그려진 춘향이 이몽룡을 만났을 때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이다. 완판본 <열녀춘향수절가>에 따르면 춘향과 몽룡은 합방 첫날밤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도령 하는 말이, ‘성현(聖賢)도 불취동성(不取同姓)이라 일렀으니 네 성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뇨?’ ‘성은 성()가옵고 연세(年歲)는 십육 세로소이다.’ 이도령 거동 보소. ‘허허 그 말 반갑도다. 네 연세 들어보니 나와 동갑 이팔이라.’”

 

춘향이 나이가 16세라고 대답하자 몽룡은 나와 동갑 이팔(二八)”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팔이란 두()개의 팔(), 16세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이팔청춘(二八靑春)이다. 두 사람 모두 파과지년이자 이팔청춘이었던 것이다.

 

이몽룡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춘향이 16세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날 밤 두 사람이 벌인 춘사는 요즘의 포르노 영화에 못지않은데, 조선 시대의 16세 여성은 그런 성적 자세와 입담이 가능하도록 무르익은 나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때마침 <춘향전>은 이광수에 의해 현대소설로 개작되어 <일설춘향전(一說春香傳)>이라는 제목으로 1925930일부터 19261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고, 이내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광수의 <일설춘향전>이 경성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최승일이 여동생 최승희의 나이를 묻는 테라다 토시오에게 ‘16라고 대답했던 것은 아마도 문사 최승일의 뇌리에 박혀있던, 춘향을 전형으로 하는 16세 여성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이는 또 무엇을 해도 충분한 성숙한 나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무용을 시작하는 최승희의 나이로 묘사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렇게 보도된 ‘16세 최승희‘16세 춘향이의 이미지와 함께 조선 사회에 손쉽고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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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최승희 나이가 세는 나이15세였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오빠 최승일은 어째서 16세였다고 말했던 것일까? 최승희의 나이가 최초로 언론에 공개된 것은 1926325일의 <경성일보>였다.

 

조선 예찬자 이시이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경성일보>는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던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취재원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이었다. 최승일은 1926321일 경성도서관에서 막 배달된 <경성일보>를 읽으면서 3면에 실린 이시이 인터뷰를 읽었다. 이 기사에는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무용가로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최승일은 다음날 (아마도) 오전에 <경성일보>를 찾아가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를 만났다. 당시 최승일은 <경성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성일보를 방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경성일보><경성방송국>은 같은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를 찾아가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언론계 종사자일 뿐 아니라 당시 최승일은 일본대학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로서 소설 작품도 여러 편 발표한 청년 문사였기 때문이다. 문인과 학자와 예술가들을 잘 알고 있어야 했던 학예부장으로서 테라다 토시오는 이미 최승일과 아는 사이였을 가능성도 높다.

 

이 만남의 자리에서 최승일은 자신의 여동생이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부탁했을 것이고, 테라다 토시오에게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미 이시이 바쿠를 아는 사이였고, 이시이 바쿠의 첫 경성공연을 후원한 것이 바로 <경성일보> 학예부였기 때문이다. 최승일은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최적임자를 찾아갔던 것이다. 최승일의 요청에 따라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써주었다.

 

 

최승일이 최승희를 대동하고 이시이 바쿠를 찾아갔던 323일 밤, 테라다 토시오는 이시이 바쿠의 부탁으로 최승희를 직접 면접하기도 했다. 경성공회당 지하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두 남매와 자리를 마주한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의 가족과 성장배경에서 여학교를 졸업한 사정, 그리고 무용을 시작하려는 이유와 포부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면접을 했었고, 이시이 바쿠에게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을 가장 먼저 안 것도 테라다 토시오였다. 그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의 소개자였을 뿐 아니라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시이 바쿠가 조선인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새로운 뉴스를 보도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 기사가 325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최승희가 16세였다는 점을 처음 보도한 사람은 테라다 토시오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최초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오빠 최승일이었음에도 틀림없다. 그리고 ‘16세 최승희의 정보가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로 건너간 것은 소개장이 전달된 322일이거나 혹은 테라다 토시오가 이시이 바쿠를 대신해 최승희를 면접했던 323일 밤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당시 조선식 세는 나이1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승일이 테라다 토시오에게 16세라고 전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점은 아직도 의문이다. 특히 321일자 <경성일보>의 인터뷰 기사에 이시이 바쿠가 “12-15세 사이의 조선인 여성 제자를 찾아내고 싶다고 한 나이 조건을 읽고도 최승일이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로 한 살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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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자서전에서 여학교 졸업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말했다. 그는 두 권의 자서전에서 5회 이상 일관적으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서술했으므로 그것은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때의 15세가 만 나이연 나이세는 나이중에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는지는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결혼 당시 최승희와 안막의 나이가 동시에 언급된 같은 자서전의 서술을 검토하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의 자서전(1936)>의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1932년은 1931년의 잘못이라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 기록에는 결혼 당시 최승희가 20, 안막이 22세였다고 되어 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193159일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생일이 언제였는지에 따라 각 나이는 다음의 6가지로 계산될 수 있다.

 

우선 안막의 경우, 그의 공식 생일(1910418)이 양력 날짜였을 경우 그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이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공식 생일 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로 환산해야 했다면 실제 생일은 1910526일이 되어, 그의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최승희의 나이도 비슷한 방법으로 6가지로 정리된다.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일 경우 결혼 당시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이다. 만일 최승희의 생일 날짜가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최승희의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이다.

 

이상의 각각의 경우에 따른 안막과 최승희의 나이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표로 정리될 수 있다. 이 표에 따르면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던 경우는 19111124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으로 연 나이이었을 때와 음력으로 세는 나이였을 때였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였던 경우는 191048일이라는 생일날짜가 양력이든 음력이든 세는 나이였을 때였다.

 


공식생일 생일 날짜가 양력인 경우 생일 날짜가 음력인 경우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만 나이 연 나이 세는나이
최승희 1911/11/24 19 20 21 19 19 20
안막 1910/4/18 21 21 22 20 21 22

 

따라서 최승희가 20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고 안막의 나이가 22세인 경우가 두 경우이므로, “최승희 20세와 안막 22의 조합은 4가지로 정리된다. (1) 두 사람의 생일이 모두 음력이고 모두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2) 최승희와 안막의 생일 날짜가 모두 양력이지만 최승희는 연 나이,’ 안막은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3) 최승희의 생일은 양력으로 연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 그리고 (4) 최승희의 생일은 음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하고 안막의 생일은 양력으로 세는 나이를 계산했을 때이다.

 

4가지 경우 중에서 첫 번째(1)의 경우가 가장 사실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음력’, 실제로는 태음태양력을 사용했고, 나이계산에는 세는 나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안막이 그같은 관습을 따른 것이라면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그들의 실제 생일은 각각 191212(최승희)1910526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승희가 같은 자서전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의 나이 15세였도 역시 세는 나이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19263월말에 세는 나이로 15세였다면 그의 생년은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었을 것임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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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두 자서전은 각각 150쪽 안팎의 분량이지만 거기에는 최승희의 나이가 10회 이상 언급되었다. 더구나 그중에는 상충되는 서술도 등장한다.

 

최승희가 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 유학을 시작했던 당시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특히 그렇다. <나의 자서전(1936)>에서는 당시 나이를 15세로 일관되게 서술했지만,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당시 15세였다는 서술과 함께 16세였다는 기술도 여러 군데 등장했다.

 

그렇지, 그래, 올해 들어가서 2년 후 을종 교원으로 임명이 된다하더라도 나이가 열여덟 살이니 열여덟 먹은 처녀가 어떻게 남의 집 아이들을 가르치니? 다 그만두어라, 승희야.” (<최승희 자서전>, 1937:34)

 

 

이는 오빠 최승일의 말이었다. 최승희가 1926319일 경성사범학교의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귀가하자 최승일이 여동생을 위로하려고 한 말이다. “2년 후에 18가 된다는 것은 지금 16세라는 뜻이다. 같은 책에서 최승희가 자신은 15세의 어린 소녀였다는 서술과는 다르다. 여학교 졸업 당시 최승희가 15세가 아니라 16세였다는 기술은 같은 책에 2번 더 나온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코자 하였었다.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코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의 여학교를 졸업하면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의 수험에는 연령이 어렸던 까닭도 있었다. 그때에 공교롭게 석정막씨의 일행이 경성에서 공연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78-79).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석정씨와 한가지로 출발하게 되었는데기차의 창에서 어머니와 서로 붙들고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최승희 자서전>, 1937:79-80).

 

최승희가 직접 자신이 15세였다고 서술한 자서전에 당시 나이가 16세였다는 내용이 3번이나 더 실렸다는 것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16세 언급의 화자들을 살펴보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다.

 

 

‘2년 후에 18세가 된다는 말한 것은 오빠 최승일이고, ‘16세인 까닭에 음악학교 수험에 연령이 어렸으며 ‘16세의 그녀가 이시이 바쿠씨와 함께 경성을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였다. , ‘16세 발언을 한 것은 최승희 본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중 최승일의 발언이 특히 주목을 끈다. 그는 본인과 부모와 함께 자기 여동생의 나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어째서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로 언급했던 것일까? 어째서 본인이 언급한 나이와 오빠가 언급한 나이에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최승희의 나이도 16세였다. 그런데 이 두 신문 기사의 취재원은 최승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이시이 바쿠에게 소개하기 위한 소개장을 받은 것이 <경성일보>의 당시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사전)였기 때문이다. 조선어로 발행되던 <매일신보>는 일본어로 발행되던 <경성일보>와 같은 사옥을 사용하는 자매지였으므로, <경성일보>의 취재 내용은 손쉽게 <매일신보>에도 보도되곤 했었다.

 

 

따라서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16세의 최승희라는 최초의 신상정보는 맨 처음 최승일로부터 테라다 토시오에게 전해졌고, 그 내용이 <경성일보><매일신보>에 보도된 이후, 모든 일본어권 미디어에서는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가 16세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것이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최승희는 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최승일은 어째서 동생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한 것일까? 두 사람은 가족이므로 서로의 생일이나 나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같은 차이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째서 나중에라도 바로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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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19263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무용유학을 시작했을 때 나이가 15,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월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가 18세였다고 서술했다. 이 나이들은 각 자서전에 한 군데 이상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두 자서전에 나타난 결혼 시기의 나이 서술을 찾아보았다. 결혼 당시의 나이에 대해서는 <나의 자서전><최승희 자서전>에 각 1번씩 명시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우선 <나의 자서전>의 기록을 보자.

 

번잡하지 않게 세비루를 입은 신랑과 간단한 스포츠복을 입은 신부는 트렁크를 하나씩 든 간단한 차림으로 석왕사로 밀월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 그것이 쇼와7(=1932), 내가 스무 살, 안막이 스물두 살 되던 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99-100).

 

 

우선 바로잡을 것은 최승희의 결혼연도는 1932년이 아니라 1931(쇼와6)이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식을 보도한 당시 신문들을 조사하면, 결혼일시는 193159일 오전11시였고 장소는 동대문밖 흥릉 옆의 청량관이라는 연회장이었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 날짜가 맞다면 결혼 당시 최승희의 만 나이19(+5개월반), ‘연 나이20, ‘세는 나이21세였다. 그러나 만일 최승희의 공식 생일 날짜가 실제로는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 날짜로 환산하면 1912112일이 되고, 그랬을 경우 최승희의 결혼 당시 나이는 만 나이19(+4개월), ‘연 나이19, ‘세는 나이20세가 된다.

 

생일이 1910418일로 알려져 있는 안막의 만 나이21(+20),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였다. 그러나 만일 안막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어서 양력날짜(1910526)로 환산해서 나이를 다시 계산하면, ‘만 나이20(+11개월), ‘연 나이21, ‘세는 나이22세가 된다.

 

 

따라서 안막의 나이가 22, 최승희의 나이가 20세였다는 것은 나이 계산방식이 세는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나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에도 똑같이 나타났다.

 

내가 결혼을 하면 인기가 줄어질 것이라고 걱정하고, 나의 결혼을 반대한 사람들도 많았으나, 나는 가령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여자로서, 아내로서, 또는 무용가로서, 어디까지든지 참되게 살아갈 생각을 하고 소화7(=1932) 봄 나는 스무 살 때에 결혼하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6).

 

여기에서도 최승희는 결혼연도가 1932년으로 기술됐다. 여성이 자신의 결혼시기를 잘못 기억하는 것은 드문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최승희의 회상에는 자주 오류나 착오가 발견되곤 한다. 그의 나이에 대한 서술을 이렇게 자세히 살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나의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결혼 즈음에 19세였다고 서술한 부분도 등장한다. 나이 서술에 일관성이 결여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조금 자세히 살펴봤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열아홉의 봄을 맞이했습니다. 경제적인 고통, 예술상의 번민, 인력 부족, 금전에 의한 유혹, 더러운 유혹의 마수……어느덧 옳고 진지한 결혼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그 무렵의 나의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89-90).

 

이 서술이 무용연구소를 개설한 192911월부터 1930년 대부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맞는 기술이다. 그러나 결혼 직전인 1931년 초를 포함하는 기술이라면 최승희의 나이를 19세라고 한 것은 착오를 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최승희가 결혼식을 가졌던 193159일 기준으로 그의 세는 나이20세였다면, 그보다 5년 전 여학교 졸업당시인 19263월의 세는 나이15세였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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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자서전에는 졸업 당시 혹은 무용 유학을 떠나던 시기 외에도 군데군데 자신의 나이를 밝힌 부분이 있다. <나의 자서전(1936)>에는 최승희가 도쿄에 도착해 이시이무용단에서 배우고 연습하던 초기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아무리 강철 같은 결의를 가지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람 몫을 하는 어엿한 무용가가 되겠다며 필사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라고 해도, 결국은 열대여섯 살의 소녀가 아닌가요?” (<나의 자서전>, 1936:57)

 

 

최승희가 경성을 떠나 도쿄에 처음 도착한 것이 19264월초였으므로, 위의 서술은 그 직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당시에 자신이 열대여섯 살의 소녀라고 했으므로 여학교 졸업과 무용 유학 시작 시점의 나이는 15세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끝내고 19297월 경성으로 귀국했을 당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등장한다.

 

마침내 경성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18, 마침 경성 하늘에는 흰 구름이 반짝이는 한여름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자서전>, 1936:78-79)

 

최승희가 경성의 고시정 19번지에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처음 설립했던 것은 1929111일이었다. 최승희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라면 경성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최승희의 만 나이17(+11개월), ‘연 나이18, ‘세는 나이19세였다. 최승희는 이때 자신이 18세라고 했으므로 이는 연 나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일 공공기록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는 1912112일이므로, 최승희의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의 만 나이는 여전히 17(+9개월), ‘연 나이17, ‘세는 나이로는 18세가 된다. 이 경우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가 18살이라고 했던 것은 세는 나이였던 셈이 된다.

 

 

따라서 19111124일이 원래 양력 날짜인지 혹은 음력 생일을 양력 날짜로 기록한 것인지에 따라 이 18세는 연 나이일 수도 있고 세는 나이가 될 수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19263월의 나이는 15세였던 것으로 역산할 수 있다.

 

<나의 자서전>에 나타난 이 서술은 <최승희 자서전(1937)>과 비교해 보아도 일치된다. 이 조선어 자서전에도 무용연구소 설립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계획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없이 경성에 조그마한 연구소를 설립하고새로운 예술분야에 있어 향토 개척의 첫 번째 발걸음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돌아보건대 내 나이 열여덟 살 되는 해였다.” (<최승희 자서전>, 1937:23)

 

, 최승일이 편집한 자서전에도 경성 고시정 무용연구소 설립 시절의 최승희 나이는 18세로 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최승희 자서전>에 첨가된 최승일 자신의 회상에도 비슷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리하여 몇 달이 못 되어 너는 집으로 돌아와서 열여덟 살 된 몸으로 러시아에 가려고 러시아 영사관에 있던 김온 군을 통하여 러시아행을 실현하려고 운동을 하였었지. 그러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아니하여 고시정(古市町) 언덕에 연구소 문패를 붙이고 대담하게 안무를 하여 보았었지.” (<최승희 자서전>, 1937:53)

 

최승희가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와 1929111일 무용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27개월 전이었던 19263월의 나이는 15세라고 보아야 한다. 192911월의 나이가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9263월의 나이는 역시 세는 나이이든, 연 나이이든 15세였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헌들을 볼 때 최승희나 그 오빠 최승일이 만 나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관습적으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일제 강점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심지어 나이 계산에까지 반영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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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최승희는 자신의 생일과 나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지금까지는 신문이나 잡지의 보도, 학적부와 출입국 기록 등의 문헌을 중심으로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를 정리해 왔지만, 정작 본인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서 뭐라고 서술했는지 살펴봤다.

 

최승희의 자서전에도 두 권이 있다. 하나는 도쿄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에서 조선어로 출판된 <최승희 자서전(1937)>이다. <나의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저자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로 되어 있다.

 

17장으로 구성된 <나의 자서전>은 전부 최승희가 직접 서술한 것이지만, <최승희 자서전>150쪽 중 약 70쪽은 최승희의 글이고 나머지 80여 쪽은 오빠 최승일을 비롯 조선과 일본의 저명 문화예술인들의 평론이다. 두 자서전의 최승희 글에 겹치는 내용이 전혀 없고, 한 책이 다른 책을 번역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권의 자서전은 별개의 책이다.

 

 

<최승희 자서전>2006년 한국에서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불꽃>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바 있지만, 일본어 <나의 자서전>은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고,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도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번역 소개된 바 없다.

 

<최승희 자서전>에는 최승희가 자신의 나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9번쯤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때는. 1926, 꽂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 봄이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6)

 

최승희는 자신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이 15세라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이때의 15세라는 나이가 어떤 나이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양력 19111124일이 그의 생일이었다면 이때의 15세는 연 나이가 되지만, 19111124일이 음력 날짜였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실제의 생일이었다면, 졸업 당시의 15세는 세는 나이가 된다. 어느 경우에나 만 나이로는 14(+4개월, 혹은 +2개월반)이었던 셈이다. 같은 책에는 숙명여학교 졸업 즈음의 나이에 대한 서술이 한 번 더 나온다.

 

 

그 사범학교의 입학시험에 나는 쉽게 합격이 되었다. 이만하면 좋다, 하고 모두 나의 손을 잡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득 어두워지는 나의 운명! 추운 삼한사온의 계절이 지나가고 북한산에 덮였던 눈이 녹아 흐르며 벚꽃과 살구꽃이 웃는 듯이 피는 봄이 우리들을 찾아왔으나, 암담한 가정에 불행한 나는 다만 고요한 침묵 속에서 오빠가 빌려준 소설과 시를 읽기에 그날그날을 보냈다. 그중에도 석천탁목 선생님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나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생에 관한 문제에 푹 빠져 있었다. (<최승희 자서전>, 1937:13-14)

 

최승희가 치렀던 경성사범 입학시험은 192636일부터 3일간이었고, 면접시험은 마지막날인 38일이었을 것이므로, 숙명여학교 졸업 직전이었고, 최승희는 이때의 자신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계집애라고 서술했던 것이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5세였다는 점은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에도 서술되어 있다.

 

모교의 교원회의 결과, 나를 학교 급비생(=장학생)으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이가 어린 까닭에 하는 수 없이 열여섯 살이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일 년 동안 있다가 동경에 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의 자서전>, 1936:22-23)

 

사범학교 입학에 실패한 후 숙명여학교에서 최승희를 동경음악학교에 유학시킬 계획을 세웠던 것인데, 이 역시 연령 제한으로 1년 더 기다렸다가 16세가 되는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으므로, 졸업 당시의 나이는 15세였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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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는 졸업식날이었던 1926323일 저녁에 오빠 최승일과 함께 이시이 바쿠의 무용공연을 관람했다. 아마도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졸업 선물이었겠지만, 이 선물은 여동생을 무용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승일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오빠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틀 후인 325일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경성을 출발해 도쿄로 향했다.

 

<경성일보><매일신보>가 당시 최승희의 나이가 16세였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세는 나이였고, 연 나이로는 15, 만 나이로는 14세였던 시기였음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서 최승희의 생년월일이 알려지고 실제 나이가 밝혀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계속되었다. 특히 세는 나이를 전혀 쓰지 않고 만 나이만 사용하던 일본에서도 그런 관행이 이어졌다.

 

 

1926615일자 <도쿄니치니치(東京日日)신문>무용계에 싹트는 조선의 꽃 한송이-최승자양이라는 기사에서 최승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기사 중의 최승자는 스승 이시이 바쿠가 고쳐준 최승희의 일본 이름이었다.)

 

새로운 제자의 이름은 최승자(崔承子, 샤이 쇼코)씨로, 올해 16세이며, 조선에서는 상당히 존경을 받는 양반 가문 출신이며, 그의 오빠는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는 자신이 다녔던 경성의 여고,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올 3월에 졸업했다.”

 

19266월에도 최승희의 나이는 여전히 만14(+7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일간신문은 여전히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했다. 그로부터 한 달반이 더 지난 1926730일자 <야마토(やまと)신문>유일의 조선문용가 최승희, 눈물의 정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도 같은 서술을 반복했다. (이 기사에서는 최승자라는 이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최승희가 본명을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스승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기사에서는 조선이 낳은 유일한 무용가, 올해 16세의 아가씨 최승희, 최근 이 소녀로 하여금 더욱 예술의 길에 몰두하게 한 에피소드가 있다면서 무용을 천한 기생의 일로 여기는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쿄 유학을 오게된 경위를 소개했다.

 

 

이때에도 최승희의 실제 나이는 여전히 만14(+8개월)이었지만 <야마토신문>은 그의 나이를 16세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더 지나서도 변하지 않았다.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할 당시 <경성일보>의 학예부장으로서 오빠 최승일에게 이시이 바쿠를 만날 수 있도록 소개장을 써주었던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조선행정> 1937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테라타 토시오가 1937년의 최승희가 26세라고 한 것은 맞게 계산한 것이다. 당시 최승희가 일본 언론이 사용하던 연 나이26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37년 보다 11년 전이었던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는 계산이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 전에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서술했다. 산수가 엉터리였는데도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혹시 최승희 자신이 당시 나는 16세였다고 발표한 적이 있었는지 조사해 봤지만, 그런 사실도 없었다. 예컨대, 최승희는 조선어판 <나의 자서전(1936: 6)>에서 당시 자신은 15세였다고 밝혔다. “그때는 1926,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이었는데 그 해에 서울에 있는 숙명여학교를 막 졸업했으니, 내가 열다섯 되던 해 봄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썼던 것이다.

 

최승희가 16세였다는 보도는 어째서 이렇게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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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23,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325일 아침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라고 보도되었다. 325일자 <경성일보>는 최승희와 이시이 바쿠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 예찬자 바쿠씨가 이번 조선 방문을 기회로 조선 소녀를 제자로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일행이 경성 제3회 공연을 끝낸 23일 밤10시경 공회당의 이시이씨 일행의 대기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싶다고 부탁한 아름다운 조선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경성)부내 체부동 137번지 최준현씨의 영양(令孃) 최승희(崔承喜, 16)였다.”

 

 

326일자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문사 최승일의 여동생이라는 점, 숙명여고보의 우등 졸업자라는 점, 그리고 325일 아침에 이미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는 점 등을 보강하며 후속 기사를 게재했다.

 

유럽 순회공연의 길을 가는 중에 경성(서울)에 이르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자, 특히 무용시가 남매의 눈에 띤 가련한 흰옷 입은 조선 소녀의 아담한 자태가 매우 흥미를 끌어 결국은 조선 소녀를 몇 명 제자로 쓰겠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청년 문사 최승일(崔承日)씨의 영매로 올해 봄 숙명(淑明)여자고등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최승희(崔承喜, 16)양이 다행히 부모의 승낙과 이시이씨 남매의 눈에 들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매일신보>327일의 보도에서도 숙명여학교 고등과 우등 졸업생 최승희(崔承喜, 16)양이 세계적 무용가 석정막(石井漠) 석정소랑(石井小浪)의 남매에게 제자가 되어 이십오일 아침 경성 역을 떠나 스승을 좇아 세계만유의 길을 떠났다함은 직보한 바 있다고 거듭 밝혔다.

 

 

이 두 매체의 보도에 나타난 최승희의 당시 나이는 16세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111124일생으로 알려진 최승희는 19263월말 현재 만 나이14(+4개월)이었고, 언론에서 흔히 쓰는 연 나이로도 15세였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보도한 것은 조선식 세는 나이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여학교 졸업 당시 나이가 만14세밖에 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조기입학이다. 최승희는 19184월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 나이가 만6세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 만8세에서 2살이나 모자랐다. 부친 최준현의 교육열과 최승희 자신의 영민함 때문에 세는 나이만 나이로 여기며 일찍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이유는 2년의 이른바 월반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는데, 보통학교(=초등학교)의 교육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중학교)의 교육연한을 3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때문에 1922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혼란이 생겼는데, 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고등보통학교 입학지원 자격이 ‘6년의 소학교(일본인) 혹은 보통학교(조선인)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총독부 학무국은 1922년 보통학교 졸업자들이 2년의 보습과를 이수한 후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도록 지침을 정했지만, 그 시행은 학교장의 재량에 맡겼다. 숙명여고보의 이정숙(李貞淑) 교장은 이 재량권을 활용해서 보통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보습과를 건너뛰고 바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도록 허용했는데, 최승희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최승희는 동급생들보다 최대 4살 어린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졸업한 것이 최승희에게 도움만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도쿄음악학교와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연령 제한을 벗어나기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오빠 최승일의 권고에 따라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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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나이 산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생일을 정하는 데 사용하는 달력으로 음력양력의 두 가지가 있고, 그 각각을 기준으로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는 나이’, ‘연 나이’, ‘만 나이의 세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력이란 흔히 말하는 그레고리력이다. 한국에서는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해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그레고리오력 채택을 추진했고, 고종은 김홍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음력 18951115일에 공식적으로 개력을 반포, 음력 18951117일을 양력 189611일로 정하고, 태양력 채택을 기념하며 왕의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변경하기까지 했다.

 

책력을 관장하던 기관도 이름을 관상감에서 관상소로 바꾸고 양력 달력을 발행, 배포했으나, 갑작스런 양력 채택으로 일반 백성뿐 아니라 궁궐 행사에도 혼란이 초래됐고, 음력에 맞춰 농사를 짓던 농촌에서는 새 달력에 반발했다. 책력을 양력으로 바꾸고 왕의 연호까지 건양으로 정한 것은 중국에서 독립하려는 의지로 보였지만, 사실은 일본에 종속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양력과 친일파에 대한 반발로 양력 시행은 저항에 부딪혔고, 시행 1년 만에 과거의 시헌력(時憲曆)으로 돌아갔으나, 일제의 강점(1910)으로 조선은 재차 양력을 사용해야 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일환으로 1873년에 음력을 완전히 폐지하고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었다.

 

조선에서 사용하던 시헌력(時憲曆)은 순수 음력이 아니라 양력과 음력을 합친 태음태양력이었다. 태음태양력은 한 달의 날짜를 정하는 데에는 달의 움직임을, 하루의 시간과 일 년의 계절을 정하는 데에는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은 달력이다.

 

삼국시대 이후 한국에서 쓰인 책력은 모두 태음태양력이다. 신라와 고구려는 인덕력(麟德曆), 백제는 원가력(元嘉曆)을 쓰다가 통일신라에서는 대연력(大衍曆), 후기에 선명력(宣明曆)을 사용했다. 고려에서도 통일신라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썼으나 충선왕 때에 수시력(授時曆)을 채택했고, 공민왕19(=1370)에 수시력의 이름을 바꾼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했다. 조선에서는 <칠정산내편>에 의해 수시력을 수정하여 사용하다가 효종4(=1653)에 마테오리치가 개발한 서양식 계산법을 사용한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해 대한제국 시기까지 이르렀었다.

 

 

한편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의 나이를 세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가장 널리 쓰이던 것이 세는 나이였다. 태어나자마자 1살로 정하고, 이후 새해를 맞을 때마다 1살을 더하는 방식이다. 이는 생일이 언제인가와 상관없이 새해를 맞을 때 1살을 먹는 방식인데, 이때의 새해는 음력상의 새해, 즉 설을 가리켰다.

 

만 나이는 양력의 도입과 함께 본격화되었고, 특히 일제 강점 이후에는 공식 기록에 남기는 유일한 나이가 되었다. 태어났을 때를 0세로 보고, 출생 후 첫 번 생일을 맞으면 1세가 되는 것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관공서 기록에 반드시 만 나이를 써야 했고, 그에 준하는 학교와 회사에서도 만 나이를 사용했다.

 

연 나이는 현재 연도에서 태어난 연도를 빼는 가장 간단한 나이 산정 방식이다. 당사자의 생일을 모를 때 사용하며,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매체에서 주로 사용하던 방식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세는 나이가 음력(사실은 태음태양력) 및 대한제국과 연결되고, ‘만 나이가 양력 및 일제침략과 연관되어서 관공서나 교육기관에서는 만 나이를 써야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세는 나이에 집착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와 30년대까지도 세는 나이(일상)와 만 나이(관공서), 연 나이(언론)의 적용이 이상과 같이 엄격하게 분야별로 지켜진 것도 아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이 정한 취학연령은 만8세였지만 최승희는 19184, 즉 세는 나이로 8세 때에 숙명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6325일의 <경성일보>와 326일 <매일신보>는 이시이 무용단에 입단해 무용 유학을 떠나는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지만,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는 14세였고, 16세는 세는 나이였다. 말하자면 일제강점 이후 10년 이상이 지나고 나서도 조선에서는 세 가지 나이 중에서 세는 나이가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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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428, 미이민국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 나타난 최승희의 나이(27)가 의구심을 던졌다면, 그보다 1년 전, 1939420일자로 발행된 벨기에의 노동허가서는 그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이 문서에는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1939430일부터 514일까지 약 2주일 동안 열린 제2회 국제무용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경연대회 중간인 510일에는 조선무용 갈라 공연도 개최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을 위해서는 최승희에게 노동허가서가 필요했다. 예술가들이 외국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얻어야 했다. 공연은 입장료를 받는 경제행위이기 때문이다. 80년 전의 일본은 벨기에의 노동 허가 면제국이 아니었으므로 일본 여권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최승희도 벨기에에서 공연을 하려면 노동허가를 받아야 했다.

 

 

예술가가 타국에서 예술 행사를 할 때 노동허가는 주관사나 흥행사가 서류 작업을 담당한다. 최승희의 유럽 순회공연 흥행사는 <국제예술기구>였고, 벨기에 국제무용대회의 주관사는 <필하모닉협회>였다. 따라서 이 두 단체가 최승희의 노동 허가 문제를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브뤼셀 시립기록보관소의 공문서 서고에서 발견된 최승희의 노동허가서에 따르면 과연 그의 흥행사 <필하모닉협회>가 후원자(sponsor)로서 최승희의 노동허가를 신청했고, 벨기에 노동 및 사회복지부(Ministere du Travail et de la Prevoyance Sociale)가 이를 승인해, 법무부 장관에게 고지하는 형식을 취했다. 외국인의 출입국 관리는 법무부 소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동 허가서에 기록된 최승희의 인적사항이 이례적이다. 최승희가 “19125월에(en mai 1912) 서울에서 태어났고(né a Seoul), 파리에 거주(demeurant à Paris)”하는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최승희가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 순회공연 동안에는 파리 샹젤리제의 스튜디오를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입한 것도 맞는 기록이다. 최승희는 서울의 수창동에서 태어나 체부동에서 숙명여학교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서울경성(京城)’이라고 쓰고 일본어로는 케이조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이 노동허가서에는 최승희의 출생지를 게이조(Keijo)’가 아니라 서울(Seoul)’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한양에서 시작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성으로 변경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경성으로 재차 변경되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야 서울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1939년에 발행된 벨기에 노동허가서에서 한성경성도 아닌 서울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의 서울표기가 이례적이라는 점은 다른 나라 입국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최승희가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했을 때나 19401010일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 그리고 1940428일 뉴욕에 입항했을 때, 그의 입국 서류에는 출생지가 모두 게이조(Keijo 혹은 Keiyo)’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독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최승희의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표기된 것은 아마도 18세기부터 조선에서 활동했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을 꼬레(Coree)’, 그 수도 한양을 서울(Seoul)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남긴 기록이 굳어져서 프랑스어권에서는 한양=한성=경성서울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어가 공용어의 하나인 벨기에도 이 관행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최승희의 국적을 한국인(de nationalité Coréenne)으로 기재한 것이다. 최승희가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한국인(coréenne)으로 기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194010월의 멕시코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이 일본인(japonesa)으로 되어 있다. 모국어도 일본어(japonas), 출생지도 일본 경성(Keijo, Japan)’, 거주지도 일본 도쿄(Tokyo, Japan)’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전적으로 일본인이었다.

 

한편 19381월의 미국 입국기록에는 최승희의 국적(Nationality)은 일본(Japan), 민족(Race or People)은 한국인(Korean)이다. 최근 거주지는 일본의 도쿄(Tokio, Japan), 출생지는 일본의 한국(Korean, Japan)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 입국 기록에 따르면 최승희는 일본인이며, 일본의 속방인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394월의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전혀 다르다. 최승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서울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작성된 프랑스어에서는 나쇼날리티(nationalité)국적뿐 아니라 민족이나 인종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국적난이 따로 없이 코레안느 나쇼날리티라고 썼다면 이는 최승희를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인지했다는 뜻이다.

 

 

이 노동허가서에 기입된 최승희의 인적사항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19125이라는 최승희의 출생연도이다. 그의 생일은 흔히 19111124일이라고 알려져 왔고, 19401010일의 멕시코 출입국 기록에 그의 출생연도가 1912년으로 기재된 적이 있지만, 생월이 19125월로 명기된 것은 벨기에의 노동허가서가 유일하다.

 

최승희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된 공식 문서가 1건 이상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일회성 실수가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에서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이 음력날짜였다면 그의 실제 생년월일은 1912112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벨기에 노동허가서는 최승희의 생월이 19121월이 아니라 5월이라고 기록했다. 프랑스어에서 1(janvier, 쟈비에)5(mai, )은 표기나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기록상의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또 이것을 의도적 오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것이 오기라면 그 의도는 나이를 줄이려는 것이었을 텐데, 이 기록으로 최승희의 나이가 변하지는 않는다. 최승희의 실제 생일이 19111124일이라면 이 노동허가서 발급이 신청되었던 1939420일 현재 최승희는 만27(+5개월)이다. 실제 생일이 19121월이었더라도 만27(+3개월10)임에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의 생일이 19125월이라면 최승희는 만26(+11개월)가 되지만 만27세를 만26세로 줄이는 것이 어떤 필요 때문이었을지 짐작할 수 없다. 더구나 이 노동허가서는 1939510일에 발효되기 때문에, 그때는 최승희의 나이는 다시 만27세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생일이 19125월로 기록된 것은 기록상의 실수이거나 의도적인 오기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생년월일처럼 금방 확인이 될 수 있는 신상정보를 실수나 왜곡할 가능성도 없고,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거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생년월일을 잊거나 잘못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최승희의 벨기에 노동허가서에 나타난 ‘19125이라는 생일 정보는 무언가 사실에 닿아있었음에 틀림없다. 어떤 사실이었을까?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면 유일한 설명은 그것이 최승희의 공문서 기록이거나, 최승희의 실제 생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최승희의 학적부에는 그의 생일이 19111124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날짜가 음력날짜였다면 최승희의 실제 생일은 1912112일로 환산되고, 이는 그의 미국과 멕시코 입국기록에 나타난 나이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벨기에 노동허가서가 기록한 생일 19125월은 출생신고일이 아니었을까?

 

출생신고는 원래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아이가 출생한 이후 몇 달씩 기다렸다가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생신고가 늦었을 경우 원래의 생일대로 신고를 하면 대개 벌과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보통 출생신고일을 생일로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관행으로 보아 최승희가 노동허가서에 생일을 ‘19125이라고 쓴 것은, 실수나 왜곡이 아니라면, 출생일이라기보다는 출생신고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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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학적부와 샌프란시스코 입국서류, 멕시코 입국서류 등을 조사한 결과, 일반적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생일 19111124일은 아마도 음력 날짜였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관공서 기록에는 음력 생일을 양력 생일인 것처럼 신고했지만,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다른 자료를 보면 최승희 생일의 비밀은 약간 더 복잡해 진다. 예컨대 최승희와 안막은 1940425일 푸에르토리코 산후앙(Ssan Juan)에서 여객선 코아모(Coamo)호를 타고 당일로 뉴욕항에 입항했는데, 이때도 입국신청서와 함께 승객명단이 제출되었다.

 

코아모호가 제출한 선객명단 4쪽에 안막과 최승희의 이름이 보이는데, 기재내용은 두 사람의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와 거의 비슷하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출생지 정보였다.

 

 

안막과 최승희가 국적을 일본(Japan), 인종을 코리안(Korean)으로 기록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때와 같았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 입항 시에는 인종이 일본인(Japanese)로 타이핑된 것을 연필로 지우고 그 위에 코리안이라고 수정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뉴욕 입항 때에는 처음부터 코리안으로 깨끗하게 타이핑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출생지 정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입항 때에는 두 사람의 출생지가 일본의 경성(Keijo, Japan)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뉴욕 입항 시에는 출생국이 코리아(Korea), 출생지는 조선(Chosen)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모두 타이핑된 기록이었다.

 

엄격히 말하면 조선과 코리아는 둘 다 나라 이름이다. 코리아는 대한제국(Korean Empire, 1897-1910)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조선(Chosen, 1392-1897)은 그 이전 518년동안 지속되었던 나라 이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뉴욕 입국기록에 코리아와 조선을 나란히 기입했다.

 

 

안막의 경우에는 이같은 출생지 정보가 더 정확한 기록일 수 있다. 그의 출생일인 1910418일에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서 아직 독립국이었으므로, 출생지를 당시의 국호와 지명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에 태어난 최승희까지 출생지를 조선, 코리아라고 쓴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기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승희와 안막이 자신의 출생지를 한국과 조선이라고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안막과 최승희가 외국 순회공연을 다니면서도 가는 곳마다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며 조선인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는 중이었으므로 공식기록이나 문헌에는 어쩔 수 없이 국적을 일본이라고 써야 했지만, 인종이나 출생지 정보 난에는 악착같이 조선과 한국이라는 이름을 남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0425일의 뉴욕 입국자 명단에는 안막의 나이는 30, 최승희의 나이는 27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안막의 정확한 생일은 추정하는 데에 특히 중요한 정보이다. 그의 생일은 일반적으로 1910418일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 생일날짜가 양력이라면 그의 나이는 만30(+1주일)가 된다. 그러나 만일 그의 생일날짜가 음력이었다면 이를 양력으로 환산했을 경우 1910526일이 되며, 따라서 그의 나이는 만29(+11)가 된다. 그런데 이 입국기록에 만30세로 기입했으므로, 그의 생일날짜는 양력생일이었다는 점이 확실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나이는 복잡해 진다. 그의 생일 19111124일이 양력날짜라면 1940425일 현재 만 28(+5개월)이다. 만일 생일날짜가 음력이라면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므로 그의 나이는 여전히 28(+3개월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승희는 이 서류에 자신의 나이를 27세로 기록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생일이나 나이를 기록으로 남길 때에는 그 정확성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기록만은 예외로 두어야 하는 것일까? 최승희는 실수나 혹은 고의로 자신의 나이를 한 살 줄였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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