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용 선생을 만난 것은 내가 처음 나주에 갔을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으로 초대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분위기였다. 이 첫 방문에서 나는 윤대근 선생의 집/작업실에서 차를 마셨고, 이순형 선생의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했고, 정찬용 선생의 집에서 바비큐 저녁을 먹었고, 최현삼 선생의 케어팜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당시 동행이었던 정연진 선생을 재워주신 게 정찬용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국에서 살 때는 누구를 집으로 초대하거나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 것은 사전 계획이 필요한 큰일이었고, 지인이 있는 지역에 출장을 다닐 때도 호텔 잠에 익숙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예고 없이 친구 집에 쳐들어가던 옛날 관행은 사라졌음을 알았고, 모임은 대개 식당과 카페에서 이뤄졌다. 그에 비해 나주에서의 즉석 초대와 활수한 대접은 거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방문 중에 나는 정찬용 선생이 상처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원인이 여러 면에서 내 경우와 비슷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동병상련을 느꼈고, 그가 앞으로 헤쳐 나갈 일들에 대해 좀 걱정도 되었다. (큰아이가 딸이라는 점이 나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혼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분주한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은 최악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주극장 프로젝트>에 정찬용 선생의 도움을 받고 싶었던 까닭은 그가 베푼 호의나 내가 느낀 동병상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의 글쓰기가 좋았다.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글을 보면 그의 문장은 짧지만 글은 길다. 이게 요즘 한국의 저널리즘에서는 독특한 현상이다.
특집이나 잡지의 글이 아니라면 한국 저널리즘의 글은 너무 짧다. ‘두괄식’을 너머 ‘두’만 있는 느낌이다. 독자가 궁금한 디테일이 턱없이 모자란다. 내가 20년 이상 익숙해졌던 미국 저널리즘은 신문기사도 긴 편이다. ‘야마’를 앞에 두되 뒤쪽의 ‘디테일’도 생략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읽을 것인지는 독자가 결정하라는 식이다.
방송도 그렇다. 티비 방송에서도 야마와 디테일을 병행하는 것이 표준인데, 이는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선례 덕분이다. 크롱카이트가 은퇴한 뒤 200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미국 뉴스방송을 주도한 3인방 댄 래더(Dan Rather, CBS), 톰 브로카우(Tom Brokaw, NBC),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ABC)도 크롱카이트의 전통을 이었다. 정찬용 선생의 글은, 미국 앵커들처럼, 야마와 함께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읽는 맛이 나고, 읽고 나면 그림이 그려진다. 특히 그의 디테일 때문에 저널리즘뿐 아니라 아카데미즘에도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그의 글에 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보통의 신문, 잡지 기사는 글이 짧은 만큼 사진도 별로 쓰지 않는다. 많아야 2-3장, 적으면 1장에 그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그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찬용 선생의 페이스북과 블로그 글에는 사진이 많다. 잘 찍은 사진도 있고 대충 찍은 듯한 사진도 더러 눈에 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취재 현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찬용 선생은 적어도 한국의 평균적 저널리스트와는 다른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서재를 보고 감탄했다. 단지 책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분야 관련서적들이 중심이었고, 그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관심이 확실한 취재자이며, 관련 자료를 부지런히 모아 정리하는 성실한 취재자라는 뜻이다.
더구나 음악가 안성현의 삶과 작품이 그의 관심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해졌다. 음악가 채동선의 가계와 교우범위를 조사한 것이 최승희의 벌교 공연으로 이어졌듯이, 안성현의 삶과 노래가 최승희의 나주 공연을 조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찬용 선생이 가진 안성현에 대한 자료는 내게 무척 요긴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의 고마운 호의가 바베큐에 그치지 않고 자료와 관심의 공유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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