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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용 선생을 만난 것은 내가 처음 나주에 갔을 때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집으로 초대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분위기였다. 이 첫 방문에서 나는 윤대근 선생의 집/작업실에서 차를 마셨고, 이순형 선생의 스마트 하우스를 구경했고, 정찬용 선생의 집에서 바비큐 저녁을 먹었고, 최현삼 선생의 케어팜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당시 동행이었던 정연진 선생을 재워주신 게 정찬용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국에서 살 때는 누구를 집으로 초대하거나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 것은 사전 계획이 필요한 큰일이었고, 지인이 있는 지역에 출장을 다닐 때도 호텔 잠에 익숙했다.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예고 없이 친구 집에 쳐들어가던 옛날 관행은 사라졌음을 알았고, 모임은 대개 식당과 카페에서 이뤄졌다. 그에 비해 나주에서의 즉석 초대와 활수한 대접은 거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방문 중에 나는 정찬용 선생이 상처하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 원인이 여러 면에서 내 경우와 비슷했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동병상련을 느꼈고, 그가 앞으로 헤쳐 나갈 일들에 대해 좀 걱정도 되었다. (큰아이가 딸이라는 점이 나보다는 나을 것이라며 혼자 안도를 느끼기도 했다. 분주한 아버지와 사춘기 아들은 최악의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주극장 프로젝트>에 정찬용 선생의 도움을 받고 싶었던 까닭은 그가 베푼 호의나 내가 느낀 동병상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의 글쓰기가 좋았다.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글을 보면 그의 문장은 짧지만 글은 길다. 이게 요즘 한국의 저널리즘에서는 독특한 현상이다.

 

특집이나 잡지의 글이 아니라면 한국 저널리즘의 글은 너무 짧다. ‘두괄식을 너머 만 있는 느낌이다. 독자가 궁금한 디테일이 턱없이 모자란다. 내가 20년 이상 익숙해졌던 미국 저널리즘은 신문기사도 긴 편이다. ‘야마를 앞에 두되 뒤쪽의 디테일도 생략하지 않는다. 어디까지 읽을 것인지는 독자가 결정하라는 식이다.

 

방송도 그렇다. 티비 방송에서도 야마와 디테일을 병행하는 것이 표준인데, 이는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의 선례 덕분이다. 크롱카이트가 은퇴한 뒤 2000년대 초까지 20년 이상 미국 뉴스방송을 주도한 3인방 댄 래더(Dan Rather, CBS), 톰 브로카우(Tom Brokaw, NBC), 피터 제닝스(Peter Jennings, ABC)도 크롱카이트의 전통을 이었다. 정찬용 선생의 글은, 미국 앵커들처럼, 야마와 함께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읽는 맛이 나고, 읽고 나면 그림이 그려진다. 특히 그의 디테일 때문에 저널리즘뿐 아니라 아카데미즘에도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그의 글에 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보통의 신문, 잡지 기사는 글이 짧은 만큼 사진도 별로 쓰지 않는다. 많아야 2-3, 적으면 1장에 그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그 기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찬용 선생의 페이스북과 블로그 글에는 사진이 많다. 잘 찍은 사진도 있고 대충 찍은 듯한 사진도 더러 눈에 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취재 현장에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찬용 선생은 적어도 한국의 평균적 저널리스트와는 다른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서재를 보고 감탄했다. 단지 책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분야 관련서적들이 중심이었고, 그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관심이 확실한 취재자이며, 관련 자료를 부지런히 모아 정리하는 성실한 취재자라는 뜻이다.

 

 

더구나 음악가 안성현의 삶과 작품이 그의 관심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해졌다. 음악가 채동선의 가계와 교우범위를 조사한 것이 최승희의 벌교 공연으로 이어졌듯이, 안성현의 삶과 노래가 최승희의 나주 공연을 조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정찬용 선생이 가진 안성현에 대한 자료는 내게 무척 요긴한 참고가 될 것이다.

 

그의 고마운 호의가 바베큐에 그치지 않고 자료와 관심의 공유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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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 번째로 나주를 방문하기 이틀 전인 202277일 나주에서 좌담회가 하나 열렸다. <나주극장>의 문화재생을 위한 좌담회라고 기사화되었다. 장소는 <나주극장> 옆의 나주 신협 본점 주차장이었고, 시간은 오후 7시였다. 좌담회 날짜는 주말이 아닌 목요일인데, 시간은 저녁 7시였다. 777, 이 한 가지만으로도 주최 측이 매우 애를 쓴 흔적이 읽혀진다.

 

좌담회의 목적은 <나주극장>의 성공적인 문화재생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좌담회를 알리는 일부 기사에는 퇴락한 <나주극장>의 오늘날 모습과 함께 주최 측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포스터도 게재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포스터를 보면서 뭔가 불편했다.

 

 

포스터에 쓰인 커다란 談場이라는 한자 때문이다. 이 한자의 폰트크기는 다른 어떤 글자보다 4-10배 이상 컸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띌 수밖에 없다. 의도는 이해가 된다. 한국어로 읽으면 담장이지만 한자로 읽으면 이야기 터라는 뜻이니, 역설과 반전을 노린 표어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포스터를 보는 사람이 한자 자와 자를 이라고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 각각이 대화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역설과 반전, 그리고 그 포스터 제작자의 재치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모를 뿐 아니라,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다. 중국을 얕잡아 보거나 싫어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심리도 한자를 경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지금 40대에 도달해 중년에 진입하는 세대도 학교에서 한자를 필수과목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 배경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한자는 결코 매력적인 언어나 효과적인 전달매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공공포스터에 한자를 쓴다는 것은 젊은 세대는 빠져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커다란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담장이라고 써놓아도 소용없다. 읽을 수 있어도 뜻을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담장이라는 한글 대신 이야기 터라고 번역을 해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談場이라는 한자를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담장(談場)’은 그 담장(-)이 아니라면서도 포스터의 배경 사진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육중한 담장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그 담장이 아니라면 담장 사진을 쓸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 때마다 나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의논하고 행동에 돌입했던 금성관 앞 광장 사진이나,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사진이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런 소통상의 문제점보다 약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식의 표기는 한자는 중요한 시니피앙(signifiant)”이지만 한글은 불완전한 보조적 시니피에(signifié)”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글 반포를 저지하려고 거듭 상소를 올리던 집현전 학사들의 마인드는 6백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나주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한자 문제를 국수주의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한자 키워드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담장이지?” 하며 의아해 하는 젊은이들에게 한자를 알아야 뜻을 알 수 있다고 재삼 재사 설명해야 한다면, 이 포스터의 기능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공공포스터의 목적은 공중 일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이해할 수만 있다면 외래어든, 외국어든, 영어든, 일본어든, 타갈로그어이든 스와힐리어든, 어떤 말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포스터의 구성요소가 특정 계층을 소외시키는 쪽으로 제작된다면 그 포스터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담회를 연 것은 환영할 일이다. 젊은이들도 좌담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청년들이 문화재생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지역사회 현안에 관심이 없다고 한탄하는 경향이 있지만, 청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마련하는데 더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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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홍반장 홍양현 선생의 소개로 알게된 분이 시습재 임재택 선생님이다. 내 선배님 중에 민청학련 사건의 피해자 임상택 선생님이 계시고, 영화감독 중에도 임권택 선생이 계신데, 아마도 임재택 선생님과 같은 문중 동일 항렬의 인물들이신 것으로 짐작된다.

 

시습재 선생님은 내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조사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다. 벌교 문화계의 명사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기 때문이다. 딱 한 번 만나 뵈었지만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약간 미소띤 표정으로 누구의 말이든 경청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홍양현 선생은 임재택 선생님의 호가 시습재라고 알려주었는데, 호가 따로 있으신 걸 보니까 한문과 고전에 능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발견된 문헌에는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의 벌교는 일제 강점기의 벌교와 상황이 사뭇 다르기 때문에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담론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요즘의 벌교는 소설가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과 작곡가 채동선 선생님의 <고향>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리고 꼬막 정식 이야기로 요약될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조사하게 된 것은 신문에서 어렵사리 발견한 홍보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 19311126일자 <동아일보(3)>에서 최승희여사 무용회, 12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라는 두 줄짜리 단신을 발견한 것이다. 완전한 문장을 갖추지도 못한 단신 기사였지만 6하원칙의 4(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가 명시된 훌륭한 정보였다. 이제 나머지 2(어떻게, )를 보충하는 것이 연구자로서 내가 할 일이었다.

 

이 자료를 보시자마자 임재택 선생님은 벌교 문화계 유지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두분은 초등학교 동창이시라고 하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사이가 뜨기는 했다지만 동창생과 연락하면서 반세기를 함께 살아오신 분들이 계신다는 게 감탄스러웠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초등학교(2)의 동창은 물론 중학교 동창들까지도 모두 끊어져서 연락되는 친구들이 없다.

 

임재택 선생님은 내게 한광석 선생님을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 그 즉시 한광석 선생님께도 내 이야기를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다음날 만날 약속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광주 조사 중이었으므로 <광주극장> 취재를 마치자마자 벌교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한광석 선생님께서 거꾸로 광주에 오시겠다고 하셨다.

 

 

한광석 선생님은 건장하고 호남형의 인물도 출중하신 분이었고, 맵시를 보니 패션 감각도 상당하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글과 그림도 잘하시고, 특히 염색 분야의 권위자셨다. 놀라운 것은 고등학교 시절 내 미술반 지도교사이셨던 박복규 선생님을 잘 아시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박복규 선생님은 ,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하셨던 화끈한 분이셨는데, 3년 전에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이후 내가 나이 차이나 지위 고하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누구든 친구를 삼거나 선생으로 모시게 된 경향성은 박복규 선생님을 모방한 덕분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임재택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한광석 선생님도 벌교의 음악가 채동선 선생님 이야기를 자세히 해 주셨다. 그런데 바로 그 채동선 선생님에 대한 정보가 벌교 공연 조사의 핵심 열쇠가 되었다.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은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과 경성시절과 도쿄 유학시절을 공유한 동년배의 가까운 사이였고,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弼承, 1910-?)의 와세다 영문학과 선배이기도 했다.

 

 

게다가 최승희 벌교 공연이 있었던 <벌교구락부>은 채동선의 부친 채중현(蔡重鉉)씨가 사재를 털어 1930126일 완공한 극장이었고, 최승희의 벌교 공연일(1931126)<벌교구락부> 개관 1주년 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승희 벌교공연의 어떻게가 구명되었는데, 여기에는 한광석 선생님과 함께 임재택 선생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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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5년 동안 최승희 선생 공연 조사를 해오면서 개발된 방식이 있는데, 첫 단계는 신문기사 조사였다. 유럽조사에서도 그랬는데, 특히 파리와 마르세이유,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암스텔담과 덴하크(=헤이그)에서는 각각 수십 건의 최승희 관련 기사를 무더기로 발굴해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최승희 선생의 유럽 공연 일정을 빈틈없이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홋카이도의 나요로(名寄)에서 오키나와의 나하(那覇)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의 42개 도시를 방문해 각 지역신문에 난 최승희 관련기사를 긁어모았는데, 그 수가 1천 건을 넘었다. 최승희의 일본공연 일정과 공연 레파토리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역신문 기사들 덕분이었다.

 

 

그런데 나주에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지방신문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성(=서울)에서 발행되었던 중앙지의 지방판을 대상으로 최승희나주를 키워드로 삼아 검색을 해 보았지만 단 한 건의 기사도 찾지 못했다. 이것이 나주공연은 없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중앙지의 지방판 기사들은 그 수도 적고, 주로 경제와 사회문제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모집단이 아니라 표본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사의 초점을 최승희의 무용공연에서 나주의 극장들로 옮기기로 했다. 극장 조사를 하다보면 공연 이야기가 곁들여지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1930년대의 최승희 공연에 대한 단서가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주의 극장들을 조사하면서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 <호남의 극장문화사(2007, 위경혜)>였다. 1950년대 이후의 호남 지역 극장들을 조사한 책이다. 이 책에는 광주의 극장들이 제외되었는데, 이는 같은 저자의 다른 저서 <광주의 극장문화사(2005)>에서 이미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저서들은 기존의 문헌자료뿐 아니라 각 극장 관계자들의 증언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서술되었으므로 내용이 포괄적이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는 훌륭한 입문서다.

 

 

<호남의 극장문화사(113-114)>에 따르면 1980년 현재 광주를 제외한 전남지역에는 모두 37개의 극장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 목포의 극장이 6개로 가장 많았고, 여수(5), 순천(4), 영광(3)에 이어 광산, 고흥, 보성, 그리고 나주가 각 2개씩의 극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영화연감>을 참조해 집계한 통계였다.

 

<영화연감>은 나주의 극장을 <나주극장(1955)><영산포극장(1958)>2개로 정리했지만, 이는 해방 이후의 공문서 기록만 기반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포괄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위경혜(2007, 233)는 별도의 인터뷰 조사를 통해 <중앙극장(1963)>을 추가하면서 근대 이전의 식민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에 이르기까지 호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나주에 있었던 극장은 총 3라고 서술했다. 나주의 극장 조사를 위한 출발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나는 별도의 신문기사 검색을 통해 1930년대의 나주에는 3개의 극장이 더 있었던 사실을 발굴해 냈다. 193138일자 <조선일보(7)>에는 남문정의 <마연(馬淵)극장>이 언급되었고, 193884일자 <동아일보(3)>에는 <촌상(村上)극장>, 193178일자 <동아일보(3)>에도 <금성정(錦城町)극장>의 영화상영 기사가 게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화연감><호남의 극장문화사>와 함께 금번에 실시한 추가조사 결과를 합치면 1930년대 이래 나주에는 적어도 6개의 극장이 개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연극장>, <금성정극장>, <촌상극장>, <나주극장>, <영산포극장>, <중앙극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중 <나주극장><영산포극장>은 그 자리와 건물이 일부나마 남아 있고, <중앙극장>의 터도 확인할 수는 있지만, <마연극장><금성정극장>, <촌상극장>은 그 이름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는, 이번에 새로 발굴된 극장들이다.

 

이제 이 6개 극장들의 이름과 위치, 설립연도와 설립자 등을 파악하는 것이 다음 과제이다. 그러고 나면 각 극장들에서 이뤄졌던 주요 공연을 조사할 발판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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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나주공연을 조사한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기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주 공연에 대한 문헌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최승희의 나주공연에 대한 보도가 단 한 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주공연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의 지역 문헌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이고, 남은 문헌은 중앙지의 지방판에 난 기사들뿐이기 때문이다. 중앙지의 지방 기사는 그 수도 적고, 그나마 사회나 경제 기사가 우선권을 차지했다

 

직접적 문헌증거 없이 조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의 문헌에 삽화나 에피소드로 잠깐잠깐씩 등장하는 세세한 내용들을 모두 긁어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이 조사에 참여해 줄 나주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틀의 의논과 부탁 끝에 다섯 분을 나의 첫 나주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올해 광주항쟁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만났던 홍양현 선생과 그의 소개로 나주에서 만났던 임재택 선생님, 그리고 김순희, 정찬용, 최현삼 선생들께 도움을 청했다. 대략의 계획을 말씀드리자 모두 수락해 주셨기에 우선 카카오톡에 단톡방을 만들고 <나주극장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사를 최승희 선생의 공연에만 한정하지 않고, 1930년대 나주의 극장들을 전체적으로 조사해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홍양현 선생은 영화 <홍반장(2004)>의 홍반장 같은 사람이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아주 길어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다. 영화에서 김주혁이 그러는 것처럼, 나주의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든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사람이 홍양현 선생인 것 같다. 그의 대표 직함은 자신이 창설한 청소년 특별활동 프로그램 <나주학교>의 교장이지만 그의 활동이 <나주학교>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나주인이라는 말을 나 주인이라고 띄어 쓰면서 나주 사람들은 내가 주인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재치와 어거지가 반반 섞인 느낌이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깊이 생각하는 성격과 사소해 보이는 꺼리에서 멋진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엿보였다.

 

 

나는 이원영-정연진 선생 부부와 함께 올해 5월 광주항쟁 기념제의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가 홍양현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그날 밤 그가 광주의 <가객>에서 시전한 시낭송에 홀딱 반했다. 이후 6월에 있었던 여순항쟁 유적지 답사에 동행했다가 일행과 떨어져 나주에 갔는데, 그때도 홍양원 선생은 <초록추어탕> 한 켠에서 김영일 선생의 질펀한 공연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최승희 전남지역 공연을 조사 중이라는 말에 홍양현 선생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려고 애썼다. 최승희가 나주공연은 안했소?”했던 그의 질문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가 경제적 풍요와 예술적 풍성함을 이어온 천년 역사의 고장이므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확고한 사람이다. 최승희 선생이 목포와 광주에서 공연하면서 나주 공연을 건너뛰었다면 홍양현 선생은 섭섭했을 것이다. 이번 조사는 홍양현 선생의 섭섭함이 근거 없음을 보이려는 시도일 지도 모르겠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에서 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사람에 속한다. 그의 인맥과 소통의 네트워크는 이번 <아치의 노래> 나주 상영회에서도 증명되었다. 대규모의 거창한 상영회는 아니지만 그가 일단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일을 벌이되 마무리가 약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그가 해온 일들이 명분 있는 일임을 잘 아는 친구와 선후배들이 그의 약점을 잘 보강해 준다. 이번에도 <실학강독회> 회원들이 상영회와 뒷풀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바람에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다.

 

2022년 정태춘 선생의 노래가 나주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면,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무용 공연도 그랬을 것이다. 홍양현 선생 같은 나주인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최승희 선생의 나주공연을 조사해 볼 작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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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또 시작되나 보다. 나주 때문이다. 겨우 세 번 방문으로 나는 나주에 완전히 매료됐다.

 

나주의 수려한 산수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영산강은 도도하고 금성산은 웅장하니까. 혹은 도시 구석구석 깃든 긴 역사의 흔적과 그 안에서 새로 솟는 에너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당당한 나주목 금성관과 생기 넘치는 호수공원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나주의 진짜 매력은 사람이다.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와 텍사스 코퍼스크리스티에서도 그랬고, 스페인 피니스테라와 남프랑스 앙티베에서도 그랬다. 홋카이도 쿠시로와 오키나와 나하에서도 그랬고, 강원도 강릉과 경상남도 통영, 전라남도 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장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곳에서 맺고 얽혔던 인연 때문이다. 매력의 핵심은 항상 사람이다.

 

나주라고 예외일 리 없다. 1천년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도 사람이고, 지금의 에너지를 내뿜는 것도 사람이다. 내가 나주에서 만난 남자들은 뭔가 불만에 찼지만 박력 있었고, 여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당차면서 아름다웠다.

 

그뿐 아니다. 나주에는 제3의 부류라고 해야 할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이상하다고 해서 비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나주 첫 방문 때부터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나주에 푹 빠졌다면 박력 있는 남자들이나 아름다운 여자들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이상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나주와 나주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옴니버스 <돈 까밀로와 빼뽀네>를 떠올리곤 했다. (Po)강 유역의 바싸(Bassa)는 영산강변의 천년 고도 나주의 이탈리아판이다.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 스미르쪼와 비지오, 브루스코와 팔케토와 지고또, 스트라치아미와 스포키아 등이 엮어내는 바싸 사람들 이야기는, 내가 아직 세세하게 모르기는 해도, 천년 동안 이어온 나주 사람들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려한 나주의 산수에 살면서 이상한 나주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즘도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영화 촬영지 브레스쉘로(Brescello)를 방문한다고 한다. 책으로 다 읽은 이야기지만 그곳에 가면 과레스키가 그려내었던 바싸 마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꾸 나주에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주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려면 나주에 가야하는 것이다.

 

외지인이 나주에 빠져들기가 쉬울 리 없다. 나주에 푹 빠지고 싶어 한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 자기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자기 역할이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늘 해오던 일을 나주에서도 해보기로 했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혼적을 나주에서도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이 성공할는지 미리 알 수 없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나주와 나주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최승희 선생의 나주 공연 조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이미 1931년의 최승희 전라도 순회공연 일정을 재구성한 바 있는데, 그해 최승희 선생은 전주(1129), 군산(30), 목포(124), 광주(5), 그리고 벌교(6)에서 공연을 단행했다. 목포공연 다음날 광주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나주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라남도 순회공연이 193111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과 1932년에도 전라도 순회공연을 했고,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1937년에도 조선 지방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따라서 나주 공연을 조사할 여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 글은, 수필이나 감상문 형식이더라도 내용은 최승희 나주공연 조사의 리서치 노트이다. 엉뚱하거나 중구난방일 수 있고, 결론이 어떻게 날지, 혹은 결론이 나기는 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료와 사유와 의견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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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는 그 목적이 인권 일반이나 특히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일 때 효과가 가장 크다. 시민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결속이 강화되며 주장이 확산되기 쉽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조선인 추도비의 경우 일제강점 식민지시기에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으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사고사를 당한 5인의 넋을 위로한다는 것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같은 추도비를 세운다는 것은 다카라즈카 정부의 지지를 받은 것도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외국인 노동자의 추도비를 세우는 것이 소수자 인권보호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공공외교 사안을 추진하는 시민사회가 다수일 때, 혹은 소수이더라도 단결된 모습을 보일 때 효과를 발휘하기 쉽다.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시민활동가들뿐 아니라 재일조선인, 특히 한때 반목하고 대립했던 민단계와 총련계 조선인들이 같은 목소리로 내고 추도비 건립을 위해 협력했던 것이 좋은 효과를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강릉에서 감사패를 증정하려는 청원이 채택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각계각층의 강릉 시민들이 청원을 내고, 여기에 서울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동조하며 감사패 증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강조했을 때 강릉시가 이에 부응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수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방정부가 민간부문의 공공외교를 지지할 때 외교의 효과는 매우 커질 수 있다. 만일 다카라즈카 시정부가 추도비 건립에 반대했더라도 시민들은 사유지에라도 이를 건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시정부가 추도비를 시립공원 내에 설치하도록 허가하고, 당시의 시장이 자신의 이름과 직함을 추도비에 새기가 함으로써 이 추도비의 공공의 성격은 한층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강릉 시정부가 추도비 건립자들에 대한 감사패 증정을 거절했더라도 청원자들은 시민단체의 이름으로라도 감사패는 전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강릉시가 김한근 시장 명의의 감사패를 증정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자, 시민들이 추진한 감사패는 그 의미가 매우 커졌다. 다카라즈카 현지에서는 일본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에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고, 감사패를 수여받은 당사자들도 이를 감격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한편 공공외교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정부는 공공외교 활동 목적이나 방식이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배치될 경우, 지방정부나 시민들의 외교활동을 제한하거나 저지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비티에스(BTS)의 유엔외교는 소수자 인권보호라는 한국정부의 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룹과 정부는 물론 한국의 국가브랜드가 크게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안용복의 독도외교는 영토수호하는 큰 목표를 이루고도 당사자는 국가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정부의 정책(=공도정책)에 배치되는 외교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고, 또 공무원을 사칭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법률에 따르면 이같은 죄목이 적용되었을 경우 사형선고를 면하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영토를 수호했다는 외교효과를 고려해 유배를 가는 선으로 형량이 감경되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추도비 건립과 강릉시의 감사패 증정은 둘 다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위배되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의 추인 아래 지방정부가 이를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강제동원 노동자들이었다면 문제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내각)강제동원자체를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추도비의 희생자들은 1914-1929년까지,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이전에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사고사를 당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추도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위배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식외교와는 달리 공공외교는 부문별로 참여자가 많기 때문에 긴밀한 의사소통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카라즈카의 경우 시정부는 물론 다수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추도비를 건립했다. 다카라즈카의 <교류협회>와 오사카의 <목련회>, 그리고 기존의 이 두 단체를 한데 모으고 효고현 전체에서 회원을 더 영입해 결성한 <추도비건립회>의 회원만도 50명이 넘었고, 이들을 지지하는 일본인 시민활동가와 재일동포 활동가들은 그 수를 수백명을 헤아렸다. 따라서 추도비 건립 결정과 추진 과정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필요한 정보를 시정부에 제공하면서 동시에 시정부가 제공하는 지침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긴밀한 의소소통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2015년에 시작한 추도비 건립이 2020년에야 마무리되기까지 햇수로 5년이나 걸린 것도, 신속하게 건립되는 추도비보다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참여해 건립되는 추도비가 되도록 <추도비건립회>가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목표한대로 추도비 건립은 별다른 잡음이나 방해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반면에 강릉시의 감사패 전달은 202111월부터 2022326일까지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역시 원활한 의사소통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0명의 청원인들이 청원을 결정한 것도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강릉시의회를 경유해 강릉시청에 접수시키는 일도 말이 나온지 수일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 이후 강릉시청의 실무자들과의 협의도 최초의 만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의논이 카톡과 이메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대단히 빠르고 원활했다. 또 강릉시청의 결정이 일본에 전달되는 것도 거의 실시간이었고, 도쿄의 강원도대표부와 고베 총영사관이 업무를 배정하는 결정도 신속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모든 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 따라서 명확하고 신속한 의사소통은 공공외교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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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ちが<舞踊靴2022>という名前まって半年っていません今年210鄭世和崔明澈先生3めた<舞踊神2022>会員60しました

 

たちは4<舞踊靴キャンペーン>430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はキム·バレリア先生いる<沿海州アリラン歌舞団>60舞踊衣装っています金鉉東(キム·ヒョンドン)金山河(キム·サナ)先生東海から発送してくださった舞踊衣装はキルギスを経由していうちにウスリスクに到着する予定です^^

 

チームアイ時代からえてもたちの活動2年半目です時間ですが400人余りの後援者めてくださった寄付金約3千万圓1千人以上かお手伝いしてましたそれがたちの自負心なら自負心でしょう

 

 

 

しかしたちがげたけはお金額ればつまらないです舞踊靴舞踊衣装はそれ自体ではありませんただ偏見差別でも在日朝鮮学生たちと難関逆境でも民族文化基盤高麗人同胞たちにたちがにするという連帯感をおせする程度ですそのような意味たちのけは経済的というよりは心情的実質的というよりは象徴的ですたちはその謙遜め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ます

 

これから<沿海州アリラン歌舞団後援>キャンペーンをしく<新入生舞踊靴>キャンペーンをえたこの時点たちの位置姿勢点検してみるではないかといますにとってもっともらしい業績しずつもってもたち自身満足できなかったりったじならそれはましい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れでえてみました

 

たちがすることが運動ではなく外交だといます運動では彼我区分味方力量敵軍攻撃して目標達成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積弊清算とか国家保安法廃止とか検察改革言論改革などのための運動必要なのは事実ですもそのような運動賛成してでは運動するのように行動します

 

 

 

しかし<舞踊靴2022>運動団体ではなく外交だといます在日朝鮮学校後援沿海州アリラン歌舞団支援することは運動でしょうか対話しながら必要必要たすことよりくの々を説得してその必要たすことに参加するようめることは運動ではなく外交です外交では対話じた理解交渉じた協力重要です

 

外交必要なのはのためですたちは皆違うからですたちのえがなり行動うのはある当然人間条件ですそのようないはたちがごしてきた時間んできた場所うためにじたものですその差異したり克服しなければならない敵対的矛盾ではありません理解してきしめられる身近いですきしめればいによりかになれるいです

 

しかしそのようないは克服する矛盾ではなくいですいのいを方法簡単ですたちが同胞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共有した々であることをれないのですたちはいもありますがもっときな共通点がありますからきすぎて共通点さすぎるようにえたらそのがまさにたちがをつけなければならないだといます

 

 

 

時間空間われば真偽善悪までわることがどれだけいですかそのようないをえて調整していくことがたちがすべきことですそれは運動家ではなく外交官仕事です

 

それでたちは鮮明運動家よりやかな外交官になることが必要だと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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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용신2022>라는 이름으로 모인 지 채 반년이 되지 못했습니다. 올해 210, 정세화, 최명철 선생님과 함께 3명이 시작한 <무용신2022>의 회원이 지금 6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용신 5차 캠페인>으로 430명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했고, 지금은 김발레리아 선생님이 이끄시는 <연해주 아리랑 가무단>에 약 60벌의 무용의상을 보내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김현동, 김산하 선생께서 동해에서 발송하신 무용의상은 조만간 키르기즈스탄을 경유해서 우수리스크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팀아이> 시절부터 따지면 우리 활동이 2년 반째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4백여 명의 후원자들이 모아주신 성금 약 3천만 원으로 1천명 이상에게 무언가 도움을 드렸습니다. 그게 우리의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드린 도움은 돈의 액수로는 보잘 것 없습니다. 무용신이나 무용의상은 그 자체로 비싼 선물이 아니니까요. 다만,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학교 학생들과 역경 속에서도 민족문화의 터전을 일구시는 고려인 동포들에게 우리가 함께 한다는 연대감을 보여드리는 정도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 도움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심정적이고,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연해주 아리랑 가무단 후원> 캠페인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우리학교를 위한 <신입생 무용신> 캠페인을 앞둔 지금,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점검해 볼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럴 듯한 업적이 조금씩 쌓이더라도 우리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거나 혹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라면, 그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운동이 아니라 외교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에서는 피아를 구분하고, 아군 역량을 키우고, 적군을 공격해서, 목표를 달성해야 하죠. 적폐 청산이라든가, 국가보안법 폐지라든가, 검찰 개혁이나 언론 개혁 등을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런 운동에 저도 찬성하는 것이 많고, 다른 장에서는 운동하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하지만 <무용신2022>운동 단체가 아니라 외교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일 우리학교를 후원하고, 연해주 아리랑 가무단을 지원하는 것이 무슨 운동이겠습니까? 대화하면서 필요를 알고, 힘이 닿는 대로 긴급한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분들을 설득해서 그 일에 동참해 주시도록 권유하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외교입니다. 그리고 외교에서는 대화를 통한 이해협상을 통한 협력이 중요하죠.

 

외교가 필요한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간 조건입니다. 그것은 지내온 시간과 살아온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요. 다만 이 차이는 무너뜨리고 극복해야 할 적대적 모순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끌어안을 친근한 차이죠. 끌어안으면 서로가 더 풍부해지는 차이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나라에 오래 살다 보면, 양식이나 관습이 크게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식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이 일본식이나 러시아식과 다른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20여년 미주에서 살다 돌아와 보니, 달라진 것도 많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 많습니다. 거꾸로 저를 보시면서 쟤는 왜 저래?’하는 생각이 드시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점들은 극복할 모순이 아니라 끌어안을 차이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끌어안는 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동포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이도 있지만 더 큰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가끔씩 차이가 지나치게 커 보이고, 공통점이 너무 작아 보인다면, 그때가 바로 우리가 조심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진위와 선악까지도 달라지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차이를 끌어안고 조정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운동가가 아니라 외교관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명한 운동가보다 온화한 외교관이 되는 것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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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富男先生ったのはその生涯最後2ぎないだから近藤先生々までよくっているとはえない読書経験ったのは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相棒研究者であり<宝塚朝鮮人追悼碑>てるのに先頭ったということだ

 

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1997)名前だけで出版されたがその内容くは近藤先生との共同研究結果だろう実際鄭鴻永先生近藤先生一緒調査して踏査した事実をよく言及した

 

2歴史学専攻したり職業にしなかったがらの調査研究実証的密度非常なので専門家たちもそのまま引用するのに十分これはおそらく2がそれぞれ立命館新大という名門大学練磨した研究能力のおかげだろう

 

 

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直後2020531日付むくげ通信300)」には、「鄭弘永先生とのことという近藤先生掲載されたこの近藤先生自身鄭鴻永先生金魚になったいた。 「金魚とはいつもつきまとう相棒日本語表現自分くして相手尊重する表現でもある

 

使うかによってこの言葉意味わることがある2003日本民主党菅直人代表当時總理小泉純一郎かって日本のイラク政策米国金魚ぎない批判しているあてもなくちょろちょろついてるという意味しかし近藤先生のように金魚自任したとすればこれは相手同行したいという欲望であり自身くして相手尊重する謙譲表現

 

近藤先生らを金魚っていたがもう一人いらっしゃる妻近藤幸子先生二人がどのように結婚したのか二人結婚生活せだったのかからないがこれを推察できるようにしてくれる<むくげ通信>せられたことがある

 

 

飛田雄一先生によると近藤先生本来名前谷口富男だった結婚直後二人うかを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日本では西洋のように必要がなくうことも可能でありまた韓国のように各自維持してもわない

 

この決定のために近藤夫妻じゃんけんをし近藤富男先生けたため採択そのから近藤富男になったというめる方法じゃんけんをしたというのも意外痛快なことだがとして自分にした近藤先生なららを幸子先生金魚いながら一生愛していたとじるようになる

 

最近2年間メールをやりとりしながら交流してきた近藤先生端正だがやかで無口だが正確簡潔だったおそらく鄭鴻永先生くなったその模範って金魚から金魚進化した結果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た

 

 

鄭世和先生によく近藤先生金魚になりたいとおした近藤先生一緒調査一緒相談して一緒いて一緒調査旅行仲良しになればとったからだ

 

そんな気持ちがわったかはらないが日本調査再開すれば近藤先生生活してもいいというえてきたコロナがくなってそのような機会なかったがその言葉いただけでもかになった近藤先生師匠としてえたいだけに近藤先生弟子同僚としてれる準備ができたという理解されたからだ

 

近藤富雄先生くなって半年になる金魚になるところだった近藤先生いながら最近自分自身質問をよくげかける。 「ると金魚になりたいとうほどはちゃんと生活しているのだろうか。(わ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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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콘도 도미오 선생을 만난 것은 그분의 생애 마지막 2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가 콘도 선생을 속속들이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내가 독서와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정홍영 선생의 단짝 연구자이셨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시는데 앞장서셨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는 정홍영 선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지만,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은 콘도 선생과의 공동 연구의 결과일 것이다. 실제로 정홍영 선생은 콘도 선생과 함께 조사하고 답사했던 사실을 자주 언급했다.

 

두 사람은 역사학을 전공하거나 직업으로 삼지 않았지만 그들의 조사와 연구의 실증적 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어서 전문가들도 그대로 인용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이 각각 리츠메이칸과 신다이라는 명문대학에서 연마한 연구능력 덕분일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 직후인 2020531일자 <무쿠게통신(300)>에는 정홍영 선생과의 일이라는 콘도 선생의 글이 실렸다. 이 글에서 콘도 선생은 자신이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썼다. “금붕어 똥이란 항상 따라다니는 단짝을 가리키는 일본어 표현으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에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이 말뜻은 달라질 수 있다. 2003년 일본 민주당 간 나오토(菅直人)대표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향해 일본의 이라크 정책은 미국의 금붕어 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줏대 없이 졸졸 따라다니기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콘도 선생처럼 스스로 금붕어 똥으로 자처했다면 이는 상대방과 동행하고 싶다는 욕망이자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겸양의 표현이다.

 

 

콘도 선생이 스스로를 금붕어 똥으로 여겼음직한 분이 또 한 분 계신다. 그의 아내 콘도 사치코(近藤幸子) 선생이다. 나는 두 분이 어떻게 결혼하셨는지, 두 분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글이 <무쿠게통신>에 실린 적이 있다.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에 따르면 곤도 도미오 선생의 원래 이름은 타니구치 도미오(谷口富男)였다. 결혼 직후 두 분은 누가 누구의 성()을 따를지 결정해야 했는데, 일본에서는 서양처럼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라야할 필요가 없고,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가능하며, 또 한국처럼 각자의 성을 유지해도 무방하다.

 

이 결정을 위해 콘도 부부는 가위바위보를 했고, 콘도 도미오 선생이 졌기 때문에 아내의 성을 채택해 그때부터 콘도 도미오(近藤富男)가 되셨다고 한다. 성을 정하는 방법으로 가위바위보를 했다는 것도 은근히 통쾌한 일인데, 아내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삼은 콘도 선생이라면, 스스로를 사치코 선생의 금붕어 똥으로 여기면서 평생 사랑하셨을 것으로 믿게 된다.

 

내가 최근 2년간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교류하던 콘도 선생님은 단정하지만 온화하고, 과묵하지만 정확하고 간결하신 분이었다. 아마도 정홍영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 금붕어 똥에서 금붕어로 진화하신 결과가 아닐까 짐작되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께 자주 콘도 선생님의 금붕어 똥이 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곤 했다. 콘도 선생님과 함께 조사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글을 쓰고, 함께 조사여행을 다니는 단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일본 조사를 재개하면 내가 콘도 선생님 댁에서 지내도 좋다는 말씀을 전해오셨다. 코로나가 길어져서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넉넉해졌다. 내가 콘도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만큼, 콘도 선생님도 나를 제자나 동료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반년이 되어간다. 내가 금붕어 똥이 될 뻔했던 콘도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요즘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누군가 나를 보면 금붕어 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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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富男先生尊敬するようになったのはそのがしてきたこととした業績のためだけではないそのせた格別人間愛寡黙実践のためだ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近藤先生特別友情感嘆境地えてうらやましいほどだ

 

飛田雄一先生追悼文によると近藤先生生涯二人師匠っていたという神戸大学師匠だった保田茂先生在日朝鮮人鄭鴻永先生保田茂先生日本有機農法専門家であること以外はあまりらないが鄭鴻永先生との友情協力近藤富男先生むくげ通信3002020531日付)』寄稿した鄭鴻永さんとのことというによくれている

 

 

近藤富男1950-2022先生鄭鴻永1929-2000先生めてったのは1983年秋宝塚市立安倉中学校職員研修会鄭鴻永先生講師としてかれただった当時54鄭鴻永先生朝鮮人連合会宝塚支部長辞職した1976から地域史研究没頭しており33近藤先生安倉中学校日本語教師として在職中だった

 

この講演テーマは同年夏武庫川氾濫朝鮮人居住部落体験した浸水被害惨状この災害なる自然災害ではなく在日朝鮮人住居条件する市当局無関心政策不在発生した人災でありこれにして人道的市民運動じて災害被害者する根本的対策じるべきだということだった

 

やかな言葉遣いと説得力のある主張魅了された近藤富男先生講演わった鄭鴻永先生ねて個人的挨拶をしながら連絡先交換したというそのんで鄭鴻永先生研究踏査活動のパートナーになった

 

 

二人1985調査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南益三ナム·イクサム)、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埋葬認許證發見つけ1993には福知山線鉄道工事中にダイナマイト爆発事故死亡した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する1929新聞記事入手して死亡原因背景調べたこの調査内容1997出版された鄭鴻永先生著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収録され後日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する実証的根拠となった

 

そのにも二人1990から1999まで10にわたりかれた朝鮮人中国人強制連行強制労働える全国交流集会提案その組織進行担当したほか二次世界大戦中建設された松代甲陽園相野山中地下バンカーを踏査強制動員労働者する記録した

 

くの調査研究踏査にしながら鄭鴻永先生近藤先生同等同僚っていたようで近藤先生鄭鴻永先生師匠としてもてなしたものとられるこれは近藤先生とメールをやりとりしながら鄭鴻永先生する話題近藤先生口調敬意尊敬心んでいるのをむことができたのでっていたじだった

 

 

興味深いのは鄭鴻永先生農科大学出身だという慶尚北道尚州郡まれ5家族とともに兵庫県宝塚移住してきた鄭鴻永先生立命館大学農学専攻された立命館関西関西学院同志社とともに関西4大名門私立大学関関同立つである

 

国立名門神代畜産学専攻した近藤先生私立名門立命館農学専攻した鄭鴻永先生世代横切友情かちいながら在日朝鮮人歴史調査研究記録としてしたことは非常異例的えた

 

<宝塚朝鮮人追悼碑>日本初期近代化過程犠牲になった朝鮮人労働者記憶するために日本人在日朝鮮人誠意けた結果でもあるが一方では鄭鴻永先生近藤富男先生一生分かちった友情協業結実でもある。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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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콘도 도미오 선생을 존경하게 된 데에는 그분이 해 오신 일과 남기신 업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이 보이신 각별한 인간애와 과묵한 실천 때문이다. 특히 정홍영 선생님과 콘도 선생의 특별한 우정은 감탄의 지경을 넘어 부러울 정도이다.

 

히다 유이치 선생의 추도사에 따르면 콘도 선생은 평생 두 분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고베대학의 스승이셨던 야스다 시게루(保田茂) 선생과 재일동포 정홍영 선생이다. 야스다 시게루 선생은 일본 유기농법의 전문가라는 점 외에는 내가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정홍영 선생과의 우정과 협력은 콘도 도미오 선생이 <무쿠게통신(300, 2020531일자)>에 기고하신 정홍영 선생과의 일(鄭鴻永さんとのこと)”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콘도 도미오(1950-2022) 선생이 정홍영(1929-2000)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가을, 다카라즈카 시립 아쿠라(安倉) 중학교의 직원연수회에 정홍영 선생이 강사로 초청되었을 때였다. 당시 54세의 정홍영 선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연합회 지부장을 사직한 후 1976년부터 지역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고, 33세의 콘도 선생은 아쿠라 중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날의 강연 주제는 그해 여름 무코강의 범람으로 조선인 거주 부락이 겪은 침수해의 참상을 전하고, 이 재해는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주거 조건에 대한 시당국의 무관심과 정책 부재로 발생한 인재요 관재이며, 이에 대해 인도적인 시민운동을 통해 재난 피해자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온화한 말씨와 설득력 있는 주장에 매료된 콘도 도미오 선생은 강연이 끝난 후에 정홍영 선생을 찾아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면서 연락처를 교환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기꺼이 정홍영 선생의 연구와 답사 활동의 파트너가 되었다.

 

 

두 사람은 1985년의 조사에서 고베 수도공사 중에 사망한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매장인허증을 찾아냈고, 1993년에는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 중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1929년의 신문기사를 입수해 사망원인과 배경을 조사했다. 이 조사 내용은 1997년에 출판된 정홍영 선생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에 수록됐고, 훗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건립하는 실증적 근거가 되었다.

 

그밖에도 두 사람은 1990년부터 1999년까지 10차례에 걸쳐 열렸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를 제안하고 그 조직과 진행을 담당했는가 하면, 이차대전 중에 만들어진 마츠시로(松代), 코요엔甲陽園), 아이노(相野), 야마나카(山中), 쿠쿠리()의 지하벙커를 답사하여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그 많은 조사연구와 답사를 함께 하면서 정홍영 선생은 콘도 선생을 동등한 동료로 여겼던 것 같았고, 콘도 선생은 정홍영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콘도 선생님과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정홍영 선생님에 대한 화제가 나올 때마다 콘도 선생의 어투에 경의와 존경심이 배어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에 내가 가졌던 느낌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홍영 선생도 농과대학 출신이라는 점이다.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출생, 5세 때에 가족과 함께 효고현 다카라즈카로 이주해 오신 정홍영 선생은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셨다. 리츠메이칸은 간사이(関西), 간세이가쿠인(関西学院), 도시샤(同志社)와 함께 간사이 4대 명문 사립대학을 가리키는 칸간도리츠(関関同立)의 하나이다.

 

국립 명문 신다이(神大)에서 축산학을 전공하신 콘도 도미오 선생과 사립 명문 리츠메이칸(立命館)에서 농학을 전공하신 정홍영 선생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우정을 나누면서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조사하고 연구해 기록으로 남기신 일은 매우 이례적으로 보였다.

 

특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일본 초기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이 함께 정성을 기울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홍영 선생과 콘도 도미오 선생이 평생 나누신 우정과 협업의 결실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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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추도비를 건립하기 위해 20년의 노력을 기울이신 콘도 도미오 선생님, 그리고 희생자들을 위해 1백년이 넘도록 제사를 지내오신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에게 존경심도 솟았다.

 

콘도 선생께서 나에게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찾아달라는 부탁하셨을 때 망설임 없이 승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희생자 다섯 분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함께 이분들을 제사하고 추도비까지 세우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생자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임이 문헌으로 확인되자, 나는 강릉시에 청원을 냈다. 추도비 건립자들에게 감사패를 증정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이것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김병순씨를 기억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김병순씨의 희생이 잊히지 않도록 애쓰신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 청원에 여러 사람이 동참했다. 한국 <팀아이>의 정철훈 선생, 사진작가 안해룡 선생도 참여했고, 김성수기념사업회의 홍진선 이사장, 네트피아의 유선기 사장, 강릉원주대학의 강승호 교수 등, 강릉의 활동가들도 동참했다. 특히 김병순씨의 족보를 찾아내 그의 강릉 연고를 밝히는 단서를 발굴해준 강릉 경주김씨 종친회의 김자정, 김철욱 선생도 청원에 참여하셨고, 일본에서도 효고현의 정세화, 스미애 다이꼬꾸(大黑澄枝) 선생이 함께 해 주셨다.

 

이 청원은 강릉 시의회를 경유해 강릉 시청에 접수되었고 청원내용의 확인을 거쳐 받아들여졌다. 감사패 증정 대상도 여덟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일본인 여섯 분(콘도 도미오, 히다 유이치, 호리우치 미노루, 타마노 세이조, 아다치 타이쿄와 아다치 치쿄 부부)과 재일동포 두 분(정홍영, 김례곤)이었다.

 

강릉시청이 청원을 신속하게 받아들여 준 것은 청원 내용이 의미있다는 판단 때문이었겠지만 거기에는 콘도 도미오 선생의 건강이 악화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청원서를 낼 즈음 202111월에 콘도 선생께서 병원으로부터 6개월 남짓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으셨기 때문이다.

 

 

감사패 증정이 결정된 것은 20221월말이었다. 도쿄 소재 강원도대표부의 강병직 본부장과 문미현 부장이 직접 다카라즈카를 방문해 청원내용을 확인한 직후였다. 이후 강병직 본부장은 강릉시청의 박종시, 이준하, 박인순 계장 등의 실무진과 협력해서 신속하게 감사패가 전달되도록 애쓰셨다.

 

김한근 강릉시장 명의의 감사패는 2022326일 전달되기로 결정됐지만 사정이 급박해졌다. 콘도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이 급해진 청원자들과 실무자들은 감사패 전달이 결정되자마자 제작을 서둘렀지만 콘도 선생의 용태는 급속히 나빠졌다. 강릉시청의 담당 공무원들은 콘도 도미오 선생을 위한 감사패를 먼저 제작해 보내기로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 듯 했다.

 

결국 강릉시청의 박인순 계장님은 콘도 도미오 선생의 감사패가 완성되자마자 이를 사진으로 찍어서 강병직 본부장과 나에게 보내주셨고, 나는 이 감사패 사진을 정세화 선생을 통해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혼수상태가 계속되던 콘도 선생님은 잠깐 정신이 돌아오신 사이에 감사패 사진을 보신 후에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른 7분에게 대한 감사패는 예정대로 326일 전달되었다.

 

 

일본에는 양심적인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한일관계가 어느 한쪽의 자존감을 상하지 않은 채 상생과 협력관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콘도 도미오 선생이 바로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었다.

 

대한민국의 지방정부가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인 활동가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콘도 도미오 선생께서 생전에 그 같은 감사를 받고 돌아가신 것은 안타까운 상황에서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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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宝塚朝鮮人追悼碑>感動えたこの追悼碑建立するために20努力けた近藤富男先生そして犠牲者のために100年以上祭祀ってきた日本人在日同胞尊敬いた

 

近藤先生犠牲者たちの韓国内縁故してほしいとんだためらうことなく承諾したのもそのためだった犠牲者5する憐憫気持ちとともにこの々を祭祀追悼碑までてた々に感謝気持ちをしたかったのだ

 

犠牲者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故郷江原道江陵であることが文献確認されると江陵市請願した追悼碑建立者感謝牌贈呈してほしいという請願だったこれは無念けた金炳順氏記憶する方法であるだけでなく金炳順氏犠牲れられないように努力した日本人在日朝鮮人する最小限礼儀だとえた

 

 

この請願大勢参加した韓国<チームアイ>鄭澈勲(チョン·チョルフン)先生写真作家安海龍(アン·ヘリョン)先生参加金性洙(キム·ソンス)記念事業会洪眞善(ホン·ジンソン)理事長ネットピアの柳善起(·ソンギ)社長國立江陵原州大学姜承昊(カン·スンホ)教授など江陵活動家たちも参加した金炳順氏系図して江陵ゆかりをらかにするがかりを発掘してくれた江陵慶州金氏宗親会金子正(キム·ジャジョン)金喆旭(キム·チョルウク)先生請願参加日本でも兵庫県鄭世和(チョン·セファ)大黑澄枝先生にしてくれた

 

この請願江陵市議会経由して江陵市役所けられ請願内容確認れられた感謝牌贈呈対象8まった日本人6近藤富男飛田雄一堀内稔玉野勢三足立泰教足立智教夫妻在日朝鮮人2鄭鴻永金礼坤だった

 

江陵市庁請願迅速れてくれたのは請願内容意味があるという判断のためだっただろうがそこには近藤富男先生健康悪化したのもきな役割たした請願書202111近藤先生病院から6月余りの時限付人生宣告されたためだ

 

 

感謝牌贈呈まったのは20221月末だった東京所在江原道代表部の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とムン·ミヒョン部長直接宝塚訪問請願内容確認した直後だった以後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江陵市庁のパク·ジョンシ·ジュンハパク·インスン係長などの実務陣協力して迅速感謝牌されるよう努力した

 

江陵市長キム·ハングン名義感謝牌2022326されることに決定されたが突発変数じた近藤先生健康悪化めたのだった請願者実務者たちは感謝牌伝達決定されるやいなや製作いだが近藤先生容態急速悪化した江陵市庁担当公務員たちは近藤富男先生のための感謝牌製作してることにしたがそれでも時間りないようだった

 

結局江陵市庁のパク·インスン係長近藤富男先生感謝牌完成するやいなやこれを写真ってカン·ビョンジク本部長ってくれはこの感謝牌写真鄭世和先生じて近藤先生されるようにした昏睡状態いた近藤先生しばらくがついた感謝牌写真ったという残念なことだがいだった7名様への感謝牌予定通326された

 

 

日本には良心的学者活動家なくないらは韓日関係がどちらかの自尊心つけず共生協力関係発展することを近藤富男先生がまさにそのような々の一人だった

 

大韓民国地方政府韓国する日本人活動家たちに公式感謝表明したのは今回めてだとした近藤富男先生生前にそのような感謝けてくなったのは残念状況でもいだとっている。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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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藤富男先生直接にかかったことがない在日同胞写真家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紹介ラインLINEグループトークで2年間対話わしただけだそれでも近藤先生がこれまで遂行した3つのプロジェクトのためにきなけをくれた。。

 

第一崔承喜チェ·スンヒ研究だった近藤先生日本調査発掘した1930年代古文献資料解釈手伝ってくれためない部分写真ってライン文字近藤先生わせれば大体24時間以内えてくれた崔承喜先生名古屋公演についてのには近藤先生きなけをくれた

 

第二在日朝鮮学校舞踊部舞踊靴るキャンペーンだった李仁珩(·インヒョン)先生在日朝鮮学校舞踊部学生たちに舞踊靴をプレゼントしめたが近藤富男先生鄭世和先生結成した青少年支援団体<チームアイ>けが絶対的だった

 

 

<チームアイ>とは子供(아이)たちを(ai)として見守(eye)チームという意味近藤先生直接付けた名前韓中日米4国語同音異義語絶妙わせた素敵名前だったその名前趣旨かったのでたちのまりも<チームアイ>ぶことにした

 

202111大阪かれた在日朝鮮学校近畿地域舞踊コンテストに近藤先生直接参席して舞踊靴伝達激励言葉もした舞踊靴プロジェクトは近藤先生鄭世和先生<ティムアイ>がいなかったらかなくても結果すこともできなかっただろう

 

第三、「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であった近藤先生づいたのはこの調査のおかげだった近藤先生追悼碑主人公たちの韓国縁故調査してほしいと調査過程激励けをしまなかった

 

 

宝塚朝鮮人追悼碑宝塚切畑長尾山麓けられた·親水広場てられた朝鮮人労働者える追悼碑であるこのには1910年代1920年代兵庫県水道工事鉄道工事事故死亡した5朝鮮人名前まれている金炳順(キム·ビョンスン)張長守(チャン·ジャンス)南益三(ナム·イクサム)尹吉文(ユン·ギルムン)吳伊根(·イグン)などがまさにその々だなる時期なる工事くなった々を一緒記憶するためにこの追悼碑てられたのは近藤先生努力結実だった

 

近藤先生在日朝鮮人地域史研究者鄭鴻永(チョン·ホンヨン)先生にこの5犠牲者死亡経緯調査記録として一方その々のための祭祀めた鄭鴻永先生鄭世和先生父親神戸西宮甲陽園地下号朝鮮人労働者いた朝鮮国独立という文字発見されたとしても有名だがその現場には近藤先生もいらっしゃった

朝鮮人犠牲者のための祭祀事故現場だった旧福知山線第6トンネル毎年開かれたねるにつれ日本人在日朝鮮人参加えた鄭鴻永先生この々のための追悼碑建立してほしい口癖のようにおっしゃったがせず20001他界された

 

 

一方1914-15神戸水道工事中死亡した3遺体西谷村共同墓地安置されその位牌近隣仏教寺院滿福寺られ3にわたる住職とこの婦女会員たちが100年以上無縁故者追慕祭事ってきた

 

この事実った近藤富雄先生鉄道工事犠牲者水道工事犠牲者のための合同追悼碑建立することになりついに2020326<宝塚朝鮮人追悼碑>建立された鄭鴻永先生遺志近藤先生によって20ぶりにいたのだ

 

追悼碑建立にとどまらず近藤先生犠牲者韓国緣故地してほしいとった多角的調査そのうちの一人である金炳順氏故郷江原道江陵という事実確認これを近藤富男先生らせることができた近藤先生大喜びだったので4縁故確認にも熱心。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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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이 없다. 재일동포 사진가 정세화 선생님의 소개로 라인(LINE) 단톡방에서 만나 약 2년 동안 대화를 나눴을 뿐이다. 그런데도 콘도 선생님은 내가 그 동안 수행한 세 프로젝트를 위해 큰 도움을 주셨다.

 

첫째는 최승희 연구였다. 콘도 선생은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1930년대의 고문헌 자료 해석을 도와주셨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문자로 콘도 선생님께 문의하면 대개 24시간 안에 답을 주셨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나고야 공연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콘도 선생께서 큰 도움을 주셨다.

 

둘째는 재일조선학교 무용부에 <무용신> 보내기 캠페인이었다. 이인형 선생과 함께 재일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기 시작했는데, 콘도 선생께서 정세화 선생과 함께 결성하신 청소년 지원단체 <팀아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팀아이>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는(eye)’ 팀이라는 뜻으로, 콘도 선생께서 직접 지으신 이름이다. 한중일미 4개국 말의 동음이의어를 절묘하게 조합한 멋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과 취지가 좋았기 때문에 우리 모임도 <팀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02111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 조선학교 깅키(近畿)지역 무용경연대회에 콘도 선생께서 직접 참석하셔서 무용신도 전달하시고 격려사도 하셨다. 무용신 프로젝트는 콘도 선생과 정세화 선생의 <팀아이>가 없었다면 오래 계속되지도, 좋은 결과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셋째,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조사였다. 내가 콘도 선생님과 가까워진 것은 이 조사 덕분이었다. 콘도 선생님은 내게 추도비 주인공들의 한국 연고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조사 과정에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기리히타 소재 시립 사쿠라 공원 신수이 광장에 세워진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추도비이다. 이 비에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효고현 수도공사와 철도공사에서 사고로 사망하신 다섯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병순, 장장수, 남익삼, 윤길문, 오이근씨 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공사에서 사망하신 분들을 함께 추도하는 이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콘도 선생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콘도 선생은 재일동포 지역사 연구자 정홍영 선생님과 함께 이 다섯 희생자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한편, 그분들을 위한 제사도 지내기 시작하셨다. 정홍영 선생님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으로 고베 니시노미아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에서 조선인 노동자가 쓴 조선국 독립이라는 문자를 발견하신 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발굴현장에는 콘도 선생도 계셨다.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는 사고 현장이었던 옛 후쿠치야마선 제6호 터널 앞에서 매년 열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일본인과 재일동포의 참여가 늘어났다. 정홍영 선생은 이분들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20001월 타계하셨다.

 

 

한편 1914-15년에 고베수도공사 중에 사망하신 세 분의 유해는 니시타니 마을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그 위패는 인근 불교사찰 만푸쿠지(滿福寺)에 모셔져, 3대에 걸친 주지 스님과 이 마을의 부녀회원들께서 1백년이 넘도록 무연고자 추모 제사를 지내오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철도공사 희생자와 수도공사 희생자를 위한 합동 추도비를 건립하기로 하셨고, 마침내 2020326<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건립되었다. 정홍영 선생이 남기신 뜻이 콘도 선생에 의해 20년 만에 빛을 본 것이다.

 

추도비 건립에 그치지 않고 콘도 선생은 나에게 희생자들의 한국 연고를 찾아달라고 하셨다. 나는 다각도의 조사 끝에 그 중 한 분인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콘도 도미오 선생에게 알려드릴 수 있었다. 콘도 선생께서는 무척 기뻐하셨기 때문에 나는 다른 네 분의 연고를 찾는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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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兵庫県<むくげの>という団体がある<兵庫朝鮮関係研究会>とともに代表的韓国関連研究団体である。 「むくげ無窮花日本語発音んだものだからこの団体韓国友好的まりだという容易推測できる

 

メディアにわるニュースには嫌韓団体いが日本には親韓団体なくない<むくげの>研究者たちはほとんどが韓日植民地支配時代不幸時期過去する謝罪容恕和解そして共生協力未来くことを日本主流雰囲気とは距離があるのでえにくくよくこえないがらも精一杯声している

 

<むくげの>けをたくさんけた<崔承喜(チェ·スンヒ)朝鮮舞踊>研究<在日朝鮮学校>後援そして<宝塚朝鮮人追悼碑>調査しながら<むくげの>会員たちからけられその月刊情報誌<むくげ通信>せられたみながらくのことをんだ

 

 

ところが2022327日付<むくげ通信>訃報掲載された近藤富男先生他界らせる飛田雄一先生追悼文だったこのはこのようにまった

 

近藤富男さんが210くなった同学年神戸大学入学時最初にあったのがだった19693月末入学手続きのときで農学部園芸農学科畜産学科だった。」

 

はびっくりした近藤富男先生他界したというニュースや名門神戸大学出身だったという紹介のためではなかった他界消息鄭世和(チョン·セファ)先生じてすでにっていたし飛田先生近藤先生神大卒業生だということもっていた神戸大学京都大学大阪大学とともに関西3大国立大学であり日本全体でもトップ10りする名門大学である

 

しかし近藤富男先生専攻畜産学だったという見当もつかなかった生涯国語つまり日本語教師としてきてきただった1974から宝塚市立安倉中学校日本語教師引退後もコリア国際学校でも日本語教師としてめたそれで近藤先生専攻当然日本語あるいは日本文学だとった

 

 

そのような誤解近藤先生けをけながらさらにまった舞踊家崔承喜チェ·スンヒ先生する1930年代日本文献調べてみると現代日本語表現ったりだしくはスペルが言葉もよくてくるがその近藤先生明快いてくれた日本語古文にもけていたからだところでその学部専攻畜産学だなんて···

 

1970年代初めに畜産学専攻されたのでをよく職業つこともできただろう。 「園芸農学専攻して韓国史研究者になった飛田先生じだこの々が名門国立大学有望分野専攻しても韓国関連学者活動家になった理由になった近藤先生がいらっしゃったらすぐにメールで質問してみたはずだがもう返事直接聞くことができない

 

近藤先生<むくげ通信>会員たちといつもしくしていたが会員として加入されたのは201811最近のことだ近藤先生<むくげ通信>加入前から<むくげ通信>寄稿されていたが最初釜山非武装地帯訪問記日帝強占期遺跡韓半島分断みに共感する近藤先生韓国する関心がどれほどかったかがかる

 

 

<むくげ通信>寄稿した学術的2つあるつは20195にわたって連載した<漢字とハングル>というこの副題漢字使わない日本語るために漢字併用ててハングル専用じた韓国語のように日本語漢字て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主張生涯日本語教師だった見解なので日本語文学者たちもけるべきだ

 

もうつは2021から2022まで9にわたって寄稿した<ソウル京畿道親環境無償給食>という韓国学校給食一般福祉のために無償市民健康農家扶養のために親環境有機農として実施されることを評価しただが遺伝子操作のない有機農畜産物重要性強調した畜産学専攻者見解がよくれている。 (継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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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兵庫)현에 <무쿠게회(むくげの)>라는 단체가 있다. <효고조선관계연구회>와 함께 대표적인 한국관련 연구단체이다. ‘무쿠게는 무궁화(無窮花)를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니, 이 단체가 한국에 우호적인 모임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미디어에 전해지는 뉴스에는 혐한단체 이야기가 많지만, 사실 일본에는 친한 단체도 적지 않다. <무쿠게회>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한일 식민지 강점시기를 불행한 시기로 여기고, 과거에 대한 사과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상생과 협력의 미래를 열기 바란다. 일본 주류 분위기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는 않지만, 그들도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무쿠게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 조선무용> 연구와 <재일 조선학교> 후원, 그리고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조사하면서 <무쿠게회> 회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그 월간 소식지 <무쿠게통신>에 실린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데 2022327일자 <무쿠게통신>에 부고가 실렸다.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선생의 타계를 알리는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의 추도문이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콘도 도미오씨가 지난 210일 사망했다. 19693월말 고베대학 입학 시에 신입생으로 처음 만난 것이 그였다. 나는 농대 원예농학과였고, 그는 축산학과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콘도 도미오 선생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이나 명문 고베(神戶)대학 출신이셨다는 소개 때문이 아니었다. 타계 소식은 정세화 선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고, 히다 선생과 콘도 선생이 신다이(神大) 졸업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고베대학은 교토대학, 오사카대학과 함께 일본 간사이(關西) 3대 국립대학이며, 일본 전체에서도 톱10에 드는 명문대학이다.

 

그러나 콘도 도미오 선생의 전공이 축산학이었다는 점은 짐작도 못했다. 그는 평생을 국어, 즉 일본어 교사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1974년부터 다카라즈카 시립 아쿠라(安倉)중학교의 일본어 교사였고, 은퇴하신 뒤에도 코리아국제학교에서도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셨다. 그래서 나는 콘도 선생의 전공이 당연히 일본어 혹은 일본문학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는 콘도 도미오 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 굳어졌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에 관한 1930년대 일본문헌을 조사하다보면 현대 일본어와 표현이 다르거나, 심지어 철자가 다른 말들도 자주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콘도 선생이 명쾌하게 풀어주셨다. 그는 현대 일본어뿐 아니라 고문에도 능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의 학부 전공이 축산학이라니...

 

1970년대 초에 축산학을 전공하셨으니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예농학을 전공하시고 한국사 연구자가 되신 히다 유이치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분들이 명문 국립대학에서 유망한 분야를 전공하시고도 한국관련 학자와 활동가가 되신 이유가 궁금했다. 콘도 선생이 계신다면 당장 문자로 여쭤 보았을 텐데, 이젠 대답을 직접 들을 수가 없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의 회원들과 늘 가깝게 지내셨지만, 회원으로 가입하신 것은 201811월로 최근의 일이다. 콘도 선생은 <무쿠게회> 가입 전부터 <무쿠게통신>에 글을 기고하셨는데, 첫 글이 부산과 비무장지대 방문기이다. 일제 강점기의 유적을 살피고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공감하는 글이다. 콘도 선생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무쿠게통신>에 기고한 학술적인 글이 2개 있다. 하나는 2019년에 5회에 걸쳐 연재한 <한자와 한글>이라는 글이다. 이 글의 부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는 일본어를 만들기 위하여이다. 한자병용을 버리고 한글전용으로 돌아선 한국어처럼 일본어도 한자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평생 일본어 교사였던 분의 견해이니 일본 어문학자들도 귀담아들을 일이다.

 

다른 하나는 2021년부터 2022년까지 9회에 걸쳐 기고한 <서울시와 경기도의 친환경 무상급식>이라는 글이다. 한국의 학교 급식이 일반복지를 위해 무상으로, 시민 건강과 농가 부양을 위해 친환경 유기농으로 실시되는 것을 높이 평가하신 글인데, 유전자 조작이 없는 유기농 농축산물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축산학 전공자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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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23일 최승희 무용단이 단행한 경남 진주 공연을 조사하다 보니 당시 지방순회 공연 일정은 철도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공연 동선이 철도 노선에 의해 결정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312월의 마산 공연 때문이었다.

 

27일 경성 공회당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가진 최승희무용단은 지방 순회공연을 이어갔는데, 당시 신문 보도를 종합하면 217-18일 부산(공회당), 221일 춘천(공회당), 224-25일 대구(대구극장), 226-27일 마산(수좌)에서 공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순회공연 일정에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동선이었다. 경성(=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춘천을 다녀온 다음, 다시 경부선을 타고 대구까지 갔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최승희의 춘천 공연 연구노트에서 비교적 자세히 밝힌 바 있다.

 

 

둘째는 공연 순서였다. 왜 마산 공연을 부산 다음이 아니라 대구 다음에 했을까? 철도 때문이다. 마산까지의 직선거리는 부산에서 가깝지만, 부산에서 마산으로 직접 가는 철도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경부선 상행선을 타고 북상해서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남행해야 했다.

 

마산선(삼랑진역-마산역)은 러일전쟁을 앞둔 일제가 1905526일 군용 철도로 개통했으나, 19051111일 일반 여객과 화물 수송도 시작했고, 그해 11일 개통된 경부선(경성-부산)의 지선으로 포함되었다.

 

따라서 경부선 철도로 하행하다 보면 삼량진에서 부산으로 갈지 마산으로 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최승희무용단이 서로 가깝게 위치한 부산과 마산에서 잇달아 공연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한편 진주 공연은 순회공연이 철도에 의해 좌우됐음을 보여주는 더욱 단적인 예였다. 1931923일의 공연이 그의 첫 진주 공연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철도 사정 때문이었다. 마산선이 193141일 경남선(마산역-진주역)과 통합되면서 국철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6개월 전인 19312월의 순회공연에서 최승희는 224-25일의 대구 공연을 마친 후 삼랑진에서 마산선으로 갈아타고 마산에 도착, 226-27일 마산 수좌(壽座)에서 공연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마산선이 경남선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주까지 갈 수는 없었고, 순회공연은 마산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공연 5개월 전인 193141일 경남선과 마산선 철도가 연결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승희무용단은 마산 공연(22)을 마친 후, 다음날 아침 경남선 기차를 타고 진주에 도착, 바로 진주 공연(23)을 가질 수 있었다. , 약 반년 전에는 불가능했던 진주 공연이 가능했던 것은 마산선과 경남선이 연결된 철도 사정 덕분이었던 것이다.

 

최승희가 지방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도쿄 유학 시절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많은 지방순회공연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 돌아와서도 지방순회공연을 기획할 때는 철도망과 그 시간표부터 조사했을 것이다.

 

 

이시이무용단처럼 최승희무용단이 순회공연을 철도에 의존했던 것은 무용단원과 수하물의 이동 때문이었다. 수십 명의 단원이 공연에 필요한 의상과 소도구, 조명과 음향 장치 등을 가지고 이동하는 데에 철도만큼 편리하고 빠르고 저렴한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무용단은 경춘선 철도 개통 전인 1931221일 춘천공연을 가졌을 때 승합자동차(버스)를 이용했다. 당시 경성-춘천의 승합차 이동 시간은 편도 4시간이었고, 1인당 왕복요금이 약 10(편도 6)이었다. 그보다 거리가 3배나 긴 경인선 철도의 이동시간은 1시간40, 왕복요금은 약 1(편도 48)에 불과했다.

 

최승희 무용단이 지방순회공연에 철도를 이용했던 것은 이 같은 신속한 이동시간과 저렴한 비용 때문이었던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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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무용단이 밀양과 마산, 진주와 통영에서 개최했던 공연을 각각 알리는 4개의 광고가 실려 있다. 이 광고들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어째서 4개의 공연을 한데 홍보하지 않고 4개의 광고문으로 나누어 게재했을까, 였다.

 

4개의 광고문은 비슷한 크기에 비슷한 형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내용이나 형식이 조금씩 달랐다. 밀양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대공개였고, 진주공연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연회였다. 마산과 통영 공연의 제목은 최승희무용 공개로 같았지만 활자 크기가 달랐다.

 

제목의 오른편에는 공연날짜와 장소를, 왼쪽에는 주최자와 후원자를 명기한 형식은 같았다.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었다. 밀양, 마산, 진주 공연은 날짜와 시간을 표기했지만 통영공연은 시간 없이 날짜만 표기했다. 또 진주공연 광고문에는 일시(日時)”라는 표현을 썼지만, 다른 광고문들은 시일(時日)”이라고 썼다.

 

 

주최자와 후원자도 조금씩 달랐다. 밀양, 진주 공연의 주최자는 <최승희무용후원회(=후원회)>, 후원자는 <동아일보 현지지국(=지국)>이었고, 마산공연의 후원자도 <지국>이기는 했지만 주최자가 <후원회>가 아니라 <최승희무용연구소>였다. 가장 차이를 보인 것은 통영공연 광고문으로 주최자는 <지국>이었고, <경성최승희무용연구소><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다.

 

, 이 광고문들은 내용이 간단하고 형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인데도, 표현이나 내용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 모든 광고문을 최승희나 최승희무용연구소의 매니저, 즉 오빠 최승일이나 남편 안막이 주관한 것이라면, 어째서 이런 차이가 보이게 된 것일까?

 

그로부터 6년 후 최승희는 일본 간사이 지역에서 3주일 동안 순회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193724일부터 27일까지 나고야와 교토, 오사카와 고베의 4개 대도시에서 공연했는데, 이때 최승희는 공연 일정과 작품명을 한 면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팜플렛을 발생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공연에서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4개의 광고문을 한데 합친 크기의 광고를 한꺼번에 게재했다면, 같은 비용으로 더 큰 지면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일정과 극장, 주최자/후원자를 명기하는 것을 넘어 발표작품과 공연자들에 대한 더 많은 내용을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가능한 대답은 하나였다. 이 광고문은 최승희나 무용연구소의 매니저가 주관하여 신문 게재를 의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주최자와 후원자로 명기된 <후원회><지국>이 게재한 광고이기가 쉽다. 즉 이 광고를 의뢰하고 그 광고비를 지불한 것은 <후원회>거나 <지국>이었다는 말이다. 다만 통영에서는 <지국>이 주최자이고 <통영삼광영화사>가 후원자였기 때문에, 아마도 이 후원 영화사가 광고비를 지불했을 가능성이 크다.

 

, 지방 순회공연은 현지의 <후원회>나 후원 신문사의 <지국>이 최승희무용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공연이 이뤄졌고, 공연의 조직과 진행을 담당하는 한편, 수익은 공연을 제공한 최승희무용단과 주최자가 일정한 비율로 분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공연 조직 및 진행 과정을 이해하면 포항 공연만 유일하게 <동아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낸 이유도 알 수 있다.

 

공연 즈음에 포항에는 <동아일보> 지국이 개설되지 않았거나 지국장이나 국원이 없는 사고지국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최승희 무용공연을 조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포항에서는 지국이 활동중이던 <조선일보>가 공연 조직을 대행했고, 포항지역에 신문이 보급되는 <조선일보>에 광고와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문에 게재된 수 개의 공연 기사와 광고를 토대로 당시에 무용공연이 지방에서 조직되고 흥행되는 방식을 모두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지방순회공연에서는 후원 신문사의 지국과 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그 결과로 공연 무용단은 신문사 지국과 공연 수익을 나누어야 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22/6/1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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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917일자 <동아일보(3)>에는 최승희의 순회공연을 알리는 광고가 4개나 나란히 실렸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광고문에는 최승희무용공개혹은 최승희무용공연회라는 말이 한자로 적혀 있었고, 그 양 옆에는 공연 일시와 극장, 주최와 후원단체 등이 명시되었다.

 

이 광고문들에 따르면 921일의 밀양 공연은 조일(朝日=아사히)극장, 922일의 마산 공연은 구()마산의 수좌(壽座=코토부키자)에서, 923일의 진주 공연은 진주좌(晉州座)에서, 그리고 925일의 통영 공연은 봉래좌(蓬萊座)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하루 전인 916일자 <동아일보(3)>에는 16일의 김천 공연이 김천(金泉)극장, 17일의 대구 공연이 대구극장에서 열린다는 기사와 광고가 실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진행된 최승희무용단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김천(9/16)-대구(9/17)-밀양(9/21)에 이어 마산(9/22)-진주(9/23)-통영(9/25)의 순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그해 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의 후속 지방공연이었고, 대구 공연 전에도 수원(913)과 안성(14)에서 먼저 공연을 가진 바 있었다. 따라서 이 순회공연은 수원-안성 등의 경기도 지역에서 출발하여 김천-대구-안동-밀양의 경상북도 내륙도시를 거쳐 마산-진주-통영의 경상남도 해안도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925일 이후 신문에 다른 공연이 보도되거나 광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통영 공연 이후 더 이상의 지방 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913일부터 925일까지 약 2주일 남짓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순회공연을 가졌으니 피로가 누적되었을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이 두 광고문에 드러난 순회공연 일정에 따르면 대구와 밀양 공연 사이에 사흘의 사이가 뜬 것이 의문이었다.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0년대에 이끌었던 일본 지방공연에서나, 1930년대 초에 최승희무용단이 진행했던 조선 지방공연에서도, 3-4일의 공연 뒤에 하루 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연속 3일을 쉬는 것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신문들을 조사해 보니 1931914-16일의 <조선일보(7)>에 포항 공연(9/18) 광고가 3일 동안 게재되었음이 발견되었다. 또 신문 보도나 광고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평전들이 안동 공연을 단행했다고 서술했음도 확인되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은 내륙 도시인 김천(16), 대구(17), 포항(18), 안동(20), 밀양(21)을 거쳐 해안 도시인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진주와 통영 공연 사이에 하루의 공백이 있는데, 이듬해인 1932년 순회공연에서는 진주와 통영 사이에 사천(泗川) 공연이 끼어 있었다. 따라서 19319월의 순회공연에서도 24일에 사천 공연이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920일부터 23일까지 4일 연속 공연한 무용단이 24일을 하루 쉬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19319월의 경상도 순회공연에 사천 공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보도한 신문 기사와 광고문들을 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거의 모든 공연이 <동아일보>에만 보도되었거나 광고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시대일보> 등의 민족지들은 물론 <매일신보><경성일보> 등의 총독부 기관지, 그리고 <조신신문><부신일보> 등의 일본어 신문들도 이 경상도 순회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조선일보>가 포항 공연(9/18)을 보도하고 광고했던 것이었다.

 

한편 이 경상도 순회공연 직전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무용공연에 대한 모든 기사와 광고는 <조선일보>에만 실렸던 점도 눈에 띄었다. <동아일보><매일신보>는 경성의 신작무용 공연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매일신보><경성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보도 및 광고 행태로 미루어 19319월의 최승희무용단 경상도 순회공연은 <동아일보>가 단독 후원하기로 계약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초부터 공연의 후원이 특정 언론사에 독점적으로 계약되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2022/6/1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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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7일 최승희 선생이 순천 공연을 가졌던 극장은 <순천극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이라고 한 것은 이 공연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나마 이런 추정이 가능한 것은 1930년대 순천에는 <순천극장> 외에 다른 극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천극장>의 당시 이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극장은 1914년 일본인에 의해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관되었는데, 일제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그 부지는 조선시대 객사 영역의 일부로 1910년대 초 읍성의 성곽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필지가 분리된 곳이라고 한다. 지금의 주소는 중앙동 24-5번지(도로명 주소는 중앙로 16번지) 자리이다.

 

 

<황금연예관>1933년경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불렸다. 1933112일의 <조선신문(5)>에 실린 신년축하 광고에 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광고문에는 네 사람의 일본인 극장주 이름이 병기되어 있다.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 키자키 요시오(木崎義男), 무라카미 요시카즈(村上義一), 타케우치 아키라(武內罷)가 그들이다. 이들은 <황금연예관>을 인수해 명칭을 <극장 순천구락부>라고 바꿔서 운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126일 벌교에서 채동선의 부친 채중현이 낙성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도 <벌교구락부>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아 1930년대 초 남도에서 구락부라는 명칭이 극장 이름으로 자주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벌교구락부>가 자주 <벌교극장>으로 불리곤 했던 것처럼 <순천구락부>도 그 공식 명칭과는 별도로 <순천극장>으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다.

 

<순천구락부>의 이름이 정식으로 <순천극장>으로 굳어진 것은 19377월부터이다. 710일의 <동아일보(5)><순천극장>이 낙성되었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해 2월 순천 거주 일본인들이 3만원의 예산으로 극장을 지어 이날 낙성식을 가졌다고 보도되었는데, 이 극장은 건평 150평에 2층 건물로 신축되었으므로 수용인원은 대략 7백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943년 현재 <순천극장>의 흥행주는 <순천구락부>의 발기인 4명의 한 사람이었던 마사무네 요시토모(正宗義智)인 것으로 보아 <순천극장><순천구락부> 자리에 개관되었고, 해방되기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후 <순천극장>은 일시적으로 <동춘극장>이라고 불렸다가 1950년대에 다시 <순천극장>으로 회복되었는데, 1978년부터는 <국도극장>으로 개칭되었다가 1990년대 들어 폐관되었다. 극장 건물은 오래 방치되었다가, 2009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상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순천극장>의 역사를 고려하면 최승희가 공연했던 극장 이름은 <황금연예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순천극장>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은 19377월이었고, 1933년경에는 <순천구락부>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다만 <황금연예관><순천구락부>로 개칭된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193112월에 이미 <순천구락부>라고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극장이나 거리 이름에 황금이라는 말이 들어간 경우가 자주 보인다. 경성에서도 지금의 을지로를 황금통이라고 불렀고, 황금정4가에 <황금좌>라는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 해방 후 <국도극장>으로 불리다가 1999년 철거되어 그 자리에 호텔이 지어졌다.

 

189941일부터 시제를 시행한 일본 요코하마(横浜)시는 그 최대 상업지역을 황금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는 벚나무 대신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것이 특색이었다고 한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손님을 부르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 곳곳에 새로운 상업 지구를 만들면서 그 지명에 황금이라는 말을 넣곤 했던 것은 요코하마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순천 최대 상업 지구였던 황금정은 지금 중앙동이라고 불리며, 해방 후에도 순천 최대의 <황금백화점>이 문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 지역은 <황금패션거리>라고 불린다. (2022/6/1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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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 촬영 시기, 다시 말해 그의 순천공연 시기는 19301025일부터 1932520일경까지 약 1년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이 기간 중 최승희가 순천 공연을 했거나 했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4번이나 된다.

 

첫째, 19301021-23일 단성사에서 가졌던 제2회 경성공연 이후 최승희는 1030일 대전공연을 시작으로 호남 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나 뭔가 사정이 생겨서 대전공연은 1111일로 연기됐고, 목포(119-10, 평화관)에서 먼저 공연한 뒤 대전(1111, 대전좌)에서 공연한 뒤 더 이상의 호남공연 없이 경성으로 돌아와 여자고학생을 돕기 위한 공연(1114, 경성공회당)을 가졌다. 이 공연 후에는 해주(1117-18, 해주극장)와 재령(1120), 수원(1129)과 인천(1220, 가무기좌) 등 경성에서 가까운 도시에 공연했다.

 

만일 이 시기에 호남공연이 이뤄졌다면 그 시기는 취소된 대전공연(1030)과 목포공연(119) 사이였을 것이다. 즉 그 일주일 동안 순천과 여수, 벌교와 광주 등의 공연을 단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공연들은 아직 발견된 바 없고, 소읍 순천 공연을 위해 대도시 대전 공연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이때의 순천공연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된다.

 

 

둘째, 최승희는 1931110-12일 제3회 경성공연과 193127-8일 신작발표회를 차례로 열었고, 이후 부산(217-18), 춘천(221), 대구(24-25), 이리(31), 전주(32-3), 군산(34-5), 김제(36), 예산(38)에서 공연했다. 3주일의 사이를 두고 평양(331-41),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12), 사리원(12), 개성(14) 등 북선지역에서도 공연했다. 이 시기에도 전북-충남 공연과 북선지역 공연 사이의 3주일 동안 전남지역 공연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2월 중순에서 4월 중순까지 2달 동안이나 순회공연을 하게 되므로, 이 시기에 순천 공연을 포함한 전남 공연까지 단행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감이 있다.

 

 

셋째, 최승희는 193151-3, 3회 신작발표회를 가진 후, 59, 청량관에서 안막과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 겸 원산 공연(522-23)을 떠났다. 이후 신혼 생활에 여념이 없다가 91-3일에 가서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발표회를 열었다.

 

그 직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서, 수원(913), 안성(14), 김천(16), 대구(17), 포항(18),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안주(20-21), 신의주(24), 안동(27),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목포극장), 광주(5, 제국관), 그리고 벌교(6,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다. 이 시기에 순천공연이 있었다면 벌교 공연 이후인 127일 경이었을 것이다.

 

 

넷째, 1932130일 경성공회당에서 토월회 주최의 재만동포위로공연을 가진 후 천안(212), 김천(16)의 충남-전북 공연과 대구(17-18), 밀양(19) 등의 경북지역 공연, 그리고 사천(22), 통영(24), 김해(27) 등의 경남 공연을 단행했다.

 

이후 기록에 남은 공연은 428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5회 신작발표회를 연 것이 처음이고, 경남 공연지인 사천, 통영, 김해는 전남 해안 지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만일 이때 순천 공연이 있었다면 227일 이후로 이어지면서 여수, 벌교, 광주, 목포 공연으로 계속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남 공연 일정이 사천-->통영-->김해로 진행된 것은 전남 지역에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순천 공연이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으로 추정된 순천 공연 시기는 1931127일경이 가장 유력하다. 벌교 공연을 마친 최승희가 기차로 불과 30분 떨어진 순천에서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2/6/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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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의심할 여지없는 자료로 받아들이면 많은 새로운 정보가 추가로 제공된다. 우선 최승희가 순천을 방문한 것은 공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간단히 추론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최승희가 아무 연고가 없는 순천을 방문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순천공연은 언제 이뤄진 것일까? 순천역이 문을 연 것이 1930105일이고 <최승희 자서전>의 출판일이 1937730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사진은 그 두 시기 사이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최승희는 19333월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193712월 세계순회공연을 떠날 때까지는 조선 지방공연을 체계적으로 단행한 적이 없다. 이시이무용단에 복귀해 그 일원으로 19341028-29일에 경성 공연을 한 적은 있지만 이때도 지방공연은 없었다,

 

1935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 도쿄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한 뒤로 최승희는 도쿄와 일본 지방공연에 치중했고 조선에서 공연한 적은 없었다.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촬영을 위해 1935914일 경성에 온 적은 있으나 이때도 지방공연은 물론 경성 공연도 없었다. 19364<반도의 무희> 개봉시기에 맞춰 영화 판촉을 위해 최승희는 조선과 만주 순회공연을 단행했으나 조선에서는 부산과 대구, 경성과 평양과 신의주 공연이 전부였고, 순천에서 공연했을 가능성은 없다.

 

다시 말해 최승희가 재도일한 19333월 이후에는 순천 공연을 할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의 순천역 사진이 촬영된 것은 순천역이 개관된 193010월부터 최승희의 재도일이 이뤄진 19333월까지의 약 2년 반의 시기로 압축될 수 있다.

 

 

한편 최승희의 공연 일정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순천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년 반의 기간은 더 압축될 수 있다. 최승희가 재도일하기 전 마지막 공연은 1932519-20일의 공주 공연이었고, 521일로 예정되었던 대전 공연은 연기되었다가 취소된 바 있었다. 이후로는 다른 공연이 없었는데 이는 이시이 바쿠의 조선 공연과 출산, 그리고 늑막염 때문이었다.

 

193264-5일 이시이 바쿠가 경성공회당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때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를 만나 자신의 경성 활동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고백했다.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공연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재정난에 빠졌던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그를 다시 도쿄로 돌아오도록 허락했는데, 당시 상황을 이시이 바쿠의 부인 이시이 야에코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이시이가 경성에 공연하러 갔을 때에 최승희를 만났는데 아기를 배어 있었다. 배가 불룩한 몸으로 안막과 같이 호텔로 찾아와 다시 이시이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부탁하기에 나는 아주 기뻤으나 이시이는 한 달 동안의 여유를 달라고 대답했다.”

 

 

이시이 바쿠의 반승락을 얻은 최승희는 재도일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해산하고 동행을 자청한 김민자를 제외한 제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3년여의 경성 생활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193284일 딸 안승자를 출산한 이후에도 문제가 생겼다. 산후조리에 이상이 있었는지 최승희는 급성 늑막염에 걸쳐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잡지 <만국부인(萬國婦人)> 193210월호에 기고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감상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번(=1932) 가을에는 동경에 가서 그이는 남은 공부를 마저 마치고 나는 무용을 하려고 했는데 아이가 너무 어리고 또 내 몸도 완쾌되지 못한 듯싶어 내년 봄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 19325월 공주공연 이후 재도일이 이뤄졌던 19333월까지 최승희는 순천공연은커녕 다른 어떤 공연도 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순천공연은 순천역 준공시기인 19301025일부터 1932519일의 공주공연까지의 약 1년 반의 시기로 더 좁혀질 수 있는 것이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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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은 그 심미적 특징 때문에 예술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사진은 기록의 특징도 가지기 때문에 학술 자료가 될 수 있다. 사진의 기록적 특징 때문에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수백 쪽의 책들이 전달하지 못하는 사실적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떤 사진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충분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진 한 장이 담은 정보를 다 풀어내기 위해서는 수십, 혹은 수백 쪽의 책을 써야할 경우도 있다.

 

<최승희 자서전>에 실린 순천역 사진이 그런 예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십여 권에 달하는 자서전과 평전들이 서술해 놓지 않은 최승희의 순천 공연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다. 다만 그 같은 사실적 정보를 제대로, 그리고 충분히 읽어 내려면 사진의 인물과 배경, 촬영시기와 출판 시기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을 활용해야 한다.

 

 

우선 이 사진이 순천역에서 촬영된 것임이 확실하다.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사진 자체이다. 순천역은 19301025일 전라선과 경전선의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고, 그 즈음에 순천역사를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순천역사에는 <순천역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19601231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 20091222일 이후의 순천역 사진과 함께 19301025일 순천역 개통 당시의 사진이 시기 순서대로 차례로 새겨져 있다.

 

순천역 개통 당시의 순천역 사진과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을 비교하면 역사의 모양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개통시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정면에서 촬영된 반면 최승희의 순천역 사진은 역사 측면에서 사각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역사의 정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두 사진 모두 배경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진에 담긴 역사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건물 전면의 모습이 같음을 알 수 있다. , 최승희 사진의 배경이 순천역임에 틀림없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증거는 이 사진이 <최승희 자서전>에 실리면서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설명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진설명이 한글로만 제시되었다면 평안남도의 순천과 혼동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안남도의 순천(順川)과는 한자로 구별되는 순천(順天)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에 이 사진의 배경이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사진을 <최승희 자서전>에 실은 의도이다. 최승희의 일본어 자서전인 <나의 자서전(自敍傳, 1936)>에는 사진이 단 한 장도 실리지 않은 반면, 한국어 자서전인 <최승희 자서전(1937)>에는 34쪽에 걸쳐서 37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청색 계열의 2색도 사진이 16, 적색 2색도 사진이 8, 갈색 2색도 사진도 10쪽에 걸쳐 13장이 실려 있다.

 

37장의 사진들은 대부분 무용작품 사진이거나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고, 4장만 일상생활 중에 스냅으로, 혹은 스냅처럼 보이도록 연출 촬영된 사진들이었다. 작품 사진 중 4장은 경성에 돌아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활동하던 시기의 사진이고 29장은 19333월 재도일한 이후의 활동을 보여주는 작품 사진 혹은 홍보용으로 촬영된 사진이었다.

 

 

일상생활을 담은 4장의 사진에는 각각 <이시이문하(石井門下) 시대>, <1회 향토방문>, <경성무용연구소 시대>, <순천역(順天驛)에서>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었는데, <이시이문하 시대><1회 향토방문>은 최승희의 도쿄 무용유학 시기(1926-1929)의 사진이고 <경성무용연구소 시대><순천역에서>는 경성에 돌아와서부터 재도일하기 전까지의 사진이다. 37장의 사진이 선택되고 수록된 데에는 나름대로 시기적 배분이 고려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이중 경성활동 시기의 사진 2장 중 <경성무용연구소 시대>는 대도시 경성에서 찍은 사진임에 틀림없고 <순천역에서>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경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읍에서 찍은 사진이다. , 이 두 장의 사진으로 경성활동 시절을 대표하도록 편집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순천역에서>가 전라남도 순천공연 때의 사진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2022/6/5,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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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있었다고 필자는 믿게 되었다. 근거는 한 장의 사진이다. 1937년에 출판된 최승희의 한글판 자서전에는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34쪽 분량의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의 최승희 독사진에 순천역(順天驛)에서라고 사진설명이 되어 있다.

 

그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땐 긴가민가했다. 당시 말로 하면 남선(南鮮)’뿐 아니라 북선(北鮮)’에도 순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니 한자가 다르다. 평안남도의 순천은 順川인 반면 전라남도의 순천은 順天이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할 당시의 근거지였던 순천과 여수의 호족이었던 박영규와 김총이 왕건을 지지하면서 고려로 귀화하면서 자신들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순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최승희 자서전(1937)>의 독사진은 전라남도의 순천역에서 찍은 것임에 틀림없다.

 

 

최승희가 순천역에서 사진 찍을 일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공연하러 순천에 갔다가 마중 나온 기자들에게 찍힌 사진인 것이다. 1930년대에는 공연자가 역에 도착하면 기자들이 마중을 나오기 보다는 공연자가 신문사로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론사와 기자들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시이 바쿠도 1926년의 첫 경성공연 때에는 아침 7시 기차로 경성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맨 처음 한 일이 이시이 코나미와 함께 <경성일보><매일신보>를 찾아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 형매 본사 내방이라는 제목의 단신이라도 한 줄 신문에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자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특히 정상급 공연자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연자가 언론사에 찾아가기 전에 기자들이 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 신문사 내방 사진이 실리면 아직 정상급 공연자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고, 기자들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가는 공연자는 정상급이라는 뜻이다.

 

19271024일 최승희가 무용유학을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 바쿠와 함께 경성 공연을 왔을 때는 기자들이 경성역으로 나가 이시이 바쿠-최승희 일행을 맞았다. 그때 경성역(=서울역)에서 찍은 이시이 일행의 사진이 1025일자 <매일신보(2)><경성일보(2)>에 실렸다. <매일신보>는 최승희가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실었고, <경성일보>는 이시이바쿠와 최승희를 포함한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런데 이 <경성일보>의 사진이 잘못 소개된 적이 있다. 정수웅의 <최승희(2004: 63)>에서 이 사진을 192711월 이시이무용단 일행이 순천역에 도착한 사진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정수웅은 이 사진의 중앙에 있는 체크무늬 외투여 여성이 최승희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 사진은 순천역 사진이 아니라 경성역 사진이었다.

 

192711월 이시이 바쿠와 최승희가 순천에서 공연할 수 없는 일정이었다. 19271031일의 <매일신보>는 이시이-최승희 일행이 25일부터 27일까지 주야간 공연을 합쳐서 경성에서 전후 다섯 번 공연을한 후에 “30일 밤 본사 주최 대전(大田) 무용시 공연회에 출연하고자 30일 아침 열시 경성역발 열차로 남행하였고, “대전서 즉시 조선을 등지고 남으로 내려가 구주(九州)에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121일자 <매일신보(3)>도 이시이무용단이 경성, 원산, 대전공연을 마치고 구주(九州, 큐슈) 사국(四國, 시코쿠) 지방순업을 마치고 동경에 돌아왔다고 전했다. 1030일 대전 공연을 마친 이시이 무용단은 곧바로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모지, 후쿠오카, 쿠루메, 노가타, 사세보, 나가사키, 쿠마모토, 가고시마 등의 큐슈 공연을 이어갔고, 그 후에도 마츠야마, 도쿠시마, 다카마츠, 우와지마, 고치 등의 시코쿠 지방공연을 마친 후, 11월말 도쿄의 무사시노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시이 무용단이 순천에서 공연할 일정이 없었다는 말이다. (2022/6/4,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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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공연 조사를 마치고 취재한 자료들을 그러모아 글로 정리하면서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순천에서도 공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면 여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30년대에는 목포, 광주와 함께 벌교와 순천과 여수가 전라남도의 5대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에는 순천과 여수 공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신문과 잡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여수와 순천에서 공연이 있었다고 언급한 문헌은 더러 있었지만, 그 공연이 언제, 어느 극장에서, 어떤 레퍼토리로 이뤄진 것인지 상술한 문헌은 없었다. 더구나 그런 간단한 언급이나마 근거가 취약했다.

 

예컨대 정병호는 평전 <최승희(1995:207)>에서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그는 “(1942216-20일의) 경성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 강릉을 비롯하여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 등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다고 서술했는데, 목록에 오른 순회공연의 지방도시는 모두 16개였다.

 

 

한편 정수웅은 그의 평전 <최승희(2004)>에서 순천에 대해 3번 언급했다. (1) 63쪽에서 석정막무용단의 순천공연이 192711월에 이뤄졌다며 무용단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가운데 체크무늬 외투를 입은 사람이 최승희라고 설명했고, (2) 370쪽의 연보에서도 192711월 순천 등의 지방 공연을 했다고 서술했는가 하면, (3) 376쪽에서도 최승희가 1942216-20일의 부민관 공연 후인 3월에 군산, 이리, 전주, 순천, 여수, 광주, 목포, 대전, 청주, 천안, 예산, 안성, 수원, 춘천, 평양등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정수웅이 순천 공연 사진이라고 설명한 이시이무용단 단체사진은 19271024일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해서 촬영한 사진이었다. 그러므로 순천공연에 대한 3개의 언급 중에서 2개가 오류였다. 19423월의 순천 공연에 대한 언급도 십중팔구 정병호의 서술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정병호의 순회공연 도시목록 중에서 강릉이 빠져 있었지만, 왜 그 도시가 제외되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가장 최근의 평전인 강준식의 <최승희 평전(2012:279)>도 단 한번 순천 공연을 언급했다. “최승희는 예정대로 2월말부터 예산-군산-이리-전주-순천-여수-목포-광주-대전-청주-천안-안성-수원-춘천-개성-평양-신의주 등 전국 17개 지역을 순회 공연했다고 서술한 것이다. 강준식의 목록에는 도시 수가 17개인데, 정수웅의 목록에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수웅과 강준식의 서술에는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병호의 평전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가 달려있지 않았다. 또 정병호의 목록에서 정수웅은 강릉을 제외했고, 강준식은 개성과 신의주를 추가했는데, 제외하거나 추가한 이유도 밝혀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천공연을 처음 언급한 정병호의 순회공연도시 목록이 중요하겠는데, 이 주장도 근거가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병호는 16개 도시 순회공연을 서술하면서 <월간춤> 199311월호에 실린 김종욱 편주의 근대춤 자료사 29(176)”를 인용했다. 필자는 김종욱의 연재기사를 집성해 출판된 <한국근대춤자료사(2014)>을 자세히 조사했는데, 이 저서에 수록된 1942년의 어떤 자료에도 16개 지방도시 순회공연을 언급한 것은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194242일자 <매일신보>가 보도한 안성 공연(328일 밤8, 안성애관극장) 뿐이었다.

 

만일 정병호 선생이 열거한 16개 지방도시가 서술된 순서대로 공연을 유치했다면 순천과 여수 공연은 안성보다 열흘이나 2주일쯤 앞선 315일과 18일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즈음에 발행된 중앙지의 지방판에는 최승희의 공연이 보도된 것이 전혀 없었다.

 

비교적 꼼꼼하게 자료를 검증한 이현준의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2019)>1942년 연보(425)에도 순천공연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최승희의 순천 공연은 과연 있었던 것일까? (2022/6/3,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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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126일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열렸던 극장은 <벌교구락부>라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이 극장의 위치를 밝히려는 시도가 이뤄진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벌교구락부>의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이번에 처음 재발견되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벌교구락부>의 신축 소식을 전하면서 그 위치를 당지(=벌교)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이라고 보도했고,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했다고 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는 했지만 극장의 위치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벌교구락부> 극장의 위치는 신시장 하단이자 벌교 신시장 인접지였던 셈이다. 1930년대의 벌교 주민이라면 이정도의 서술로도 그 위치를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지금은 그 주소가 밝혀지지는 않는 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벌교구락부>의 주소가 파악되었는데, 지번 주소는 벌교읍 벌교리 875번지혹은 벌교읍 시장21번지였다. 이 주소를 알아내는 데에는 <호남극장문화사(2007, 위경혜)>의 서술과 벌교 거주 한광석 선생님의 증언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호남극장문화사>는 벌교에 등장한 첫 극장으로 1958년경에 소화다리 인근에 설립되었던 <벌교극장>1960년대에 개관한 <현대극장><제일극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서술했다. <벌교극장>은 임시로 가설된 노천 가설극장이었고, <현대극장><제일극장>은 건물을 신축해 개관한 실내 극장이었다고 한다.

 

<호남극장문화사>에 따르면 <제일극장>의 개관일은 1963311일로, 극장주는 씨 성을 가진 벌교우체국장과 벌교읍장이었던 김철수의 동생 김상수씨의 공동 경영이었으며, <제일극장>의 첫 상영작품은 <왕자 호동(1962, 한형모 감독)>이었다.

 

<현대극장><제일극장>보다 2년 먼저 개관해 성업 중이었다는 서술로 미루어, <현대극장>의 개관 시기는 1961년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극장주는 장학사업을 하던 이길남씨라고 <호남극장문화사>는 밝혔다.

 

 

한광석 선생님께 이 두 극장에 대해 문의한 결과 “1930년대 기준 벌교 신시장 하단/인접지라면 <현대극장> 자리가 <벌교구락부>가 있던 곳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해 주셨다. 그동안 필자가 섭렵한 한국의 극장사를 보면 극장은 대개 이전의 극장자리를 이어받아 신설되거나 개설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1960-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던 <현대극장>자리가 1930-40년대의 <벌교구락부>자리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였다.

 

지금은 <현대극장>도 폐관되어 <대성의원>이라는 병원으로 바뀌었는데, 그 주소가 바로 벌교리 875-6번지였다. 시장2길을 따라 대성병원의 오른쪽에는 <현대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주차장의 상호가 현대인 것도 아마 이전의 <현대극장> 자리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호남극장문화사(2007)>230쪽에는 벌교읍 거리와 극장의 위치를 명시한 약도가 실려 있는데, 가설극장이었던 <벌교극장>은 소화다리와 홍교다리 사이였고, 제일극장은 현 <벌교 진마트>자리이며, <현대극장>은 벌교 새마을금고 건너편의 <대성의원> 자리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교차 확인을 위해 1916년에 발행된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대장과 지적원도를 찾아보았지만, <현대극장>의 주소인 벌교리 875번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지적원도 맨 앞장의 표지에 그려진 약도를 살펴보면, 벌교리의 지번은 1번지부터 862번지까지만 나와 있었다. 아마도 <현대극장>이 있던 875번지와 <제일극장>이 있던 866번지는 1916년의 지적도가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주인 없는 공터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22/5/30,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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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의 벌교 공연>20205월 필자가 목포와 광주, 나주를 방문하면서 새로 발견되었다. 1931124일의 목포 공연, 125일의 광주공연을 조사한 후, 나주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조사했으나, 126일에는 나주가 아니라 벌교에서 공연이 있었던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동아일보(1124일자, 3)>의 기사를 통해 확인됐다. 광주공연과 함께 벌교공연이 나란히 공지된 기사였다. 공연 열흘 전에 중앙지의 지방난에 공지된 것으로 보아 이 공연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미리 기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의 보도에서 공연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광주와 벌교 공연은 실제로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함께 벌교 공연이 열렸던 <벌교구락부>가 조선인 채중현에 의해 설립된 벌교 최초의 근대식 극장이었음도 발견되었다. 이 극장의 건축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완성과 낙성식 소식은 <동아일보(1930129일자, 3)<부산일보(19301210일자, 7)>, 그리고 <조선일보(19301214일자, 7)>에 보도되었다.

 

이 극장의 이름이 신문에 따라 <벌교구락부>, <벌교극장>, <벌교공설극장> 등으로 서로 다르게 소개된 것이 특이했는데, 아마도 현지에서는 <벌교구락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부산의 기자가 이를 극장으로 이해하고 <벌교극장>이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였다.

 

다만 <조선일보>가 이 극장을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명명한 것은 의문이다. <동아일보><부산일보>는 채중현씨가 사재로 이 극장을 설립했다고 보도한 반면, <조선일보>만 이를 공설(公設)’극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일 채중현씨가 <벌교구락부>를 개관, 낙성한 후 이를 벌교읍에 희사했다면 공설극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벌교구락부(1930)><목포극장(1926)>에 이어 전남 지역에서 조선인이 개관한 두 번째 극장이었고, <광주극장(1935)>보다 5년이나 이르게 개관한 조선인 설립의 극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승희의 벌교공연은 벌교구락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 행사였음도 확인되었다.

 

 

벌교 공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나주의 홍양현 선생, 화순의 임재택 선생님, 벌교의 한광석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중에서도 벌교에서 출생, 성장하셨고 지금도 벌교에서 활동하고 계신 한광석 선생님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셨다.

 

특히 한광석 선생님은 벌교의 역사와 일제강점기의 상황, 그리고 음악가 채동선 선생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해 주셨는데, <벌교구락부>의 설립자인 채중현씨가 채동선 선생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그 덕분에 채동선과 최승희의 가족 사이에 인적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 같은 인맥이 벌교 공연이 성사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벌교 공연이 확인됨으로써 최승희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다른 연구 가능성도 열렸다. , 목포, 광주, 벌교와 함께 전남의 5대도시에 속했던 순천과 여수에서의 공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당시 순천과 여수가 벌교의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불과 2-30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을 뿐 아니라, 두 도시 모두 경전선과 전라선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공연 예정지로 꼽힐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벌교 공연 이후의 최승희 일정, 특히 순천과 여수의 일정을 확인해 주는 신문기사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 없지만, 벌교 공연이 확인된 만큼 순천과 여수의 공연 가능성을 상정하고 조사연구를 계속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벌교 공연은 지금까지 최승희 연구자들에 의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던 공연으로 이번 조사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지만, 향후 최승희의 전남지역 순회공연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는 데에도 자극을 주는 중요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22/5/28,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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