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737건

지금까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1931126일 밤 <벌교구락부> 무대에서 춤을 추었던 것은 최승희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무용수들 외에도 공연을 위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무대 위에서는 열 명 이상의 무용수가 최승희와 번갈아 14개 작품을 발표했다. 보이지 않게 일했던 무대, 음악, 조명 및 의상과 소품 담당자들과 매니저와 단장까지 합치면 약 20여명의 단원들이 공연의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벌교 공연의 연목은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과 거의 같았을 것이기에, 14개 작품을 상연하려면 적어도 10여명의 무용수가 필요했다. 이름이 명시된 무용수가 8(최승희, 김민자, 조영숙, 노재신, 이정자, 곽경신, 정임, 마돌)이었고, 군무에만 참여한 무용수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방공연에 대한 언론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31912일자 <동아일보(7)>는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발표회 직후의 수원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연구생 10여명 소녀의 총출동이라고 보도했고, 1931121일자 <조선일보(7)>도 군산 공연을 보도하면서 동 연구소원 전부가 총출연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에 이름이 명시된 7명의 제자(=연구생) 중에서 노재신과 이정자는 192911월 무용연구소가 개설됐을 때부터 최승희와 고락을 함께한 제자들이다. 193012월에 입단한 김민자는 입단은 1년 늦었지만 최승희의 수제자가 되었다. 조영숙은 19313월 이후에 입단했지만 그해 5월의 제3회 신작발표회에서 독무를 맡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였다. 곽경신과 정임과 마돌은 19315월 이후에 입단한 신입단원들로 보인다.

 

따라서 최승희와 수제자 그룹의 5명이 벌교 공연의 14개 연목 중에서 10개 작품을 공연한 셈이고, 연구생들의 군무는 4개 작품(세계의 노래, 영혼의 절규, 폭풍우, 건설자)이었다.

 

 

한편 최승희의 독무는 <자유인의 춤><십자가>의 두 작품이었고, 중무는 김민자와의 <철과같은 사랑> 한 작품뿐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주목을 받을만한 작품은 14개 작품 중에서 3작품에 머물렀고 다른 11개 작품은 수제자들과 연구생들의 참여와 활약에 의지했던 셈이다.

 

그밖에 무용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음악과 조명, 무대장치이다. 라이브 반주를 사용할 때 근대무용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용했고, 조선무용은 북과 장구, 꽹과리와 징 등을 이용했다. 따라서 적어도 2, 많게는 4-6명의 악사가 필요했다. 비용절감을 위해 레코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도 적어도 한 사람이 축음기 조작을 전담해야 했다.

 

무용 공연에서는 조명이 중요한데, 최승희는 조명에 대해 특히 까다로웠다. 뉴욕 카네기홀의 조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 최승희를 만족시켰던 사람이 원우전(元雨田)이었고, 최승희무용단 제4회 신작발표회의 무대감독을 맡아 주었다. 다만 원우전이 지방공연에 동행해 무대와 조명을 담당해 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무용공연의 조명은 적어도 좌,우와 중앙의 3개가 필요하며, 그중의 하나(대개는 중앙 조명)는 스포트라이트 기능을 갖춰야 했다. 1930년대에 전자식 원격제어가 가능했을 리 없으므로 적어도 3명의 조명 담당자가 따라 붙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벌교 공연의 무대, 조명, 음악 담당자가 적어도 4-5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무용단의 단장과 매니저는 가족이 맡았다. 단장은 아버지 최준현이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공연의 기획과 극장 섭외, 언론 홍보, 회계 관리 등의 실무는 주로 큰오빠 최승일이 담당했고, 경우에 따라 작은오빠 최승오가 맡기도 했다. 19315월 결혼 후에는 남편이 매니저 일을 이어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안막이 결혼 직후 사회주의 문예운동 혐의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벌교 공연의 매니저 역할도 최승일이나 최승오의 몫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최승희 만의 공연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무용수와 4-5명의 스탭, 단장과 매니저 역할의 가족까지 합치면 20명이 넘는 공연단이었던 것이다. (2022/5/26, 조정희)

,

1931126일의 공연에서 최승희는 벌교의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을 선사했을까? 벌교민의 반응은 어땠을까? 환호와 갈채를 보냈을까, 아니면 처음보는 근대무용에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작품이 가장 좋은 반응을 일으켰을까? 야유를 받았던 작품은 없었을까?

 

불행히도 최승희 벌교 공연의 연목(=공연작품 목록)에 대한 자료는 발견된 것이 없다. 벌교 공연의 프로그램이 남아 있다면 문제는 간단할 것이다. 혹은 당시 벌교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감상문이나 비평문이 발견된다면 각 연목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에 대한 문헌 자료는 193111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문장짜리 단신 기사가 전부이다. 최승희가 내연(來演)했다는 것과 공연의 일시와 장소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것을 추론에 의지해야 한다. 다행히 벌교 공연 전후의 상황을 잘 살피면 연목에 대한 정보를 추론해 낼 수가 있다.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공연 과정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우선 경성에서 신작발표회를 개최한 다음, 그 연목을 가지고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하는 것이 순서였다. 이는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 시절 스승 이시이 바쿠로부터 직접 배우고 경험한 바였다.

 

이시이 바쿠가 새로 창작한 작품들은 도쿄 공연에서 첫 선을 보이지만, 거듭되는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다듬어지곤 했다. 같은 작품의 공연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무용수의 숙련도가 높아져서 오히려 지방의 관객들이 수도권 관객들보다 세련되고 성숙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최승희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1931916일자 <동아일보(7)>는 최승희의 마산 공연을 소개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일행은 금번 신작무용을 발표함과 동시에 남조선지방을 순회 중이라고 보도했다. 마산 공연의 연목이 경성 공연의 연목과 같음을 시사한 것이다.

 

 

1013일자 <매일신보(7)>무용가 최승희는 경성에서 신작무용을 발표한 후 지방공연의 첫걸음으로 오는 13일 해주극장에서 신작무용발표회를 개최한다고 보도했다. 경성에서 발표된 신작무용 연목이 해주에서도 반복될 것임을 알린 것이다. 1031일자 <동아일보(7)>도 개성 공연의 연목이 신작무용공연회의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 최승희는 193191일 단성사에서 공연했던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을 가지고 수원(913)을 비롯해, 김천(9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공연은 물론, 조치원(1124), 청주(25), 대전(26), 전주(29), 군산(30), 목포(124), 광주(5), 그리고 벌교(6) 공연을 진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126일의 벌교 공연의 연목은 이틀 전의 목포 공연과 하루 전의 광주 공연의 연목과 같았을 뿐 아니라 석 달 전인 91일 경성 <단성사>공연 연목과 대동소이했음에 틀림없다. 193191일자 <매일신보(5)>는 제4회 신작발표회의 14개 작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1. 세계의 노래 (연구생 일동); 2. 자유인의 춤 (최승희); 3. 토인(土人)의 애사(哀史) (김민자, 조영숙); 4.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노재신, 김민자, 이정자, 곽경신, 정임); 5. 번외 야곡(夜曲) (노재신).

 

2, 1. 인조인간 (최승희, 노재신); 2. 영혼의 절규 (연구생 일동); 3. 철과 같은 사람 (: 최승희, : 김민자); 4. 고난의 길 (최승희 외 연구생); 5. 번외: 이국의 밤 (이정자, 노재신).

 

3, 1. 폭풍우 (최승희 외 연구생); 2. 어린 용사 (곽경신, 조영숙, 이정자); 3. 십자가 (최승희); 4. 건설자 (최승희 외 연구생).”

 

 

물론 91일의 경성 공연 연목이 석달 후 벌교 공연 연목과 완전히 일치했는지는 의문이다. 최승희는 무용수의 숙련도와 표현력, 그리고 관객의 반응 등을 고려하면서 각 지방 공연의 연목을 조정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교 공연의 연목이 제4회 신작발표회의 작품들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2022/05/26, 조정희)

,

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채동선과 최승일, 그리고 안막을 통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혹시 채동선과 최승희가 직접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있었다.

 

192996일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왔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298월 최승희도 도쿄 무용 유학을 마치고 귀경해 있었다. 채동선의 귀국 독주회는 19291128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는데, 최승희의 조선에서의 첫 번째 무대는 1929125-7일 조선극장에서 열린 찬영회 주최의 <무용,,영화의밤>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박승희(朴勝喜, 1901-1964)가 이끄는 토월회의 화제작 <아리랑>이 재연되면서 화제가 되었고,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의 아내 석금성(石金聖, 1907-1995)도 여주인공 봉희 역을 맡아 출연했다. 최승희는 <인도의 애수>, <황혼>, <소야곡> 등 자신의 최초 창작무용 작품을 선보여, 그의 신무용을 궁금해 하던 관객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채동선의 독주회와 찬영회의 <무용,,영화의밤>은 저물어가는 경성의 1929년을 장식한 두 개의 주요 예술행사였다. 독일 유학 경력의 바이얼린의 귀재 채동선 독주회가 경성의 화제가 된 것은 당연했고, 최승희도 이 연주회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연구를 병행했던 최승희는 이 연주회를 직접 참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무용,,영화의밤>은 경성 유수의 무대예술인들이 총출동했던 행사였고, 몰려드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이틀로 예정되었던 공연일을 하루 더 늘려야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으므로, 채동선도 이 공연을 참관했거나 적어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후 채동선과 최승희가 함께 출연한 공연도 있었다. 1930411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신춘음악무용의밤> 행사였다. 193041일자 <조선일보(5)>에 따르면 중앙유치원은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아동을 보육하여 온유치원이며 경비의 곤란을 겪는 이 유치원을 후원하기 위해 예술인들이 공연을 조직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는 최승희가 무용부문을 담당하는 한편, 음악부문에는 피아노의 김영환(金永煥, 1893-1978), 성악가 안기영(安基永, 1900-1980)과 현제명(玄濟明, 1903-1960) 등과 함께 바이올린의 채동선이 참여했다. 즉 최승희의 벌교 무용공연이 있기 1년 반 전에 채동선과 최승희는 같은 연주회에 참여하면서 면식을 익혔고 서로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또 김영환은 숙명여학교 시절 최승희의 음악교사였고, 안기영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최승일과 동창이면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김영환의 제자였을뿐 아니라,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28년 귀국한 후에는 이화여전의 교수로 임용되어 채동선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초기 근대 음악가들의 명성은 당대에도 이미 자자했다. 문예지 <동광>19316월호(통권22)에서 김영환씨는 피아니스트로서 우리 악단의 길을 열은 사람이며 고종황제 생신어연이 석조전에서 열렸을 때 어전 연주를 하여 금일봉 3천원을 받은경험이 있고, “‘예술가가 칼을 찰 수 없다며 총독부 학무국 근무를 거절한 배짱 있는 음악가라고 서술했다.

 

 

안기영씨는 .. 악단의 경이라면서 작곡가로서도 촉망되는 바 그의 <작곡집1><2>, 그리고 <조선민요집> 등은 ... 선진국 악단에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현제명씨는 테너보다 바리톤에 가깝지만 안기영씨와 같이 악단의 쌍벽이라고 치하했다.

 

이어 기사는 채동선씨는 조선 안에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기술로나 예술로나 첫손을 꼽아야 할 사람이라면서. 같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채동선을 가르친 바 있던 홍난파를 상식 이하의 유치한 이론을 가진 사람으로 폄하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승희가 이렇게 10년 이상 연상인 쟁쟁한 음악가들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용이라는 신예술을 개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최승희는 채동선과 직접적인 예술적 교분을 갖게 되었으므로, 그로부터 일 년 반 후에 채동선으로부터 벌교 공연의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했더라도 그다지 이상할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2022/5/25, 조정희)

,

<벌교극장> 낙성식을 보도한 세 신문의 기사에 공통된 또 한 가지 내용은 이 극장의 설립자가 채중현(蔡重鉉)씨라고 밝힌 점이다. 특히 <부산일보>가 채중현을 벌교의 백만장자라고 소개한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재산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른 기록에 채중현이 만석꾼이라고 서술된 것을 보면 그가 벌교 지역의 대지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채중현은 벌교의 근검조합장을 역임하고 남선무역회사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금융업과 무역업에도 종사했다. 게다가 사립 송명학교의 기성회장과 벌교유치원의 원감을 역임하는 한편, 새로 학교 부지를 기증하여 벌교소학교(지금의 벌교남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교육에 대한 투자와 학교 경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중현은 1931211일 총독부학무국으로부터 전남의 대표적 교육자로 표창을 받았다. 벌교 주민들도 19343월 소화다리 인근에 채중현 기념비를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렸다.

 

 

지주이자 기업가, 교육후원자로서 <벌교극장>을 설립한 외에 채중현씨가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음악가 채동선(蔡東鮮, 1901-1953)의 부친이었다는 점이다. 채중현이 <벌교극장>을 설립했을 때 그의 아들 채동선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 1년만이었다. 채중현은 아들이 고향에서 연주회를 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부친의 재력과 함께 자신의 영민함과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채동선은 1915년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성으로 유학,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고)에 입학, 3학년이던 1918년 홍난파에게서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4학년이었던 1919년 만세운동에 가담해 투옥되었지만 벌교 대지주인 아버지의 힘으로 출옥, 경성제1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음악대신 영문학을 전공했다. 1924년 와세다대 졸업 후 잠시 미국생활을 했으나, 바이올린 전공으로 마음을 정하고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19299월 귀국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까지 4회에 걸친 개인 독주회와 다수의 작품발표회를 가졌다.

 

 

채동선의 약력을 정리하다보니 평행선처럼 떠오른 다른 인물이 있었다.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崔承一, 1902-?)이다. 강원도 홍천 출생인 최승일은 1905년경 대지주인 아버지 최준현(崔濬鉉)를 따라 상경,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학교를 중퇴하고, 1920년 도쿄의 니혼대학 미학과에 입학했는데, 1922년 집안이 경제적으로 몰락하자 니혼대를 2년 만에 중퇴하고 경성으로 돌아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문사로 활동했다.

 

, 채동선과 최승일은 경성에서의 고등보통학교 시절, 삼일만세운동의 경험, 같은 시기의 도쿄 유학생활 경험을 공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이 1년에 1백명 미만이던 시절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이에서라면 채동선이 최승일에게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제안하고 초대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安漠, 1910-?)도 채동선과 학연이 있다. 안막은 채동선보다 9살 연하이므로 학창시절이 겹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와세다 영문학과 동창이다. 재경성 와세다대 동창회는 1930115일 채동선의 귀국독주회를 주최했고, 연주회가 끝난 뒤에는 동창회 회식이 이어졌다. 당시 경성에 체재했던 안막도 이 연주회와 회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막과 최승희의 결혼은 193159일로 최승희의 벌교 공연 반년 전이다. 따라서 <벌교극장> 개관1주년기념 특별행사에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유치하려는 것이 채중현의 계획이었다면, 이는 채동선을 통해 최승일이나 안막을 경유해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상황증거에 따른 추론이며, 이를 뒷받침할 명시적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최승희와 채동선의 인적 관계망을 고려하면 그가 호남 순회공연 일정을 짜면서 전주, 목포, 광주를 거쳐 벌교에서 공연을 가졌을 개연성이 충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2/5/24, jc)

,

최승희의 벌교 공연 보도에 의구심을 가졌던 것은 극장 때문이기도 했다. ‘인구 5천명의 벌교포에 무용 공연을 열만한 제대로 된 극장이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최승희는 도쿄 무용유학 시절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일원으로 적지 않은 공연에 출연했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이나 유라쿠자(有樂座), 호가쿠자(邦樂座)나 니혼(日本)극장 등의 주요 극장들은 수용인원 2천명 이상의 초대형이었다.

 

무용 유학을 마치고 경성에 돌아온 후에 가졌던 4차례의 공연은 경성공회당(1,2)과 단성사(3,4)에서 열렸는데, 둘 다 객석 1천석의 대형 극장이었다. 최승희가 벌교에 앞서 공연했던 목포의 <목포극장>도 정원이 510, 광주의 <제국관>670여석 규모였다. 1930년대에 벌교에도 웬만한 규모의 무대가 마련된 극장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수용인원 1천명의 대형극장이었다.

 

 

1930129일자 <동아일보(3)>“1천여 명을 수용할 벌교구락부 신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전남 벌교포는 5천여 인구가 거주하며 문화적 모든 시설이 거개 구비한 적지 않은 도시라면서도 시민이 모여 공사간 협의할만한 장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채중현(蔡重鉉)씨가 금번에 구락부(俱樂部)를 당지 중앙지점인 신시장 하단에다 18백원의 적지 않은 금액으로, 건평 130여평에 1천명 이상 수용할극장 설립 공사를 벌여 근일에 끝났음으로 지난 6일 오후에 낙성식까지 거행했다고 자세히 보도했다.

 

1210일자 <부산일보(7)>벌교극장 신축이라는 제목아래 벌교의 백만장자 채중현씨가 고장에 극장이 없는 것을 유감으로 여겨” <벌교극장>을 설립했으며 “6일 낙성식과 피로연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2백수십명을 초대"했는데, 이 연회에는 조선 기생의 무용등이 공연되었고 오후 6시경에 마쳤다고 보도했다.

 

1214일의 <조선일보(7)>도 벌교의 공설극장신축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벌교 신시장 인접지에다 4천여원의 거액을 들여 구락부식 공설극장을 신축하고 “6일 오후3시부터 낙성식과 피로연을 열었는데 주최자 채중현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벌교면장 홍인표(洪寅杓)씨의 답사와 다수 내빈의 축사가 이뤄졌고, “여흥으로 조선명창 리화중선(李花中仙) 형제의 성악으로 다수한 내빈에게 많은 위안을 드리고 6시에 폐회했다고 전했다.

 

 

<벌교구락부> 혹은 <벌교(공설)극장>이라고 불리던 이 극장의 공사비용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채중현씨가 사재를 털어 신시장 하단/인접지에 건설해 “126일 낙성식을 가졌다는 점은 모두 공통되므로 믿을 만한 내용이다.

 

당시 벌교에는 2개의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홍교에 가까운 상부마을의 구시장과 벌교역에 가까운 하부마을의 신시장이 그것이다. 지금의 벌교시장은 1930년대의 신시장이 확대되어 지금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홍교 근처의 구시장은 신시장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벌교극장이 신시장의 어디쯤에 설립되었는지는 다음번 현지 취재 때에 확인할 계획이다.)

 

 

한편 <벌교극장>의 규모가 1천명을 수용할 정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경성공회당>이나 <단성사>에 맞먹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소 과장일 가능성도 있다. 경성공회당의 2층 넓이가 2백평인데 여기에 1천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벌교극장>의 건평이 130여평이었다면 <경성공회당>식 계산법으로는 대략 6백여명이 정원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방 극장들은 대개 지정좌석제가 아니라, 다다미식이거나 장의자를 사용했으므로 행사에 따라서는 1천명이 들어갈 수도 있기는 했겠지만, 정상적으로는 수용인원 650명의 극장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목포와 광주의 주요극장들보다 큰 규모였던 것이다.

 

또한 <벌교극장>의 낙성식이 1930126일에 열렸다는 점은 최승희의 벌교 공연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최승희의 공연 날짜가 정확히 그 일 년 뒤인 1931126일이었기 때문이다. , 최승희의 무용공연은 <벌교극장>의 개관1주년 기념행사였던 것이다. (2022/5/23, jc)

,

1931126일 무용가 최승희는 전남 벌교에서 공연했다. 극장은 <벌교구락부>였다. 124일의 목포, 125일의 광주 공연에 이은 남도 순회공연의 일환이었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목포와 광주의 공연을 조사하는 중에 벌교 공연이 언급된 신문 기사가 발견된 것이다. 19311124일자 <동아일보(3)>가 지역 모임을 소개하는 <회합> 난에 최승희 여사 무용회 126일 벌교구락부에서 개최한다고 짤막하게 보도했는데, 이 단신은 125일의 광주 <제국관> 공연 보도와 나란히 실려 있었다.

 

그러나 공연 당일(126)이나 그 직후의 신문에는 후속 보도가 없었고, 그밖에도 최승희의 벌교 공연을 언급한 문헌은 더 이상 발견된 것이 없다. 최승희는 실제로 벌교에서 공연을 했을까? 혹시 기획되고 공고되었지만 연기되거나 취소된 것은 아니었을까?

 

 

무용 공연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은 자주 있었다. 1930825일로 예정되었던 최승희의 청주 공연은 악사의 준비에 미비해서 912일로 연기되었고, 19301030일로 기획된 대전 공연은 주최 측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1111일로 연기됐다. 1932520일로 공고되었던 인천 공연도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 연기되었다가 결국 취소되었다.

 

신문에 공지된 공연이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면 이는 즉각 재공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과 시간 손실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1931126일의 벌교 공연은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는 보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예정대로 이뤄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벌교 공연의 실현 여부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벌교가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벌교읍의 1930년 인구가 23천명이었고 일본인이 집중 거주했던 벌교포의 인구도 5천명 남짓이었던 벌교읍이 조선의 신무용 톱스타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했다는 것이 믿어지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최승희는 유학에서 막 돌아온 젊은 무용가였고, 신진답게 최승희의 공연 행보는 공격적이었다. 193021일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래 벌교 공연 직전까지 그는 네 차례의 신작발표회를 경성에서 열었고, 각 발표회 후에는 지방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1931년에만도 최승희는 부산(217-18), 춘천(21), 대구(24-25)에서 지방 공연을 가졌고, 호남지역에서도 이리(31), 전주(2-3), 군산(4-5), 김제(6) 등에서 공연했다. 최승희가 전라도 공연을 가진 것은 1930119-10일의 목포 <평화관>공연 이후 두 번째였다.

 

이후 최승희는 정주(43), 신의주(5-6), 의주(9), 선천(11), 사리원(12), 개성(14) 등의 북선 지역에서 공연한 뒤 경성으로 돌아갔는데, 안막과의 결혼식(59)이 예정되어 있었고, 곧바로 네 번째 신작무용 발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3191일 경성 단성사에서 제4회 신작무용공연을 가진 후 최승희는 다시 지방공연에 나섰다. 수원(913), 김천(16), 대구(17), 밀양(21), 마산(22), 진주(23), 통영(25) 등의 경상도 공연에 이어 해주(1013), 신천(14), 개성(30)의 북선 공연을 가졌고, 뒤이어 조치원(11월24일), 청주(25), 대전(26일), 전주(29), 군산(30), 목포(124일, 목포극장), 광주(5일, 제국관), 그리고 벌교(6일, 벌교구락부)에서 공연을 열었던 것이다.

 

 

벌교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소도시였다. 1930년의 벌교읍 인구는 23천명, 1940년에는 25천명으로 늘어나 광주(65천명)와 목포(64천명), 여수(37천명)와 순천(28천명)에 이어 전남에서 5번째로 큰 도시였다. 인구로 본 벌교는 전남에서는 나주와 강진보다 컸고, 전북의 이리와 김제보다 큰 도시였던 것이다.

 

최승희는 공주와 천안, 이리와 김제 등 인구가 벌교보다 작은 도시에서 공연한 바 있었고, 특히 신천과 재령, 의주와 정주와 선천 등 벌교 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훨씬 더 작은 도시들에서도 무용 공연을 했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최승희가 빠르게 성장하던 신흥 소도시 벌교에서 공연을 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022/5/22, 조정희)

,

<동아일보(1922529, 4)>에 따르면 숙명여학생들은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오다)”했다가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 인천역에 도착해 대열을 정비할 시간을 30분씩으로 잡는다면, 실제 수학여행은 12시에 시작되어 545분경에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시간이 채 못되는 수학여행이었던 것이다.

 

인천 도착이 1135분이었으니 인원점검하고 나면 바로 점심시간이었을 것이다. 식사시간을 45분으로 잡았다면 여행지 방문시간은 오후1시부터 6시까지 약 5시간뿐이었다. 숙명여학생들은 인천에서 어떤 곳을 방문하고 견학했던 것일까?

<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했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도 인천역을 나서면 바로 중심가였고 인천신사가 있던 동공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시가 방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5시간 동안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을 돌아보고, 그밖에도 기타 여러 곳을 차례로 관람했다니 일정이 빡빡한 수학여행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동공원(東公園,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 중구 인중로 146)>은 일제강점기에 인천신사가 있던 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조계지의 동편 끝에 마련되었고 그때는 <일본공원>이라고 불렸고, 궁정(宮町)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궁정공원>이라고도 했다. 바닷가 절벽 위의 높은 곳에 마련된 신사 인근이 공원으로 꾸며져 식물원과 놀이시설이 있었다.

 

<서공원(西公園)>은 지금의 <자유공원>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청국과 일본 조계지 북쪽 응봉산(鷹峰山) 기슭에 조성된 공원이다. <각국공원> 혹은 <만국공원>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 지역이 청국과 일본을 제외한 기타 각국의 조계지였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1914년 조계지를 철폐하면서 <일본공원><동공원>으로 <각국공원><서공원>으로 개칭됐다.

 

관측소(현재, 중구 전동 25-1)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는 기상대를 말한다. 19044월 일제는 인천에 관측소를 신설해 러일전쟁을 필두로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는 데에 필요한 기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응봉산 정상에 69평 규모의 목조 2층 건물로 지어진 관측소의 주변에는 기후를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각종 기기를 구비했고, 그 결과를 매일 발표했다.

 

 

축항(築港, 중구 내항로 67)은 축조된 항구라는 뜻이다. 1883년 개항 시기 인천에는 항구시설이 없었다. 일제는 1914년 갑문과 잔교를 만들어 대규모 선박들이 접안할 수 있게 했다. 관측소와 함께 인천 축항은 일제가 건설한 신식문물로서 학생들의 견학거리로 추천됐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1924426)>가 보도한 이화학당의 인천 수학여행에는 검역소(중구 항동71-17)”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반출되던 한국소를 검사하던 이출우검역소를 가리킨다. 통감부 시기부터 패망까지 일제는 약 150만 마리의 한우와 6백만 마리분의 소가죽을 반출했는데, 검역소는 그 한우와 가죽을 검사하던 곳이다.

 

 

그런데 5시간의 도보 일정으로 동공원과 서공원, 관측소와 축항과 검역소 방문이 가능했을지가 의문이었다. 현주소 기준으로 동선을 측정해 보니, 인천역에서 자유공원 입구까지 5백미터(도보로 10), 자유공원 입구에서 관측소까지 5백미터(오르막길 15), 관측소에서 검역소까지 3.3킬로미터(54), 검역소에서 축항까지 1.7킬로미터(27), 축항에서 동공원까지 3.2킬로미터(51)였고, 모든 방문을 마치고 인천역으로 돌아가는데 1.5킬로미터(26)였다. 10.7킬로미터였고 도보로 178, 즉 걷는 데에만 약 3시간이 걸렸을 거리이다.

 

5군데의 방문지를 돌아보는 시간은 2시간밖에 할당되지 않았을 테니 한 방문지에 25분 이상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인천 시가지와 서공원의 양식 건물들은 걸어지나가면서 구경할 수 있었겠지만, 관측소나 검역소, 축항의 갑문이나 신사에서는 현장 관계자로부터 충분한 설명이나마 제대로 듣기 어려웠을 시간이다. 따라서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은 3시간 걸으면서 2시간 구경해야 했던 분주하고 빡빡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

 

,

<동아일보(1922529, 4)>는 숙명여학생들이 인천 수학여행을 위해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다. 그래서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경인선이 개통되었던 18999월의 열차 운행은 하루 2왕복에 불과했으나, 그 해(=1899) 121일부터는 하루 세 번 왕복, 이듬해인 1900316일부터는 하루 네 번 왕복으로 증편됐다. 6개월만에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증가세는 계속되어서 19203월에는 9, 19254월에 이르면 하루 13편에 이르렀다. 경인선 운행 20년 만에 열차 편수가 3, 25년 만에 4배로 증가한데다가, 운행 객차와 화물차의 수가 1899년의 3량에서 1925년에는 7량으로 늘어났으니 경인선을 이용한 인적, 물적 수송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1920년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에서 기차가 출발하는 시간은 오전 645, 9, 1042, 1210, 210, 515, 610, 750, 1010분이었다. 그런데 이 1920년 열차시각표에는 1922526일의 <동아일보>가 보도한 오전1135분에 인천에 도착하는 기차편이 없다. 오전1135분에 도착하려면 그보다 1시간40분 전인 오전955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야 하지만, 9시발과 1042분발 기차가 있을 뿐이다.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열차시간표가 더 증편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19253월의 열차시각표를 보면 남대문역 출발 열차가 하루 13편으로 늘었고, 출발 시각은 오전635, 740, 830, 915, 1015, 1110, 오후1240, 1445, 1620, 1740, 1835, 2035, 2230분이었다. 이중 오전830분과 오후540분 기차는 급행이었다. 급행의 운행시간은 50분으로 오전830분에 경성역을 출발하면 오전92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1920년과 1925년의 열차시간표를 비교해 보면 증편된 4개 열차 중에서 3개가 오전 기차라는 점이다. 첫차가 645분에서 635분으로 10분 당겨졌고, 9시 기차는 915분으로 15분 미뤄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740, 830분발 열차가 2편 증편됐다. 1110분발 기차도 새로 생겼는데, 이는 오전에 인천으로 가는 경성의 여행객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경인선 덕분에 인천이 경성의 1일 생활권에 완전히 포함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간표에도 숙명여학생들이 탔던 955분발 기차는 없었다. 915분발과 1015분발 열차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20년 이후에 955분발 열차가 생겼지만 1925년에는 그것이 감편되어 1135분발 기차가 1110분으로 당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19254월에 발표된 열차시각표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 제1함대가 인천항에 입항하자 일본군의 경성행 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열차시간표였다. 여기에는 경성->인천 열차가 14, 인천->경성 열차가 14편으로 되어 있었다. 인천행 열차 중에서는 오후330분과 오후435분 기차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대 귀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830분발 급행열차의 번호가 205호이고 그 다음으로 출발하는 915분발 보통열차 번호가 207호인데 그 다음 1110분에 출발하는 보통열차 번호가 211호인 것을 보면 그 사이에 1015분발 209호 보통열차가 있었으나 감편되었다는 뜻이다. 209호가 누락된 것은 그 시간 여행자가 적어서 감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253월 시행의 인천발 경성행 기차시간표는 6, 75, 85, 910, 1110, 오후1255, 255, 45, 515, 615, 720, 845, 1040분 등이었다. 19254월의 특별시간표에는 오후720분발 경성행 열차가 감편되었고, 그 대신 일본군의 편의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오전720분과 840분 기차가 증편되었다. 숙명여학생들이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한 615분발 열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

,

<동아일보(1922529, 4)>의 숙명여학교 수학여행 기사를 통해 또 한 가지 확인된 것은 경인선의 시간표였다. 이 기사는 (5)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인천에 도착함)”했다가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를 통해 경인선의 기차들의 발착 시간과 속도를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열차시간표를 찾았는데, 1899918일에 개통되었던 경인선의 첫 시간표는 간단했다. 노량진->인천이 하루에 2, 인천->노량진이 2편뿐이었다. 노량진행 기차는 인천에서 오전7시와 오후1시에 출발했고, 인천행 기차는 노량진에서 오전9시와 오후3시에 출발했다.

 

오전7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는 오전8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20분 쉬었다가 9시에 다시 노량진을 출발해 1040분에 인천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1시에 인천을 출발한 기차가 240분에 노량진에 도착했고, 이 기차는 20분 휴식한 후 3시에 다시 출발해 440분에 인천에 도착함으로써 하루 운행을 마쳤다.

 

 

주목할 것은 경인선이 줄여놓은 거리이다. 이 기차는 도보로 12시간 걸리던 여행길을 1시간40분으로 줄였다. 이 속도가 지금 기준으로는 그리 빠른 것은 아니다. 최초의 경인선 거리가 33.2킬로미터였고, 이를 1시간40분에 달렸으니 그 속도는 약 시속 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누구든 1백미터를 15초에 달린다면 그 속도가 시속 24킬로미터이다. 즉 당시의 기차는 1백미터를 15초에 달리는 사람보다 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차 통학을 하던 학생들이 달리는 기차를 뛰어서 올라탔다거나, 만주의 열차강도 마적단이 말을 타고 기차와 나란히 달리다가 뛰어 오르는 일도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도 경인선은 두 도시와 그 시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우선 인천의 여관과 호텔들이 폐업했다. 인천항에 도착한 선객들이 바로 기차편으로 경성으로 향했으므로 인천에서 숙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문을 닫은 것도 경인선이 개통된 직후였다.

 

그 대신 경성 시민들은 점심을 먹으러 인천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인천의 식당들은 호황을 맞았다. 중국집 <중화루>가 유명해 진 것도 경인선 덕분이다. 경인선은 또 월미도 유원지를 경성시민의 소풍지로 만들어 주었다.

 

 

경인선의 속도가 조선인들을 놀라게 했다면 기차와 함께 도입된 시간 개념이 조선인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노량진이나 인천에서 오전 열차를 놓치면 오후까지 기다려야 했고, 오후 기차를 놓치면 다음날까지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경인선의 개통식에서 기차를 놓친 사람이 있었다. 조선 정부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 1851-1909)이었다.

 

1899918일 제물포역에서 열린 경인선 개통식에는 대한제국의 고관대작들이 총출동했고, 학부대신 신기선도 당연히 참석했다. 신기선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조정에서 그나마 괜찮았던 신하였다. 벼슬 팔아 돈벌이하던 고종에게 뇌물을 근절하지 못하실 경우, 나라의 명맥이 끊길 것이라고 호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경인선 개통식의 귀빈 신기선이 기차의 발차를 코앞에 두고 사라졌다. 기차는 경적을 울렸고 출발 직전에야 비서가 화장실에서 신기선을 찾아냈다. “대감마님, 어서 나오십시오.” 그러자 신기선이 호통을 쳤다. “내가 아직 다 일을 안 보았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비서가 호소했다. “대감마님. 화통(=기차)이란 시간을 늦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잔말 말고 기다리라고 해라.” 기차는 떠났고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은 이 역사적 경험을 놓치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는 기차와 함께 시간개념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2간지를 사용하던 시간제가 24시간제로 바뀌었고, 한 시간도 분 단위로 세분화되었다. 그리고 그 세밀한 시간을 모두 잘 지켜야 했다. 새로 도입된 이 시간엄수의 관행은 반상천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고, 고관대작이나 미관말직의 지위를 구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

 

,

1922526일의 숙명여학교 인천 수학여행에는 516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동아일보(1922529, 4)>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기사 중의 초등과란 보통학교를 가리키며 오늘날 초등학교 과정이다.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만8세 이상의 여아가 입학하는 4년제 과정이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숙명 초등과의 입학정원은 90명이었고, 최승희도 19184월 이 학교에 입학해 19223월에 졸업했다.

 

 

19224월부터 제2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면서 보통학교는 6년제로 바뀌었지만, 숙명여학교는 이 해부터 보통과를 폐지해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고등과 교육에 충실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여학교 초등과 정원은 1학년 없이 2,3,4학년 각 90명으로 총 270명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숙명여학교 초등과 생도 수가 333명이었다고 했으니 재학생 수가 정원을 초과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된다.

 

첫째는 법정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선발했을 가능성이다. <조선일보(1920616, 3)>1920년 숙명여학교 고등과의 모집정원이 40명이었으나 58명이 지원했고 이중 48명이 선발됐다고 보도했다. 모집정원보다 8(20%)을 초과 입학시킨 것이다. 입학 후 4년 동안 여러 사정으로 퇴학할 학생 수를 예상해 학생을 미리 더 선발했던 것이다. 초등과의 법정 정원이 90명이었다면 그 20%인 최대 18명까지 더 선발할 수 있었고, 따라서 초등과의 각 학년 재학생 수는 최대 108명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보결(補缺) 학생, 즉 편입생의 선발이다. 숙명여학교의 입시요강을 보면 매년 신입생과 함께 약간 명2,3,4학년 보결학생을 추가로 선발했다.

 

 

따라서 초과 입학생과 보결 학생을 합치면 재학생 수가 법정 정원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시기에는 학교가 적어서 입학 경쟁률이 251에 달하기도 했고, 학생들은 많은데 입학할 학교가 없어 비상대책이 강구되었던 시기였으므로, 법적, 혹은 관행적으

로 용인되던 초과입학 비율 20%를 넘기더라도 총독부로서도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이 수학여행에 참가한 고등과 학생은 183명이었다. 1차 조선교육령이 적용되었던 1921학년도까지 숙명여학교는 3년제였고, 입학 정원은 40명이었지만 실제 입학생은 48명이었다. 1922년의 정원은 80명으로 늘었지만, 실제로 몇 명이 입학했는지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80(정원)1백명(20%추가)의 사이였을 것이다. 따라서 19225월 현재 숙명 고등과 재학생은 최저 176, 최대 196명이었을 것인데, <동아일보>가 보도한 183명은 이 범위 안에 들어가므로 정확한 숫자로 보인다.

 

 

따라서 초등과 333명과 고등과 183명이 참가했다는 것은 곧 숙명여학교의 전교생이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단 516명은 1920년대 수학여행 규모 순위에서 5위로 꼽혔다.

 

1위는 192359일 관촉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강경공립보통학교(동아, 516, 800)였고, 2위는 192354일 성남사로 원족을 갔던 안성공립보통학교(조선 59, 700)였다. 3위는 1923522일 담양으로 수학여행을 갔던 광주보통학교(조선, 529, 667)이었고, 4위는 1923522일 묘향산 수학여행을 갔던 평양 광성학교(동아, 519, 528)였다.

 

한편 <조선일보(1924426)>에 따르면 숙명여학교에 뒤이어 대규모 수학여행단 6위를 차지한 것은 이화학당(5백명)으로, 이들도 426일 인천 수학여행을 단행했는데, 방문한 곳이 축항과 관측소, 검역소와 공원들이어서 2년 전의 숙명여학교와 완전히 같았다.

 

불행히도 숙명여학교의 이 수학여행을 담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구 6(1925년 기준)에 불과했던 도시 인천에 같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 5백 명이 줄지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숙명여학생들이 인천을 구경했다기보다는 인천 시민들이 숙명여학생들을 구경하게 되었던 수학여행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

,

숙명여학교의 19225월 인천 수학여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1918년에 입학해 19223월에 숙명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그해 4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숙명여고보)에 진학했다.

 

당시 조선의 학교들 사이에는 수학여행 붐이 일었다. 1910년대까지는 조선총독부가 수학여행을 금지하거나 억제했지만, 1919년 삼일만세운동 이후에는 수학여행을 장려하되 방법과 내용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수학여행을 장려한 것은 문화정치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예산자립을 위해 관광산업을 일으키는 정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은 메이지 시대 일본 학교들의 관행을 모방한 것이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시작된 초기의 수학여행은 위국충군(爲國忠君),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황제에 대한 충성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점 후 일제가 수학여행을 억제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총독부는 철도와 숙박업을 바탕으로 관광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자생적 산업기반이 없던 조선에서 조세 수입을 창출할 방법이 관광업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평양과 경주와 부여를 고적지로 개발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러한 관광정책의 흐름 속에서 학생들의 수학여행도 장려되었지만, 총독부는 각 학교의 1박 이상의 수학여행은 도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한편, 여행의 경유지와 내용을 보고하도록 했다. 수학여행 프로그램을 친일적 내용으로 채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제약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학교들은 수학여행을 적극 활용했다. 1920년대에 이뤄진 수학여행은 <동아일보>254, <조선일보>171건이 보도되었는데, 중복을 제외하면 10년간 보도된 수학여행 건수는 273건에 달했다. 여기에는 보통학교(=초등학교)와 고등보통학교(=중학교), 전문학교와 실업학교 등 모든 종류의 학교들이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 수학여행지로 자주 선택되었던 곳은 경성, 평양, 인천, 진남포, 수원, 신의주, 원산, 경주, 부여, 강화도, 만주, 일본 등이었다. 진남포와 신의주, 원산 등은 근대 문물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고, 경주와 부여, 강화도 등은 전통문화유적을 견학하기 위한 곳이었다.

 

경성과 평양, 개성과 수원과 인천 등은 일제의 근대시설/신문물과 조선의 역사유적/전통미가 공존하는 곳이었으므로 선호되었다. 1920년대에 실시된 273건의 수학여행 목적지 중에서 경성(46)과 평양(45)이 가장 많았고, 그 뒤로 인천(36), 개성(28), 진남포(17), 수원(15), 신의주(13), 강화(12)의 순서로 나타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총독부가 학무국과 각 도장관을 통해 수학여행을 통제할 때 일제가 건설한 근대문물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낙후된 조선을 일제가 근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체제 우월성과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문화 유적지가 수학여행지로 선정된 경우에는 통제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일제는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 계속되어 왔다는, 이른바 식민사관을 주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를 유적지의 해설 형태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것이다.

 

일제의 수학여행 내용통제는 효과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은 조선의 역사보다는 일제의 문물에 감탄하기 쉬웠을 것이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더 쉽게 물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수학여행 후에 민족의식이나 반일의식이 강화되기도 했다.

 

1920년 개성 수학여행을 다녀온 보성학교 황학동(黃鶴東)은 개성의 인삼실업기관을 견학한 후 일제의 식민지 경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는가 하면, 1921년 강화도 수학여행을 갔던 보성학교의 박달성(朴達成)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금일의 경우를 직접 초래한 것이 강화에 있음을 절실히 기억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겠는가고 개탄하기도 했다. (*)

,

최승희의 인천 무용공연을 살피기에 앞서 19225월에 있었던 숙명여학교의 인천 수학여행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당시 숙명여고보 1학년생이었던 최승희가 이 수학여행에 참가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통해 1920-30년대의 인천의 모습, 경성 시민들이 주변 도시들을 여행하던 유형에 대해서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 수학여행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성사립숙명여학교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은 직원15인의 인솔 하에 지난 26일 상오1135분 도착 열차로 래인(來仁, 인천을 방문)하여 시가(市街)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築港) 및 기타 여러 곳을 순람(巡覽=차례로 관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발() 열차로 귀교하였다더라. (인천)”(<동아일보>, 1922529, 4)

 

사진도 없는 단신이지만 압축적이고 밀도 높은 기사이다. 이 보도 내용을 잘 살피면 당시의 숙명여학교, 경인선 기차 운행, 인천의 관광명소와 산업시설 등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다.

 

 

우선 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학생 여행은 1910년대부터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다. 교동(校洞)보통학교는 오늘(=19101016) 인천으로 수학여행 한다더라(<매일신보>, 19101016, 27)는 신문 보도가 있었고, 숙명여학교에서는 직원과 생도 일동 89명이 수학여행하기 위하여 지난 (19141)10일에 수원으로 내려갔더라(<매일신보>, 1914111, 3)>는 기사도 발견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매일신보>경성여고보 고등과 학생들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19201013, 3)고 보도했고, <동아일보>경성전수학교 직원과 생도 150명이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1921429, 4)는 기사를 냈다. 1932<부산일보>경성의 숙명여학교 생도 1,2,3학년 3백여명은 수학여행을 위해 512일 개성에 가서 전매국 출장소의 인삼 상황 등 여러 명소와 구적(舊蹟)을 견학했다(1932514, 6)고 보도했다.

 

이 기사들로 미루어 볼 때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도시로 견학을 가는 여행은 당일에 돌아오는 경우에라도 수학여행이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에는 3학년 학생들을 일본이나 만주로 일주일씩 수학여행을 보냈던 적도 있는 것을 보면 숙명여학교가 각 학년 혹은 전학년 학생들을 적어도 연1회 이상 다양한 형태의 수학여행에 참여하도록 주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위의 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숙명여학교가 수원(1914)과 인천(1922)과 개성(1932) 등을 자주 수학여행의 대상지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경성에서 가깝고, 철도로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역사적 유적이나 근대적 산업시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같은 도시 안에서 소풍을 가는 것은 원족(遠足)’이라고 불렸다. <매일신보(19101016, 2)>사범학교 직원과 학생 일동은 어제(=1015)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평야원족회(平野遠足會)를 행하였다고 보도했는데, 이처럼 경성의 학생들이 경성 내 혹은 교외지역으로 가는 짧은 여행을 원족이라고 불렀다. ‘원족이란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로 먼 발걸음이라는 뜻이므로 주로 도보여행을 가리켰지만,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기도 했다.

 

 

숙명여학생들이 자주 갔던 원족 대상지는 우이동과 효창원 등이었다. 숙명여학교의 우이동 원족은 <매일신보(1913429, 5)>경성 중부 박동 사립숙명고등여학교 생도 136명은 교사가 거느리고 어제(1913428) 오전 830분 남대문을 떠나는 기차로 운동 겸 사쿠라 구경을 위하여 동소문밖 우이동으로 향하여 갔다더라고 보도한바 있었다.

 

효창원 원족에 대해서도 <매일신보(192154, 3)>오늘 4일 오전9시에 시내 사립숙명여학교에서 고등과와 보통과 학생 전부를 교원들이 영솔하고 원족을 가기로 되었다고 전하고, 보통과 1,2학급 생도들은 아직 유치하여 너무 먼 길은 가기 어려움으로 과히 멀지 않은 동물원으로 가게하고, 그 외 보통과 3학년에서부터 고등과 3년급 생도들은 효창원으로 가서 하루 동안 유쾌히 놀고 오후4시 가량 각각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더라고 보도했었다. (*)

 

,

최승희는 그의 40년 무용 경력 동안 인천에서는 단 하루 공연했다. 인천 유일의 최승희 공연은 193012177시반, 인천의 <가무기좌(歌舞伎座, 가부키자)>에서 열렸다.

 

조선의 무용의 화형(花形=스타) 최승희 일행이 금월 20일 인천 가무기좌에서 무용회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당일 오후5시부터는 인천시내 학생견학을 위하여 15, 10전에 공개하고 오후7시반부터는 일반에 6040전에 공개하는데, 동아일보 독자에 한해서 60전을 40전에, 40전을 30전에 공개하게 되었다. 최승희 일행의 무용은 보고자 하는 인사도 많은 터이므로 당일에는 상당히 성황을 이루리라 한다.”(동아일보, 19301217:7)

 

 

첫 공연 후 2년쯤 뒤에 최승희는 또 한 번의 인천 공연을 기획했다. 1932520일 오후7시반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인천공회당>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오는 20일밤 7시반부터 인천공회당에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제5회 신작발표회가 개최될 터인데 회원권은 대인50전 학생30전의 2종이다.”(<매일신보>, 1932512, 7)

 

그러나 이 두 번째 공연은 기한 없이 연기되었고, 이후 다시 일정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공연이 연기된 이유가 회장(會場) 관계라고 보도됐다.

 

“[인천] 기보=본보 인천지국 주최로 최승희무용연구소의 신작발표회를 오는 20일밤 인천공회당에서 개최하려하였으나 회장(會場) 관계로 무기연기하기로 되었다.”(<매일신보>, 1932514, 7).

 

 

1932년의 공연이 취소된 후 최승희의 공연이 다시 인천에서 열린 적은 없었다. 따라서 193012월의 공연이 최승희의 유일한 인천 공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인천에서 영화로 선보인 적은 있었다. 최승희의 두 번째 극영화이자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829일 애관에서 상영되었던 것이다.

 

“[인천] 본보 인천지국에서는 구정의 선물로 1만 독자에게 바치고자 반도무희 최승희 여사가 나온 <대금강산보>라는 일활(日活)작품의 영화와 대조(大朝)<뉴쓰>를 무료로 제공하여 하루의 위안을 삼고자 금29일 오전2시반부터 외리 애관(愛館)에서 개최하기로 되었다는데 독자는 무료입장권을 지참하고 정각에 오기를 바란다고 한다.”(<매일신보>, 193829, 6.)

 

해방이 되자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던 최승희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1946531일의 <동아일보(석간26)>화북에서 출발한 최종 귀환선 2척이 29일 인천에 입항했으나 검역관계로 상륙하지 못하고 정박 중이며 이번에 귀환한 동포 15백여명 중에는 조선이 자랑하는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 여사가 승선했다고 전했다. 최승희가 실제로 귀환선에서 하선해 인천에 발을 디딘 것은 그해 63일이었다.(<독립신보>, 194665, 2)

 

 

그밖에도 최승희의 무용 스승 이시이 바쿠는 인천에서 세 차례 공연했다. 공연일은 1926324, 193269, 1937430일이었고, 극장은 모두 <인천공회당>이었다.

 

한편, 최승희는 1922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해 526일 실시되었던 숙명여학교의 수학여행 때였다. 숙명여학교의 고등과 학생 183명과 초등과 생도 333명이 직원 15명의 인솔아래 26일 상오 1135분 도착 열차로 인천에 도착하여 시가와 동,서공원, 그리고 관측소와 축항, 기타 여러 곳을 순람하고 당일 하오615분 인천역을 출발하는 열차로 귀교했던 것이다.(<동아일보>, 1922529, 4).

 

이상이 언론에 보도된 최승희와 인천의 인연이다. 그가 인천에서 다른 소규모 무용 활동이나 여가 시간을 보냈을 수는 있겠지만, 신문과 잡지에 보도된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글에서는 최승희의 인천 공연을 중심으로 1920년대와 30년대의 인천 상황, 공연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공연에서 발표된 작품들과 그에 대한 관객의 반응 등을 살펴보려고 한다. (*)

,

추도비문은 많은 실마리를 주지 않았지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참여한 공사와 사망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옛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고,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는 고베수도가설공사 중에 터널붕괴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는 신문기사로 확인되었다. 1929328일자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에 사고 상황과 희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아사히신문 도쿄판><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전자는 도쿄 소재 일본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사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씨가 찾아 주셨고, 후자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도서관에서 발굴하셨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4개의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이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윤길문(21), 오이근(25)씨가 사망하고 윤일선(尹日善, 25), 여시선(余時善, 19), 오이목(吳伊目, 연령 미상)씨가 중경상을 입었는데, 피해자들은 모두 경상남도 고성과 통영 출신이었다.

 

 

다이너마이트 사고보다 15년 전에 발생했던 고베수도공사 터널붕괴사고에 대한 신문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1910년대의 일간신문은 발행면수가 적었기 때문에 산간 오지에서 발생한 공사장 사고까지 보도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나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은 사고지역인 니시타니무라(西谷村)의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매장 일시가 191483일 오후2시 이후로 명시되어 있었다. 오지에서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의 장례가 3일장이나 5일장으로 치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는 82일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83일 오전에 매장인허증이 발행되자마자 당일 오후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김병순(金炳順)씨의 한자 이름에 잘못이 있었다.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잡을 병()’ 혹은 자루 병()’자로 보였지만, 이는 빛날 병()’의 오기였다. 한국에서는 불 화()’변이 부가된 빛날 병자가 이름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훗날 발굴된 족보 자료에서도 김병순씨의 이름을 金炳順으로 기록해 놓고 있었다.

 

 

매장인허증에는 김병순씨의 생년월일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메이지(明治)16, 1883519일이었다. 따라서 사망 당시 김병순씨의 나이는 만31(+3개월)였다.

 

김병순씨의 최종거주지 주소는 카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의 타마세(玉瀨)였다. 번지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당시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을 이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주소만으로도 신원을 밝히기에는 충분했을 터였고, 우편물도 제대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병순씨의 최종 주소지는 그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른바 함바飯場)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순씨의 한국 내 연고를 찾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본적지 주소였다.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라고 되어 있었다. 즉 김병순씨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9148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꿀 수 있다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이 주소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와 군(), ()와 동()이 명시된 것은 좋으나 사이에 면()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강릉시 지명 중에는 대천동이라는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 이후 1백여년 동안 조선의 지역 구획과 지명 변동이 많았으므로 그 계보를 차분히 조사해 나가면 실마리가 발견될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으로서는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만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일본 매장인허증에 본적이 강릉으로 명시되었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강릉의 호적이나 족보 기록을 찾아 일본과 한국의 기록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반드시 완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

202011월초 2차 무용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나는 비로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 나설 여유가 생겼다. 출발점은 당연히 추도비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추도비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다카라즈카와 고베, 오사카 등지를 취재하러 다녔던 20203월초까지는 추도비가 세워지기 전이었고, 2020326일 추도비가 세워진 후에는 일본을 방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불거진 한일 양국의 경제마찰과 양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이 중첩되면서 기존에 자유롭던 한,일 여행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도비가 희생자 조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정세화 선생에게 추도비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비석의 전,후면과 좌우 측면, 받침대와 상단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촬영해 달라고 했다. 정세화 선생은 곧 사진을 보내 주셨고, 나는 추도비 희생자 연구를 위한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자료인 추도비 사진들을 꼼꼼이 살펴보았다.

 

추도비는 2개의 거대한 장방형의 돌이 2단으로 겹쳐져 세워져 있었고, 전면에는 <월조남조>라는 글귀와 함께 그 하단에 희생자 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후면에는 추도비를 세운 이유와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월조남지, 철새는 고향을 잊지 않고 머나먼 조국의 방향으로 뻗은 가지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1914년부터 약 15년간 진행된 <고베시 수도터널공사> 중에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3명의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이는 센가리 수원지에서 고베시까지 깨끗한 물을 보내기 위한 어려운 공사였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부설 후, 이곳 무코강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범람과 토석류로부터 철도를 지키기 위한 개수공사 중, 1929326일에 두 명의 조선반도 출신자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와 철도 건설현장에서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면서,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추모비를 건립합니다. 2020326.”

 

비문에 따르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목적은 두 가지이다. “희생된 다섯 분을 애도하고 사고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이다. 지역생활에 중요한 근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에 순직한 분들을 애도하고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어서 추도비 건립을 주도한 단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모임><다카라즈카시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이하 교류협회)>, 그리고 <목련회>의 세 단체이다. 이 세 단체의 구성과 활동, 대표자들에 대한 서술은 다른 글에서 이뤄졌으므로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세 단체를 결성하거나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2세인 김예곤 선생이었음을 밝혀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고베수도공사><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의 사고와 희생자들을 밝혀낸 정홍영 선생이 20001월에 타계한 후에도 콘도 토미오 선생은 추도와 제사를 계속했다. 시간이 가면서 추모 제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2013년에는 <교류협회>가 정식으로 추모 제사에 참여했고, 20175<고베수도건설공사 및 구국도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 중의 사망자 추도비를 건립하는 모임>(이하 <추도비건립모임>)이 발족되면서 추도비 건립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는 다른 조선인 추도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었다. 추도비 건립 당시의 다카라즈카 현직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 씨가 슬퍼할 도()’자를 써 보냈고, 이를 추도비의 후면에 새긴 것이다. 일본에서는 물론 효고현과 다카라즈카 지역에서도 특히 조선인 추도비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현직 정치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도의 뜻을 나타낸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

,

20203월 초 서울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 조선인 추도비를 잊고 있었다. 이미 조사한 최승희 관련 자료들이 상당히 쌓였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고 번역해 정리하는 데에 여러 달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내가 최승희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2018년부터 2년여 동안 일본의 42개 도시에서 수집해온 최승희 관련 자료 중에는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많아 흥미로웠지만, 애써 수집한 자료 중의 일부는 제대로 읽거나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복사된 자료들 중에는 읽지 못할 정도로 활자가 흐리거나 뭉개진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이 그런 경우도 있었고 복사가 잘못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체로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신문 기사들은 원본이 좋지 않았는데 이는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의 물자 통제로 신문 인쇄에 필요한 잉크도 배급제가 실시됐고, 따라서 신문사들은 상시적으로 잉크가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일제 패전까지의 신문들의 인쇄는 상태가 매우 나빴다.

 

 

활자를 읽을 수 있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1920-30년대의 일본어는 철자와 용례가 현대 일본어와 다른 점이 꽤 많았다. 오늘날 일본 대학입시에서 현대일본어와 별도로 일본어 고문과목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고문 과목에는 메이지유신(1876)이래 1930년대까지의 글들이 많이 출제된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어 고문에 해당하는 1930년대의 신문기사를 읽을 때는 오늘날의 사전이나 번역기가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정세화 선생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셨다. 정세화 선생과 둘이서 연락하던 라인(LINE) 방에 콘도 토미오(近藤富男)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真銅敏之) 선생을 초대해서 함께 문자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셨다. 내가 자료를 읽다가 막히면 그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서 라인 단톡방에 올렸고, 콘도 선생과 신도 선생께서 시간 되시는 대로 그 부분을 읽어주시고 해석도 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수집해 온 자료들을 쑥쑥 읽어나갈 수 있었고, 필요한 부분들은 번역해서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게 됐다.

 

 

라인 단톡방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 또 하나 있었다. <무용신 보내기> 2차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1차 캠페인 때부터 이인형 선생의 합류로 활력과 추진력이 생겼는데, 일본에서도 콘도 토미오 선생과 신도 도시유키 선생께서 참여하시기로 한 것이다.

 

일은 점점 커져서 일본에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팀아이>가 결성되었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셨다. <팀 아이(ムアイ>라는 이름도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직접 지으셨는데 아이들을 사랑()으로 지켜보며(eye) 돕는 팀이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회원 모집도 이뤄져서 약 15인의 회원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팀아이> 출범에 자극을 받아 한국 <팀아이>도 결성되었다. 9명의 회원들이 모여 조선학교 무용부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 <팀아이> 회원은 아직 공개모집할 단계가 아니었으므로 이인형 선생과 나의 대학 동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먼저 황웅길, 강충호, 정철훈, 권홍우 선생이 참여하셨고, 곧이어 정회선, 이원영, 조성무 선생도 합류해 주셨다.

 

 

일본 <팀아이>는 재일 외국인 학생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었지만, 한국 <팀아이>는 지원의 대상을 재일 조선학교로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 특히 다카라즈카가 속한 효고현에서는 외국인 중 재일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이상이었으므로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재일 조선학생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는 셈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팀아이>가 협력해 이룬 첫 번째 사업이 제2<무용신> 캠페인이었다. 고베에서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나고야 지역에 이르는 일본 깅키(近畿) 지역의 조선학교 무용부 학생 160명에게 무용신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두 번째 <무용신> 프로젝트도 성공적이어서, 일본 <팀아이>의 회장이신 콘도 토미오 선생께서 202011월 오사카에서 열린 <깅키지역 중앙예술경연대회>에 참석해 학생들에게 직접 무용신을 전달해 주셨다. (*)

,

첫 무용신을 선물하기 위해 고베를 방문했을 때 정세화 선생은 내게 자신의 절친 신도 도시유키(신도근동) 선생을 소개하셨다. 신도 선생은 정세화 선생의 부친 정홍영 선생과 함께 지역의 조선인 관련 사적을 답사하면서 연구 활동에 참여했던 분이었다. 고베의 니시노미야 지하호에서 푸른 봄조선독립이라는 벽서를 발견한 것도 정홍영-신도 도시유키 답사조였다.

 

정세화 선생은 이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가 거의 준비되었고 326일에 세워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최승희 연구자인 내게 조선인 추도비 이야기를 자꾸 해 주시는 게 조금 의아했다. 그 의문은 고베를 떠나기 전, 정세화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식사를 하면서 풀렸다.

 

 

내가 시코쿠와 고베,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하면서 동포 분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최승희 연구자라고 소개했고, 일본 조사에서 발굴된 최승희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곤 했다. 특히 최승희 선생의 지역 공연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드릴 때마다 듣는 이들은 흥미로워했다.

 

예를 들면 최승희 선생이 우와지마 공연에서는 공연 수익금을 그 지역 도서관 건립에 기부해서 그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며, 나고야 공연 수익금을 조선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에 출전하는 스키 선수들의 여비로 쾌척했다는 이야기들을 해 드리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소지하는 랩탑 컴퓨터에 고이 저장된 신문, 잡지 기사들을 증거삼아 보여드리곤 했었다.

 

정세화 선생이 내게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찾아줄 수 있겠느냐고 처음 말을 꺼낸 것도 내가 수집한 자료들을 보고난 직후였다고 한다. 80여년전의 최승희 선생의 행적을 고신문과 잡지, 자서전과 예술사 서적들을 통해 밝혀내고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조정희 선생이 1백년 전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다카라즈카의 조선인들의 행적도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 부탁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이유로 거절하고 싶었다. 우선 나는 한국 근대사나 한일관계사 전공자가 아니었다. 일제강점 초기의 노동이민은커녕 후기의 강제동원의 역사도 잘 몰랐다. 비교적 오랜 학문 생활을 통해 나는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면 각별히 주의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학 안에서도 일탈사회학 하던 사람이 예술사회학으로 분야를 바꾸면 초심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미 가진 학위나 장서, 지식과 경험이 거의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 대상의 성격이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고 그의 활동 범위도 일본 전역이었다. 따라서 그가 가는 곳마다 행적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다. 각 지역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는 그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고, 나는 재주껏 그 기록을 찾아서 깨우기만 하면 되었다. 실제로 그렇게 기지개를 켠 기록은 엄청나게 많기는 했다.

 

그러나 추도비의 조선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생존 당시 차별받는 조선인 노동자였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사망하게 한 사고에 대한 기사는 발견될 수 있겠지만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이나 생존시 사정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기록으로 남아있을지 알 수 없다. 유명 인기인이었던 최승희 선생과는 달리 무명인들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을 발굴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울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세화 선생의 부탁을 대놓고 거절하지 못했다. 평소 장난기와 익살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그 부탁의 말씀을 하시는 동안 매우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조선인 추도비는 정세화 선생의 가계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그의 부친 정홍영 선생이 1970년대에 시작하셨던 지역사 연구의 마지막 단추였던 것이다.

 

나는 다소 자신없는 목소리로 정세화 선생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연구자는 자료가 없으면 꽝입니다. 일단 어떤 자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봅시다.” (*)

,

201911월 오사카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면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처음 들었고, 20201월 고베의 <고베조고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면서 자세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추도비에 대한 내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부에 점점 끌렸고, 그들이야말로 1930년대에 일본 땅에서 조선무용을 처음 시작했던 최승희 선생의 진정한 후예들이라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노력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때마침 두 번의 만남으로 급속히 가까워진 정세화 선생이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정세화 선생이 나의 최승희 연구를 돕는 한편, 나는 조선학교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일본 내 인맥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최승희 연구를 돕겠다는 정세화 선생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조선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몰랐다.

 

 

서울로 돌아와 연락을 계속하던 중 나는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정세화 선생도 좋다고 하셨다. 멋진 취주악 연주회를 열어준 고베조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즉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고베조고는 정세화 선생의 모교이기도 했기 때문에, 내 제안에 대단히 흐뭇해 하셨던 것 같다.

 

결정이 되자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의 명단과 각 학생들의 신발 치수를 파악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일반 모금을 시작했다. 오랜 외국 생활로 과거의 인맥이 거의 끊어진 나로서는 특정 지인들에게 기부를 요청할 방법은 없었고, 어차피 일반 모금을 해야 했다. 내가 하는 sns는 페이스북 밖에 없었으므로 거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이때 큰 원군이 나타났다. 최승희와 재일조선학교, 그리고 무용신 이야기를 듣고 이인형 선생이 동참해 주신 것이다. 이인형 선생은 발이 아주 넓어서 모금운동을 주도하기에 적임자였다. 그는 몸담아 활동하는 단체가 아주 많았고, 그중 일부에 나를 소개도 해 주셨다. 나도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모임을 중심으로 지인들을 찾아 협조를 당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노력은 페이스북에 기울였는데, 2주일 동안 계속된 모금운동에서는 97만원의 성금이 모금되었다. 정세화 선생이 파악해 주신 고베조고 무용부의 인원은 26명이었고, 지도교사를 포함해서 27켤레의 무용신을 준비하면 되었다. 97만원의 예산으로는 27켤레의 무용신 대금으로 충분했다.

 

그때 정세화 선생이 다시 제안을 하셨다. 무용신을 얼마간 더 주문할 수 있으니 마츠야마 소재 시코쿠 조선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나는 좋다고 했고, 정세화 선생은 시코쿠 조선학교 무용부원과 지도교사를 위한 무용신의 신발칫수 조사하셨다.

 

무용신의 전달 시기는 3월초의 졸업식에 맞추기로 했다. 고베조고의 졸업식은 31일이었고, 이 행사에 맞춰서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이인형 선생과 내가 이 졸업식에 참석해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전달하기로 했다.

 

 

이인형 선생보다 먼저 출국한 나는 먼저 마츠야마에 들러 시코쿠 조선학교에 무용신을 전달했다. 무용부 학생이 5명에 불과했던 시코쿠 조선학교에서는 작은 무용발표회를 열어가며 환영해 주었고, 그런 환대를 받고 보니 내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고베조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졸업식이 끝난 후에 무용부 학생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정세화 선생이 정성껏 준비해 주신 무용신을 무용교사에게 전달했다. 무용신을 하나씩 전해 받은 학생들은 너무너무 고마워해서 우리가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

 

그날 시코쿠와 고베에서 오고간 것은 무용신만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무용신 한 켤레는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고, 뭐 영원히 남을 선물도 아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대한민국 동포들이 재일조선인을 잊지 않고 있음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시코쿠와 고베에서의 아름다운 경험 때문에 우리는 조선학교 무용신 선물을 확대해 가기로 했다. (*)

,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3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김병순(金炳順, 1914년 사망), 남익삼과 장장수(南益三, 張長守, 1915년 사망), 윤길문과 오이근(尹吉文, 吳伊根, 1929년 사망)5명이었다.

 

 

내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11월초였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러 오사카에 갔다가 우연히 교분을 갖게 된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이 추도비가 건립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추도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당시 나는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일본 공연을 조사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한 것도 무용경연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무용경연대회를 통해 나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이 80여년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때까지 나는 다카라즈카를 두 번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답사에서 다카라즈카 대극장을 포함해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이 재일 조선인들의 밀집 주거지역이라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나는 20201월에 다시 고베를 방문했다. 정세화 선생의 초대로 고베조고의 연례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비로소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추도비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점과 이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추도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1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게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질문할 때마다 정세화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셨다.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현지인들이, 인본인과 재일동포를 불문하고,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분들이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 건립에 대해 각별한 열심을 내고 계셨다. 콘도 토미오 선생은 다카라즈카의 중등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사로 오래 재직하신 후 정년퇴임하신 분으로 2000년에 작고하신 재일동포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 추도비를 꾸준히 추진해 오신 것도 알게 되었다.

 

 

정홍영 선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 곳곳을 조사하고 답사해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과정과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한 상황, 이들이 받았던 차별대우와 악조건 속에서도 분투하며 이루어낸 조선인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그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담겨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정홍영 선생의 소원이었는데, 그가 타계하신 후 그의 오랜 연구 파트너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를 이어 받았다. 다카라즈카 학술단체와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았고, 결국 정홍영 선생 사후 20년 만에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었다. (*)

,

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연구사의 조사방법이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첫째,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닌 신고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수백명, 많으면 1천명이 넘을 수도 있었다. 이 신청서들은 전산 처리된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데이터베이스 검색이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일일이 신청서를 넘기면서 이름과 주소, 가족사항과 이주지 등의 정보를 일일이 살펴야 한다.

 

 

둘째, 그같은 지난한 조사를 통해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이나 친척, 후손이 강제동원 피해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찾아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한 것이 1929년이므로 이들이 경남 고성을 떠난 것은 그 이전이다. 이들의 나이가 이때 21세와 25세였으므로 대략 1905년에서 1910년 출생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본으로 노동이민을 떠난 것을 직접 보았거나 1차로 전해 들었을 사람들의 나이는 2004년 현재 70세에서 1백세에 달할 것이다. 그중에서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해 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이 얼마나 될른지는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셋째, 만에 하나 윤길문씨나 오이근씨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한 신고서가 접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신청서의 문서 보존연한은 통상적으로 3년 혹은 길어야 5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펴볼 신청서 자체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김상민 선생의 조사 방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가진 자료는 경남 고성군 고성면출신의 윤길문(尹吉文, 21)’오이근(吳伊根, 25)’라는 한자 이름과 그들의 나이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본관과 이름의 항렬을 알면 이들의 친족관계가 폭넓게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족보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면 오늘날까지 생존한 가족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며,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 호적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족보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탐문의 방법이 있다. 고성군 내의 집성촌을 찾아가 탐문하거나, 혹은 언론의 협조를 얻어서 공개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행적을 탐문해 가족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는 아니므로, 우선 김상민 선생의 조사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에 고성의 1차 취재를 마치기로 했다.

,

앞에서 일제의 국민동원령이 시작된 1938-45년 사이에 약 180만명이 군인, 군속, 노무자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거의 10명 중의 1명꼴로 조선 밖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1938년 이후 강제동원피해자이다. 내가 연고를 찾고자하는 윤길문, 오이근씨는 1929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민동원령이 내려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자발적인 노동이민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여기서 자발적이란 용어는 강제적의 상대어로 쓰인 것일 뿐,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한일 합방 직후에 시행된 토지조사사업(1910-1918)때문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는 지주와 소유권을 강화하고 소작인의 소작권을 폐지하는 내용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땅이 없는 소작인들의 농업 종사는 더욱 어려워졌고 생활은 피폐해졌다.

 

 

1920년 조선인 농가 중 자영농이 23%, 반자작이 37%, 소작농이 40%였던 것이 1940년이 되면 각각 18%, 23%, 59%로 바뀌었다. 이렇게 몰락한 농민들은 농촌에서 과잉인구로 집적되어 소작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하는 악순환을 이루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은 국내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거나 산간벽지의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해외로 유출되었다.

 

둘째는 일제의 산미증산계획과 쌀의 반출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으로 조선의 쌀 생산량은 증가하였지만 일본으로 유출되는 양이 더욱 많아 조선의 식량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이농인구가 증가하였으나 국내의 산업발전 수준이 낮아서 이들을 임금노동자로 수용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의 상당수가 일자리가 있는 일본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배출요인으로만 보아도 1910년대와 20년대 조선인의 도일 노동이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떠나지 않을 수 없는반강제적인 성격이 짙었다. 다만 일제의 직접적인 강제는 아니더라도 일제의 정책으로 인한 간접적인 강제였던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1차대전(1914-1918) 이후의 경기 호황기에는 일본의 노동력 유인력이 컸기 때문에 조선인의 도일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20년대말 세계가 불경기에 돌입했을 때, 일본의 일자리마저 쪼그라들었을때에는 조선인에게 미친 타격은 더욱 컸다. 1931년의 조선의 실업자 수가 3백만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2천만명, 경제활동인구 12백만명 중에서 실업률이 25%에 달했던 극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도항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의 노동이민은 더욱 늘어났고, 시간이 갈수록 합법적 도항보다는 불법 도항이 늘어났다. 불법이주한 사람들은 관공서나 회사에 기록을 남길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공식 기록만 보더라도 경기불황으로 일본 내무성의 요청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19258월 도항저지제를 실시했음으로 불구하고, 조선인의 도항자수는 1920년의 30,189명에서 1930년에는 298,091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 1935년에는 625,678명으로 다시 5년 만에 두 배로 늘었고, 1940년에는 1,190,444명으로 1백만명을 넘었으며, 1944년에는 1,936,843명으로 4년만에 거의 두배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 후기에 조선인들의 생활고가 매우 심각했다는 뜻이다.

 

 

생활고에 쫓겨 도일한 이농 노동이민자들은 대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의 조사에 따르면 출신지가 알려진 1923년의 도항자 72,815명 가운데 경상남도 출신이 39%,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 출신이 25%, 경상북도 출신이 16%이었다. 일본 도항자의 80%가 이 세 지역 출신이었던 것이다.

 

친분관계도 노동이민자의 도일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이주자의 73%가 친척 또는 친구를 통해서 일자리를 찾았다1925년의 센서스에 따르면 경상남도 고성군의 인구는 약 87천명이었다. (*)

,

김상민 선생이 지적한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2004년에 시작된 조사를 가리킨다. 그해 35<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이 통과되었고, 11월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되어, 첫 번째 업무가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였다.

 

이후 2010322일에는 다시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률에 따른 <국외강제동원희생자 지원위원회>를 신설했다. 피해자 조사와 함께 피해자들을 보상하고 지원하는 업무도 병행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다. 해방된 지 60년이나 지나,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강제동원 피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독재정부,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쿠데타 정부가 근대사의 질곡을 60년이나 연장시킨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집권으로 양성된 반민족 정치인들은 민주정부의 강제동원 피해조사와 보상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갔으니 잊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간의 유감을 푸는 방법일 수는 있지만, 국가 간의 외교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일 수 없었다.

 

사실 2004년 이전에도 각종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가 수집되었다. 우선 1945년 조선총독부가 퇴각하면서 남긴 <노무군 문서> 3권에는 1,012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었다.

 

1952-3년에는 내무부가 전국조사로 작성한 <일정시 피징용자명부>, 1957-8년 지방 읍·면지역에서 신고 받은 <왜정시피징용자명부>, 그리고 1970년대 대일민간인청구권 보상을 위해 작성한 <피징용사망자연명부>가 있다. 3종의 명부에 수록된 피해자는 총 537,077명이었다.

 

1990년 노태우 전대통령의 방일 외교의 성과로 일본정부로부터 돌려받은 <군인군속명부(12, 346,733)><노동자명부(3, 114,822)>, <군인군속공탁금명부(120,525)>도 추가되었다. 16종 명부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는 582,080명이었다.

 

 

그밖에도 민간이나 해외에서 수집된 명부가 있다. 2005년 김용현이 기증한 <동명회명부록(1, 419)>, 2005년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인수받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명부(81, 116, 413,407>, 2011년 러시아 국립군사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조선인포로명부(2,767)>, 2017년 김광렬 선생의 유족이 기증한 <강제동원기록(151,737)> 등이 있다.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2010년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가 신규 수집자료와 함께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피해자 명단도 568,330명에 달했다. 김상민 선생이 언급한 피해자 신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편 2004년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회청원 자료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자의 수는 총 7,879,708명이었고, 이중 국내 동원이 6,126,180, 국외 동원 1,390,063, 군인·군속이 363,465명으로 집계되었다.

 

 

강제동원 피해자 기록을 취합해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인적사항이 파악된 피해자 수는 약 118만명이라고 했다. 전체의 5분의1,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만 따지면 약 60만명 이상이 누락된 상태이다.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의 3분의1 가량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강제동원피해자들이므로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건너가 철도공사 노동자로 일하던 중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는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없다. 국가기록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경남고성> 출신의 피해자는 3,523명이었다. 파악되지 않은 피해자를 3분의1로 본다면, 1938-1945년 사이의 강제 동원된 고성군 출신의 피해자는 대략 5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성군에서 약 5천명의 강제동원 피해자가 발생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전에도 노동이민의 숫자 역시 상당한 숫자에 달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

고성군청에 들어가 우선 민원실을 찾았다. 차례를 기다렸다가 창구계원에게 ‘1백년전에 일본에서 사망하신 고성면민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는다고 말했다. 계원은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인지 미간을 찌푸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잠깐 기다려 달라면서 전화를 했다. 일상적 민원업무 외에 다소 복잡한 민원을 다루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나를 안내해 민원실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로 안내한 특별 민원담당자에게 나는 똑같이 요청했다. 윤길문, 오이근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자 찾아왔다고 했다. 그 역시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나는 가져간 자료 폴더를 꺼내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조선인 추도비> 사진과, 제사상 장면, 그리고 나무 위패에 이름이 적힌 사진 등을 보여주었다.

 

이분들이 1914년과 1929년에 일본 다카라즈카에서 철도 터널공사와 수도관 터널공사 중에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고성 출신의 윤길문, 오이근씨는 다이너마이트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지요. 일본 분들이 1백년 가까이 이분들의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작년에는 이 다섯 분을 위한 추도비를 건립하셨는데, 뒤늦게나마 이분들이 어떤 분들이셨는지 연고를 알고자 하십니다. 저는 그분들의 부탁을 받고 조사를 시작한 끝에 마침내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방법을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민원담당관은 내 말을 다 듣고 커피 한잔 하시겠어요?’하고 말했다.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물도 한잔 달라고 했다. 밤새 버스에서 쪽잠을 잔데다가 새벽 통영 자전거 관광으로 피곤했다. 고성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시외버스 안에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고성군청 민원실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다보니 목이 말라왔던 것이다.

 

내가 물과 커피를 마시는 동안 잠시 자리를 떴던 담당자가 누군가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고성군청의 역사자료연구사 김상민 선생이었다. 나는 드디어 적임자를 만난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도 프레젠테이션을 반복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창구나 민원담당관에게 이야기할 때보다 편한 마음이었고, 간결하게 설명해 나갈 수 있었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공적 기록, 즉 민적/호적을 열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강화된 개인정보 보호법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역사연구라는 이유로 열람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료가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고, 공적 자료 조사가 불가능하다면, 향교를 통한 족보 조사, 혹은 집성촌을 방문해서 탐문조사도 해 볼 생각입니다.”

 

김상민 연구사는 말없이 들으면서 간간이 내가 꺼내놓은 자료 사진들을 뒤적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가 일어섰다. “제 자리가 있는 2층으로 가시지요.”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역사연구실은 책상마다 서류뭉치와 문서철들이 쌓여 있었다. 고성의 역사가 오래고 유서가 깊은데다가 문화재와 사적지 등이 많기 때문에 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쪽 깊숙한 곳에 마련된 그의 책상 앞에 앉았을 때 김상민 연구사가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들기더니 말했다.

 

 

“10여년전에 강제동원 피해자 신고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신고된 사람이 고성에서만 수백 명입니다. 그중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도 있었고 자발적 노동이민자도 있었습니다. 본인이 신고한 경우는 별로 없고 가족이나 친척, 기타 연고자들이 신고하셨기 때문에 일단 신고서를 다 받고 분류는 나중에 했지요.

 

강제동원 피해자로 확인된 분들은 중앙부서로 자료가 이전됐고, 노동이민자로 밝혀진 분들의 자료는 군청 자료실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료연한으로 폐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자료가 남아 있으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 가지 방법이 열렸다. 나는 몇일이 걸리더라도 그 자료를 일일이 조사할 용의가 있었지만 개인정보 보호때문에 내가 직접 볼 수는 없었다. 김상민 연구사가 그 신청서 조사를 자신이 해보겠다고 하셨다. 다시 희망이 솟았다. (*)

,

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군청으로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걸어 방문의사를 밝히고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냥 민원실로 방문하기로 했다. 군청의 협조를 얻으면 일이 쉬워질 것이었고, 협조를 받지 못하더라도 바로 개인적인 조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고성터미널에서 군청까지는 걸어서도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29년에 고성면이라고 불렸지만 193810고성읍으로 승격된 이래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다지 많은 발전이 이뤄지지 못해왔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성은 변한12국의 하나인 고사포국(古史浦國) 혹은 고자국(古資國)의 영토였고, 서기 42년부터 461년까지 소가야(小伽倻)의 도읍지였다. 고자국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의 중국기록에는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일본 사기에는 고차국(古嵯國) 혹은 구차국(久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가야가 속했던 가야연맹이 신라에 합병(562)된 이후에는 고자군(古自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16(757)고성군으로 개칭했는데, 이때의 이름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가야시대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성은 경상도 서남 해안지역의 중심지였다. 산악과 해안이 구비되어 있고 농업을 위한 평야와 교통을 위한 도로가 잘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성의 변방이던 창원과 사천, 통영과 진주가 대도시로 발전하면서 고성군만 도농복합지역으로 남아 있다. 고성군의 면적은 서울시 크기이지만 인구는 51천명에 머물러, 2백만명이 사는 주변 4도시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었다. 192587천명이던 고성의 인구는 1960년대 13만 명에 달했으나 2020년 현재 약 51천명으로 집계되었다.

 

 

고성 시내를 가로 질러 들어가는데 뜻밖에도 공룡이라는 말이 자주 발견되었다. 시장이름도 공룡, 거리이름도 공룡이 있고, 곳곳에 공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당과 가게가 많았다. 고성에서 공룡 화석이 출토되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실이었다. 고성 소개서 <나무가 알려주는 고성 이야기(2015: 257-8)>와 고성군 웹사이트(goseong.go.kr)의 설명에 따르면,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약 12천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 발자국 화석과 새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821월 이곳에서 최초로 용각류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이래, 덕명리 해안을 따라 약 19백여족, 고성군 전체에서는 약 54족의 공룡발자국 화석이 확인되었는데, 다고 한다.

 

공룡 발자국 화석 중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자국도 발견되었는데, 발자국 하나의 길이가 102센티미터, 너비 64센티미터에 달해, 이 공룡의 크기는 발에서 등까지 약 8미터, 머리까지는 15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1백 톤이 넘는 거대한 공룡으로 추정되었다.

 

 

고성군은 198311월 하이면 덕명리와 월흥리 일대를 군립공원으로 지정해 공룡발자국을 보존하고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의 양과 종류, 규모 덕분에 고성은 미국 콜라라도주와 아르헨티나 해안지역과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인정되었고, 특히 중생대 새발자국 화석지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고성군은 이곳에서 출토된 공룡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4년 하이면 상족암군립공원 내에 공룡박물관을 개관하여 약 96종의 공룡관련 전시물을 일반에 공개했고, 20064월부터 매3-4년마다 공룡세계엑스포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219월에도 제5회 고성공룡세계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의 고성 취재는 삼국시대나 중생대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는 없다. 대략 1백여년 전에 이곳을 출발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 청년 두 사람의 행방을 찾으면 된다. 그다지 도시화되어 있지 않은 고성에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흔적을 찾는 것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인구가 적고 이동이 빈번하지 않은 지역이었다면 1백년 전 이주자 가족의 기억을 갖고 있는 분들이 남아 계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

20201130일 월요일, 나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을 찾는 첫 답사에 나섰다. 목적지는 경남 고성이었다. 일본 효고현의 일간지 <고베신문><고베유신일보>1929328일의 보도에 따르면, 후쿠치야마선 개수공사에 참여했다가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한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29일 밤11시에 서울을 출발한 고속버스는 30일 새벽 4시쯤 통영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고성으로 가는 고속버스가 없었으므로 통영이나 진주에서 갈아타야 했다. 진주에서 환승하면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웠지만, 버스 시간표가 좋았기 때문에 통영 환승을 선택했다.

 

유럽 취재를 통해 터득한 한 가지 요령은, 야간에 이동하면 주간 취재시간이 넉넉해진다는 것이었다. 취재는 대부분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거나, 사람들을 탐문하는 것이므로 밤에 일할 수 없다. 따라서 야간 시간을 이동에 활용하면 시간과 경비가 확실히 절감되었다. 다만 일본 취재에서는 야간 이동의 교통편이 거의 없어서 이 요령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고성 취재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갔다.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별도의 운임 없이 자전거를 실어주게 되어 있었다. 최승희 선생의 지방공연 취재를 위해 지방 도시를 방문했을 때 자전거를 가져가서 톡톡히 덕을 보았었다. 현지 교통사정을 잘 모르는 만큼 도시 내 이동에 자주 택시를 타야했는데 자전거를 가져가면 그런 수고와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군산이나 공주 같은 중소도시에서는 시내 이동을 전적으로 자전거에 의존해도 좋았고, 대구나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도 자전거가 유용했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면 되었고, 이동 거리가 멀면 자전거를 자전거보관소에 묶어놓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통영은 자전거 친화적인 도시가 아니었다. 언덕이 너무 많았다. 새벽녘에 통영 시내 구경을 할 생각으로 바닷가 구도심으로 향했는데, 간선도로에 오르자마자 거대한 언덕이 나타났다. 도로는 캄캄하고 가로등도 드문드문한데다가 이따금씩 무서운 속도로 달려 지나가는 차량들이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은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 했다. 내리막도 길었지만 마냥 내리 달릴 수 없었다. 도로가 고르지 않았고 무섭게 달려지나가는 트럭과 승용차들 때문에 자주 브레이크를 잡아야 했다. 구도심에 도착하기 전에 그런 언덕이 하나가 더 있었다.

 

 

 

가까스로 두 번째 고개를 넘어 세병관 표지판을 지나치면서 비로소 바닷가에 접근했다. 남망산 공원에서 일출을 볼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남았으므로 한동안 선창에서 어선들이 고기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새벽시간에 깨어 있는 곳이 선창뿐이었다. 막 귀항한 어선들이 수백 개의 백열등을 대낮같이 밝힌 채 야간 어로에서 잡은 고기를 부리고 있었다. 한켠에서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손가락 경매로 물건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일출시간이 가까워지자 남망산 공원에 올랐다. 선창에서는 자전거로 불과 5분 거리였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 옆에 자전거를 세우고 해가 뜨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드문드문 구름이 끼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통영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새벽 통영의 자전거 관광은 고성 취재까지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쏘다니는 바람에 통영 도심의 지리를 제법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유용한 경험과 지식이 되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또 다른 희생자 남익삼씨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영의 사전 답사를 한 셈이었다.

 

 

남망산 공원에서 내려와 문을 연 첫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자전거를 시장 맞은편 자전거 주차장에 묶어둔 채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자전거로 고개를 2개나 다시 넘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는 고성 취재를 마치고 찾으러 올 생각이었다.

 

고성행 시외버스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있었고, 통영에서 고성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고성에 도착하니 오전 10시쯤 되었다. (*)

,

최승희의 공식 생일은 19111124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선 호적과 일본 외무성 여권발급기록 등의 공문서에는 이 날짜가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 숙명여학교의 학적부와 북한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도 생년월일은 이 날짜이다.

 

그러나 이 생일이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일었다. 이 생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최승희 자신이 직접 밝힌 나이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19263월 자신이 무용을 시작했을 때의 나이가 (조선식 세는 나이로) 15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생일이 양력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세는 나이는 16세여야 했다. 또 최승희는 두 자서전에서 결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20세라고 밝혔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세는 나이는 21세가 되어야 했다.

 

 

최승희의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는 외국에서도 자주 발생했다. 1938111일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작성한 미국 입국서류에 최승희는 자신의 나이를 25세로 기록했지만, 공식 생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나이는 만26세여야 했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하면서 제출한 입국신고서에도 최승희의 나이가 28세라고 적혀 있었지만, 공식 생일인 19111124일을 기준으로 하면 그의 만 나이는 29세여야 했다.

 

심지어 최승희 자신이 생년을 1911년이 아니라 1912년이라고 직접 밝힌 기록도 있다. 최승희가 1939510일자로 발급받은 벨기에 노동허가서와 19401010일자로 제출한 멕시코 입국기록에도 그의 생년이 1912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식 생일과 나이의 불일치가 해소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19111124일이라는 생일을 음력날짜로 고려하고, 이를 양력날짜인 1912112일로 변환하면 생일과 나이가 완전히 일치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생일을 음력날짜로 기억하고 실제 생일은 양력 날짜로 환산해 축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런 관행은 1960년대나 그 이후에도 꽤 남아서 한국인들 중에는 주민등록상의 생일이 진짜 생일이 아닌 경우가 적지 않다. 최승희도 바로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음력 19111124, 즉 양력으로 1912112일이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던 1938111일의 최승희 나이는 만25세가 맞다. 이날은 생일 바로 전날이었으므로 만일 미국 입국이 하루만 늦었다면 최승희는 입국기록의 나이를 26세라고 썼을 것이다.

 

19401010일 최승희가 멕시코에 입국했을 때의 나이도 1912112일을 기준으로 하면 만 28세인 것이 맞다. 이와 함께 멕시코 입국신고서에는 생년을 1912년으로 기록한 것과 브뤼셀에서 발급받은 노동허가증에 생년을 1912년으로 기입한 것도 정확한 기록이다. 다만 브뤼셀 노동허가증에 생월을 ‘5이라고 기록한 것은 1월의 잘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최승희의 생일로 알려져 온 19111124일이 잘못된 날짜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이 공식문서에 기록된 생일이었고 최승희와 그의 가족들도 이를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승희는 공식기록, 즉 호적과 학적부, 도항증이나 여권, 이사할 때마다 이전해야 했던 주민등록에는 모두 이 공식 생일을 기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111124일이 공식 생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진짜 생일이 아니었고, 이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1912112일이 진짜 생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최승희의 생일 파티는 이 날짜에 맞춰 이뤄졌을 것이고, 특히 가족들의 생일상도 이 날짜에 맞춰졌을 것이다.

 

최승희의 진짜 생일이 공식 생일과 다르다고 해서 그의 삶을 연구하거나, 그의 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탄생 기념일을 지키는 데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예컨대 최승희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가 2011년에 이뤄졌으나, 그의 진짜 생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2012년이어야 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6세의 일기><이즈의 무희>가 최승희의 도쿄 공연 활동과 맞물려 <16세 최승희> 신화를 영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1)>는 최승희의 파리 공연에 즈음해 <14세 최승희> 신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381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나 그의 국적과 민족정체성 문제로 미국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당시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했고 난징 대학살 소식이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고, 특히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일본상품 배척운동이 벌어져 일본 국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한 최승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국에서의 실패를 뒤로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국적이나 민족정체성보다는 개인사를 홍보했다. 양반 출신인 그는 유럽에서 귀족 가문으로 홍보되었고, 기생을 천시하던 관행을 무시하고 무용가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인해 최승희는 아시아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승희는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그의 유럽 첫 공연이었던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2면을 전부 할애해 최승희를 길게 소개한 글이 게재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극동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14세에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교장은 그가 가수가 될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도쿄 음악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나이가 어려 서울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소개문은 조선이나 일본, 만주와 중국, 미국에서도 사용되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무용을 시작한 나이를 14세라고 명시한 것이다. 불과 3-4년전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어째서 프랑스에서는 14세라고 했던 것일까?

 

 

유럽식 만 나이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나이는 만14(+4개월)이다. 이 생일이 음력날짜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 되므로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는 여전히 만14(+2개월반)이었다. 따라서 파리 공연 팜플렛에 그의 나이를 14세라고 쓴 것은 유럽식으로 정확한 나이 기술이었던 셈이다.

 

16세 여성과 14세 여성은 어감이 대단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6세의 여성은 과년(瓜年) 혹은 과년(過年)이라며 성인 대접을 했지만, 14세라면 누구나 소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라는 표현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드가의 소조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와 연관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희를 작품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유화와 드로잉 작품을 다수 남겼지만, 생전에 조각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은 <14세의 어린 무용수> 하나뿐이었다.

 

 

이 작품이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이 조각품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고,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14세 소녀 마리 반 구뎀(Marie van Goethem)도 벨기에 출신의 하류계층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서도 무용수는 창녀와 별반 다름없이 취급되는 천한 직업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의 전당에 아즈텍 인디언을 들여놓았다며 인종차별적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실망하고 분노한 드가는 전시회가 끝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작업실에 옮겨와 처박아 두고, 두 번 다시 전시회에 내놓지 않았다. 1917년 드가가 사망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다시 빛을 보았고, 1931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

,

일본에서 <16세 최승희> 신화가 지속되었던 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가 집필한 세 개의 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그가 <문예(193411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 둘째는 1925년에 발표한 실록 단편 <16세의 일기(十六歳日記)>, 셋째는 1926년에 발표한 그의 초기 대표작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무희 최승희론(1934)>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를 일본일(日本一) 무용가라고 선언했다. 일본 최고라는 말이다. 최승희는 3(1929-1933)의 경성 활동을 접고 스승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와 1934920일 도쿄에서 첫 공연을 가졌는데, 이 공연을 관람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곧바로 <무희 최승희론>을 집필해 <문예>지에 기고하면서 최승희를 극찬한 것이다.

 

 

<무희 최승희론>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6세 최승희>3번 언급했다. 같은 글에서 같은 표현을 여러 번 서술한 것은 강조의 뜻임에 틀림없지만, 3번이나 서술한 것은 지나쳐 보인다. 그가 무리해 가면서 최승희의 ‘16세 신화를 강조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대답의 일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단편소설 <16세의 일기(1925)>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자신이 16세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형상화된 소설이다. 이 작품은 19258-9월호 <문예춘추><17세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2회로 나뉘어 발표되었지만, 1927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6세였음을 밝히면서 작품의 제목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다.

 

<16세의 일기>의 저술 배경을 생각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를 만났을 때, 인생의 비슷한 시기에 최승희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가 의사였던 부유한 집에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부모와 조부모, 여동생을 차례로 잃고 16세에 천애 고아가 되었지만 글쓰기에 매달려 험한 세상을 헤쳐 왔다.

 

최승희도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몰락한 채 빈곤 속에서 여학교를 졸업했으나 진로를 찾지 못하던 중, 16세의 나이에 발견한 무용에 매달려 낯선 일본 땅으로 건너와 인생을 개척 중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즈의 무희(1926)>는 그 내용과 발표 시기의 양면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승희의 삶과 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시즈오카현의 오지 이즈(伊豆) 지방에서 유랑하던 천민 무희에게 사랑을 느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무희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우호적 정서는 일본 제국의 변방 조선에서 온 <반도의 무희> 최승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의 무희>가 발표된 것은 <문예시대(文藝時代)> 19261월호와 2월호였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기 대표작으로 평론가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1년만인 1927320일 단행본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16세의 일기>도 수록되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처음 일본에 도착했던 19264월은 혜성처럼 등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16세의 일기>가 일본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는 마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이 최승희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이 보였다.

 

 

또 최승희가 19333월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 공연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인 19332, 쇼치쿠 영화사가 <이즈의 무희>를 영화화하여 개봉했다. 소설 <이즈의 무희>와 영화 <이즈의 무희>는 두 번에 걸친 최승희의 일본 활동 시작 시기와 일치했던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최승희가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고, 최승희의 공연 활동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발표가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중첩된 우연을 통해서나마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특별한 관심과 작품들이 <16세 최승희> 신화를 이어받아 영속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

,

일본에서 ‘16세 최승희신화를 일으키고 유지시킨 최대 공헌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였다. 훗날 <설국(雪國유키구니, 1937)> 등의 작품으로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1968)한 문호이자, 지금도 일본인들이 애호하는 10대 작가의 한 사람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0년대에도 이미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한 주목받는 작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4년 일본 종합문예지 <문예(文藝)> 11월호에 실린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 여류 신진무용가 중에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했다. 글 중에서 자신은 작가이지 무용 전문가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일찍부터 무용에 관심이 많았고, <이즈의 무희><무희> 등의 무용과 관련된 작품을 다수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일본일 작가에 의해 일본일의 무용가로 지목되었으니 일본 문화계가 최승희에게 주목했던 것은 당연했다. 최승희의 1930년대 중반 인기 급부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평가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승희의 성공 신화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을 테니 두 사람의 서로 칭찬하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예>무희 최승희론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 무용가선언으로 유명해진 글이지만 그 글이 ‘16세 최승희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은 그동안 지적되지 않았다. 4쪽 분량의 이 기고문에는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나이가 16세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한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하고자 하였고,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 여학교를 졸업하고도 16세였던 까닭에 나이가 어려서 음악학교의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최승희가 오빠에게 이끌려서 입문하겠다고 이시이씨를 찾아왔을 때는 여학교 졸업 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이시이씨와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하며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걸작 <에헤야노아라>와 같은 것은 일본의 <갓보레>와 같은 춤인데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에서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8년 전에 16세라면 그는 아직도 너무 젊다. 천부의 체구와 재분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7)

 

 

무희 최승희론은 문예 193411월호 153-158쪽의 6쪽이 걸친 기고문이지만 첫 쪽과 마지막 쪽은 1-2행의 짜투리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4쪽짜리 글이다. 그 짧은 글에서 최승희는 16라는 표현이 3번이나 사용된 것이다. 이는, 의식적 결과이든 무의식적인 실수이든, 작가에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16세라는 나이에 집착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시절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01년에 아버지, 1902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1906년에는 할머니를 잃었고 1909년에는 누나가 죽었다. 1912년 이바라키 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1914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천애 고아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바라키 중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잃었던 상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했고, 이를 <17세의 일기>라는 단편소설로 만들어 <문예춘추> 19258월호와 9월호에 나누어 발표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망 당시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 세는 나이가 16세였다는 점을 깨달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7년 단행본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1927)>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면서 제목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

,

최승희가 16세에 무용을 시작했다는 이른바 ‘16세 최승희신화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이내 중단되었지만 일본에서는 8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최승희와 가깝고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네 사람의 역할을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첫째는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이다. 192615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16세라고 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그였다. <경성일보>의 테라다 토시오 학예부장에게 소개장을 부탁하면서 여동생의 나이를 한 살 올려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최승희는 <나의 자서전(1936)><최승희 자서전(1937)>에서야 당시 자신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15세였음을 밝혔다.

 

최승일이 여동생의 나이를 16세라고 말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특히 이시이 바쿠가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2-15세의 조선인 여성을 제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발표한 터여서, 최승일이 이시이 바쿠의 연령 제한을 어겨 가면서, 세는 나이로 15, 만나이로 14세였던 최승희의 나이를 일부로 한두 살 높인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필자는 작가 최승일이 조선 여성의 가장 꽃다운 나이로 알려진 16세를 동생의 나이로 제시했던 것이며, 이는 춘향의 나이 16세와도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그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전혀 없는 셈이다.

 

둘째는 <경성일보>의 학예부장 테라다 토시오(寺田壽夫, 1892-?)였다. 그는 ‘16세 최승희신화를 최초로 신문에 보도했고, 그것이 적어도 10년 이상 지속되도록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1926325일자 <경성일보>‘16세 최승희신화를 처음 보도했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1937년 총독부의 행정잡지 <조선행정(朝鮮行政)> 4월호에 기고한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에서 다음과 같이 ‘16세 최승희신화를 반복했다.

 

최승희는 올해 26세이다. 그러니까 벌써 11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그녀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숙명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 봄, 이시이 바쿠가 경성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가졌다. 당시 나는 경성일보에 있으면서 연예계 일을 맡고 있었고, 또 이시이 바쿠의 매니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시이 바쿠의 공연에도 후원자의 마음으로 구경을 갔다.”

 

 

이 인용문은 자연스럽게 읽힐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산술적 오산이 포함돼 있다. 19374월 현재 최승희가 26세였다면, 11년 전인 1926년의 나이는 15세가 되어야 맞다. 그런데 테라다 토시오는 최승희가 “11년이나 전 ... 16세의 젊은 나이였다고 했다. 잘못된 계산이었지만 버젓이 활자화되었고, 그 뒤로도 바로잡히지 않은 채 ‘16세 최승희신화가 계속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셋째는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였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집 <나의 얼굴(1940:31)>에 실린 최승희와 조택원이라는 글에서 최승희와 처음 만났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경성의 공회당 공연은 분명 그 이듬해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당시 경성일보 학예부장을 지내셨던 테라다 히데오(寺田壽夫)씨의 소개장을 가지고, 나의 공연 대기실을 방문한 두 남매가 있었다. 오빠 승일군은 자기 여동생을 어떻게든 무용수로 만들고 싶다면서. 제발 거두어 주기를 청했다. 그 여동생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최승희이지만, 그 무렵의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나 아직 열여섯 살의 작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시이 바쿠의 자서전 <춤추는 바보(1955:116)>에도 전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시이 바쿠는 ‘16세 최승희신화를 1950년대까지 연장시킨 장본인이었던 셈이다.

 

한편 이시이 바쿠의 아내 이시이 야예코(石井八重子)<최승희 팜플렛 제1>에 실은 기고문 생각날 때마다 보고 싶은 최승희에서 최승희씨는 서울의 명문 여학교인 숙명을 그 해에 졸업한 착하고 귀여운 열다섯 살의 소녀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아내 야예코가 제대로 알고 있던 최승희의 나이를 이시이 바쿠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최승희의 잘못된 나이를 계속해서 밀고 나갔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