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최승희의 벌교 공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사실 이는 잘못된 인상을 주는 표현이다. 1931년 12월6일 밤 <벌교구락부> 무대에서 춤을 추었던 것은 최승희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무용수들 외에도 공연을 위해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무대 위에서는 열 명 이상의 무용수가 최승희와 번갈아 14개 작품을 발표했다. 보이지 않게 일했던 무대, 음악, 조명 및 의상과 소품 담당자들과 매니저와 단장까지 합치면 약 20여명의 단원들이 공연의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벌교 공연의 연목은 제4회 신작발표회의 연목과 거의 같았을 것이기에, 14개 작품을 상연하려면 적어도 10여명의 무용수가 필요했다. 이름이 명시된 무용수가 8명(최승희, 김민자, 조영숙, 노재신, 이정자, 곽경신, 정임, 마돌)이었고, 군무에만 참여한 무용수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이는 지방공연에 대한 언론보도에서도 확인된다. 1931년 9월12일자 <동아일보(7면)>는 경성 단성사에서 열렸던 제4회 신작발표회 직후의 수원 공연 소식을 전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연구생 10여명 소녀의 총출동”이라고 보도했고, 1931년 12월1일자 <조선일보(7면)>도 군산 공연을 보도하면서 “동 연구소원 전부가 총출연”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에 이름이 명시된 7명의 제자(=연구생) 중에서 노재신과 이정자는 1929년 11월 무용연구소가 개설됐을 때부터 최승희와 고락을 함께한 제자들이다. 1930년 12월에 입단한 김민자는 입단은 1년 늦었지만 최승희의 수제자가 되었다. 조영숙은 1931년 3월 이후에 입단했지만 그해 5월의 제3회 신작발표회에서 독무를 맡을 만큼 빠른 성장을 보였다. 곽경신과 정임과 마돌은 1931년 5월 이후에 입단한 신입단원들로 보인다.
따라서 최승희와 수제자 그룹의 5명이 벌교 공연의 14개 연목 중에서 10개 작품을 공연한 셈이고, 연구생들의 군무는 4개 작품(세계의 노래, 영혼의 절규, 폭풍우, 건설자)이었다.
한편 최승희의 독무는 <자유인의 춤>과 <십자가>의 두 작품이었고, 중무는 김민자와의 <철과같은 사랑> 한 작품뿐이었다. 따라서 최승희가 주목을 받을만한 작품은 14개 작품 중에서 3작품에 머물렀고 다른 11개 작품은 수제자들과 연구생들의 참여와 활약에 의지했던 셈이다.
그밖에 무용공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음악과 조명, 무대장치이다. 라이브 반주를 사용할 때 근대무용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사용했고, 조선무용은 북과 장구, 꽹과리와 징 등을 이용했다. 따라서 적어도 2인, 많게는 4-6명의 악사가 필요했다. 비용절감을 위해 레코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경우에도 적어도 한 사람이 축음기 조작을 전담해야 했다.
무용 공연에서는 조명이 중요한데, 최승희는 조명에 대해 특히 까다로웠다. 뉴욕 카네기홀의 조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 최승희를 만족시켰던 사람이 원우전(元雨田)이었고, 최승희무용단 제4회 신작발표회의 무대감독을 맡아 주었다. 다만 원우전이 지방공연에 동행해 무대와 조명을 담당해 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무용공연의 조명은 적어도 좌,우와 중앙의 3개가 필요하며, 그중의 하나(대개는 중앙 조명)는 스포트라이트 기능을 갖춰야 했다. 1930년대에 전자식 원격제어가 가능했을 리 없으므로 적어도 3명의 조명 담당자가 따라 붙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벌교 공연의 무대, 조명, 음악 담당자가 적어도 4-5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승희무용단의 단장과 매니저는 가족이 맡았다. 단장은 아버지 최준현이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공연의 기획과 극장 섭외, 언론 홍보, 회계 관리 등의 실무는 주로 큰오빠 최승일이 담당했고, 경우에 따라 작은오빠 최승오가 맡기도 했다. 1931년 5월 결혼 후에는 남편이 매니저 일을 이어받는 것이 자연스러웠겠지만, 안막이 결혼 직후 사회주의 문예운동 혐의로 수감되었기 때문에 벌교 공연의 매니저 역할도 최승일이나 최승오의 몫이었을 것이다.
“최승희의 벌교 공연”은 최승희 만의 공연이 아니었다. 10여명의 무용수와 4-5명의 스탭, 단장과 매니저 역할의 가족까지 합치면 20명이 넘는 공연단이었던 것이다. (2022/5/26, 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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